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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료 59

얄타 회담, 연합국의 한반도 점령 및 시정 방안 논의

신탁 통치 구상과 국제 민간 행정 기구안이 대한 정책 결정 집단 내부에 자리잡음으로써 미국의 전후 대한 정책 구상은 완숙 단계에 들어갔다. 그리고 1945년 들어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점차 미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자신들의 정치⋅군사적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들을, 대일 군사 작전과 관련하여 보다 현실적인 기초 위에서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적용될 국제 신탁 통치안은 정치적 독립과 군사적 안보를 내용적으로 분리하였고, 군사 안보적 측면이 1차적인 고려 사항이었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특히 한국의 전후 처리안이 주변 강대국과의 이해 관계 조정을 전제로 하였던만큼 전후 이 지역의 정치⋅군사적 상황을 어떻게 미국 측에 유리하게 조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하였다. 미 국무..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가비라성(迦毗羅城)의 큰 절에서 한량없는 대비구 대중과 함께 계셨다. 또 한량없는 백천억 나유타 보살마하살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제일체개장보살(除一切蓋障菩薩)⋅집금강주보살(執金剛主菩薩)⋅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문수사리보살(文殊舍利菩薩)⋅보현보살(普賢菩薩)⋅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미륵보살(彌勒菩薩)로서 그들이 대표가 되었으며, 또 한량없는 천⋅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인비인(人非人)의 대중들이 공경하고 둘러 있는 가운데서 법(法)을 말씀하셨다. 그때 그 성에 외도에 귀의하여 불법을 믿지 않는 겁비라전다(劫比羅戰茶)라는 바라문(婆羅門)이 있었다. 어떤 관상쟁이가 겁비라전다 바라문에게 말하기를, “바라문이여, 당신은 7일 후..

불국사와 석불사 축조

불국사와 석불사 축조 모량리(牟梁里)【혹은 부운촌(浮雲村)이라고도 한다】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는 크고 이마가 평평하여 성(城)과 같으므로 대성(大城)이라고 불렀다. 집이 가난하여 생활할 수 없어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고용살이를 하여 그 집에서 약간의 밭을 받아 의식(衣食) 비용으로 삼았다. ……(중략)…… 대성이 이를 듣고 뛰어 들어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제가 문간에 온 스님이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우리는 분명히 전생에 선업이 없어 지금 이렇게 곤궁한 것입니다. 지금 또 보시하지 않으면 내세에는 더욱 곤란할 것이니,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法會)에 보시해서 뒷날의 응보를 도모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진표 점찰계법

진표 점찰계법 승려 진표(眞表)는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목(全州牧)】 만경현(萬頃縣) 사람이다【혹은 두내산현(豆乃山縣) 혹은 도나산현(都那山縣)이라고도 하니 지금의 만경(萬頃)이며, 옛 이름은 두내산현이다. 관녕전(貫寧傳)에 석진표의 고향을 금산현(金山縣) 사람이라고 한 것은 절 이름과 현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고,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으로 성(姓)은 정씨(井氏)이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금산사(金山寺) 숭제법사(崇濟法師)의 강석 아래에 몸을 던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배우기를 청하였다. ……(중략)…… 진표가 (숭제) 법사의 말을 듣고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선계산(仙溪山) 불사의암(不思議菴)에서 멈춰서 머물면서 3업(業)을 연마하였으며, 망신참회(亡身懺悔)로 계..

의상 화엄일승법계도

의상 화엄일승법계도 법사(法師) 의상(義湘)은 아버지가 한신(韓信)으로 김씨(金氏)인데, 나이 29세에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서방으로 가서 불교의 교화를 보고자 하였다. 드디어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가 변방의 순라군(戌邏軍)에게 첩자로 오인 받아 수십 일 동안 갇혔다가 간신히 면하여 돌아왔다【이 사실은 최후(崔侯)가 지은 본전(本傳)과 원효의 행장(行狀) 등에 실려 있다】. 영휘(永徽) 초에 마침 당나라 사신의 배가 서방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편승하여 중국으로 들어갔다. ……(중략)…… 종남산(終南山) (지엄(智儼)의) 문인 현수(賢首)가 『수현소(搜玄疏)』를 찬술하여 의상에게 부본(副本)을 보내면서, 아울러 편지를 보내 은근하고 간절하게 다음과 같..

