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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 제2차 십자군 실패

Jobs9 2021. 5. 1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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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르 3세 시대

AD 1125년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5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AD 1024년부터 100여년 동안 독일을 지배하던 잘리어 왕조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에 독일 제후들과 주교들이 모여 다시 왕위계승 선거를 실시해야만 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주플린부르크 가문의 작센 공작 로타르 3세였다. 비록 로타르 3세는 하인리히 5세 생전에 반기를 들어 전투에서 승리하고 사실상 독립상태가 되었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이미 늙고 후계를 이어받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최적의 후보자로서 여겨졌다. 결국 로타르 3세가 잘리어 왕조와 아무런 혈통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왕으로 선출될 수 있었는데 독일 제후와 주교들은 혈통에 의한 세습보다는 선거에 의한 왕위계승원칙을 선택한 것이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반란 진압

 

즉위 초부터 로타르 3세의 가장 강력한 정적은 호엔슈타우펜 가문이었다. AD 1047년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된 프리드리히 1세가 하인리히 4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하면서 시작된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슈바벤쥐라 산맥에 지은 슈타우펜 성에서 가문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의 두 아들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와 프랑켄 공작 콘라트는 하인리히 4세의 외손자이었기 때문에 왕위계승권이 있었다. 이에 따라 콘라트는 형인 프리드리히 2세를 후보자로 내세웠으나 왕위계승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프리드리히 2세와 콘라트 형제는 자신들의 정당한 왕위 계승권을 침해받았다고 생각하여 반발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AD 1127년 12월 동생 콘라트가 형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와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2세의 지지를 받아 뉘렌베르크에서 대립왕이 되었다. 이후 콘라트는 재빠르게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향하여 AD 1128년 몬차에서 밀라노 대주교 안셀름 5세로부터 이탈리아 왕관도 받았다. 그러나 비록 콘라트가 왕위에는 올랐지만 이탈리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고 AD 1129년 로타르 3세가 콘라트의 중요한 거점인 뉘렌베르크와 슈파이어를 함락시켰기 때문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반란은 사실상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로마교황청 내분 개입

 

AD 1130년 로마교황청에서는 로마교황 호노리우스 2세가 선종하자 인노켄티우스 2세가 먼저 소수의 젊은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어 서둘러 교황 축성까지 받았다. 그러나 추기경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년층 파벌은 인노켄티우스 2세를 인정하지 않고 별도로 아나클레투스 2세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한 뒤 인노켄티우스 2세를 로마에서 축출했다. 그러나 아나클레투스 2세의 조상이 유대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에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노르베르와 샹파뉴 클레르보 수도원장 베르나르두스가 인노켄티우스 2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후 베르나르두스는 프랑스 교회에 대해, 노르베르는 독일 교회에 대해 각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AD 1130년 프랑크 에탕프 공의회는 인노켄티우스 2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선택했다. 

 

한편 독일의 로타르 3세도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와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의 양측으로부터 동시에 지지를 부탁받았으나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노르베르의 영향으로 인노켄티우스 2세 측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러자 로타르 3세의 지지를 얻기 힘들어진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는 대신에 시칠리아 섬과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 지도자가 된 루지에로 2세와 접촉하여 AD 1130년 크리스마스에 팔레르모 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치르고 루지에로 2세를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시키는 대가로 지지를 약속받았다. 그러자 본래부터 노르만족과 적대하던 동로마 황제 요한네스 2세가 로타르 3세와의 동맹을 추진하였고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도 로타르 3세와의 만남을 추진하여 AD 1131년 3월 리에주에서 만난 후 지지를 약속받았다. 이렇게 로마교황청의 내분은 독일의 로타르 3세와 시칠리아 왕국의 루지에로 2세의 대결로 변화되었다. 

 

 

첫번째 이탈리아 공략 및 호엔슈타우펜 가문 반란 진압

 

그토록 바라던 시칠리아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한 루지에로 2세가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를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처남인 알리페 공작 라눌프 2세를 카푸아 공작 로베르 2세와 함께 로마로 보냈으나 라눌프 2세의 아내이자 루지에로 2세의 여동생인 마틸다가 남편의 학대를 고발하면서 루지에로 2세와 라눌프 2세 사이가 틀어졌다. 결국 라눌프 2세는 카푸아 공작 로베르 2세와 함께 오히려 루지에로 2세에게 반기를 들고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 측에 가담하여 AD 1132년 7월 노체라 전투에서 루지에로 2세의 군대를 격퇴해 버렸다. 

 

이렇게 시칠리아 왕국이 내분에 휩싸이자 좋은 기회로 여긴 로타르 3세가 AD 1132년 8월 군대를 이끌고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와 함께 이탈리아로 향하여 AD 1133년 6월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가 장악한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전역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인노켄티우스 2세로부터 황제의 대관을 받았고 로마교황청이 기증받았던 토스카나 지역도 넘겨받았다. 그러나 당시 로타르 3세는 아직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반란을 최종적으로 진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루지에로 2세와 대립하던 라눌프 2세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고 독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AD 1034년 로타르 3세가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항복을 받아내었지만 로타르 3세는 AD 1035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진 호엔슈타우펜 가문과의 화해를 선택하여 그들 형제에게 영지를 되돌려 주었고 대신에 콘라트는 이탈리아 왕위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두번째 이탈리아 공략과 사망

 

로타르 3세가 독일로 돌아 간 사이 이탈리아에서는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의 반격이 시작되어 AD 1134년 카푸아를 점령하여 자신의 아들인 알폰소를 카푸아 공작으로 세웠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로마를 떠나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에 대해 파문을 내리고 로타르 3세에게 다시한번 도움을 요청하였다. 로타르 3세도 이탈리아에서 루지에로 2세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다시 이탈리아로 진군하였으나 때마침 루지에로 2세가 병을 얻어 시칠리아 섬에서 칩거 중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로타르 3세는 라눌프 2세와 합세하여 카푸아를 탈환하고 라눌프 2세의 근거지인 알리페를 되찾아줬고 계속해서 남이탈리아 지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AD 1136년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인 살레르노를 함락시켰고 이듬해 바리마저 점령하며 남이탈리아 대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루지에로 2세의 영토는 시칠리아 섬만 남게 되었고 AD 1137년 겨울이 되자 로타르 3세는 라눌프 2세를 풀리아 공작으로 임명하였고 자신의 사위이자 바이에른 공작인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10세에게 토스카나와 스폴레토 지방을 넘긴 후 독일로 철군을 시작했다. 하지만 로타르 3세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던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고 이에 루지에로 2세가 재기의 기회를 얻었다. 이후 AD 1138년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도 사망했기 때문에 루지에로 2세는 처음에는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와의 화해를 모색했지만 다시 불화가 발생했고 결국 AD 1139년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를 포로로 붙잡으며 남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데 성공한다. 한편 로타르 3세에 대한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 겨우 영지만 지켜내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도 로타르 3세의 사망으로 이제 다시 한번 왕위를 노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성립

