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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Humanities 1005

곰탕 유래, 몽골, 공탕(空湯), 곰탕 설렁탕 차이

● 공탕(空湯) 몽골음식이었던 고기를 넣고 삶은 맑은 국물을 ‘공탕(空湯)’이라고 하는데, 공탕을 ‘슈루’라고 발음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로 전해지면서 공탕(空湯)이 곰탕, 슈루가 설렁탕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조 때 간행된 몽골어 사전인 몽어유해(蒙語類解)에는 ‘공탕은 전쟁터에서 (고기를 조금 넣고도 많은 양을 만들 수 있어서) 군사들의 식사를 해결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곰탕이 ‘푹 고아서’ 곰탕이 아니라 고깃덩이는 안 보이는 맑은 국물인 공탕(空湯)이었던 것이다. 설렁탕도 조선시대 선농단(先農壇)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소고기를 국에 넣어 끓여서 나눠먹었다고 해서 선농탕(先農湯)이란 설이 있다. 눈처럼 진한 국물이라고 해서 설농탕(雪濃湯)이 설렁탕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

기독교 금요일 어식, 청어, 네덜란드의 부흥

기독교 금요일 어식, 청어 성경에는 유독 물고기가 많이 등장한다. 다섯 개의 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대표적이다. 이와 유사한 기적은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마태복음’ 15장에서도 소개되는데 떡 7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4000명을 먹였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로마의 수도였던 라벤나(Ravenna)의 6세기경 그려진 최후의 만찬 모자이크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식탁 중심에 새겨져 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제자들 앞에서 육신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보이고 먹은 음식 또한 생선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육식에 반해 물고기는 기독교의 중요 식문화로 자리 잡아 빈번히 언급됐다. 그렇다면 어째서 물고기가 기독교 식문화..

억울한 친일파

광복 하루 전인 8월 14일에 변절하여 친일파 되면 억울하잖아. 우리는 사건이 우연히 시작되었으므로 우연으로 끝날 것으로 믿고 포기한다. 그런데 판돈이 걸리면 필연이다. 한강 의대생 사건도 어쩌다 판돈이 걸려서 그렇게 된 것이다. 초심자의 행운으로 따는 것은 우연이고 도박중독으로 오링되는 것은 필연이다.

신은 사건이다

예수는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형제도 있다. 그냥 보통사람이다. 예수가 처녀생식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초딩이다. 그런 사람과는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없다. 애들은 가라. 사물의 예수가 아니라 사건의 예수다. 세상을 사건으로 보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신은 사물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아니잖아. 신은 사건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인간들은 직관적으로 안다. 신이 눈, 코, 입, 귀, 똥구멍 다 있고 수염난 영감쟁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피곤하다. 에휴! 말귀를 못 알아먹네. 추상은 추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조론으로 보면 우주 안에 사물은 없다. 만약 사물로 된 신이 있다면 그게 때려죽일 외계인 놈이다.

와카슈도, 중도, 若衆道, 일본 남색, 코쇼(小姓), 미동

와카슈도, 若衆道 약칭은 衆道로 슈도(しゅうどう)라고 읽는다. 일본에서 남성 동성애의 한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헤이안 시대에 공가나 스님의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 점차 시대가 지나면서 전국 시대 무렵에는 무가에서도 당연시되었고, 이 즈음해서 높으신 분의 취미에서 일반인들도 즐길 정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남색 풍습은 에도 시대에도 성행하며 당대의 일본 문학작품에서도 남색을 다룬 소설이나 그림들이 적지 않게 나오며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에도 중도를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여럿 존재하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성관념이 서구화되고 남색 풍습이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사라졌다. 다만 현대에도 그 영향이 아주 없는것은 아니라서 보이즈 러브나 오토코노코 등으로 간접적으로 슈도의 향기를 느낄 수는 있다. 전국시대에는..

