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서양사 Western History

비잔티움 제국,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 마케도니아 왕조

Jobs9 2021. 5. 17. 15:21
반응형

비잔티움 제국의 위기와 혼란

이슬람 세력의 아나톨리아 반도 압박

 

비잔티움 제국은 헤라클리우스 황제 말기에 이슬람 제국에게 야르무크 전투(AD 636년)에서 대패하면서 영토가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시리아와 이집트라는 곡창지대를 빼앗겼으며 AD 674년부터 AD 678년 사이에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공격당하였다. 비록 "그리스의 불" 덕분에 해상의 이슬람 함대를 물리치면서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반도는 계속해서 공격받았다. 계속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가 점점 요새화되면서 주민들이 빠져나가시 시작하자 인구감소 방지와 지역 방위력 증강을 목적으로 테마제도가 실시되었다. 테마제도는 병사들에게 토지를 제공하여 정착시키는 대신에 군역을 담당하도록 만든 것으로 군사령관이 행정장관을 겸하는 일종의 전시비상체제였다. 테마제도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에 의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아나톨리아 반도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실시되었으나 그 효율성이 입증되면서 점차 발칸반도까지 확대되었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발칸반도 압박

 

서쪽의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하면서 발칸반도의 방위력이 취약해졌고 이는 불가르족이 세운 제1차 불가리아 제국에게 발칸반도 상당부분을 잃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불가르족은 중앙아시아 투르크족의 일파로 AD 370년경 훈족과 함께 동유럽에 등장하여 볼가 강 서쪽에 정착하였다. AD 7세기 초 쿠르트(재위 AD 605년 ~ 642년)에 의해 불가르족이 하나로 통일되어 대 불가리아로 불리는 나라를 세우기도 했으나 쿠르트 사후 분열되었다. 대 불가리아 분열이후 쿠르트의 아들 아스파루크가 일파를 이끌고 발칸반도 남동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세웠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AD 9세기초 위대한 군주 크룸(재위 AD 803년 ~ 814년)이 등장하여 흩어져 있던 불가르족을 모두 통합하고 강력한 군대를 구성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크룸은 AD 811년 비잔티움 황제 니케포루스 1세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니케포루스 1세를 전사시켰다. 이듬해인 AD 812년에는 새로운 비잔티움 황제 미카엘 1세와 싸워 다시한번 승리를 거두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미카엘 1세가 제위를 버리고 도망쳤지만 높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막혀 크룸은 퇴각해야만 했다. 하지만 크룸은 돌아오는 도중에 비잔티움 제국 전 지역을 초토화 시켰고 특히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는 약 1만명에 달하는 주민이 학살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공격은 AD 814년 크룸이 갑자기 급사한 뒤에도 계속해서 이어졌고 비잔티움 제국은 AD 9세기 중반까지 제1차 불가리아 제국에게 마케도니아 지방 대부분을 빼앗기고 말았다.

 

 

종교분쟁

 

대외적으로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 어려움에 처한 비잔티움 제국은 내부적으로도 종교문제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특히 성상파괴주의와 성상옹호주의 사이의 논쟁이 극심하였는데, 레온 3세(AD 717년~741년 재위)와 콘스탄티노스 5세(AD 743년~775년 재위)가 성상파괴주의를 지지하면서 성상 옹호자에 의해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에이레네 황후의 노력으로 AD 787년에 열린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 의해 성화(이콘)을 받들되 숭배하지는 않도록 정해지면서 분쟁을 봉합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성상파괴주의 논쟁은 계속되었으며 특히 동서교회의 분열의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

 

바실리우스 1세 시대

 

바실리우스 1세는 아르메니아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불가르족의 침입에 의해 사람들이 마케도니아로 포로로 잡혀갈 때 함께 끌려갔다. 이런 이유로 바실리우스 1세는 마케도니아인으로 불리게 되었고 훗날 그가 창조한 왕조를 '마케도니아 왕조(Macedonian dynasty)'로 지칭되지만 실제로는 마케도니아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바실리우스는 무식하고 글도 몰랐으나 힘이 아주 세고 기마술이 뛰어나 동로마 황제 미카일 3세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아 시종장이 되었다. 이후 바실리우스는 미카엘 3세의 외숙인 바르다스와의 권력 투쟁에 승리하여 동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가 되었고 AD 867년에 미카엘 3세를 암살한 후 단독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바실리우스 1세의 찬탈로 시작된 마케도니아 왕조는 계속해서 유능한 황제를 다수 배출하면서 '마케도니아 르네상스(Macedonian Renaissance)'로 불리는 동로마 제국의 부흥을 이끌게 된다.

   

  

영토 회복

 

단독 황제가 된 바실리우스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 회복을 구상하고 서쪽의 카롤루스 1세의 증손자로서 이탈리아를 통치하고 있던 황제 루트비히 2세와의 연합을 추진했다. 프랑크 왕국은 AD 814년 카롤루스 1세가 죽은 이후 아들 루트비히 1세를 거쳐 AD 840년 루트비히 2세의 세 아들에 의해 분할 상속되었고 이탈리아와 황제 지위는 장남인 로타르 1세에게 넘겨졌으나 AD 855년 로타르 1세도 사망하고 당시에는 로타르 1세의 아들인 루트비히 2세가 이탈리아와 황제 지위를 함께 상속받은 상태였다. 바실리우스 1세는 북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긴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섬, 아드리아 해 연안 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대함대를 파견하여 루트비히 2세의 군대와 함께 협공에 나섰다. 

 

동로마 제국군은 뛰어난 장군인 니케포루스 포카스의 활약 덕분에 연전연승을 거듭하여 달마티아, 베네벤토, 오트란토를 차례로 손에 넣고 AD 876년에는 남이탈리아의 이슬람 세력의 중심인 풀리아 지방의 바리를 점령하였다. 그렇지만 바실리우스 1세는 자신의 적통 로마 황제이므로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면서 마찰을 빚었다. 특히 바실리우스 1세가 루트비히 2세의 '로마인 황제(Imperator Romaorum)' 칭호를 인정하지 않고 '프랑크인 황제(Basileus Phrangias)'라고만 부르면서 루트비히 2세를 모욕했다. 하지만 이미 동로마 제국이 남이탈리아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실리우스 1세는 루트비히 2세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남이탈리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공고하게 만들었고 '칼라브리아(Calabria)'와 '랑고바르디아(Langobardia)'라는 두 개의 속주로 재편하였다. 다만 시칠리아 섬은 수복하는 데 실패하여 대부분 이슬람 세력에게 내어주어야 했다. 