 

콘라트 3세 시대

 

AD 1137년 12월 로타르 3세가 사망한 뒤 이듬해 3월 코블렌츠에서 교황대리가 출석한 가운데 왕위계승선거가 열렸다. 로타르 3세에게는 아들이 없이 딸만 있었기 때문에 사위인 벨프 가문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0세가 후보자로 나섰고 로타르 3세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에서는 프랑켄 공작 콘라트가 다시 후보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콘라트가 승리를 거두고 엑스라샤펠에서 콘라트 3세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벨프 가문도 롬바르드 귀족 출신이자 바이에른 공작령을 보유한 명망있는 가문으로 하인리히 10세는 이미 로타르 3세 생전에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와 스폴레토를 물려받고 이제는 로타르 3세의 개인 영지였던 작센까지 상속받으면서 막강한 세력을 보유하였기 때문에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렇게 하여 AD 12세기 내내 독일 역사를 지배하게 되는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의 대립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콘라트 3세는 하인리히 10세의 작센 공작령 상속을 인정하지 않고 아스카니아 가문의 알브레히트(훗날의 초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브레히트 1세)가 차지하도록 했고 바이에른 공작령도 몰수하여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4세에게 넘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하인리히 10세가 작센과 바이에른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유지했지만 AD 1139년 사망하고 말았다. 하인리히 10세의 동명의 아들 사자공 하인리히는 나이가 10살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하인리히 10세의 동생인 벨프가 반란을 이어갔지만 AD 1140년 12월에 콘라트에게 바인스베르크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콘라트 3세가 프랑크푸르트까지 진격하였지만 AD 1142년 벨프 가문과의 화해를 선택하여 사자공 하인리히에게 그의 아버지의 영지 중 하나인 작센 공작령을 되돌려 주었다.

 

 

 

 

제2차 십자군 실패

 

AD 1145년 중동에서 이라크 북부의 모술과 시리아의 알레포를 통치하던 이슬람 총독(아미르) 이마드 앗딘 장기가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에데사 백국의 수도 에데사를 함락시키자 로마교황 유게니우스 3세가 제2차 십자군 결성을 호소하자 콘라트 3세가 호응하여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를 위해 콘라트 3세는 AD 1146년 어린 아들 하인리히 베렝가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마인츠 대주교 하인리히 1세를 후견인으로 임명한 뒤 자신의 조카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3세와 함께 AD 1147년 가을 제2차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 비록 제2차 십자군에는 프랑스 왕 루이 7세도 동참하였으나 콘라트 3세는 서로 간섭받기를 원하지 않아 각자 진군하기 시작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콘라트 3세가 먼저 헝가리를 경유해 먼저 동로마 제국으로 진입했으나 원치않는 대군이 자신의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꺼려한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가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결국 이 때문에 콘라트 3세는 지리가 어두운 아나톨리아 반도를 단독으로 횡단하다가 룸 술탄국의 매복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 일부만 겨우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7세는 콘라트 3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내륙이 아닌 해안가를 따라 진군하였지만 별다른 소용없이 룸 술탄국의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당초부터 제2차 십자군은 제1차 십자군 때와 달리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이라는 목적이 이미 실현된 상태였기 때문에 원정의 목적이 불분명한 상태였고 이 때문에 성서에 나오는 성스러운 도시라는 이유만으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였다가 참패만 당한 채 AD 1148년 9월 각자 본국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벨프 가문의 재반란과 콘라트 3세의 죽음

 

제2차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독일로 돌아가던 콘라트 3세는 AD 1148년 겨울을 보내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잠시 머물렀다. 이 때는 이탈리아 남부의 세력을 회복한 시칠리아왕 루지에로 2세가 해군을 육성하여 동로마 제국까지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의 요청에 따라 반(反) 시칠리아 동맹을 맺었다. 그러자 루지에로 2세도 콘라트 3세와 불화를 겪던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동맹을 맺었고 콘라트 3세에게 적대하던 바이에른의 벨프와도 연합하였다. 이에 AD 1150년 바이에른의 벨프가 슈바벤 공작령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콘라트 3세는 서둘러 독일로 돌아가야 했고 아들 하인리히 베렝가와 함께 벨프의 군대를 물리쳤다. 

 

그렇지만 장남 하인리히 베렝가가 AD 1150년 13살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고 차남 프리드리히의 나이가 6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AD 1152년 콘라트 2세는 임종을 맞이하여 자신의 조카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3세를 후계자로 지명해야만 했다. 프리드리히 3세의 아버지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가 호엔슈타우펜 가문 소속이고 어머니 유디트가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9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3세의 즉위는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의 화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양가 모두에게 환영받았다. 이후 벨프는 AD 1152년 하인리히 10세의 이탈리아 영지였던 토스카나 변경백령과 스폴레토 공작령을 이어받아 이탈리아로 떠났다. 하지만 벨프 가문의 작센공작 사자공 하인리히가 성장하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새로운 정적이 된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시대

 

즉위와 황제 대관식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3세는 콘라트 3세와 함께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하면서 콘라트 3세의 주목을 받았고 후계자로 지명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콘라트 3세의 임종을 지킨 사람은 프리드리히 3세와 밤베르크 주교 뿐이었고 따라서 콘라트 1세가 프리드리히 3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을 들은 사람도 단 둘 뿐이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 대한 의혹은 있었으나 이의를 제기해야 할 콘라트 3세의 아들은 너무 어렸다. 결국 프리드리히 3세는 독일 제후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고 대신에 콘라트 3세의 아들 프리드리히가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3세는 아헨에서 정상적으로 즉위하여 프리드리히 1세로 명명되었는데 붉은 수염 때문에 이를 의미하는 '바르바로사(Barbarossa)'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해진다. 

