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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전쟁과 그리스 재패, 로마-시리아 전쟁과 아나톨리아 반도 진출, 제3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의 멸망

Jobs 9 2021. 5. 14.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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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전쟁과 그리스 재패

 

제1,2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200년경의 그리스, 마케도니아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카르타고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이제 서지중해에서 로마를 상대할 만한 세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제 로마의 관심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로마를 위협하던 마케도니아에 대한 응징이 되었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후예인 안티고노스 왕조가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BC 229년 마케도니아 왕으로 즉위한 필리포스 5세는 BC 216년 로마가 한니발에게 칸나에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자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BC 214년 일리리아의 로마 동맹도시들을 공격하여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10여 년 동안 지리하게 이어졌고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BC 206년 마케도니아에게 일리리아를 넘기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에게해 건너편으로 관심을 돌려 로도스섬과 아나톨리아 반도의 페르가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BC 202년 자마 전투를 끝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로마의 승리로 막을 내린 후 BC 200년 로마는 마케도니아로부터 그리스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전쟁을 재개하였다.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그리스 중부의 아이톨리아 동맹 및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카이아 동맹과 연계하고 마케도니아의 공격을 받던 로도스와 페르가몬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이후 BC 199년의 마케도니아 전투와 BC 198년의 테살리아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였고 최종적으로 BC 197년 테살리아의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마케도니아는 대부분의 그리스 영토를 포기하고 본래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세력이 한정되어야 했고 해군도 해체하였으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자신의 막내 아들까지 볼모로 내어주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로마-시리아 전쟁과 아나톨리아 반도 진출

 

마케도니아의 세력이 위축되자 또다른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후예인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아나톨리아 반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BC 191년 아이톨리아 동맹이 로마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시리아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당시 시리아 왕인 안티오코스 3세가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에 도착하였고 이에 로마군이 다시 그리스에 투입되면서 로마-시리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동맹의 지원을 낙관한 안티오코스 3세는 병력을 보병 1만명과 기병 500기 밖에 보유하지 않은 채 그리스에 도착했기 때문에 옛 테르모필라이 전투가 벌어졌던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방어선을 펼쳤다. 그러나 BC 191년 보병 2만명과 기병 2천기로 이루어진 로마군에게 패배하면서 바다를 건너 아나톨리아 반도의 에페수스로 도망쳐야 했다. 

 

이후 로마군은 아이톨리아 동맹을 다시 제압하였고 그 사이 로마 해군은 로도스와 페르가몬 해군과 연합하여 시리아 해군을 물리치고 제해권을 차지했다. 아이톨리아 동맹을 굴복시킨 로마군은 BC 190년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하였고 안티오코스 3세가 7만명의 병력을 모았으나 3만명의 로마 동맹군에게 시필로스 산 근처의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결국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와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타우루스 산맥의 서쪽에 위치한 아나톨리아 반도의 영토를 모두 포기하고 막대한 보상금과 함께 아들인 안티오코스 4세를 볼모로 보내야 했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로마의 그리스 재패

 

BC 179년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왕조의 필리포스 5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페르세우스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다. 페르세우스는 기존의 무력에 의한 팽창정책 대신에 그리스 폴리스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유화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마케도니아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로마에서 BC 171년 군대를 일으켜 마케도니아를 공격하면서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페르세우스도 처음 3년 동안은 일리리아의 겐티우스와 연합하여 로마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었으나 BC 168년 로마군에게 일리리아가 무너지면서 방어선의 큰 공백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은해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피드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마케도니아로 진격하여 페르세우스를 포박하여 로마로 압송하였다. 

 

이렇게 하여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왕조는 멸망하였고 이후 마케도니아는 4개의 자치 공화국으로 나뉘어진 채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마케도니아를 지원했던 일리리아 역시 여러 개의 자치공화국으로 잠시 나뉘었다가 이듬해 로마의 속주인 일리리쿰이 되었다. 이후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조공을 바치는 처지로 전락하였고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페르세우스도 BC 165년 사망하였다. 그러나 BC 152년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안드리스코스가 로마 지배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안드리스코스의 세력은 당시 로마의 집정관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에게 손쉽게 진압되었고 이제 마케도니아는 자치도 폐지된 채 BC 148년 로마의 속주로 합병당하고 만다. 그리고 BC 146년 로마가 아카이아 동맹까지 해체시키고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두면서 그리스 전역이 로마의 마케도니아-아카이아 속주로 전락하게 된다.

