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Humanities/서양사 Western History

십자군의 변질, 제4차 십자군, 비잔틴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라틴제국, 비잔티움 제국 망명정권

Jobs 9 2021. 5. 20. 08:11
반응형

제4차 십자군의 불안한 결성

 

서유럽의 대표적인 강대국인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잉글랜드가 모두 참여한 제3차 십자군 원정이 결국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면서 십자군의 열기도 시들해졌다. 성지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슬람 세력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으나 AD 1198년 교황이 된 인노첸시오 3세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모집에 호응하는 군주가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서임권을 둘러싸고 여전히 교황과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서로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D 1201년 프랑스 상파뉴에서 열린 마상시합을 계기로 상파뉴의 백작 티보를 중심으로 한 제4차 십자군이 겨우 조직되었다. 상파튜의 티보와 블루아의 루이가 주축이 되었으며 플랑드르의 보두앵을 비롯한 70여명의 제후와 기사들이 참가하였고 티보가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AD 1200년 티보가 병사하자 이탈리아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으며 6명의 기사들이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제4차 십자군은 이전 십자군들이 이용한 육로를 통한 예루살렘 탈환이 아니라 아이유브 왕조 창건 이후 새롭게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된 이집트를 바로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선박 건조와 항해원들의 선발을 제노바와 피사에도 협상을 벌였지만 최종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이 계약을 통해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4,500명의 기사와 말, 9천명의 종자, 2만명의 보병을 수송할 수 있는 선박을 확보하고 항해를 위한 식량과 선원들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소집에 응한 제후와 기사들 사이에 베네치아를 통해서 출발한다는 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AD 1201년 베네치아에 집결한 십자군은 기대하였던 33,500명에 크게 못미치는 12,000명에 불과하였다.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계약이행의 대가로 85,000 실버 마르크를 요구하였지만 십자군은 51,000 실버 마르크 밖에 지불하지 못했다. 베네치아는 85,000 실버 마르크 전액을 지불하기 전까지는 선박을 인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기에 십자군은 출발 전부터 위기에 처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였던 엔리코 단돌로는 재정적으로 위기에 처한 십자군의 약정을 이용하여 십자군의 힘을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모략을 꾸미게 된다.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모략

 

베네치아는 AD 5세기경 게르만족의 일파가 북이탈리아를 침입하자 이들을 피해 아드리아해 해안가의 척박한 석호에 자리잡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던 베네치아는 점차 도시로 성장하였고 AD 7세기 경에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아 '도제(Doge)'라고 부르는 종신제 지도자를 선출하기 시작하면서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프랑크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서 뛰어난 상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중계 무역과 상업을 통해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베네치아 공화국

 

 

AD 1193년 1월 1일 베네치아의 제39대 도제로 엔리코 단돌로가 선출되었는데 단돌로는 이때 이미 시력을 잃은 노인에 불과하였으나 놀라운 정신력과 체력으로 정력적으로 일하는 야심가였다. 단돌로는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여 베네치아에서 발이 묶여있던 제4차 십자군에게 접근하여 십자군이 지불금의 일부만 제공하는 대신에 자라를 공략하기로 하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자라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주요한 무역항이었는데 현재는 반란을 일으켜 헝가리 왕국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AD 1202년 10월 8일에 십자군은 베네치아를 출발하여 자라로 향했고 공격 1주일만에 자라를 손쉽게 점령하였다. 하지만 헝가리 왕국은 이미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상태였기 때문에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를 공격한 것에 대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매우 분노하였고 십자군 전체를 파문해 버렸다. 비록 십자군의 변명을 듣고 파문이 철회되기는 하였지만 이로서 이교도에 대한 성전을 수행한다던 십자군의 대의명분은 손상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십자군의 힘을 이용하여 손쉽게 자라를 점령한 단돌로가 다음 목표를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잡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과 라틴제국의 성립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한 제 4 차 십자군 전쟁  (Fourth Crusade, 1202 ~ 1204)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마케도니아 왕조(AD 867년 ~ 1056년) 시절의 성세가 끝나고 국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뒤를 이은 두카스 왕조(AD 1059년 ~ 1081년)는 22년동안 4명의 황제를 배출하였으나 3명의 황제가 폐위되는 등 혼란스러웠고, 특히 AD 1071년에 벌어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이슬람의 셀주크 왕조에게 대패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그 뒤의 콤네노스 왕조(AD 1081년 ~ 1185년)는 중앙관료 귀족과의 대립에서 승리하고 서유럽에서 일어난 십자군원정을 잘 이용하는 등 비교적 안정적으로 제국을 이끌었지만 AD 1176년 셀주크 왕조의 방계인 룸술탄국과의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 회복에 실패하였고 외교적으로도 베네치아와 제노바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국가에게 상업적인 양보를 하는 실책으로 국부를 유출시키고 말았다. 결국 콤네노스 왕조는 마지막 황제인 안드로니쿠스 1세의 폭정으로 일어난 반란으로 멸망하였고 새롭게 앙겔로스 왕조가 일어났다.

