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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내전,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 Alea Jacta Est), 루비콘강, 파르살루스 전투, 폼페이우스의 죽음, 클레오파트라

Jobs 9 2021. 5. 1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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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내전

카이사르 내전

제1차 삼두정치의 붕괴

 

BC 56년 루카 회담에 따라 BC 55년 집정관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나란이 선출되고 이듬해 전직 집정관 신분으로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로, 크라수스는 시리아로 각각 원하는 속주의 총독이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삼두정치 일원 중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진압 이외에는 별다른 군사적 업적이 없던 크라수스가 동방의 파르티아 원정을 야심차게 추진하였으나 BC 53년 카르하이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하여 제1차 삼두정치의 한 축이 무너져버렸고 더욱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연결해주던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이미 전년도에 병사한 상태였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결혼동맹도 깨져 있었다. 

 

비록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퇴역병사에 대한 토지지급을 승인하지 않은 원로원에 대한 반감으로 카이사르의 제1차 삼두정치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술라의 원로원 중심 통치체제를 옹호하는 벌족파이고 갈리아 전쟁을 통해 얻은 카이사르의 군사적 명성을 시기하고 있었다. 집정관 임기 종료 후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의 속주 총독으로 임명받았으면서도 부임지로 가지 않고 로마에 머물며 부관을 통해 대리통치를 하고 있었고 그 사이 원로원 보수파에 설득당해 점차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1차 삼두정치는 붕괴되었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마침내 충돌하게 된다.

 

 

로마 진군

카이사르 내전,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 Alea Jacta Est), 루비콘강

갈리아 전쟁 동안 카이사르는 계속된 승전보로 로마 시민들 사이의 인기가 매우 높아졌지만 제1차 삼두정치를 이용하여 로마 원로원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위험인물로 취급되고 있었다. BC 50년에 카이사르의 속주 총독 임기가 만료되자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카이사르로서는 만약 자신이 군사 지휘권을 내어놓고 로마로 돌아온다면 차기 집정관에 선출되기 전까지 아무런 공직을 갖지 않은 채 무방비로 적들을 상대해야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더욱이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지원을 받아 이미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모든 군대 지휘권을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중재안으로 BC 49년 1월 1일 폼페이우스와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는 안을 원로원에 전달하였으나 원로원은 이를 거부하고 카이사르에게 지휘권을 내놓치 않으면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겠다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내렸다. 

 

평화적인 해결책이 사라지자 카이사르는 주저없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였다. 카이사르는 신속성을 위해 갈리아 군대 중 이탈리아에 가장 가까이 주둔 중이던 제13군단만 이끌고 BC 49년 1월 10일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 Alea Jacta Est)”라는 말과 함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넜다. 당시는 아직 군사행동에 적합하지 않은 겨울이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북이탈리아에서 숙영지를 편성하고 겨울을 보낼 것을 생각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러한 로마 원로원의 예상을 깨고 신속하게 남하했다. 이와 함께 로마 안에서 호민관의 지위로 카이사르를 돕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원로원 최종권고 이후 로마를 탈출해 카이사르와 합류하자 카이사르는 이 둘에게 각각 군사를 나누어 주어 안토니우스에게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레초를 공격하도록 했고 쿠리오에게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페사로, 파노, 안코나를 공격하게 했다.

 

