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급격한 영토 확대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BC 264년부터 BC 146년까지 3차례 포에니 전쟁을 벌였고 동시에 마케도니아와도 BC 215년부터 BC 168년까지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으며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와도 BC 192년부터 BC 188년까지 시리아 전쟁을 벌였다. 이 모든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로마는 이탈리아 서남단의 시칠리아(BC 241년 속주편입), 이탈리아 서쪽의 지중해 섬인 코르시카와 사르데냐(BC 231년 각각 속주편입), 이베리아 반도의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와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BC 197년 각각 속주편입), 발칸반도 서북부의 옛 일리리아 지역인 일리리쿰(BC 167년 속주편입), 그리스에 해당하는 마케도니아-아카이아(BC 146년 속주편입), 북아프리카의 옛 카르타고 지역인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BC 146년 속주 편입)를 속주로 삼으면서 그 영토가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로마의 영토확대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동쪽으로는 시리아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한 대가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났던 페르가몬 왕국은 BC 133년 마지막 왕인 아탈로스 3세가 자신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로마에게 페르가몬을 양도하면서 BC 129년 로마의 아시아 속주가 편입되었다. 또한 서쪽으로는 지금의 남프랑스의 랑그도크루시용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 BC 120년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 트란살피나가 되었다. 남쪽으로도 자마 전투 직전에 로마와 동맹을 맺어 로마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왕국도 BC 148년 여러 개로 분할된 채 각 부족장이 다스리는 형태로 로마의 보호령이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좌절
이렇게 하여 로마의 영토는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서로는 이베리아 반도, 남으로는 북아프리카, 동으로는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지역까지 이르며 지중해를 내해로 삼을 정도로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오히려 로마시민의 삶 자체는 점점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로마 시민들은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전쟁이 장기간 이루어지면서 그동안 자신의 생업을 포기해야만 했으나 막상 로마에 되돌아와서도 속주에서 들어온 값싼 곡물 때문에 오히려 경쟁력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몰락한 자영농들이 로마 시내로 흘러들어와 빈민층을 이루면서 사회문제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로마군은 시민들이 장비를 스스로 구입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일정규모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만 병역의무가 있었으나 자영농의 몰락으로 병역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로마는 병역의무를 부과하는 재산의 상한선을 계속 낮추면서 병력 숫자를 유지하고자 하였지만 이 때문에 장비의 질적 저하가 이어졌다.
BC 133년 호민관이 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빈민층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신체불가침의 호민관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살해당하고 말았다. BC 12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으로 선출되면서 형의 실패한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형의 토지개혁이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키자 이번에는 해외에서 수입한 밀을 싼 값에 빈민층에게 제공하는 '곡물법', 해외 속주에 빈민층을 이주시켜 토지를 제공하는 '식민법'을 적극 추진하였고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새롭게 대두된 중간계급인 '에퀴테스(기사) '에게 속주에 대한 징세외 재판의 배심원을 전담시키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은 점진적으로 교묘하게 이루어지면서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지만 이번에도 보수적인 원로원과 귀족들의 반대에 밀려 최종적으로 개혁은 실패하고 가이우스 그라쿠스 자신도 살해당했다.
이렇게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좌절되고 오히려 불법적으로 살해되자 이에 분노한 로마의 평민들은 호민관과 평민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파(populares, 포풀라레스)'라는 정치세력이 되어 기존의 원로원과 귀족들로 구성된 '벌족파(Optimates, 옵티마테스)'와 대립하면서 로마는 심각한 사회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에퀴테스라는 중간 계급도 성장하였는데 에퀴테스는 초기 로마에서 자신의 비용으로 말을 조달하여 기병대를 이루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BC 1세기 경부터 로마군의 기병대를 동맹국으로부터 조달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자 실제로 기병대로 전쟁에 참여하는 일이 없어졌지만 원로원 의원과 평민 사이의 중간계급이 되어 주로 무역과 금융 등의 경제 분야를 담당하며 부를 축적하였고 점차 정치세력화하며 민중파와 벌족파의 중간에 위치하게 된다.
