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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s 9 2021. 5. 1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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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암살

이제 명실상부하게 로마의 1인 지배자가 된 카이사르에게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이 부여되었다. 카이사르는 각종 사회정책(식민·간척·항만·도로건설·구제사업 등)을 추진하고 달력을 율리우스력으로 개정하는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BC 53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인에게 당했던 참패를 당했던 카르하이 전투를 설욕하고자 대규모 원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카이사르 반대파를 자극했다. 카이사르에게 이미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많은 사람들이 왕위를 탐내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또다시 엄청난 군사적 명성을 얻게 된다면 카이사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결국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앞세워 BC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장에서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만다.

 

카이사르가 죽은 다음날인 3월 16일에 암살자의 대표인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의 정당성을 호소했으나 성난 카이사르파 군중들에게 공격당했다. 이때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공개했는데 유언장에는 당시 18세인 카이사르의 조카, 옥타비아누스가 제1후계자로 지목되어 있었고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또 다른 브루투스인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제2후계자로 적혀 있었다. 군중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암살파와 카이사르파는 종신독재관 지위를 제외한 나머지 카이사르의 정책은 모두 그대로 이어받기로 합의하였고 3월 18일 카이사르는 화장되었다. 그러나 유해는 때마침 내린 비에 모두 씻겨 내려갔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무덤조차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카이사르는 역사 속에서 퇴장하고 이제 로마는 카이사르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약관의 소년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를 주목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의 내전과 로마 제정의 시작

BC 43년경 로마의 세력 현황  (옥타비아누스: 보라색 / 안토니우스: 녹색 / 레피두스: 갈색 / 마르쿠스 브루투스: 붉은색)

옥타비아누스의 등장과 제2차 삼두정치의 성립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후계자로 갑자기 언급된 옥타비아누스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에퀴테스(기사) 계급 출신으로 그의 어머니가 바로 카이사르의 조카딸인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였다.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는 그가 네살에 불과했던 BC 59년에 사망했고 얼마 뒤 어머니가 시리아 속주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하면서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인 옥타비아와 함께 카이사르의 누나이자 자신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카이사리스에게 양육이 맡겨졌다. 옥타비아누스는 12살이던 BC 51년에 외할머니마저 사망하면서 카이사르가 후견인이 되었다. 

 

BC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당시에 옥타비아누스는 19세의 나이로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 유학 중이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자신이 제1상속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케도니아로 피신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대담하게도 로마로 귀국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남긴 재산의 3분의 2를 상속받는 것보다 카이사르의 정치세력을 이어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카이사르의 측근 조차도 옥타비아누스를 카이사르가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어쨌든 유언장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이름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바뀌었다. 

 

로마에 돌아온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아무런 정치적 기반도 없고 능력에 대한 검증도 부족했지만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그가 카이사르가 지목한 후계자라는 사실만으로 열렬히 지지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자금을 자신의 세력을 넓이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대담하게도 동방 속주에서 보내온 세금도 가로채어 카이사르의 병사들에게 나누어지면서 그들의 환심을 샀다. 이로서 19세의 풋내기에 불과했던 옥타비아누스가 어느덧 카이사르가 남긴 막대한 자금력과 병력을 모두 이어받은 세력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세력 확대와 안토니우스와의 분쟁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세력을 서서히 넓히고 있던 사이 로마는 카이사르 암살의 정당성을 두고 정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카이사르 암살파는 카이사르가 왕이 되려 했다는 점을 강조하였지만 카이사르의 부하이자 카이사르와 함께 BC 44 공동 집정관직을 수행 중이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암살범들의 주장을 반박하였고 카이사르의 장례식에서 복수를 외쳤다. 여기에 많은 로마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여론이 역전되었고 이미 로마 원로원이 카이사르 암살범들을 특별 사면한 상태였으나 암살범들의 신변이 불안해졌기 때문에 숨어지내야 했다. 로마 원로원은 주요 암살범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는 가리아 키살피나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마케도니아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시리아로 각각 속주 총독 자격을 부여하여 로마를 떠나가도록 조치했다. 