한자동맹, Hansa 同盟, 독일어 Hanse, 친구, 발트 해, 신항로 개척으로 쇠퇴, Hanseatic League

한자동맹, Hansa 同盟, 독일어 Hanse, 친구, 발트 해, 신항로 개척으로 쇠퇴, Hanseatic League한자(Hansa)는 13세기 초에서 17세기까지 독일 북부 도시들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무역 공동체이다. 본래 한제(Hanse)는 중세 독일의 도시에서 활동하던 상회(商會, 상인 조합)를 이르며, 이들은 서쪽으로는 영국, 동쪽으로는 발트 해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자체적인 해군을 보유하여 교역로을 독점하면서 대항해시대 이전 중세 유럽의 유력자로 자리잡았다. 한자동맹 [Hansa, ― 同盟] (영) Hanseatic League. Hansa는 Hanse라고도 씀. 독일 북부의 도시들과 외국에 있는 독일의 상업집단이 상호교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창설한 조직. 13~15세..

사제왕 요한, 동방 기독교 왕국, 프레스터 존, Prester John

사제왕 요한(Presbyter Johannes) 전설은 중세 시대에 동방(東方) 어딘가에 거대하고 풍요로운 기독교 왕국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제왕 요한의 이야기는 12세기 초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 유럽에서 유행했다. 동방의 무슬림과 온갖 이교도들의 나라 너머에 있다는 이 기독교 왕국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중세 시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여러 판타지가 섞여있다. 전설에 따르면 사제왕 요한은 세 명의 동방 박사 중 한 명의 후손이며, 관대한 군주이며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부유한 왕국은 청춘의 샘 같은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며 에덴 동산에 맞닿아 있었다고 한다. 몽골이 사실상 공중분해되면서 아시아 지역에서 사제..

향신료 전쟁, 스파이스 루트, 후추, 검은 황금

1975~76년 프랑스 인류학박물관 연구자들은 고대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엑스레이로 찍다가 그의 콧구멍 속에 후추 열매가 여러 알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도 남부 열대지방에서 채취된 이 후추 열매들은 주검의 부패를 막기 위해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향신료의 역사가 30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발견이었다. 그러니까 애초 향신료는 ‘양념’처럼 음식 풍미를 더하려고 쓰였다기보다 불멸의 보존을 위해 인류사에 등장한 셈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향신료를 15세기 유럽의 근대를 열어젖힌 대항해 시대의 산물로 생각한다. 인도의 향신료를 찾아 헤매다 신대륙을 발견한 15세기 항해가 콜럼버스나 인도행 대서양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가마가 세계사에 던진 거대한 반향 탓이다. 를 지은..

하인리히의 법칙, Heinrich's law, 1: 29: 300의 법칙

하인리히의 법칙, Heinrich's law 1: 29: 300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그와 관련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들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하는 통계적 법칙이다. 1931년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가 펴낸 《산업재해 예방 : 과학적 접근 Industrial Accident Prevention : A Scientific Approach》이라는 책에서 소개된 법칙이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하인리히는 미국의 트래블러스 보험사(Travelers Insurance Company)라는 회사의 엔지니어링 및 손실통제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업무 성격상 수많은 사고 통계를 접했던 하인리히는 산업재해 사례..

아랍, 수니파, 이란, 시아파, 아수니 이시아

이슬람교를 따르는 무슬림은 크게 두개의 종파, 수니파(Sunni)와 시아파(Shia)로 나뉜다. 오늘날 전 세계 약 18 억 무슬림 중 약 85%가 수니파고 15%는 시아파다. 시아파는 이란, 이라크,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등의 이슬람 국가에서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수니파는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40 개 이상의 국가에서 대다수를 차지한다. 종파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수니파와 시아파는 1400년에 이르는 오랜 역사 동안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함께 살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중동 여러 국가와 종교 세력들이 종교적,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며 수니파와 시아파 간 분열이 심화되었고, 서구(미국)의 개입에 지역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며 이 분열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걸쳐..

