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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Humanities 1005

카노사의 굴욕, 하인리히 4세 복수,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아나니 사건

카노사의 굴욕 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Walk to Canossa, Humiliation of Canossa)은 1077년 1월 28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을 말한다.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독일왕과 교황이 서로 대립하던 중에 발생하였다. 교황권력이 황제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기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인리히 4세는 굴욕을 맛보았으나 독일에서의 권력 장악에 성공한 후 1084년 로마를 탈환하여 교황을 폐위하며 복수를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로마를 떠나 이듬해 망명지에서 쓸쓸히 객사하였다. 카노사 굴욕을 세속 군주가 굴..

십자군 전쟁 비판, 종교 학살, “전쟁은 인간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올리는 아이디어다.”, 십자군 이야기

“전쟁은 인간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올리는 아이디어다.” 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새 책 의 첫 문장대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겠다는 목적으로 1095년 십자군 전쟁을 기획한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압박으로 로마 바티칸에 들어가지 못하고 유럽을 떠돌고 있었다. 그는 “신이 예루살렘의 해방을 바라시며 이것은 신의 명령”이라고 유럽의 왕과 기사들을 충동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그러나 아랍인들에게는 학살을 뜻하는 ‘악마의 전쟁’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1291년 예루살렘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200년간 계속됐다. 이 전쟁으로 기독교인, 이슬람교인, 유대교인들이 평화롭게 순례했던 성도 예루살렘은 오늘날까지도 전쟁의 도시가 됐다. 시오노 나나미가 를 10..

사기열전, 史記列傳, 원본, 전문

史記列傳 史記卷六十一 伯夷列傳第一 夫學者載籍極博, 猶考信於六蓺. 詩書雖缺, 然虞夏之文可知也. 堯將遜位, 讓於虞舜, 舜禹之閒, 岳牧咸薦, 乃試之於位, 典職數十年, 功用旣興, 然後授政. 示天下重器, 王者大統, 傳天下若斯之難也. 而說者曰堯讓天下於許由, 許由不受, 恥之逃隱. 及夏之時, 有卞隨·務光者. 此何以稱焉? 太史公曰:余登箕山, 其上蓋有許由冢云. 孔子序列古之仁聖賢人, 如吳太伯·伯夷之倫詳矣. 余以所聞由·光義至高, 其文辭不少槪見, 何哉? 孔子曰:⌌伯夷·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 ⌌求仁得仁, 又何怨乎?⌏ 余悲伯夷之意, 睹軼詩可異焉. 其傳曰: 伯夷·叔齊, 孤竹君之二子也. 父欲立叔齊, 及父卒, 叔齊讓伯夷. 伯夷曰:⌌父命也.⌏ 遂逃去. 叔齊亦不肯立而逃之. 國人立其中子. 於是伯夷·叔齊聞西伯昌善養老, 盍往歸焉. 及至,..

실로암, 아랍어 Siloan, 영어 Siloam, 실로암 의미

실로암은 히브리어(솰하)에서 유래되어 ‘보내다, 말씀을 보내다’는 의미 실로암( 영어: Siloam, Silwan)은 동예루살렘의 대부분 팔레스타인의 이웃 지역으로, 예루살렘 옛 시가지의 교외에 위치해 있다. 히브리어 성경과 신약성경에 언급된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의 나서부터 맹인인 자를 고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의 실로암은 농촌 마을로서 시작하였으며 지역 전통에 따르면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 이 지역이 처음 언급된 것은 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이후로 이 마을은 천천히 예루살렘으로 통합되었다가 도시 인접 지역이 되었다. 1948년 전쟁 이후 이 마을은 요르단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1967년 6일 전쟁에 이를 때까지 이 통치는 지속되었다가 이후로는 이스라엘이 점유해오고 있다.