 

안토니우스는 BC 44년 6월 자신의 집정관 임기종료 후 갈리아 코마타 및 갈리아 키살피나의 5년 임기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전횡이 심해지자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격렬히 비난하기 시작했고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반대했기 때문에 민심도 잃었다. 더욱이 어리다고 무시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가 새롭게 부상하여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군대를 모두 차지해 버렸다. 이렇게 점점 로마 안에서의 입지가 좁아지고 집정관 임기로 거의 만료되어가자 안토니우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이탈리아 가까이에서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빼앗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무티나를 포위했다. 이에 로마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의 군사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BC 43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가이우스 판사 및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도록 하였다. 또한 카이사르의 옛 군대로부터 인심을 얻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줄 좋은 기회로 여기고 이에 응했다. 

 

로마 원로원은 아무런 공직 경험이 없던 옥타비아누스를 BC 43년 1월 1일부로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고 추가로 군사지휘권도 부여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판사 및 히르티우스와 함께 출병하였고 BC 43년 4월에 벌어진 포품 갈로룸 전투와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격파하여 안토니우스가 도망치게 만들었다. 다만 전투 도중에 2명의 집정관 모두 전사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포위에서 벗어난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전사한 두 집정관의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넘기도록 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거절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비록 안토니우스와 전투를 벌였지만 자신은 카이사르의 암살범을 도울 생각은 없다며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홀대하였고 단독으로 안토니우스를 추격하라고 냉담하게 말했다. 결국 병사들 역시 카이사르의 암살범을 따를 수 없다며 버티자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절망하여 마케도니아를 목표로 달아났지만 도중에 안토니우스의 편에 섰던 갈리아 부족에게 붙잡혔고 안토니우스의 명령에 의해 처형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 암살범 중 최초의 처형자가 되었다. 

 

 

제2차 삼두정치 체제 구축과 반 카이사르파 토벌

 

데키우스 브루투스가 사라지자 옥타비아누스는 전사한 두 집정관의 군대를 흡수하였고 로마 원로원에게 공석이 된 집정관의 권한까지 요구하였다. 그리고 로마 원로원이 이를 거절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직접 8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에 입성하여 행진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BC 43년 8월 19일 친척인 퀸투스 페디우스와 함께 공석이 된 집정관 자리에 선출되었다. 한편 도망친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히스파니아의 속주 총독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게 몸을 의탁했는데 레피두스는 일찍이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의 내전 중에 로마의 통치를 맡겼을 정도로 카이사르가 신임하던 사람이었다. 레피두스의 도움으로 안토니우스는 패잔병을 수습하였고 이에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 군대를 합쳐 거대한 세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대립하고 있던 시기에 카이사르 암살범인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그리스에서 병사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및 레피두스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여 BC 43년 11월 보노니아(지금의 볼로냐)에서 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회담을 통해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 안토니우스는 그 옛날 카이사르가 조직했던 제1차 삼두정치를 모방한 제2차 삼두정치 동맹을 5년 기한으로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제1차 삼두정치가 비밀리에 조직되어 운영된 것에 반해 제2차 삼두정치는 민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조직으로 인정받았다. 이제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재건을 위해 원로원과 민회의 승인없이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초법적인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제2차 삼두정치를 통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로마에서 반대파를 숙청하는 한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공동으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레피두스는 배후에서 로마 본국을 관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로마 원로원 의원 300명과 에퀴테스 2,000명을 국외로 추방하거나 숙청하였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격렬히 공격했던 키케로를 살해하며 개인적인 복수도 달성하게 된다. 그리고 몰수한 자금을 이용하여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상대할 군대를 편성하였고 공석이 된 로마 원로원 의원자리는 각각 자신들의 지지자들로 채웠다. 이렇게 새로 구성된 로마 원로원은 BC 42년 1월 1일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선포하였고 이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로 격상되는 부수이익을 얻었다. 