 

 

  

제3차 포에니 전쟁

 

제3차 포에니 전쟁의 발발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점차 동쪽으로 마케도니아 왕국, 일리리아, 시리아로 그 영역을 확대해갔고 히스파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이에 반해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히스파니아의 영토를 빼앗기고 매년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면서 고통받고 있었다. 더욱이 이웃인 누미디아와의 국경분쟁에서도 평화협약에 의해 카르타고의 영토분쟁에 대한 중재권을 보유하게 된 로마 원로원이 매번 누미디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정을 이끌면서 카르타고의 불만은 커져갔다.

 

BC 151년 카르타고는 로마에 50년간의 전쟁 배상금 지급이 끝나면서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에 맺었던 휴전협약이 종료되었다고 생각하고는 약 6만여 명의 용병을 조직하여 누미디아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로마는 협약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카르타고의 행위를 강력하게 항의하고 조사단을 파견했다. 이때 로마 원로원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는데 때마침 그리스에서 일어난 반 로마 세력의 발호에 로마 원로원은 강경파가 힘을 얻었고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에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 모두 내륙으로 이주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연히 카르타고는 이에 반발하였고 카르타고는 농성전에 대비하면서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카르타고의 멸망

 

카르타고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대(大)스키피오)의 양손자인 스키피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소(小)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군대에 맞서 3년간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BC 146년 결국 함락당하고 만다. 소(小)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함락 이후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기 위해 가래로 갈고 소금을 뿌려 볼모지로 만들었다. 전쟁전 카르타고의 인구는 25만명이었으나 함락후에는 5만명도 채 되지 않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멀리 아프리카 딴 곳으로 보냈다. 소(小)스키피오가 그들이 3년 동안 버틴게 너무나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노예로 만들거나 전리품으로 끌고 가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여 약 700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카르타고는 이로서 완전히 멸망당했고 3차례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로마는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카르타고가 지배하던 북아프리카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불모지가 된 카르타고 자체는 비록 약 100년 후에 로마 황제가 되는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병사들의 은퇴 후 거주할 도시로 만들면서 재건되지만 예전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하게 된다. 참고로 로마는 이전까지 속주 총독으로 법무관을 임명하였으나 카르타고와 북아프리카는 그 중요성 때문에 처음으로 전직 집정관(프리콘술)을 임명하게 된다. 

 

 

 로마 레기온(Legion)

보병의 밀집대형은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 대형이 오랫동안 압도적인 위력을 자랑하였다. 로마군도 처음에는 팔랑크스를 계승했으나 긴 역사를 통해 다양한 전술을 습득하면서 레기온이라는 독특한 대형을 발전시켰다. 로마군단의 첫 번째 군제개혁은 BC 4세기경에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로마는 북쪽에서 침입한 갈리아인에게 로마마저 점령당한 위기상황을 맞이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독재관으로 임명받은 카밀루스는 로마 군제를 개혁하여 기존의 팔랑크스 대형을 10개의 독립된 부대로 나누어 각 부대의 기동성을 살렸다. 당시 로마군은 중핵인 중장보병대를 하스타티(Hastati), 프린키페스(Principes), 트리아리(Triarii)의 3개 대열로 편성하였고 각 대열은 마니풀루스(Manipulus, 중대)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는 120명 단위로 총 1,200명씩, 최후미이자 예비대인 트리아리는 60명 단위로 총 600명을 편제하여 각 군단 병력을 3,000명 선에서 유지하였고, 양익에는 300기의 기병대를 나누어 배치하였다. 군단 총원으로 세지 않는 경보병, 벨리테스(Velites)들은 대열 중간에 나뉘어 배치되었다.
 
