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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52

광복, 독립, 해방, 8·15, 광복절

광복, 독립, 해방, 8·15 , 광복절 독립 독립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유사 이래 우리의 모든 역사가 예속의 역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노태우 정부 때 천안에 ‘독립기념관’을 지을 때에도 큰 논란이 있었다. 우리의 국권을 우리 스스로 행사하기 위해 싸운 선열들을 ‘독립투사’라고 부르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본래부터 독립국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독립국인 우리의 주권을 일제가 강탈했으므로 독립투사들은 그것을 되찾기 위해 피 흘려 싸워 마침내 주권을 회복했다. 이 ‘회복’을 마치 우리의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을 얻은 것으로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중문대사전》은 한국의 ‘한’에 대해 “1897년에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국호를 ‘한국’이라고 고쳤다. ..

흥화진전투, 양규, 강감찬, 강동6주, 거란침입

고려 전기 거란침입 때 흥화진(興化鎭, 평안북도 의주)에서 벌어진 전투. 흥화진은 서희(徐熙)가 거란과 담판하여 강동6주(江東六州)를 확보한 이후, 995년(성종 14) 구축한 압록강 방면의 요충지이다. 거란은 흥화진을 선점하기 위해 고려 현종대에 수 차례에 걸쳐 침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010년(현종 1), 1017년(현종 8), 1018년(현종 9)에 전투가 벌어졌다. 경과 및 결과 1010년(현종 1) 거란 제2차 침입 당시 거란의 성종(聖宗)이 40만 대군으로 직접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 해 11월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을 포위하고 고려의 항복을 종용하면서 전투는 11월 17일부터 23일까지 1주일 간 전개되었다. 흥화진에는 순검사(巡檢使) 양규(楊規)가 거란의 압박에 조금도 굴하지 ..

자유시 참변, 홍범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 러시아 자유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 교전, 흑하(黑河)사변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을 감행한 일본군을 피해 만주 일대 독립군 부대는 항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을 대한독립군단으로 규합하고 연해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1921년 3월 부대별 이동을..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독도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1667) 이 두 섬(울릉도, 독도)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고려를 보는 것이 운슈(雲州 - 현재 시마네현의 동부)에서 온슈(隱州- 오키섬)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본의 서북쪽 경계는 이 주(此州 - 오키섬)를 한계로 한다. 「은주시청합기」는 운주(雲州)의 관원인 사이토 호센(齊藤豊仙)이 마쯔에번주(松江藩主)의 명으로 1967년 8월 부터 약 2개월 동안 은주(隱州)를 순시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상부에 보고한 지방관찬서이다. 은주란 현재의 오키섬을 말하고 당시에는 오키국(隱州国)을 말한다. (당시 일본에서의 국( 国 1)은 주(州 )와 같은 개념이다.) 운주란 이즈모국을 말하며 현재 시마네현의 일부인 이즈모시를 말한다. 독도가 기록된 일본 최초의 문헌..

제주 4·3사건, 서북청년단, 1947년, 남로당, 토벌대, 30,000명 학살, 3·1절 발포사건, 무장봉기, 강경진압작전, 주민희생

제주 4·3사건, 1947년, 남로당, 토벌대, 30,000명 학살, 3·1절 발포사건, 무장봉기, 강경진압작전, 주민희생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

여순사건, 1948년,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송호성, 백선엽, 김지회, 지창수, 제주4·3사건

여순사건, 1948년,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송호성, 백선엽, 김지회, 지창수, 제주4·3사건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하여 일주일여 만에 전 지역을 수복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인명·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제정과 강력한 숙군 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여순사건의 배경은 그 주체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살펴보아야 하는..

일진회, 일진회 ‘합방’ 운동, 윤시병, 이용구, 송병준, 독립협회 (원)일진회, 동학 진보회 결합

일진회는 독립협회와 동학에 소속된 인물들이 친일과 반정부를 표방하면서 1904년 12월 2일에 결성된 단체 일진회의 결성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 체결이 체결되자 한국에서는 국권 회복운동이 일어났다. 이 시기 국권 회복운동은 한편으로는 계몽운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으나 일진회는 일본에 협력한 반민족단체였다. 일진회는 독립협회의 흐름을 이어받은 (원)일진회와 동학의 일파인 진보회가 결합하여 창립되었다. (원)일진회는 유신회(維新會)라는 이름으로 1904년 8월 18일 서울에서 조직되었고 바로 일진회로 개명하였다 . (원)일진회의 회장은 윤길병(尹吉炳)이었으나 실제 (원)일진회를 조직한 자는 송병준(宋秉畯)이었다. 송병준은 일본에 망명해 있다가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주한일본군 사령..

