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서양사 Western History

노르만족의 남부 이탈리아 지배, 시칠리아 왕국, 로베르 기스카르

Jobs9 2021. 5. 19. 19:22
반응형

노르만족의 등장과 남부 이탈리아 진출

노르만족의 등장

 

AD 800년부터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 해적인 바이킹은 월등한 항해능력을 바탕으로 유럽 해안 각지에서 약탈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바이킹의 약탈은 프랑스 지방이 특히 심하였는데 AD 9세기 초에는 바이킹의 약탈이 절정을 이루어 AD 845에는 파리가 점령되고 각지의 주요 도시가 습격을 받을 정도였다.

 

AD 9세기 후반 이후 바이킹 중 일부가 프랑스 왕의 봉토를 받아서 가신이 되기 시작했고 AD 900년 경에는 프랑스 북부 센강 유역에 항구적으로 정착지를 마련하고 노르망디 공국을 건설하였다. 노르망디란 말은 프랑스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한 바이킹들을 북쪽에서 왔다는 뜻으로 "노르만족"으로 부르기 시작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노르만족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승마전투기술을 배우는 등 빠르게 중세 유럽문화에 동화되었다.

 

 

노르만족의 남부 이탈리아 진출

 

AD 11세기경 이탈리아는 중앙의 교황령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뉘어 이탈리아 북부는 오토 대제 이후로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어 봉건영주들의 통치를 받고 있었고, 이탈리아 남부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노력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로 재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섬만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 세력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로 이슬람 세력은 시칠리아 섬을 근거지로 계속해서 이탈리아 남부로 진출을 시도하였고 본국에서 군대를 파견할 여력이 없었던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현지에서 용병들을 고용하여 군사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AD 1025년 바실레이오스 2세가 죽은 이후 그 뒤를 이은 비잔티움 황제들이 모두 무능하고 사치가 심하여 재정압박이 심해졌고 급기야 용병들에게 지급해야할 임금을 체불하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스스로 영주를 자처하며 난립하기 시작했다.

 

한편 AD 10세기 이후부터는 성지순례와 모험을 목적으로 많은 노르만족들이 노르망디 지방을 떠나기 시작했는데 그들중 상당수가 지중해로 유입되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서 용병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이러한 노르만족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이 바로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의 형제들이었다.

 

 


로베르 기스카르 시대

 

로베르 기스카르는 노르망디의 하급기사였던 오트빌 가문 탕크레드의 아들로서 자신을 포함해서 배다른 형제가 총 12명이 있었다. 그 중 8명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남부 이탈리아를 향했고 이들중 5명은 용병대장으로서 큰 활약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영리했던 로베르 기스카르의 활약이 돋보였는데 "기스카르"라는 말은 라틴어 "Viscardus"에서 유래한 말로 '교활하다', '여우같다'는 뜻이었다.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탈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의 이복형제들이 이탈리아 남부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선 강철팔이란 별명을 지녔던 형제 중 첫째 굴리엘모는 둘째 드로고와 함께 비잔티움 제국의 이탈리아 남부 영토를 공격하여 AD 1040년 풀리아와 AD 1042년 멜피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때 굴리엘모는 자신의 점령을 대외적으로 공인받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봉건영주인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4세에게 점령지를 바치는 조건으로 풀리아와 칼리브리아 백작이 되었다. 그러나 굴리엘모의 작위가 정식으로 신성로마황제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AD 1044년 굴리엘모는 과이마르 4세와 함께 칼리브리아 전역을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AD 1045년 타란토 근처에서 패배하고 그 이듬해 사망하였다. 굴리엘모 사후 그의 지위는 동생인 드로고가 이어받았는데,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탈리아에 도착한 것이 이때쯤이었다. 한편 드로고가 AD 1051년 암살당했기 때문에 그 세력을 다시 그 동생인 윙프레가 이어받았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오트빌가문의 노르만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교황령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로마교황 레오 9세는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3세의 도움을 받아 AD 1053년 노르만족 정벌하고자 했지만 하인리히 3세가 파병을 거부하는 바람에 단독으로 노르만족을 상대하게 되었다. 윙프레는 군대를 지휘를 이복동생인 로베르에게 맡겼고 로베르 기스카르는 교황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로마교황 레오 9세를 포로로 잡으면서 노르만족 사이에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편 이때 로마교황 9세가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으로 보낸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마찰을 빚은 끝에 서로 상대방을 파문하면서 AD 1054년 동서교회의 대분열이 발생하게 된다.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장악

