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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의 대이동, 서로마 제국 위기, 히스파니아 브리타이아 독립, 훈족의 침공

Jobs9 2021. 5. 16.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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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위기

 

스틸리코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호노리우스는 11살로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으로 반달족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를 임명하였다. 스틸리코는 뒤에 등장하는 아이티우스와 함께 서로마 제국을 지탱한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게 된다. 로마인과 반달족의 혼혈로 태어난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와 결혼하고 호위대장(comes stabuli)에 임명받을 정도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총애를 받았다. 스틸리코는 AD 390년 로마군 최고 지위인 군사령관(magister militum)이 되었고 AD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군대를 총괄하는 총사령관(magister utriusquae militiae)으로 임명받으며 어린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부탁받았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뒤 스틸리코는 그의 유언에 따라 서로마 제국을 실질적인 통치를 하면서 서로마 제국의 각지의 반란 및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해야 하는 어려움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서고트족과의 대결과 북아프리카 반란토벌 

 

스틸리코는 AD 395년 1월 동방에서 훈족이 이동해오면서 연쇄적으로 촉발된 게르만 족의 대이동에 서로마 제국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서고트 족의 족장이 된 알라리크가 기존에 맺은 로마와의 포이데라티를 파기하고 트라키아 속주를 침입하여 하드리아노폴리스까지 약탈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죽기 직전에 정예병력 상당수를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새롭게 등장한 훈족을 방어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반도를 비롯한 동방속주에 배치하였고 나머지 정예병력도 찬탈자 유게니우스를 진압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이끌고 왔었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이탈리아의 로마 군단은 해산되지 않은 채 호노리우스의 서로마 제국에게 편입된 상태였다. 아르카디우스의 동로마 제국은 정예병력을 이탈리아에 내주면서 발칸 반도의 방어는 포이데라티가 된 서고트족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고트족이 반기를 들자 이를 방어할 만한 힘이 없었다. 이에 동로마 제국의 아르카디우스는 스틸리코의 도움을 이탈리아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르카디우스의 요청에 따라 스틸리코는 병력을 이끌고 발칸반도에 상륙한 뒤 동로마 제국군의 지휘권까지 인수하여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을 격퇴해내었다. 그러나 스틸리코가 무력으로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려들지도 모른다며 루피누스가 음해하였고 이에 아르카디우스는 스틸리코에게 동로마 제국군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되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충직했던 스틸리코는 이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채 콘스티노폴리스로 동로마 제국군을 되돌려 보낸 뒤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루피누스도 정작 자신의 음모대로 귀환한 동로마 제국군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는데 이 과정에 스틸리코가 어느정도 관여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편 AD 397년에 아프리카 속주의 군대를 지휘하던 코메스인 길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프리카 속주는 서로마 제국의 주요 식량생산지였으므로 스틸리코는 우선 갈리아에서 대량의 곡물을 싣고 와 식량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킨 후 로마 원로원 결의를 통해 북아프리카 반란토벌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토벌군 지휘는 스틸리코를 대신하여 마스케젤이 맡았는데 마스케젤은 고작 5천명의 병력만으로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여 길도의 반란군을 손쉽게 평정하였다. 그러나 마스케젤은 귀환 후 다리에서 떨어져 익사하고 말았다. 

 

 

서고트족의 재침공과 동고트족과의 대결

 

AD 397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다시 처들어오자 스틸리코도 병사들을 이끌고 나아갔고 이오니아 해를 지나 아르카디아 지방에서 서고트족을 포위하였으나 알라리크는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스틸리코가 이를 추격하였으나 알라리크의 공작에 따라 이번에도 스틸리코의 의도를 의심한 동로마 제국의 방해를 받아 서로마 제국으로 철군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후 알라리크가 다시 발칸 반도를 공격해오자 동로마 제국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알라리크를 일리리쿰 속주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는데 테오도시우스 1세의 유언에 따라 일리리쿰은 본래 서로마 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이러한 행동은 당연히 월권이었으나 동로마 제국은 알라리크의 칼날이 서로마 제국으로 향하게 만들기 위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동로마 제국의 의도대로 AD 400년이 되자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이번에는 발칸반도가 아닌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다. 당시 알라리크는 동로마 제국의 일리리쿰 속주의 군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서고트족의 왕으로도 추대된 상태였다. 알라리크는 동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와 동맹을 맺은 후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라이티아 속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스틸리코는 반달족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호노리우스가 머물던 밀라노까지 함락위기에 처했다. 스틸리코는 서둘러 회군하였고 AD 402년 4월 폴렌티아 전투에서 알라리크를 격파하였고 협상을 통해 알라리크를 일리리쿰으로 되돌려보냈다. 

