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황제시대 도래와 3세기의 위기
군인황제 시대의 개막
본래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로마 황제는 법적으로 확실한 지위가 아니라 로마 공화정의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 호민관 특권을 교묘히 뒤섞어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차기 황제의 계승 방법이 명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혈통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지만 아우구스투스를 이은 티베리우스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였고 오현제 시대에도 능력이 뛰어난 인물을 양자로 지정하는 방식으로 황제 계승이 이어진 것처럼 반드시 전임 황제의 혈통일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네로와 콤모두스, 카라칼라의 사례에서 보듯이 혈통에만 의존할 경우 폭군이 등장하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네로나 콤모두스가 죽은 이후 혈통이 단절되자 그때마다 로마 원로원이 로마 황제를 지명하였지만 결국은 로마 군단장끼리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한 베스파시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각각 자신의 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와 세베루스 왕조를 창건하였는데 이로서 로마 군단의 지지를 받은 로마 군단장이 로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로마 황제가 되는 선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AD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암살되고 세베루스 왕조가 단절되자 이제 차기 로마 황제로 라인강에 주둔한 로마 군단병들은 신병훈련책임자였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추대되는 일이 벌어졌다. 막시미누스는 군단장도 아닌 일개 대대장에 불과했기 때문에 당연히 속주 총독 경험도 없었고 로마 원로원 의원도 아닌 상태에서 로마 황제로 선출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막시미누스 본인 스스로 로마 군단을 이끌고 수도 로마에 입성하여 로마 원로원을 위협하여 승인을 받아낸 것도 아니고 단순히 로마 군단병 사이에서 신망을 얻어서 얼떨결에 로마 황제로 추대된 경우였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이를 거부할 힘이 없었다. 이로서 로마 황제를 지목하는 권한이 이제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로마 군단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특히 3세기부터 북쪽에서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게르만족이, 동쪽에서는 파르티아 제국을 무너뜨린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왔기 때문에 이를 막아낼 수 있는 군사적인 능력이 로마 황제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이 되면서 전투에서 승리한 전공만 있으면 곧바로 황제 지위를 찬탈하는 군인황제시대의 대혼란이 시작되었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이름에 붙은 트라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이라는 뜻으로 가난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로마 군단의 병사로 입대하였다. 당시는 아직 카라칼라의 '안토니우스 칙령'이 공포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속주민은 로마 군단에 보조병으로 입대하여 20년간 복무하는 것이 로마 시민권을 얻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도 그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기골이 장대했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눈에 띄어 근위대에 들어갈 수 있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절에는 라인강의 로마군단에서 신병훈련 책임을 맡은 대대장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던 중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병사들 사이에서 많은 신망을 얻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죽자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로마 원로원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했지만 탐탐치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트라야누스를 통해 속주 출신이 로마 황제가 되는 선례가 생겼지만 트라야누스의 혈통은 이탈리아인이었던 것이 분명했던 반면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대대로 트라키아 출신이었으므로 이민족의 혼혈일지도 모르는 애매한 혈통이었다. 이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반(半)야만인이라고 대놓고 얘기할 정도였다. 또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일개 대대장 출신에 불과했고 당연히 교양도 부족하여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호감을 얻기 어려웠다. 이러한 사실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 즉위 후에도 수도 로마에 가기보다는 라인강에 머물며 게르만족 격퇴에만 몰두했다. 어쨌든 병사들의 신망이 좋고 용맹도 뛰어난 만큼 재위 3년 동안은 계속해서 승전보를 수도 로마에 전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3년 동안 국경에서 성공적으로 게르만족를 격퇴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로마 원로원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그러던 중 AD 238년 3월 북아프리카 속주 총독인 고르디아누스가 79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황제로 추대되는 일이 벌어졌고 고르디아누스는 그 사실을 로마 원로원에게 통보했다. 고르디아누스는 당대의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흥분하며 고르디아누스이야 말로 진정한 황제라며 그대로 승인해 버렸고 고르디아누스의 나이가 너무 고령이었기 때문에 그의 동명 아들과 함께 공동 황제로 승인하여 각각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로 선포했다. 반대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로마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었다. 졸지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버림받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분노하여 즉각 군단을 이끌고 수도 로마로 향했다.
로마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에게 서둘러 로마로 돌아와 방어에 나서도록 하였지만 북아프리카 속주에 인접한 누미디아 속주의 총독인 카펠리아누스가 로마 원로원의 결정에 반발하여 AD 238년 4월 북아프리카 속주의 카르타고를 공격하였다. 여기서 패배한 고르디아누스 2세가 전사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도 자결하고 말았다. 이제 로마 원로원이 당황하게 되었으나 이제와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적대하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의 원로 의원인 원로인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였고 그것만으로는 정통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도 로마에 머물던 고르디아누스 1세의 어린 외손자를 고르디아누스 3세로서 차기 황제로 내세웠다.