갑작스러운 카이사르의 진군에 놀란 로마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황급히 로마를 버리고 도망쳤고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자발적으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남하 중에도 지속적으로 폼페이우스에게 회담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아직 휘하에 제13군단 밖에 거느리지 못한 카이사르와는 달리 숫적으로 폼페이우스가 훨씬 우세함에도 허를 찔린 폼페이우스로서는 군대를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브린디시에서 카이사르의 포위망을 뚫고 그리스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내전을 해결하고 싶었으나 이제 내전의 장기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히스파니아 정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그리스로 떠난 뒤 3월 25일 베네벤토와 3월 26일 카푸아에 입성하여 남이탈리아 평정을 마무리하고 4월 1일 수도인 로마에 입성했다. 당시 집정관이었던 가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마요르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가 모두 폼페이우스를 따라갔기 때문에 로마에는 최고 통치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법무관으로 선출시켜 수도 로마의 통치를 맡기고 카이사르는 자신은 뒤쫓아 온 3개 군단과 합류하여 4월 7일 히스파니아로 떠났다. 당시 폼페이우스의 세력은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 동방 속주에 걸쳐 퍼져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그 전에 배후의 안전을 먼저 확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모르는 폼페이우스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호민관 자격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군권을 맡기고 그의 동생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에게 전함 40척을 이끌고 이탈리아와 그리스 사이의 아드리아 해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히스파니아로 출발한 카이사르는 엄청난 속도로 행군하여 4월 17일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이 지휘하는 군대가 있는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갈리아의 나머지 군단과 합류하는 한편 로마 점령 후 확보한 막대한 국고를 이용하여 군함 12척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달 정도 마실리아를 공격하던 카이사르는 마실리아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에게 3개 군단을 맡기고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 새로 건조된 군함들을 맡겨 각각 지상과 해상에서 마실리아를 공격하도록 한 후 자신은 나머지 6개 군단, 보병 2만 7천명과 기병 3천기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6월 22일 바르셀로나에서 서쪽으로 130km 떨어진 레리다에 도착했다. 당시 레리다에는 히스파니아의 두 속주 총독인 폼페이우스를 대신하여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가 부총독으로 부임해 있었고 5개 군단과 현지 병력 4만 8천명을 포함한 총 7만 8천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세그레 강에서 급작스런 홍수를 만나 보급선이 차단당하면서 고전하였으나 작은 배를 연결한 다리를 이용하여 세그레 강을 건너면서 고립상태에서 벗어났다. 

 

이후 카이사르는 일레르다 바로 아래쪽에 흐르는 슈리스 강의 물줄기를 일부 바꾸어 자기 진영으로 흐르도록 만들어 이번에는 폼페이우스 군의 보급선을 차단하였다. 이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폼페이우스 군의 탈영병이 급증했고 형세가 불리해지자 후퇴하였으나 카이사르의 추격을 받아 8월 2일 결국 항복해야만 했다. 이후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다시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으나 이를 어기고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에 합류하게 된다. 9월 6일 오랫동안 버티던 마실리아가 함락되고 카이사르가 9월 17일 남쪽 끝의 카디스에 도착한 후 다시 북상하자 9월 25일 타라고나에서 2개 군단을 보유했던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였다. 이로서 히스파니아는 완전히 카이사르의 수중으로 떨어졌고 카이사르는 로마로 되돌아가 폼페이우스와의 직접 대결을 준비하게 된다.

 

 

북아프리카 원정 실패와 디라키움 공방전의 패배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원정을 떠난 동안 쿠리오에게 2개 군단을 맡기며 폼페이우스의 추종 세력이 있는 속주 총독으로 있는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정벌을 지시했고 안토니우스에게는 40척의 군함을 맡기며 그의 동생인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와 함께 폼페이우스와의 직접적인 대결에 앞서 아드리아 해에 대한 제해권을 유지하도록 지시한 상태였다. 처음에 쿠리오는 시칠리아의 방어를 담당하던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가 그리스의 폼페이우스에게 도망가는 바람에 별다른 전투없이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그 곳의 2개 군단을 흡수하였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에서는 원로원파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온 누미디아 왕인 유바 1세와 BC 49년 8월 24일 바그라다스 강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쿠리오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또한 가리우스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도 폼페이우스의 노련한 해군제독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에게 패해 보유했던 군함 40척을 모두 잃어버렸다. 히스파니아 원정 성공으로 고무된 카이사르 측에게는 뼈아픈 일격이었다.

