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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로마-파르티아 전쟁, 사산왕조 페르시아 등장, 파르티아 제국 멸망

Jobs9 2021. 5. 1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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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의 등장

 

오리엔트의 혼란

 

'오리엔트(Orient)'의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 '시리아(Syria)', '팔레스타인(Palestine)',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이란고원(Iranian Plateau)', '이집트(Egypt)'와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Bactria)', '소그디아나(Sogdiana)', '아라코시아(Arachosia)', '드란기아나(Drangiana)', '게드로시아(Gedrosia)'를 통일했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Achaemenid Persia)'가 BC 330년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의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재위 BC 336년 ~ BC 323년)'에게 멸망당하면서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통합한 거대한 제국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BC 323년 불과 32세의 나이에 자식도 없이 요절하면서 그의 거대한 제국은 후계자 '디아도코이(Diadochi)'를 자처하는 여러 장군들에 의해서 조각조각 나뉘게 되었다. 

 

이후 오랜 전쟁 끝에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Antigonid Dynasty)',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ic Dynasty)',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Dynasty)'의 3왕국으로 크게 나뉘어졌다. 이 중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디아도코이 중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와 이란고원을 차지한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 '바빌론(Babylon)'의 '사트리프(Satrap; 총독)'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Seleucus I Nicator)였다. 그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 이란, 박트리아 등을 모두 차지하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디아도코이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셀레우코스 왕조를 BC 305년에 창건하였다.

 

그런데 셀레우코스 1세는 기본적으로 그리스인이었던 만큼 주로 마케도니아와 이집트의 다른 디아도코이 왕조와 벌이는 항쟁에 치중하였고 이러한 성향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후대 왕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셀레우코스 왕조는 점차 동방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집트와의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BC 250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박트리아의 사트리프였던 디오도토스 1세 소테르(Diodotus I Soter)가 반란을 일으키고 박트리아를 차지하면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Greco-Bactrian Kingdom)'을 세웠고 비슷한 시기에 파르티아의 사트리프인 안드라고라스(Andragoras)도 독립을 선언했다. 

 

 

아르사케스 1세의 파르티아 건국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건국되자 박트리아에 있던 유목민 부족인 '파르니(Parni)'가 핍박을 피해서 '카스피해(Caspian Sea)' 남동쪽의 '파르티아(Parthia)' 지방으로 향했다. 파르니는 고대 이란의 부족 연맹인 '다하에(Dahae)'의 일파로서 본래 파르티아 지방에서 살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자 박트리아로 이동했었다. 그러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건설된 이후 디오도토스 1세 소테르의 압박이 거세지자 파르니의 족장 아르사케스(Arsaces)가 부족을 이끌며 고향인 파르티아로 되돌아갔고 BC 247년 파르티아의 사트리프인 안드라고라스를 물리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아르사케스 1세(Arsaces I, 재위 BC 247년 ~ BC 217년)가 되었다. 

 

아르사케스 1세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파르니의 근거지인 파르티아로 불렸지만 파르니 스스로는 창시자인 아르사케스의 이름을 따 '아르사크 왕조(Arsacid Dynasty)'라고 했고 중국에서는 이를 음차하여 '안식(安息)'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파르티아 왕가에서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 II, 재위 BC 404년 ~ BC 358년)를 자신의 선조로 주장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어(Persian Language)'가 아닌 '그리스어(Greek Language)'를 공용어로 삼았고 문화적으로 친(親) 그리스적인 성향을 보였다.

 