인도 불교 쇠퇴, 이슬람의 침략

이슬람 세력의 성장과 인도 침입 이슬람의 발생과 성장 이슬람의 교주 모하메드(Mohammed, 570∼632)는 AD. 570년 메카(Mecca)에서 쓰러져 가는 명문가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메카는 아라비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였으나 사막 지방의 미신과 우상 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모하메드라는 이름은 ‘높이 존경받다’라는 뜻으로 남자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여졌던 이름이었다. 그의 생의 비극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압둘라(Abdullah)는 그의 탄생 며칠 전에 죽었다. 그가 여섯 살 때 어머니 아미나(Amina)도 잃었다. 그리하여 그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나 아홉 살 때 그 할아버지마저 죽자 삼촌 아부 탈립(Abu Talib) 밑에서 자라며 그가 속한 코레이쉬(Koreish) 부족들과..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 751년, 이슬람, 당, 고선지, 실크로드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는 751년 7월 ~ 8월 사이에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 장군이 지휘하는 당나라군과 동맹군 카를루크가 압바스 왕조, 티베트 연합군을 상대로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영토인 탈라스 강 유역에서 압바스 왕조의 동쪽 진출을 막으려 하였다. 배경 아바스 왕조는 세력이 강해지고 710년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 진출하였다.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위구르 샤틀리에, 카를룩 등의 유목민은 당나라 영토를 계속하여 진출 정복하였고 당나라는 신강지역에의 안서도호부에서 방어하려고 하였다. 750년,압바스 왕조의 군대는 계속 동진하고 있었고 고선지(高仙芝)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소그디아나를 압박한다. 소그디아나 왕은 당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압바스 왕조에 도움을 요청했고 747년 우마이야 ..

인도 불교 쇠퇴, 힌두교, 브라만교, 이슬람교

인도에는 힌두교, 이슬람교를 비롯해 기독교,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종교가 있다. 힌두교도가 전체 인구의 78%로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무슬림이 15%, 기독교가 2.5%, 시크교도가 1.9%, 불교도가 0.8%, 자이나교도가 0.4%로 뒤를 잇는다. 인도는 일조량과 강우량이 풍부해 토지가 비옥한 거대한 대륙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인도 문명의 지리학적 성장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이로 인해 기원전 1500년경부터 아리아인들이 수차례 대규모로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유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인도 문명이 점진적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 기원전 약 500년에 이르면 모든 남아시아 대륙은 이미 공통의 문명으로 응집되기 시작하였다. 혹은 이 시기의 인도는 ..

윤석열이 뜨는 이유

윤석열이 뜨는 이유는 하나다. 문재인을 처넣을 수 있다는 환상 주군을 쳐내는 깡패 검사 이미지 이명박근혜를 보냈어도 지지하는 아이러니 그래서 윤석열이 죽는 이유도 하나다. 환상이 깨지는 순간 죽는다. 안철수가 뜰 때 안철수는 신선한 맛이 있었다. 한참 잘 나갈 때는 안철수 현상, 안철수 신드롬이 있었다. 시장직과 대통령후보를 양보하여 겸손 이미지가 있었다. 안철수는 미래(?)라는 키워드가 있었다. 윤석열은? 깡패 박정희 전두환 향수와 문재인을 처넣을 수 있다는 환상 이명박근혜를 보냈어도 지지하는 아이러니

프랑스 발루아-앙굴렘 왕조, 이탈리아 전쟁, 프랑스-오스만 동맹, 프랑스 르네상스,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프랑수아 1세 시대 즉위와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창건 AD 1494년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방계인 앙굴렘 백작 샤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앙굴렘 가문은 발루아-오를레앙 왕조의 시조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차남인 장을 시조로 하고 있었다. 프랑수아 1세는 장의 손자로서 프랑스 왕 루이 12세에게는 5촌 조카에 해당되었는데 프랑수아 1세가 아버지 샤를을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AD 1496년 2살의 어린 나이에 앙굴렘 백작이 되었다. 당시 루이 12세는 세 명의 아내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한 채 말년까지 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만약을 대비하여 가장 가까운 친족인 프랑수아 1세를 잠재적인 왕위계승 후보자로 여기며 AD 1499년 프랑수아 1세를 발루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에 ..

합스부르크 왕가, 카를 5세 시대, 신성로마황제, 종교 개혁, 합스부르크 왕가 분할, 스페인, 오스트리아

카를 5세의 상속에 의한 합스부르크 대제국 건설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부르고뉴 공작령 상속 AD 1500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프 1세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의 상속녀 후아나 사이에서 카를로스가 태어났다. 펠리페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 공작령의 상속녀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고 후아나는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가 결혼하여 낳은 딸이었다. 이렇게 복잡한 혈통을 이어받은 카를로스는 오스트리아 기반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고뉴 공작령의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아라곤 왕국 및 카스티야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왕가에 대한 상속권을 모두 보유하게 되었다. AD 1482년 펠리페 1세는 그의 모후인 마리가 사망하자 부르고뉴 공작령을 ..

