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드 앗딘 장기의 장기왕조 등장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십자군 자체의 힘 보다는 이슬람 세계의 분열에 힘입은 바가 컸다. 당시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실권을 빼앗긴 채 종교적인 권위만을 인정받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고, 칼리프를 대신하여 세속적인 권한을 행사하던 셀주크 왕조도 왕위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중앙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지방 총독(아타베그 혹은 아미르)들이 중앙정부의 지배를 거부한 채 서로 영토를 다투며 살아가기 시작했고 결국 분열된 이슬람 세계로서는 갑작스런 십자군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도 점차 저력을 발휘하여 십자군이 세운 십자군 국가에 대항하는 반격이 시작되었는데, 그 중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 바로 이마드 아딘 장기(일명 장기)가 세운 장기 왕조였다.
이마드 아딘 장기는 북부 시리아의 대도시인 알레포의 아미르였던 아크 순르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AD 1094년에 아버지가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하자 장기는 이라크 북부의 모술로 피신하여 모술 아미르인 카르부가의 휘하에 들었다. AD 1127년 칼리프 알 무스타시드가 셀주크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 2세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장기는 술탄의 편에 서서 싸워 칼리프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장기는 이 공으로 모술의 아미르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당시 모술에 부속되어 있던 알레포에 입성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장기는 시리아 셀주크 왕조 리드완 왕의 딸이자 알레포의 이전 아타베그였던 일 가지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새로운 아타베그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아타베그 정권을 장기의 이름을 따 장기 왕조라고 부른다. 이후 장기는 오랫동안 시리아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여 신자르, 자지라, 하란, 하마 등으로 영토를 넓혔으나 시리아의 중심인 다마스쿠스만은 점령에 실패하였다. 다마스쿠스를 지배하던 부리왕조가 이슬람교도이면서도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을 맺어 장기에게 대항했기 때문이었다.
에데사 점령
AD 1144년부터 장기는 십자군 국가 중 최약체인 에데사 백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에데사 백국은 그리스도교 국가이면서도 주민 대부분이 아르메니아인으로 유럽인이 적었으며 같은 십자군 국가인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과 분쟁이 잦았다. 더구나 당시 에데사 백국을 지원하던 비잔티움 제국의 요한네스 2세와 예루살렘 왕국의 풀크가 죽었기 때문에 의지할 만한 나라도 없어졌다. 기회를 옅보던 장기는 에데사 백국의 왕위를 이은 조슬랭 2세가 서쪽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서 테르 바실까지 약탈을 벌이러 떠난 사이에 에데사를 기습공격하였다. 에데사는 비록 난공불락의 요새로 불리웠으나 조슬랭 2세가 대부분의 군대를 이끌고 나간 상태로 사제들이 전투지휘를 맡았기 때문에 공성전에 너무나 서툴렀다. 장기는 도시 북쪽성벽에 목재를 쌓고 기름과 유항을 뿌려 불을 질렀고 불길에 성벽이 무너지자 군대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 에데사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장기의 에데사 함락은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이래 이슬람 무슬림에 의한 최초의 대승이었기 때문에 장기에 대한 찬양이 일어났으며 바그다드의 칼리프도 온갖 미사여구로 업적을 치하하였다.
비록 에데사 백국의 모슬랭 2세는 테르 바실에서 건제하였으나 에데사 함락으로 에데사 백국은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다른 십자군 국가들도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예루살렘 왕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풀크의 미망인 멜리장드는 로마에 특사를 파견하여 교황에게 에데사 함락소식을 알리고 구원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한편 장기는 AD 1145년에 숙원이었던 다마스쿠스 포위전을 다시 준비하던 중 조슬랭 2세가 잔존병력을 이끌고 에데사 탈환을 노린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에데사로 돌아가 협력자를 처형하고 유대인을 이주시켰다. 그 이후에도 장기는 모술의 정치불안과 자지라 영주들의 반란기미로 인하여 정신없이 보내던 중 AD 1146년 숙영지에서 노예 야란칸슈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장기가 시작한 십자군에 대한 무슬림의 성전은 차남인 누르 앗 딘에게 이어지게 된다.