 

바실리우스 1세는 동로마 제국의 해군이 이탈리아를 공격하는 동안에 육군은 아나톨리아 반도로 향하도록 했다.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그리스도교의 이단인 파울리키아파(혹은 파울스파)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파울리키아파는 성상파괴주의자로서 성상숭배를 공인한 테오도라 여제(재위 AD 842년 ~ AD 855년) 시절의 대대적인 박해를 피해 아나톨리아 반도로 향했고 그리스도교도이면서도 이슬람 세력과 동맹을 맺고 동로마 제국과 대립하고 있었다. 바실리우스 1세는 처남인 크리스토포루스에게 군사를 이끌고 파울리키아파를 공격하도록 하여 AD 872년 주요 거점인 테프라케를 파괴하고 파울리키아파를 분쇄하는 데 성공하였다. 바실리우스 1세는 여세를 몰아 아나톨리아 반도 남부로 니케포루스 포카스를 파견하여 타르수스 지방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동서 교회의 포티우스 분열과 불가리아의 그리스도교 개종

 

로마 제국의 제1수도인 로마의 교황과 제2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종교적인 권위를 두고 오랫동안 대립하였고 이는 AD 484년 아카키우스 분열로 이어졌다. 비록 분열된 동서교회가 AD 519년 아직 동로마 황제가 되기 이전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화해했지만 동로마 황제의 비호를 받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의 자율권과 발언권이 격상되었다. 그리고 AD 730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가 성상파괴령을 내리자 로마교황이 크게 반발하면서 동서 교회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로마교황은 동로마 황제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세속적인 힘을 찾기 위해 AD 800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1세에게 서로마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해 주었다. 이제 로마교황은 동로마 황제의 세속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반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로마교황의 수위권은 단순히 명예상의 문제일 뿐 동방의 다른 교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것은 거부하게 되었다.

 

AD 813년 동로마 황제 레오 5세에 의해 성상파괴령이 다시 선포되면서 동서 교회의 갈등이 재개되었지만 AD 843년 동로마 여제 테오도라에 의해 취소되고 성상숭배가 복원되면서 동서교회의 화해 분위기가 다시 무르익었다. 하지만 테오도라를 실각시키고 미카일 3세의 친정을 성립시킨 바르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를 해임시키고 후임으로 포티우스를 임명하면서 다시 마찰이 일어났다. 이그나티우스 측에서는 해임의 부당함을 로마교황 니콜라우스 1세에게 탄원하였고 니콜라우스 1세는 이번 기회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진상조사단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진상조사단이 포티우스의 선임을 정당하다고 판단하고 정식 교회회의를 통해서 포티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선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티우스를 합법적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마찰을 빚었다. 

 

그러던 중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가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개종을 추진하였다. 로마교황 니콜라우스 1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가 모두 불가리아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기 위해 경쟁하였고 결국 보리스 1세는 국경을 맞댄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방지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파견된 주교와 사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보리스 1세는 종교적으로 동로마 제국에게 종속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불가리아 대주교구의 지위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와 대등하게 격상시키기 위한 협상을 포티우스와 진행하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결렬되었고 이에 보리스 1세는 다시 로마교황 니콜라우스 1세에게 접근하여 로마교황청이 파견한 성직자들을 불가리아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로마교황청의 행위에 대하여 포티우스는 크게 반발하였고 로마교황청의 성직자들이 불가리아에 포교할 때 니케아 신경 중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는 문구 중에 라틴어 '필리오퀘(Filióque; '성자'라는 뜻)'를 덧붙인 것을 빌미로 로마교황청을 맹비난하였다. 필리오퀘라는 문구가 추가되면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모두 발현된다'는 의미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이단으로 몰아붙인 것이었다. AD 867년 포티우스는 공의회를 소집하여 '필리오퀘' 문구 추가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그 책임을 물어 로마교황 니콜라우스 1세를 파문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로마교황을 파문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으나 당시 니콜라우스 1세는 병환 중이었기 때문에 포티우스의 행위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채 같은 해 선종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포티우스의 위세는 로마교황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중 포티우스에게 갑자기 위기가 찾아왔다.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 정변이 발생하여 미카엘 3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황제가 된 바실리우스 1세가 포티우스를 해임하고 이그나티우스를 복위시킨 것이었다. 니콜라우스 1세의 뒤를 이어받은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2세는 AD 869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하여 포티우스를 파문하였고 로마교황청의 성직자도 모두 철수하기로 하면서 불가리아 대주교구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로 다시 편입되었다. 이렇게 하여 포티우스 분열로 불리는 동서교회 분열이 겨우 수습되었다. 

 

한편 AD 877년 이그나티우스가 사망하고 포티우스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위하였을 때 당시 로마교황인 요한네스 8세는 이탈리아 해안에 출몰하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일명 '사라센')을 막아내기 위해 동로마 제국 해군의 지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포티우스의 복위를 승인해 주었다. 그리고 비록 포티우스가 바실리우스 1세의 아들인 레오 6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AD 886년 레오 6세가 황제가 되자 다시 해임당하게 되지만 포티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인정받으며 훗날 로마 카톨릭과 갈라선 동방 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추대된다.