로마 원로원의 이러한 선택은 고육지책이었지만 의외로 큰 효과를 발휘했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로마 원로원을 응징하고자 호기롭게 이탈리아 본토로 들어왔지만 로마 원로원의 결정에 따라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도시들이 완강하게 저항하고 나선 것이었다. 전투가 몇 달 동안 교착상태에 빠지고 막시미아누스 트라쿠스의 부대가 지닌 식량도 점점 떨어져 가자 막시미아누스 트라쿠스를 황제로 추대한 병사들이 이제는 등을 돌리게 되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로마 황제는 공식적인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죽음 이외에는 그만둘 방법이 없었고 결국 막시미아누스 트라쿠스는 AD 238년 5월 자신을 추대한 로마 군단병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필리부스 아라부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살해당하면서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이제는 로마의 공동 황제인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두고 로마 원로원이 두 개의 파벌로 나뉜채 정쟁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에 실망한 근위대가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둘다 납치하여 살해하였다. AD 238년 한 해동안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이어 막시무스와 발비누스까지 살해당하는 혼란이 발생한 끝에 이제 고르디우스 3세가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황제가 될 당시 13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가 대리 통치하였고 즉위 3년이 되던 해에 근위대장이었던 티메시테우스의 딸과 결혼하면서 티메시테우스가 사실상 로마 제국을 이끌고 나가게 되었다. 티메시테우스는 로마 원로원과 잘 협력하였고 AD 242년 동방 속주를 다시 공격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사푸르 1세를 격파해 내는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티베시테우스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역습을 허용해야 했고 후원자를 잃어버린 고르디아누스 3세는 AD 244년 새로운 근위대장인 필리푸스 아라부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고르디아누스 3세를 살해한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이름 중 아라부스는 아랍 출신이라는 뜻으로 시리아의 베두인 부족 출신인 아랍인이었다. 필리푸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를 죽인 뒤 근위대의 추대를 통해 로마 황제가 되었는데, 이제 속주 출신과 병사 출신에 이어서 유럽인이 아닌 아랍인 중에도 로마 황제가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필리푸스도 통치자로서는 무능한 편이었으나 로마 원로원과 가급적이면 충돌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면서 황제 자리를 지켜나갔다. 그러나 AD 249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이 도나우강 방어선을 넘어서 침공해오자 이를 격퇴하는 전공을 세운 데키우스가 병사들의 추대로 로마 황제가 되었고 이에 절망한 필리푸스는 자살하고 말았다.
데키우스와 갈루스
데키우스는 집정관을 역임한 후 로마 원로원 의원을 지냈고 필리푸스 아라부스에 의해 도나우강의 모이시아를 방어하는 군단장으로 임명받아 고트족을 방어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렇게 데키우스는 원로원 의원 출신이라는 점과 고트족을 물리친 전공을 통해서 데키우스는 로마 원로원과 군단병 모두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로마 황제 후보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AD 249년 무능한 필리푸스 황제를 대신한 로마 황제로 추대되어 베로나 근처에서 필리푸스의 군대를 물리친 후 로마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데키우스는 황제가 된 직후인 AD 250년 1월에 내린 포고령을 통해서 모든 로마 시민들은 로마신을 경배하고 신성한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교인들이 반발하자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탄압에 나섰다. 그러나 고트족이 다시 도나우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범해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탄압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고트족을 토벌하러 나서야 했다. 데키우스는 만일 사태를 대비하여 성년이 된 두 아들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그 중 둘째 아들인 호스틸리아누스를 수도 로마에 남긴 채 큰 아들인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함께 출정하였다. 그러나 데키우스의 예상이 불행히도 적중하면서 AD 251년 흑해 연안의 도브루자 늪지대에서 벌어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데키우스가 큰 아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데키우스는 로마 역사상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데키우스와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한꺼번에 사망하면서 호스틸리아누스가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지만 고트족을 막아내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로마 군단은 모이시아 속주 총독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공동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갈루스는 로마 황제가 되자 고트족과 대결하기 보다는 그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며 강화를 추진했고 자신의 후임 모이시아 속주 총독으로 아이밀리아누스를 임명한 뒤에 서둘러 수도 로마로 되돌아 가 버렸다. 더욱이 호스틸리아누스가 얼마 뒤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에 갈루스는 아무런 전투없이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는 행운을 얻었고 자신의 아들인 볼루시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트족은 갈루스와 강화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AD 253년 대규모로 도나우강을 건너 발칸 반도로 처들어왔기 때문에 모이시아 속주의 로마 군단병들이 자신의 지휘관인 아이밀리아누스를 로마 황제로 추대해 버렸다.
발레리아누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갈루스는 라인강 상류의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속주 총독인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발레리아누스의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가 뒤늦게 도착한 뒤 아이밀리아누스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발레리아누스가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다. 발레리아우스는 세베루스 알렉산드르 재위 시절 집정관을 지냈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절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서 고르디아누스의 반란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의 호감을 얻고 있었다. 또한 갈루스에 의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속주 총독이 되면서 로마 군단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에 이은 두번째로 이상적인 로마 황제 후보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63세의 나이에 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의 중단된 그리스도교 박해정책을 이어받아 카르타고 주교와 로마 주교를 처형하였다. 발레리아누스가 로마 황제가 될 무렵 로마 제국은 북쪽의 고트족이 대거 침입하여 발칸 반도를 유린하였고 동방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사푸르 1세도 다시 로마의 동방 속주를 노리기 시작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는 넓은 로마 제국을 혼자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아들인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한 후 제국의 서부지역 통치를 위임하고 그 자신은 동부지역 통치에 전념한 채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였다. 비록 초반에는 유리하게 전쟁을 이끌어 갔지만 AD 260년 초 갑자기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푸르 1세의 회담 제의에 소수의 호위병력만 이끌고 갔다가 포로로 붙잡혀 버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렇게 하여 발레리아누스는 포로로 붙잡힌 로마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되어 버렸다.
