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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이탈리아 반도 정복, 제1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

Jobs 9 2021. 5. 13.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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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왕정

 

로마는 전설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 전쟁에서 패배한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한 뒤 그의 손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 BC 753년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7세기경 팔라티누스 언덕에서서 조그마한 도시국가로 출발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초기 로마는 로물루스, 누마 폼필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앙쿠스 마르키우스의 4명의 왕이 차례로 통치한 후 BC 550년 경부터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에트루리아인에게 직접 통치를 받았다. 에트루리아 왕조는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세 명의 왕으로 이어지며 로마의 초기문화의 근간을 제공하였으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폭정을 못이긴 로마 시민의 반란으로 BC 509년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 로마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 형태로 변화하였다. 

 

 

공화정의 등장과 이탈리아 반도 정복

 

로마는 내부적으로 귀족과 평민 간의 내부분란을 극복하면서 특유의 공화정 체제를 발전시키는 사이에 대외적으로는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보병을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가장 먼저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라티움 족과의 라티움 전쟁(BC 340년 ~ BC 338년)을 통해 라티움 동맹을 해체하고 각 영토를 모두 정복했다. 다음으로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에 거주하던 산악부족인 삼니움 족과는 3차례의 전쟁(BC 343년 ~ BC 341년, BC 316년 ~ BC 304년, BC 298년 ~ BC 290년)을 벌여 일부 고전하기도 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중부 이탈리아 전체가 로마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왔다. 

 

이후 이탈리아 남부로 시선을 돌려 BC 280년 이탈리아 남부의 타란툼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에 타란툼이 그리스의 에페이로스 왕인 피로스에게 원조를 요청하면서 피로스 전쟁이 발발하였고 비록 헤라클레이아 전투와 아스쿨룸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에페이로스군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결국 철군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전투에서 이겼으나 그만큼 손실도 많이 입어 패전과 다름없는 승리라는 의미로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이 유래하게 된다. 피로스의 에페이로스군이 철군하면서 타란툼도 더이상 로마에게 저항하지 못하면서 이탈리아 남부도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로마는 BC 272년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한 동맹 체제를 만들어 내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재패하게 되었다.

 

공화정 체제 발전
 
로마 공화정
로마는 초기에 왕정을 유지하였고 원로원의 자문을 받았다. 로마 역시 그리스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민회가 존재했으며 '쿠리아회(comitia curiata)'라고 불렸다.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시작되면서 선출된 집정관(Consul) 2명이 왕의 권력을 이어받았고 법무관(Praetor), 안찰관(Aedilis), 재무관(Quaestor) 등의 보좌를 받았다. 정무관은 임기가 1년으로 제한되었고 모두 민회에서 선출되었다. 다만 주요한 의사결정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로마 원로원과 민회를 거쳐야 했다. 특히 로마의 관직은 경력과 나이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재무관, 안찰관, 법무관, 집정관 순으로 공직을 역임하게 되는 데 이를 두고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 명예로운 경로)'라고 불렀다.


정무관
① 재무관(Quaestor, 콰이스토르)은 집정관이나 군단 지휘관, 속주 총독을 보좌하여 재정과 회계업무를 담당하는 직책으로 연령 제한이 30세로 제일 낮아 가장 먼저 진출하는 공직이 되었다.
 
② 안찰관(Aedilis, 아이딜리스)은 도로와 공중 목욕탕 관리와 같은 일반 행정업무, 식량 공급, 축제와 각종 경기 계획 및 운영, 경찰권 행사 등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고 정무관 중 유일하게 귀족 출신 2명, 평민 출신 2명으로 신분을 구별하여 재무관 출신으로 36세 이상의 후보자 중에 선출했다. 
 
③ 법무관(Praetor, 프라이토르)은 이름 그대로 재판을 담당하는 직위로서 로마 공화정에서 집정관 다음의 최고 지위였다. 법무관은 집정관이 전쟁 등으로 부재시 내정을 총괄하고 소규모 전투의 경우에는 집정관을 대신할 수 있는 군단 지휘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정관과 함께 임기를 마친 후 속주 총독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관직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중요한 관직이었기 때문에 재무관과 안찰관을 역임한 경력과 나이가 39세 이상으로 자격요건이 필요했다.
 