 

 

후계자 문제

 

바실리우스 1세에게는 아들이 4명이 있었지만 첫번째 황후 마리아에게 얻은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만을 편애하였다. 특히 에우도키아 잉게리나가 낳은 레오 6세의 경우에는 본래 에우도키아 잉게리나가 미카일 3세의 정부였기 때문에 미카일 3세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바실리우스 1세도 레오 6세를 잔혹할 정도로 미워하고 심한 매질도 서슴치 않았기 때문에 레오 6세가 미카일 3세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졌다. 그러나 바실리우스 1세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AD 879년에 요절하자 바실리우스 1세는 깊은 시름에 빠졌고 이를 자신이 황제 즉위 과정에서 벌인 죄악에 대한 신의 징벌로 여기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요절 이후 바실리우스 1세는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정신착란까지 일으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레오 6세를 더욱 심하게 미워하여 감옥에 가둔 채 두 눈을 뽑아 버릴 뻔도 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의 이간질 때문에 바실리우스 1세와 레오 6세 사이의 불화는 더 심해졌으나 바실리우스 1세가 AD 886년 여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정황 상 바실리우스 1세가 암살된 것은 아닌 지 의혹이 발생하면서 레오 6세가 그 배후로 의심받았으나 구체적인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레오 6세는 20살의 나이에 동생인 알렉산데르와 함께 공동 황제로 즉위했고 알렉산데르가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레오 6세는 사실상 동로마 제국의 통치권을 단독으로 행사하게 되었다. 레오 6세는 즉위 직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를 해임하고 16살인 동생 스테파누스를 임명했다. 

 

 

레오 6세 시대

 

바실리우스 1세가 군사적인 재능은 출중했지만 학문적으로는 무식했던 것에 반해서 레오 6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대학자들에게서 교육을 받아서 학문적인 소양이 뛰어났다. 아버지 바실리우스 1세 시절부터 추진되었던 로마법 개정사업을 완성하여 "바실리카 법전(Basilika)"을 발행하였는데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절의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을 대대적으로 개편한 것이라는 점과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종교문제와 세속문제들을 폭넓게 다룬 여러 권의 법령집(개정 칙령)을 썼고 그 밖에 바실리우스 1세를 찬양하는 추도사, 예배용 시, 설교문, 연설문, 세속 시류, 군사학 논문들도 남겼다. 이러한 노력으로 동로마 제국이 문화적으로 번영기를 맞이했기 때문에 레오 6세는 '현제(賢帝)' 또는 '철학자 황제'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군사적인 어려움

 

문화적으로는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과 달리 동로마 황제 레오 6세는 군인이라기보다는 학자이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레오 6세 재위시절 가장 큰 위협은 불가리아였다. 불가르족이 세운 불가리아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은 보리스 1세의 아들 시메온 1세가 AD 893년 즉위하였는 데 같은 해 레오 6세가 불가리아 교역소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테살로니키로 옮기고 중과세를 부과한 것 때문에 시메온 1세가 트라키아를 공격해 들어왔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군대는 아바스 왕조를 상대하기 위해서 아나톨리아 반도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가리아의 갑작스런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유일한 수비군이었던 마케도니아 테마군도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레오 6세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니케포루스 포카스를 서둘러 소환하여 불가리아를 상대하도록 하였고 동유럽에 새롭게 등장한 유목민인 마자르족을 끌어들여 불가리아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메온 1세가 또 다른 유목민인 페체네그족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서 AD 896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결국 이를 물리치지 못한 레오 6세는 AD 896년에는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와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겨우 강화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으나 그 대가로 흑해와 스트란자 사이의 영토를 불가리아에 양도하고 매년 공물도 보내는 처지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위기는 다른 지역에서도 계속되어 동로마제국이 불가리아의 공격을 받는 동안 이슬람 세력이 다시 이탈리아 남부로 진출했고 AD 902년에는 시칠리아의 마지막으로 남은 거점마저 빼앗았다. 그리고 AD 904년 그리스인이면서도 이슬람측으로 전향한 변절자 트리폴리의 레오가 이슬람 함대를 이끌고 마르마라 해를 침공하였고 레오 6세는 이 공격을 가까스로 방어했지만 트리폴리의 레오는 퇴각하는 길에 테살로니키를 약탈하여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를 기회로 불가리아까지 침공하면서 마케도니아 남부와 알바니아 남부 지역을 모두 불가리아에 내주어야 했다. 또한 레오 6세가 AD 908년에 이슬람 함대를 물리치고 아나톨리아 반도 남부의 타르수스를 잿더미로 만들면서 복수에 성공했지만 안드로니쿠스 두카스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다시 타르수스가 이슬람 측으로 넘어갔다.

 

 

콘스탄티누스 7세 시대

 

힘겨운 황태자 공인

 

동로마 황제 레오 6세는 즉위 이전에 조에 자우치나라는 여자를 사랑했지만 아버지 바실리우스 1세의 강요로 테오파노 마르티니아케와 결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테오파노와의 사이에서는 딸만 하나 얻었으나 그마저 일찍 요절했고 테오파노가 지나치게 신앙심이 깊어서 부부관계도 소원했기 때문에 아들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AD 897년 테오파노가 사망하자 레오 6세는 본래부터 사랑하던 조에 자우치나를 황궁으로 데려와 두 번째 황후로 삼았지만 조에 자우치나 역시 딸만 낳은 채 AD 899년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레오 6세는 에우도키아 바이아나와 세 번째 결혼을 하고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지만 출산 과정에서 에우도키아 바이아나가 죽고 어렵게 얻은 아들 역시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 6세는 포기하지 않고 조에 카르보노프시나와 네 번째 결혼을 추진하면서 교회와 마찰이 생겼다.

 

당시 교회법에서는 네 번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레오 6세의 네 번째 결혼에 반발했다. 이 때문에 레오 6세는 정식으로 결혼할 수는 없었지만 조에 카르보노프시나는 AD 905년에 레오 6세가 그렇게도 바라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7세를 낳았다. 그러자 레오 6세는 교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로마교황 세르기우스 3세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고 자신의 결혼에 반대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콜라오스 미스티코스를 해임하고 조에 카르보노프시나와의 결혼을 승인받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조에 카르보노프시나가 정식 황후가 되었고 아들 콘스탄티누스 7세도 황태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7세의 별칭은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였는데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자주색' 방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로 황궁에서 태어난 정식 황태자라는 뜻이었다.