누르 앗 딘과 제2차 십자군의 대결
에데사 백국 멸망
장기가 갑작스럽게 암살된 이후 장기의 두아들인 사이프 앗 딘 가지과 누르 앗 딘(일명 누레딘)은 아버지의 영토를 분할하였다. 사이프 앗 딘 가지는 모술과 이라크 북부지방을 통치하게 되었고 누르 앗 딘은 알레포와 에데사를 지배하였다. 특히 누르 앗 딘의 통치지역이 십자군 국가에 인접해 있고 군사적 재능이 아버지 장기 못지않아 누르 앗 딘은 십자군 국가와 다마스쿠스의 부리왕조, 그리고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항쟁을 벌이며 영토를 계속해서 넓혀 나가게 된다.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2세가 장기가 죽은 기회를 틈타 AD 1146년 9월에 에데사를 회복하였으나 누르드 앗 딘이 다시 공격하여 같은 해 11월에 에데사를 탈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간신히 도망쳤던 모슬랭 2세는 결국 이듬해에 붙잡혀 포로가 되었고 알레포에 감금신세로 지내다가 AD 1159년에 죽었다. 조슬랭의 미망인은 투르베셀을 비롯한 남은 에데사 백국의 영토를 비잔티움 제국에게 팔아넘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으나 투르베셀은 같은 해에 누르 앗 딘과 룸 술탄국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렇게 하여 십자군 국가 중에서 제일 먼저 성립되었던 에데사 백국은 역시 가장 먼저 멸망하였다.
제2차 십자군 결성과 반목
AD 1145년 장기가 에데사를 점령하자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성지 구원을 요청하며 제2차 십자군 결성을 호소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를 주축으로 하하여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았던 다수의 귀족과 사제가 참가하는 십자군이 결성됐다. 그러나 제2차 십자군은 제1차 십자군과는 달리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이라는 당초 목적이 이미 실현된 상태였기에 원정의 목적이 에데사 백국의 탈환인지, 장기왕조에 대한 공격인지에 대하여 확실히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더욱이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도 제1차 십자군 때와는 달리 자신이 요청하지 않은 대군이 비잔티움 제국을 지나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거기에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도 서로 간섭받기 싫어하여 따로따로 진군했다. 많은 면에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콘라트 3세는 프랑켄 공작이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시초로 신성로마제국 잘리에르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하인리히 5세의 조카였다. 하인리히 5세가 죽은 후 잘리에르 왕조가 단절되자 작센공작 로타르 3세가 새로운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는데 콘라트 3세는 이에 반발하여 대립왕이 되었다. 이 대립은 AD 1137년 로타르 3세가 죽은 이후에 종식되었고 콘라트 3세는 정식으로 독일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대관을 받지 않아 황제의 칭호는 사용하지 못했다. AD 1146년 콘라트 3세는 어린 아들 하인리히를 후계자로 지명한 후 마인츠의 대주교 하인리히 1세를 후견인으로 임명하여 후계구도를 정비하였으며 이듬해인 AD 1147년 가을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요청에 따라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떠났다. 콘라트 3세는 프랑스 루이 7세보다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으나 비잔티움 제국이 비협조적이었기에 단독으로 아나톨리아 반도를 횡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나톨리아 반도에 대한 지리에 어두웠기에 룸 술탄국의 매복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 일부만 겨우 살아남아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AD 1137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던 루이 7세는 아버지 루이 6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왕권강화에 힘써 상파뉴 백작을 제압하고 일드프랑스 지방을 평정하였으나 새롭게 잉글랜드 왕이 된 앙주가문의 헨리 2세와의 전투에서는 큰 성과를 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AD 1147년 역시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요청에 따라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게 된 루이 7세는 콘라트 3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해안로를 따라가는 진행로를 잡았으나 역시 룸 술탄국의 공격이 시달리며 군사를 태반을 잃고 가까스로 안티오키아 공국에 도착하였다. 안티오키아 공국은 루이 7세에게 에데사 탈환을 요청하였으나 루이 7세는 이를 거절하고 당초의 목적대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제2차 십자군의 다마스쿠스 공략 실패
어렵사리 제2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다시 집결하였으나 십자군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례를 목적으로 하였기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애초부터 원정의 목적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은 향후 계획에 대하여 회의를 거듭한 끝에 결국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다마스쿠스의 부리왕조는 비록 이슬람교도였지만 장기왕조와의 오랜 분쟁으로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십자군이 다마스쿠스를 공격하려는 명분은 단지 다마스쿠스가 성서에 등장하는 성스러운 도시라는 점 뿐이었다.