  

AD 405년 이번에는 동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가 게르마니아 북쪽 끝에서 진군해왔다. 이때 동고트족인 여자와 아이들을 합쳐 무려 10만명이나 되었으나 스틸리코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3만명에 불과했다. 이에 스틸리코는 신병을 모집하였으나 여의치않자 노예까지 해방시켜 겨우 3만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로 들어와 많은 도시들을 약탈하였으나 스틸리코는 피렌체 근교의 피에솔레로 후퇴하여 보급선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동고트족에게 대승을 거뒀고 이듬해 티치눔에서 라다가이수스를 사로잡아 처형하는 데 성공했다. 

 

 

스틸리코 숙청과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

 

이렇게 스틸리코의 고군분투로 서로마 제국은 위기에서 여러 번 벗어났지만 거듭된 전쟁으로 제국 자체는 점점 더 피폐해져만 갔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스틸리코는 서고트족과의 동맹을 추진하였는 데 정착지와 매년 돈을 지급하는 굴욕적인 조건 때문에 스틸리코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더욱이 호노리우스와 결혼했던 스틸리코의 장녀 마리아가 죽은 이후 스틸리코가 아들 에우케리우스와 테오도시우스 1세의 막내딸 플라키디아 사이의 결혼을 추진하면서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가 자신을 폐위시킨 후 에우케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것은 아닌 지 의심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AD 408년 8월 동로마 제국의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하자 스틸리코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할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서고트족과 내통하여 에우케리우스를 동로마 황제로 세우고자 한다는 의심이 깊어졌다. 결국 파비아에서 쿠데타가 발행하여 스틸리코의 측근들이 대거 살육당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스틸리코는 호노리우스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후 얼마 뒤 처형당했다.

 

스틸리코가 숙청당하자 그의 휘하에 있던 게르만족 병사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로마에서 도망쳐 서고트족의 알라리크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자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의 원수를 갚는다는 핑계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AD 408년 9월 수도 로마를 포위한 후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일단 물러났다. 알라리크가 스틸리코의 지위를 이어받기를 요구했으나 호노리우스가 거절하자 AD 409년 다시 로마로 진군하여 아탈루스를 황제로 옹립하여 라벤나에 머물고 있던 호노리우스를 압박하였다. 하지만 호노리우스가 여전히 알라리크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AD 410년 8월 24일 아탈루스를 폐위시킨 후 로마를 약탈하였다. 그러나 알라리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은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다. 

 

 

히스파니아와 브리타이아의 독립

 

알라리크의 뒤를 이은 아타울푸스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남부에 정착했다가 히스파니아(지금의 이베리아 반도)로 이동했으나 반달족이 히스파니아로 밀려오자 다시 갈리아 남부지방으로 밀려났고 AD 418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와 동맹협정을 맺으며 그곳에 정착하였다. 이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로 이동하자 서고트족이 히스파니아를 다시 장악하였고 AD 466년 유리크 왕 시절에 정식으로 서고트 왕국을 세웠으나 알라리크 2세가 프랑크족의 클로비스에게 패배하면서 갈리아를 상실하고 영토가 피레네 산맥 이남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은 AD 711년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히스파니아 지방을 지배하게 된다.

 

AD 407년 브리타니아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티누스는 스스로 황제 콘스탄티누스 3세를 자처하며 갈리아를 침공하였으나 군사령관인 콘스탄티우스에게 패배하였다. 콘스탄티우스는 AD 417년 호노리우스 황제의 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하였고 AD 421년 2월에는 공동황제까지 임명되었으나 같은해 8월 사망하였다. 한편 콘스탄티누스의 반란으로 더이상 브리타니아에는 로마 군단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호노리우스가 브리타니아에 새로운 로마 군단을 보내는 것을 포기하면서 브리타니아는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브리타니아는 오늘날 독일 북서부에 거주하던 앵글족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 거주하던 작센족이 유입되어 앵글로-색슨족으로 불리우며 각지에 왕국을 세웠다. 오늘날의 잉글랜드라는 명칭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의 마지막 노력

 

AD 423년 호노리우스가 죽자 로마의 치안장관인 요하네스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2세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AD 425년 서로마 제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요하네스는 훈족과 친분이 두터운 갈리아의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에게 훈족 용병을 이끌고 이탈리아의 라벤나로 와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아이티우스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요하네스는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아이티우스가 라벤나로 도착했을 때는 호노리우스에 의해 공동황제로 임명되었던 콘스탄티우스 3세의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옹립된 상태였다. 그러나 즉위 당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나이가 6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모친인 플라키디아가 한동안 섭정이 되었다. 플라키디아는 아이티우스를 회유하기 위해 갈리아의 최고 군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아이티우스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서로마 제국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보니파키우스와의 분쟁과 반달족의 북아프리카 점령

