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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동서분열,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서로마 제국 멸망, 제노의 유일한 로마 황제 등극

Jobs9 2021. 5. 1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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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등장

 

로마 제국의 제2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탄생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누스 1세는 AD 324년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이후 이미 유명무실해진 수도 로마를 대신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미 수도 로마는 3세기의 위기를 거치면서 황제가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곳으로 전락하였고 디아클레티니아누스가 로마 원로원의 입법기능마저 박탈하면서 더이상 수도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는 황제가 있는 곳이 바로 수도가 되었고 사두정치를 통해 이탈리아 본토의 통치를 담당하게 된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도 수도 로마가 아닌 밀라노에 주둔했을 정도로 수도 로마의 위상은 바닥에 떨어져 버린 상태였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새로운 수도의 건설을 추진했고 이에 선택된 곳이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를 이어주는 지역에 위치한 비잔티움(현재의 이스탄불)이었다. AD 324년부터 AD 330년에 걸친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재탄생한 비잔티움에 대해 콘스탄티누스 1세는 "새로운 로마(Nova Roma)"이란 명칭을 붙였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이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수도 로마에 이은 제국의 2번째 수도가 되었고 동방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동서분열

AD 293년 로마의 군인황제시대를 종식시키고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른바 사두정치를 실시하면서 2명의 정제와 2명의 부제가 로마는 크게 동서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이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방책이었을 뿐 디아클레티니아누스가 '선임 황제(Senior Augustus)'로서 로마 제국의 최고 통치자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군통수권자가 4명이나 존재하기 때문에 디아클레티니아누스의 퇴임 이후 내전이 벌어졌고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1세도 자신의 사후에 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에게 제국을 나누어 상속하면서 여러 명의 공동 황제가 로마 제국을 분할 통치하는 관례가 이어졌다. 그리고 AD 394년 로마 제국을 재통합한 테오도시우스 1세도 AD 395년 임종시에 자신의 사후에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로마를 동서로 나누어 지배하도록 하였다. 비록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을 영구히 분할할 생각을 없었지만 이후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은 반목을 거듭하면서 제국의 분열이 점점 고착화되었고 특히 서로마 제국은 훈족과 게르만족의 침공을 받으며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비잔티움 제국의 호칭 문제

 

비잔티움 제국이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리된 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홀로 남은 동로마 제국을 이전의 로마 제국과 구분하여 근대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이다. AD 1557년 독일의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옛 이름인 비잔티움에서 착안하여 최초로 불렀고 이것이 일반화되면서 고착화 되었다. 그러면서 동로마 제국의 성격이 고대 로마 제국과 많이 달라져 사실상 다른 나라인 것처럼 취급하는 풍조가 생겼다. 언어와 문화 면에서 그리스적인 색채를 띄기 시작했고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제 통치사상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종교적으로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유럽 역사의 '고대'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중세' 시대가 열렸다고 여기는 것도 이러한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다만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으로 구분하는 것은 지극히 서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다. 동로마 제국 사람들은 스스로는 여전히 자신의 나라를 "로마"로 불렀고 동로마 제국과 충돌하게 되는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과 이슬람 세력도 여전히 동로마 제국을 '로마(Rum)'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으로 구분하여 지칭하는 배경에는 AD 800년 서유럽의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카롤루스 1세)가 로마 교황의 대관식을 통해 서로마 황제를 계승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카롤루스 대제와 이를 계승한 신성로마제국이야말로 진정한 로마 제국의 계승자이며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인의 나라일 뿐이라고 폄하했던 것이다. 

 

사실 동로마 제국의 특징으로 지칭되는 것들 대부분이 로마 제국 후기의 유산이다. 로마 제국을 동서로 분할하여 통치하는 것과 전제군주정의 도입은 디오클레티니아누스의 개혁에서 유래한 것이었고 동로마 제국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그리스 문화도 이미 로마 공화정 시절부터 교양인의 필수덕목으로 장려되던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도 이미 테오도시우스 1세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것이었다. 오히려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과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모든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로마 제국 그 자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사실은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한 뒤에 망명한 동로마 제국의 학자들에 의해 중세 문화를 거부하고 고대 문화의 부활을 추구한 서유럽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명백히 알 수가 있다.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르카디우스 시대