민중파, 마리우스의 집권
빈민층을 지원하려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하였지만 이러한 로마의 문제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의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결책이 제시된다. 마리우스는 귀족이 아닌 에퀴테스 출신으로 당시 상류계층에 필수적인 그리스어 실력도 갖추지 못할 정도로 교양이 부족했지만 힘세고 용감하여 일찍부터 여러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군사적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부족한 교양으로 인해 대중연설 실력이 부족하여 로마의 공직에 진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40세가 넘은 BC 115년이 되어서야 많은 뇌물을 써서 겨우 법무관이 되었다.
이후 마리우스는 뇌물의 죄를 처벌을 받지 않았고 광산 투자가 성공을 거두며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으며 로마의 초기 왕정시대부터 유래한 유력한 씨족인 율리우스 가문의 율리아와 결혼도 하는 등 개인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참고로 율리아는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가 된다. 그리고 BC 113년 북이탈리아의 알프스 산맥 너머에서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처들어오고 BC 111년에는 BC 111년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왕국과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하는 혼란이 발생하자 마리우스는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들어낼 기회를 얻게 된다.
유구르타 전쟁과 마리우스의 집정관 당선
유구르타 전쟁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보호국이 되어 몇 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누미디아의 왕자인 유구르타가 BC 118년 왕위에 오른 뒤 분할된 누미디아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과정에 로마가 개입하면서 일어났다. 로마에서는 유구르타가 누미디아의 서부를, 그의 동생인 아드헤르발이 누미디아의 동부를 각각 분할하는 중재안을 제시하였지만 유구르타는 BC 112년 아드헤르발을 공격하여 누미디아를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로마가 유구르타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유구르타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유구르타가 BC 111년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가 처들어오자 이를 매수하여 유리한 조건을 강화를 맺었다. 그리고 직접 로마를 방문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하였으나 자신이 뇌물을 제공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로마의 여론이 나빠지자 탈출하여 누미디아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유구르타 전쟁이 재개되었으나 BC 110년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의 로마군의 공격이 실패로 끝났고 이듬해 BC 109년 집정관 퀸투스 메텔루스로 지휘관이 바뀌게 되었고 마리우스도 메텔루스를 보좌하는 역할로 유구르타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메텔루스는 정면대결에서는 유구르타에게 잇달아 승리했지만 유구르타가 자신의 장인이자 인접한 마우레타니아의 왕인 보쿠스 1세의 지원을 받아 펼치는 게릴라전에는 고전하였다.
마리우스는 유구르타 전쟁이 장기화되고 그 자신도 메텔루스의 견제로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지 못하자 직접 집정관에 선출되어 유구르타 전쟁의 총사령관이 될 야심을 품었다. 이에 따라 메텔루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BC 108년말에 로마로 귀환하여 유구르타 전쟁을 단시일 내 끝내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집정관에 선출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마리우스의 요청대로 메텔루스의 후임으로 유구르타 전쟁을 맡았고 마리우스와 공동 집정관으로 선출된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비슷한 시기에 알프스 산맥 너머에 등장한 킴브리족을 상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유구르타 전쟁 뿐만 아니라 북쪽의 킴브리 전쟁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바다 건너의 북아프리카보다는 알프스 너머가 더 로마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정예병력 대부분이 롱키누스에게 맡겨졌고 이에 마리우스는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한 군제 개혁에 착수한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로마군은 전통적으로 일정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로마 시민이 자비로 무장을 하고 병사로 종군하는 시민병 형태였고 그 지휘는 1년 단위로 선출되는 2명의 집정관이 교대로 맡았으며 소규모 전투의 경우에는 법무관이 지휘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시도에서 보듯이 저렴한 속주의 공물이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자영농이 대거 몰락했기 때문에 병역 의무를 지는 시민의 숫자가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보유 재산규모를 계속해서 낮추었으나 무장을 자비로 해야했기 때문에 로마군단의 질적 하락이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로마군단의 지휘관을 맡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은 선출직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군사적으로 출중한 인물이라는 보장이 없었고 임기도 1년에 불과하였다. 다만 지휘관의 경우에는 집정관의 임기가 종료되어도 '전직 집정관(Proconsul)'이라는 지위로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였으나 로마 병사는 생업 때문에 1년 이상 종군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되는 경우 1년마다 병사가 교체되는 공백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러한 고질적인 로마군단의 문제점이 누적되면서 이제는 유구르타 전쟁과 킴브리 전쟁 등 주요 전쟁에서 로마군단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었다.