AD 1148년 제2차 십자군에 의해 다마스쿠스의 공격이 시작되자 다마스쿠스의 영주 우나르는 장기왕조의 후계자인 누르 앗 딘과 사이프 앗 딘 가지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결국 병력숫자가 부족했던 제2차 십자군으로서는 누르 앗 딘 부대의 원군과 다마스쿠스의 복병에게 괴롭힘을 당한 끝에 아무성과 없이 예루살렘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제2차 십자군은 해산되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장기 왕조와 예루살렘 왕국의 이집트 쟁탈전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것은 파티마 왕조였다. 파티마 왕조는 이슬람 시아파의 분파인 이스마일파가 AD 909년에 북아프리카에서 창건한 왕조로 왕조 명칭은 예언자 무하마드의 딸이자 시아파 제1대 이맘 알리의 부인이었던 파티마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파티마 왕조는 AD 963년에 이집트를 차지하고 왕조의 근거지를 옮겼고 수니파였던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독자적인 시아파 칼리프를 선출하여 아바스 왕조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파티마 왕조는 한때 북진을 계속해 시리아와 시칠리아까지 정복할 정도로 성세를 구가하였으나 AD 1149년에 칼리프로 어린 알 자피르가 즉위한 이후부터 대부분의 권력을 와지르(재상)에게 빼앗긴 채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이후 파티마 왕조는 권력을 둘러싼 내란에 시달렸으며 최종적으로 와지르 사와르와 장군 디르감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AD 1163년 사와르는 디르감에게 권력을 빼앗기자 누르 앗 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누르 앗 딘은 쿠르드족 출신의 용맹한 장군이었던 시르쿠를 파견하였다. 시르쿠는 훗날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하는 살라흐 앗 딘(일명 살라딘)의 숙부가 되는 인물로 이때 살라흐 앗 딘이 부관 자격으로 따라나섰다고 한다. 사와르는 시르쿠의 도움으로 디르감을 축출하고 파티마 왕조의 권력을 장악하자 이번에는 시르쿠를 몰아내기 위해 예루살렘 왕국과 손을 잡았다. 새로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에 오른 아말릭 1세는 누르 앗 딘의 세력이 시리아와 이집트 양 방향에서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것을 방지하고 풍족한 이집트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고자 출병하여 시르쿠 군을 포위하였다. 시르쿠 군은 후방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었으나 누르 앗 딘이 예루살렘 왕국의 후방인 하림을 공격하여 안티오키아 공국 및 트리폴리 백국과 연합한 예루살렘 왕국군을 격파하자 어쩔 수 없이 아말릭 1세가 철군하면서 포위에서 벗어났다. 이후 이집트를 두고 누르 앗 딘과 아말릭 1세가 서로 차지하려고 각축을 벌였으며, 사와르는 그 때마다 아말릭 1세와 누르 앗 딘과 번갈아 가며 동맹을 맺어 위기를 벗어났다.
이렇게 사와르의 술수에 말려서 몇번에 걸쳐 위기에 쳐했던 시르쿠 군이었지만 결국 총 3번의 공격 끝에 AD 1169년 카이로 입성에 성공했고 사와르를 처형하였다. 시르쿠는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새로운 와지르로 승인받고 전후 처리작업을 진행하였기에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가 수니파 세력에게 지배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르쿠는 이집트 점령 두달 만에 갑자기 사망하였고 후계자로 조카인 살라흐 앗 딘이 지명되었다. 살라흐 앗 딘이 선택된 이유는 그가 시르쿠의 조카이기도 했지만 불과 31세의 나이로 매우 젊어 군부 내에 지지기반이 약했기에 누르 앗 딘 입장에서 볼때 독립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이집트라는 풍요로운 땅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행운을 거머진 살라흐 앗 딘은 이후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이집트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성전 기사단(템플 기사단)
제1차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회복된 이후인 AD 1119년말에 위그 드 파앵의 요청에 의해 아홉 명의 기사들에 의해 성지수호를 목적으로 한 기사단이 창설되었다. 이 기사단은 왕궁 근처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는데 그곳이 고대 유대왕국 시절 솔로몬 왕이 건립한 예루살렘 성전의 터였기 때문에 성전 기사단(템플 기사단)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식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이다. 성전 기사단은 이미 활동 중이었던 성 요한 기사단을 모방하여 활동수칙을 정하였고 AD 1128년에 교황 호노리오 2세에 의해 정식 기사 수도회로 인정받게 되었다. 성전 기사단은 성지 수호에 공헌하기를 원하는 많은 서유럽 귀족들의 기부와 입회로 인해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더욱이 AD 1138년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로부터 자유로운 국경출입과 과세면제, 교황 이외의 사람에게 복종의 의무 면제 등의 많은 특권을 부여받으면서 세력이 더욱 커졌다. 성전 기사단은 붉은 십자가가 표시된 하얀색 겉옷을 입어 서로를 구분하였다.
성전 기사단은 성 요한 기사단과 함께 팔레스타인 지방의 그리스도교 국가의 수호를 위해 많은 군사적인 활동을 하면서 서유럽 귀족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어갔다. AD 1147년 제2차 십자군에 참전한 프랑스의 루이 7세를 도와준 공로로 파리 교회의 광대한 부지를 기증받아 그곳에 요새화된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후 이곳은 프랑스를 방문하는 교황이나 다른 외국의 왕들의 임시 숙소가 되었으며 왕실의 보물이나 자금을 보관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AD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이집트 아야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의 3만 대군을 물리치면서 성전 기사단의 명성은 더욱 켜졌다.
