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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국어/현대문학 540

땅끝, 나희덕 [현대시]

땅끝 나희덕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좇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개관 - 제재 : 중의적..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박태원, 세태소설 [현대소설]

● 줄거리 구보는 동경 유학까지 하고 돌아와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는 글쟁이보다는 월급쟁이가 몇 갑절 낫다고 생각한다.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스물 여섯 살짜리 아들이 외출을 하면 어머니는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구보는 집을 나와서 천변길을 걷다가 한낮의 거리 위에서 두통을 느끼다가 왼편 귀의 기능에 스스로 의혹을 품는다.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하여 화신상회 백화점을 들어가다가 아이를 동반한 어떤 부부를 보고 자신은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지를 생각해 본다. 밖으로 나온 그는 동대문행 전차를 타고 가면서 자신이 고독을 지독히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에 맛선을 본 여인이 막 전차에 오르는 것을 본다. 어머니께서 아는 집안의 딸로서 ..

간격, 안도현 [현대시]

간격 안도현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개관 - 성격 : 상징적, 성찰적 - 표현 : 나무를 인격화하여 인간의 삶과 관련된 의미를 부여함. 전후를 대비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강조함. - 제재 : 간격(울창한 숲의 필수 조건 → 사회적 관계의 완성을 위한 필수 조건) - 거리, 기다림의 의미 - 주제 : 적당한 간격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 중요시어 및 시구..

속리산에서, 나희덕 [현대시]

속리산에서 나희덕 가파른 비탈길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은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시어 풀이 *선망(羨望) : 부러워하여 바람.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속리산을 오르면서 얻게 된 깨달음을 바탕으로, 치열한 경쟁 속..

오후의 구도, 김광균 [현대시]

오후의 구도 김광균 바다 가까운 노대(露臺) 우에 아네모네의 고요한 꽃방울이 바랍에 졸고 흰 거품을 물고 밀려드는 파도의 발자최가 눈보라에 얼어붙은 계절의 창밖에 나즉이 얼어붙은 조각난 노래를 웅얼거린다 천정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시 하 -- 얀 기적소리를 남기고 고독한 나의 오후의 응시 속에 잠기여가는 북양 항로의 깃발이 지금 눈부신 호선(弧線)을 긋고 먼 해안 우에 아물거린다 기인- 뱃길에 한배 가득히 장마를 싣고 황혼에 돌아온 적은 기선이 부두에 닻을 나리고 창백한 감상(感傷)에 녹슬은 돛대 위에 떠도는 갈매기의 날개가 그리는 한줄기 보표는 적막하려니 바람이 울 적마다 어두운 카-텐을 새여오는 보이얀 햇빛에 가슴이 매여 여윈 두 손을 들어 창을 나리면 하이-헌 추억의 벽 우엔 별빛이 하나 눈을 감으..

죽고 난 뒤의 팬티, 오규원 [현대시]

죽고 난 뒤의 팬티 오규원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者)도 아닌 죽은 자(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 갈래 : 자유시, 산문시 - 성격 : 풍자적, 비판적, 자기성찰적 표현 및 특징 ① 일상어와 산문체의 율조로 자아와 현대인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② 자의식을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를 통해 현대인의 소시민적 자화상을 풍자하고 있다..

무서운 시간, 윤동주 [현대시]

무서운 시간 윤동주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잎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呼吸)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는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마오. 어구 풀이 * 무서운 시간 :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화자가 자신의 양심과 마주하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성찰의 시간을 의미함 * 나를 부르는 것 : 내면의 소리, 화자의 양심 *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 : 나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희망을 보여 줌 *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한 *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

봄, 이성부 [현대시]

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목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개관 - 제재 : 봄('너') → 희망의 이미지,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 겨울 뒤에 반드시 찾아오는 계절 / 화자가 현실에 정착되기를 염원하는 민주와 자유의 상징 - 주제 : 봄(새로운 시대, 자유와 평화의 새 시대)의 도래..