갈리에누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로부터 공동 황제로 임명된 후 라인강을 넘어오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알라마니족을 방어하고 판노니아의 잉겔누우스, 일리리쿰의 레갈리아누스가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느라 정신없이 보내던 중 발레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여전히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방어하기에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포로로 붙잡힌 아버지를 구출하려는 시도조차 포기하였다. 그러나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계속된 공격에 서쪽의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연결하는 방어선과 동쪽의 유프라테스강을 이용한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져 갈리에누스 혼자서 로마 제국의 모든 국경을 동시에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이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비판받는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우선 갈리에누스는 서쪽의 갈리아 제국과 동쪽의 팔미라 제국을 이를 토벌하지 않고 자신을 대신하여 로마 국경을 지켜주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로마 제국을 사실상 분할해 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먼저 갈리에누스는 판노니아와 일리리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게르마니아의 두 속주 총독로 임명한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가 전리품 분배 문제로 갈리아 총독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코르넬리우스 사로니누스와 다투던 중 살해해 버리고 말았는데 그 와중에 갈리에누스의 아들도 죽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포스투무스는 현재의 독일 트리어에 해당하는 아우구스타 트레비로품에 수도를 정하고 갈리아 제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원로원, 집정관, 호민관 제도를 그대로 준용하고 군단병의 지지를 받아야만 황제가 될 수 있는 등 로마 제국의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작은 로마 제국에 지나지 않았다. 갈리에누스도 처음에는 갈리아 제국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았고 어차피 포스투무스가 라인강의 방어를 계속 맡아준다면 그 지위가 속주 총독이던 황제이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갈리아 제국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해 주기로 결정했다.
비슷한 시기에 동방 속주에서도 발레리아누스의 장군이었던 플리비우스 마크리아누스가 황제를 참칭하고 나서자 시리아 팔미라의 귀족인 셉티미우스 오데나투스가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마크리아누스를 토벌한 후 시리아 일대를 장악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오데나투스는 여전히 갈리에누스를 로마 황제로서 대우하였고 갈리에누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오데나투스를 로마의 속왕으로 임명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 속주를 제외한 나머지 동방 속주의 방어를 일임했다. 비록 오데나투스는 AD 260년부터 AD 267년까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었으나 AD 267년 승리 축하연에서 큰 아들과 함께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오데나투스의 후처였던 제노비아가 암살범을 죽인 뒤 자신의 어린 아들인 와발라트를 남편의 후계자로 앉히며 실권을 장악하였고 갈리에누스도 이를 인정해야 했지만 제노비아는 남편과 달리 로마의 속왕으로 만족하지 않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까지 공격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로마 제국은 서쪽의 갈리아 제국과 동쪽의 팔미라 제국이 분리되고 말았다.
다음으로 갈리에누스는 국경에 주둔한 로마 군단만으로는 기병 위주의 게르만족을 상대하기 버거워지자 마찬가지로 기병 위주로 편성한 상설예비대를 편성하여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시켰다. 이 예비대는 기동력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기병의 비율을 이전에 비해 3배이상 높였고 무어인 경장 기마 투창병과 달마티아 외인 기병 부대, 강력한 복합궁을 사용하는 오리엔트 궁수 부대, 페르시안 장창병대, 쐐기꼴 대형으로 전투하는 게르만계 보병, 낙타부대 등 다양한 병종이 혼합하였다. 이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에 파르티아식 중장기병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카라칼라 황제 시절에는 기병대를 이용한 기동타격대 개념이 등장한 것에서 발전하여 이제는 아예 로마 군단의 중심병과를 전통적인 중장보병이 아니라 게르만족이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같은 기병 위주로 변경한 것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실리주의자인 갈리에누스는 기병대장을 원로원 의원을 임명하던 로마 공화정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오랜 전통을 깨고 전문 군인을 기병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비록 제정 이후 로마 황제에 대한 자문기관으로 실권을 모두 빼앗긴 로마 원로원이었으나 내정과 군대를 두루 경험한 사람만이 로마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얻을 수 있어 로마 원로원은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인재양성기관을 역할을 하였으나 이제는 그 기능마저도 상실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로마 군단의 중심병과가 중장보병에서 기병으로 변경되면서 지금까지 황제의 후보자 대부분이 군단장이었던 것과 달리 갈리에누스 이후에는 황제 후보자가 기병대장으로 변경되어진다.
