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의 탄생
오토 1세 시대
프랑크 왕국이 분열하여 독일 지역에 성립했던 동프랑크 왕국은 AD 911년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인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한 이후 프랑켄 공작, 작센 공작, 슈바벤 공작, 바이에른 공작 등의 유력 제후들이 선거를 통해서 국왕을 선택하였고 이에 따라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와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차례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AD 936년 하인리히 1세가 자신이 죽기 1개월 전인 AD 936년 8월 7일에 자신의 아들인 오토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후 다른 공작들이 선거를 통해 오토 1세를 독일의 왕으로 인정하도록 만들면서 왕위 세습에 성공하고 작센 왕조를 창건하게 되었다. 이제 본격적인 중세 독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귀족 연합체의 명목상 1인자를 강조한 하인리히 1세와 달리 왕위에 오른 오토 1세는 가문의 영지인 작센 이외의 공작령에 대해서도 국왕으로서의 종주권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즉위 직후 내전이 벌어졌다.
오토 1세는 프랑켄 공작 및 바이에른 공작과의 전쟁을 벌이던 도중에 이복형 탕크마르도 반란을 일으켜 이탈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결국 탕크마르는 죽었고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는 항복하였으며 동명의 바이에른 공작 에버하르트는 공작위에서 쫓겨났다. AD 939년에는 동생인 하인리히가 반란을 일으켜 항복했던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선 로렌 공작 지젤베르, 그리고 프랑스 왕 루이 4세의 지원까지 받아 제법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오토 1세가 또 다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는 전사하였고 로렌 공작 지젤베르는 도망치던 도중에 익사하였으며 하인리히는 항복했다.
오토 1세는 에버하르트가 죽은 이후 프랑켄 공작을 별도로 임명하지 않고 여러 개의 영지와 주교령으로 나눈 뒤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후 항복했던 오토 1세의 동생인 하인리히가 AD 941년에 또 다시 오토 1세에 대한 암살 음모에 가담했으나 다른 가담자들과는 달리 용서를 받게 되면서 결국 마음으로 승복하여 이후 평생 형에게 충성을 바치게 된다. AD 947년 하인리히는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받았고 다른 공작 작위도 오토 1세의 친족들이 계승하게 되면서 오토 1세는 느슨한 귀족 연합체에 불과했던 독일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동방 영토 확장
오토 1세는 내부적으로 반란에 시달리면서도 대외 확장정책을 펼치고 교회의 조직망을 활용하여 이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동쪽 국경 너머에 살던 슬라브족과 싸워 승리를 거두며 AD 937년 마그데부르크에 장크트모리츠 수도원을 건립하였고 AD 948년에는 브란덴부르크 주교구와 하벨베르크 주교구를 신설하였다. 한편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가 즉위한 이후 이전의 하인리히 1세 시절 납부하던 공물 제공을 중단하고 오히려 작센을 침공하기도 하였다. 이에 오토 1세가 보헤미아를 공격하여 비록 초반에는 고전을 거듭하였지만 AD 950년에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다시 조공을 받아내며 종주권을 재확립하였다.
이후에도 오토 1세는 그리스도교 포교를 명분으로 내세워 동방 영토 확장에 심혈을 기울였고 AD 955년에는 장크트모리츠 수도원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 부어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AD 962년 로마교황 요한네스 12세의 승인을 받아 마그데부르크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키고 브란덴부르크 주교구와 하벨베르크 주교구를 관할하도록 하였으며 AD 967년에는 메르제부르크 주교구를, AD 968년에는 차이츠 주교구를 각각 설립하여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의 관할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는 총 4개의 주교구를 관할하게 되면서 그 세력이 더욱 커졌다.
이탈리아 왕위 획득
이제 오토 1세의 관심은 이탈리아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마지막으로 카롤링거 왕조의 전 영토를 지배했던 카를 3세가 AD 887년 동프랑크 왕국에서 아르눌프에게 폐위되고 이듬해 사망한 이후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채 유력 귀족들이 서로 왕위를 주장하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던 상태였다. 먼저 프리울리 후작 베렌가리오 1세가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지만 스폴레토 공작 귀도 3세가 로마교황 포모르수스에게 압력을 가하여 황제 지위와 이탈리아 왕위를 모두 차지한 채 AD 891년에는 자신의 아들인 람베르토 2세를 공동 황제 겸 이탈리아의 공동 왕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AD 893년 아르눌프가 이탈리아에 개입하여 귀도 3세와 람베르트 2세 부자를 몰아내고 로마교황령을 보호해주는 조건으로 황제 대관식을 치른 뒤 프리울리 후작 베렌가리오 1세를 이탈리아 왕으로 복위시켰다.