아르사케스 1세는 나라의 수도로 '헤카톰필로스(Hecatompylos)'를 건설했다. 비록 파르티아는 고원 지대로서 농사에 부적합하였지만 동서 간의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에 위치하여 중계 무역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이후 아르사케스 1세는 혈통적으로 유사한 '파르티아족(Parthians)'을 흡수하여 세력을 키웠으며 이란계 유목 민족을 통합하면서 발전하였다. 한 때 박트리아의 디오도토스 1세 소테르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Seleucus II Callinicus)가 서로 화해하면서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BC 235년 디오도토스 1세 소테르가 죽은 이후에는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디오도토스 2세 테오스(Diodotus II Theos)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와도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파르티아에 여러 도시를 세우며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BC 246년 아르사케스 1세가 죽은 이후 그의 동생인 티리다테스 1세(Tiridates I)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고대 로마(Ancient Rome)의 역사가인 아리아노스(Arrian, 생몰년 AD 86년 ~ 160년)는 티리다테스 1세를 파르티아의 창시자로 기록하였고 파르티아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티리다테스 1세와 그의 후손들이 모두 왕명으로 '아르사케스(Arsaces)'의 이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아르사케스 1세와 티리다테스 1세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티리다테스 1세는 BC 238년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의 공격을 받아 잠시 도망쳐야 했지만 셀레우코스 왕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가 물러났기 때문에 곧바로 파르티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셀레우코스 왕조-파르티아 전쟁과 파르티아의 영토 확대

 

파르티아의 셀레오코스 왕조 속국화

 

파르티아는 태생적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반기를 들고 건국되었기 때문에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BC 223년 셀레우코스 왕조에 걸출한 왕인 안티오코스 3세(Antiochus III)가 즉위하면서 파르티아의 세력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즉위 초인 BC 213년에 벌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에서는 패배하였지만 곧바로 '아르메니아(Armenia)'를 정복하고 BC 209년에는 파르티아의 수도인 헤카톰필로스도 점령하였다. 비록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2세(Arsaces II, 재위 BC 217년 ~ BC 191년)는 왕위를 그대로 유지했지만 파르티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속국 신세가 되었다. 

 

이후 안티오코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경로를 그대로 따라서 진군하여 박트리아로부터 종주권을 인정받았고 BC 206년 인도까지 도달하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동일한 '대왕(그리스어 Basileus Megas)'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설욕에 성공하여 BC 198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남부 시리아와 아나톨리아 반도 영토까지 차지하였지만 신흥 강자로 부상한 로마에게 BC 191년 '마그네시아 전투(Battle of Magnesia)'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영토는 내어주고 말았다. 

 

 

미트리다테스 1세의 영토 확장

 

파르티아는 BC 171년 미트리다테스 1세(Mithridates I, 재위 BC 171년 ~ BC 132년)가 즉위한 후 카스피 해의 남동 지방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영토를 확대시키며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쪽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신흥 강자로 등장한 로마와 전쟁을 벌여야 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인들이 '마카베오(Maccabeus)' 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 재위 BC 175년 ~ BC 164년)가 파르티아 원정을 벌여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고자 했지만 BC 164년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파르티아를 위협하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압박이 사라지자 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스 1세는 기회를 엿보던 중 동쪽에 위치한 박트리아의 에우크라티데스 1세(Eucratides I)가 '인도(India)'에 대한 정벌에 나서면서 자리를 비운 틈을 타고 박트리아를 침공하여 '아스피오네스(Aspiones)'와 '투리우아(Turiua)' 지방을 차지하였다. 이후 미트리다테스 1세는 BC 155년 경에 서쪽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를 침공하여 '메디아(Media)'를 차지한 후 BC 148년에 수도를 옛 '메디아 왕국(Kindgdom of Media)'의 수도였던 '엑바타나(Ecbatana)'로 옮겼다. 그리고 미트리다테스 1세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시절에 사용되었던 '왕중왕(동시대 바빌론 기록은 šar šarrāni)' 칭호를 파르티아 왕조의 역사상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미트리다테스 1세는 BC 142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발상지인 '파르스(Pars)' 지방을 점령했고 이듬해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Babylonia)'를 공격하여 바빌론을 차지했으며 '티그리스(Tigris)' 강 유역에 위치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동쪽 수도인 '셀레우키아(Seleucia)'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바빌론을 탈환하려고 공격해 온 셀레우코스 왕조의 디미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Demetrius II Nicator)를 포로로 붙잡았고 고대 '엘람(Elam)'의 중심 도시였던 '수사(Susa)'를 함락시키면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파르티아는 메디아, 파르스, 바빌로니아를 모두 차지하는 대제국으로 거듭 났고 또한 동서간의 육상 교역로인 실크로드와 페르시아 '왕도(Royal Road)'의 지배권을 완성하면서 향후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얻게 된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미트리다테스 1세는 '미트리다테스 대왕(Mithridates I the Great)'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프라테스 2세와 동방 유목민의 공격