마리우스는 전통적인 로마군단의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고 로마군단의 질적인 문제와 양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군제 개혁에 돌입하였다. 이에 따라 일정 수준의 재산을 가진 로마시민들로 군대를 편성하던 시민개병제를 폐지하고 대신 로마군 지원자격을 무산자로 확대하여 지원자들로만 군대를 조직하는 모병제를 도입하였다. 무기 역시 국가가 지급하는 것으로 하여 일정한 수준의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하였고 종군기간을 25년으로 하여 장기간의 원정이 용이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이전까지 로마 시민의 자랑스런 의무이자 권리였던 병역의무는 사라졌고 대신 로마군도 하나의 직업이 되면서 일정수준의 전투력을 항상 유지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단순히 군사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었으나 부수적으로 오랫동안 로마를 짓누르던 빈민층 구제문제 역시 해결되는 효과를 발휘했다. 병역의무가 사라지면서 빈궁한 중소 자영농들이 생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도심으로 흘러들어온 빈민층에게는 로마 병사라는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이렇게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장기간의 군사원정도 용이하게 하고 빈민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낳았지만 로마군이 더 이상 국가에 충성하기 보다는 자신들에게 많은 전리품을 챙겨줄 수 있는 유능한 장군에 대해 충성하는 것으로 변질되도록 만들어 로마군의 사병화로 이어졌고 이것이 나중에 로마 공화정을 무너뜨리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유구르타 전쟁 승리
마리우스는 이렇게 대폭 증강된 로마군을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향하여 유구르타를 지속적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누미디아의 수도인 키르타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누미디아와 마우레타니아 동맹군과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마리우스가 누미디아군을 상대하는 동안 자신의 군사 재무관으로 참전 중인 젊은 귀족 루키우스 술라에게 마우레타니아군을 맡도록 하였다. 전투가 진행되자 마리우스가 유구르타의 누미디아군과 교착상태에 빠진 동안 술라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보쿠스 1세의 마우레타니아군을 물리친 후 누미디아군을 협공하였다. 결국 유구르타도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였고 마리우스는 누미디아의 수도를 점령하게 되었다.
키르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유구르타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마우레타니아의 보쿠스 1세는 비밀리에 로마와의 우호관계 회복을 시도했다. 이에 마리우스는 술라를 파견하였고 술라는 보쿠스 1세에게 로마의 강대함을 설명하고 유구르타를 생포하는 것만이 로마와 마우레타니아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주장했다. 이에 설득당한 보쿠스 1세가 유구르타를 생포하여 술라에게 넘겼고 술라는 유구르타와 함께 마리우스가 있는 키르타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유구르타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종식되었고 BC 104년 마리우스는 로마인으로서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하는 개선식을 벌이는 기쁨을 맛보았다. 포로가 된 유구르타는 관례에 따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마리우스의 개선식에서 처형되었다.
5년 연속 집정관 선출과 킴브리 전쟁의 승리
유구르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마리우스의 인기는 매우 높아졌고 이탈리아 북쪽을 침입한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을 상대하기 위해 BC 104년 다시한번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 모두 유틀란트 반도에서 유래한 게르만족의 일파로서 당시에는 갈리아(지금의 프랑스)로 남하하여 BC 109년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를 공격하였다. 이에 로마군이 출병하였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고 급기야는 마리우스가 유구르타 전쟁에서 최종승리를 거둔 BC 105년 벌어진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당시 집정관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와 전직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이 이끄는 로마군 8만명이 전멸하는 참패를 경험하였다.