미소공동위원회, 1차 회담, 2차 회담, 신탁통치 반대운동 단체 협의대상

미소공동위원회 ▪카이로회담(1943.11) 미영중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 한국 자유독립국가 해방 결의 ▪얄타회담(1945.2) 미영소 ▪신탁통치 밀약(공산화 두려워 미국이 제안) ▪38선분할 결정(소련참전, 국내진입요청, 미국이 공산화 두려워 요청) ▪포츠담선언(1945.7) 미영소중 ▪한국독립 재확인 ▪모스크바3상회의(45.12) 미영소 ▪임시조선민주주의 정부수립 강조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미영소중 최고 5년간 신탁통치 ▪미소공동위원회 ▪협의대상 선정문제: 미(모든 단체) vs 소(반탁단체 제외) ▪제1차(1946.3) 임시정부의 협의대상 ▪제2차(1947.5) 9월에 한국문제 UN에 제출 1 개요 미소공동위원회는 1945년 12월 발표된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

중국 팔로군, 八路军, 조선의용군 연합 작전

조선의용군, 중국 팔로군 연합 작전 수행 팔로군(중국어 간체자: 八路军, bālù-jūn, 바루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공산당 휘하 독립적 성향을 가진 부대로 중국 국민혁명군 예하 제8로군(1937.8)으로 편성됐고, 얼마 뒤 제18집단군(1937.9)으로 개편됐지만 팔로군이라고 계속 불리었다. 이로써 1937년 9월 제2차 국공합작이 형성됐고, 팔로군은 신사군(1937.10)과 함께 화베이 지방에서 항일전의 유격전을 담당했다. 이후 국공내전 기간에 중국 공산당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팔로군은 조선의용군이라고 하는 조선인들도 포함. 이들은 중국 화북지방에서 중국 공산당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사회주의세력으로 화북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그 산하에 조선의용군을 조직하여 항일..

애국계몽운동, 1905∼1910년, 개화자강파, 실력양성운동, 사회운동, 국권회복운동

1905∼1910년 사이에 전개된 개화자강파(開化自强派)의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총칭하는 역사적 개념. 한국 민족은 1905년 11월 이른바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의 일부를 빼앗기자 새로이 당면한 민족적 과제로서 국권회복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당시 한국 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양면에서 전개되었다. 개항 후 한국 민족이 상당 기간 열강의 침입에 대해 완강한 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박탈당한 것은 ‘힘’과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는 것은 힘을 기르지 않는 한 어려운 과제였고, 당시 한국 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은 처음부터 장기전을 전..

무오사화(戊午士禍),1498년,연산군,김일손,유자광,훈구파,사초문제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조선은 성종대에 이르러 집권적 관인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유교문화가 그 성숙기에 도달하였다. 세종·문종대에 융성했던 유학은 세조의 무단정치와 불교 숭상으로 한 때 저조했으나 성종대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성종은 원래 학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등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파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던 김종직(金宗直)을 중용하였다. 아울러 그 제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 등 영남 출신의 신진사류를 대거 불러들이게 되었다. 중앙에 진출한 신진사류는..

4군 6진, 세종대왕, 최윤덕, 김종서

시대적 배경 조선 건국 초기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고 있던 시기였다. 중국에서는 새로 건국된 명(明)이 기존의 중국의 지배자였던 원(元)과 각축을 벌이며 서서히 세력을 성장시켜 마침내 대륙의 패자로 등장하였다. 원은 비록 대륙에서의 패권을 상실하였으나 아직 강력한 세력을 유지한 채 몽골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조선이 건국되었고, 일본에서는 무로마치의 막부가 점차 영향력을 잃어 가면서 지방 세력들이 힘을 얻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처럼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개국한 조선은 왕조의 개창과 동시에 대외관계 수립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그와 함께 고려 말 피폐해진 군사력을 복구하여 국가의 방어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준동하는 왜구들을 방어하기 위한 해안 방어 체제를 정비함과 동시에 대륙정..

삼강행실도(三綱行實道), 성종, 설순, 열녀, 충신, 효자

조선전기 직제학 설순 등이 왕명으로 삼강(三綱)의 모범이 될 만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만든 언행록.교훈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종이에 목판 인쇄. 관판본(官版本). 4권. 각 권 세로 36.4~38.4㎝, 가로 19.6~22.1㎝.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세로 24.4~25.3㎝, 가로 16.5~17.8㎝. 유계(有界). 반엽(半葉) 13행(行) 22자(字).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양산시립박물관 소장. 내용 1431년(세종 13)에 직제학 설순(偰循)에 의해 완성된 『삼강행실도』를 성종 연간에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각 35인씩 선별하여 개찬(改撰)한 판본의 재간본(再刊本)이다. 1권과 2권은 열녀, 3권은 충신·효자, 4권은 효..