로마군단의 마니풀루스는 산악전이 많았던 삼니움 전쟁(BC 343∼BC 341년) 기간 동안 역할이 강화되었다. 삼니움족은 로마군을 소규모로 습격하여 약탈할 뿐 점령하지는 않았는데 로마군의 기존 진형은 대규모 전투에 적합할 뿐이어서 상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로마는 이러한 삼니움족의 소규모 게릴라에 대항하기 위해 마니플루스의 기동성과 독립성을 강화하였다. 이후 로마군단은 중장보병 60명인 백인대(Centuria) 2부대가 모여 마니플루스를 구성하고, 이것이 다시 전열 3줄과 경장보병 4,200명인 레기온(Legion, 군단)을 형성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전의 팔랑크스는 한 덩어리로 뭉쳐있었기에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곧 전부가 붕괴되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마니플루스는 어느 한쪽이 무너져도 그 피해는 그 마니플루스로 그치고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한 개의 마니플루스가 무너져도 뒤에 대기하던 다른 마니플루스가 보완해 주는 임기응변의 조치가 가능해졌다.
 
로마군단의 두 번째 군제개혁은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 ~ BC 201) 당시 스키피오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키피오는 히스파니아 전투를 통해 약 50~60cm정도의 글라디우스(Gladius, 베기보다는 찌르기를 목적으로 하는 짧은 검)으로 제식무기를 도입하였고, 마니플루스 사이의 간격을 후방 마니플루스가 지나갈 수 있도록 넓혀 전술적인 자유도를 높혔으며, 한니발의 전술인 기병과의 유기적인 협력을 통한 포위섬멸전을 로마군에게 도입하였다. 다만 로마는 농경국가였기 때문에 기병을 양성하지는 못하고 대개 북아프리카 누미디아나 갈리아의 기병을 용병 혹은 동맹군으로 활용하였다.
 
로마군단의 세 번째 군제개혁은 마리우스에 의해 진행된다. 마리우스는 로마군을 시민개병제에서 모병제로 바꾸었는데 이는 몰락하는 자영농을 군인이라는 직업으로 흡수하는 효과와 안정적인 전투력을 유지하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전술의 기본단위를 기존의 마니플루스에서 마니플루스 3부대를 합친 코호르트(Cohort, 대대)로 변경하여 나날이 증가하는 대규모 전투에 대응하였다. 여기에 마리우스는 기병과 투석병, 공성병을 보조병으로 편성하여 로마군이 다양한 전투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로마군단은 30개의 마니플루스로 이루어진 레기온에서 10개의 코호르트로 구성되는 집단으로 변화하였으며 중장보병 군단에 맞먹는 숫자의 보조병 군단을 별도로 편성하여 대규모 장기원정을 가능하게 되었다.
 
이상의 군제개혁을 통하여 로마군은 우리가 흔히 아는데로 강력한 청동갑옷과 온몸을 가릴 수 있는 방패 그리고 근접전용 글라디우스와 1.5m가량 되는 투창인 필룸(Pilum)을 2, 3개가량 휴대하고 직사각형꼴의 밀집대형으로 제1열이 방패를 맞대고 있으면 뒷열이 투창을 투척하면서 적군의 공격을 방패로 막아내는 형태로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각각의 마니플루스 사이에는 큰 간격을 유지하여 전방의 마니플루스가 붕괴위험에 놓일 경우 후방으로 신속히 이동하고 후방의 예비대가 그 간격을 통해 전방으로 진격하여 군단의 붕괴를 막아내었다. 중장보병과 비슷한 숫자의 보조병을 활용함으로서 야전 뿐만 아니라 공성전이나 방어전 등 다양한 전투에서도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또한 예비대를 운용하여 패배할 때도 참패를 당하는 경우가 적었고 승리시에는 전과를 충분히 확대할 수 있었다. 로마 군단은 BC 197년 키노세팔레 전투와 BC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잇달아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를 격파하면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고 로마제국 성립에 크게 기여하면서 근대 이전 가장 강력한 보병집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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