 

교황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노르만족의 세력은 칼리브리아 전역을 석권하였고 로베르 기스카르의 세력 또한 더불어 성장하였다. AD 1057년 윙프레이 죽자 이젠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어받아 풀리아와 칼리브리아 백작이 되었다.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노르만족의 지배가 공고히되자 결국 로마교황 니콜라우스 2세는 이들을 회유하고자 AD 1059년 로베르 기스카르의 이탈리아 남부 지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공작 작위를 부여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자신의 작위에 포함된 시칠리아를 이슬람 세력의 손에서 빼앗기 위해 AD 1061년에는 막내동생 루지에로와 함께 시칠리아 섬을 공격하여 메시나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로베르 기스카르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이탈리아 본토에 있었기 때문에 시칠리아에 대한 점령은 동생 루지에로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탈리아 본토로 돌아갔다.

 

로베르 기스카르의 2번째 남부 이탈리아 정복도 대성공을 거두면서 AD 1071년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거점인 바리를 정복하였고 AD 1076년에는 롬바르드 왕국의 살레르노를 빼앗아 자신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그 사이 동생 루지에로도 AD 1072년에 시칠리아 팔레르모를 빼앗아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고 시칠리아 섬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비잔티움 제국 침공

 

AD 1073년 로베르 기스카르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비잔티움 황제 미카일 7세는 자신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와 로베르 기스카르의 딸인 헬레네를 결혼시키는 혼인동맹을 제안하였다. 로베르 기스카르로서는 향후 비잔티움 황제의 장인이 될 절호의 기회였으므로 즉각 이를 승락하였고 헬레네로 하여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약혼식을 치르게 하고 예비황후로서의 교육도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AD 1078년 비잔티움 제국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미카일 7세가 퇴위하고 새롭게 니케포로스 3세가 황제가 되었다. 니케포로스 3세는 당연히 미카일 7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가 지녔던 황태자 자격을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헬레네마저 약혼을 파혼시키고 유폐시켜버렸다. 이에 분노한 로베르는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움직여 니케포로스 3세를 제위찬탈자로서 파문시키고 콘스탄티노스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할 명분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그 사이 비잔티움 제국의 상황도 바뀌어 AD 1081년 24살의 알렉시오스 1세가 다시 제위를 찬탈하고 새롭게 콤네누스 왕조를 열었다. 알렉시오스 1세의 등장으로 로베르 기스카르는 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할 명분을 잃었지만 로베르 기스카르의 야심이 단순히 황제의 장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개의치 않고 비잔티움 제국 정벌을 시도하게 된다. 다만 이제 로베르 기스카르가 상대해야하는 사람이 고령의 무능한 황제 니케포로스 3세가 아니라 이젠 젊고 야심만만한 알렉시오스 1세라는 것이 문제였다. 

 

AD 1080년 함대를 조직하여 비잔티움 제국 침공을 준비하던 로베르 기스카르는 이듬해인 AD 1081년에 알렉시오스 1세가 새로운 비잔티움 황제가 된 지 얼마지나지 않은 틈을 타서 비잔티움의 속주 일리리아의 수도 두라초로 침공하였다.이에 알렉시오스 1세는 즉각 베네치아 공화국과 신성로마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의 함대로 하여금 로베르 기스카르의 함대와 맞서게 하였고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로 침공하여 성직자 서임권 문제로 대립하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베르 기스카르는 두라초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이 자랑하던 바랑기안 친위대를 비롯한 제국 정예군을 격파하고 두라초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사주를 받아 풀리아와 칼라브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신성로마제국군이 로마를 포위하는 등 후방이 불안해졌기 때문에 이탈리아로 회군하고 말았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로베르 기스카르는 곧바로 로마로 진격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구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아들 루지에로 보르사에 의해 구출받게 되었다.