아라우시오 전투의 참패에 충격을 받은 로마 시민들은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언제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로마로 처들어올 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상사태의 해결을 위해 마리우스를 BC 104년 집정관으로 선출한 것이었고 이후 연임을 기피하는 관례를 깨고 BC 103년과 BC 102년 잇달아 마리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였다. 비록 집정관 지위가 아니더라도 전임 집정관 자격으로 군사지휘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참패한 원인 중 하나가 유능한 전직 집정관 카이피오보다 경험이 부족한 현직 집정권 막시무스의 법률상 지위가 높았던 점에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반성으로 마리우스를 아예 집정관으로 계속 선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마리우스가 집정관이 되었을 때에는 킴브리족은 히스파니아로, 테우토네스족은 북부 갈리아로 각각 이동했기 때문에 로마 본토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위협이 사라졌다. 이에 마리우스는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손실된 로마군을 보충하면서 기회를 엿보게 된다.
BC 102년 테우토네스족이 비로소 로마 본토를 노리고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리우스는 6개의 로마군단과 보조군단을 이끌고 나갔다. 그리고 현재의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해당하는 아쿠아이 섹스티이아이에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고 테우토네스족의 왕도 포로로 붙잡았다. 마리우스의 승리에 열광한 로마 시민들은 마리우스를 BC 101년 집정관으로 재선출하였고 마리우스는 킴브리족에게 몰려 궁지에 몰려있던 공동 집정관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를 지원하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 카툴루스와 합류하여 베르첼리 전투에서 킴브리족에게 대승을 거두고 로마로 개선했다. 이제 마리우스의 인기는 타의추종을 불허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BC 100년 집정관에도 재선출되었다. 이렇게 하여 마리우스는 BC 104년부터 BC 100년까지 무려 5년동안 연속해서 집정관에 선출되는 기록을 남겼고 BC 107년 최초 집정관 선출을 포함하여 개인 통산 총 6번이나 집정관에 선출되는 명예를 얻었다.
마리우스의 실각
BC 100년 개인 통산 6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면서 마리우스의 영광은 계속되었지만 오랜 전쟁이 끝나면서 퇴역병의 처리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호민관이었던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가 킴브리족을 내쫓고 차지한 땅을 퇴역병사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것과 시칠리아, 마케도니아, 아카이아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퇴역병사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농지법을 들고 나왔다. 이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과 유사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원로원이 반발하였지만 마리우스가 퇴역병사들을 움직여 무력시위를 벌인 끝에 결국 민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법안 통과 이후에 사투르니누스의 지나치게 급진적인 성향을 경계하여 거리를 두게 된다.
사투르니누스가 BC 99년 호민관에 재선되었으나 집정관 선거에서는 벌족파로서 대중적인 인기가 높던 후보자인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BC 99년 집정관 선거가 무산되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사투르니누스를 로마의 적으로 규정하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결의했고 집정관인 마리우스에게 사투르니누스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리우스도 결국 무력을 동원하여 사투르니누스를 원로원에 감금하였으나 벌족파 지지자들이 건물 지붕을 뜯고 들어가 사투르니누스와 지지자들을 돌로 쳐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비록 마리우스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었지만 이 일로 인해 친구를 배신한 인물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크게 인기를 잃어버리며 이후 10년 간 사실상 은퇴신세가 된다.