십자군의 변질, 제4차 십자군, 비잔틴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라틴제국, 비잔티움 제국 망명정권

제4차 십자군의 불안한 결성 서유럽의 대표적인 강대국인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잉글랜드가 모두 참여한 제3차 십자군 원정이 결국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면서 십자군의 열기도 시들해졌다. 성지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슬람 세력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으나 AD 1198년 교황이 된 인노첸시오 3세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모집에 호응하는 군주가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서임권을 둘러싸고 여전히 교황과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서로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D 1201년 프랑스 상파뉴에서 열린 마상시합을 계기로 상파뉴의 백작 티보를 중심으로 한 제4차 십자군이 겨우 조직되었다. 상파튜의 티보와 블루아의 루이가 주축이 되었으며 플랑드르의 보두앵을 비롯한 70여..

살라흐 앗 딘, 리처드 1세, 제3차 십자군 전쟁

살라흐 앗 딘의 등장 아이유브 왕조 창건 살라흐 앗 딘의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로 AD 1138년 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아났다. 살라흐 앗 딘은 아버지 나짐 앗 딘 아이유브가 이마드 앗 딘 장기의 부하가 되면서 다마스쿠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숙부인 시르쿠를 따라 이집트 공격에 나서면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AD 1169년 시르쿠가 이집트를 점령한 지 얼마 안되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살라흐 앗 딘은 31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집트의 군사령관이자 와지르로 임명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이집트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대내외적으로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이를 효과적으로 대처하면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내었다. 우선 흑인 내시장인 네자흐가 궁정반란을 ..

이슬람의 반격, 제2차 십자군 전쟁

이마드 앗딘 장기의 장기왕조 등장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십자군 자체의 힘 보다는 이슬람 세계의 분열에 힘입은 바가 컸다. 당시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실권을 빼앗긴 채 종교적인 권위만을 인정받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고, 칼리프를 대신하여 세속적인 권한을 행사하던 셀주크 왕조도 왕위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중앙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지방 총독(아타베그 혹은 아미르)들이 중앙정부의 지배를 거부한 채 서로 영토를 다투며 살아가기 시작했고 결국 분열된 이슬람 세계로서는 갑작스런 십자군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도 점차 저력을 발휘하여 십자군이 세운 십자군 국가에 대항하는 반격이 시작되었는데, 그 중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 바로 이마드 아딘 장기(일명 장기)가 세운 ..

교황권의 성장, 제1차 십자군 전쟁

교황권의 성장 동서교회의 분열 그리스도교는 로마황제들의 거듭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교세를 확장하였고 마침내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AD 313년 정식으로 공인되었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AD 392년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교세를 확장할 수 있게 된 교회는 로마 제국의 속주총독제도를 모방하여 체제를 정비하여 로마 교회 전체를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다섯 교구로 나누었다. 그 중에서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1의 사도였던 성 베드로가 순교한 땅으로 하나의 성지로 인정받는 만큼 다른 교구보다 중요하게 여겨졌고, 로마의 주교는 교회 조직의 최고의 권위를 지닌 교황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

노르만족의 남부 이탈리아 지배, 시칠리아 왕국, 로베르 기스카르

노르만족의 등장과 남부 이탈리아 진출 노르만족의 등장 AD 800년부터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 해적인 바이킹은 월등한 항해능력을 바탕으로 유럽 해안 각지에서 약탈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바이킹의 약탈은 프랑스 지방이 특히 심하였는데 AD 9세기 초에는 바이킹의 약탈이 절정을 이루어 AD 845에는 파리가 점령되고 각지의 주요 도시가 습격을 받을 정도였다. AD 9세기 후반 이후 바이킹 중 일부가 프랑스 왕의 봉토를 받아서 가신이 되기 시작했고 AD 900년 경에는 프랑스 북부 센강 유역에 항구적으로 정착지를 마련하고 노르망디 공국을 건설하였다. 노르망디란 말은 프랑스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한 바이킹들을 북쪽에서 왔다는 뜻으로 "노르만족"으로 부르기 시작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노르만족들은 그리스도교로 ..