아르눌프가 더 이상 이탈리아에 흥미를 잃고 돌아갔고 로마교황 포모르수스마저 사망하자 람베르트 2세가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로마로 되돌아오면서 이탈리아는 베렌가리오 1세와 람베르트 2세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AD 898년 람베르트 2세가 암살되면서 이탈리아 내전이 겨우 종식되는 듯이 보였지만 AD 922년 부르고뉴 왕 루돌프 2세가 이탈리아의 일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이탈리아 왕위에 도전하면서 내전이 재개되었다. AD 924년 베렌가리오 1세가 북이탈리아에서 살해되면서 루돌프 2세가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지만 루돌프 2세 역시 AD 926년 베렌가리오 1세의 잔존 세력에게 추대받은 프로방스 왕국의 아를 백작 위그에게 축출당하고 말았고 위그는 자신의 아들인 로타리오 2세를 공동 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이탈리아의 혼란은 끝나지 않아서 AD 940년 이브레아 후작 베렌가리오 2세가 위그와 로타리오 2세 부자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AD 947년 위그를 아를 백작령으로 쫓아냈다.
이제 로타리오 2세에게 이탈리아 왕위를 포기하도록 종용하였지만 로타리오 2세가 오토 1세에게 군사 지원을 받아내면서 이탈리아 왕위를 지켜내었다. 그렇지만 AD 950년 로타리오 2세가 갑자기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고 베렌가리오 2세가 로타리오 2세의 미망인인 아델라이드를 자신의 아들인 아달베르트 2세와 강제로 결혼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아델라이드는 딸 엠마를 데리고 이탈리아를 탈출하여 오토 1세에게 도망쳤다. 이미 오토 1세는 AD 946년 왕비 마틸다와 사별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델라이드와 재혼하고 이를 명분으로 이탈리아 왕위를 노리고 AD 951년 군사를 데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갔다. 그리고 오토 1세는 옛 롬바르드(랑고바르드) 왕국의 수도인 파비아에 입성하여 베렌가리오 2세를 축출한 후 자신의 딸 리우르가르트와 결혼하여 사위가 된 로렌 공작 콘라트 적공(Konrad der Rote)을 이탈리아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베렌가리오 2세가 오토 1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영토까지 일부 양도했기 때문에 베렌가리오 2세의 이탈리아 왕위를 그대로 유지시켰다.
레흐펠트 전투와 마자르족 격퇴
독일로 돌아온 오토 1세는 아들이자 슈바벤 공작이었던 리우돌프의 반란으로 어려움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AD 954년 때마침 침공한 마자르족 때문에 리우돌프에게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틈을 타 1여년 간의 전투 끝에 AD 955년 리우돌프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내부를 수습한 오토 1세는 마자르족에게 공세로 전환하기 위해 바이에른, 슈바벤, 보헤미아 등의 영지에서 군사를 징발하고 아우구스베르크 근처의 레흐펠트 평원으로 진군하였다. 마자르족의 별동대가 독일군 후방의 수송부대를 습격하면서 오토 1세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였지만 마자르족이 보급품 약탈에 몰두하는 사이에 오토 1세가 침착하게 원군을 파견하여 마자르족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오토 1세는 각각 1천명의 기사로 이루어진 8개 군을 이끌고 1만 7천명의 경기병으로 이루어진 마자르족 본대와 레흐펠트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레흐펠트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르족은 정면 공격을 하는 척하면서 주력군을 우회시켜 오토 1세의 군대를 포위하려고 하였다.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보헤미아 군이 패퇴했고 그 옆에 위치한 슈바벤 군도 혼란에 빠지며 오토 1세의 군대 중 좌익이 거의 붕괴되었다. 오토 1세로서는 큰 위기였지만 우익의 프랑켄 군을 이끄는 사위 콘라트 적공에게 마자르족을 역포위하라고 지시했다. 자칫 잘못하면 프랑켄 군이 비운 사이 우익마저 무너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작전이었지만 콘라트 적공이 멋지게 성공시키면서 마자르족은 큰 혼란에 빠졌다. 특히 경기병으로 이루어진 마자르족의 위력이 충분히 발휘되기 위해서는 화살을 쏘고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을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나 순식간에 접근한 독일의 기사단 때문에 충분한 여유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독일의 기사단과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중무장 갑옷을 입은 독일 기사단이 방패로 마자르족의 화살을 튕겨내며 돌격해 들어가자 마자르족의 진형이 삽시간에 무너졌다. 비록 역전의 전기를 마련한 콘라트 적공은 전투 도중에 전사했지만 이후 벌어진 난전에서 중무장을 한 독일의 기사단이 가벼운 무장의 마자르족을 일방적으로 살육하기 시작했고 결국 견디지 못한 수많은 마자르족이 무질서하게 도망치다가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레흐펠트 전투는 유럽에 진출한 이후 마자르족이 겪은 보기드문 대패로 이후 마자르족은 다시 독일을 침공할 힘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마자르족은 서유럽 문명과의 공존을 선택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이슈트반 1세가 AD 1000년에 로마교황 실베스테르 2세로부터 정식으로 왕으로 승인받아 헝가리 왕국을 건국하게 된다.