 

BC 42년 10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28개의 군단을 이끌고 그리스의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기 위해 아드리아 해를 건너가면서 필리피 전투가 벌어졌다. 필리피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군대를,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의 군대를 각각 상대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전투에 있어서는 백전노장인 안토니우스의 활약이 대단하여 10월 3일 벌어진 첫번째 전투에서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군대의 기습에 옥타비아누스가 패배하였지만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의 군대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카시우스는 자결하였고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진영에 틀어박히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20일 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협공에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진영도 무너졌고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자결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카이사르의 암살범이 모두 사라졌고 이제 로마의 권력을 놓고 벌이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이 시작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

 

필리피 전투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새로운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안토니우스는 갈리아를,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 반도와 히스파니아를,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 속주를 통치하도록 합의되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옛 연인인 클레오파트라 7세가 반 카이사르파를 지원했다는 혐의로 소환하였지만 곧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에 빠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아예 눌러 앉아 버렸다. 그러던 중 BC 40년 초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안토니우스의 세번째 부인인 풀비아가 공모하여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는 일이 벌어졌고 옥타비아누스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공모한 혐의로 로마 원로원 의원 300명을 대거 숙청해버렸다. 이때 죽은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해적단을 조직하여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이탈리아 반도로 향하는 식량수송을 방해하고 있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의 외손녀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넘기는 조건으로 휴전을 맺었다.

 

이집트에 머물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자신의 동생과 부인이 축출되고 자신의 파벌 사람들이 대거 숙청된 사실과 옥타비아누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굴욕적인 휴전을 맺었다는 사실에 분노하였다. 이때 오리엔트 지방에서 파르티아 제국이 로마의 시리아 속주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지만 안토니우스는 먼저 옥타비아누스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 역시 이탈리아의 브룬디시움에 병력을 집결시켰지만 내전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우려한 양 군의 백인대장들도 종군을 거부하였다. 때마침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풀비아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인 옥타비아와 재혼하는 조건으로 극적인 화해가 성사되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 속주를 다시 나누기로 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서방 속주를, 안토니우스가 시리아를 비롯한 동방 속주를 통치하는 대신에 레피두스에게는 북아프리카 속주가 그대로 맡기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토벌과 제2차 삼두정치의 붕괴

 

BC 38년 1월 옥타비아누스는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리비아와 재혼하였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부하 중 한 명이 옥타비아누스 측으로 전향하여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넘기는 일도 일어나면서 옥타비아누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사이의 휴전이 깨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많은 해군을 보유한 안토니우스의 협력이 필수적이었고 안토니우스 역시 카이사르의 유업인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옥타비아누스의 병력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측은 타란툼에서 만나 BC 38년으로 기한이 종료되는 제2차 삼두정치 체제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함 120척을 제공하는 대신에 옥타비아누스는 2만명의 병력을 안토니우스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옥타비아누스가 약속했던 병력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2천명 밖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사이가 다시 나빠지게 된다.

 

BC 36년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까지 끌어들여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비록 군사적 재능이 부족한 옥타비아누스가 고전하였지만 카이사르가 일찍이 옥타비아누스에게 군사 자문으로 붙여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나우로쿠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대활약을 보이면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세력은 몰락하였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자신도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거점으로 삼았던 시칠리아를 두고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가 대립하였지만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의 군대를 돈으로 매수하여 오히려 레피두스를 몰락시켜 버렸다. 이후 레피두스는 세력을 잃은 채 허울뿐인 최고 제사장 지위만 유지한 채 강제로 은퇴해야만 했고 이로서 제2차 삼두정치 체제의 한 축이 무너지고 이제 로마의 패권을 두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본격적인 대결이 불가피해지게 되었다.

 

 

 

최후의 대결, 악티움 해전

악티움 해전

옥타비아누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상대하는 동안 안토니우스는 야심차게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기대했던 만큼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고 그 자신의 작전 실패도 겹치면서 파르티아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연인이 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이집트의 도움으로 군사를 다시 보충하였고 이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한 후 로마로 돌려보내고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였다. 비록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 7세의 힘으로 군대를 재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인 배우자를 부정하고 동방의 정부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선동하면서 안토니우스의 로마 내 인기가 매우 추락하였다. 