중세 프랑스, 카페왕조, 필리프 2세

프랑스 카페왕조의 성립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경건왕 루크비히 1세 사후인 AD 843년에 베르됭 조약에 의해 3등분되어 중프랑크와 황제 지위는 장남인 로타르가 계승하였고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각각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카를이 차지하였다. 중프랑크 왕국은 로타르 사후에 다시 로트링겐, 부르군트, 이탈리아로 분할되었으며 AD 869년 로트링겐의 국왕 로타르 2세가 죽자 로트링겐을 두고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가 격돌한 끝에 AD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동프랑크와 서프랑크가 각각 동서로 분할하여 차지하였다. AD 879년 서프랑크도 대머리왕 카를의 손자인 루이 3세와 샤를로망 대에 이르러 분할통치되었으나 두 사람이 차례로 죽은 이후에 왕위가 동프랑크와 이탈리아의 왕위를 차..

노르망디 공국, 중세 영국,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 노르망디공 윌리엄

바이킹 바이킹이란 본래 대략 AD 800년부터 AD 1050년 사이에 활약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 선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비록 바이킹은 평화적인 정착과 무역활동도 하였지만 당시 유럽인들보다 월등한 항해능력을 바탕으로 유럽 해안 각지에서 약탈활동을 벌인 해적으로 더 유명하였다. 바이킹의 활동으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해안은 사실상 바이킹의 지배에 받기 시작했으며 잉글랜드 본토까지 바이킹 출신인 데인인의 지배를 받았다. 유럽 내륙에서도 바이킹의 침입이 이어져 바이킹은 프랑스 지방과 스페인 지방에 침공하였고 지중해와 발트 해 연안, 러시아, 우크라이나까지 진출하였다. 덴마크 출신 바이킹들은 프리슬란트, 프랑스, 잉글랜드 남쪽에 진출했고, 스웨덴 출신 바이킹들은 발트 해 연안,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

셀주크 투르크

셀주크 투르크 투르크족은 본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으로 하나의 민족을 지칭한다기보다는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로 일반적으로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분열된 여러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AD 6~8세기경 중국 북부의 몽골고원과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강대한 세력을 자랑했던 돌궐도 투르크족의 일종이라고 한다. 셀주크 투르크족은 AD 960년 경 투크르족의 일파인 오구즈 투르크에서 족장 셀주크가 이끄는 한 무리가 독립하면서 생겨났다. 셀주크는 자신의 일족을 이끌고 중앙아시아의 남쪽으로 이동하였으며 주로 이란지역을 장악한 사만왕조의 용병으로서 활약하여 부하라와 사마르칸드 사이의 영토를 얻었다. 이때 셀주크 투르크족이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으로 보인다. 셀주크가 죽은 후에 유목민족의 전통에 따..

신성로마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 제2차 십자군 실패

로타르 3세 시대 AD 1125년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5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AD 1024년부터 100여년 동안 독일을 지배하던 잘리어 왕조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에 독일 제후들과 주교들이 모여 다시 왕위계승 선거를 실시해야만 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주플린부르크 가문의 작센 공작 로타르 3세였다. 비록 로타르 3세는 하인리히 5세 생전에 반기를 들어 전투에서 승리하고 사실상 독립상태가 되었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이미 늙고 후계를 이어받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최적의 후보자로서 여겨졌다. 결국 로타르 3세가 잘리어 왕조와 아무런 혈통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왕으로 선출될 수 있었는데 독일 제후와 주교들은 혈통에 의한 세습보다는 선거에 의한 왕위계승원칙을 ..

황제권과 교황권의 대립, 잘리어 왕조 시대, 카노사의 굴욕

콘라트 2세 시대 콘라트 2세는 신성로마황제 오토 1세의 딸인 리우르가르트와 결혼한 로렌 공작 콘라트 적공(Konrad der Rote)의 증손이었지만 아버지인 하인리히가 할아버지 케른텐 공작 오토의 공작 지위를 동생 콘라트에게 빼앗기고 슈파이어 백작에 머물렀고 설상가상으로 콘라트 2세가 2살에 불과한 AD 992년 요절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매우 불우하게 보내야 했다. 콘라트 2세는 아버지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아델하이트도 재혼하였기 때문에 누나 유디트와 함께 삼촌인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5세에게 양육이 맡겨졌고 보름스 주교 부트하르트의 슬하에서 자라야 했다. 이에 따라 비록 콘라트 2세는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신중하고 사려깊은 성품을 지니고 있고 신앙심이 깊으며 상냥..