 

BC 138년 미트리다테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프라테스 2세(Phraates II, 재위 BC 132년 ~ BC 127년)가 즉위하였다. 그동안 셀레우코스 왕조는 BC 139년 디미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가 파르티아와 전쟁 중 포로가 되면서 이후 내부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는 혼란이 발생했으나 BC 139년 디미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Antiochus VII Sidetes)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이후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는 마카베오 가문이 반란을 일으킨 팔레스타인에 침공하여 BC 135년 '예루살렘(Jerusalem)'을 점령하였고 이제는 빼앗긴 메디아를 되찾고자 파르티아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파르티아의 프라테스 2세는 포로로 붙잡은 디미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를 BC 129년 석방하여 내분을 조장하였고 이어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대를 급습하여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는 다시 왕위 계승 다툼의 내분에 빠졌기 때문에 파르티아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대한 지배력은 굳건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프라테스 2세는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서쪽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지만 동쪽의 박트리아가 강력한 유목 민족인 '사카족(Sakas)'과 '토카라족(Tocharians)'의 공격을 받으면서 다시 위기에 빠졌다. 사카족은 이란계 유목 민족으로 중국 문헌에는 '사이(塞)'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며 토카라족은 중국 북서부 '간쑤성(甘肅省; 감숙성)'의 서부 지역에 거주한 '월지족(月支族)'의 일파를 서양에서 이르는 말이었다. 사카족과 토카라족이 박트리아 왕국을 공격하였고 이후 파르티아의 국경까지 넘어오자 프라테스 2세는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의 군대에서 포로로 붙잡은 그리스인으로 부대를 구성하여 투입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전쟁 도중에 그리스인 부대가 종군을 거절하면서 프라테스 2세는 BC 127년 전투 중에 전사하고 말았고 그의 삼촌인 아르타바누스 1세(Artabanus I, 재위 BC 127년 ~ BC 124년)가 즉위하였지만 그 역시 BC 124년 토카리족과의 전쟁 도중에 전사하였다.

 

 

 

미트리다테스 2세와 제국으로의 확대

 

아르타바누스 1세가 죽자 그의 아들인 미트리타테스 2세(Mithridates II, 재위 BC 124년 ~ BC 91년)가 즉위하였다. 미트리다테스 2세는 사카족과 토카리족을 당장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는 외교적으로 접근하여 그들에게 거주할 땅을 내어주는 대신에 속국이 되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방에 남아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인 '페르시아만(Persian Gulf)'의 '카라케네(Characene)'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미트리다테스 2세는 신속하게 군대를 보내 카라케네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신에 파르티아의 속국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어서 북서쪽의 아르메니아도 침공하여 아르메니아의 왕인 아르타바스테스 1세(Artavasdes I)를 패배시키고 왕자인 티그라네스(Tigranes; 훗날의 티그라네스 2세)를 포로로 붙잡았다. 아르메니아는 티그라네스를 석방받는 대가로 70계곡을 내주었다고 한다.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빼앗으면서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영토를 확대한 로마와 만나게 되었고 이에 BC 92년 로마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하였다. 나중에 로마의 최고권력자로 부상하게 되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가 당시에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한 로마의 '킬리키아(Cilicia)' 속주 총독의 신분으로 외교 협상에 응하였고 '유프라테스(Euphrates)' 강을 국경으로 정하는 것을 합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트리다테스 2세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왕중왕(그리스어 BAΣIΛEΥΣ BAΣIΛEΩN)'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가 발행한 동전에 새겨져 있다. 이렇게 하여 파르티아는 미트리다테스 2세 재위 시절에 영토가 역대 가장 넓어지게 되면서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으로 불릴 정도가 되었고 이 때문에 미트리다테스 2세도 '미트리다테스 대왕(Mithridates the Great)'으로 불리게 된다. 