 

아이티우스와 함께 서로마 제국의 또다른 실력자로는 북아프리카의 코메스인 보니파키우스가 있었다. 아이티우스는 보니파키우스와 의견대립이 많았기 때문에 모략을 꾸며 보니파키우스를 반역혐의를 뒤집어 씌웠고 이에 보니파키우스가 히스파니아에 있던 반달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비록 얼마지나지 않아 보니파키우스에 대한 누명이 벗겨지면서 반달족에 대한 지원요청을 취소했지만 군데리크의 뒤를 이은 이복동생 가이세리크는 예정대로 8만명에 달하는 반달족 전체를 데리고 AD 429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처들어갔다. 보니파키우스가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가이세리크는 히포 레기우스(현재 알제리의 안나바)를 14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시켰다. 

 

결국 보니파키우스는 이탈리아로 도망쳤고 가이세리크는 서로마 제국과 협상을 벌여 AD 435년 포이데라티 협정을 맺었으나 AD 439년에 협정을 파기하고 카르타고를 기습 점령하였다. 그리고 AD 442년 다시 로마와 동맹협정을 맺어 북아프리카의 지배를 인정받아 반달왕국을 성립시켰다. 반달왕국은 옛 카르타고의 선원들을 이용하여 대규모 함대를 조직한 후 지중해를 건너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 등 지중해의 여러 섬들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영토를 확대시킨 후 AD 533년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섬들을 지배하게 된다.

 

 

아이티우스의 권력장악

 

보니파키우스는 북아프리카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우스를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에 중용되어 서로마 제국의 총사령관(magiser utriusque militiae)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아이티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처들어오면서 AD 433년 라벤나 근처에서 리미니 전투가 벌어졌다. 비록 아이티우스가 패배하면서 물러나야했지만 이때 입은 부상으로 보니파키우스가 사망하고 그의 사위인 세바스티아누스가 보니파키우스의 지위를 이어받자 아이티우스는 재차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더이상 아이티우스를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티우스는 라벤나에 입성하였고 세바스티아누스를 추방한 후 보나파키우스의 미망인인 펠라지아와 결혼하며 죽은 보나파키우스을 대신하여 서로마 제국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아이티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이후 20년간 아이티우스는 갈리아에서 여러 게르만 부족과 싸우며 눈부신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 AD 436년에는 부르군트족을 격파한 후 평화협정을 강요하였고 AD 438년에는 수에비족과 서고트족에게 승리를 거뒀다. AD 443년에는 부르군트족을 제네바 호수 근처에 정착시키고 복속시킨 게르만 부족 중 알란족을 AD 440년에는 발랑스에, AD 442년에는 오를레앙에 차례로 옮겨 살도록 정리하였다. AD 450년에는 프랑크족의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그 중 한 명을 양자로 삼았다. 

 

 

훈족의 침공

 

AD 451년 훈족이 침공하면서 서로마 제국이 큰 위기에 처했다. 훈족은 중앙아시아의 스텝지대에 거주하였던 투르크계의 유목 기마민족으로 AD 4세기경 유럽에 등장하여 볼가 강과 돈 강 사이의 평원지대를 지배하던 알라니족을 무너뜨리고, AD 375년에 흑해 연안의 동고트족을 정복했으며 AD 376년경에는 다뉴브강 하류의 서고트족을 쫓아내는 등 막강한 군사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훈족의 유래에 대해서는 AD 5, 6세기에 인도와 이란을 침략한 에프탈족과 일찍이 중국인에게 알려진 흉노족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훈족과 로마 제국 사이에 위치한 게르만 부족들이 차례로 무너지거나 로마 제국 영토안으로 들어가자 이제는 훈족과 로마 제국이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AD 434년 아틸라가 훈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면서 훈족이 로마 제국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아틸라는 형 블레다와 공동으로 훈족의 왕이 된 후 동로마 제국과 공물을 받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동로마 제국이 이를 이행하지 않자 AD 441년 도나우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AD 445년 형 블레다를 살해하고 단독으로 왕권을 장악한 아틸라는 AD 447년 동로마 제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발칸 반도를 정벌하였다. 동로마 제국으로서는 아틸라를 달래기 위해 매년 700파운드의 금을 공물로 제공해야만 했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유린하고 막대한 부를 쌓게 된 아틸라는 AD 451년 관심을 서로마 제국으로 옮겼다.