황제 즉위와 신성로마제국의 탄생
레흐펠트 전투 승리 이후에도 오토 1세의 영토확장은 계속되어 AD 960년에는 엘베 강 중류와 오데르 강 중류 사이에 거주하던 슬라브족을 모두 복속시켰고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에게도 조공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오토 1세가 리우돌프 반란과 마자르족의 공격을 상대하는 동안 이탈리아 왕국을 다시 장악한 베렌가리오 2세가 AD 961년 자신의 아들인 아달베르트 2세와 함께 로마교황령을 공격하자 로마교황 요한네스 12세가 오토 1세에게 이탈리아 원정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오토 1세는 그 해 5월 아직 6살 밖에 안된 아들 오토 2세에게 독일 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뤄주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뒤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리고 AD 961년 12월 베렌가리오 2세를 폐위시킨 뒤 스스로 이탈리아 왕위에 올랐고 이듬해 2월 로마에 당도한 오토 1세는 로마교황 요한네스 12세의 집전으로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이 거행하며 황제로 즉위하였다.
오토 1세는 황제 즉위 후 11일 뒤 로마교황 요한네스 12세와 '오토의 특권(Privilegium Ottonianum)'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 오토 1세가 로마교황에게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와 카롤루스 1세에 의해 성립된 로마교황령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대신에 로마교황은 로마교황령에 대한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차기 로마교황들은 교황이 되기전에 모두 황제에게 충성서약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오토 1세의 황제 즉위는 AD 924년 이후 단절된 카롤링거 왕조의 계승으로 여겨졌으므로 훗날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는 제국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오토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인정받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대제의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다만 일부에서는 오토 1세의 정통성을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찾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를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1세까지 소급하여 적용하기도 한다.
오토 1세가 독일로 돌아가자 오토의 특권을 굴욕적으로 느낀 로마교황 요한네스 12세가 협약을 파기하였다. 이에 오토 1세는 즉각 로마로 돌아와 요한네스 12세를 폐위시키고 레오 8세를 새로운 로마교황으로 선출시켰다. 그러나 오토 1세가 로마를 떠나자 이번에는 로마 시민들에 의해 레오 8세가 축출된 채 요한네스 12세가 복위되었고 AD 964년 요한네스 12세가 갑자기 죽자 그 뒤를 베네딕투스 5세가 이어받았다. 다시 한번 로마에 대한 무력 정벌의 필요성을 느낀 오토 1세는 AD 964년 로마로 재차 진군하여 레오 8세를 복위시켰고 AD 965년 레오 8세가 사망하자 요한네스 13세를 로마교황으로 선출시켰지만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요한 13세가 다시 축출되었기 때문에 오토 1세는 AD 966년부터 AD 972년까지 아예 로마에 머물며 요한네스 13세를 지원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성로마황제가 교황의 선출에 간섭하는 선례가 만들어졌으며 이후 한동안 교황권에 대한 황제권의 우위가 유지되었다.
오토 1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교회의 주교들에게 토지를 부여하여 종교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면에서도 지배권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주교 지위는 기본적으로 세습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로서도 주교의 임명권(서임권)을 행사하여 지속적으로 지방권력의 이탈을 방지할 수 있었다. 비록 서임권 문제는 훗날 황제권과 교황권의 대립의 불씨가 되지만 당시에는 효율적인 교회 조직을 활용하여 제국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그 옛날 카롤루스 1세와 마찬가지로 오토 1세를 황제로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토 1세는 이탈리아 남부의 동로마 제국령을 공격하는 한편 동로마 제국과의 오랜 협상을 벌여 마침내 AD 972년 아들 오토 2세와 동로마 제국의 공주 테오파노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독일로 돌아온 오토 1세는 AD 973년 3월 멤레벤에서 사망했고 후임으로 오토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 명칭과 황제 칭호
유럽의 역사 속에서 황제라는 칭호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로마 제국 초대황제인 옥타비아누스가 군대에 대한 절대 지휘권을 가진 장군을 의미하는 '임페라토르(Imperator)'의 호칭을 독점하였고 원로원으로부터 '존엄한 자'라는 의미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 이후 그 후계자들이 모두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의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동양적으로 번역한 것이 황제라는 말이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리된 이후 황제는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에 각각 존재하게 되었으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동로마 제국만이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1세가 서유럽 대부분을 통일하고 로마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치르면서 멸망한 서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고 황제 칭호를 부활시켰다.