 

서고트족의 위협 및 서로마 제국의 스틸리코와의 대립

 

테오도시우스 1세로부터 동로마 제국을 물려받은 아르카디우스는 즉위 당시 17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권신인 플라비우스 루피누스가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즉위 직후인 AD 395년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이 포이데라티(동맹부족) 협정을 파기하고 발칸 반도 남동부의 트라키아를 침공하였으나 이를 방어하지 못하고 서로마 제국의 총사령관인 스틸리코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당시 수도 로마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유게니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데려갔던 군대가 그대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스틸리코가 군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에 상륙하여 동로마 제국의 군대 지휘권까지 인수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까지도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서로 다른 나라로 분열된 것은 아니라고 인식한 것을 보여준다. 

 

어쨌든 스틸리코는 서고트족을 격퇴하였으나 평소 스틸리코와 사이가 좋지 못하던 루피누스가 스틸리코가 그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할 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도록 만들었고 이에 아르카디우스는 스틸리코에게 수도 로마로 되돌아 갈 것을 요구했다. 스틸리코는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순순히 철수하였지만 오히려 동로마 제국으로 돌아온 가이나스의 고트족 용병이 루피누스를 살해하였다. 그 배후로 스틸리코가 지목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은 스틸리코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고 동로마 제국 속주에 있던 스틸리코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동로마 제국은 점점 더 서로마 제국과 멀어지게 되었다.

 

이후로도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이 재차 발칸 반도를 공격하였고 연례적으로 발칸 반도를 공격하였고 스틸리코가 이를 물리치지만 스틸리코가 동로마 제국을 노린다고 의심한 아르카디우스는 스틸리코를 냉대했고 오히려 알라리크의 관심을 이탈리아 반도로 돌리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에 인접한 일리리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일리리쿰 속주를 서로마 제국에게 분할했던 테오도시우스 1세의 유언에 반하는 것으로 명백히 월권이었으나 결국 동로마 제국의 의도대로 알라리크는 이제 발칸 반도가 아닌 이탈리아 반도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번히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을 막아내던 스틸리코도 AD 408년 황제 자리를 노린다고 의심한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에게 숙청되었기 때문에 AD 410년 수도 로마는 서고트족에게 약탈당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황후 에우독시아의 전횡

 

아르카디우스 즉위 초기 국정을 장악했던 루피누스가 암살당한 이후에도 아르카디우스는 제국의 통치에 관심이 없어서 루피누스의 정적이었던 환관 에우트로피우스가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에우트로피우스에 의해 아르카디우스의 황후가 된 아일리아 에우독시아가 아르카디우스의 총애를 받으면서 상황이 변했다. 에우독시아에게 푹 빠진 아르카디우스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에우트로피우스를 숙청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도 쫓아냈다. 그러나 에우독시아도 AD 404년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그로부터 4년 뒤인 AD 408년에는 아르카디우스도 사망하면서 이제 동로마 제국은 7살에 불과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맡겨졌다. 

 

 

 

테오도시우스 2세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테오도시우스 법전

 

아르카디우스의 맏아들로 테어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즉위 당시 7살에 불과하여 아르카디우스 말년부터 두각을 나타낸 민정 총독 안테미우스가 섭정이 되었다. 안테미우스는 유능한 행정가이자 외교관으로서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향후 거의 천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 주게 되는 테오도시우스 성벽도 건설했다. 그러나 안테미우스가 AD 414년 사망하였고 테오도시우스 2세는 그림과 필사본을 만드는 취미에 몰두할 뿐이었기 때문에 2살 연상의 누나인 풀케리아가 15살의 나이에 섭정이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AD 425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이 곳에서 학자들을 모아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의 모든 로마법을 집대성하는 작업을 펼쳐 AD 438년 《테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us)》을 공포하였다.