 


로베르 기스카르의 죽음과 후계다툼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로베르 기스카르는 AD 1084년 다시한번 출전하여 악천후와 베네치아 공화국 함대의 저지를 뚫고 비잔티움 제국 영토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염병이 번지면서 어려움을 겪어야했고 결국 AD 1085년 7월 케팔로니아 섬으로 향하던 중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살아생전 로베르 기스카르는 자신이 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공작이 되고 동생인 루지에로를 시칠라아 백작으로 임명하여 그 통치를 맡겼었다. 로베르 기스카르가 죽자 그의 아들과 조카들 사이에 후계다툼이 벌어졌으나 결국 아들 루지에로 보르사가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위를 상속받았다.

 

시칠리아에서는 AD 1101년 루지에로가 죽은 이후에는 그 아들 시모네가 시칠리아 백작위를 이어받았으나 4년만에 죽자 루지에로의 다른 아들인 동명의 루지에로가 시칠리아 백작 루지에로 2세가 되었다. 루지에로 2세는 AD 1111년 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공작이 된 굴리엘모 2세가 AD 1127년 후사없이 죽자 이 작위마저 차지하고 로베르 기스카르의 흩어진 세력을 다시 통합하는 게 성공하였다. 한편 후계다툼에서 소외당했던 인물 중 하나였던 타란토의 보에몽은 제1차 십자군에 참전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우게 된다. 

 

 

 

루지에로 2세 시대

 

루지에로 2세는 시칠리아의 백작이자 로베르 기스카르의 동생인 루지에로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AD 1101년 루지에로 1세가 죽은 이후 시칠리아 백작위를 상속받았던 형 시모네가 불과 4년만에 죽자 루지에로 2세가 시칠리아 백작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그의 나이가 9살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AD 1112년 성년이 될때까지 어머니 아델레이데가 섭정을 맡았다.

 

AD 1112년부터 직접 직무를 개시한 루지에로 2세는 남부 이탈리아를 두고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들과 조카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분을 틈타 조금씩 세력을 확대해 나갔고 AD 1127년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인 조카 굴리엘모 2세가 자식없이 죽자 오트빌 가문의 수장으로서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남부 이탈리아에 강력한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우려한 이탈리아 귀족과 로마교황 호노리오 2세의 방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지에로 2세는 강력한 군사력과 뇌물을 병행하는 외교술로 반대파를 누르는데 성공하고 교황 호노리오 2세로부터 정식으로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시칠리아의 공작으로 임명받았다. 이로서 루지에로 2세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유럽의 강력한 영주 중 한사람이 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정식 왕위를 노리기 시작했다.

 


시칠리아 왕국의 탄생

 

AD 1130년 교황 호노리오 2세가 죽자 그 후계자리를 놓고 추기경단이 젊은층과 노년층으로 분열하여 각각 인노켄티우스와 피에트로 피에를레오니를 지지하면서 교황 직위를 두고 두 명의 후보자가 대립하기 시작했다. 인노켄티우스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의 후원으로 신성로마황제 로타르를 비롯한 여러 제후들의 지지를 받아내자 위기를 느낀 피에트로 피에를레오니가 루지에로 2세에게 도움을 청했고 루지에로 2세는 정식 왕위를 인정받는 대가로 피에트로 피에를레오니를 지지하였다. 대립이 해결되지 않은 채 교황선출이 강행되어 인노켄티우스가 젊은 추기경단의 지지로 교황 인노첸시오 2세로 선출되었고 노년층 추기경단은 피에트로 피에를레오니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하여 아나클레투스 2세로 명명하였다. 2명의 교황이 선출되는 혼란에도 불구하고 루지에로 2세는 당초의 약속대로 아나클레투스 2세로부터 정식으로 왕위를 인정받았고 AD 1130년 크리스마스에 팔레르모 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치르고 시칠리아 왕이 되었다. 