 

프리드리히 1세의 황금 흉상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1세는 예전의 카롤루스 대제나 오토 대제와 같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동안 독일 왕위가 세습이 아닌 선거를 통해서 계승되면서 국왕의 권위가 많이 약화됐고 벨프 가문의 사자공 하인리히가 작센의 거대한 영지를 가진 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구축한 상태였다. 또한 이탈리아 남부 지방의 경우에는 시칠리아 왕국의 루지에로 2세의 지배권이 공고해진 상태였고 북부 지방도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피렌체와 같은 상업도시들이 막대한 부를 쌓으며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또한 전임 왕인 콘라트 3세는 평생 로마에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식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른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1세는 무엇보다 먼저 이탈리아로 가서 황제 대관식을 치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처음에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권에 대한 황제권의 우위도 되찾아 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독일왕으로 선출된 사실을 로마교황 유게니우스 3세에게 알렸지만 별도로 승인을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콘라트 2세가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와 체결한 동맹의 승인을 유보하여 시칠리아 왕국에게 위협받던 로마교황 유게니우스 3세를 압박했다. 이 당시 로마교황 유게니우스 3세는 로마교황의 세속적인 권력을 비판하는 종교개혁가 아르날도와 그를 지지하는 개혁파 세력에게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1세의 지원이 절실한 상태였다. 결국 AD 1153년 로마교황 유게니우스 3세가 프리드리히 1세에 대한 황제 대관식을 치뤄주는 대신에 프라드리히 1세는 로마교황령을 보호하고 시칠리아 왕국이나 아르날도 세력 등 로마교황청의 적대세력과 협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합의하는 콘스탄츠 조약이 체결되었다. 

 

 

제1차 이탈리아 원정

 

이제 프리드리히 1세는 황제 대관식을 치르고자 로마로 향하는 도중에 우선 북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북이탈리아의 자치도시를 공격하면서 평생 총 6번에 걸쳐 이루어질 이탈리아 원정의 첫번째를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AD 1155년 밀라노를 복속시키고 토르토나를 파괴한 뒤 이탈리아 왕위를 받았다. 그리고 로마로 입성하여 아르날도의 공화파 세력을 제압하며 아르날도를 처형하였고 비록 로마교황 유게니우스 3세는 이미 AD 1153년에 선종하였으나 그 뒤를 이은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는 약속대로 프리드리히 1세에게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해 주었다. 그러나 아르날도의 순교에 분노한 로마 시민들의 폭동이 일어나자 프리드리히 1세는 이를 무력으로 제압하였지만 여론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일단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와 함께 티볼리로 물러났다. 

 

프리드리히 1세는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가 AD 1154년 사망하고 그의 아들 굴리엘모 1세가 즉위한 틈을 노리고 남이탈리아까지 진군할 생각까지 했지만 독일 제후들이 지원을 거절하였고 독일을 너무 오래 비워두는 것이 불안하여 그대로 독일로 되돌아갔다. 이후 남이탈리아에서는 굴리엘모 1세의 지배를 반대하는 풀리아 귀족들이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마누엘 1세가 장군 미카일 팔라이올로구스를 보내어 AD 1155년 한 해 동안 남부 이탈리아의 바리, 트라니, 지오비나초, 안드리아, 타란토를 석권했다. 그리고 비록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가 굴리엘모 1세를 파문하며 동로마 제국을 지원했지만 곧이어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과 불화가 발생하고 굴리엘모 1세도 반격을 시작하면서 AD 1156년 남이탈리아 영토를 대부분 회복했다. 

 

 

제2차 이탈리아 원정

 

굴리엘모 1세가 로마교황령 베네벤토까지 공격했기 때문에 결국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는 굴리엘모 1세를 시칠리아섬과 이탈리아 남부의 카푸아와 나폴리의 지배자로 인정해주어야 했다. 비록 굴리엘모 1세와의 화친이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프리드리히 1세에게는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가 시칠리아 왕국과 임의로 화친하는 것을 금지한 콘스탄츠 조약을 위반한 것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는 AD 1157년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롤란드 추기경(나중의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을 통해서 편지를 보내서 황제 대관은 교황의 선물이고 독일 영토가 교황권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였기 때문에 황제권이 교황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던 프리드리히 1세를 자극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1세는 이번 기회에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회복하고 이전에 실시하지 못했던 시칠리아 원정까지 단행할 욕심에 AD 1158년 제2차 이탈리아 원정을 실시했다. 다만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독일을 비운 사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가장 큰 정적인 벨프 가문의 작센 공작 사자공 하인리히를 이번 원정에 동행시켰다. 프리드리히 1세는 사자공 하인리히를 무리하게 힘으로 누르기보다는 회유하는 방식을 택하여 AD 1156년 사자공 하인리히가 그토록 원하던 아버지 영지인 바이에른 공작령을 이미 되돌려 준 상태였다. 대신에 바이에른 공작령을 잃게 된 오스트리아 변경백 하인리히 야조미르고트에게는 그의 작위를 공작으로 승격시켜주는 것으로 무마하였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에 도착한 프리드리히 1세가 먼저 롬바르디아의 중심 도시인 밀라노를 점령하고 론칼리아 의회를 개최하여 일련의 행정개혁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이탈리아 북부의 상업도시들을 조직화하고 자신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포드룸(FODRVM)'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3만 파운드 가량의 은을 세금으로 내도록 하는 대신에 병역 의무를 면제시켰다. 이제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걷어들이는 막대한 세금을 바탕으로 많은 용병을 고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독일 제후에 대한 의존성을 많이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는 이탈리아 북부가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재편되는 것을 우려 속에 지켜보다가 AD 1159년 선종하였다. 

 

이제 후임 로마교황의 선출을 두고서 추기경단이 다시 둘로 나뉘어 대다수는 알렉산데르 3세를 로마교황으로 선출했지만 일부에서는 빅토리우스 4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웠다. 이에 양 측 모두 프리드리히 1세의 지지를 요청했고 고심끝에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에게 좀더 우호적인 대립교황 빅토리우스 4세의 지지를 선택하였다. 이에 따라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자연스럽게 시칠리아 왕국의 굴리엘모 1세의 지지를 받아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AD 1162년 상황은 프리드리히 1세에게 안좋게 흘러갔다. 그해 4월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프리드리히 1세에게 밀려 프랑스로 도피했지만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잉글랜드의 헨리 2세의 지지를 받아내면서 좀더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 또한 밀라노에서는 프리드리히 1세의 지배에 항거하는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밀라노가 많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많은 반감을 샀다. 더욱이 프리드리히 1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독일에서도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기 때문에 결국 프리드리히 1세는 AD 1162년 말에 독일로 돌아가야만 했다.