카롤루스 1세 이후 그 직계혈통인 카롤링거 왕조에서 황제 칭호를 세습하였지만 제국이 분열되면서 그 권위는 많이 실추되었고 AD 924년 단절되었다. 그러나 AD 962년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가 로마로 진군하여 로마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치르면서 황제 칭호가 부활하였다. 하지만 오토 1세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는 물론 이전의 카롤링거 왕조의 황제들도 자신의 칭호를 특정 영토와 연결시키지 않았고 다만 로마 제국의 황제를 의미하는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사용했을 뿐이다. 오토 1세의 아들인 오토 2세가 동로마 황제에 대응되는 의미로 "로마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황제 칭호에 로마를 결부시키는 개념이 일시적으로 등장하였고 AD 1034년이 되면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황제권과 교황권의 대립이 심화되는 AD 1157년에는 "신성한 교회"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신성 제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은 이 두가지가 합쳐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프랑크 왕국이 신성로마제국이 되었지만 오토 1세를 비롯한 신성로마황제들은 그 권위가 독일과 북이탈리아에 제한되었을 뿐이었고 그 외 프랑스나 잉글랜드 등지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신성로마제국도 실존 했던 국가로 보기에도 힘들다. 대대로 신성로마황제는 독일왕이 로마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거행하여 즉위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는 카롤루스 1세에게 로마교황이 대관식을 치뤄준 관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관을 치르지 않는다고 해도 독일 내부에서 지니는 권력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황제라는 호칭만 사용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정식으로 로마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치르면 신성로마황제가 되고 그러지 못하면 그냥 독일 왕(공식적으로는 '프랑크족의 왕'이나 '로마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 불렸다. 따라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개념은 독일 왕이 정식으로 황제의 대관을 치렀을 때 그 지배 영토가 불리는 명예와 같은 것이었다.
오토 2세 시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반란 진압
오토 2세는 이미 아버지 오토 1세가 죽기 이전인 AD 961년에 이탈리아 공동왕으로, AD 967년에는 공동 황제로 임명받았지만 오토 1세가 사망하고 단독 황제로 즉위하자 안팎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사촌이자 가장 큰 정적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도전을 받아야 했고 외부적으로는 로렌의 재편입을 노리는 서프랑크 왕국의 로테르를 상대해야만 했다. 먼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슈바벤까지 노리던 것이 오토 2세의 반대로 좌절되자 AD 974년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2세는 바이에른과 작센의 귀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우스 2세와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의 지지까지 얻어냈지만 사전에 발각되면서 하인리히 2세는 오토 2세에게 사로잡혀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AD 976년 하인리히 2세가 바이에른으로 되돌아와 재차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하인리히 2세는 보헤미아로 추방되었고 그의 바이에른 공작령은 크게 축소된 채 일부가 분리되어 독일의 6번째 공작령인 케른텐(카린티아) 공작령이 되었다.
서프랑크왕 로테르와의 대결
오토 2세에 대한 두번째 위협대상은 끊임없이 로렌을 노리는 서프랑크 왕국의 로테르였다. 로렌은 메르센 조약 당시 서프랑크 왕국으로 편입되었지만 이후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의 오랜 영토분쟁 지역으로 남아 있던 상태였다. 로테르는 AD 978년 파리 백작인 위그 카페와 함께 독일을 침공하여 오토 2세가 있던 아헨을 기습 공격하였고 오토 2세는 임신 중이던 아내 테오파노를 데리고 겨우 아헨을 탈출하여 쾰른으로 이동했다. 오토 2세를 아슬아슬하게 놓친 로테르는 아헨의 궁전을 약탈하고 파괴한 뒤 서프랑크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에 오토 2세는 반격에 나서 우선 로렌을 둘로 나눠 하(下) 로렌의 공작으로 로테르의 동생이자 정적인 샤를을 임명하여 로테르를 견제했다. 그리고 AD 978년 10월 서프랑크 왕국의 수아송, 랭스 등을 파괴하고 파리로 진격하였다. 이번에는 로테르가 도망쳤고 오토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을 둘로 나눠 하(下) 로렌 공작 샤를을 왕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결국 위그 카페의 군사력 덕분에 로테르는 복위되었으나 더이상 로렌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AD 980년 7월 오토 2세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북이탈리아 세력 회복과 갑작스런 죽음
오토 2세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내부 반란과 서프랑크 왕국의 로테르와의 전쟁을 치르느라고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 로마에서는 오토 2세가 즉위하던 AD 973년 로마교황 요한네스 13세가 선종하자 사비나 지역을 중심으로 광대한 영지를 보유한 크레센티 가문에서 로마교황 선거에 개입하여 프란코 페루치 추기경을 후보자로 내세웠으나 친황제파에서 후보로 내세운 베네딕투스 6세가 로마교황이 되었다. 이에 크레센티 가문은 이듬해 페루치 추기경과 함께 베네딕투스 6세를 교살하고 페루치를 대립교황 보니파시우스 7세로 참칭하게 하였다. 비록 오토 2세는 아직 이탈리아로 갈 형편이 되지 못했지만 AD 974년 자신의 대리인으로 시코 백작을 내세우면서 보니파시우스 7세는 폐위되고 새로운 선거를 통해 로마교황 베네딕투스 7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프랑크 왕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여유가 생긴 오토 2세가 AD 980년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베네딕투스 7세의 지위를 안정시켰다.