 

 

 

미트리다테스 2세 사후의 혼란

 

비록 파르티아 제국의 전성기를 연 미트리다테스 2세였지만 말년에는 내전의 혼란을 겪었다. BC 95년 바빌로니아의 총독이기도 했던 미트리다테스 2세의 아들 고타르제스 1세(Gotarzes I)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나중에 메디아까지 세력을 넓혔고 BC 91년 미트리다테스 2세가 죽자 황후인 아시아바타르(Asi'abatar)과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런데 고타르제스 1세의 아들이지만 아사아바타르가 아닌 아리아자테(Ariazate)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던 오로데스 1세(Orodes I)가 반발하고 나섰다. 아리아자테는 '아르메니아 왕국(Kingdom of Armenia)'의 티그라네스 2세(Tigranes II)의 딸이기도 했다.

 

오로데스 1세는 파르티아 제국의 동쪽을 차지한 채 고타르제스 1세에게 반기를 들었고 결국 BC 80년 고타르제스 1세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오로데스 1세가 BC 75년 사망하자 이후 3년간은 파르티아 제국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한 암흑기가 도래하였다. 그 사이 미트리다테스 2세의 형제로 추정되는 시나트루케스(Sinatruces, 재위 BC 75년 ~ BC 69년)가 중앙 아시아의 사카족의 도움을 받아 왕으로 즉위하였고 마침내 분열된 파르티아 제국을 재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시나트루케스는 즉위 당시 이미 80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재위 7년 만에 사망하였고 BC 69년 그의 아들인 프라테스 3세(Phraates III, 재위 BC 69년 ~ BC 57년)가 즉위하였다

 

 

 

로마-파르티아 전쟁

로마의 동방원정과 프라테스 3세의 몰락

 

프라테스 3세가 즉위하기 이전에 파르티아 제국은 미트리다테스 2세 사후에 벌어진 오랜 혼란 때문에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에게 공격을 당해 영토를 일부 빼앗긴 상태였다. 티그라네스 2세는 왕자 시절 포로로 붙잡히면서 내주어야 했던 70계곡을 모두 되찾은 것을 넘어서 메디아를 폐허로 만들고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쇠락해져버린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위까지 차지하며 영토로 역대 최대로 넓혀 놓으면서 티그라네스 2세는 '티그라네스 대왕(Tigranes the Great)'으로 아르메니아는 '대아르메니아 왕국(Kingdom of Greater Armenia)'으로 불릴 정도가 되었다.

 

프라테스 3세는 실지를 회복하고자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고 때 마침 BC 73년부터 로마와 '폰투스(Pontus)' 사이의 전쟁에서 아르메니아가 폰투스를 지원하며 참여하였다. 처음에 로마군을 이끌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약칭 '루쿨루스')는 파르티아 제국에게 중립을 요구하였고 그 후 폰투스를 점령하면서 이제 전쟁은 로마와 아르메니아의 대결로 변화하였다. 로마의 루쿨루스는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며 아르메니아를 천천히 공격해 들어갔으나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자 BC 66년 로마에서는 총사령관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약칭 '폼페이우스')로 교체하였다. 폼페이우스는 파르티아 제국과 동맹을 체결하고 아르메니아를 협공하였다. 결국 아르메니아가 무너졌고 티그라네스 2세는 폼페이우스에게 항복하였다.

 

당초 폼페이우스는 로마가 아르메니아의 시리아와 아나톨리아 반도의 정복지를 얻는 대신에 아르메니아 본토는 파르티아 제국에게 넘기기로 약속했지만 아르메니아에게 승리를 거두자 돌연 태도를 돌변하였다. 아르메니아 본토는 그대로 티그라네스 2세를 왕으로 유지시키는 대신에 로마의 속국으로 삼았고 로마군을 이끌고 티그리스 강 유역의 파르티아 제국의 속국을 점령해 버린 것이었다. 프라테스 3세는 무력하게 이를 지켜봐야만 했고 그 사이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차지하며 셀레오코스 왕조를 멸망시켜 버렸다. 결국 프라테스 3세는 BC 57년 두 아들인 오로데스(Orodes)와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오로데스 2세와 미트리다테스 4세의 내분

 

프라테스 3세를 죽인 오로데스와 미트리다테스는 파르티아 제국을 둘로 나누기로 합의하면서 오로데스가 파르티아의 왕 오로데스 2세(Orodes II, 재위 BC 57년 ~ BC 37년)가 되는 대신에 미트리다테스는 메디아의 왕이 되었다. 참고로 미트리다테스 2세의 사후 오로데스 1세가 왕이 되었을 때 미트리다테스 2세의 아들로 추정되는 미트리다테스 3세(Mithridates III)가 잠시 반란을 일으켜 왕을 참칭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프라테스 3세의 아들인 미트라다테스는 미트리다테스 4세(Mithridates IV, 재위 BC 57년 ~ BC 54년)로 명명되었다.