 

 

 

훈족의 위협과 공물 외교

 

테오도시우스 2세 치세의 동로마 제국은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과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에 대해서는 군사적으로 대응하는 강경책을 사용했지만 북쪽에 새롭게 등장한 유목민족인 훈족에 대해서는 공물을 제공하여 달래는 유화책을 활용하였는데 AD 421년 훈족의 왕 루아가 트라키아를 침공하자 매년 금 350만 파운드를 제공하겠다는 조건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AD 434년 서로마 제국이 펼친 북아프리카를 차지한 반달족에 대한 원정 지원이 실패로 끝났고 때마침 훈족의 왕 루아가 죽고 공동 왕으로 즉위한 블레다가 동로마 제국의 공물 제공량을 늘리도록 요구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훈족에게 제공해야 하는 공물의 양이 350만 파운드에서 700만 파운드로 2배 늘어났다. 

 

AD 439년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이 시칠리아 섬을 공격하자 동로마 제국에서도 병력을 지원하였고 이 틈을 타고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자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동서로 양분되었다. 이로 인해 발칸 반도의 방어력이 취약해지자 훈족의 블레다는 AD 441년 마르구스, 나이수스, 소피아, 플로브디브, 에디르네, 이레글리 등의 발칸 반도의 도시들을 유린하고 AD 442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하였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황금 6천만 파운드를 일시불로 지불하고 매년 2,100 파운드를 지급하는 엄청난 조건을 약속하고 나서야 겨우 훈족의 블레다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후 AD 443년 블레다가 급사하고 그의 동생인 아틸라가 훈족의 단독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아틸다는 동로마 제국보다는 서로마 제국에 더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일단 훈족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스도교 네스토리우스파의 이단배격

 

테오도시우스 2세 치세 시절 그리스도교는 아리우스파의 이단 배격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가 예수 그시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인성과 신성의 서로 다른 2개의 위격을 가지고 있다는 '이성설(二性說)'을 설파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대주교인 키릴루스가 가장 크게 반발하면서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루스가 설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가장 큰 논쟁은 성모 마리아를 두고 키릴루스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칭호를 사용한 데 반해 네스토리우스는 성모 마리아가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이라며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라는 칭호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렇게 네스토리우스 학파의 교리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자 AD 431년 제3차 공의회인 에페소스 공의회를 통해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비록 테오도시우스 2세가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였으나 키릴루스가 섭정인 풀케리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고 네스토리우스파를 반대하던 로마 교황 켈레스티누스 1세가 키릴루스에게 공의회 진행을 위임하자 키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안티오키아의 주교들의 도착이 늦어지는 것을 이용하여 네스토리우스의 이성설을 이단으로 선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2세는 AD 435년 네스토리우스를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유배보내야 했지만 네스토리우스파는 박해를 피해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으로 피신하였고 그의 주장을 추종하는 네스토리우스파는 중앙 아시아를 넘어 중국의 당나라까지 전파되어 '경교'라는 이름으로 한때 번성하게 된다.

 

 

마르키아누스 시대

 

마르키아누스 즉위와 훈족에 대한 공납 중단

 

테오도시우스 2세는 평생 정치를 누나인 풀케리아에게 맡겼다. 풀케리아는 독실한 신앙심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맹세한 채 본래 황후를 뜻하는 '아우구스타(AUgusta)'의 칭호로 불리며 단호하고 강인한 성품으로 제국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테오도스우스 2세의 황후인 아일리아 에우도키아는 이를 못마땅해 했고 풀케리아도 지나치게 그리스 사상에 심취한 에우도키아를 싫어했다. 따라서 풀케리아와 에우도키아는 사사건건 부딪쳤고 한때 풀케리아가 에우도키아에게 환관 파울리누스와의 간통의 누명을 씌워 예루살렘에 은거하게 만들었으나 그녀 자신도 AD 441년 환관 크리사피우스의 음모로 수도원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AD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사냥을 나갔다가 아들도 없이 낙마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풀케리아는 황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풀케리나는 트라키아 출신의 장군인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하여 그를 황제로 세우고 자신은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풀케리아는 이미 독신을 맹세했기 때문에 결혼은 마르키아누스의 황제 즉위를 위한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아 당연히 둘 사이에 자식도 없었다. 마르키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 2세 시절에 실권을 장악하고 훈족에게 거액의 공물을 제공하는 조건을 수락했던 환관 크리사피우스를 숙청하고 훈족에 대한 거액의 공물 제공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훈족의 아틸라가 서로마 제국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동로마 제국은 당장 큰 위협은 없었고 AD 453년 아틸라가 급사하면서 훈족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훈족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마르키아누스가 훈족에 대한 공납금 부담을 제거하자 그동안 중과세에 신음하던 원로원 계층에 대한 세금을 감면하였고 관직을 유지하는 비용도 줄여 매관매직의 부정부패도 방지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 단성론의 등장