오토 2세는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우스 2세를 의식하여 스스로 로마 황제라고 칭하고 자신의 제국을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칠리아 섬을 장악하고 남이탈리아의 칼리브리아 지역까지 넘어 온 이슬람 군을 응징함으로써 이탈리아 남부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였지만 AD 982년 전투에서 완패하고 말았다. 이에 오토 2세는 자신의 추락한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AD 983년 이탈리아 북부의 베로나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여 아들인 오토 3세를 독일 왕으로 임명하고 후계자로 공식화했다. 하지만 오토 2세가 이탈리아에 계속해서 머무르며 독일을 비운 사이 기회를 노리던 덴마크의 데인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동시에 동쪽의 슬라브족도 반란을 일으켜 엘베 강 동쪽의 브란덴쿠르크 부근을 점령했다. 오토 2세는 이를 진압하고자 하였지만 AD 983년 12월 말라리아에 걸려 28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하고 말았다.
오토 3세 시대
즉위와 이탈리아 문제
AD 983년 12월 오토 3세가 즉위했을 당시 나이가 3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오토 2세 시절 반란을 일으켰다가 추방당했던 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되돌아와 작센 왕가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 섭정 자리를 요구했다. 비록 AD 984년 제국 의회의 결정에 따라 오토 3세의 모후인 테오파노가 섭정이 되는 데 성공했지만 섭정 지위를 포기하는 대가로 하인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작으로 복위되었다. 테오파노는 AD 991년 사망시까지 오토 3세의 섭정이 되었고 이후에는 오토 1세의 황후였던 오토 3세의 할머니 아델라이드가 AD 994년까지 섭정을 했다. 그리고 AD 994년 오토 3세는 14세의 나이로 친정을 시작하게 된다. 오토 3세는 아직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고 오토 3세의 나이가 어린 것을 기회로 로마에서는 크레센티 가문이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 3세는 가장 먼저 이탈리아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당시 로마는 오토 2세가 대립교황 보니파시우스 7세를 추방하고 대신 선임한 로마교황 베네딕투스 7세가 AD 983년 선종한 이후 다시 오토 2세의 추천에 따라 요한네스 14세가 로마교황으로 즉위하였지만 같은 해 오토 2세가 죽자 크레센티 가문이 다시 로마를 장악하였고 동로마 제국으로 피신하였던 보니파시우스 7세가 되돌아와 요한네스 14세를 투옥하고 독살하였다. 이후 보니파키우스 7세는 분노한 로마 군중에게 AD 985년 7월 살해되고 요한네스 15세가 새롭게 선출되었지만 크레센티 가문의 크레센티우스 2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비록 오토 3세의 섭정이었던 테오파노 황후가 AD 989년부터 991년부터 로마에 머물며 크레센티우스 2세의 영향력을 제거해주었지만 테오파노 황후가 다시 독일로 되돌아가자 로마교황 요한네스 15세는 다시 크렌센티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AD 996년 로마교황 요한네스 15세는 오토 3세에게 로마로 와서 크레센티 가문을 억제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오토 3세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먼저 파비아에서 이탈리아 왕위에 오른 뒤 로마에 입성하였지만 그 사이 로마교황 요한네스 15세는 열병으로 선종하고 말았다. 이에 오토 3세는 자신의 사촌이자 궁정 사제인 케른텐의 브루노를 로마교황으로 선출시켜 최초의 독일인 출신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5세를 선출시켰다. 이후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5세가 오토 3세의 황제 대관식을 거행해 주었으나 오토 3세가 독일로 되돌아가자 크레센티우스 2세에 의해 그레고리우스 5세가 축출되고 요한네스 16세가 대립교황이 되었다. 이에 오토 3세는 AD 998년 재차 로마로 진군하여 요한네스 16세의 코와 귀, 혀를 잘라내어 불구로 만들고 산탄젤로 성에 농성 중이던 크레센티우스 2세를 체포하여 처형시킨 후 그레고리우스 5세를 복위시켰다.
로마 황제 칭호와 갑작스런 죽음
오토 3세는 아예 로마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삼고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들의 종', '세계의 황제'라며 그리스도교 세계의 지도자를 자칭했다. AD 999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5세가 자연사하자 오토 3세는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프랑스인 오리야크의 제르베르를 로마교황 실베스테르 2세로 세우며 여전히 로마교황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AD 1000년에는 오토 3세가 프라하 주교로서 동유럽 일대에 그리스도교를 포교하다가 프로이센 지방에서 이교도에 의해 순교한 성(聖) 아달베르트의 유골이 있는 폴란드의 그니에즈노로 순례 여행을 떠나 그곳을 로마카톨릭의 대주교좌로 만들고 피아스트 공작이 다스리던 폴란드가 왕국으로 승격되는 발판을 마련해 주게 된다.