 

이후 두 형제 사이에 곧바로 내분이 발생하여 오로데스 2세가 미트리다테스 4세를 공격하였고 패배한 미트리다테스 4세는 로마의 시리아 속주로 도망쳐야 했다. 이후 BC 55년 미트리다테스 4세가 메소포타미아를 공격하여 셀레우키아를 점령하고 재기를 노렸으나 오로데스 2세의 부하 장군인 수레나(Surena)에게 포위당하여 결국 함락당하고 미트리다테스 4세 자신은 처형당했다. 참고로 '수레나'라는 이름은 그가 속한 '수렌(Sûrên)' 가문의 이름의 그리스어 및 라티어 기록에서 유래한 것으로 실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오로데스 2세의 로마와 전면전, 카레 전투

 

로마의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

 

BC 53년 로마의 시리아 속주 총독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약칭 '크라수스')가 침공하였다. 당시 크라수스는 마그누스 폼페이우스 및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약칭 '카이사르')와 함께 BC 60년 '제1차 삼두정치(First Triumvirate)'를 구성하며 로마의 유력자가 되었지만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에 비해 군사적인 업적이 부족했다. 폼페이우스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지중해의 해적을 단기간에 일소시키고 폰투스와 아르메니아를 속국으로 삼았으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는 눈부신 전공을 세운 덕분에 '위대한 폼페이우스(라틴어 Pompeius Magnus)'라고 불리고 있었다. 카이사르 역시 전쟁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지금의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대부분, 북이탈리아의 일부, 라인 강 서쪽의 독일에 해당하는 '갈리아(라틴어 Gallia)' 전체를 정복하면서 로마 영토를 크게 넓혔다. 반면에 크라수스는 이탈리아 내부에서 일어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War of Spartacus, BC 73년 ~ BC 71년)'을 진압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전공이 없었다. 

 

이에 따라 크라수스는 동방의 강대국인 파르티아 제국을 정벌해내면서 단숨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전공을 뛰어넘고자 하였다. BC 54년 집정관을 마치고 이듬해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크라수스는 즉시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하였다. 자신의 휘하에 7개 로마 군단 총 35,000명과 기병 4,000기를 이끌고 파르티아 제국의 서부 국경으로 진군을 시작하였고 속국인 아르메니아의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Artavasdes II)도 북쪽 국경을 협공하기로 약속받았다. 다만 파르티아 제국은 기병이 강점이었기 때문에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크라수스에게 기병 운용이 어려운 산악 지형으로 진군할 것을 조언하였으나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제국의 메소포타미아 최대 도시인 셀레우키아를 단숨에 점령할 욕심에 최단 거리인 평원을 이동 경로로 선택하였다. 크라수스의 부관으로 함께 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약칭 '카시우스')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진격하자는 수정 의견을 제시했지만 크라수스는 이 마저도 거부했다.

 

 

파르티아 제국의 대응

 

한편 파르티아 제국의 오로데스 2세는 갑자기 로마군이 처들어오자 당황하여 크라수스에게 공격을 중지해 달라는 사절을 보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능가하는 전공을 세울 욕심에 눈이 먼 크라수스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로마와의 결전이 불가함을 깨달은 오로데스 2세는 파르티아군을 둘로 나눠 보병 전부와 약간의 기병을 자신이 직접 이끌고 로마의 요청에 따라 협공에 나선 아르메니아를 공격하기 위해 나섰고 궁기병 9,000기와 중기병(그리스어 κατάφρακτος; 카타플락토스) 1,000기를 수레나에게 내주어 크라수스의 로마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다만 오로데스 2세는 수레나가 로마군을 격파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은 채 시간만 벌어주기를 기대하였을 뿐이었다. 대신에 오로데스 2세는 자신이 아르메니아를 공격하면 크라수스도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회군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수레나는 오로데스 2세의 기대를 훨신 더 뛰어넘는 명장이었다.