 

 


계속된 반란과 위기

 

루지에로 2세가 그토록 원하던 왕위를 손에 넣었으나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던 베르나르도가 프랑스의 루이 6세, 잉글랜드의 헨리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로타르 3세의 연합을 이끌어내고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와 시칠리아의 왕 루지에로 2세를 적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탈리아 남부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10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AD 1130년 먼저 아말피 공작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듬해 육상과 해상에서 포위망을 형성하여 이를 손쉽게 진압하였다. AD 1032년에는 바리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둘째아들 탕그레드를 새로운 바리의 공작으로 삼았다.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를 지원하기 위해 카푸아 공작 로베르 2세와 알리페 공작 라눌프 2세를 로마로 보냈으나 그 사이 라눌프 2세의 아내이자 루지에로 2세의 여동생인 마틸다가 남편의 학대를 고발하자 화가 난 루지에로 2세가 라눌프 2세의 형제 영지인 아벨리노를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라눌프 2세는 즉각 항의하였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카푸아의 로베르 2세와 함께 로마를 떠나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 가담하였다. 라눌프 2세는 교황군을 이끌고 되돌아왔고 양군은 AD 1132년 7월 노체라  근처에서 싸우게 되었다. 노체라 전투에서 루지에로 2세는 일생일대의 패배를 당하고 근거지인 살레르노로 퇴각해야 했다.

 

이듬해 신성로마황제 로타르 3세가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자 라눌프 2세를 비롯한 반란군 수장들이 로타르 3세의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로타르 3세가 대동한 군대의 숫자가 얼마되지 않아 거절당했다. AD 1134년까지 루지에로 2세의 군대가 반란군을 다시 압박하여 카푸아를 점령하고 자신의 다른 아들인 알폰소를 새로운 카푸아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이와 동시에 장자인 동명의 루지에로에게는 풀리아 공작 작위를 부여하였다.

 

루지에로 2세의 토벌에 고전하던 반란군이었지만 AD 1135년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한번 반란군에 대한 도움을 거절하였던 신성로마황제 로타르 3세가 루지에로 2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루지에로 2세와 적대적이었던 피사와 제노바, 비잔티움 제국과 연합하여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때마침 루지에로 2세가 병을 얻어 시칠리아 섬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힘을 얻은 반란군은 카푸아를 공략하였고 아베르사를 점령하였으며 라눌프 2세의 근거지였던 알리페마저 탈환하였다.

 

AD 1136년 본격적으로 신성로마제국군이 합류하면서 전황은 루지에로 2세에게 극도로 불리해져만 갔다. 루지에로 2세가 여전히 시칠리아 섬에 머물러 있는 사이에 제국군은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인 살레르노를 함락시켰고 이듬해 바리마저 점령하였다. 풀리아 전역을 거의 장악한 로타르 3세는 겨울이 다가오자 라눌프 2세를 풀리아의 공작으로 임명하고 철군하였다. 그러나 로타르 3세가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다가 죽게 되면서 루지에로 2세는 다시 기회를 얻게 되었다.

 

 

대대적인 반격과 반란의 종식

 

루지에로 2세는 시칠리아에서 모집한 기사 400명과 주로 이슬람 무슬림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칼라브리아 지방의 트로페아에 상륙하여 포추올리와 알리페, 카푸아, 아벨리노를 차례로 공격하고 캄파니아 지방을 수복하였다. 이때 공포에 질린 나폴리 공작 세르기우스가 즉각 루지에로 2세에게 항복하였다. 이후에 루지에로 2세는 반란군의 세력을 근절시키고자 풀리아 북부로 이동하였으나 세력이 많이 꺾였음에도 여전히 기사 1,500명을 보유한 라눌프 2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그리고 이미 AD 1132년 노체라 전투에서 루지에로 2세에게 대승을 거둔 경험이 있던 라눌프 2세는 AD1137년 리그나노 전투에서 다시 한번 루지에로 2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는 데 성공했다.