AD 1001년 1월 이탈리아의 티부르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였으나 그 처벌을 관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자신들의 경쟁 상대였던 티부르가 완전히 파괴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많은 불만을 가졌고 이를 이용하여 투스쿨룸 백작 그레고리우스 1세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 오토 3세와 교황 실베스테르 2세를 라벤나로 축출하였다. 이에 오토 3세는 자신의 친척이자 바이에른 공작인 하인리히 4세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지만 하인리히 4세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AD 1002년 오토 3세가 말라리아에 걸려 급사하고 말았다.
하인리히 2세
오토 3세가 죽자 이탈리아에서는 로마 시민들의 반란이 자연스럽게 사그라들면서 로마교황 실베스테르 2세가 로마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오토 3세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오토 3세의 사촌이자 바이에른 공작이 하인리히 4세가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으나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2세는 오토 2세 시절 반란을 일으켰다가 추방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제후들이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를 대립 후보로 내세웠다. 그렇지만 하인리히 4세는 오토 왕조 최초의 황제인 하인리히 1세의 증손자로서 오토 왕가의 유일한 남자 자손이라는 정통성 덕분에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스의 도움을 받아 독일 왕의 대관식을 치르고 하인리히 2세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후 하인리히 2세는 다른 유력 공작령인 작센, 바이에른, 상(上)로렌, 하(下)로렌, 프랑켄을 차례로 방문하며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높이고 다른 공작들의 봉신의 예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폴란드의 대결과 이탈리아왕 및 황제 즉위
하인리히 2세는 오토 3세의 남은 지위인 이탈리아 왕위와 황제의 대관을 받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해야 했으나 동쪽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가 오토 3세가 죽은 혼란을 틈타 루사티아와 미스니아(현재의 마이센)를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먼저 상대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이브레아 변경백 아르뒤노가 AD 1002년 폼페이에서 이탈리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더는 미뤄둘 수 없었다. 하인리히 2세는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를 루사티아와 미스니아에서 몰아낸 뒤 AD 1004년 3월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트렌토를 함락시키고 AD 1004년에는 파비아에서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후방에서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가 다시 침공하여 보헤미아의 모라비아와 상 헝가리(현재의 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기 때문에 하인리히 2세는 아르뒤노를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고 독일로 되돌아 가야만 했고 이에 아르뒤노가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독일로 돌아온 하인리히 2세는 폴란드를 상대하기 위해 이교도인 엘베강 동쪽의 리우티티안 부족과 협정을 맺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교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 조건으로 군사지원을 얻었다. 그리고 AD 1004년 볼레스와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위에서 몰아내기 위해 볼레스와프 1세에게 쫓겨났던 아로미르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내세웠고 AD 1005년에는 루사티아와 미스니아를 탈환하고 폴란드 영토까지 침공했다. 이에 볼레스와프 1세가 협상에 나서면서 포즈난에서 첫번째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으나 평화는 2년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AD 1007년 볼레스와프 1세가 다시 침공하여 루사티아와 미스니아를 점령하고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령까지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한 하인리히 2세의 반격은 3년 뒤인 AD 1100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지만 별다른 성과도 못 거뒀기 때문에 AD 1012년 2번째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이번에도 볼레스와프 1세는 강화조약을 어기고 루사티아를 침공하였고 AD 1013년 메르제부르크에서 세번째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볼레스와프 1세가 하인리히 2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루사티아와 미스니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렇게 폴란드와의 전쟁이 마무리되자 하인리히 2세는 AD 1013년말 다시한번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고 이듬해 2월 로마를 점령하고 마침내 로마교황 베네딕투스 8세로부터 황제의 대관을 받았다. 하지만 로마교황은 이탈리아 귀족이나 동로마 제국,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하인리히 2세가 자신을 보호해주기를 바랐으나 하인리히 2세는 전임 황제인 오토 3세와 달리 이탈리아보다는 독일의 통치에 더 관심이 많았다. 더욱이 후방에서 다시한번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여줬기 때문에 서둘러 독일로 돌아갔다.
폴란드 볼레스와프 1세와의 강화조약 체결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대한 지원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새로운 보헤미아 공작인 올드리치에게 자신의 아들 미에슈코를 보내어 함께 하인리히 2세에게 반기를 들 것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올드리치는 오히려 미에슈코를 체포하여 하인리히 2세에게 보냈고 이에 하인리히 2세는 볼레스와프 1세에게 제국 법정에 출두하여 재판받을 것을 요구했지만 볼레스와프 1세가 거절하자 일단 미에슈코를 풀어준 뒤 보헤미아 공작 올드리치와 작센 공작 베르나르트 2세와 함께 3방향에서 동시에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하인리히 2세는 호기롭게 폴란드 내륙으로 깊숙히 진격하였지만 전투를 거듭할 수록 많은 피해를 함께 입어야 했다. 더욱이 풀려난 볼레스와프 1세의 아들 미에슈코가 모라비아인 기사단을 이끌고 작센 동부 변경백경을 공격했기 때문에 하인리히 2세는 아무런 영토 이익없이 그대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제 반대로 폴란드의 반격이 시작되어 동부 변경백 게로 2세가 전사하였고 AD 1017년 폴란드군이 미스니아까지 진격하였다가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하인리히 2세가 보헤미아는 물론 이교도인 밴드족의 지원까지 받아 폴란드의 글로고프와 니엠차를 포위했지만 점령에 실패했고 미에슈코의 폴란드군도 보헤미아를 침공했지만 별다른 성과없이 퇴각해야만 했다. 이제 다시 한번 하인리히 2세와 볼레스와프 1세 사이의 휴전 협상이 시작되어 AD 1018년 양국 사이의 네번째 강화조약인 바우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통해 볼레스와프 1세는 보헤미아를 공식적으로 포기했고 루사티아와 미스니아의 봉신의 지위만 유지하기로 했지만 봉신의 지위는 명목상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루사티아와 미스니아를 차지하게 되었다.