 

BC 34년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를 정벌하고 자신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삼았고 클레오파트라 7세에겐 ‘왕들의 여왕’이란 호칭을 부여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에 더이상 충성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고 이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인기는 더욱 떨어졌다. 결정적으로 안토니우스의 비밀 유언장을 보관 중이던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에게 유언장을 공개하도록 강요하였는데 그 유언장에는 로마가 정복한 영토를 자신의 아들들에게 나누어 줘 왕이 되도록 하고 장래 자신과 클레오파트라 7세의 무덤은 알렉산드리아에 호화롭게 건설하라고 되어 있었다.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버렸다고 생각한 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안토니우스의 BC 34년 집정관 지위도 박탈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있는 이집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BC 31년 초 아그리파의 함대가 로마군을 수송하여 아드리아 해를 성공적으로 횡단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곧 벌어질 큰 전투의 예비 단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을 받은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본대를 그들의 해상 보급 경로에서 차단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코르푸 섬 맞은편에 위치한 본토에 도착,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바다와 땅 모두에서 막히자 안토니우스군 내부에서 탈영병이 발생하여 계속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였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해상 차단 해제를 기도하기 위해 그리스 서쪽 해안의 악티움만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아그리파와 가이우스 소시우스의 함대가 있었는데 안토니우스의 함대보다 수는 많지만 더 작고 조종하기 더 쉬운 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BC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발발하여 옥타비아누스군이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안토니우스의 죽음과 내전의 종식

 

안토니우스와 남은 군사들은 근처에 기다리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함대가 막판에 노력한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을 추격하였고 BC 30년 8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자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살하였는데 독사가 클레오파트라 7세를 무는 사이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칼로 몸을 찌르고 클레오파트라 7세의 팔 쪽으로 쓰러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후 알렉산드리아에 보존되어 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해를 참배했는데 그때 만진 코가 일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다른 왕들의 유해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나는 시체가 아니라 왕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잘 이용하여 크게 성공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활용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명의 카이사르가 있으나 하나로 족하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훗날의 정치 인생을 위해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이들은 살려주는 대신에 카이사리온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독립국가로서의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막을 내렸고 이제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막대한 보물을 압수하여 병사들에게 나누어주면서 그들의 변함없는 충성을 얻어냈고 이후 풍요로운 이집트를 자신의 개인 소유로 삼으면서 막대한 경제적 기반도 얻게 된다.

 

 

 

로마 제정의 시작

 

프린켑스의 지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비공식적이지만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는 내전의 최종 승리자로서 로마 군단의 절대적인 지지와 이집트를 비롯한 막대한 부를 손에 넣고 있었고 신격화된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후광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로마는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공화정이었고 로마 시민은 왕정이나 독재관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술라는 독재관이 되어 무자비한 대숙청을 통해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면서 은퇴 후에도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술라가 구축한 로마 원로원 중심의 통치 제도는 이미 거대한 제국이 된 로마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이 때문에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되어 로마 원로원의 힘을 누르고 효율적인 통치체계를 갖추고자 했지만 반대파를 숙청하지 않고 그대로 포용하면서 결국 암살당하고 말았다. 옥타비아누스도 술라가 추구한 로마 원로원 중심의 과두제의 한계를 잘 알았지만 카이사르처럼 암살당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원하는 것들을 맞춰가며 차근차근 권력을 손에 넣고자 하였다. 

 

먼저 옥타비아누스는 독재관의 지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내정의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BC 31년부터 BC 28년까지 8년간 해마다 집정관의 자리를 맡으며 권력을 독점했다. 8년 연속 집정관의 연임은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가리우스 마리우스도 5년 연속 집정관을 연임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아우구스투스는 내전 당시 소유한 로마 군단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고 금화와 은화의 발행권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가 왕위에 오르려는 것은 아닌 지 전전긍긍했지만 현실적으로 옥타비아누스의 권력을 무너뜨릴 힘이 없었다. 다만 BC 29년 로마 원로원은 '로마 제1시민(princeps civitatis)'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는데, 흔히 프린켑스라고 알려진 이 칭호는 로마 원로원 중 높은 위신과 덕망을 지닌 원로의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부여하던 명예직에 불과한 것이었다. 로마 원로원으로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왕이 아닌 로마의 시민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여한 것이었으나 로마 공화정의 껍데기는 유지한 채 사실상 제정을 추진하던 옥타비아누스는 '프린켑스'라는 칭호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아우구스투스 등극