 

 

계속된 이탈리아 원정 실패와 영향력 상실

 

독일로 귀국한 후 통치 체계를 재정비한 프리드리히 1세는 AD 1163년 3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둘수가 없었다. 그 사이 로마에서는 AD 1164년 프리드리히 1세가 지지하던 대립교황 빅토리우스 4세가 사망하고 새로운 대립교황 파스칼리스 3세가 선출되었지만 AD 1165년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로마를 내주고 떠나야만 했다. 그러던 중 AD 1166년 시칠리아왕 굴리엘모 1세가 사망하자 이번에야 말로 이탈리아 영향력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로 여긴 프리드리히 1세가 4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다. 그리고 비록 처음에는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3세를 축출하고 대립교황 파스칼리스 3세로부터 다시한번 황제 대관을 받는 데 성공했지만 갑자기 진중에 말라리아가 유행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6년간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채 프리드리히 1세가 독일로 철군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밀라노, 베네치아, 만토바, 파도바, 브레시아, 로디를 비롯한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이 AD 1167년 12월 1일 롬바르디아 동맹을 결성하고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연대하면서 프리드리히 1세에게 대항하고 나섰다. 롬바르디아 동맹에 가입한 도시는 처음에는 16개였으나 나중에는 20개까지 늘어났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는 AD 1169년 우선 자신의 아들인 하인리히 6세를 독일왕으로 선출시키며 후계구도를 안정시켰고 6년 간의 휴전이 끝나는 AD 1174년이 되자 곧바로 5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롬바르디아 동맹 도시들과 벌인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하면서 이번에도 별다른 성과없이 AD 1175년 독일로 되돌아 가야만 했다. 

 

비록 프리드리히 1세가 이듬해 6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실시하였지만 계속해서 원정을 지원해 주던 작센-바이에른 공작 사자공 하인리히가 이번에는 지원을 거부하면서 레냐노 전투에서 롬바르디아 동맹에게 완벽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제 프리드리히 1세의 황제로서의 권위는 무참히 깨어졌고 롬바르디아 동맹 및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협상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AD 1176년 아나니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프리드리히 1세는 알렉산데르 3세를 로마교황으로 인정하였고 AD 1177년 베네치아 조약을 맺어 알렉산데르 3세와 공식적으로 화해했다. 그리고 롬바르디아 동맹도시들과도 베네치아 조약을 체결하여 6년 간의 휴전을 가진 후 AD 1183년 다시 콘스탄츠 조약을 체결하여 황제에 대한 명목상 충성 대신에 폭넓은 자치권을 보장해야만 했다. 이로서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권에 대한 황제권의 우위도,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영향력 회복에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사자공 하인리히의 몰락과 독일의 봉토 개편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에 대한 지원을 거절한 작센-바이에른 공작 사자공 하인리히에 대해 복수에 나섰다. 당초 프리드리히 1세는 사자공 하인리히를 회유하기 위해 많은 특권을 양보하였는데 사자공 하인리히는 엘베강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한 후 AD 1154년 이 지역에 대한 주교 임명권을 넘겨 받았고 AD 1158년 뮌헨과 뤼베크를 건설하여 뤼베크가 발트해로 연결되는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도록 했다. 또한 브라운슈바이크를 새로운 수도로 삼고 자신의 가문의 상징인 사자상을 세웠는데 이것이 그의 별명인 사자공이 유래한 배경이다. 그리고 AD 1168년 잉글랜드의 헨리 2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하고 AD 1172년에는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도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방문하여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에게 제왕 못지 않은 성대한 환영까지 받으면서 그의 위세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사자공 하인리히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프리드리히 1세는 물론 주변의 다른 독일 제후들도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 중에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브레히트 1세가 사자공 하인리히의 가장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알브레히트 1세는 AD 1123년 아버지 오토로부터 작센의 안할트 백작령을 물려받은 이후 세력을 급격히 확대하고 있었는데 AD 1134년 로타르 3세를 후원한 대가로 엘베 강과 하벨 강 합류지점 동쪽의 노르트마르크를 받았고 AD 1138년에는 콘라트 3세가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10세의 영지를 몰수할 때 작센 공작으로 임명받으면서 그 세력을 크게 확장시킨 상태였다. 비록 AD 1142년 콘라트 3세가 벨프 가문과 화해하면서 사자공 하인리히에게 작센 공작령을 다시 내주야 했으나 AD 1150년 하펠란트의 영지를 상속받았고 발트해 연안의 이교도인 벤트족과의 전쟁을 거듭하면서 AD 1157년에는 초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 임명받으면서 독일의 유력 제후로 성장한 상태였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브레히트 1세는 사자공 하인리히를 견제하기 위해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비히만, 튀링겐 백작 루트비히 3세, 쾰른의 대주교 라이날트와 함께 사자공 하인리히가 작센의 평화를 깨뜨리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가 법정 출두를 명령했으나 사자공 하인리히가 거절하자 AD 1180년 제국 의회를 열어 그의 2개 공작령을 비롯한 모든 영지에 대한 몰수를 선언하였다. 이렇게 되자 사자공 하인리히로서도 고립무원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프리드리히 1세에게 굴복하고 자신의 처가인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있는 노르망디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사자공 하인리히가 본래 상속받았던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의 소유 만 인정했을 뿐 나머지 영지는 모두 몰수한 후 이를 다른 제후들에게 분배하였다. 

 

쾰른 주교구와 파더보른 주교구를 베스트팔렌 공작령으로 개편하여 쾰른 대주교에게 넘겼고 나머지 작센 공작령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베른하르트에게 봉토로 부여했다. 또한 바이에른 공작령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오토에게 수여했고 안데흐 백작 베르톨트는 이탈리아의 메라니아 공작으로 임명받았다. 마지막으로 사자공 하인리히에게 예속되어 있던 폴란드 포메라니아의 보구슬라프 1세에 대해서는 봉신 서약을 받고 슬라비니아 공작으로 봉했다. 사자공 하인리히의 영지 재분배와 별도로 독일의 다른 영지도 재편하여 이미 AD 1168년에 뷔르츠부르크 주교에게 프랑켄 공작령을 넘긴 상태였고 AD 1178년에는 그동안 독일왕이 왕위를 겸직하던 부르군트 왕국을 아예 독일에 병합했으며 AD 1180년에는 케른텐 공작령에 속해 있던 슈타이어마르크를 분리하여 공작령으로 별도의 승격시켰다. 