원효 불교사상

원효 불교사상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속성(俗姓)은 설씨(薛氏)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으로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談捺) 내말(乃末)이다.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이다】 불지촌(佛地村) 북쪽 율곡(栗谷) 사라수(娑羅樹) 아래서 태어났다. ……(중략)…… 성사가 태어나서 어릴 적 이름은 서당(誓幢)이고, 제명(第名)은 신당(新幢)【당(幢)은 속어로 털[毛]이다】이다. 처음에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는데, 해산하려고 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이때가 진평왕(眞平王) 39년인 대업(大業) 13년 정축년(丁丑年, 617)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

교종, 명랑(明朗) 신인종(神印宗)

명랑(明朗) 신인종(神印宗) 『금광사본기(金光寺本記)』를 살펴보니 다음과 같이 전한다. “법사는 신라에서 태어났다. 당나라에 들어가 도를 배우고, 돌아올 때 해룡(海龍)의 청으로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였다. (용왕으로부터) 황금 1000냥【혹은 1000근이라고도 한다】을 보시 받아 지하로 잠행하여 자기 집의 우물 밑으로부터 솟아 나왔다. 이에 집을 내놓아 절로 삼고, 용왕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빛났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금광사(金光寺)【승전(僧傳)에는 금우사(金羽寺)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明朗)이고,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인데, 혹은 법승랑(法乘娘)이라고..

설총 화왕계

설총 화왕계 ……(전략)…… 신문대왕(神文大王)이 한여름 5월에 높고 밝은 방에 거처하면서 설총(薛聰)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오늘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처음으로 그치고 향기로운 바람이 살랑살랑 부니 좋은 반찬과 애처로운 음악이 있더라도 고상한 말과 좋은 웃음거리로써 울적한 회포를 푸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대는 틀림없이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을 것이니, 나를 위해서 이야기해 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설총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이 들으니 옛날에 화왕(花王)이 처음 전래하였을 때 이를 향기로운 정원에 심고 비취색 장막을 둘러 보호하자 봄 내내 그 색깔의 고움을 발산하니 온갖 꽃을 능가하여 홀로 빼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아름답고 고운 ..

강수 이야기

강수 이야기 강수(强首)는 중원경(中原京)의 사량인(沙梁人)이고, 아버지는 석체(昔諦) 나마(奈麻)이다. 그 어머니가 꿈에 뿔이 달린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낳았는데, 머리 뒤편에 뼈가 불쑥 나와 있었다. ……(중략)…… 나이가 들자 저절로 책을 읽을 줄 알고 의리를 통달하였다. 아버지가 그 뜻을 알아보고자 하여 묻기를, “너는 불교[佛道]를 배우겠느냐? 유교[儒道]를 배우겠느냐?”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제가 들으니 불교는 세속을 도외시한 가르침(世外敎)인데, 저는 인간세계의 사람으로서 어찌 부처가 되는 것을 배우겠습니까? 유교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네가 좋은 대로 하라.”고 하였다. 드디어 스승을 찾아가 『효경(孝經)』⋅『곡례(曲禮)』⋅『이아(爾雅)』⋅『문선(文選)』을 ..

신라인 당 유학

신라인 당 유학 [원성왕(元聖王) 5년(789)] 9월에 자옥(子玉)을 양근현(陽根縣)의 소수(小守)로 삼으니, 집사사(執事史) 모초(毛肖)가 논박하여 말하기를, “자옥은 문적(文籍)으로 등용되지 않았으니 지방 관직을 맡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시중(侍中)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비록 문적으로 등용되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학생(學生)이 되었으니 역시 써도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이에 따랐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5년 9월 九月, 以子玉爲楊根縣小守. 執事史毛肖駮言, 子玉不以文籍出身, 不可委分憂之職. 侍中議云, 雖不以文籍出身, 曾入大唐爲學生, 不亦可用耶. 王從之. 『三國史記』卷10, 「新羅本紀」10 元聖王 5年 9月 해설 : 신라가 당나라에..

국학 설립, 독서삼품과 실시

국학 설립, 독서삼품과 실시 국학(國學)은 예부(禮部)에 속하였는데,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설치하였다. 경덕왕(景德王)이 태학감(太學監)으로 고쳤으나 혜공왕(惠恭王)이 옛 이름대로 하였다. 경(卿)은 1명이었는데 경덕왕이 사업(司業)으로 고쳤으나 혜공왕이 다시 경으로 칭하였다. 관등은 다른 경과 같았다. 박사(博士)【약간 명이었는데, 수는 정하지 않았다】와 조교(助敎)【약간 명이었는데, 수는 정하지 않았다】가 있었다. 대사(大舍)는 2명이었는데 진덕왕(眞德王) 5년(651)에 설치하였다. 경덕왕이 주부(主簿)로 고쳤으나 혜공왕이 다시 대사로 칭하였다. 관등이 사지(舍知)에서 나마(奈麻)까지인 자로 임용하였다. 사(史)는 2명이었는데 혜공왕 원년(765)에 2명을 더하였다. 교수하는 법은 『주역..