신성로마제국, 오토 1세, 하인리히 2세

신성로마제국의 탄생 오토 1세 시대 프랑크 왕국이 분열하여 독일 지역에 성립했던 동프랑크 왕국은 AD 911년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인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한 이후 프랑켄 공작, 작센 공작, 슈바벤 공작, 바이에른 공작 등의 유력 제후들이 선거를 통해서 국왕을 선택하였고 이에 따라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와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차례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AD 936년 하인리히 1세가 자신이 죽기 1개월 전인 AD 936년 8월 7일에 자신의 아들인 오토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후 다른 공작들이 선거를 통해 오토 1세를 독일의 왕으로 인정하도록 만들면서 왕위 세습에 성공하고 작센 왕조를 창건하게 되었다. 이제 본격적인 중세 독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귀족 연합체의 명목상 1인자..

비잔티움 제국,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 마케도니아 왕조

비잔티움 제국의 위기와 혼란 이슬람 세력의 아나톨리아 반도 압박 비잔티움 제국은 헤라클리우스 황제 말기에 이슬람 제국에게 야르무크 전투(AD 636년)에서 대패하면서 영토가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시리아와 이집트라는 곡창지대를 빼앗겼으며 AD 674년부터 AD 678년 사이에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공격당하였다. 비록 "그리스의 불" 덕분에 해상의 이슬람 함대를 물리치면서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반도는 계속해서 공격받았다. 계속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가 점점 요새화되면서 주민들이 빠져나가시 시작하자 인구감소 방지와 지역 방위력 증강을 목적으로 테마제도가 실시되었다. 테마제도는 병사들에게 토지를 제공하여 정착시키는 대신에 군역을 담당하도록 만든 것으로 군사령관이 행..

로마 제국의 동서분열,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서로마 제국 멸망, 제노의 유일한 로마 황제 등극

동로마 제국의 등장 로마 제국의 제2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탄생 콘스탄티누스 1세는 AD 324년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이후 이미 유명무실해진 수도 로마를 대신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미 수도 로마는 3세기의 위기를 거치면서 황제가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곳으로 전락하였고 디아클레티니아누스가 로마 원로원의 입법기능마저 박탈하면서 더이상 수도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는 황제가 있는 곳이 바로 수도가 되었고 사두정치를 통해 이탈리아 본토의 통치를 담당하게 된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도 수도 로마가 아닌 밀라노에 주둔했을 정도로 수도 로마의 위상은 바닥에 떨어져 버린 상태였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새로운 수도의 건설을 추진했고 이에 선택된 곳이 발칸 반도와 아..

파르티아 제국, 로마-파르티아 전쟁, 사산왕조 페르시아 등장, 파르티아 제국 멸망

파르티아 제국의 등장 오리엔트의 혼란 '오리엔트(Orient)'의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 '시리아(Syria)', '팔레스타인(Palestine)',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이란고원(Iranian Plateau)', '이집트(Egypt)'와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Bactria)', '소그디아나(Sogdiana)', '아라코시아(Arachosia)', '드란기아나(Drangiana)', '게드로시아(Gedrosia)'를 통일했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Achaemenid Persia)'가 BC 330년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의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재위 BC 336년 ~ B..

게르만족의 대이동, 서로마 제국 위기, 히스파니아 브리타이아 독립, 훈족의 침공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위기 스틸리코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호노리우스는 11살로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으로 반달족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를 임명하였다. 스틸리코는 뒤에 등장하는 아이티우스와 함께 서로마 제국을 지탱한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게 된다. 로마인과 반달족의 혼혈로 태어난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와 결혼하고 호위대장(comes stabuli)에 임명받을 정도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총애를 받았다. 스틸리코는 AD 390년 로마군 최고 지위인 군사령관(magister militum)이 되었고 AD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군대를 총괄하는 총사령관(magister utriusquae militiae)으로 임명받으며 ..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고트족의 침략, 테오도시우스 1세, 로마의 동서 최종 분열, 그리스도교 국교화, 서로마 제국 멸망, 반달리즘(vandalism)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AD 363년 율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도중에 전사하고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요비아누스마저 AD 364년 급사하자 새로운 황제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일개 병사로 시작해 군사령관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요비아누스가 죽자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발렌티누스 1세는 계속된 서쪽의 게르만족 침입과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동생인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제국의 동부를 맡기는 대신에 자신은 서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주로 갈리아의 파리에 머물며 알레마니족을 격파하였고 브리타니아에 침공한 피트족과 스코트족을 상대하기 위해 유능한 장군인 플라비우스 테오..