 

 

로마교황과의 대립과 제3차 십자군 참여, 그리고 갑작스런 죽음

 

비록 프리드리히 1세가 독일 내 가장 강력한 정적이던 사자공 하인리히를 몰락시켰지만 그렇다고 프리드리히 1세의 왕권이 강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모든 귀족들이 국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잉글랜드 봉건제도와 달리 국왕이 아닌 자신의 상급 귀족에게만 봉신서약을 하면 되는 독일 봉건제도의 특성 때문이었다. 또한 여전히 왕위계승은 독일 유력 제후들에 의한 선거로 이루어져야 했고 이탈리아 북부에 대해서는 명목상 군주일 뿐 실제적인 지배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한번 회복하기 위해 AD 1186년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 6세를 시칠리아 왕국의 루지에로 2세의 유복녀 콘스탄차와 결혼시켰다. 그러자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3세가 이를 로마교황청에 대한 압박으로 여겨 크게 분개하였고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라노 대주교가 하인리히에게 이탈리아 왕의 대관식을 치뤄주자 파문해버렸다. 

 

이러한 프리드리히 1세와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3세의 불화는 트리어 대주교와 쾰른 대주교의 임명을 둘러싼 대립으로 크게 비화되었다. 비록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3세가 프리드리히 1세도 파문하려 했지만 AD 1187년 선종했기 때문에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로마교황으로 그레고리우스 8세가 선출되자 프리드리히 1세가 화해에 나섰다. 이때 AD 1187년 10월 2일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새로운 영웅으로 등장한 살라흐 앗 딘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의 호소에 따라 프리드리히 1세도 제3차 십자군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제3차 십자군에는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 사자심왕 리처드 1세도 동참을 선언하였으나 기사 2만명을 포함한 무려 10만명의 대군을 이끌게 된 프리드리히 1세는 단독으로도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며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을 기다리지 않고 AD 1189년 팔레스타인을 향해 먼저 출발하였다. 육로를 선택한 프리드리히 1세는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를 경유하여 AD 1189년 가을에 동로마 제국의 국경 안으로 진입했고 아나톨리아 반도에 상륙한 후 룸 술탄국의 수도인 이코니움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프리드리히 1세는 성지 예루살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AD 1190년 6월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동쪽 킬리키아의 살레흐 강을 건너던 중 물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1세의 전설

 

프리드리히 1세는 생전에 불타는 듯한 붉은 수염과 큰 키의 건강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뛰어난 검술과 말솜씨, 예의범절 등으로 인해 '기사도의 모범'이라고 불렸다. 실제로 AD 1184년 마인츠에서 아들들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면서 이상적인 생활 방식으로서의 기사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수천 명의 기사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역동적이고 강렬한 삶의 산 프리드리히 1세의 최후가 너무도 어이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가 사실은 죽지않고 튀링겐의 키르하우저 산 또는 바이에른의 운더베르크 산의 동굴에 그의 기사들과 함께 잠자고 있고 언제가 다시 깨어나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며 적들을 말끔히 무찌르고 독일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는 영웅 전설을 남기게 되었다. 이 전설은 이후 독일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회자되었고 AD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아돌프 히틀러가 소련침공의 작전명으로 '바르바로사 작전(FALL Barbarossa)'을 선택하는 배경이 된다.

 

 

하인리히 6세 시대

 

황제 즉위와 시칠리아 왕위 획득 실패

 

비록 프리드리히 1세가 사망하였으나 이미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6세가 AD 1186년 독일왕으로 즉위하여 독일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 승계는 아무런 이상없이 이루어졌다. 또한 프리드리히 1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사자공 하인리히가 재기를 노렸지만 하인리히 6세가 이미 토벌한 상태였다. 그리고 AD 1190년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자 하인리히 6세는 사자공 하인리히에게 옛 작센 공작령을 되돌려 주며 화해를 추진하였고 북서쪽의 브라반트 공작 헨드리크 1세와 에노 백작 바우드베인 5세도 영지를 부여하며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 이렇게 후방을 안정시킨 하인리히 6세는 이듬해인 AD 1191년 4월 이탈리아로 향하여 로마교황 켈레스티누스 3세로부터 정식으로 황제 대관식까지 치뤘다. 

 

한편 하인리히 6세의 황후가 시칠리아의 왕 루지에로 2세의 딸인 콘스탄차였기 때문에 AD 1189년 루지에로 2세의 손자 굴리엘모 2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을 때 하인리히 6세도 시칠리아 왕위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의 귀족들이 이를 거부하고 루지에로 2세의 또 다른 손자인 탕크레드를 왕으로 옹립했다. 이에 하인리히 6세는 무력으로 시칠리아 왕국을 차지하고자 이탈리아 남부로 군사를 이끌고 갔고 나폴리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칠리아 왕국의 귀족들이 격렬히 저항했고 바다에서 해군이 참패를 당했으며 때마침 하인리히 6세의 군대 안에서 전염병이 창궐했기 포위를 풀고 철군해야만 했다. 

 

 

시칠리아 재원정과 죽음

 

제3차 십자군에 참여했던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가 팔레스타인을 떠나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귀환 중 폭풍을 만나 베네치아 부근 해변에 상륙하는 일이 벌어졌다. 리처드 1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 도중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게 모욕을 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을 피하고자 신분을 위장했으나 AD 1192년 12월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레오폴트 5세는 리처드 1세를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겼고 하인리히 6세는 리처드 1세에게 석방해주는 대가로 자신에 대한 봉신 서약과 석방금으로 은화 10만 마르크를 지불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 원정을 추진할 때 추가적으로 5만 마르크의 자금을 지원하는 가혹한 조건을 모두 받아내었다. 이후 리처드 1세의 모후이자 프랑스 아키텐의 상속녀인 엘레오노르가 아들의 석방금을 모두 지급하면서 리처드 1세는 겨우 석방되어 잉글랜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리처드 1세의 석방금을 통해 막대한 군자금을 마련한 하인리히 6세는 다시 한번 시칠리아 왕국을 노리기 시작했다. AD 1194년 2월 시칠리아 왕 탕크레드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아들인 굴리엘모 3세가 불과 7살의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하인리히 6세에게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하인리히 6세는 먼저 AD 1194년 3월 그동안 인근 독일 제후들과 분쟁을 벌이던 사자공 하인리히와 화해하여 후방을 안정시켰고 AD 1194년 1월 롬바르디아 연맹 도시들과 베르첼리 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의 충성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거침없이 이탈리아를 횡단하여 11월 20일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를 점령하고 황후 콘스탄차와 공동으로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굴리엘모 3세는 거세하고 눈을 멀게 하였으며 수많은 시칠리아 귀족들을 살해하였다. 