 

AD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된 이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논란은 중단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며 '정교성(Orthodoxy)의 방어자'로 칭송받고 있던 키릴로스의 신조를 이어받은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신학자 유티메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서로 융합되었으며 마치 포도주가 바다에 빠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인성도 신성에 흡수되어 하나의 본성만 남았다"는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m)'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단성설에 따라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아니라 단지 신적 존재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인류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논란이 크게 일었다. 결국 AD 451년 마르키아누스에 의해 제4차 공의회인 칼케돈 공의회가 열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보유했고 섞이거나 변화되거나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는다"라는 로마 교황 레오 1세의 주장이 정통 교리로 선택되어 단성론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또한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엄격히 구분한 네스토리우스파도 이단으로 재확인되었다.

 

이렇게 하여 유티케스의 단성론은 이단이 되었지만 정통 교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키릴로스의 "육화하신 하나의 본성"이라는 표현을 이어받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본성이 육신을 취해 두 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단성론을 지지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스코로스와 안티오키아의 주교 세베루스는 이것이야말로 이단으로 단죄된 네스토리우스파와 같은 생각이라며 비판하였다. 결국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교구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구에서는 칼케돈 공의회 결의를 거부하며 또 한번의 그리스도교 분열이 일어났다.

 

이후 알렉산드리아 교구와 안티오키아 교구에서는 단성론파가 큰 세력을 형성하면서 칼케돈 공의회에서 채택된 칼케돈 신조를 신봉하는 정통 교회와 대립하며 향후 각자 콥트 정교회와 시리아 정교회로 분리된다. 이와 별도로 이 즈음 아르메니아에서도 칼케돈 신조를 부정하면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로 독립한다. 동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에서는 단성론파가 워낙 큰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동로마 황제들도 이들을 일방적으로 이단으로 단죄하기를 주저하였고 오히려 황실에서도 단성론을 지지하는 세력이 득세하는 등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을 혼란으로 몰고가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단절

 

마르키우스는 유능한 행정관으로서 동로마 제국의 재정을 풍족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재위 7년 만인 AD 457년 사망하고 말았다. 이미 풀케리아가 AD 453년 사망하였고 마르키아누스와 풀케리아의 결혼이 형식상이었으므로 당연히 자식도 없어서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게르만족 출신의 장군인 플라비우스 아르다부르 아스파르에 의해 레오 1세가 황제로 옹립되면서 새로운 레오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전까지 로마 제국은 비록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1개의 국가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공동 황제 중 1명이 사망하면 그 통치지역에 대해서도 나머지 황제가 통치권을 회수하여 직접 통치하거나 후임 황제를 임명하면서 간접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미 AD 455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사망하면서 서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단절되었고 이제 동로마 제국에서도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단절되면서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을 이어주던 혈연적인 관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더욱이 서로마 제국의 실권도 게르만족 출신의 장군인 플라비우스 리키메르가 장악하면서 서로마 황제가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왕위계승을 간섭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지면서 양국의 분열이 고착화되어 진다.

 

 

 

레오 왕조

 

레오 1세 시대

 

아스파르의 레오 1세 옹립

 

게르만족의 일파인 알라마니족 출신인 아스파르는 테오도시우스 2세 시절에 발탁되어 군사령관(마기스테르 밀리툼) 지위까지 올랐다. AD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아들없이 사망하자 차기 황제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출신이 게르만족이고 로마 제국에서 이단으로 선포된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격이 없었다. 이에 아스파르는 로마인 장군인 마르키아누스를 지지하여 테오도시우스 2세의 누나인 폴케리아와 결혼하는 방식으로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마르키아누스가 재위 7년만에 사망하면서 다시 차기 황제를 선택할 기회가 아스파르에게 찾아왔고 이번에는 자신의 부하이자 집사인 레오 1세를 황제로 옹립했다. 레오 1세는 트라키아 출신의 로마인으로 삼위일체론의 정통 그리스도교 신자였기 때문에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었다. 이 덕분에 레오 1세는 AD 457년 2월 무난하게 차기 황제로 즉위하였지만 테오도시우스 왕조와 아무런 혈연적인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정통성 확보를 위해 즉위식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아나톨리우스의 제관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동로마 황제의 즉위식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거행하는 관행이 만들어졌다.