내정 정비, 그리고 작센 왕조의 단절
비록 하인리히 2세는 신체적으로는 다리를 절고 유약한 몸을 지녔지만 재위 기간 22년 동안 말을 타고 곳곳을 다니며 전쟁을 지휘하고 재판을 주재했으며 왕권을 강화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특히 말할 때마다 성서 구절을 인용할 정도로 독실한 신자였지만 이교도 부족과 동맹을 맺는 일도 서슴치 않을 정도로 현실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내정 면에서 오토 1세가 만들어 놓은 교회 조직을 활용하는 체계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주교들에게 성직자로서 독신 생활을 강요했는데 이 덕분에 세습제인 봉건 제후와 달리 주교직은 임명제를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주교구가 너무 거대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마인강 상류의 밤베르크를 인근의 뷔르츠부르크 주교령에 포함시키지 않고 별도의 밤베르크 주교구로 삼은 것이었다. 참고로 하인리히 2세는 밤베르크 주교구를 신설한 공을 인정받아 사망한 지 100년도 지난 AD 1146년에 성인으로 추증된다.
이렇게 하인리히 2세가 유능한 통치자로서 평생 동안 유연한 자세로 차근차근 왕권을 강화해 나가며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제국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2세에게는 자신의 제국을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 이 때문에 하인리히 2세가 AD 1024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신성로마제국의 작센 왕조가 단절되고 말았고 이후 독일 왕위와 나아가 신성로마황제 자리를 두고 여러 제후들이 다투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토 1세의 딸 리우르가르트와 로렌 공작 콘라트 적공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케른텐 공작 오토 1세의 손자의 자격으로 잘리어족 슈바벤의 콘라트가 독일 왕 콘라트 1세로 선출되는데 성공하면서 새로운 잘리어 왕조가 창건된다.
유럽의 군주 칭호
1. 황제(Emperor)
유럽에서 황제 지위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리된 이후 황제 자리가 둘로 나뉘었다. 서로마 제국이 AD 476년 멸망하면서 서로마 제국의 제위가 단절되었으나 로마교황에 의해 AD 800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1세의 카롤링거 왕조가 황제 지위를 계승하였다. 이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황제의 권위가 격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절되었으나 AD 962년 오토 1세에 의해 부활되면서 신성로마제국으로 계승된다. AD 1452년부터 신성로마황제 지위를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되었고 AD 1804년 나폴레옹 1세가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황제가 아닌 오스트리아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1세가 카롤루스 1세로부터 이어지는 정통성을 주장하며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나 얼마 가지 못했고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 시절 다시 황제 자리를 부활시켰지만 보불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번에는 독일에서 빼앗긴 신성로마제국의 권리를 되찾았다는 의미로 AD 1871년 독일 제국 성립을 선포하고 황제 호칭을 사용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약 천년을 이어갔으나 AD 1453년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했고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자신이 동로마 제국을 계승하였음을 주장하면서 황제를 의미하는 '차르(Tsar)'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하여 유럽에서 황제 호칭은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 3개국만이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이외에는 아무리 국력이 강하더라도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지 못했기 때문에 황제가 되지 못했다. 다만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가 AD 919년 '모든 불가리아인과 그리스인의 차르(Tsar of the Bulgarians and the Romans)'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나바르 왕국의 산초 3세가 AD 1034년 '전 에스파냐의 황제(Imperator totius Hispaniae)'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세르비아의 스테판 두샨도 AD 1346년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차르(Tsar of the Serbs and Romans)'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로마 제국과의 연결고리가 없었기 때문에 자칭한 것에 불과할 뿐 외교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로마 제국과의 연결고리가 그리스도교 세계인 유럽에서의 황제 칭호의 전제 조건이 되자 그리스도교 세계와 상관없는 비유럽의 황제 칭호를 우회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이후 인도 무굴제국을 병합한 것을 근거로 '영국의 왕이자 인도의 황제'라는 표현을 통해 우회적으로 황제 호칭을 사용하였고 이를 모방한 이탈리아도 에티오피아를 병합하고 '이탈리아의 왕이자 에티오피아의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 밖에 유럽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중남미에서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발생하였는데 먼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아이티의 자크 데살린이 AD 1804년 황제가 되었고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실 출신의 페드루 1세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AD 1822년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의 아구스틴 1세도 AD 1822년 황제를 자처하기도 했다.