BC 27년 옥타비아누스는 갑자기 이제 내전이 종결되고 그 혼란이 수습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다시 명목상으로는 이전의 공화제로 회귀한 것처럼 보였으므로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vgvstvs)"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BC 23년까지는 집정관의 자격으로, 그 이후에는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여전히 로마 군단의 최고지휘권을 보유하였고 로마 공화정의 개선장군에게 부여하던 호칭인 '임페라토르(Imperator)'를 카이사르가 독점하던 사례를 이어받아 그 역시 독점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군단의 총지휘권이 있으므로 로마 군단이 거두는 모든 승리의 영예가 옥타비아누스로 향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개인의 소유가 된 이집트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걷어 들이면서 로마 제일가는 부자이기도 하였고 이를 이용한 금화와 은화의 화폐 발행권도 반납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종종 자비를 털어서 공공건물과 가도를 건설하고 도로를 유지 보수하였으며 그 사실을 화폐에 새겨서 선전하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지니고 있던 또 다른 권력은 로마 속주 총독에 대한 임명권이었다. 본래 로마 속주 총독은 로마 원로원이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내전 종결 직후 로마 원로원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킬리키아, 키프로스, 이집트처럼 지리적으로 멀고 로마에게 점령당한 지 얼마되지 않은 속주에 대해서는 대규모 로마 군단이 주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군통수권을 장악한 옥타비아누스에게 10년 기한으로 통치를 위임하였다. 이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이들 속주에 대한 총독을 임명권을 가지게 되었고 속주 총독의 권한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유지하고 외국과의 선전포고와 강화를 자신의 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대신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주요 식량공급처였던 아프리카 속주를 비롯하여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시칠리아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에 대해서는 로마 원로원이 여전히 총독을 임명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마찰을 피했다. 이러한 속주 총독 임명권의 구분은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자연스럽게 기한이 갱신되면서 이후 '황제령 속주'와 '원로원령 속주'로 구분되는 것이 고착화되었고 옥타비아누스의 중요한 권력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옥타비아누스의 지니고 있는 권력은 대부분 기존 로마 공화정에 존재하던 합법적인 권한에 기초한 것이었으나 예외적으로 BC 23년 집정관직을 더이상 수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대신에 호민관 특권만 추가적으로 요구하였다. 호민관은 평민 출신만 출마할 수 있는 직책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귀족이 되었기 때문에 자격이 없었지만 본래 옥타비아누스가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졌다. 호민관 특권에 따라 신체불가침을 인정받아 옥타비아누스를 공격하는 것으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고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과 다른 호민관이 내린 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지니게 되었으며 민회와 평민회, 로마 원로원을 소집하고 법률도 발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밖에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 경력자로서 풍기 단속과 정무관 감찰, 인구 조사와 같은 감찰관으로서의 역할도 부여받았는데 로마 역사상 단 한명이 감찰관과 호민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적이 없었다. 

 

 

로마 제정의 시작

 

비록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모든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공화제가 유지되고 있었고 옥타비누스는 법률상 직책은 명예직에 불과한 로마 원로원의 프린켑스 지위 뿐이었다. 다만 BC 12년 최고 제사상이었던 레피두스가 사망하자 그 후임자가 되면서 최고 제사장이 되었는데 최고 제사장은 종신직이고 단 1명만 선출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상징성이 매우 컸지만 여전히 명예직이었다. 하지만 신격화된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로마 원로원의 프린켑스로서 옥타비아누스의 발언은 가장 큰 권위를 지녔고 호민관 특권을 이용하여 로마 원로원의 결정을 거부하고 민회를 소집하여 법률과 칙령을 반포할 수 있었으며 BC 19년부터는 집정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식석상에서 집정관의 상징을 사용하고 두 집정관 사이에 앉을 수 있는 권리도 부여받았다. 또한 여전히 임페라토르로서 로마 군단에 대한 최고지휘권을 보유했고 황제령 속주에 대한 총독 임명권을 보유하였으며 호민관 특권에 따라 신체불가침이 법률적으로 보장되었다.

 

이처럼 옥타비아누스는 황제로서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으나 여전히 프린켑스였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가 구축한 통치체계를 '원수정(Principatus; 프린키파투스)'라고 부르지만 실질적으로는 '제정'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공식적인 칭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Avgvstvs)"였고 이 칭호를 대대로 옥타비아누스의 후계자들이 이어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황제'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임페라토르(imperator)'는 영어의 "엠퍼러(emperer)', '카이사르(Caesar)'는 독일어의 '카이저(Kaiser)'와 러시아어의 '차르(tsar)'의 어원이 되며 모두 황제를 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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