진성여왕대 혼란

진성여왕대 혼란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 최치원(崔致遠) 지음 당나라 19대 황제가 중흥(中興)을 이루었을 때 전쟁과 흉년의 두 재앙이 서쪽에서 멈추어 동쪽에 와서, 나쁜 중에 더욱 나쁜 것이 없는 곳이 없고 굶어 죽고 싸우다 죽은 시체가 들판에 즐비하였다. 해인사의 별대덕(別大德)인 승훈(僧訓)이 이를 애통해 하더니 이에 도사(導師)의 힘을 베풀어 미혹한 무리의 마음을 이끌어 각자 벼 한 줌을 내게 하여 함께 옥돌로 삼층을 쌓았다. 그 발원 법륜의 계도(戒道)는 크게 보아 호국을 으뜸으로 삼으니, 이중에서 특별히 억울하게 죽어 고해(苦海)에 빠진 영혼을 구해 올려 제사를 지내서 복을 받음이 영원히 그치지 않고 이에 있도록 함이다. 때는 건녕(乾寧) 2년(895, 진성여왕 9년) 7월 16일에 ..

원종과 애노의 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난 [진성왕] 3년(889) 나라 안의 여러 주(州)⋅군(郡)에서 공물과 조세를 보내지 않아 나라의 창고가 텅 비어 나라의 씀씀이가 궁핍하게 되었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나마(奈麻) 영기(令奇)에게 명하여 (이들을) 붙잡아 오도록 하였다. 영기가 적의 보루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촌주(村主) 우련(祐連)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칙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고 나이 10여 세 된 우련의 아들에게 촌주의 직을 잇게 하였다.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진성왕 3년 [眞聖王] 三年, 國內諸州..

신라 귀족 복식 문화, 법흥왕

신라 귀족 복식 문화 신라 초의 의복 제도는 색상에 대해 살펴볼 수 없다. 제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대에 이르러 비로소 6부(六部) 사람이 입는 복색의 높고 낮음을 제도로 정하였지만, 여전히 오랑캐의 풍속과 같았다. 진덕왕(眞德王) 재위 2년(648)에 이르러 김춘추(金春秋, 604~661)가 당(唐)나라에 들어가 당나라의 의례에 따를 것을 청하니,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이 조서로써 이를 허락하고 아울러 옷과 허리띠를 주었다. 드디어 [김춘추가] 돌아와서 시행하여 오랑캐의 [복색을] 중화(中華)의 것으로 바꾸었다. 문무왕(文武王) 4년(664)에 또한 부인의 의복을 고치니, 이 이후로는 의관이 중국과 같게 되었다. ……(중략)…… 법흥왕 대의 제도에서 태대각간(太大..

흥덕왕 사치 금령 조치

흥덕왕 사치 금령 조치 흥덕왕(興德王) 즉위 9년, 태화(太和) 8년(834)에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사람은 상하가 있고, (그에 따라) 호칭이 같지 않고 의복도 다르다. 그런데 풍속이 점점 경박해지고 백성이 사치와 호화를 다투게 되어 오직 외래 물건의 진기함을 숭상하고 도리어 토산품의 비루함을 혐오하니, 예절이 거의 무시되는 지경에 빠지고 풍속이 쇠퇴하여 없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에 감히 옛 법에 따라 밝은 명령을 펴는 바이니, 혹시 고의로 범하는 자가 있으면 진실로 일정한 형벌이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권33, 「잡지」2, 색복 興德王即位九年, 太和八年, 下敎曰. 人有上下, 位有尊卑, 名例不同, 衣服亦異. 俗漸澆薄, 民競奢華, 只尚異物之珍竒, 却嫌土産之鄙野, 禮數失於逼僭, 風俗至於陵夷..