훈련도감(訓鍊都監), 조선 후기, 중앙군영

조선 후기에 설치되었던 중앙군영. 훈국(訓局)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8월에 임시기구로 설치되어 점차 상설기구로 변모한 뒤 1746년(영조 22)『속대전』에 올라 법전에 규정되었다. 조선 전기의 양인 의무 군역을 바탕으로 한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五衛)는 일찍부터 군인으로 복무하는 대신 포(布)를 내는 사람이 늘어나는 등 여러 모순을 드러내어 16세기말에는 그 조직이 허구화되어 있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왜군에 참패함으로써 당장의 전쟁을 수행하고, 나아가서는 발전된 사회상에 맞는 군사 제도를 갖추기 위해 군사 조직의 재정비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에 급료병으로써 새 군사 편제에 의해 설치한 것이 훈련도감이다. 이 기구의 창설은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

흥남 철수, 미 제10군단, 국군 제1군단, 1950년, 장진호 전투, 해상 철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1950년 12월 15일(출항 기준)부터 23일까지 흥남항구를 통해 해상 철수한 작전. 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원산이 적중에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흥남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흥남주변에 몰려든 10만 명의 북한주민들도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선박으로 월남하였다. 한국정부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밀려 평양을 포기하게 되자, 1950년 12월 4일 평양시의 전 행정기관을 철수시키고 38선 접경 및 그 이북 전역에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50여만 명에 달하는 이북 피난민동포 구출을 위한 긴급조치를 취하였다. 1951년 1·4후퇴를 전후하여 많은 북한 주민들이 북한을 탈출하여 월남했다...

흥왕사의 변, 1363년, 공민왕, 김용, 홍건적

1363년(공민왕 12)에 김용(金鏞)이 왕을 살해하려고 흥왕사 행궁(行宮)을 침범한 사건. 1359년에 뒤이어 1361년에 홍건적(紅巾賊) 10여 만의 무리가 재차 침입하였다. 이 때 정세운(鄭世雲)이 총병관(摠兵官)이 되어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김용·최영(崔瑩) 등과 함께 싸워 적을 물리쳤다. 이렇게 외적을 물리친 지 며칠이 안 되어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군공(軍功)을 시기하여 서로 싸우는 비극이 일어났다. 김용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안우·이방실·김득배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그 죄를 뒤집어씌워 모두 죽였다. 그리고 복주(福州)에서 돌아와 흥왕사의 행궁에서 거처하던 공민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결국 공..

휴전반대국민대회, 1951년, 포로석방, 한미상호방위조약

6·25전쟁의 당사자인 한국의 주장과 의지를 전적으로 무시한 채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에 자극받은 국민이 궐기한 대회. 통일에 대한 한국 국민의 기백과 의지를 전세계에 일깨워 주고, 휴전이 성립된 이후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경우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미국의 보장을 받기 위한 목적을 달성한 범국민적인 운동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전쟁의 확전을 우려한 유엔과 자유진영이 휴전을 모색하게 되면서부터 통일의 가망성은 희박해졌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미국은 1951년 5월 17일에 한국전쟁의 목적을 정치 목표와 군사 목표로 분리하여 먼저 군사 목표부터 추구함으로써 휴전협상을 통하여 쌍방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뒤를 이어 6월 1일에는 유엔이 ‘38도선 부근에서 휴전한다는 것..

윤봉길 투탄의거, 훙커우공원의거,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투탄의거. 1932년 4월 29일 일본은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켜 상해를 점령한 뒤 전승기념 및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을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하였다. 이때 비밀항일결사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단원인 윤봉길이 사열대 위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요인을 폭살시켰다. 당시 사상자는 일본군사령관 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 해군중장 노무라(野村吉三郎), 육군중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 등과 다수의 간부들이었다. 이 중 시라카와는 중상을 입은 뒤 5월 24일 사망하였고 가와바타는 즉사하였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한국독립운동계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일제의 침략을 받아..