오스만 제국 전성기, 바예지드 2세, 셀림 1세, 제10대 술탄 쉴레이만 대제

제8대 술탄 바예지드 2세 시대 바예지드 2세는 메메드 2세의 장자로서 말년의 아버지가 사이가 안 좋았으나 AD 1481년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는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궁정관리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오스만 제국의 제8대 술탄이 될 수 있었다. 바예지드 2세 즉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유럽 쪽 영토는 육로로는 헝가리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맞대고 있었고 바다로는 베네치아 공화국 및 로도스 기사단(옛 성 요한 기사단)과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바예지드 2세는 아버지의 팽창정책을 이어받아 AD 1483년 보스니아의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하였고 AD 1484년에는 크림한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나우 강과 드네스트르 강 요새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또한 AD 1499년부터 AD 1503년까지..

오스만 제국, 발칸반도, 동로마 제국 멸망

제5대 술탄 메메드 1세 시대 AD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에게 패배하고 바예지드 1세 자신은 포로가 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분열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티무르가 오스만 제국을 바예지드 1세의 세 아들이 분할하여 통치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는데, 장남인 슐레이만이 루멜리아(발칸반도 점령지)를, 차남인 메메드는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의 아마시아를, 그리고 삼남인 이사는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부르사를 각각 다스리도록 하였다. AD 1405년 메메드가 이사를 물리치고 부르사를 차지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 영토를 통합하였지만 바예지드 1세와 함께 포로로 붙잡혔다가 풀려난 막내 무사가 AD 1410년 슐레이만을 물리치고 발칸반도 영토를 장악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

발트 3국,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발트 3국은 유럽 중부와 동부와 북부 사이, 독일과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이 동부 발트 지역에 위치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세 국가를 가리키는 단어다. 다른 나라에서도 '발트 3국'에 해당하는 표현은 있지만 대체로 '발트(해) 국가'에 해당하는 표현(영어의 Three Baltic States 등)을 쓴다. 과거 이 지역 전체를 가리키던 명칭인 리보니아(Livonia)라고 부르기도 한다. 20세기 초반에는 핀란드도 발트 3국과 함께 묶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핀란드는 중립국이 된 반면 발트 3국은 소련에 복속되어 공산권 블록에 속하게 됨으로써 발트 3국과 핀란드는 더이상 같이 묶이지 않게 되었다. 발트 3국은 단순한 지리적 단어 그 이상의 국가간 협력체로, 국제무대에서 서로의 입..

리투아니아 대공국 ,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는 한 나라, 벨라루스-리투아니아 관계

리투아니아 대공국 당시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는 한 나라였다. 리투아니아인과 중세 루테니아인들은 언어와 종교가 달랐지만 둘 다 공통의 적인 타타르인과 튜튼 기사단에 대항해 협력하는 사이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성문법에는 "리투아니아인과 사모기티아인과 루테니아인은 상호간의 평등한 권리를 누리고 보장한다."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으며, 벨라루스 민족주의자들의 성웅 프란시스크 스카리나는 빌뉴스에서 인쇄소를 차렸다. 중세 리투아니아 역사와 벨라루스 역사는 거의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역사마냥 상당부분 겹친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당시에 귀족들의 권한이 커지고 벨라루스 지역에 대해 농민들을 탄압하다보니 벨라루스에서도 반발하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쇠퇴하면서 벨라루스 지역은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

체코, 보헤미아 후스전쟁, 얀 후스 교회개혁운동, 얀 지슈카 수레진 전술

보헤미아의 교회개혁운동 유럽교회의 분열와 존 위클리프의 교회개혁운동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한창 중이던 AD 13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후임을 두고 로마 추기경단과 프랑스 추기경단이 대립하여 각자 교황을 옹립하는 '유럽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난다. 잉글랜드가 로마계열 교황과 그 후임을 지지하면서 프랑스와 대립하였기에 유럽세계 전체가 둘로 나뉘어졌고 이로 인하여 교회의 분열은 단순히 종교상 문제가 아니라 국가 간의 문제로 발전하였다. AD 1409년 피사에서 종교회의가 열려 로마계열 교황 그레고리우스 12세와 아비뇽계열 교황 베네딕토 13세 양측 모두를 파면하고 새롭게 통일교황으로 밀라노주교인 알렉산더 5세를 선출하였으나 두 교황 모두 이를 거부하면서 교황이 동시에 3명의 존재하는 더 큰 혼..