 

히스파니아 원정을 마친 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법무관인 레피두스에 의해 독재관에 취임하여 로마의 민심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10일간 각종 조치를 취한 뒤 BC 48년 집정관에 선출된 뒤 곧바로 독재관 지위를 사임하고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을 위해 브란디쉬로 향하여 병력을 집결시킨 후 BC 48년 1월 4일 마침내 그리스로 향했다. 이때 선박이 부족하여 카이사르 자신이 제1진으로 보병 1만 5천명과 기병 500기를 이끌고 먼저 출발했고 다음날 폼페이우스 측의 감시를 뚫고 그리스 해안에 무사히 도착하였으나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진의 출발을 위해 되돌려 보낸 선박들은 폼페이우스 측 함대에 발각되어 모두 침몰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 1월 5일에 오리쿰을, 1월 7일에 아폴로니아를 차례로 점령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제2진으로 편성된 보병 1만 명과 기병 800기가 천신만고 끝에 아폴로니아 북쪽의 닌페움에 상륙해 4월 3일 카이사르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로마의 영토 중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갈리아, 히스파니아가 카이사르의 지배를 받았고 나머지 그리스, 북아프리카, 동방 속주들이 폼페이우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상태였다. 그 중에서 폼페이우스가 차지한 속주들이 카이사르의 속주보다 더 부유한 편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세금이 폼페이우스 측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서 물러날 때 데려온 군단과 동방의 각 속주에서 불러모은 군단을 포함하여 무려 11개 군단이 넘는 대병력을 보유하여 카이사르의 병력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호기롭게 폼페이우스 군에 대한 대규모 포위망 구축에 나섰지만 폼페이우스도 직접 대결 대신에 소모전으로 일관하면서 전투가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3개월 간의 소모전 끝에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 군에 의해 포위망이 돌파당했다. 본래부터 병력의 열세를 보이던 카이사르 군은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패배하면서 거의 괴멸에 가까운 큰 피해를 입은 채 테살리아로 후퇴해야만 했다. 

 

 

파르살루스 전투의 결정적 승리

 

폼페이우스는 디라키움 공방전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뒤쫓지 않고 여전히 소극적 태도를 일관했다. 이러한 폼페이우스의 소극적 태도 덕분에 카이사르는 테살리아를 손쉽게 장악하였고 흩어진 병력을 모으면서 재기를 도모했다. 뒤늦게 폼페이우스도 추격을 시작하면서 디라키움 공방전의 2달 뒤인 8월 9일에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2번째 대결이 벌어지게 되었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 군은 약 2만 2천명이었고 폼페이우스 군은 그 2배가 넘는 4만 5천명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우측면을 집중공격하기 위해 정예기병 7천기를 좌익에 배치하고 그 지휘를 티투스 라비에누스에게 맡겼다. 라비에누스는 갈리아 전쟁 당시 카이사르의 부하로 참전하였으나 내전이 시작되자 폼페이우스 측으로 전향한 상태였다. 이에 대항하여 카이사르 역시 자신의 우측면이 취약한 것을 눈치채고 갈리아 전쟁 당시부터 활약한 고참 병력을 우익의 기병 뒤에 배치하고 카이사르 자신도 우측면에 위치하였다.

 

파르살루스 전투가 시작되자 처음에는 폼페이우스의 예상대로 카이사르의 우익 기병대를 손쉽게 물리쳤다. 그러나 그 배후에 대기하고 있던 카이사르의 고참 병사들은 당황하지 않고 반격에 나섰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중장보병으로 하여금 먼 거리를 달리게 하여 지키도록 만든 후 역습에 나서고자 하였으나 7년간 카이사르와 함께 갈리아의 수많은 전장을 누빈 카이사르의 고참 병사들은 스스로 진격을 멈춘 후 호흡과 전열을 가다듬은 뒤 재차 돌격에 나섰다. 이에 폼페이우스가 기병대를 투입하였으나 이번에도 카이사르의 고참 병사들은 기병을 막지 않고 그대로 통과시킨 뒤 배후의 다른 카이사르 군과 함께 포위해버렸다. 이로서 폼페이우스가 처음에 계획하였던 기병대를 좌익에 집중하여 카이사르 군의 배후를 돌아서 공격하는 전술이 봉쇄되고 말았다.