 

앙겔로스 왕조 역시 초대황제인 이사키우스 2세가 형인 알렉시우스 3세에게 폐위당한 채 장님이 되어 유폐되면서 내분이 발생하였다. 이사키우스 2세의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알렉시우스 앙겔루스는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십자군 대표인 보니파체를 만나 알렉시우스 3세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버지를 복위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알렉시수스 앙겔루스는 그 대가로 20만 실버 마르크의 사례금과 함께 십자군의 이집트 원정을 지원하여 병사 1만 명과 기사 500명을 제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카톨릭의 관할로 만들겠다고 약속하였다. 보니파체는 이를 수락하였고 비록 일부 십자군들이 주저하거나 이탈하였지만 대부분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에 동의해버렸다. 단돌로로서도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 라틴계 상인들이 그리스계 세력에게 밀려나고 있던 형편이었기 때문에 동방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 적극 지원하기로 하였다. 이로서 제4차 십자군은 자라 공략에 이어 이번에도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여 그리스도교를 수호한다는 당초의 대의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AD 1203년 6월 24일 총 3만5천명의 제4차 십자군이 베네치아 선단을 이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서 인구 15만명의 대도시였고 총 3만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 알렉시우스 3세의 무능으로 인하여 비잔티움 제국군의 기강이 많이 해이해진 상태였고, 수많은 징후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우스 3세는 십자군의 침공에 대하여 별다른 방비를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십자군은 단지 80명의 기사만을 투입하여 총 500의 경기병을 물리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에 위치한 칼케돈과 크로소폴리스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북동부에 상륙하여 공격하기 시작했고 1달여간의 공성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지 못하자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불을 질렀다. 이 불로 인하여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입성할 수 있었으나 약 2만명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집도 함께 불태워졌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알렉시우스 3세는 그동안 모아둔 1만 파운드의 금과 막대한 보석을 챙겨서 트라키아로 도망쳤고, 십자군은 당초 목적대로 감옥에 갇혀있던 이사키우스 2세를 복위시켰다. 이사키우스 2세가 알렉시우스 3세에 의해 장님이 되었기 때문에 원활한 전후처리를 위해 알렉시우스가 공동황제로 즉위하여 알렉시우스 4세가 되었다.

 

새롭게 비잔티움 제국의 공동황제가 된 알렉시우스 4세는 당초 약속대로 십자군에게 막대한 군자금과 병력을 지원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 카톨릭 관할에 두어야 했으나 이미 알렉시우스 3세가 황궁의 재물을 모두 들고 도망쳤고 시민들이 로마 카톨릭으로의 개종을 맹렬히 반대하였기 때문에 약속을 이행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십자군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엄청난 세금을 매겨야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반발은 더욱 커져갔고, 약속이행이 점점 어려워지자 십자군의 불만도 팽배해졌다. 이듬해인 AD 1204년 1월 25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폭동이 일어나 이사키우스 2세와 알렉시우스 4세 황제 부자가 모두 살해되고 알렉시우스 5세가 새롭게 제위에 오르는 사태가 발생했고 알렉시우스 5세는 십자군에 대한 채무집행을 거절하였다. 아무런 성과도 없지 못한 십자군이 분노에 휩싸이자 이틈을 노려 단돌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할 것을 선동하였다. 결국 십자군은 AD 1025년 4월 5일에 재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하였고 황제 알렉시우스 5세는 겁을 먹고 트라키아로 도망쳤기에 손쉽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십자군 원정의 목적이 지급받지 못한 배상금에 대한 불만때문이었던 만큼 첫번째 공격과는 달리 수많은 학살과 화재, 약탈행위가 저질러졌고, 수많은 문화재와 예술작품이 파괴되었다. 그 사이 단돌로는 교활하게 도시의 보물들을 빼돌려 자신들의 도시로 이동시켰다.

 

약탈행위는 사흘간 계속된 끝에 겨우 진정되었고 십자군은 사태수습을 위해 자기들끼리 새로운 황제를 뽑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가 유력했으나 베네치아 단돌로의 극심한 반대로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선출되었다. 보두앵은 5월 12일에 황제로 즉위하였고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라틴 제국이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크게 놀랐지만 이미 사태가 종료된 후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라틴 제국을 승인하고 대신 예루살렘 원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제4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원정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번 원정을 지원한 대가로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어 비잔티움 제국 영토의 8분의 3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이 땅을 십자군과 거래하여 크레타 등 무역기지를 얻어냈다. 이렇게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노력했던 단돌로는 모든 일을 마무리하자 병에 걸렸고 자신의 고국 베네치아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에 묻혔다.

 

 

비잔티움 제국 망명정권 성립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하고 라틴제국이 들어섰지만 니케아, 에피루스, 트라페주스에선 비잔티움 세력이 건재하여 망명정권인 니카이아 제국과 에페이로스 공국, 트라페주스 제국이 각각 성립되었다. 니케아 제국은 도망친 황제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인 테오도루스 라스카리스에 의해 성립되었고, 에피루스 공국은 두카스 가문이 라틴제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면서 세워졌으나 트라페주스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전에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기에 제4차 십자군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라틴제국(보라색)과 비잔티움 제국 망명정권(분홍색)

 

에피루스 공국은 한때 발칸반도 대부분을 장악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의 기회를 얻었으나 AD 1230년 2대 군주인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가 불가리아와의 클로코드니차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힌 이후로 공국은 둘로 나뉘어지면서 힘을 잃고 말았다. 트라페주스 제국도 동서 교역로의 도상에 위치하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많은 부를 얻을 수 있었으나 영토가 흑해 남부 연안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큰 힘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하여 니케아 제국이 실질적인 비잔티움 제국의 계승국가가 되었다. 니케아 제국은 산업을 부흥시키고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외교적으로도 불가리아, 신성로마제국과 동맹을 맺고 라틴제국을 압박하였으며 AD 1254년에는 에피루스 공국으로부터 종주권을 인정받고 명실상부한 비잔티움 제국의 계승국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 황제 요하네스 4세의 섭정을 맡던 미카엘 8세가 AD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제위에 오르면서 비잔티움 제국을 재건하였다. AD 1338년 에피루스 공국마저 병합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이 완전하게 부활하였으나 트라페주스 제국만은 지리적 이점으로 독립을 유지하였다. 특히 트라페주스 제국은 AD 1453년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하는 비잔티움 제국보다 더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여 AD 1461년 역시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존속하게 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