신라 진골귀족 생활 -금입택(金入宅)

신라 진골귀족 생활 -금입택(金入宅) 신라의 전성기에 서울에는 17만 8936호,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남택(南宅)⋅북택(北宅)⋅우비소택(亏比所宅)⋅본피택(本披宅)⋅양택(梁宅)⋅지상택(池上宅)⋅재매정택(財買井宅)⋅북유택(北維宅)⋅남유택(南維宅)⋅대택(隊宅)⋅빈지택(賓支宅)⋅장사택(長沙宅)⋅상앵택(上櫻宅)⋅하앵택(下櫻宅)⋅수망택(水望宅)⋅천택(泉宅)⋅양상택(楊上宅)⋅한기택(漢岐宅⋅비혈택(鼻穴宅)⋅판적택(板積宅)⋅별교택(別敎宅)⋅아남택(衙南宅)⋅김양종택(金楊宗宅)⋅곡수택(曲水宅)⋅유야택(柳也宅)⋅사하택(寺下宅)⋅사량택(沙梁宅)⋅정상택(井上宅)⋅이남택(里南宅)⋅사내곡택(思內曲宅)⋅지택(池宅)⋅사상택(寺上宅)⋅임상택(林上宅)⋅교남택(橋南宅)⋅항질택(巷叱宅)⋅누상택(樓上宅)⋅이..

발해 교통로 - 5도, 신라도

발해 교통로 - 5도, 신라도 용원(龍原)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도(日本道)이다. 남해(南海)는 신라도(新羅道)이다. 압록(鴨淥)은 조공도(朝貢道)이다. 장령(長嶺)은 영주도(營州道)이다. 부여(扶餘)는 거란도(契丹道)이다. 『신당서』권219, 「열전」144 북적 발해 가탐(賈躭)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이르기를, “발해국(渤海國)의 남해(南海)⋅압록(鴨淥)⋅부여(扶餘)⋅책성(柵城)의 4부(府)는 모두 옛 고구려의 땅이다. 신라 천정군(泉井郡)에서 책성부(柵城府)에 이르기까지 무릇 39역(驛)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37, 「잡지」6 지리 4 龍原東南瀕海, 日本道也. 南海, 新羅道也. 鴨淥, 朝貢道也. 長嶺, 營州道也. 扶餘, 契丹道也. 『新唐書』卷219, 「列傳」144 北狄 渤海 賈躭古今郡..

발해 일본 경제 교류

발해 일본 경제 교류 갑인(甲寅)에 천황이 중궁(中宮)에 나아갔는데, 고제덕(高齊德) 등이 왕의 서신과 토산품을 바쳤다. 그 교서에 “[대]무예([大]武藝, 재위 719~737)가 아룁니다. ……(중략)…… 삼가 영원 장군(寧遠將軍) 낭장(郞將) 고인의(高仁義), 유장군(游將軍) 과의도위(果毅都尉) 덕주(德周), 별장(別將) 사항(舍航) 등 24명에게 서신을 가지고 가도록 하였고 아울러 담비 가죽 300장을 정중히 보냅니다. ……(중략)……”라고 하였다. 『속일본기』권10, 신구 5년(728) 봄 1월 임오(壬午)에 [고]제덕([高]齊德) 등 8명에게 각각 빛깔이 고운 비단과 무늬 있는 비단, 면을 하사하되 차등이 있었다. 이에 그 왕에게 새서(璽書)를 내려 말하기를, “천황이 삼가 발해 군왕(渤海郡王)..

신라 일본 교역

신라 일본 교역 신라가 아찬(阿湌) 김항나(金項那)와 사찬(沙湌) 살류생(薩虆生)을 보내 조공하였다. 특산품[調]으로 바친 물건은 금⋅은⋅철⋅솥⋅비단⋅명주⋅베⋅가죽⋅말⋅개⋅노새⋅낙타 따위의 10여 종이었다. 또한 따로 바친 물건이 있었다. 천황(天皇)⋅황후(皇后)⋅태자(太子)에게 금⋅은⋅칼⋅깃발 따위를 바쳤는데, 각각 그 수가 많았다. 『일본서기』권29, 천무 천황 8년 10월(갑자) 대재(大宰)가 신라의 공물을 바쳤는데, 금⋅은⋅비단⋅베⋅가죽⋅구리⋅철 따위의 10여 가지였다. 아울러 별도로 불상⋅여러 가지 채색 비단⋅새⋅말 따위 10여 가지를 바쳤다. 그리고 [김]상림([金]霜林)이 금⋅은⋅채색(彩色) 등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을 바치니, 모두 80여 가지였다. 『일본서기』권30, 지통 천황 2년 2월..