 

 

 

불가리아 시메온 1세의 계속된 침략과 동로마 제국의 내부 혼란

 

AD 912년 레오 6세가 사망하자 공동 황제였던 알렉산데르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알렉산데르는 조카인 콘스탄티누스 7세를 제거하려는 마음먹기도 했지만 콘스탄티누스 7세가 병약하여 곧 죽을 것으로 생각하고는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AD 913년 알렉사데르가 불가리아에게 보내기로 약속한 공물제공을 거절하자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알렉산데르가 급사하면서 콘스탄티누스 7세는 7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콜라우스 미스티코스가 섭정을 맡아 시메온 1세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니콜라우스 미스티코스는 불가리아에게 공물을 다시 제공하고 시메온 1세의 딸을 콘스탄티누스 7세와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시메온 1세는 자신이 후손이 동로마 황제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기 때문에 니콜라우스 미스티코스의 강화 조건을 받아들이고 철군하였으나 AD 914년 궁정 반란이 일어나면서 니콜라우스 미스티코스가 실각하고 콘스탄티누스 7세의 모후인 조에 카르보노프시나가 섭정이 되면서 콘스탄티누스 7세와 시메온 1세의 딸 사이에 약속된 결혼이 취소되었다. 이에 분노한 시메온 1세가 AD 914년 다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하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했고 이듬해에는 알바니아의 두라초와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키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AD 917년 동로마 제국의 조에 카르보노프시나는 니케포루스 포카스의 아들인 레오 포카스에게 육군을 이끌고 불가리아를 공격하도록 했고 아르메니아 출신의 해군 제독인 로마누스 레카페누스에게는 해군을 이끌고 페체네그족의 도나우강 도하를 지원하도록 했다. 하지만 로마누스 레카페누스가 페체네그족과 불화를 일으키면서 페체네그족의 불가리아 공격은 성사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레오 포카스마저 안키알루스 전투에서 불가리아 군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시메온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육박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성벽에 의지하며 버티기 시작하고 후방의 세르비아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자 일단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변만 약탈한 후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공동 황제 로마누스 1세의 권력장악과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공인

 

이제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불가리아와의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조에 카르보노프시나의 권력이 약화되었고 로마누스 레카페누스가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비록 조에 카르보노프시나가 로마누스 레카페누스를 견제하기 위해 레오 포카스와 손을 잡았으나 오히려 로마누스 레카페누스가 먼저 레오 포카스와 조에 카르보노프시나를 모두 축출하였다. 그리고 AD 919년 자신의 딸 헬레나를 콘스탄티누스 7세와 결혼시킨 뒤 스스로 공동 황제의 자리에 올라 로마누스 1세가 되었다. 이후 로마누스 1세는 자신의 아들 4명 중 3명을 차례로 공동 황제로 임명하며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정통성 있는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7세를 폐위시키지는 못한 채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에만 만족해야만 했다. 

 

그동안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제외한 발칸 반도 대부분을 장악한 후 AD 924년 이집트을 장악한 이슬람 파티마 왕조와 연합하여 육상에서는 불가리아가, 해상에서는 파티마 왕조가 각각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협공하였다. 이에 로마누스 1세는 시메온 1세와 강화 협상을 벌여 불가리아에게 다시 공물을 제공하고 시메온 1세가 황제를 의미하는 '차르(Tsar)'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승인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집전으로 대관식까지 치뤄주면서 제1차 불가리아 제국(First Bulgarian Empire)이 탄생하게 되었다. 

 

비록 로마누스 1세가 인정한 것은 '불가리아인의 차르(Tsar of the Bulgarians)'라는 칭호 뿐이었지만 시메온 1세 스스로는 '불가리아인와 로마인의 차르(Tsar of the Bulgarians and Romans)'를 자처하였다. 불가리아가 황제의 나라로 격상됨에 따라 불가리아 대주교도 총대주교로 격상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동격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로마누스 1세는 불가리아와의 오랜 분쟁을 종식하였고 시메온 1세가 AD 924년 급사하고 그의 어린 아들 페타르 1세가 즉위한 뒤에도 그의 차르 칭호와 불가리아 교회의 총대주교구 승격을 그대로 승인하고 자신의 손녀딸과 결혼시켜 우호 관계를 지속하였다. 

 

 

콘스탄티누스 7세의 친정

 

비록 로마누스 1세는 동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으나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신의 두 아들 스테파누스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AD 944년에 폐위되고 수도원에 보내졌다. 동시에 콘스탄티누스 7세도 큰 위기에 처했으나 여전히 정통성을 가진 황태자로서 동로마 제국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 스테파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 유폐되고 콘스탄티누스 7세가 단독 황제로서 권력을 되찾았다. 동로마 제국을 단독으로 통치하게 된 콘스탄티누스 7세는 이전의 병약함과 나약함을 벗어버리고 뛰어난 통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7세는 문관과 군인, 대토지 소유 귀족과 자영농 출신 군인 사이에 갈등을 무마하였고 로마누스 1세와 적대적이었던 레오 포카스의 동생인 바르다스 포카스에게 군권을 맡기고 바르다스 포카스의 아들 삼형제인 니케포루스 포카스, 레오 포카스, 콘스탄티누스 포카스를 중용하여 각각 아나톨리콘, 카파도키아, 셀레우키아 테마의 군사령관인 스트라테고스로 임명하며 각각의 국경 방어를 맡겼다. 또한 대외적으로 불가리아에게는 화평의 자세를 취하고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에 대해서는 단호한 공세를 취하였다. 비록 AD 949년 나중에 신성로마황제가 되는 독일 작센 왕가의 오토 1세와 연합한 크레타 섬에 대한 공략은 실패로 끝났지만 AD 957년과 AD 958년 이슬람 측과의 전쟁에서는 큰 승리를 거뒀다. 

 

콘스탄티누스 7세는 저술가로도 유명하여 여러가지 저술을 남겼는데 이는 당시의 동로마 제국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역사자료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7세 치세에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를 지칭하는 "마케도니아 르네상스"가 절정을 이루었다. 한편 AD 957년에는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의 섭정인 대공녀 올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자 콘스탄티누스 7세는 올가가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직접 세례를 받도록 해주었다. 비록 이것이 곧바로 키예프 공국의 그리스도교화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올가의 손자인 블라디미르 1세(재위 AD 978년 ~ AD 1015년) 시절에 키예프 공국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로 편입되는 계기가 된다. 