 

레오 1세는 즉위 이후 서로마 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AD 457년 마요리아누스의 서로마 황제 즉위를 인정했지만 AD 461년 리키메르가 마요리아누스를 살해한 뒤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새로운 서로마 황제로 세우자 이에 대한 승인은 거절하였다. 그리고 AD 465년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사망하자 마르키아누스의 사위인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임명하여 수도 로마로 보냈는데 안테미우스가 레오 1세의 즉위 당시부터 유력한 황제 후보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레오 1세로서는 잠재적인 위협을 함께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후 레오 1세는 리키메르가 안테미우스의 딸과 결혼하여 서로마 제국의 실권을 유지하는 것을 그대로 묵인하였고 AD 468년 안테미우스와 연합하여 북아프리카를 차지한 반달족에 대한 대규모 원정도 계획하였다. 하지만 총지휘를 맡긴 처남 바실리스쿠스가 북아프리카 상륙 이후 항복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달라는 반달족의 왕 가이세르크의 계략에 넘어가면서 기습공격을 허용하는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이후 30년간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레오 1세와 아스파르의 대립

 

레오 1세는 황제가 된 이후 자신을 황제로 옹립한 아스파르가 한동안 막후 실세로 권세를 누리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만 레오 1세는 아스파르의 꼭두각시 노릇만 할 생각을 없었다. 우선 레오 1세는 아스파르를 지지하는 게르만족 군대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부지방에 살던 산악민족인 이사우리아족을 병사로 받아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근위병의 상당수를 이사우리아족으로 교체하고 AD 466년에는 이사우리아족의 족장인 타라시코디사를 자신의 첫째 딸인 아리아드네과 결혼까지 시키며 힘을 실어 주었다. 이후 타라시코디사는 자신의 이름을 동로마식의 플라비우스 제노로 변경하였고 아스파르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항마로 떠오르게 된다. 

 

레오 1세의 견제에 대하여 아스파르는 반격의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고 AD 468년의 반달족 원정 대실패로 레오 1세의 입지가 약화된 틈을 타고 레오 1세의 둘째 딸과 자신의 아들인 율리우스 파트리키우스를 강제로 결혼시킨 후 파트리키우스를 로마 제국의 황태자에 해당하는 부제(caesar)로 선포하였다. 이러한 아스파르의 전횡에 위기를 느낀 레오 1세는 AD 471년 아스파르를 궁중으로 초대하여 암살해버렸다. 아스파르는 사망했고 함께 파트리키우스만 부상을 입은 채 겨우 살아남았다. 

 

이렇게 하여 아스파르가 사라졌지만 트라키아에 살던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보가 아스파르의 트라키아 군사령관 지위를 요구하고 나섰다.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보의 누이가 아스파르의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레오 1세는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보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그가 동고트족을 이끌고 트라키아를 유린하는 것은 막아내지 못했다. 결국 레오 1세는 AD 473년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보와 평화조약을 맺어야 했는데 동고트족이 트라키아에 정주하고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보가 아스파르의 지위를 이어받아 트라키아의 군사령관이 되며 동로마 제국은 매년 금 2천 파운드를 공납금으로 동고트족에게 지불하는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이렇게 하여 동고트족이 사실상 트라키아에서 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제노 시대

 

최초의 이민족 로마 황제 즉위

 

AD 474년 2월 레오 1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맏사위인 제노가 가장 유력한 황제 후보였다. 그러나 제노는 이민족인 이사우리아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레오 1세는 제노와 자신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레오 2세를 차기 황제로 지명하고 사망하였다. 다만 레오 2세의 나이가 7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를 보좌하기 위해 제노가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 2세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요절하면서 제노가 동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민족 출신인 제노의 황제 자리는 안정되지 못했고 결국 레오 1세의 처남인 바실리스쿠스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자신의 누나이자 레오 1세의 황후인 엘리아 베리나가 바실리스쿠스의 반란을 지지하고 이사우리아족 출신의 장군인 일루스까지 배신하자 제노는 폐위된 채 이사우리아로 도망쳤다. 