마지막으로 갈리에누스는 알라미니족이 라인강을 넘어오자 이를 격퇴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라인강 주변의 국경지역을 내주는 대신에 다른 게르만족을 막아내도록 하였다. 이는 게르만족에게 게르만족의 방어를 맡긴 것으로 로마 제국 스스로 국방의 자주성을 일부 포기했다는 점에서 후대 역사가에게 큰 혹평을 받았고 당대에도 로마 군단 내부에서 갈리에누스가 게르만족 애첩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어쨌든 라인강 방어 임무에서 벗어난 갈릴레우스를 도나우강 방향으로 군대를 집중하여 잉겔누우스와 레갈리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게르만족을 도나우강 바깥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이렇게 로마 제국을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동분서주하던 갈리에누스였지만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으로 제국이 나누고 로마 원로원 의원을 로마 군단에서 배제하였으며 게르만족에게 국경수비의 일부를 부탁하는 것과 같은 로마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정책을 잇달아 펼치면서 많은 반발을 샀다. 결국 AD 268년 팔미라 제국의 제노비아가 이집트까지 점령하자 갈리에누스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황제의 개인 영지이자 이탈리아가 수입하는 밀의 3분의 1 이상을 공급하던 주요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이를 상실한 것은 갈리에누스의 가장 큰 실책이 되었다. 결국 갈리에누스는 로마 군단의 지지를 잃어버린 채 밀라노에서 반란군과 싸우다가 살해당했고 그 후임 황제로 기병대장이었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추대되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이름에 붙은 고티쿠스는 고트족 출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고트족과의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워서 얻은 칭호였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포로가 된 고트족 남자 중 젊고 건장하면 로마 군단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무장 해제 후 황폐화된 모이시아 속주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전임자인 갈리에누스가 단순히 알리마니족에게 라인강의 방어를 일임한 것과 달리 어디까지나 로마의 통제를 받는 범위내에서 정착을 허락한 것으로 정착할 토지를 얻은 고트족은 더이상 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땅을 지키려고 자발적으로 싸우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정책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자신은 재위 1년 반만에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아우렐리아누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갑자기 병사하자 로마 원로원은 그의 동생인 퀸틸루스를 황제로 지명하였지만 로마 군단이 이를 거부하고 기병대장인 아우렐리아누스를 자신의 황제로 추대했다. 결국 퀸틸루스는 자결하였고 로마 원로원은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승인하였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군사적 재능이 출중한 인물로 갈리에누스의 기병예비대를 더욱 강화시켜 사산 왕조 페르시아식 중장기병과 팔미라 제국식 궁기병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국경을 넘어오자 이를 바로 공격하지 않고 약탈후 되돌아가면서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총반격을 가하는 전술로 대승을 거뒀다. 비록 초반에는 로마 제국 국경 내부에서의 약탈을 그대로 방관하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약탈한 재물과 사람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진 반달족의 약점을 노렸기 때문에 전멸에 가까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방어전술은 국경에서 게르만족을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게르만족이 공격해오면 최대한 안쪽으로 끌어들인 후 해당 속주가 개별적로 방어하는 동안 로마 황제는 기병예비대를 이끌고 게르만족이 후퇴하는 길목을 차단하여 포위섬멸하는 종심방어전술로 변경되었다.
게르만족을 격퇴시킨 아우렐리아누스는 자신을 당장은 적대하지 않는 갈리아 제국을 잠시 놔둔 채 동쪽의 팔미라 제국을 두번째 목표로 삼았다. 팔미라 제국은 사실상 통치하던 제노비아는 뛰어난 미인이자 남성을 능가하는 여걸로서 로마 제국의 내부혼란을 틈타 단기간에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AD 271년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 제국 원정을 시작하자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를 연결하는 비잔티움을 함락당했고 이어서 벌어진 시리아의 에메사 전투에서도 패배한 채 제노비아의 아들이자 팔미라 제국의 명목상 통치자인 와발라트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제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 속주들이 로마 제국으로 다시 전향했고 팔미라가 이중 삼중으로 포위당하자 위기에 몰린 제노비아가 낙타를 타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로 도망치려 했지만 로마 기병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제노비아가 로마로 후송되었고 아우렐리아누스도 철군하기 시작하자 팔미라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아우렐리아누스는 되돌아와 팔미라 반란을 진압하고 철저히 약탈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AD 273년 팔미라 제국은 멸망하여 다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제노비아는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서 개선식을 벌일 때 끌려다니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여인이었기 때문에 처형 만은 면하여 로마 근교의 티볼리에서 여생을 보냈다.
팔미라 제국이 무너지자 이제 자연스럽게 아우렐리아누스의 다음 목표는 갈리아 제국이 되었다. 당시 갈리아 제국은 건국자인 포스투무스가 AD 268년 살해된 후 히스파니아가 로마 제국으로 되돌아갔고 이후 즉위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리우스와 마르쿠스 피아워니우스 빅토리누스도 계속해서 살해당하는 혼란 끝에 당시에는 테트리쿠스 1세가 황제가 되어 있었다. AD 274년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으로 처들어갔고 샬롱전투를 벌이게 되자 갈리아 제국의 테트리쿠스 1세는 아우렐리아누스와 협상을 벌여 갈리아 제국을 넘기는 대신에 신변을 보장받는 비밀 협정을 맺었다. 결국 테트리쿠스 1세가 투항하자 갈리아 제국군은 삽시간에 무너졌고 이렇게 하여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까지 통합하여 분열된 로마 제국을 하나로 재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테트리쿠스 1세는 당초 약속에 따라 루키니아 총독으로 임명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즉위 후 단기간에 게르만족을 누르고 분열된 로마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등 뛰어난 업적을 남기면서 스스로 '레스티투토르 오르비스(Restitutor Orbis; 세계 재건자)'라고 부르게 하였다. 또한 그동안 로마는 국경에서 외적을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수도 로마에는 아무런 성벽을 세우지 않았지만 게르만족이 로마 국경 안쪽까지 침범해오는 상황에서 수도 로마의 방어력을 강화시키고자 새로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세우게 하였다. 이 밖에 아우렐리아누스 자신이 시리아의 태양신 종교인 '미트라교'를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미트라 신전을 세웠다. 이렇게 내정까지 정비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마지막으로 로마 제국에게 황제가 포로로 붙잡히는 치욕을 안겨 준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였다. AD 275년 아우렐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을 떠났으나 어이없게도 갑자기 암살당하고 말았다. 일설에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자신들을 처형할 것이라는 노예비서 에로스의 거짓말을 믿은 장교단이 암살했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 사후의 혼란과 디아클레티아누스의 등장