 

  

로마누스 2세의 짧은 치세

 

콘스탄티누스 7세는 말년에 고질적인 열병으로 고생하였고 AD 959년 사망하자 콘스탄티누스 7세와 로마누스 1세의 딸인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로마누스 2세가 20세의 나이에 동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로마누스 2세는 즉위 직후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7세의 추종자들과 어머니 헬레나의 세력을 모두 축출했지만 유능한 환관 요세푸스 브링가스는 유임되었고 군사령관도 아버지가 기용하였던 니케포루스 포카스와 레오 포카스 형제를 그대로 중용하여 각각 제국의 서방과 동방의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로마누스 2세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브린가스와 니케포루스 형제에게 정사를 모두 맡긴 채 향락에만 몰두했다. 그러다가 재위 4년 만인 AD 963년에 어린 아들 바실리우스만 남겨놓은 채 갑자기 사망하면서 니케포루스 포카스가 새롭게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니케포루스 2세 시대

 

니케포루스 포카스는 콘스탄티누스 7세 시절 활약한 바르다스 포카스의 아들로 동생인 레오 포카스 및 콘스탄티누스 포카스와 함께 일찍부터 군인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니케포루스 포카스는 로마누스 2세 시절 동로마 제국의 동방 총사령관이 되어 AD 960년에 이슬람의 지배 하에 있던 크레타 섬을 1년여 간의 공방전 끝에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AD 962년 초에는 킬리키아와 시리아를 공격하여 60개가 넘는 요새를 함락하고 키프로스 섬과 안티오키아를 점령하며 많은 군사적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AD 963년 로마누스 2세가 사망하자 환관 요세푸스 브링가스가 권력다툼을 벌이던 로마누스 2세의 황후 테오파노가 자신과 어린 아들 바실리우스의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니케포루스 포카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니케포루스 포카스는 황후 테오파노의 요청을 기회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환관 브링가스를 몰아내었다. 그리고 AD 963년 8월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동로마 황제 니케포루스 2세로 즉위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폴리에우크토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보충하기 위해 황후 테오파노와 결혼하였다. 타고난 군인이었던 니케포루스 2세는 황제가 된 이듬해인 AD 964년부터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을 재개하여 아나톨리아 반도 남부의 타르수스를 점령하였고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 사이에서 비무장 공동지역으로 관리되던 키프로스 섬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시리아 북부를 장악한 함단 왕조를 공격하여 사실상 속국으로 삼고 AD 969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구를 수복하였다. 

 

니케포루스 2세는 많은 군사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으로는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불가리아의 침입을 맞서기 위해 러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한 키예프 공국의 스뱌토슬라프에게 상당한 지원금을 약속하고 침공하도록 요청하였는데 스뱌토슬라프는 도브루자 전역을 점령하고 불가리아 북동쪽의 80개 마을을 불태운 뒤 아예 동로마 제국의 영토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또한 신성로마황제 오토 1세의 황제 칭호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지나치게 모욕하여 오토 1세가 이탈리아의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는 빌미를 내주었다. 또한 말년에 정치적으로 오만해지고 고압적으로 변해서 교회와 민중 모두의 신임을 잃었고 결국 황후 테오파노가 동로마 제국의 총사령관인 요한네스 치미스케스와 사랑에 빠지면서 니케포루스 2세는 암살당하고 만다.

 

 

요한네스 1세 시대

 

요한네스 치미스케스는 니케포루스 2세와 마찬가지로 아나톨리아 반도 출신으로 콘스탄티누스 7세 시절에 유프라테스 강변의 사모사타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요한네스는 처음에는 니케포루스 2세의 정변을 지지하여 그가 황제가 되도록 도와주었으나 황후 테오파노와 연인이 되면서 스스로 황제가 될 야심을 품고 테오파노와 계략을 꾸며 니케포루스 2세를 암살하고 황제 요한네스 1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폴리에우크토스가 반발하고 나서자 요한네스 1세는 황후 테오파노를 배신하여 그녀를 수도원으로 추방하고 니케포루스 2세의 암살자를 처벌하면서 사태를 무마하였다. 또한 레오 포카스의 아들이자 니케포루스 2세의 조카인 바르다스 포카스의 반란도 바르다스 스클레루스의 활약 덕분에 진압했다. 이후 바르다스 포카스는 7년간 키오스 섬에 유배당하게 된다.

 

그렇지만 요한네스 1세는 문제가 많은 즉위 과정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된 이후에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AD 971년 불가라아를 장악한 키예프 공국의 스뱌토슬라프가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자 이를 물리치고 발칸 반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공고히 했다. 그리고 스뱌토슬라프를 지원한 불가리아에 대한 응징으로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의 수도까지 처들어가 불가리아의 보리스 2세를 생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고왔다. 이제 불가리아는 차르 지위가 폐지된 채 동로마 제국의 속국 신세가 되었다. 

 

또한 요한네스 1세는 AD 974년부터 AD 975년까지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 이슬람의 파티마 왕조가 지배하던 바알베크, 다마스쿠스, 티베리아스, 카이사레아, 베이루트, 비블로스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비록 성지 예루살렘의 수복에는 실패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헤라클리우스 1세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상실한 이후 동방 영토가 다시 최대로 확대될 수 있었다. 이렇게 치세 내내 영토 확대에 애쓰던 요한네스 1세이었지만 AD 976년 동방 원정에서 돌아오던 길에 후계자도 남기지 못한 채 갑자기 병사하고 말았다.

 

 

 

동로마 제국의 중무장 기병, 클리바노포로스

동로마 제국군의 주력은 '카타플락토이(Kataphraktoi)'라고 불린 중장기병으로 기수와 기마 모두에게 갑옷을 입혔었다. 니케포루스 2세 시대가 되면 더욱 강화된 중무장을 한 기병이 등장하였는데 '클리바노포로스(Klibanophoros)'라고 불리웠다. 클리바노포로스는 팔꿈치까지 소매가 내려오는 클리바니온을 걸치고 그 위에 두꺼운 패드를 댄 에필로리콘을 입었으며 머리에는 철제 투구를 쓰고 눈을 제외한 모든 안면을 사슬 후드로 감쌌다. 팔과 종아리도 갑옷과 체인으로 모두 보호하도록 하였으며 다리도 건틀렛과 강철 덧신을 신었다. 이렇게 중무장한 클리바노포로스에게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는 부분은 눈과 콧구멍 뿐이었다. 