재당 신라인 교역 활동

재당 신라인 교역 활동 신라 사람 왕청(王請)이 왔으므로 만나 보았다. 이 사람은 본국[일본]의 홍인(弘仁) 10년(819)에 바다에 표류하다가 데슈쿠니[出州國]에 닿은 당(唐)나라 사람 장각제(張覺濟) 등과 같이 배를 탔던 사람이다. 표류하게 된 까닭을 물으니, “여러 가지 물건을 교역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 바다를 건너는데 갑자기 풍랑을 만나 3개월 동안 남쪽으로 떠내려가다가 데슈쿠니에 닿았습니다 ……(중략)…….”라고 말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권1, 개성 4년 정월 8일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던 천태종(天台宗) 승려 원재(圓載, ?~877)의 제자 인호(仁好)와 순창(順昌)이 신라 사람 장공정(張公靖) 등 26명과 함께 나가토쿠니[長門國]에 도착하였다. 『속일본후기』권13, 인명천황 10년 12월..

신라 교역품

신라 교역품 중국의 동해에 있는 이 나라[신라]로부터 가져오는 물품은 비단[調段], 검(劍), 키민카우(kiminkhau), 사향(麝香), 침향[蘆薈], 말 안장 용품[馬鞍], 담비 가죽[貂皮], 도기(陶器), 범포(帆布), 육계(肉桂), 쿠란잔(khulanjan)이다. 이븐 쿠르다지마, 『제도로 및 제왕국지』 [그] 지역[신라]에서는 인삼(人蔘)⋅수은(水銀)⋅사향(麝香)⋅송자(松子)⋅진자(榛子)⋅석결명(石決明)⋅송탑자(松塔子)⋅방풍(防風)⋅백부자(白附子)⋅복령(茯笭)⋅대소포(大小布)⋅모시포(毛施布)⋅동경(銅磬)⋅자기(瓷器)⋅초석(草蓆)⋅서모필(鼠毛筆) 등이 나는데, 상선(商舶)들이 5색으로 염색한 비단에 문자(文字)를 세워 무역을 한다. 조여괄, 『제번지』권상, 신라국

장보고(張保皐), 정년(停年)전

장보고(張保皐)⋅정년(停年)전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이라는 자는 자기 나라에서 서주(徐州)로 와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장보고의 나이는 서른 살이고 정년의 나이는 열 살이 젊어, 장보고를 형이라고 불렀다. 모두 싸움을 잘하였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나라와 서주에서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정년은 또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걸어가면서 물을 내뿜지 아니하였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技藝)로서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후에 장보고는 신라에 귀국하여 그 왕(흥덕왕)을 뵙고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신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청해(淸海), 신라 해로(海路)의 요지(要地)에 진영(鎭營)을 설치..

『입당구법순례행기』 장보고

『입당구법순례행기』 장보고 [개성(開成) 4년(839) 4월] 20일 이른 아침에 신라인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 문득 듣건대, “장보고(張寶高)가 신라 왕자와 공모하여 신라국을 징벌하고 곧 그 왕자를 신라국의 왕자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권2, 839년 4월 20일 [개성 4년(839) 6월] 7일 정오경에 북서풍이 불기에 돛을 올리고 나아갔다. 오후 2시 무렵에 적산(赤山)의 동쪽 해변에 배를 대니 북서풍이 몹시 분다. 적산은 순전히 바위로 되어 있으며 매우 높은데, 곧 문등현(文登縣) 청녕향(淸寧鄕) 적산촌(赤山村)이다. 산 속에 절이 있어 그 이름은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인데, 이는 장보고가 처음 세운 것이다. 오랫동안 장전(莊田)을 갖고 있어 양식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 장..

장보고(張保皐)

장보고 해상 활동 장보고(張保皐)【「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궁복(弓福)으로 되어 있다】와 정년(鄭年)【연(年)은 연(連)으로도 되어 있다.】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그들의 고향과 아버지⋅할아버지는 알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은 특히 바닷속에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조금 뒤졌으나 정년이 장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技藝)로 항상 서로 맞서 서로 아래에 들지 않으려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타고 창을 쓰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이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을 뵙고 아뢰기를,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동시⋅서시⋅남시의 개설

동시⋅서시⋅남시의 개설 동시전(東市典)은 지증왕(智證王, 재위 437~514) 9년(508)에 설치하였다. 감(監)은 2명이었는데, 관등(官等)이 나마(奈麻)에서 대나마(大奈麻)까지인 자로 임용하였다. 대사(大舍)는 2명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이 주사(主事)로 고쳤으나 후에 다시 대사로 일컬었으며, 관등은 사지(舍知)에서 나마까지인 자로 임용하였다. 서생(書生)은 2명이었는데, 경덕왕이 사직(司直)으로 고쳤으나 후에 다시 서생으로 칭하였다. 관등은 조부(調府)의 사(史)와 같았다. 사는 4명이었다. 서시전(西市典)은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 4년(695)에 설치하였다. 감(監)은 2명이었다. 대사(大舍)는 2명이었는데, 경덕왕이 주사(主事)로 고쳤으나 후에 다시 대사로..