④ 집정관(Consul, 콘술)은 왕을 대신한 최고 통치권자로서 2명이 한달씩 교대로 집무를 보았다. 필요에 따라 로마 원로원과 민회를 소집할 수 있었고 유사시 군단 지휘권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정무관인 재무관, 안찰관, 법무관을 모두 역임한 후에 집정관에 입후보할 수 있었고 나이도 40세 이상으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로마의 영토가 확대된 후에는 임기를 마친 집정관이 전직 집정관(Proconsul)이 되어 군단 지휘관에 버금가는 자격요건이 요구되는 속주 총독이 될 수 있게 된다. 
 
⑤ 감찰관(censor)은 집정관을 마쳐야만 선출될 수 있는데 본래 5년마다 이루어지는 인구조사를 위해 선출되었으나 점차 공중도덕 감찰, 재정 감독, 공공 사업 계약서 작성 등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권한이 점차 강화되었다. 
 
⑥ 마지막으로 전쟁과 같은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재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모든 권한이 1명에게 집중되는 독재관이 임시직으로 임명되었다. 독재관은 2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이 임명할 수 있었고 그 권한이 너무 막강하여 임기가 6개월로 제한되었다.


원로원과 민회 
이렇게 정무관들이 통치를 담당했지만 주요한 의사결정은 원로원과 민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로마 원로원은 왕정 시절 씨족의 장로로 구성되어 왕의 자문을 맡았던 기관으로 공화정이 된 이후에도 집정관에 대한 자문을 맡았으나 나중에는 원로원 의결이 법률적인 효력을 가지면서 입법기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임기 만료된 정무관이 자동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면서 점차 최상급 신분집단으로 취급되기 시작했고 정무관 선거 때문에 자동적으로 연령과 재산의 제한까지 생겼다. 민회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시민이 참석하는 의사결정기구였지만 가부를 결정하는 투표 이외에 다른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다.

호민관과 평민회
본래 로마 공화정은 귀족들이 통치권한을 균등하게 분담하는 과두정 형태를 띄었으나 직접 무장하고 중장보병으로 참여하는 평민들의 발언권이 강화되면서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호민관(tribunus)이 등장하게 되었다. 평민회에서 선출된 호민관은 처음에는 2명이었으나 나중에는 10명까지 늘어나게 된다. 호민관은 집정관과 같은 정무관들은 물론 다른 호민관의 결정조차도 평민의 권익을 해칠 경우에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다른 정무관과 마찬가지로 민회에서 법률을 발의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또한 BC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에 의해 호민관은 평민회 의결을 통해 로마 원로원의 승인없이도 법률을 반포할 수 있는 권한도 얻게 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의 성장 

 

카르타고는 과거 지중해 해양무역으로 담당하던 페니키아 계열의 도시로서 BC 814년경 현재의 북아프리카의 튀니스 북쪽 연안에 세워졌다. 카르타고는 비옥한 경작지를 보유하면서도 지중해를 통한 해상무역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농업 중심 세력과 상업 중심 세력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BC 600년경부터 서지중해의 무역권을 차지한 상업 중심파가 정부를 장악하기 했고, 코르시카 섬, 사르데냐 섬,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 등으로 진출하였으며 시칠리아 섬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하였다. 카르타고의 정치체제는 전형적인 과두정이었고 일반 시민들은 상업에 종사하는 대신에 전쟁은 고용한 용병들에게 맡겼으며 해상 무역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군대도 육군보다는 해군이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로마와는 많은 면이 달랐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전개

 

전쟁의 원인

전쟁의 발단은 이탈리아 반도 남단의 시칠리아 섬에 대한 지배권 다툼 때문이었다. 당시 시칠리아는 카르타고가 절반을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메시나와 시라쿠사가 전쟁 중이었다. 시라쿠사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메시나는 로마로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로마는 시칠리아 섬을 장악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하였다. 로마는 상륙과 동시에 메시나와 동맹을 맺어 자신의 세력하에 두고 시라쿠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시라쿠사도 처음에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강력한 로마 육군이 시라쿠사와 카르타고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도시를 포위하자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은 로마와 강화를 맺었다. 