 

라눌프 2세에게 2번이나 대패를 경험하게 된 루지에로 2세는 작전을 바꿔 라눌프 2세 군대와의 전면전을 피한채 군대를 나눈 채 지형을 따라 이동시켰다. 루지에로 2세가 군대를 분산시켜 반란군의 성들을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하자 당황한 라눌프 2세가 우왕좌왕할 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 사이 루지에로 2세는 반란군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비록 라눌프 2세는 도망쳤으나 이듬해인 AD 1139년 고열로 사망하였고 같은 해에 나폴리 공작 세르기우스마저 죽으면서 나폴리는 이미 카푸아 공작으로 임명된 아들 알폰소의 영지로 합병되었다. 이로서 약 10년간 루지에로 2세를 괴롭혔던 반란이 모두 종식되었다.

 

AD 1138년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가 죽었기 때문에 루지에로 2세는 로마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게 화해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카푸아 공국을 교황령과 시칠리아 왕국 사이의 완충지대로 독립시킬 것을 요구하였지만 루지에로 2세가 이를 거절하였다. 결국 교황군과 시칠리아 왕국군이 AD 1139년 격돌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루지에로 2세의 동명의 아들 루지에로가 이끄는 군대가 대승을 거두고 로마교황 인노첸시오 2세를 포로로 붙잡는 데 성공했다. 루지에로 2세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를 위협하여 자신의 남부 이탈리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굴복한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루지에로 2세를 "시칠리아의 왕이자 풀리아의 백작이며 카푸아의 공작"으로 선포하였다. 이렇게 하여 루지에로 2세가 통치하는 시칠리아 왕국의 영토가 정식으로 공인받게 되었는데 이때 정해진 영토는 향후 500년 동안 유지된다.

 

 

 

말년의 치세

 

내부 안정에 성공한 루지에로 2세는 해군 육성에도 힘을 써 안티오크 공국 출신의 조르주 지휘 아래 북아프리카 튀니지 지방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비록 북아프리카 영토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시칠리아 왕국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 밖에도 시칠리아 왕국의 해군은 코르푸섬을 함락시켰고 그리스 해안을 공격했으며 대담하게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진격하기도 하였다.

 

명실상부한 유럽의 강력한 군주 중 한명이 된 루지에로 2세는 AD 1140년에 이른바 아리아노 조례를 반포하여 자신만의 통치철학을 성문화하였다. 그리고 노르만족, 프랑크족, 이슬람교도가 섞여있는 다인종 국가였던 시칠리아 왕국을 통치하면서 모든 인종을 편견없이 중용하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풀며 학문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루지에로 2세의 치세 마지막 15년동안 팔레르모 궁정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로 붐볐고 시칠리아 왕국은 북유럽의 노르만 문화, 이탈리아의 라틴문화 뿐만 아니라 이슬람 문화, 비잔티움의 그리스 문화가 서로 어울려진 격조높은 문화를 창출해내었다.

 

 

 

루지에로 2세 이후 시칠리아 왕국

 

루지에로 2세는 AD 1154년 향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루지에로 2세가 건국한 시칠리아 왕국은 그의 후손들에 의해 AD 1194년까지 통치되었으나 AD 1194년 후계가 단절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가 결혼을 통하여 상속권을 부여받으면서 새롭게 신성로마제국의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통치를 받게 된다. AD 1266년에는 프랑스 앙주가문의 샤를이 시칠리아 왕국을 점령하여 카를로 1세가 되었지만 AD 1282년에 시칠리아 만종학살을 계기로 일어난 민중반란으로 시칠리아 섬을 상실하였고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가 대신하여 시칠리아 섬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시칠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남부만을 지배한 앙주가문의 나폴리왕국(정식국가로 취급받지는 못함)과 시칠리아섬 그 자체를 통치한 아라곤 왕가의 시칠리아왕국(트리나크리아로 부르기도 함)으로 분할되었다.

 

분할된 시칠리아 왕국은 AD 1443년 아라곤왕 알폰소 5세에 통일된 이후 알폰소 5세가 사용한 "양시칠리아 왕국"이란 명칭이 비공식적으로 사용되다가 AD 1816년에야 비로소 정식 국명이 된다. 그리고 양시칠리아 왕국이 AD 1860년 G.가르발디에 의해 사르데나 왕국에 병합되면서 오늘날의 이탈리아가 성립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