신라의 촌락 지배, 신라촌락문서, 신라민정문서, 신라장적

신라의 촌락 지배 이 현(縣)의 사해점촌(沙害漸村)을 조사해 보니, 지형은 산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의 둘레는 5725보(步), 공연(孔烟)의 수는 합하여 11호(戶)가 된다. 계연(計烟)은 4, 나머지 3이다. 이 가운데 중하연(仲下烟) 4호, 하상연(下上烟) 2호, 하하연(下下烟) 5호이다. 마을의 모든 사람을 합치면 147명이며, 이 중 3년 전부터 살아온 사람과 3년 사이에 태어난 자를 합하면 145명이 된다. 정(丁) 29명(노(奴) 1명 포함), 조자(助子) 7명(노(奴) 1명 포함), 추자(追子) 12명, 소자(小子) 10명이며, 3년 사이에 태어난 소자 5명, 제공(除公) 1명이다. 여자는 정녀(丁女) 42명(비(婢) 5명 포함), 조여자 9명, 소여자 8명이며, 3년간에 태어난 ..

통일 신라 관료전 지급 및 녹읍 폐지와 정전의 지급

통일 신라 관료전 지급 및 녹읍 폐지와 정전의 지급 [신문왕 7년(687)] 5월에 교서를 내려 문무(文武) 관료들에게 토지를 차등 있게 주었다.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8 신문왕 7년 하5월 [신문왕] 9년(689) 봄 정월에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해마다 조(租)를 차등 있게 주고 이를 일정한 법으로 삼았다.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8 신문왕 9년 춘1월 [성덕왕 21년(722)] 가을 8월에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8 성덕왕 21년 추8월 [경덕왕 16년(757)] 3월에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리에게 매달 주던 녹봉(祿俸)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주었다. 『삼국사기』권9, 「신라본기」9 경덕왕 16년 3월

후고구려 궁예

후고구려 궁예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이다.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861)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48대 경문왕(景文王, ?~875)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 빛이 있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까지 뻗쳤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태어났고 나면서 이가 나 있고, 또한 햇빛이 이상하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옵니다. 마땅히 아이를 키우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궁중의 사람을 시켜 그 집에 가서 죽이게 하였다. 그 사람이 포대기에서 그 애를 꺼내 처마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인 여자 종이 몰래 받다가 실수하여..

후백제 견훤(甄萱)

후백제 견훤(甄萱)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이씨(李氏)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후에 가문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견훤이 태어나 어린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면 어머니가 식사를 날라다 주었는데, 아이를 나무 수풀 밑에 놓아 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시골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장성하자 체격과 용모가 우뚝 뛰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커서 보통이 아니었다. 군대를 따라 서울에 들어왔다가 서남 해안을 지키러 갔을 때에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기다렸고, 그의 용기는 항상 병졸보다 앞섰으므로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지방 호족의 성장-선필

지방 호족의 성장-선필 선필(善弼)은 신라의 재암성(載岩城) 장군이었다. 이때에 도적의 무리가 다투어 일어나 이르는 곳마다 약탈하였다.태조(太祖)가 신라와 우호를 맺으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서 근심하였다. 선필은 태조의 위엄과 덕행을 보고 드디어 귀순을 표시하여 신라와 우호를 맺을 수 있도록 힘을 썼고, 적을 막아 여러 번 공이 있었다. 후에 그 성을 들어 귀부하자 태조가 후하게 대우를 더하였으며, 나이가 많았으므로 상부(尙父)로 삼았다. 『고려사』권92, 「열전」5 [제신] 왕순식 부 선필 善弼爲新羅載巖城將軍, 時群盜競起所至奪掠. 太祖欲通好新羅以路梗患之, 弼觀太祖威德遂歸款, 以計使通好新羅, 因捍賊屢有功. 後以其城內附, 太祖厚加待遇, 以年老稱爲尙父. 『高麗史』卷92, 「列傳」5 [諸臣] 王順式 附 善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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