벌족파, 술라의 집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마리우스와 달리 유서깊은 씨족인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일원이었다. 이 때문에 당대 지식인의 상징인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높은 수준의 교육도 받았다. BC 107년 재무관으로 마리우스를 보좌하여 유구르타 전쟁에 참여하여 유구르타를 생포하는 큰 공을 세웠다. 유구르타를 생포할 당시 술라는 무력으로만 밀어붙이는 마리우스와 달리 외교적인 수단과 계략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후 술라는 순조롭게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 명예로운 경로)'을 따라갔고 BC 97년 법무관으로 선출되면서 독립적으로 로마군단을 지휘할 자격도 얻게 되어 이듬해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아나톨리아 반도의 킬리키아 총독으로 부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BC 91년 동맹시 전쟁에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동맹시 전쟁과 술라의 활약
동맹시 전쟁의 원인은 로마와 다른 이탈리아 동맹도시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 때문이었다. 로마와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일찍이 포에니 전쟁부터 시작하여 이후에 벌어진 수많은 전쟁을 도우며 로마의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했지만 여전히 이로 인한 부와 권리는 로마 시민이 독점하고 있었다. 한때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이탈리아 동맹도시의 시민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추진하였지만 이 법에 대해서만은 로마 귀족 뿐만 아니라 평민까지도 반대하였기 때문에 무산된 채 가이우스 그라쿠스 본인이 살해되고 말았고 BC 91년 로마 호민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에 의해 다시한번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인 전체에게 확대하는 법안을 추진하였으나 이번에도 모든 로마 시민의 반대에 직면한 채 또다시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로마 시민권의 독점현상이 계속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BC 90년 서로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한 반기를 일으키면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로마 동맹에서 이탈한 피첸토족, 베스티노족, 마루키노족, 파엘리노족, 마르시족, 프렌타노족의 8개 부족은 수도를 코르피니움에 두고 나라 이름을 '이탈리아'로 정하며 독자적인 화폐도 만들었다. 또한 마르시족이 북부에서, 삼니움족이 남부에서 각각 봉기를 일으켰으나 다만 라티움 지방의 라틴족과 토스카나의 에트루리아족, 페루자와 테르니의 움브리아족은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유린하고 상황에서도 이탈리아 도시들은 로마와의 동맹을 굳건히 유지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탈리아 동맹도시의 반란은 로마에게 큰 충격을 줬다. 로마는 즉각 2명의 집정관 중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가리우스 마리우스 및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보좌를 받아 북부를 담당하고 다른 집정관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및 티투스 디디우스를 참모로 하여 남부를 맡도록 하였다.
이탈리아 동맹도시들은 일찍부터 로마군과 함께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로마군의 전술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북부를 담당하던 루푸스가 전사하고 말았다. 다만 남부에서는 이탈리아 동맹도시인 캄파니아로 처들어 갔으나 술라의 선전으로 어느정도 전선이 안정을 찾는다. BC 90년 겨울 유일하게 남은 집정관인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동맹도시와 반란에 가담했더라도 즉시 항복하는 동맹 도시의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유화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반란은 사그라들었고 북쪽으로는 스트라보가, 남쪽으로는 술라가 로마군을 이끌고 각각 반란의 잔당을 모두 토벌하였다. 특히 술라의 활약이 눈부셨기 때문에 술라는 BC 88년 집정관에 선출될 수 있었다.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과 마리우스의 음모 실패
BC 88년 아나톨리아 반도의 북부지역을 지배하던 폰투스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비티니아를 침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폰투스는 BC 302년 미트리다테스 1세 크티스테스가 아나톨리아 반도 북부에 세운 헬레니즘 소왕국으로 오랫동안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속국 신세였으나 BC 191년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왕조가 패배하면서 독립할 수 있었고 BC 115년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가 즉위한 이후 적극적으로 대외확장 정책을 펼치며 영토를 넓혀나가고 있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처음에 이웃한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3세와 협력하여 파플라고니아와 갈라티아를 나뉘어 가졌으나 카파도키아를 두고는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BC 94년 니코메데스 3세의 뒤를 이어 니코메데스 4세가 즉위하자 BC 88년 니코비아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였고 이에 니코메데스 4세는 로마로 피신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로마는 즉각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비티니아에서 철군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오히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동쪽의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2세와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BC 87년 술라를 전직 집정관 자격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폰투스와 전쟁을 벌이도록 결정하였다. 하지만 재기를 노리던 마리우스가 폰투스 정벌군의 총사령관 자리를 노리고 호민관인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결탁하여 민회에서 술라 대신에 마리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도록 선동하는 데 성공했다. 술라는 자신의 정당한 지휘권이 박탈당한 것에 분노하여 폰투스 원정을 위해 이탈리아 남부의 놀라에 주둔 중이던 로마 군단을 규합하여 수도 로마로 진군하였다. 로마군이 수도 로마를 공격하는 것은 사상초유의 일로서 이에 놀란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도주했으나 술피키우스는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리고 술피키우스의 법안이 무효화되고 로마가 안정을 되찾자 술라는 본래 임무대로 폰투스 원정을 떠났다.