2. 왕(King)
로마 제국시절 최고통치자는 황제 밖에 없었고 그 하위인 왕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게르만 민족의 국가가 난립하면서 새로운 군주의 호칭이 필요해지면서 '왕'이 등장했다. 왕은 라틴어로 '렉스(Rex)'가 되었고 영어로는 게르만어 중 혈통을 의미하는 "kin"으로부터 "King"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서로마 제국과 포이데라티(동맹부족) 협정을 맺은 게르만족 부족장이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그대로 정착되었다. 이후 유럽에서는 로마교황이 황제의 대관식을 집전하듯이 대주교가 왕의 대관식을 치뤄주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지배 영토의 주교령이 대주교령으로 승격되면 그 지역의 군주도 왕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3. 대공(Grand duke)
황제나 왕이 아니면서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는 경우에 대공의 호칭이 부여되었는데 그 위치는 왕 보다 낮고 공작보다 높았다. 중세 시대에는 원칙적으로 대공의 임명은 로마교황 만이 가능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AD 13세기 중엽에 몽골의 러시아 침입에 대항하여 발트해 연안을 지켜낸 공적으로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로부터 대공으로 임명받은 민다우가스 리투아니아의 대공과 AD 1569년에는 로마교황 피우스 5세에 의해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대공으로 임명받은 코시모 데 메디치가 있다. 특이한 사례로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공국은 오히려 몽골 지배 당시 전 루시(러시아인)의 대공(Velikiy Kniaz)으로 인정받으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이 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수많은 대공(Großherzog)령이 등장했는데 나폴레옹 1세의 몰락 후 빈 희의에 의해 난립했던 독일 영방국들이 정리되었는데 룩셈부르크 대공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 등 10개 만이 남았다.
* 한국어로 대공으로 번역되는 타 사례들
- 프린스(Prince)
유럽의 군주 중 황제나 왕과 달리 교황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한 소군주의 경우에는 프린스로 불렸다. 프린스라는 말은 로마 시민의 제1인자라는 의미의 라틴어 "프린켑스(princeps)"에서 유래하였다. 프린켑스는 본래 원로원의 최연장자에서 붙이는 존칭이었으나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된 이후로 황제에게만 사용되던 것에서 프린스가 군주를 뜻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군주로서 프린스라는 말은 한국어로 대공이나 공작으로 번역한다. 현재까지 프린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로는 모나코와 리히텐슈타인, 안도라 등이 있다.
참고로 왕위계승 후보자들도 프린스의 호칭으로 불렀는데 이것이 한국어로는 왕자로 번역되었다. 특수하게 영국에서는 AD 1282년 에드워드 1세가 웨일즈를 정복한 뒤 웨일즈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자신의 차남인 에드워드 2세에게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라는 작위를 부여하였는데 후일 에드워드 2세가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왕세자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작위를 부여받는 전통이 생겼다. 이 때문에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웨일스 공이 아니라 영국 왕세자로 번역한다. 비슷한 사례로 스페인의 왕세자도 '아스투리아스 공(Príncipe de Asturias)'으로 불리고 있다. 그 밖에 여왕이나 여제의 남편에게 프린스의 호칭이 부여되기도 하였다.
- 선제후(Kurfurst)
일반적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 선출권을 보유하였던 제후들을 지칭한다. 황제 선거를 둘러싸고 분쟁이 계속해서 발생하자 AD 1198년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독일의 3명의 대주교(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와 라인강의 중요한 제후인 라인 팔츠백의 동의없이 황제가 선출될 수 없음이 선언되었다. AD 1257년부터는 작센 공작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추가되었고 AD 1289년 보헤미아 왕에게 마지막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AD 1356년 카를 4세의 금인칙서를 통해 7명의 선제후의 자격이 성문화되었는데 완전한 영지 지배권이 부여되었으며 선제후에 대한 공격은 반역과 동일하게 취급받았다. 이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를 대공과 동급으로 취급한다.
- 오스트리아 대공(독일어: Erzherzog, 영어: Archduke)
오스트리아 대공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4세가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와 동등한 지위가 되도록 5통의 특허장과 2통의 편지를 위조하고 스스로 대공을 자처하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루돌프 4세의 장인이었던 카를 4세가 문서위조를 밝히고 대공 칭호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루돌프 4세의 아내이자 카를 4세의 딸인 카타리나의 부탁에 따라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못했다. AD 1453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선출되자 루돌프 4세의 특권이 추인되었고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에게 오스트리아 대공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 합법화되면서 새롭게 귀족 작위로 추가되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대공은 프리드리히 3세의 자손에게만 이어지는 특별한 작위이며 다른 대공의 작위가 장자에게만 상속되는 것과 달리 오스트리아 대공 작위는 프리드리히 3세의 자손이라면 누구나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