 

클리바노포로스는 동로마 제국의 전통적인 공격 형태인 쐐기골 대형을 이루며 전장에 투입되었다. 구체적으로 맨 첫열은 20명이고 다음 열은 24명, 그 다음열은 28명 순으로 4명씩 증가하여 마지막 열은 64명의 중기병이 대열을 이루었다. 클리바노포로스는 중장갑 무장을 바탕으로한 충격력을 활용한 돌격을 주요한 공격 전술로 이용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마케도니아 왕조가 강력한 군사력을 갖게 되는 배경이 되었으나 너무 비싼 유지 비용 때문에 동로마 제국이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의 셀주크 왕조에게 대패하는 만지케르트 전투(AD 1071년) 이후 동로마 제국의 재정이 열악해지면서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소멸하게 된다.

 

 

바실리우스 2세 시대

 

황제즉위와 권력안정

 

AD 976년 요한네스 1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로마누스 2세와 테오파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바실리우스 2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바실리우스 2세는 본래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정당한 황위 계승권이 있었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황위를 니케포루스 2세와 요한네스 1세에게 차례로 빼앗겨야 했다. 그리고 요한네스 1세가 병사하면서 바실리우스 2세가 18세의 나이에 동생인 콘스탄티누스 8세와 함께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지만 치세 초반 9년 동안은 실권을 시종장인 바실리우스 레카페누스에게 빼앗긴 채 허수아비로 지내야 했다. 아무런 힘이 없던 바실리우스 2세는 묵묵히 바실리우스 레카페누스의 통치를 지켜보며 조용히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바실리우스 2세는 즉위 초 불가리아의 반란에 시달려야 했는데 동로마 제국의 지배에 반발한 스레데츠(지금의 소피아) 백작 니콜라스의 네 아들인 다비드, 모세스, 아론, 사무일이 반란을 일으켜 불가리아 서부를 장악한 것이다. 비록 다비드와 모세스는 전사했지만 막내인 사무일은 불가리아의 북동부를 모두 회복하였다. 그러자 바실리우스 2세는 나머지 아론과 협상하여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시키는 강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사무일이 이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동로마 제국과 맞섰다. 그리고 AD 977년 사무일은 동로마 제국에서 볼모로 있다가 도망친 옛 차르 보리스 2세의 동생 로만을 새로운 차르로 즉위시켰다. 이 때 보리스 2세도 로만과 같이 동로마 제국에서 도망쳤지만 그의 동로마식 복장을 보고 오해를 한 불가리아 국경 수비대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더욱이 아나톨리아 반도에서의 바르다스 스클레루스가 바실리우스 2세의 어린 나이를 빌미로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물론 이슬람 영주의 지원까지 받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바르다스 스클레루스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으나 다르다넬스 해협의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니케아를 공격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바실리우스 2세는 요한네스 2세 시절 반란을 일으켰다가 바르다스 스클레루스에게 진압당하며 키오스 섬에 유페되었던 바르다스 포카스를 석방하여 바르다스 스클레루스에게 복수하도록 했다. 이후 두 바르가스 간의 대결은 처음 두 번은 바르다스 스클레루스가 승리를 거뒀으나 마지막인 3번째에는 바르다스 포카스의 승리로 끝났다. AD 979년 패배한 바르다스 스클레루스는 가족들을 데리고 바그다드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그동안 불가리아의 사무일은 발칸 산맥 북부의 모이시아를 되찾고 알바니아와 테살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에 바실리우스 2세가 AD 986년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사무일의 고향인 소피아를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퇴각하던 길에 이흐티만 근처의 산길인 이른바 '트라야누스의 관문(Trajan's Gate)'에서 불가리아 매복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르다스 포카스가 AD 987년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를 자처했다. 이렇게 하여 바실리우스 2세가 다시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나 자신의 여동생 안나와 결혼한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1세의 도움을 받으면서 AD 989년 바르다스 포카스를 죽이는데 성공하며 오랜 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바실리우스 2세는 이때 키예프 공국으로부터 지원받은 6천명의 병력을 바탕으로 러시아 출신 근위대를 창설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바랑기안 친위대이다. 그리고 그 사이 키운 군사력으로 자신감을 얻은 바실리우스 2세는 시종장 바실리우스 레카페누스를 추방하고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의 전쟁 시작

 

이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리아를 상대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사무일은 AD 992년에는 제국의 수도를 오흐리다로 천도하고 불가리아 총대주교구를 부활시켰으며 세르비아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계속된 성공에 도취되면서 발칸 반도 전체를 통일하는 야심까지 꿈꾸고 있었다. 이에 바실리우스 2세는 우선 외교적으로 불가리아를 압박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불가리아에 대한 본격적인 군사 원정을 계획하여 바실리우스 2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불가리아와의 전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바실리우스 2세가 AD 989년부터 실시한 여러 차례 원정이 성공을 거두면서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를 물리치고 발칸 반도 북부의 상당한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AD 995년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시리아를 공격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시리아로 떠나면서 불가리아에 대한 공세를 잠시 중단해야만 했다. 그러나 바실리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모든 병력을 기병으로 변경하여 불과 16일만에 아나톨리아 반도를 횡단하는 강행군 끝에 파티마 왕조의 공격으로부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AD 1000년부터 불가리아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여 AD 1005년까지 모에시아,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발칸반도 동부 전역을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클라디온 협곡 전투와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멸망

 

이후 수년 동안은 지지부진한 전투가 계속되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는데 동로마 제국이 불가리아를 공격하는 경로는 대부분 스트루마 강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나 불가리아의 사무일이 클라디온 협곡 주변에 두꺼운 목책을 만들어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방어하였기 때문이었다. AD 1014년에 재차 불가리아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바실리우스 2세는 이번에도 스트루마 강을 이용하여 이동하였으나 클라디온 협곡에 목책으로 방어진을 편성한 불가리아 군에게 저지당해야 했다. 비록 바실리우스 2세가 굴하지 않고 목책을 부수기 위해 계속해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번번히 저지당했다. 