술라는 폰투스 공격에 앞서서 폰투스를 지원하려던 그리스를 공격하였다. 이에 미트리다테스 6세가 아르켈라오스를 지휘관으로 하는 군대를 아테네로 파견하였지만 술라는 그리스를 석권한 후 아테네를 포위하였다. 로마군의 치열한 공성전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1년간 버텼지만 결국 식량이 바닥나면서 항복해야 했고 폰투스군은 보이오티아 평원으로 달아났다. 술라가 이를 뒤쫓아 가면서 BC 86년 카이로네이아 평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술라는 중장보병 1만 5천명과 기병 1,500기를 이끌고 12만명의 폰투스군 중 무려 10만명이나 죽이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는 평정되었고 이제 에게 해를 건너 폰투스의 본토가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로 향하고자 하였으나 마리우스가 로마로 되돌아와 재기하였기 때문에 서둘러 미트리다테스 6세와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수도 로마로 되돌아 갔다.
술라의 쿠데타
술라가 그리스에서 폰투스군과 싸우는 동안 집정관 중 하나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마리우스을 복권시켰고 이에 아프리카로 피신했던 마리우스가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 의원 50명과 에퀴테스 계급의 1천여명을 숙청하는 복수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BC 86년 마리우스가 킨나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자 술라를 반역자로 규정하였지만 마리우스는 임기를 시작한 지 불과 13일 후인 BC 86년 1월 13일 71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이후 킨나가 술라 토벌군을 파견하였지만 오히려 술라 토벌군의 병사들은 자신의 지휘관인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를 버리고 술라군에게 투항하였다. 핌브리아는 자살하였고 BC 84년 킨나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술라를 토벌하기 위해 일리리아로 향했으나 폭동이 일어나 킨나도 죽고 말았다.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진 술라는 BC 83년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하였고 귀족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때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맺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술라에게 합류하였다. 당시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노르바누스가 술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였고 다른 집정관인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술라와 교섭을 벌였으나 병사들이 계속에서 술라에게 투항하였다. BC 82년 집정관으로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와 마리우스의 동명 아들인 가리우스 마리우스(소(小) 마리우스)이 선출되어 재차 술라 토벌에 나섰으나 연전연패하였다. 결국 BC 82년 11월 술라는 콜리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수도 로마에 입성하였고 이후 철저한 반대파 대숙청 작업에 돌입했다. 이때 살해된 사람이 무려 4천7백명이라고 하고 이미 죽은 마리우스도 부관참시되었다. 본래 술라의 살생부에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딸과 결혼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간신히 도망쳤다고 한다.
술라의 독재와 보수개혁
술라가 로마에 입성하였을 때 당시 집정관이었던 카르보와 소(小) 마리우스가 모두 죽었기 때문에 로마의 최고 통치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이에 술라는 원로원을 압박하여 임기 제한이 없는 ‘국가재건을 위한’ 독재관으로 취임하였고 이후 호민관 및 민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원로원의 의원수를 2배로 늘려 600명이 되도록 하여 원로원 중심의 지배체제의 회복하도록 하는 일련의 개혁을 진행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법안을 폐지하고 재판의 배심원을 에퀴테스가 아닌 원로원 의원이 다시 맡도록 하였고 군단을 지휘하는 전직 집정관 및 전직 법무관은 원로원이 결정하도록 하였으며 호민관은 다른 관직에 취임할 수 없도록 하였고 연임은 10년의 휴지기를 가진 후에야 가능하도록 제한했다. 이렇게 원로원 중심체제로의 일련의 개혁을 완료한 술라는 BC 79년에 돌연 독재관 자리에서 사임하고 은퇴하였다가 이듬해 별장에서 죽었다.
술라의 보수개혁에 의해 로마는 다시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 체제를 회복하였으나 영토가 지나치게 확대되어 분쟁이 잦은 로마에게 의사결정이 느린 원로원 체제는 계속해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또한 술라는 자신과 같은 무력 쿠데타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로마 직할령(루비콘 강 이남)으로 로마 군단을 이끌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을 만들었으나 이미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로마군단의 사병화가 진행되었고 술라 자신도 이를 이용하여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했기 때문에 사실상 무의미하였다. 이렇게 애써 술라가 구축한 원로원 중심의 로마 통치체제는 술라가 죽자마자 역설적으로 술라가 가장 신임했던 폼페이우스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흔들리게 된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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