군인황제시대의 대혼란 속에 모처럼 등장한 명군이었던 아우렐리아누스가 갑자기 암살된 후 로마 제국은 무려 5개월간이나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된 끝에 75세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가 황제로 선택되었다. 타키투스는 로마의 유명한 역사가인 푸블리우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후손이라는 점 이외에는 아무런 공적이 없었지만 아우렐리아누스 사후 아무도 황제 자리를 내켜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전 재산을 기부하며 황제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타키투스는 즉위 이듬해 시리아로 향했지만 도중에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타키투스의 동생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로리아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했지만 로마 군단은 이를 거부하고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멸망한 팔미라 제국을 대신하여 동방 속주를 통치하도록 임명되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를 로마 황제로 추대하였다. 프로부스는 황제가 된 뒤에도 수도 로마로 향하지 않고 동방 속주에 머물며 국경방어에만 몰두하였지만 재위 4년만인 AD 282년 병사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프로부스가 암살된 후 로마 군단은 암살범을 모두 사형에 처한 후 근위대장이었던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 카루스를 다음 황제로 추대했다. 카루스는 두 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한 뒤 카리누스는 수도 로마로 보내 제국의 서방 방위를 맡기고 그 자신은 누메리아누스와 함께 제국의 동방 방위를 담당하기로 했다. 그리고 도나우강을 넘어 온 게르만족을 격퇴한 뒤 AD 283년부터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했다. 이 원정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유프라테스강의 셀레우키아를 함락시키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수도인 티그리스강의 크테시폰마저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카루스가 갑자기 벼락에 맞아 즉사하는 사고사를 당했다. 이제 공동 황제이자 카루스의 둘째 아들인 누메리아누스가 원정군을 수습하여 귀환하기 시작하였으나 AD 284년 갑자기 암살된 채 발견되었다. 누메리아누스의 호위 장교인 디아클레스는 유일하게 황제 알현이 허용되었던 누메리아누스의 장인인 아페르를 암살범으로 지목하여 체포하였고 이제 카루스의 장남으로 제국의 서방 방위를 맡았던 카리누스가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었지만 동방의 로마 군단은 카리누스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디아클레스를 다음 황제로 추대하였다.
황제로 추대된 디아클레스는 자신의 이름을 로마식인 디아클레티아누스로 바꾸고 카리누스와 대결을 벌이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카리누스 역시 디아클레누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간의 내전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게르만족과의 전투경험이 풍부한 카리누스는 강력한 힘을 보유하여 AD 285년 베네치아의 총독인 아울렐리우스 율리아누스가 황제를 참칭하자 이를 즉각 토벌한 후 모아시아에서 디아클레티아누스의 로마 동방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자기 카리누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장교가 카리누스를 암살해 버리는 바람에 내전은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카리누스를 잃어버린 로마 서방군은 디아클레티아누스를 자신의 황제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디아클레티아누스는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자 전제 군주정과 사두정치를 도입하며 로마 군단에 의해 황제가 좌지우지되었던 군인황제의 혼란을 비로소 종식시키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사두정치 체제의 성립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정치
전제 군주정 개혁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AD 3세기 내내 지속된 로마 제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작업에 나섰다. 우선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해 그 때까지도 남아있던 공화정 시대의 잔재들을 일소하고 '프린켑스(제1시민)'라는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던 로마 황제 자리를 오리엔트식 전제군주와 비슷한 형태로 바꾸었다. 명칭부터 '도미나누스(Dominus; 지배자)'라고 변경하고 페르시아식 궁중예법을 도입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였다. 이제 로마 제국은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이 아닌 본격적인 '전제 군주정(Dominatus; 도미나투스)'이 시작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형식상 남아있던 로마 원로원의 권한을 모두 박탈하였는데 이미 3세기의 위기를 거치면서 로마 원로원은 황제의 칙령을 법령으로 공포하기 위한 형식적인 의결기구로 전락했고 군무에서도 배제되었기 때문에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로마 원로원의 입법기능을 모두 배제해버렸다. 민회의 권한도 박탈되어 이제 황제의 칙령은 민회의 승인도 받지 않아도 곧바로 법률적인 효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보좌하기 위한 관료 조직도 더 세분화되고 더 늘어나는 대신에 집정관을 비롯한 모든 관료를 민회의 승인 없이도 황제가 임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 하나의 로마 원로원의 권한인 원로원령 속주 총독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도 박탈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절 로마 속주는 황제가 직접 총독을 임명하는 '황제령 속주'와 로마 원로원이 총독을 임명하는 '원로원령 속주'로 나뉘어졌는데 황제령 속주 총독은 '황제 대리인(Legatus Augusti pro praetore)'라고 부르고 원로원령 속주 총독은 공화정 시절 그대로 '전직 집정관(Proconsul)'이라고 부르며 구분하였다. 그러나 이제 원로원령 속주까지 황제가 직접 총독을 임명하도록 변경하였고 속주 총독이 너무 막강한 권한을 지녀 반란의 온상이 되어버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속주를 좀더 세분화하여 그 권한을 축소시켰다. 또한 내정과 군정을 구분하여 내정은 전문 관료에게 맡기고 대신에 몇 개의 속주 내정을 총괄하는 '관구(Diocese)'를 신설하고 이를 담당할 '비카리우스(vicarius; 대리인)'이라는 직책을 만들어냈다.
군사조직도 개편하여 속주 총독의 군정 기능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본래 몇 개의 군단을 지휘하는 군사령관의 호칭이었던 '둑스(dux)'를 하향조정하여 각 속주별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의 호칭으로 변경하였다. 다만 둑스를 총괄하는 '코메스 둑스(comes dux)'를 두었는데 이는 직책이라기 보다는 최선임 둑스에 대한 호칭으로 보는 것이 옳다. 또한 로마 군단이 대부분 국경에 배치되어 예비병력은 황제의 근위대 이외에는 별달리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 군단을 중앙 예비군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와 국경 주둔병인 리미타네이(limitanei)로 구분하여 충분한 예비 병력도 확보하였다. 또한 황제의 근위대장(praefectus praetorio;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은 비카리우스와 코메스 둑스의 상위 지위로 내정과 군정을 총괄하면서 오늘날의 총리와 같이 그 성격이 변화하게 된다.