 

하인리히 6세의 시칠리아 왕위 즉위식 다음날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태어났다. 하인리히 6세는 십자군 원정에도 참여하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에 어린 프리드리히 2세를 미리 독일 왕으로 선출시키고자 했지만 쾰른 대주교 아돌프의 반대로 난항을 겪어야 했다. 이에 하인리히 6세는 교회의 영지에 대해 세금을 감면해주는 방식으로 회유에 들어갔고 AD 1196년 12월 프리드리히 2세를 독일왕으로 선출시키는 데 겨우 성공했다. 이후 하인리히 6세가 독일을 떠나 시칠리아 왕국에 머물며 십자군 원정을 준비를 시작하였고 AD 1197년에 일어난 시칠리아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으나 AD 1197년 9월 28일 메시나에서 갑자기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벨프 왕조의 반격

 

오토 4세 시대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필리프와의 대립

 

하인리히 6세가 갑자기 죽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의 나이가 3살에 불과하자 독일 제후들은 하인리히 6세 생전에 프리드리히 2세를 미리 독일왕으로 선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독일 왕위에서 밀려난 어린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에서 모후 콘스탄차와 함께 공동으로 시칠리아 왕위에는 오를 수 있었다. 이제 독일에서는 다시 왕위계승선거가 치뤄졌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에서는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인 슈바벤 공작 필리프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오랜 정적인 벨프 가문에서는 사자공 하인리히의 아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오토를 각각 후보자로 내세웠다. 이렇게 독일 왕위를 둘러싼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의 대립이 심화되자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라인 강 유역의 유력한 독일 제후 4명인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팔츠백(궁중백)의 동의없이는 누구도 왕위에 오를 수 없다고 선언하였는데 여기에서 선제후의 지위가 유래하였다. 

 

그렇지만 이후로도 선제후들이 둘로 나뉜 채 AD 1198년 3월 호엔슈타우펜파 귀족들이 필리프를 독일 왕으로 선출하자 쾰른 대주교 아돌프가 이끄는 반대파가 같은 해 6월 벨프 가문의 오토를 독일왕 오토 4세로 추대하여 대립하였다. 다만 전통적으로 독일 왕위 대관식을 치뤄주던 쾰른 대주교가 오토 4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오토 4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룰 수 있었으나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여러가지 상징물들을 모두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조품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이후 오토 4세는 AD 1201년 오토 4세는 중부 이탈리아에 대한 로마교황의 권리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로부터 지지를 얻고 필리프를 파문하도록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AD 1204년이 되자 필리프가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보헤미아, 남동쪽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아 내면서 상황이 오토 4세에게 불리하게 흘러가지 시작했다. AD 1205년에는 쾰른 대주교 아돌프를 비롯한 오토 4세의 지지자들이 필리프의 편으로 돌아섰으며 이에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도 필리프를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다. 자신만만해진 필리프가 오토 4세에게 자신의 사위가 되면 슈바벤 공작령을 양도하겠다며 회유에 나섰으나 오토 4세가 거절하였다. 그러던 중 AD 1208년 필리프의 딸과 결혼하고 싶어했으나 거절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바이에른의 팔라틴 백작인 비텔스바흐의 오토가 필리프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필리프의 지지자들도 어쩔 수 없이 오토 4세를 왕으로 인정해야만 했고 오토 4세는 AD 120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선거에서 정식으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필리프의 큰 딸인 10세의 베아트릭스와 약혼하여 양 측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와의 대립

 

오토 4세는 이탈리아로 향하여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왕위에 오른 뒤 AD 1209년 10월 로마를 방문하여 황제의 대관식을 치뤘다. 이 때 오토 4세는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만나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가 왕위에 오른 시칠리아 왕국을 신성로마제국의 세력 안으로 편입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막상 황제의 대관까지 받자 오토 4세는 약속을 어기고 이탈리아 남부를 침공하였고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파문에도 게의치 않고 AD 1210년 11월 이탈리아 남부를 모두 점령하였다. 오토 4세의 세력에 의해 남북으로 포위될 위기에 처한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새로운 독일왕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이에 기존의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지지하던 독일 제후들도 뉘른베르크에 모여 프리드리히 2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선출했다. 그러자 위기에 몰린 오토 4세는 독일로 돌아와 약혼녀인 필리프의 딸인 베아트릭스와 결혼하여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지만 베아트릭스가 결혼 후 3주 만에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제 독일은 오토 4세와 프리드리히 2세를 두고 양분되었고 독일 남부의 여러 귀족들이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하였으나 오토 4세는 라인강 하류 지방과 북동부 독일에서 여전히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분쟁 중이던 잉글랜드 왕 존이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 플랑드르 백작 포르투갈의 페르난두와 불로뉴 백작 다마르탱의 레노와 함께 오토 4세에게도 지원을 요청하였다. 잉글랜드의 존도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불화를 겪고 있었고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 4세가 이 동맹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존이 프랑스 서부 지역에 상륙하는 것에 맞춰서 오토 4세의 독일군도 파리로 진군하기로 하였지만 AD 1214년 7월에 벌어진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의 부빈 전투에서 오토 4세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비록 오토 4세는 포로의 신세를 면한 채 간신히 도망쳤지만 이를 계기로 오토 4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AD 1215년 정식으로 폐위당한 후 3년 뒤에 사망하였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복귀

 

프리드리히 2세 시대

 

프리드리히 2세는 AD 1197년 아버지 하인리히 6세를 여의고 정당한 상속권이 있던 독일 왕위를 잃어버린 채 어머니 콘스탄차가 상속권을 보유한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지만 곧이어 콘스탄차마저 사망하면서 불과 3살의 나이에 고아가 되어 버렸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이탈리아식 이름인 페데리코 2세로 불리며 시칠리아 왕으로 살았지만 AD 1209년 오토 4세가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한 것을 두고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불화를 겪으면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프리드리히 2세는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지지를 바탕으로 AD 1212년 마인츠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독일 왕이 되었고 AD 1214년 오토 4세가 부빈전투의 패배로 몰락하자 AD 1215년 다시한번 아헨에서 대관식을 갖고 독일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그리고 AD 1220년에는 로마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황제의 대관까지 받는 데 성공하였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이후에도 여전히 시칠리아에만 머물렀고 독일은 아들 하인리히 7세를 독일왕으로 세운 뒤 통치를 위임했다. 