성전 기사단은 군사조직의 활동과 더불어 금융기관으로의 모습도 보여주기 시작했다. 본래 중세유럽에는 수도회에 입회를 원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사유재산을 모두 수도회에 기증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성전 기사단도 마찬가지였기에 많은 재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특히 성전 기사단원 중에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이슬람 세력과 싸우는 단원은 절반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단원들이 병참과 경제기반 구축사업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순례자들의 예금증서를 작성하여 그들의 자산을 보관하는 사업을 시작하는 등 많은 금융기술을 새로 만들거나 정비하면서 거대한 금융기관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러한 금융활동을 통해 성전 기사단은 점차 막대한 자산을 보유하기 시작하였고 유럽과 팔레스타인 지방 각지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채 유럽과 성지 예루살렘을 가로질러 많은 요새를 건설하면서 수많은 하부조직을 거느린 대조직으로 성장했다. 성전 기사단은 함대까지 보유하여 전성기에는 키프로스 섬 전체를 장악할 정도였다. 이렇게 성전 기사단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엄청나게 조직이 비대해져가자 많은 지역 주교들과 수도회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상업활동과 금융업에서 경쟁을 벌이게 된 상인이나 제조업자로부터도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금융기관으로서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으나 본래의 목적인 성지수호는 점점 어려움을 겪고 말았다. 살라흐 앗 딘의 아야유브 왕조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성전 기사단은 수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기사단장인 제라르 드 리드포르가 포로로 사로잡히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이는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자결을 택하는 기사도 정신을 위배한 것이었기에 성전 기사단의 명예가 많이 실추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AD 1187년 예루살렘 왕국이 예루살렘을 잃고 아크레로 쫓겨갈 때 성전 기사단도 함께 이동하였으나, AD 1290년 아크레마저 함락당하자 성전 기사단은 유럽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비록 예루살렘을 잃었지만 성전 기사단은 이미 재정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상태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필리프 4세가 즉위하면서 성전 기사단의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필리프 4세는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양대 종교기사단인 성 요한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을 합병해 자신의 휘하로 두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성전 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가 이를 거절하면서 불편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당시 프랑스는 잉글랜드와의 전쟁 때문에 성전 기사단에게 상당한 채무를 지고 있던 상태였기에 필리프 4세는 이를 해소하고 막대한 성전 기사단의 재산을 압류하기 위해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 필리프 4세는 당시 종교재판이 익명의 제보로도 진행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하여 성전 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아 종교재판에 회부한 것이었다. 이단 심판을 위해서는 교황의 허락이 필요하였지만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의 강력한 지지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었기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더욱이 성전 기사단은 입회의식이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많은 루머가 나돌고 있는 상태였고, 비대해진 조직으로 인해 많은 정적이 생기면서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해 있어 성전 기사단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AD 1307년 필리프 4세는 전격적으로 명령을 내려 성전 기사단원들을 모조리 체포하였고 입회 의식에서 남색 행위와 반 그리스도교적 맹세, 악마 숭배 의식을 치룬다고 하는 등의 100여가지 죄목으로 기소하였다. 당시 이단 심판에 참석한 심문관들은 모두 필리프 4세와 결탁한 고위 성직자였기에 죄를 자백할 때까지 무자비한 고문을 가해졌고 마침내 AD 1312년 교황 클레멘스 5세에 의해 성전 기사단의 해체가 결정되어 AD 1314에 자크 드 몰레 기사단장을 비롯한 성전 기사단의 주요 지도자 4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성전 기사단의 재산 대부분은 성 요한 기사단으로 넘어갔고 이는 성 요한 기사단을 장악하고 있던 필리프 4세의 수중에 떨어졌다. 필리프 4세는 이렇게 얻은 막강한 재산을 바탕으로 귀족세력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이외의 나라에서는 성전 기사단의 이단행위에 대한 의혹이 팽배하였기에 적극적으로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에서는 '그리스도 기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기사단이 존속되었고 신성로마제국과 키프로스 섬에서 열린 종교재판에서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특히 교황과 대립 중이었던 스코틀랜드는 기사단에게 마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비록 성전 기사단은 AD 19세기에 이를 때까지 이단의 오명을 씻지 못했으나 AD 1813년 레이누아르에 의해 최초로 이의가 제기된 이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성전 기사단의 무고함이 주장되면서 어느정도 명예가 회복되었다. 오늘날 카톨릭 교회에서도 이 사건을 당시 사회의 어쩔 수 없는 강압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특히 AD 2007년에 공개된 바티칸 비밀문서에 의하면 당시 교황이 성전 기사단의 부패는 인정하였으나 이단 혐의만은 사면한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