군인황제시대 도래, 3세기의 위기,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사두정치 체제, 콘스탄티누스 왕조, 그리스도교 공인

군인황제시대 도래와 3세기의 위기 군인황제 시대의 개막 본래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로마 황제는 법적으로 확실한 지위가 아니라 로마 공화정의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 호민관 특권을 교묘히 뒤섞어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차기 황제의 계승 방법이 명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혈통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지만 아우구스투스를 이은 티베리우스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였고 오현제 시대에도 능력이 뛰어난 인물을 양자로 지정하는 방식으로 황제 계승이 이어진 것처럼 반드시 전임 황제의 혈통일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네로와 콤모두스, 카라칼라의 사례에서 보듯이 혈통에만 의존할 경우 폭군이 등장하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네로나 콤모두스가 죽은 이후 혈통이 단절되자 그때마다 로마 원로원이 로마 황제를 지명하였지만 결국은 로마 군단장끼리..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시대, 5현제의 번영, 팍스로마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시대 AD 69년 12월 21일 로마 원로원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하였으나 신중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그대로 알렉산드리아에 머문 채 디라키움의 무키아누스를 로마로 파견하였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대 반란을 빠르게 진압할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티투스에게 예루살렘을 신속히 함락하도록 하였고 티투스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여 5달의 포위전 끝에 AD 70년 9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비록 유대 반란은 최후의 항전을 벌인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는 AD 73년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지만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사실상 끝난 것이었다. 함락된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시대, 티베리우스 시대,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 유대 전쟁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시대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한 아우구스투스는의 기본적으로 포에니 전쟁 이후로 계속된 로마의 급격한 팽창이 이제 한계가 왔음을 인정하고 내실을 기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국경선의 안정을 위해 라인강, 도나우강, 시리아 같은 주요 국경에 요새를 짓고 로마 군단을 주둔시켰다. 다만 내전과정에서 40개까지 늘어난 군단을 예산문제로 28개로 감축하는 대신에 28개 군단을 상비군화하였고 부족한 병력은 로마 속주민으로 구성된 보조병으로 메웠다. 로마 군단은 로마시민권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 20년 동안 복무했고 보조병은 로마시민권이 없는 속주민으로 구성되어 요새수비, 국경 경비, 투사무기 발사병 엄호 등의 임무를 25년 동안 수행하는 대신에 제대 이후 로마 시민권을 얻을 ..

카이사르 암살, 아우구스투스 내전, 로마 제정,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 아우구스투스 등극,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Avgvstvs), 엠퍼러(emperer), 카이사르(Caesa..

카이사르의 암살 이제 명실상부하게 로마의 1인 지배자가 된 카이사르에게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이 부여되었다. 카이사르는 각종 사회정책(식민·간척·항만·도로건설·구제사업 등)을 추진하고 달력을 율리우스력으로 개정하는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BC 53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인에게 당했던 참패를 당했던 카르하이 전투를 설욕하고자 대규모 원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카이사르 반대파를 자극했다. 카이사르에게 이미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많은 사람들이 왕위를 탐내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또다시 엄청난 군사적 명성을 얻게 된다면 카이사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결국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앞세워 BC 44년 ..