 

당초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왕으로 선출될 때 로마교황 호노리우스 3세에게 십자군 원정의 참여를 약속하였지만 2차례나 십자군 원정을 거절했다.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전에 이슬람교 무슬림의 영토였던 시칠리아 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이슬람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이 적었고 아랍어도 할 줄 알아 그들의 문화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AD 1225년 로마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AD 1227년 8월까지 십자군 원정을 실시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였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도 마지못해 십자군 원정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이를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이탈리아 북부도시에 대한 권리를 다시 주장하면서 다시 마찰을 빚었다. 

 

이탈리아 북부도시들은 예전에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맞섰던 롬바르디아 동맹을 재건하였고 처음에는 밀라노, 볼로냐, 브레시아, 만토바, 파도바, 비첸차, 트레비소로 구성되었으나 이후 몬페라토, 비안드라테, 피아첸차, 베로나, 로디 등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든 북이탈리아 도시의 모두가 반(反) 황제파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성로마황제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대신에 로마교황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을 꺼려하여 황제파가 된 도시도 있었다. 반황제파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대대로 경쟁을 벌이던 벨프 가문의 이름에서 유래한 '구엘프(Guelfi)'라고 불렸고 황제파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성 이름 바이블링겐에서 유래한 '기벨린(Ghibellini)'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구엘프와 기벨린은 도시 간, 혹은 도시 내 정파 간 대립을 벌이며 AD 13세기 내내 계속해서 투쟁을 벌이게 된다. 

 

 

제6차 십자군 참여

 

프리드리히 2세는 첫번째 황후인 아라곤의 콘스탄체와 사별하였는데 AD 1225년에는 예루살렘을 상실한 채 아크레에서 명맥만 유지하던 예루살렘 왕국의 욜란데와 결혼하고 그녀의 아버지인 브레멘의 장이 지니고 있던 예루살렘 왕위를 빼앗았다. 이로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명분이 확실해졌고 이에 AD 1227년 제6차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남이탈리아의 브란디시에서 또다시 병환을 이유로 지체했다. 더구나 프리드리히 2세의 예루살렘 왕위 계승의 명분이었던 황후 욜란데도 아들 콘라트를 남기고 사망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하였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도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AD 1228년 6월 브린디시 항구를 떠나야 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에 도착한 이후에도 곧바로 군사행동에 들어가지 않고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에 나섰다. 당시 알 카밀은 그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일족과 알레포 및 다마스쿠스의 총독의 반란으로 위기에 빠져 있어 예루살렘 방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의 십자군과 무리하게 싸우기보다는 예루살렘을 요새화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소유권을 넘기는 방안을 제안했다. 비록 종교기사단인 성 요한 기사단(구호기사단)과 성전 기사단이 반발하고 나섰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알 카밀의 조건을 모두 수용한 뒤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대관식을 치르고 정식으로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다. 

 

 

장남 하인리히 7세의 반역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사이 이탈리아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예루살렘 왕위에서 쫓겨난 욜란데의 아버지 브레멘의 장이 로마교황 호노타리우스 3세로부터 로마교황령인 토스카나의 총독으로 임명받고 군대를 모아 이탈리아 남부로 진격하였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에 총독을 남긴 후 이탈리아의 브린디시로 귀환하여 빠르게 실지를 회복했다. 다만 로마교황령은 직접 공격하지 않고 AD 1130년 로마교황 호노리우스 3세를 만나 협약을 맺었다. 이렇게 프리드리히 2세는 이탈리아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이번에는 독일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독일 통치를 위임받은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하인리히 7세가 독일 귀족들을 압박하면서 마찰을 빚고 있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AD 1232년 하인리히 7세를 소환하여 독일 제후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지내도록 요구했으나 독일로 돌아간 하인리히 7세는 여전히 공격적인 자세를 유지한 채 AD 1234년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7세는 프리드리히 2세와 마찰을 빚던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동맹도시들과 연합하여 프리드리히 2세가 알프스 산맥을 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자 하였으나 프리드리히 2세가 이를 뚫고 AD 1235년 독일에 도착하여 하인리히 7세의 지위를 박탈하고 감옥에 가뒀다. 그리고 둘째 아들인 콘라트를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한 뒤 2년후인 AD 1237년에 독일 왕 콘라트 4세로 세웠다. 또한 AD 1235년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여동생인 이자벨라를 세 번째로 결혼하여 잉글랜드와 동맹 관계를 구축했고 벨프 가문과도 화해하여 사자공 하인리히의 손자이자 신성로마황제 오토 4세의 조카인 오토를 브라운슈바티크-뉘렌부르크 공작으로 임명했다.

 

 

로마교황과의 대립과 독일 대립왕의 등장

 

AD 1237년 프리드리히 2세는 여전히 자신의 지배를 거부하는 이탈리아 북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무시하고 롬바르디나 동맹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롬바르디아 동맹의 반격을 당해 AD 1238년 브레시아에서 포위당하자 겨우 탈출하였으나 AD 1239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 엔초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세워 이탈리아 북부의 통치를 맡겼고 이후 엔초가 로마교황령을 공격하여 합병하였다. 이러한 황제와 교황의 대립에 이탈리아 도시들도 황제파인 기벨린과 교황파인 구엘프로 나뉘면서 큰 혼란에 휩싸였다. AD 1241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프리드리히 2세를 단죄하기 위한 공의회를 소집하였지만 기벨린 도시인 피사와 프리드리히 2세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한 채 8월 선종하였다. 

 

후임 교황으로 켈레스티누스 4세가 선출되었지만 2주만에 사망하고 인노켄티우스 4세가 다시 즉위하였다. 이후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프리드리히 2세와 협상을 벌여 잠시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근본적으로 프리드리히 2세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AD 1244년 제노바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의 리옹으로 탈출하여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보호를 요청했다. 그리고 AD 1245년 리옹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나 프리드리히 2세의 방해로 150명의 주교만 참석한 가운데 위증, 평화방해, 신성모독, 이단혐의로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과 폐위를 선언하고 독일 제후들에게 새로운 왕을 선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독일의 마인츠 대주교와 쾰른 대주교를 비롯한 독일 제후들이 모여 튀링겐 백작 하인리히 라스페를 대립왕으로 선출했고 AD 1247년 그가 죽자 네덜란드의 홀란트 백작 빌렘을 다시 대립왕으로 선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2세는 여전히 시칠리아 왕국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오히려 프리드리히 2세는 후사가 단절된 오스트리아 공작령까지 차지하였고 아들인 콘라트 4세가 바이에른 공작 오토 2세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여 바이에른의 지원까지 받았기 때문에 독일 남부에서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엘프(황제파)였던 갑자기 파르마가 구엘프파(교황파)로 돌아서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변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파르마의 배신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은 채 포위 공격에 나섰고 도중에 매사냥을 즐길 정도로 방심하고 있었으나 AD 1248년 파르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충격은 총애하던 아들인 엔초가 AD 1249년 볼로냐에 사로잡혔다는 것이었다. 