 

이렇게 되자 곤란해진 것은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는 내전을 틈타 시칠리아 전체를 장악할 생각이었으나 아직은 신흥국인 로마를 얕보고 시칠리아 섬에 주둔한 병력 만으로 로마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원부대를 천천히 출발시켰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신속한 로마군의 진군으로 메시나와 시라쿠사가 로마 세력하에 들어가고 말았고 카르타고는 뒤늦게 증원군을 파견하여 로마군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여 시칠리아 내전은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불리게 되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포에니'라는 말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가리킨다.

 

 

전쟁의 전개 모습

본래 로마는 농경민족으로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만 전투를 벌여왔기 때문에 육군이 강했고 카르타고는 해상무역이 왕성하여 해군이 강했다. 이런 이유로 제1차 포에니 전쟁 초기에 벌어진 육전은 모두 로마의 승리로, 해전은 카르타고의 승리로 돌아갔다. 시칠리아는 섬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도시가 해안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육전만으로는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마는 카르타고가 장악하고 있던 아그리젠토의 점령을 계기로 해군력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족한 해전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고심 끝에 코르부스(corvus, 일명 까마귀 배)를 탑재한 배를 만들게 되었다. 코르부스는 해전시 적함에 최대한 접근시 두 군함사이에 걸쳐놓을 수 있게 만든 잔교로서 선상전투를 용이하게 만들면서 이제 로마군은 해전을 육전으로 바꾸며 손쉽게 적함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는 코르부스를 이용하여 BC 260년 시칠리아 북안의 해전에서 처음으로 카르타고 해군에게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여세를 몰아 로마는 BC 256년 230척의 대함대를 거느리고 카르타고 본토를 침공하여 해전에서 다시 한번 대승을 거두고 카르타고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카르타고도 육군을 강화시키기 위해 고용한 스파르타 출신 크산티푸스가 전투 코끼리 100마리를 포함한 대군을 지휘하면서 로마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로마는 살아남은 병사들을 데리고 후퇴하였고 해전에서 다시 한번 카르타고군을 물리쳤으나 폭풍우로 수많은 병력을 잃고 말았다. 로마로 돌아간 병력은 전체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전장으로 다시 시칠리아 섬으로 옮겨졌고 자신감을 회복한 카르타고는 전투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시칠리아 장악에 나섰다. 비록 잠시 로마의 반격에 성공하여 카르타고가 점령하고 있던 팔레르모를 함락시켰지만 BC 253년 로마는 또다시 폭풍우로 수많은 병력을 잃었고 육전에서도 전투 코끼리의 위압적인 모습에 로마 병사들이 겁을 먹으면서 전황이 극도로 로마에게 불리해져만 갔다. 하지만 팔레르모를 지키고 있던 집정관 루시우스 카에실리우스 메텔루스가 깊은 참호와 경보병의 투창을 이용하여 전투 코끼리 부대를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하여 육전에서도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로마의 최종 승리

카르타고가 팔레르모 탈환에 실패하면서 이제 카르타고 세력 하에 있는 시칠리아의 도시는 마르실라와 트라파니 뿐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BC 249년에는 카르타고 해군이 로마 해군에게 오랜만에 승리를 거두었고 BC 247년에는 사령관으로 파견된 하밀카르 바르카가 뛰어난 용병술로 로마군을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하밀카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주역 이 되는 한니발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농업 중심파와 상업 중심파의 국론분열로 하밀카르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보내지 못했고 이에 하밀카르는 전면전을 포기하고 게릴라전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은 결국 BC 241년 트라파니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에서 로마가 대승을 거두면서 끝이 났다. 이후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수복할 힘을 사실상 잃었고 강화조약을 통해서 로마에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반면에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최종승자가 되면서 거액의 배상금과 함께 최초의 목적인 시칠리아 획득에 성공하였고 그 주변의 사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까지 중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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