 

전황이 동로마 제국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면서 바실리우스 2세가 퇴각을 검토하던 중 우연히 우회로를 발견하였다. 이에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리아의 군대가 클라디온 협곡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서 오히려 우회로를 통해 불가리아의 후방을 기습 공격하였다. 허를 찔린 불가리아 군은 클라디온 협곡의 목책을 포기한 채 물러나야 했고 불가리아 군이 물러가자 바실리우스 2세는 손쉽게 목책을 부수고 진격할 수 있었다. 이제 전투는 동로마 제국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진행되었다. 허를 제대로 찔린 불가리아 군은 제대로 군대를 수습하지 못한 채 후퇴를 거듭하면서 산발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막강한 동로마 제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결국 클라디온 전투는 동로마 제국의 대승으로 끝났다.

 

비록 클라리온 전투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사무일은 무사히 도망치는 데 성공했고 그의 아들인 가브릴 라도미르의 분전으로 바실리우스 2세는 일단 동로마 제국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바실리우스 2세는 이 때 끌고 온 불가리아 군 포로 1만 5천명에게 잔인한 형벌을 내려 포로 대부분의 두 눈을 다 멀게 하고 100명당 1명씩만 한 눈을 남겨두어 나머지를 인솔하고 불가리아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이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여 이를 본 사무일은 충격으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 바실리우스 2세의 별칭인 '불가록토누스(Boulgaroktonos)'는 "불가르족의 학살자"라는 뜻이다. 

 

비록 불가리아가 사무일이 죽은 이후에도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가브릴 라도미르가 AD 1015년 암살당하고 그를 암살하고 차르 지위를 찬탈한 이반 블라디슬라브도 AD 1018년 디라키움(지금의 알바니아 두러스)를 공격하던 중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이반 블라디슬라브의 미망인인 마리아는 자신의 세 아들과 함께 동로마 제국에 항복하면서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또한 불가리아의 속국이었던 세르비아도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에 병합되었고 다른 속국이었던 크로아티아는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이렇게 하여 바실리우스 2세는 무려 400년만에 발칸 반도가 다시 동로마 제국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바실리우스 2세의 말년

 

이후 바실리우스 2세는 AD 1016년 크림 반도로 진출하여 흑해 연안 지역을 차지했다. 또한 동쪽으로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군사력과 외교로 압박하여 영향력을 강화시키면서 동로마 제국의 위상을 강화하였으나 말년에는 노르만족이 남이탈리아에 대거 몰려들어오면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에 바실리우스 2세는 AD 1019년 칸나이에서 롬바르드족과 노르만족의 연합공격을 막아낸 후 이탈리아 남부를 정리하고 시칠리아 섬을 되찾기 위한 대대적인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AD 1025년에 죽음을 맞이하면서 실현되지는 않았다.

 

 

바랑기안 친위대

 

'바랑기안(Varangian)'이란 말은 스칸디나비아에서 통용되던 맹세의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러시아 강가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바이킹족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추정된다. 이후 바랑기안이란 말은 러시아에 있는 모든 바이킹족 이주민을 가르키는 말로 사용된다. 바이킹족이 동로마 제국의 용병으로 고용된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AD 988년 러시아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2세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원조 요청에 응하여 보낸 6천명의 바이킹족 전사들이 황실 근위대로 정착하면서 바랑기안 친위대가 성립되었다. 이들은 강한 동지애로 뭉친 강인한 전투부대로 외국인 집단이었기에 궁정음모에 가담할 염려가 없어 황실 근위대로 중용되었다. 바랑기안 친위대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러시아에서 많은 바이킹족이 바랑기안 친위대에 지원하는 것을 대단한 영예로 생각하였다.

 

바랑기안 친위대는 바이킹족의 전통을 이은 정예 보병이었기 때문에 체인 메일과 반원형 헬멧을 쓰고 검과 함께 바이킹의 전통적인 무기인 도끼를 애용하였다.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바랑기안 친위대는 황실 방위 뿐만 아니라 대외 원정에도 동원되어 발칸 반도와 시칠리아 섬, 남이탈리아 등에 주로 파견되었다. 바랑기안 친위대는 갖가지 궁정 음모가 횡횡하던 동로마 제국에서 흔들리지 않고 황제에 대한 충성을 바치며 약 2세기 동안 유지되었으나 AD 1081년 알바니아 항구도시 두라초를 놓고 시칠리아의 노르만족과 벌인 두라초 전투에서 괴멸당하면서 사실상 몰락하였다. 이후 바랑기안 친위대가 재건되지만 초기의 용맹성을 많이 상실하고 만다.

 

 

 

바실리우스 2세 사후의 마케도니아 왕조 혼란

 

콘스탄티누스 8세와 로마누스 3세 시대

 

바실리우스 2세에 의해 동로마 제국은 영토가 다시 확대되었고 재정도 풍족해지면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바실리우스 2세에게는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AD 1025년 사망하자 이미 AD 976년에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던 동생인 콘스탄티누스 8세가 제위를 이어받았다. 콘스탄티누스 8세는 금욕적이고 유능했던 형과 달리 탐욕스럽고 쾌락을 추구하는 성격으로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이어갔고 결국 AD 1028년 사망하고 말았다. 콘스탄티누스 8세도 아들이 없었고 첫째 딸인 유도키아는 수도원에 들어갔기 때문에 둘째 딸인 조에가 왕위계승권을 보유하였는데 조에는 원로원 귀족인 로마누스 아르기누스와 결혼한 후 그를 황제 로마누스 3세로 즉위시켰다. 그리고 조에는 콘스탄티누스 8세의 셋째 딸이자 자신의 동생인 테오도라를 시기하여 수도원에 유폐시켰다.