자화상 2, 오세영 [현대시]

자화상 2 오세영 전신이 검은 까마귀, 까마귀는 까치와 다르다. 마른 가지 끝에 높이 앉아 먼 설원을 굽어보는 저 형형한 눈, 고독한 이마 그리고 날카로운 부리. 얼어붙은 지상에는 그 어디에도 낱알 한 톨 보이지 않지만 그대 차라리 눈발을 뒤지다 굶어 죽을지언정 결코 까치처럼 인가의 안마당을 넘보진 않는다. 검을 테면 철저하게 검어라. 단 한 개의 깃털도 남기지 말고...... 겨울 되자 온 세상 수북이 눈을 내려 저마다 하얗게 하얗게 분장하지만 나는 빈 가지 끝에 홀로 앉아 말없이 먼 지평선을 응시하는 한 마리 검은 까마귀가 되리라. * 형형한 : 광채가 반짝반짝 빛나며 밝은 핵심 정리 갈래: 자유시, 서정시 성격: 의지적 주제: 올곧은 지조와 기개를 지키려는 의지 특징: 까마귀를 의인화하여 화자가 지..

길의 노래, 이기철 [현대시]

길의 노래 이기철 내 마지막으로 들 집이 비옷나무 우거진 기슭이 아니면 또 어디겠는가 → (내 마지막으로 들 집)무덤 연지새 짝지어 하늘 날다가 깃털 하나 떨어뜨린 곳 어욱새 속새 덮인 흙산 아니고 또 어디겠는가 ⇒ 죽음에 대한 상념 마음은 늘 욕심 많은 몸을 꾸짖어도 → (마음/몸)대조적 표현 몸은 제 길들여온 욕심 한 가닥도 놓지 않고 붙든다 → 욕망의 현실성 도시 사람들 두릅나무 베어내고 그곳에 채색된 丹靑 올려서 → (도시 사람들)인간중심적이고 이기적인간 → (채색된 단청)정신적 가치 , 욕심과 낭비 다람쥐 들쥐들 제 짧은 잠, 추운 꿈 꿀 혈거(穴居)마저 줄어든다. → (혈거) 절실한 생존 공간 ⇒ 인간 문명의 이기심 고발 먼 곳으로 갈수록 햇빛도 더 멀리 따라와 내 여린 어깨를 토닥이는 걸 보..

엄마 걱정, 기형도 [현대시]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개관 - 제재 : 외롭고 슬픈 어린 시절의 추억 - 주제 : 시장에 간 엄마를 걱정하고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 / 외롭고 두려웠던 유년에 대한 회상 - 성격 : 회상적, 서사적, 애상적, 감각적, 고백적 - 표현 *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통하여 동시적 분위기를 형성함. * 유사한 문장의 반복과 변조를 통해 리듬감 형성 *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엄마의 고된..

눈 오는 지도, 윤동주 [현대시]

눈 오는 지도 윤동주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장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 버린 역사처럼 훌훌히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로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그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내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개관 - 화자 : 순이와 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안타까워 하는 사람 - 주제 : ..

고향길, 신경림 [현대시]

고향길 신경림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 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미 수북한 쇠전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 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만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 되어 떠나려네 개관 - 성격 : 서정적, 향토적, 애상적 - 표현 * 향토색 짙은 시어 및 소재의 활용 * 고향에 대한 화자의..

설날 아침에, 김종길 [현대시]

설날 아침에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 쉬고 파릇한 미나리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개관 - 성격 : 주지적, 희망적, 긍정적 - 표현 : 평범한 시어와 간결하고 압축된 표현으로 건강한 삶의 자세를 표출함. / 현실에 대한 긍정과 미래 지향..

난(蘭), 박목월 [현대시]

난(蘭) 박목월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 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나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해설 전체 3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문장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고 합니다. 더도 덜도 아닌, 바로 '이쯤에서' 화자는 '하직'을 소망합니다. 여기서 '하직'이란 시어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단순하게 아랫사람이 웃어른에게 말하는 작별 인사가 아닌, 버리고 떠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버리고 떠나기 - 법정 스님의 수필 가 떠오른 구절입니다. 첫 문장에서 이 시의 주제가 무..

나무 1, 지리산에서, 신경림 [현대시]

나무 1 -지리산에서- 신경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주제 : 나무를 통해 깨달은 바람직한 삶의 자세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나무를 길러 본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가에 대..

사랑하는 별 하나, 이성선 [현대시]

사랑하는 별 하나 이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춰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 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이해와 감상 사람들은 누구나 외롭고 힘들 때, 진심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대상을 찾게 된다. 그리고 자신 또한 타인에게 힘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이 시는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따뜻한 존..