후삼국통일, 10세기, 고려, 신라·후백제 통합, 발해 유민 포섭

10세기 전반기에 고려가 신라·후백제를 통합하고 발해 유민을 포섭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한 일. 신라 말기에 등장한 후백제·후고구려(태봉·고려)와 신라를 우리 역사상 후삼국이라 하고,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건국한 892년(진성여왕 6)부터 고려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태종 19)까지의 45년간을 후삼국시대라고 한다. 신라는 이른바 하대에 이르러 왕권이 쇠약해지고 정치가 문란해졌다. 이는 골품제적 신분 질서에 바탕을 둔 신라 사회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그 운영 원리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귀족들의 대토지 사유화로 인하여 토지로부터 유리된 농민들은 점차 중앙 지배층의 가혹한 경제적 착취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서는 지방에서 중앙의 수취를 거부하고 나아가 정치적 지배에 ..

회퇴변척(晦退辨斥), 1611년, 광해군, 정인홍, 조식, 이언적, 이황

1611년(광해군 3) 3월 정인홍이 무함을 받은 스승 조식의 변호를 위해 이언적과 이황의 행적을 거론하며 비판한 사건. 1611년(광해군 3) 3월에 우찬성 정인홍(鄭仁弘)이 스승 조식(曹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무함 받은 것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차자(箚子)를 올려 이황을 비판하고 아울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과오까지 지적하였다. 이에 이목(李楘) 등 500여 명의 유생이 단체로 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옹호하면서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공격하고, 그의 이름을 성균관의 유적(儒籍, 청금록)에서 삭제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유생들을 처벌하려 하자, 그들은 성균관을 나가 권당(捲堂)에 들어가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관료들과 지방 유생들까지 양측으로 나뉘어 몇 달이나 시비 논쟁을..

황포탄의거(黃浦灘義擧), 1922년, 의열단, 항일의거

의열단(義烈團)에서 전개한 의열사들의 항일의거. 1922년 3월 28일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 마닐라로부터 귀국하는 도중에 상해(上海)에 도착하였다.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항일운동단체인 의열단에서는 다나카를 사살할 것을 결정하고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오성륜(吳成崙, 또는 이정룡)은 다나카가 기선에서 내릴 때, 김익상(金益相)은 오성륜이 실패할 경우 다나카가 승용차로 향할 때 저격하기로 하였으며, 이 역시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이종암(李鍾巖)은 다나카가 승용차에 오를 때 저격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 다나카가 도착하여 하선하면서 마중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 오성륜이 권총을 발사하였다. 그러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온 영국인 신부가 다나카 앞을 지나다가 총탄에 맞..

황토현전투, 1894년, 동학농민군, 전라감영군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맞아 크게 승리한 전투. 1894년 3월 20일전라도 무장에서 전봉준(全琫準)·손화중(孫化中)·김개남(金開男) 등의 남접계 동학지도자들을 중심으로 4,000여 명의 동학농민군들이 들고 일어섰다. 이들은 태인 주산리에서 태인접주 최경선(崔敬善)이 이끄는 300여 명의 농민군, 말목장터에 집결해 있던 수백 명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경과와 결과 고부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들은 4일간 머물며 화약고를 불태우는 등 폐정을 혁파한 뒤, 3월 25일경 백산(白山)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백산은 고부 관아로부터 북쪽에 있는 높이 50m도 되지 않는 작은 언덕이었으나 인근의 곡창지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요새지였다. 농민군이 백산에 진을 치고 ..

황산벌전투, 660년, 백제멸망전투, 삼국통일전쟁

660년 황산벌에서 있었던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의 큰 싸움. 황산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連山) 지방이다. 역사적 배경 의자왕 초, 왕권 중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한 백제는 중국과 신라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와 연결해 신라에 압박을 가하였다. 특히 642년(의자왕 2)에 대야성(大耶城)주 01)을 비롯한 신라 남부의 40여 성을 함락한 사건은 신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파견해 적극적인 외교 교섭을 벌인 결과,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에 이 나당연합군이 드디어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다. 경과와 결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내주(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

황산대첩, 1380년, 우왕, 이성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고려말왜구퇴치

1380년(우왕 6) 9월에 이성계(李成桂) 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 14세기 후반에 극심하던 왜구의 노략질은 1376년 홍산(鴻山)에서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380년 8월에 5백척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해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州)·군(郡)을 약탈·방화·살육하였다. 이 때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왜적을 치도록 하였다. 경과와 결과 진포싸움은 최무선이 만든 신무..