 

로마누스 3세는 자신만만하게 통치를 시작했지만 그리 유능하지 못했고 점점 권문 세족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그 사이 황후 조에가 AD 1033년부터 아나톨리아 반도 북쪽에 위치한 파플라고니아 출신의 환관 요한네스 오르파노트로푸스의 다섯 형제 중 막내 동생인 미카일이라는 젊은 애인을 두기 시작했으나 로마누스 3세는 모른 척 하였다. 하지만 로마누스 3세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조에가 독을 먹인다는 소문까지 나돌던 중 AD 1034년 로마누스 3세가 목욕탕에서 의문사하였고 조에는 미카엘과 재혼하여 그를 황제 미카엘 4세로 만들었다. 그러나 미카엘 4세가 뇌전증을 앓으면서 건강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통치는 대부분 그의 큰 형인 요한네스 오르파노트로푸스가 대리해야만 하였다. 요한네스 오르파노트로푸스는 원만하게 동로마 제국을 이끌어 나갔고 미카엘 4세가 AD 1041년 사망하자 여동생 마리아의 아들인 미카일 칼라파테스를 조에의 양자로 삼도록 하여 미카엘 5세로 즉위하도록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9세 시대

 

콘스탄티누스 9세의 즉위와 연이은 내부 반란

 

비록 미카엘 5세가 동로마 황제가 되었지만 여전히 제국의 실권은 큰 삼촌인 요한네스 오르파노트로푸스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카엘 5세는 다른 삼촌인 콘스탄티누스와 공모하여 요한네스 오르파노트로푸스를 수도원에 유폐시켰다. 이제 미카엘 5세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존재는 양어머니인 조에 밖에 없었기 때문에 AD 1042년 조에마저 수도원으로 내쫓았다. 그렇지만 콘스탄티누스 8세가 죽은 이후 왕위 계승의 정통성은 조에에게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미카엘 5세를 폐위시키고 조에를 예제로 복위시켰다. 이와 함께 조에의 동생이자 콘스탄티누스 8세의 셋째 딸인 테오도라도 불러와 공동 여제로 즉위시켰다. 

 

그렇지만 조에와 테오도라 모두 동로마 제국을 직접 통치할 능력은 없었고 테오도라가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맹세했기 때문에 조에가 세 번째 결혼상대를 물색하여 궁정 귀족인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쿠스를 선택하였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쿠스가 조에와 결혼한 후 콘스탄티누스 9세로 즉위하였으나 정통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치세 동안 반란에 시달리게 된다. 먼저 콘스탄티누스 9세는 황제 즉위 이전부터 마리아 스클레리나라는 애인을 두고 있었는데 마리아의 오빠인 로마누스 스클레루스의 음모로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된 게오르기우스 마니아케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도중에 사망하였다. 또한 AD 1047년에는 콘스탄티누스 9세의 친척인 레오 토르니케스가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레오 토르니케스를 따르려 하지 않아 실패로 끝났다. 

 

 

 

이탈리아 남부의 노르만족 유입과 AD 1054년 동서 교회의 대분열

 

콘스탄티누스 9세는 외부 민족의 침략에도 시달렸는데 AD 1043년에는 러시아의 키예프 대공국이 바다를 이용해 처들어왔으나 '그리스의 불' 덕분에 물리쳤고 이후 루스족을 방어하기 위해 페체네그족을 끌어들였으나 오히려 도나우 강을 너머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침입당했다. 또한 이슬람 세계에서도 정변이 일어나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무력화되고 실권을 셀주크 왕조가 장악하였는데 동로마 제국도 AD 1045년 아르메니아를 병합하면서 셀주크 왕조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노르만족이 계속 유입되어 사실상 독립상태가 되었고 노르만족을 이끌던 로베르 기스카르는 로마교황 레오 9세를 포로로 붙잡고 강제로 칼라브리아와 풀리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 유입은 종교적인 혼란도 파생시켰는데 로베르 기스카르로부터 풀려난 로마교황 레오 9세가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AD 1054년 프랑스 추기경 훔베르트을 비롯한 3명을 사절단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는 교황 수위권과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주장하는 훔베르트 일행의 오만한 태도 때문에 만남을 거부하였다. 이에 훔베르트 일행도 케룰라리오스에게 불만을 품었고 때 마침 로마교황 레오 9세가 병사하자 훔베르트는 케롤라이오스에게 복수하고자 임의로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케롤라이오스와 동방정교회 성직자 모두를 파문했고 이에 분노한 케롤라리우스도 훔베르트 일행을 역으로 파문했다. 이렇게 하여 유럽의 교회가 로마카톨릭과 동방정교회로 완전히 갈라서는 AD 1054년 동서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사키우스 1세 콤네누스 시대

 

치세 동안 내우외환의 불안과 동서 교회 대분열의 혼란을 겪었던 콘스탄티누스 9세는 AD 1055년 사망하였고 아들도 없고 황후인 조에가 이미 AD 1050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공동 여제 자리에서 물러났던 테오도라가 다시 복위하였다. 하지만 테오도라 역시 77살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AD 1056년 사망하였고 임종 직전에 유력 귀족인 미카엘 브링가스에게 제위를 넘겨 미카엘 6세로 즉위하도록 하였지만 미카엘 6세는 유약하고 무능한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파플라고니아 테마의 군사령관인 이사키우스 콤네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미카엘 6세는 자신이 보낸 토벌군이 이사키우스의 군대에게 패배하자 당황하여 이사키우스를 부제(Caesar)로 임명하고 다른 후계자는 세우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시도하였고 그러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일 케룰라리오스는 아예 미카엘 6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이사키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받아들여 이사키우스 1세로 즉위시켰다.

 

이제 동로마 황제가 된 이사키우스 1세는 자신의 지지 기반인 군대를 개혁하고 재정지원을 늘리는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일 케룰라리오스가 자신을 즉위시킨 것을 빌미로 내정 간섭을 시도하자 AD 1058년 체포하여 추방해 버렸다. 이로 인해 이사키우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과 교회의 지지는 잃었으나 이사키우스 1세에게는 강력한 군대가 있었고 AD 1059년 마자르족과 페체네그족에 대한 원정에서 거듭해서 승리했기 때문에 황제 지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AD 1059년 늦가을에 갑자기 열병에 걸리면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자 파플라고니아의 군사귀족 가문 출신인 콘스탄티누스 두카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건강이 회복되었지만 복위를 노리지는 않은 채 수도원에서 조용히 은거하며 지내며 2년 뒤 사망하게 된다. 대신에 콘스탄티누스 두카스가 콘스탄티누스 10세로 즉위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새로운 왕조인 두카스 왕조가 창건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