 

이렇게 하여 바실리스쿠스가 새로운 동로마 황제로 즉위하게 됐지만 이사우리아족을 학살하고 중과세 정책을 실시하여 점차 인기가 떨어졌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는 단성설을 신봉했는데 이미 AD 451년 그리스도교 관련 제4차 공의회의 칼케돈 공의회에서 단성설이 부정되었기 때문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결정적으로 AD 47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화재가 발생하자 민심이 크게 이반되었고 일루스까지 레노에게 다시 전향하면서 바실리스쿠스는 AD 477년 7월 폐위된 채 겨우 목숨만 건저 카파도키아로 유배되었고 제노가 다시 황제로 복위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제노의 유일한 로마 황제 등극

 

서로마 제국에서는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호노리우스와 그 후예들이 모두 어리거나 무능하여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촉발된 위기를 극복해내지 못했고 결국 리키메르와 같은 게르만족 출신의 장군이 서로마 황제를 마음대로 옹립하고 폐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AD 476년에는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킨 뒤 명목상이던 존재하던 서로마 황제 자리도 비워두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이후 오도아케르는 제노에게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자신이 이탈리아 왕이 되는 것을 승인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이미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를 장악했고 서로마 제국의 영토도 이탈리아와 달마티아(지금의 크로아티아)로 축소된 채 다른 지역은 모두 게르만족이 차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노도 어쩔 수 없이 이를 승인했다. 이렇게 하여 서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가 폐지되었고 제노 만이 합법적인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제노는 어렵게 황제로 복위했지만 이제는 일루스의 영향력이 너무 막강해져 버렸다. 제노는 일루스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이에 반발한 일루스가 AD 484년 이탈리아의 오도아케르와 동맹을 맺고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일루스의 반란은 4년이나 끌었으나 결국 AD 488년에 진압되었고 일루스는 처형되었다. 이제 제노의 다음 상대는 오도아케르가 되었다.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 왕으로 만족하지 않고 AD 482년에 달마티아를 점령하였고 일루스의 반란 당시에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까지 침범한 바 있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레오 1세 당시의 반달족 원정 대실패와 일루스의 반란의 후유증으로 대규모 원정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제노는 판노니아에 자리잡고 있던 테오도리쿠스의 동고트족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동고트족 테오도리쿠스 1세의 이탈리아 점령

 

테오도리쿠스의 동고트족은 트라키아에 자리잡고 있는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보의 동고트족과는 또 다른 일파로서 본래 훈족에 종속되어 서로마 제국과 카탈라우눔 전투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훈족이 와해된 후 AD 457년 판노니아로 흘러들어간 후 동로마 제국과 포이데라티(동맹부족) 협정을 맺었고 이후 동고트족 왕자인 테오도리쿠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볼모로 가서 로마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AD 471년 테오도리쿠스는 동고트족의 족장이 되어 하(下)모이시아로 진출하였고 이에 제노는 테오도리쿠스를 회유하기 위해 AD 483년에 군사령관에 임명하고 이듬해 집정관의 지위까지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하는 등 점점 테오도리쿠스의 동고트족을 제어하기 힘들어 했다. 이에 제노는 동고트족의 힘을 다른 방향으로 분출시키는 한편 이를 이용하여 이탈리아의 오도아케르도 물리치는 방안을 생각해내었고 AD 488년 테오도리쿠스에게 이탈리아를 점령하면 이탈리아의 왕으로 임명하는 조건으로 출병할 것을 명령했다.