황무지 개간권 반대운동, 일본, 황무지개간권, 보안회의소

조선 말 일본이 한국주권침탈의 일환으로 황무지 개척권을 강제로 요구해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항일운동을 일컫는 총칭.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를 발판으로 1904년 5월 21일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의으로 옮겼다. 이에 일본은 우선 연해어업권, 내하(內河)·연해항해권, 철도부설·관리권, 통신기관 관리권 등의 이권을 강점하고, 또한 내정개혁이라는 구실 아래 재정권·외교권·내정권 등에까지 침략야욕을 드러냈다. 황무지개척권 요구 역시 이와 같은 일제의 대한경영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다. 요구의 직접적인 동기가 일본인의 식민을 목적으로 다수의 일본인 농민을 한국에 이주시키고, 아울러 한국의 농지를 개방시켜 원료 및 식량공급기지로 삼으려는 데 있..

홍산대첩, 1376년, 우왕, 최영, 홍산, 부여, 왜구

1376년(우왕 2) 7월 최영(崔塋)이 홍산(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싸움. 이 싸움은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의 진포싸움,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 정지(鄭地)의 남해대첩과 함께 왜구토벌에서 가장 빛나는 전적 중 하나이다. 고려때 왜구 침범은 충정왕 때부터 시작되어 공민왕과 우왕 때 가장 창궐했는데, 특히 우왕 14년 동안 378회에 걸쳐 쳐들어와 최고를 기록하였다. 1376년 7월 왜구가 부여에 침입했다가 공주에 이르렀는데, 이 때 목사 김사혁(金斯革)이 정현(鼎峴)에서 싸우다가 패전해 공주가 함락되었다. 왜구는 다시 연산현(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개태사(開泰寺)로 쳐들어와 이를 맞아 싸우던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도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은 출정..

홍경래의 난, 1811년, 순조, 홍경래, 우군칙, 평안도, 서북민 차별

1811년(순조 11)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 181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5개월간에 걸쳐 일어난 반란이다. 조선 후기 봉건사회는 17, 18세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양적으로 팽창되어 갔다. 특히 이앙법(移秧法)·이모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기술의 변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되었다. 이 결과 지난날의 봉건지주와는 다른 서민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선된 농업 생산기술과 시장의 확대라는 유리한 여건 속에서 차경지(借耕地)의 확대를 통해 상업적 농업을 하는 경영형부농이 성장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수의 소농민들은 몰락해 ..

호락논쟁(湖洛論爭), 조선 후기 성리학, 인물성 동이(人物性同異) 논쟁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의 인물성 동이(人物性同異)에 관한 논쟁. 호락 시비 혹은 인물성 동이 논쟁이라고도 한다. 처음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발생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은 인물성(人物性)의 이(異)를 주장하고, 이간(李柬)은 인물성(人物性)의 동(同)을 주장하였다. 권상하는 한원진의 이론(異論)을 지지했으므로 이간은 권상하·한원진을 상대로 논변하였다. 그러나 권상하는 더 이상의 논변은 무익하다고 생각, 한원진에게 중지하도록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한원진과 이간의 사이에는 두 차례의 왕복 논변을 끝으로 직접적인 논변은 없었지만 서로의 주장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이간의 인물성 동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낙하(洛下)주 01)에 살고 있었으므로 낙학(洛學) 또는 낙론(洛論)이라 불리게 되었고,..

호주제폐지(戶主制廢止), 2005년, 민법 개정, 가족법

2005년 3월 2일 민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와 같은 달 31일 법률 제7427호의 공포 과정을 거쳐 호주제를 폐지함. 호주제도는 호주를 중심으로 한 가(家) 구성, 호주권(戶主權), 호주승계에 대한 규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가족법에 있어 양성평등과 민주적 가족법을 구현하기 위한 가족법 개정운동의 결과 1977년·1990년·2002년에 부분적 개정이 이루어졌고, 2005년에 이르러 마침내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개정안이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 배경 호주제도는 한국사회의 가부장 의식과 악습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여성차별적 제도라는 비판 끝에 결국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폐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시된 비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호주제는 가족 구성원을 호주에게 종속시켜 개인의..

호가장 전투, 1941년, 조선의용대, 중국 하북성 호가장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 대원들이 중국 하북성(河北省) 호가장(胡家庄)에서 일본군의 습격에 맞서 싸운 전투. 1938년 10월 중국 무한(武漢)에서 중국 관내 지역 최초의 한인 무장 조직으로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김원봉(金元鳳)을 총대장으로 한 조선의용대는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대일본군 반전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 일본군 포로 심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 지구에 국한된 선전 활동은 조선의용대 내부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결국 화북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을 요구하던 대원들은 1940년 말부터 이듬해 여름 사이 황하를 건너 태항산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태항산 지역에서 기존의 조선청년연합회 회원들과 합류한 조선의용대 주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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