잉글랜드 헨리 5세와 아쟁쿠르 전투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의 내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단절과 랭커스터 왕가의 시작 AD 14세기 후반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위에 오른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 모두 미성년이었기에 왕족과 귀족들이 후견을 맡았다. 잉글랜드 경우는 숙부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이 통치권을 장악하였으나 곧 리처드 2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통치역량을 발휘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AD 1381년에는 와트타일러의 주도하에 농민반난이 발생하여 한 때 런던까지 점령당했으나 침착하게 와트 타일러와 협상을 벌여 시간을 번 후 반란을 토벌한 일이었다. 이에 AD 1386년 잉글랜드 의회는 11인 위원회를 만들어 리처드 2세의 활동을 감시하기 시작했으나 AD 1389년 성년이 되자 즉시 랭커스터 공작으로부터 통치권을 ..

백년전쟁의 시작, 흑태자 에드워드, 브레티니-칼레 조약

백년전쟁의 발발 원인 카페왕조 직계혈통의 단절 AD 12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프랑스내 잉글랜드 영토를 둘러싼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와 프랑스 카페 왕가의 대결은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잉글랜드의 실지왕 존으로부터 프랑스 남서부의 기옌과 가스코뉴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탈환하면서 카페 왕가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필리프 4세(AD 1268년 ~ AD 1314년)는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고 과감한 정책을 펴면서 왕권이 크게 신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필리프 4세 사후 세 아들(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이 모두 단명했기 때문에 갑자기 카페 왕가의 직계혈통이 단절되었다. AD 1328년 카페 왕가의 마지막 왕인 샤를 4세가 3명의 딸을 남기고 죽었으나 프랑스의 오랜 법전인 프랑크족의 살리..

스위스 독립전쟁, 장창 보병, 스위스 용병

스위스의 초기역사 고대의 스위스 BC 5세기 경에 갈리아족의 한 갈래인 헬베티족이 현재 스위스의 서부에 정착하고 라에티족이 동부지역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스위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부의 헬베티족이 AD 58년에 로마제국의 카이사르에게 패배하면서 스위스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AD 4세기 경에는 그리스도교화가 되었다. 현재 스위스의 공식명칭인 헬베티아 연방은 헬베티족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AD 5세기경에 일어난 게르만족 대이동 과정에서 서부지역의 부르군트족과 동부지역의 알라만족, 남부지역의 랑고바르드족이 정착하면서 현재의 민족구성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부르군트족은 라틴화된 반면에 알라만족은 게르만 전통을 유지했기 때문에 스위스의 언어가 현재와 같이 복잡한 구성을 갖게 되었다. AD 8세기 카롤루..

차가타이 한국, 티무르 제국

차가타이 한국의 성립과 분열 차카타이 한국의 성립 몽골제국의 칭기즈칸은 AD 13세기 초에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샤왕조를 무너뜨리고 이곳을 차남인 차가타이의 영지로 부여하였다. 차가타이의 이름을 따서 차가타이 한국으로 불리게 되는 이 영지는 일리강에서 시르다리아강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며 차가타이 자신은 일리 계곡의 알말리크의 막사에서 기거하면서 도시생활을 멀리하고 유목민의 풍습을 지켰다. AD 1242년 차가타이는 임종이 다가오자 이미 호라즘 샤왕조와의 전투 중에 전사했던 아들 모에투겐을 대신하여 모에투겐의 4남이었던 카라 훌레구를 차기 칸으로 지명하였다. 하지만 차가타이 한국은 독립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몽골제국 대칸에 의해 칸의 지위가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카라 훌레구는 몽골제국의 제3대 대칸 구유크에..

카이로의 번영, 맘루크 왕조 바이바르스 1세 시대

맘루크 왕조의 탄생 맘루크의 등장 중세시대 이슬람 국가들은 군사력을 주로 맘루크라고 부르는 노예병사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맘루크는 어린 시절에 팔려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남자 노예를 지칭하는 말로 아랍어로는 '소유되었다'는 의미였다. 처음에 투르크족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점차 체르케스, 동로마 제국, 쿠르드, 슬라브 등 출신들도 맘루크로 키워졌다. 맘루크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무타심(재위 833년 ~ AD 842년)에 의해 칼리프의 친위대로 선발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본래 고아로 혈연적, 지연적 연고가 없었던 만큼 오직 자신의 주인에게만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칼리프의 친위대로는 적격이었다. 또한 기본적으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만으로 선발하여 철저하게 훈련되었기 때문에 노..