 

테오도리쿠스는 제노의 명령을 받아들여 총 10만명에 달하는 동고트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처들어갔다. 오도아케르가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AD 489년 이손조의 전투와 밀라노의 전투, AD 489년 아다의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하였다. AD 490년 8월이 되자 오도아케르는 수도인 라벤나에 고립되었고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테오도리쿠스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에 오도아케르는 AD 493년 3월에 항복하였지만 테오도리쿠스는 연회에 초대하여 오도아케르를 살해하였고 이탈리아의 라벤나를 수도로 하는 동고트 왕국을 세우고 스스로 테오도리쿠스 1세로 즉위하였다. 비록 동고트 왕국은 공식적으로 여전히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테오도리쿠스 1세의 지위는 동로마 제국의 총독에 불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간섭은 크지 않아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다만 테오도리쿠스 1세는 로마인을 로마법에 따라 통치하겠다는 약속은 지켰고 고트족의 전통적인 법과 관습은 동고트족에게만 적용했다. 그리고 프랑크족, 서고트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등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게르만족 왕국들과 동맹을 맺고 38년간 안정적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며 '대왕(the Great)'으로 칭송받게 된다.

 

 

교회의 아카키우스 분열

 

오도아케르가 죽고 이탈리아 반도에 테오도리쿠스 1세의 동고트 왕국이 들어서면서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는 외부세력이 모두 사라졌다. 그동안 호전적이던 북아프리카의 반달족도 AD 477년 가이세리크가 사망한 이후에는 동로마 제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도 테오도시우스 2세 시절인 AD 442년 체결한 평화조약에 따라 더 이상 전쟁이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종교적인 요인으로 마찰이 일어났다. AD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단성론파가 잠시 황제 자리를 찬탈한 바실리쿠스의 지원 속에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과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직을 차지하며 다시 큰 세력을 형성한 것이었다. 이에 제노는 복위후 단성론자와 정통론자의 화해를 위해 AD 48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아카키우스의 이론에 기초한 통합 칙령인 '헤노티콘(Henoticon)'을 발표하였다. 

 

헤노티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대로 인정하였지만 신성과 인성의 관계 부분에 대해서는 모호한 자세를 취했다. 이 때문에 로마 교황인 심플리키우스가 반발하였으나 당시 중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AD 483년 로마 교황이 된 펠리스 3세도 헤노티콘을 반대하면서 승인을 거부하였고 오히려 AD 484년 단성론자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페트루스 몽구스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페트루스 풀로를 해임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아카키우스와 함께 모두 파문하였다. 그러자 아카키우스도 로마 교황이 다른 교구의 총대주교보다 지위가 높다는 교황수위권을 부정하면서 로마교황 펠릭스 3세를 로마 주교로 격하시켜 부르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성찬예배 중 로마 교황을 위한 기도 부분도 삭제하는 식으로 맞대응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교 교회가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의해 동서로 나뉘는 아카키우스 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 시대

 

AD 491년 4월 제노가 죽자 동로마 제국에서는 이민족 출신 황제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황후인 아리아드네가 궁중 의전관인 61세의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와 결혼하면서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수려한 외모와 소박하고 공정한 성품을 지녀 인기가 좋았던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황제가 되자마자 공공지출을 최대한 억제하고 세제를 개혁하면서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었고 매관매직 행위를 근절시켰으며 밀고자에 대한 보상도 폐지하면서 동로마 제국을 일신하였다. 그러나 제노의 동생인 플라비우스 롱기누스가 이사우리아족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사우리아족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축출하였고 롱기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유배보내야 했다. 

 

AD 502년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서 예로부터 북방 유목민족이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공격하기 위해 내려오는 통로인 카프카스 지방의 방위를 위해 소요되는 비용을 동로마 제국도 분담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거절하면서 전쟁이 발생했다.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AD 502년에 아르메니아의 에르주룸을 점령하였고 AD 503년에는 티그리스의 디야르바르크까지 차지하자 결국 아나스타시우스 1세도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AD 506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빼앗은 동로마 제국의 요새를 되돌려받는 조건으로 방위분담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발칸 반도의 북쪽에서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이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AD 512년에 흑해에서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새로운 성벽을 쌓았다. 이는 테오도시우스 2세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를 위해 축조된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더불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중요한 방어벽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안정적으로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였지만 종교적으로는 단성론에 심취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유페미우스를 유배보내고 말았다. 이 때문에 삼위일체론의 정통교리를 신봉하는 비타리아누스의 반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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