디아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관료와 군사령관의 숫자가 증가하고 군대도 증강되었기 때문에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세제 개편도 단행하여 크게 농경지에 부과하는 '토지세(jugum)'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인두세(capitatio)'로 구분하고 과세를 위한 평가는 5년 단위로 이루어지도록 했다. 모든 세금은 실질적인 소득과 무관하게 부과하였고 중앙 정부가 총괄하여 징수하기로 하였다. 일견 가혹해보이는 세제 개편이었지만 3세기의 위기 시절에 마구잡이로 부과하던 모두 특별세를 폐지하였고 그동안 면세 혜택을 누리던 이탈리아에도 과세하는 등 나름대로 합리적인 면이 있었다. 또한 국가 재정수입을 일정하게 만들면서 재정지출의 안정화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박해
그리스도교는 초기부터 로마 제국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하여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네로(재위 AD 42년 ~ AD 54년)는 로마 대화재로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그리스도교도에게 방화범 혐의를 뒤집어 씌어 학살하였고 도미티아누스(AD 재위 AD 81년 ~ AD 96년)는 자신을 스스로 신격화하면서 그리스도교를 국가 전복죄로 취급했다. 또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AD 재위 AD 193년 ~ AD 211년)는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막는 엄격한 법을 제정하여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격렬한 박해를 실시하였다. 군인황제시대에도 데키우스(AD 재위 AD 249년 ~ AD 251년)와 발레리아누스(AD 재위 AD 253년 ~ AD 260년)가 각각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이어졌지만 재위기간이 짧아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의 최후이자 최대의 큰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AD 재위 AD 284년 ~ AD 305년) 시절 일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전제 군주정을 도입하면서 페르시아식 궁정 예법을 도입하였고 전통적인 로마의 다신교 숭배 사상을 부활시키며 스스로를 신격화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 내에 퍼지고 있던 그리스도교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고 있었고 당연히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신으로 섬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부하였고 이것이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AD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공식적인 칙령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금지시켰고 교회와 성물, 성전을 파괴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그리스도교의 모임을 불허하였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교가 만연해 있던 동방 속주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를 보내 철저하게 진압하였다. 그리고 AD 304년에는 고발이 없어도 그리스도교인을 체포하고 고문할 수 있도록 하여 철저하게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였다.
사두정치 체제의 도입
디아클레티아누스가 전제군주정과 함께 도입한 또 하나의 개혁은 '사두정치(Tetrarchia; 테트라키아)'이다. 디아클레아누스는 점점 늘어가는 외적의 침입 때문에 로마 제국의 국경이 곳곳에서 뚫리는 상황 속에서 로마 황제 혼자서 방대한 로마 제국 전체를 지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이 '정제(Augustus)'로서 로마 제국 동방의 통치를 담당하는 대신에 유능한 장군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임명하여 로마 제국 서방의 통치를 일임하였다. 비록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렐리아누스가 모두 자신의 아들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국경을 나누어 방어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후계자를 미리 지명하여 유사시를 대비한 임시체제였던 반면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아예 상설 제도로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분할 통치가 어느정도 효율성이 증명되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AD 286년 아예 막시미아누스를 '정제(Augustus)'로 승격시킨 후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갈레리우스)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각각의 '부제(Caesar)'로 임명하여 동서로 나뉘어진 제국의 방위를 다시 4분할하는 '사두정치(Tetrarchia; 테트라키아)'를 성립시켰다. 다만 사두정치는 어디까지나 효과적인 국경선 방위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 제국까지 분할한 생각이 없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스로를 '세니오르 아우구스투스(Senior Augustus)'로 부르게 하고 막시미아누스를 '유니오르 아우구스투스(junior Augustus)'로 부르게 하며 그 우위를 분명히 구분한 채 로마 제국 전체에 대한 중요한 결정은 직접하였다.
이제 로마 제국은 정제 및 부제 4명이 통치하는 '관할구역(Praetorian prefecture)'으로 나뉘어졌고 세부현황은 다음과 같다.
① 디오클레티아누스(동방 정제)
- 주둔지 : 아나톨리아 반도의 니코메디아
- 통치지역 : 오리엔스 관할구역(트라키아 관구, 아시아 관구, 폰투스 관구), 이집트 황제 직할령
② 갈레리우스(동방 부제)
- 주둔지 : 도나우 강의 시르미움
- 통치지역 : 일리리아 관할구역(판노니아 관구, 모이시아 관구, 트라키아 관구)
③ 막시미아누스(서방 정제)
- 주둔지 : 이탈리아의 밀라노
- 통치지역 : 이탈리아 관할구역(이탈리아 관구, 아프리카 관구, 히스파니아 관구)
④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서방 부제)
- 주둔지 : 갈리아의 트리어
- 통치지역 : 갈리아 관할구역(갈리아 관구, 비에넨시스 관구, 브리타니아 관구)
제2차 사두정치와 로마 제국의 분열
사두정치가 등장하면서 이제 로마는 1명의 황제에게 의존하면서 발생하는 느린 의사결정의 문제를 해결하고 신속한 국경방어와 내란 토벌이 가능해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의도대로 사두정치가 실행된 이후 로마 제국의 국경선이 안정화되었기 때문에 그 효율성은 인정받았으나 4명의 군통수권자가 존재하여 내분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단점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생존하는 동안은 그의 권위가 다른 3명보다 높았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없이 유지되었으나 그가 죽은 이후에는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를 잘 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AD 305년 5월 돌연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은퇴를 선언하였다.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나란히 정제로 승격시킴으로써 1명의 정제 자리를 두고 벌어질 내전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제는 각각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막시미누스 다이아)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세베루스)가 선정되었다. 이로서 제2차 사두정치가 시작되었다.