해, 박두진 [현대시]

해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 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 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 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현대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현대시]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 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 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 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개관 - 주제 : 젊은 날의 삶에 대한 반성적 인식 - 성격 : 비유적, 성찰적 - 표현 : 영탄적이고 애상적인 어조 / 시를 쓰고 있는 시점보다 훨씬 ..

그의 반, 정지용 [현대시]

그의 반 정지용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金星), 쪽빛 하늘에 흰꽃을 달은 고산식물(高山植物),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 나간 시름의 황혼(黃昏) 길 위 ― 나 ―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개관 - 제목 : '그의 반'이라는 제목은, 그가 없이는 자신도 없다는 것으로 '그'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에 꼭 필요한 것임을 강조한 표현임 - 주제 : 절대적 존재에 대한 경배와 묵도 - 성격 : 관념적, 독백적,..

외인촌, 김광균 [현대시]

외인촌 김광균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뭍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

침향(沈香), 서정주 [현대시]

침향(沈香) 서정주 침향(沈香)을 만들려는 이들은, 산골 물이 바다를 만나러 흘러내려 가다가 바로 따악 그 바닷물과 만나는 언저리에 굵직굵직한 참나무 토막들을 잠거 넣어 둡니다. 침향은, 물론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 잠근 참나무 토막들을 다시 건져 말려서 빠개어 쓰는 겁니다만, 아무리 짧아도 2 ~ 3백 년은 수저(水底)에 가라앉아 있은 거라야 향내가 제대로 나기 비롯한다 합니다. 천 년쯤씩 잠긴 것은 냄새가 더 좋굽시요. 그러니, 질마재 사람들이 침향을 만들려고 참나무 토막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내다가 육수(陸水)와 조류(潮流)가 합수(合水)치는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나 자기들 아들딸이나 손자 손녀들이 건져서 쓰려는 게 아니고, 훨씬 더 먼 미래의 누군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후대들을..

능금, 김춘수 [현대시]

능금 김춘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개관 - 제목 '능금' : 구체적 대상이 아니라, '관념적 이데아'의 육화(肉化) - 주제 ..

배를 밀며, 장석남 [현대시]

배를 밀며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시어 풀이 희번덕이는 : 몸을 젖히며 번득이는. 여기서는 ‘물결이 빛에 반짝거리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추락(墜落) : 높은 곳에서 떨어짐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연정..

절정(絶頂), 이육사 [현대시]

절정(絶頂)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견디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그것을 넉넉한 관조(觀照)의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강인함을 절제된 언어로 보여 주고 있다.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상징적, 남성적, 지사적 * 제재 : 현실의 극한 상황 * 주제 : 극한 상황에서의 초월적 인식 * 특징 ① 한시의 ‘기 - 승 - 전 - 결’의 구조와 유사한 형식임. ② 역설적 표현을 통해 주제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함. ③ 강렬한 상징어와 남성적 어조로 강인한 의지를 표출함. ..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현대시]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개관 - 주제 : 인내와 희생을 통한 사랑의 실천 - 성격 : 여성적, 명상적, 상징적, 불교적 - 표현 * 경어체 사용으로 경건한 분위기 연출 * 불교적 명상을 바탕으로 한 상징세계 형상화 * 수미쌍관의 기법으로 시적 완결성 획득 * 당신을 위한 헌신적 기다림이 ..

멧새소리, 백석 [현대시]

멧새소리 백석 처마 끝에 명태(明太)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門)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1. 갈래 - 자유시, 서정시 2. 표현 - ① 감각적 시어의 사용(시각, 촉각) ② 평서형의 단정적 종결 (객관적 어조로 진술의 타당성 확보) ③ 제목과 상반된 내용 서술 (현실의 부당성을 부각함) ④ 동일한 시구의 반복 3. 주제 - 냉혹한 세상을 살아가는 어려움. 1. 시적 화자 - 명태를 보고 있는 나 2. 시적 대상 - 명태 3. 시적 대상의 특징 ① 꽁꽁 얼었다 ② 길다랗고 파리한 ③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4. 시간적 배경의 특..

등산, 오세영 [현대시]

등산 오세영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 확고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절벽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의 벌레처럼 무명(無明)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바람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한다. 행복이라든가 불행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 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개관 - 제재 : 등산 → 정상(목표)에 이르는 과정 - 주제 : 삶에 대한 진지한 깨달음(목표보다 목적이 중요하다는 인식) - 성격 : 비유적, 상징적, 불교적 - 표현..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현대시]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손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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