 

파르마 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로마냐, 마르케, 스폴레토가 차례로 구엘프파로 돌아섰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가 코모와 모데나까지 상실했지만 로마냐, 마르케, 스폴레토는 곧바로 회복하였다. 또한 독일에서도 아들 콘라트 4세가 대립왕 빌렘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프리드리히 2세도 이젠 늙고 병들었기 때문에 AD 1250년 12월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독일 사람 중 일부는 프리드리히 2세도 그의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1세와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을 믿지 않은 채 프리드리히 2세도 죽지 않았고 에트나 산의 동굴에 숨어 있으며 언젠가 부활하여 자신의 왕국을 재건할 거라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콘라트 4세 시대

 

프리드리히 2세는 임종시 이미 독일왕이 된 차남 콘라트 4세에게 자시이 지니고 있던 시칠리아 왕위와 이탈리아 왕위, 예루살렘 왕위를 모두 넘겼다. 다만 예루살렘 왕위의 경우에는 AD 1244년 예루살렘을 다시 상실했기 때문에 명목상에 불과했다. 그리고 서자인 만프레디에게는 타란토 대공국을 상속시켰고 독일에 머물러야 하는 콘라트 4세를 대신하여 섭정이 되어 시칠리아 왕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도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먼저 죽은 장남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에게는 오스트리아 공작령과 슈타이어마르크 변경백령을 상속했다. 

 

이렇게 프리드리히 2세의 유산이 정리된 후 콘라트 4세가 독일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대립왕 빌렘에게 패배한 채 독일에서 축출되었다. 그러자 콘라트 4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세력 만이라도 넓히기 위해 AD 1252년 베네치아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 남부로 진격하여 이듬해 나폴리를 점령했다. 그리고 시칠리아 왕국의 섭정이 되어 있는 동생 만프레디를 굴복시키고 시칠리아 왕국에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콘라트 4세도 로마교황청과 화해하는 데는 끝내 실패하여 AD 1254년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로부터 파문당한 채 AD 1254년 갑자기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단절

 

독일의 대공위 시대

 

콘라트 4세의 아들로는 콘라딘이 유일했지만 2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독일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고 대립왕 빌렘도 AD 1256년 사망했기 때문에 독일 왕위는 공석이 되었다. 이후 독일 왕위 선출 권한을 가진 선제후로 마인츠 대주교 ,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 라인 팔츠백의 4명 이외에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추가되며 총 6명으로 결정되었으나 차기 왕을 두고 독일 제후들이 크게 둘로 나뉜 채 대립하기 시작했다. 한 에서는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를 추대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카스티야 왕 알폰소 10세를 내세웠다. 콘월 백작 리처드는 프리드리히 2세의 처남이었고 카스티야 왕 알폰소 10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인 베아트리스의 아들이었다.

 

비록 혈연적으로는 카스티야 왕 알폰소 10세가 호엔슈타우펜 왕가와 더 가까웠지만 카스티야 왕이 독일왕까지 겸임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이에 콘월 백작 리처드가 막대한 뇌물을 뿌리며 독일 왕위에 대한 강한 야심을 들어냈다. 결국 독일 왕위 선출권을 보유한 6명의 선제후 중 3명(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 라인 팔츠백)이 콘월 백작 리처드를 지지하고 나머지 3명(트리어 대주교,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카스티야 왕 알폰소 10세를 독일 왕으로 선출하면서 서로 팽팽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 루이 9세와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알폰소 10세를 지지하였고 명목상으로는 독일 제후 중 하나이지만 사실상 독립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가 알폰소 10세의 손을 들어주면서 알폰소 10세가 승리했다. 하지만 알폰소 10세는 적대 관계를 가진 이탈리아의 기벨린 도시들의 방해로 독일에 대관식을 치르러 갈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콘월 백작 리처드의 부인인 산치아와 자매 관계인 루이 9세의 왕비 마르그리트와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왕비 엘레오노르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당초 알폰소 10세를 지지하던 프랑스 왕 루이 9세와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모두 콘월 백작 리처드의 편으로 돌아섰다. 결정적으로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도 콘월 백작 리처드를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변경하였고 알폰소 10세와 달리 리처드는 아무런 방해없이 독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독일의 아헨으로 향하여 AD 1257년 5월 쾰른 대주교 집전으로 대관식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알폰소 10세를 지지하는 세력은 여전히 리처드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처드와 알폰소 10세의 지지 세력 중 어느 쪽도 실질적으로 독일을 장악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더욱이 알폰소 10세는 물론 리처드 역시 독일에 제대로 머물지도 않았기 때문에 독일 왕위는 사실상 비어있는 '대공위 시대'가 20여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대공위 시대는 AD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가 왕으로 선출되면서 겨우 종식된다.

 

 

시칠리아 왕국의 호엔슈타우펜 왕가 단절

 

한편 시칠리아 왕국은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된 이후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로마교황령으로 편입하고자 했지만 콘라트 4세의 동생인 만프레디가 콘라트 4세의 2살짜리 어린 아들인 콘라딘을 명목상 시칠리아 왕으로 선포하고 섭정이 되어 실질적인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AD 1254년 새로운 로마교황으로 선출된 알렉산데르 4세는 만프레디를 파문하고 AD 1255년 4월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아들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임명했다. 비록 만프레디가 교황군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AD 1258년 8월 10일 콘라딘이 죽었다는 거짓 소문 속에서 정식으로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지만 로마교황청과의 대립은 여전했다. 결국 AD 1261년 새로운 로마교황이 된 우르바누스 4세는 전임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약속을 무효화하고 새롭게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동생인 샤를 드 앙주를 끌어들였고 최종적으로 만프레디가 AD 1266년 2월 베네벤토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기 때문에 시칠리아 왕국의 호엔슈타우펜 왕조도 단절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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