 

 

카탈라우눔 전투의 승리

 

아틸라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여동생 호노리아로부터 구혼편지를 받자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반을 요구하며 AD 451년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으로 처들어갔다. 아틸라의 훈족이 거침없이 진군하며 오를레앙까지 육박하자 아이티우스는 서둘러 군사들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당시 서고트족의 왕인 테오도릭 1세를 설득하여 동맹으로 끌어들였고 그밖에 동맹부족(포이데라티) 협정을 맺은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 동고트족 등의 지원을 받아 연합군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병력을 구성을 마친 아이티우스는 AD 451년 6월 20일 오를레앙 근처의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아이티우스는 기마술이 우수한 서고트족을 우익에 배치하여 훈족을 포위하고자 하였으나 아틸라는 정예 훈족 기병을 가운데에 배치하여 중앙돌파를 노렸다.

 

전투가 시작되자 예정대로 아틸라가 기병을 이끌고 중앙으로 돌진하였고 좌우에 배치된 서고트족과 동고트족 역시 전투에 돌입하였다. 연합군의 우익의 서고트족의 전투가 특히 치열하게 전개되어 서고트족은 테오도릭 1세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테오도릭 1세의 아들인 토리스먼드가 부대를 수습하였다. 아틸라의 훈족 기병과 서고트족의 전투가 혼전으로 치닫는 동안 좌측에 위치한 아이티우스는 여전히 제자리를 사수하고 있었다. 아틸라는 중앙돌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틸라 부대의 후미가 노출되었고 이에 아이티우스는 병력을 나눠 아틸라 부대의 후미를 향해 돌격시켰다. 결국 이 공격이 결정타가 되어 훈족의 진형이 무너지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이티우스는 해가 질때까지 훈족을 추격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아버지 테오도릭 1세를 잃어버린 토리스먼드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아틸라로서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아이티우스는 훈족이 무너질 경우 서고트족을 더이상 견제할 수단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고는 토리스먼드에게 아버지의 왕위를 정식으로 계승하기 위해 서둘러 철수할 것을 종용하였다. 결국 서고트족이 물러나면서 아틸라 역시 후퇴할 수 있었고 라인강을 건너 본거지로 되돌아갔다. 카탈라우눔 전투는 아틸라에게 있어서 최초이자 유일한 패배였다. 

 

 

훈족의 재침공

 

이듬해가 되자 아틸라는 세력을 다시 회복하여 이탈리아의 북부를 침략했다. 이번에는 아이티우스가 아틸라를 저지할 만한 병력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갈리아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방관하였다. 아틸라는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파도바, 비첸차, 베로나, 크레모나, 피아젠차, 파비아, 밀라노를 차례차례 유린하였고 서로마 제국으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결국 로마의 교황 레오 1세와 원로원 의원 2명이 아틸라를 만나 협상을 통해 겨우 돌려보낼 수 있었다. 협상의 자세한 내용은 기록되진 않았으나 상당수의 공물을 바친 것으로 추정되며, 아틸라는 때마침 닥친 기근과 전염병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철군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10년 가까이 유럽을 공포속으로 몰아넣으며 '신의 채찍'이라고까지 불렸던 아틸라였지만 AD 453년 결혼식날 급사하였다. 한시대를 풍미한 영웅으로서는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아틸라가 죽자 여러 명의 아들에 의해 제국은 분열되었고 결국 455년 판노니아의 네다오 강 대전투에서 게피다이, 동고트, 헤룰리, 기타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연합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역사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이티우스의 암살과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단절

 

아틸라가 죽은 후 아이티우스는 자신의 아들을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이티우스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아들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고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아이티우스를 암살하도록 부추겼다. 결국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자신을 알현하러 온 아이티우스를 칼로 찔러 죽였다. 하지만 발렌티니아누스 3세 역시 얼마지나지 않아 막시무스에 의해 암살당하였고 원로원 투표를 통해 막시무스가 새로운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참고로 동로마 제국에서도 아르카디우스가 AD 408년 사망한 이후 아르카디우스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기간 AD 408년 ~ AD 450년)와 아르카디우스의 사위인 마르키아누스(재위기간 AD 450년 ~ AD 457년)가 차례로 즉위하였지만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여 동로마 제국의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스파르에 의해 레오 1세가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렇게 하여 테오도시우스 1세가 창건한 후 로마 제국을 동서로 분할하여 지배하던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양쪽에서 단절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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