 

초반 열세를 딪고 우익의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 군은 그대로 폼페이우스 군의 좌익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폼페이우스의 좌익 기병대가 모두 괴멸된 상태였고 카이사르의 고참 병사들이 교묘하게 폼페이우스 군의 오른쪽 배후로 돌아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전황이 점점 폼페이우스 군에게 불리해져 갔다. 결정적으로 카이사르가 최후방에 남겨 둔 예비병력까지 투입하자 폼페이우스 군도 더이상 버티지 못했다. 이미 오랜 전투를 벌이며 지칠데로 지친 폼페이우스 군으로는 후방에서 대기하며 힘을 비축한 카이사르의 예비병력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폼페이우스도 견디지 못하고 라리사로 달아났다. 폼페이우스 군은 1만 5천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나 카이사르 군의 피해는 2백명에 불과할 정도로 카이사르의 대승이었다. 

 

 

폼페이우스의 죽음과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밀회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하자 동방 속주들이 카이사르 편으로 돌아섰고 카이사르는 그라에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3개 군단을 맡겨 동방 속주를 수습하도록 하였다. 동방 속주마저 돌아서자 폼페이우스는 시리아 속주로 향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북아프리카로 가서 재기를 도모하고자 우선 이집트로 향했다. 당시 이집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BC 55년 이집트 내전에 개입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복위를 도운 적이 있었다. BC 51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누나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여 공동통치자로 즉위한 상태였으나 폼페이우스는 여전히 이집트가 자신을 지원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막상 9월 28일 폼페이우스가 도착하자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들이 폼페이우스를 살해하고 만다. 

 

폼페이우스를 추적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참수된 머리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 머무는 동안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에 권력다툼이 발생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의 세력을 이용하여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접근했고 이에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공동통치자로 이집트를 지배하도록 중재했다. 이에 반발한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병력이 적은 카이사르를 공격하였고 이에 카이사르는 동방 속주에 파견보낸 도미티우스의 3개 군단 중 2개 군단을 이집트로 차출했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버티는 동안 지원병이 도착했고 결국 BC 47년 3월 27일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군대는 패배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도 도망치다가 익사하고 말았다. 이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2달 동안 나일강을 유람하는 등 연인관계로 발전했고 나중에 진짜인지 의심스러운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다. 

 

 

폰투스 정벌과 폼페이우스 잔당 토벌

 

카이사르가 이집트에서 밀회를 즐기는 사이 아나톨리아 반도의 폰투스가 로마 내전의 혼란을 틈타 세력 확대에 나섰다. 처음에는 시리아 속주를 맡은 도미티우스가 폰투스 군을 공격하였으나 카이사르가 이집트 내란에 개입하면서 2개 군단을 차출했기 때문에 결국 폰투스 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BC 47년 6월 이에 카이사르가 직접 아나톨리아 반도로 향했고 BC 47년 6월 파르나케스 2세의 폰투스 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에 보고하는 승전보고서에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는 또 하나의 명언을 남겼다. 

 

폼페이우스가 죽은 이후에도 북아프리카는 여전히 카이사르에 반기를 들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속주에는 폼페이우스의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그리고 히스파니아에서 카르사이에게 거짓약속을 한 후 폼페이우스에게 합류했던 페트레이우스와 아프라니우스가 있었다. 이들은 10개 군단에 달하는 병력과 누미디아 왕국의 지원까지 받고 있었지만 BC 46년 4월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누미디아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이들을 모두 괴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즉각 누미디아로 처들어 가 누미디아 왕국도 멸망시켰다. 탑수스 전투에서 패배한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페트레이우스, 카토는 자살하고 누미디아의 왕인 유바 1세도 자결을 선택했으며 아프라니우스는 도적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북아프리카의 폼페이우스 잔당을 모두 토벌한 카이사르는 로마로 되돌아 가 개선식을 거행했지만 이듬해 히스파니아에서 탑수스 전투에서 살아남은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부하장수였다가 폼페이우스 편으로 돌아섰던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모아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카이사르는 다시 히스파니아 원정을 떠났고 문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지막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모두 토벌했다. 그나이우스와 라비에누스는 전사하였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만이 겨우 시칠리아로 도망칠 수 있었다. 탑수스 전투를 마지막으로 마침내 내전은 끝났고 로마는 이제 카이사르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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