제2차 사두정치 체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한계를 들어내고 말았다. 제2차 사두정치 체제의 한계는 무엇보다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인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티누스)가 권력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분쟁의 씨앗을 남겼다는 점이었다. 결국 AD 306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브리타리아 원정 도중에 병사하자 원정군 병사들은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정제가 죽은 경우에는 부제가 정제로 승격하는 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의 정제 승계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동방의 정제 갈레리우스가 중재를 나서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영토를 승계하는 대신에 서방의 정제로 세베루스를 인정하게 하고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의 부제가 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 영토를 승계하자 이번에는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가 불만을 터트렸고 이를 기회로 그동안 소외되었던 로마 원로원이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목적에 AD 306년 10월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서방의 정제 세베루스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반역이었기 때문에 AD 307년 2월 군사행동을 개시하였으나 은퇴하였던 막센티우스의 아버지인 막시미리우스가 아들을 위해서 정계에 복귀하여 세베루스의 군대를 격퇴하고 세베루스를 살해하였다. 결국 상황 정리를 위해서 전임 황제 신분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그리고 현재의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가 모여 회합을 가졌으나 막센티우스의 기대와 달리 서방의 정제로 플라비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리키니우스)가 선임되었다. 그러자 막센티우스가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마저 내쫓고 무력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하였고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몸을 의탁하는 처지가 되었다. 막시미아누스는 AD 310년 콘스탄티누스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쿠데타를 계획하였다가 예상보다 빨리 되돌아 온 콘스탄티누스에게 축출되어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서방의 정제로 임명되었으나 막센티누스에 의해 밀려나고 말았던 리키니우스는 갈레니우스에 의해 일리리쿰, 트라키아, 판노니아 속주의 지배를 맡게 되었다가 AD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자 동방의 정제가 되어 그의 유럽 속주를 모두 이어받았다. 그러나 동방의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동방 속주에서 사실상 정제와 같이 행동하였기 때문에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모두 정제로 자칭하며 4분할되었다. 그 세부적인 세력 현황은 다음과 같다.
① 콘스탄티누스
- 주둔지 : 갈리아의 트리어
- 통치지역 : 갈리아 관구, 히스파니아 관구, 브리타니아 관구
② 막센티누스
- 주둔지 : 이탈리아의 밀라노
- 통치지역 : 이탈리아 관구, 아프리카 관구
③ 리키니우스
- 주둔지 : 도나우강의 시르미움
- 통치지역 : 판노니아 관구, 모이시아 관구, 트라키아 관구
④ 막시미누스 다이아
- 주둔지 : 아나톨리아 반도의 니코메디아
- 통치지역 : 오리엔스 관구, 아시아 관구, 폰투스 관구, 이집트 관구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누스 1세의 로마 재통일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서방 황제 등극
로마 제국의 서방은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의 세력으로 분할된 상태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의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적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중에서 먼저 행동을 개시한 것은 콘스탄티누스였다. 콘스탄티누스는 AD 311년 동방의 정제인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어 막센티우스의 반란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얻은 후 AD 312년 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막센티우스의 병력은 총 10만명에 비해 병력숫자는 적었지만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로마 제국의 최전선 중 하나인 라인강을 지키던 정예병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북부의 요충지인 토리노와 베로나를 점령한 뒤 살인과 약탈, 방화 등을 금지시키면서 민심까지 얻었다. 결국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도시들이 별다른 전투없이 항복하기 시작했고 이에 막센티우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서면서 10월 28일 로마 북부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밀비우스 다리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콘스탄티누스의 꿈 속에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 문자인 라바룸(카이(Χ)와 로(Ρ)를 겹친 모양(☧))이 나타났고 "이 표시로 이기리라"라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 전설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전투가 시작되자 막센티우스는 테베레 강변에 배수진을 펼쳤지만 전투경험이 풍푸한 콘스탄티누스의 군대의 공격이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막센티우스는 로마로 후퇴하여 농성전을 펼치기로 결심하였으나 밀비우스 다리는 대병력이 한꺼번에 퇴각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수많은 말과 병사들이 다리에서 떨어졌고 막센티우스도 강물에 떨어져 익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강물에서 막센티우스를 건져낸 뒤 그의 목을 잘라 장대에 걸고 로마로 입성하였다. 본래 로마시민과 원로원은 막센티우스를 지지했었지만 이제는 서둘러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고 로마인끼리의 내전에서는 축조된 적이 없는 개선문을 세우기로 결의까지 하였다. 이로서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되어 로마 제국 서방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재통일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방의 정제인 리키니우스를 밀라노에서 만나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을 시키고 여러가지 현안을 논의한 후 로마 제국에 만연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는 내용이 포함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통치를 좌우하기 시작하자 초조해진 동방의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AD 313년 3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리키니우스가 통치하는 속주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리키니우스의 반격에 패배하고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사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리키니우스 역시 로마 제국 동방 지역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두 명에 의해 양분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의 동맹도 얼마가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와의 사소한 분쟁이 발생하자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처들어가면서 AD 314년 10월 8일 카발라에 전투가 벌어졌다. 리키리우스의 병력이 3만5천명으로 숫자면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보다 많았으나 전투는 하루종일 접전으로 흘러갔고 결국 콘스탄티누스 1세가 직접 이끈 기병대의 돌격이 결정타가 되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승리로 끝났다. 리키니우스는 2만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퇴각하였고 본거지인 시르미움을 버리고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 속주로 도망쳤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리키니우스를 뒤쫓아 발칸 반도에 들어가면서 마르디아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카발라에 전투보다 더 접전이 되었으나 이번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승리하면서 리키니우스는 아시아 속주로 도망쳤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일단 리키니우스와 휴전을 맺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맏아들 크리스푸스와 함께 라인강과 도나우강 건너편의 게르만족과 전투에 전념하며 7년을 보냈다. 그 사이 리키니우스는 군대를 재건하는 데 시간을 보냈고 AD 324년 7월 3일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다시한번 맞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이번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병력(13만명)이 리키니우스의 병력(16만5천명)보다 열세였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승리로 끝났다. 바다에서도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크리스푸스가 리키니우스의 해군에게 승리를 거뒀다.