훌레구의 이슬람 정벌, 일한국의 건국과 몽골제국의 분열

이슬람 세계 정벌 훌레구의 이슬람 정벌군 출정 AD 1251년 차가타이 가문과 우구데이 가문을 누르고 대칸의 지위에 오른 몽케 칸은 이후 몽골제국을 다시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대상은 정벌이 진행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의 서아시아 지역이었다. 이슬람 지역에 대해서는 이미 AD 1243년 장군 바이주에 의해 룸 술탄국을 무너뜨리고 아나톨리아 반도를 점령한 바 있었다. 몽케 칸의 명령에 의해 몽골전체에서 싸울 수 있는 남자 중 10분의 1을 모집하여 총 13만명이라는 몽골제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정벌군이 조직되었고, 지휘관으로는 바이주로부터 군대를 인계받아 투르키스탄 지방을 공략하고 있었던 훌라구가 임명되었다. 훌라구는 칭기즈칸의 4남인 톨루이의 아들로 몽케 칸과는 형제지간이었다. 다른 형제로는 몽케 칸 사후에 ..

우구데이 칸, 킵차크한국 바투 칸의 유럽원정

제2대 우구데이 칸의 즉위 칭기즈칸 사후 몽골제국의 제2대 대칸의 자리는 칭기즈칸의 3남인 우구데이(혹은 오고타이)의 차지가 되었다. 본래 칭기즈칸의 장자는 주치였으나 어머니 보르테가 메르키트 부족에게 납치당했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임신했기 때문에 주치는 태어날 때부터 혈통을 의심받았다. 비록 칭기즈칸이 자신의 아들로 선언하였으나 칭기즈칸이 직접 지어준 주치란 이름의 뜻은 '손님'이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이 대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 제국을 여러 아들과 친족들에게 분배하고 후계자를 정했는데, 이때 칭기즈칸이 주치를 장자로서 우대하여 먼저 발언할 기회를 주었으나 차남인 차가타이가 주치의 의심스런 혈통을 거론하면서 주먹다짐까지 벌인 일이 있었다. 자신의 사후 아들끼리 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칭기즈칸은..

몽골제국, 칭기즈칸 정복전쟁

몽골족과 초원 통일 AD 12세기경 중국의 북쪽에 위치한 초원 지대에 살던 몽골족은 서쪽의 나이만 부족, 북쪽의 메르키트 부족, 남쪽의 탕구트족(서하), 동쪽의 타타르족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이들은 서로 침략과 약탈, 이에 대한 복수를 거듭하고 있었고 중국왕조의 계략에 따라 동맹과 분쟁을 반복하였다. 몽골족 부족 중 하나였던 보르지긴 씨족의 족장 예수게이가 메르키트 부족의 후엘룬을 납치하여 후처로 삼았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테무진이었다. 테무진은 9살 때 예수게이가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부족민들에게 버림받아 극심한 가난을 경험해야 했다. 테무진은 15살이 되어 아버지 예수게이 살아생전에 정혼을 맺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메르키트 부족이 보르테를..

계속된 십자군의 실패, 제6차 십자군, 제8차 십자군, 교황권의 몰락, 아비뇽 유수

계속된 십자군의 실패 제5차 십자군 AD 1218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요청으로 프랑스와 독일 귀족을 중심으로 제5차 십자군이 구성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인 아크레 왕국의 장 드 브리엔느를 중심으로 이슬람교의 본거지가 된 이집트를 공략하여 AD 1219년에는 나일 강 근처의 다미에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수를 만나 카이로로 진격하지는 못하고 말았고 결국 8년간의 휴전에 합의한 채 아무런 성과없이 철군하고 말았다. 제5차 십자군은 교황이 조직한 마지막 십자군이 되었다. 한편 당시 유럽에는 동방의 사제왕 요한의 전설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사제왕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시 방문한 세 명의 동방 박사 중 한 명의 후손으로 부유한 그리스도교 왕국의 군주로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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