카이사르 내전,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 Alea Jacta Est), 루비콘강, 파르살루스 전투, 폼페이우스의 죽음,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의 내전 제1차 삼두정치의 붕괴 BC 56년 루카 회담에 따라 BC 55년 집정관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나란이 선출되고 이듬해 전직 집정관 신분으로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로, 크라수스는 시리아로 각각 원하는 속주의 총독이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삼두정치 일원 중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진압 이외에는 별다른 군사적 업적이 없던 크라수스가 동방의 파르티아 원정을 야심차게 추진하였으나 BC 53년 카르하이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하여 제1차 삼두정치의 한 축이 무너져버렸고 더욱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연결해주던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이미 전년도에 병사한 상태였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결혼동맹도 깨져 있었다. 비록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제1차 삼두정치, 갈리아 전쟁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제1차 삼두정치 동맹시 전쟁에서 활약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불과 18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도와 동맹시 전쟁에서 활약하며 군사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세력에 속했지만 BC 87년 마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와 반대파를 숙청할 때 아버지는 이미 죽고 폼페이우스 자신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화를 피했다. 그러나 BC 83년 술라가 폰투스 원정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하자 폼페이우스는 동맹시 전쟁에서 아버지가 지휘하던 3개의 군단을 이끌고 술라에게 합류하였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내전 동안 뛰어난 군사적 활약을 보여줬고 그 덕분에 술라의 신임을 얻어 독재관이 된 술라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2년동안 마리우스의 잔당토벌을..

로마의 영토확대, 그라쿠스 형제, 마리우스 집권,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술라의 쿠데타

로마의 급격한 영토 확대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BC 264년부터 BC 146년까지 3차례 포에니 전쟁을 벌였고 동시에 마케도니아와도 BC 215년부터 BC 168년까지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으며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와도 BC 192년부터 BC 188년까지 시리아 전쟁을 벌였다. 이 모든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로마는 이탈리아 서남단의 시칠리아(BC 241년 속주편입), 이탈리아 서쪽의 지중해 섬인 코르시카와 사르데냐(BC 231년 각각 속주편입), 이베리아 반도의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와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BC 197년 각각 속주편입), 발칸반도 서북부의 옛 일리리아 지역인 일리리쿰(BC 167년 속주편입), 그리스에 해당하는 마케도니아-아카이아(BC 146년 속주편입), 북아프리카의 옛 카..

마케도니아 전쟁과 그리스 재패, 로마-시리아 전쟁과 아나톨리아 반도 진출, 제3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의 멸망

마케도니아 전쟁과 그리스 재패 제1,2차 마케도니아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카르타고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이제 서지중해에서 로마를 상대할 만한 세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제 로마의 관심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로마를 위협하던 마케도니아에 대한 응징이 되었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후예인 안티고노스 왕조가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BC 229년 마케도니아 왕으로 즉위한 필리포스 5세는 BC 216년 로마가 한니발에게 칸나에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자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BC 214년 일리리아의 로마 동맹도시들을 공격하여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10여 년 동안 지리하게 이어졌고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BC 206년..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이탈리아 침공, 티치노 전투, 트레비아 강 전투, 칸나에 전투, 스키피오, 카르타고 침공, 자마 전투

제2차 포에니 전쟁 전쟁의 배경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넘기고 막대한 전쟁배상금까지 지불하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쟁에 참여한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급해야 했기 때문에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다. 결국 급료 지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BC 240년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은 용병의 출신국가들과 카르타고 내의 반란 세력과 결합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용병의 반란이 쉽게 진압되지 못하고 거의 3년 4개월이나 끌었지만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활약한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가 이번에도 활약을 보이며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하였다. 다만 그 와중에 로마는 중립화시켰던 사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에 대한 지배권도 얻었다. 또한 북이탈리아로 ..

로마, 공화정, 이탈리아 반도 정복, 제1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

초기 왕정 로마는 전설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 전쟁에서 패배한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한 뒤 그의 손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 BC 753년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7세기경 팔라티누스 언덕에서서 조그마한 도시국가로 출발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초기 로마는 로물루스, 누마 폼필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앙쿠스 마르키우스의 4명의 왕이 차례로 통치한 후 BC 550년 경부터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에트루리아인에게 직접 통치를 받았다. 에트루리아 왕조는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세 명의 왕으로 이어지며 로마의 초기문화의 근간을 제공하였으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폭정을 못이긴 로마 시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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