패배한 리키니우스가 또다시 아시아 속주로 도망쳤지만 이번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시아 속주까지 뒤쫓아 가면서 9월 18일 소사이아의 칼케돈 근처에서 크리소폴리스 전투가 벌여 다시한번 승리를 거뒀다. 리키니우스는 니코메디아로 도망쳤으나 더이상 버티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항복하였으나 테살로니카에 감금된 후 이듬해 반란혐의로 처형되었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유일한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이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발칸반도의 비잔티움을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새로운 로마(Nova Roma)'라고 명명하면서 이후 천년동안 동로마 제국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 사후에 그의 이름을 붙여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로 개명된다.
체제 개혁과 그리스도교 공인
체제 개혁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을 마무리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우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에서는 속주의 내정과 군정을 구분하여 총독을 군정 업무에서 배제시켰으나 속주에 따라서는 여전히 총독이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를 더욱 철저하게 구분하였다. 이는 황제 근위대장(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도 예외는 아니어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근위대의 군정 기능을 박탈하고 오로지 내정에만 치중하도록 그 기능을 변경하였다. 이제 로마 제국의 내정은 '《속주 관료》-《관구 대리인(비카리우스)》-《근위대장》-《정제/부제》'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조직 체계가 구축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군사개혁에도 착수하여 근위대장의 군정 기능이 배제시키면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오랜 전통의 황제 근위대를 폐지하였다. 또한 로마군을 국경을 수비하는 하급 부대인 리미타네이(Limitanei)와 관구(Diocese)에 기반을 둔 상급부대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로 구분하여 리미타네이가 국경을 수비하는 동안 코미타텐세스가 요격하는 종심방어전술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근위대장의 군정 기능을 대신할 새로운 직책인 '마기스테르(magister; 군사령관)'를 신설하였다. 이제 군사 조직에 있어서도 "《둑스(군단장)》-《코메스 둑스》-《마기스테르(군사령관)》-《정제/부제》"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지휘체계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기스테르는 보병과 기병으로 나뉘어져 각각 '마기스테르 페디툼(magister peditum; 보병대장)'과 '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 기병대장)'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교 공인
디아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BC 309년까지 이어졌지만 그리스도교의 확산은 피할 수 없었고 AD 305년 로마 동방의 정제가 된 갈레리우스가 AD 311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 칙령을 완화시키는 새로운 칙령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로마 서방의 정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방 정제 리키리우스와 협의하여 AD 313년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장려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비록 밀라노 칙령은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장려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그리스도교도 다른 모든 종교와 평등한 입장에서 포교할 수 있는 권리만 부여한 것이었으나 그동안 박해만 받아 온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특혜를 얻은 것과 동일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내전을 통해 로마를 재통일한 후인 AD 325년에 최초의 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정리하였고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삼위일체설을 정통교리로 인정하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성립시켰다. 최종적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AD 337년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으면서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로마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로부터 '대제'의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죽음과 로마 재분열
AD 326년 갑자기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맏아들 크리스푸스를 자신의 후처이자 크리스푸스의 계모인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고문 끝에 처형하였고 파우스타 역시 목욕하다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살해당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파우스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를 지명했다. AD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후계자 중 첫째인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담당하게 되었고 둘째인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아시아와 이집트를 맡게 되었으며, 막내인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재통합된 로마 제국은 그의 사후 다시 셋으로 분열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3형제가 공동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을 삼분할하였으나 AD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가 콘스탄스의 영토를 노리고 처들어갔다가 전사하였고 AD 350년에는 콘스탄스가 내부의 마그넨티우스 반란에 살해당하면서 콘스탄티우스 2세가 로마 제국의 단독황제가 되었다. 이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또다른 동생인 갈베스를 부제로 삼아 제국 동방을 맡긴 뒤 병력을 이끌고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어 콘스탄티우스 2세는 갈루스를 반역죄 혐의로 처형하였으나 제국 동방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 기미가 감지되자 마지막 남은 동생인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아 로마 제국의 서방을 맡겼다. AD 360년 율리아누스가 병사들에 황제로 추대되면서 내전의 위기가 다시 찾아왔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율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 역시 AD 363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 도중 전사하였고 병사들에 의해 요비아누스가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창건한 콘스탄티누스 왕조도 79년만에 단절되고 새로운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