  

 

카레 전투와 파르티아군의 승리 

 

크라수스는 '오스로에네(Osroene)'의 부족장이였던 아리암네스(Ariamnes)의 길안내를 받아 행군을 하였다. 아리암네스는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을 도운 전력이 있었으므로 크라수스는 그를 신뢰하였으나 사실 그는 이미 파르티아 측에 매수된 상태였다. 아리암네스는 로마군을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쪽 국경인 '카레(Carrhae; 오늘날의 터키 하란)' 근처까지 인도하였지만 그 곳은 물이 없고 사방이 확 트인 곳으로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기엔 최악의 지형이였다. 이 곳으로 진입하기 전 크라수스는 아르메니아의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로부터 파르티아 주력군이 도착하여 위급하다는 구원 요청을 받았으나 무시하고 계속 파르티아 제국의 영토 안으로 진군하였다. 

 

BC 53년 5월초 크라수스의 로마군이 수레나의 파르티아군과 마주치면서 카레 전투(Battle of Carrhae)가 시작되었다. 크라수스의 부장인 카시우스는 보병을 중앙에 두고 기병을 양 날개에 배치하는 전통적인 진형을 건의하였으나 크라수스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방진으로 편성했다. 이로 인해 로마군의 방어력은 강화되었으나 대신 기동력은 현저히 저하되고 말았다. 처음에 수레나는 로마군을 동요시켜 진형이 무너뜨린 후 강력한 파르티아 중기병인 카타플락토스를 돌격시키기 위해 악기로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카타플락토스에게 번쩍이는 갑옷을 입혀 노출시켰지만 로마군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처음의 계획을 단념하였다.

 

수레나가 차선책으로 선택한 공격 방법은 궁기병을 이용하여 원거리에서 화살 공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9,000기의 궁기병이 넓게 포진하여 로마군을 에워싸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고 이에 로마군은 특유의 거북이 모양의 방어진인 '테스투도(Testudo)' 진형으로 더욱 밀집하였다. 비록 방패로 보호되지 않는 노출된 팔다리에 화살을 맞는 것까진 피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진형을 유지한 채 파르티아군의 화살이 다 떨어지기를 끊질기게 기다렸다. 하지만 수레나는 사전에 수천 마리의 낙타 부대에 화살을 잔뜩 실은채 대기시켰으므로 화살 공격은 쉬지않고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군 부상자들은 점점 증가하였고 거대한 방패를 들고 사막에서 오랫동안 서있어야 했으므로 로마군 병사들은 탈수증상과 열사병으로 점점 쇠약해졌다. 크라수스는 투창병을 보냈으나 투창병 역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할 뿐이었다. 이에 크라수스는 로마군을 전진시켜 보았으나 로마군이 산개하여 궁기병에게 돌격하면 궁기병은 퇴각하면서 거리를 벌린 뒤 말 위에서 뒤로 돌아 사격을 가했다. 로마인들이 '파르티안샷(Parthian Shot)'이라고 부르게 되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기마 화살 공격 기술이었다.

 

마지막으로 크라수스는 그의 아들인 푸빌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Publius Licinius Crassus)(약칭 '푸빌리우스')에게 기병대로 구성된 별동군을 조직해 파르티아군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푸빌리우스의 별동군은 화살 공격을 당한 뒤 파르티아 궁기병과 카타플락토스에 포위되어 전멸당했고 푸빌리우스도 전사하고 말았다. 창에 꽃혀 높히 들린 푸빌리우스의 목을 본 크라수스는 심하게 동요하였고 부상자들을 팽겨친채 근처 마을로 후퇴하였다. 다음날 아침 수레나가 회담을 제의하였는데 수레나는 크라수스가 시리아로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보장해주는 대가로 로마가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영토를 포기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크라수스는 회담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였으나 로마군 병사들은 크라수스가 회담을 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하였다. 마지못한 크라수스가 고위장교를 대동하고 회담장에 나갔으나 역시 이는 수레나의 함정이었다. 회담에 나온 크라수스와 고위 장교들은 살해되었고 뿔뿔이 흩어진 로마군은 결국 대부분 포로로 잡히고 카시우스를 비롯하여 약 10,000명 정도만 귀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카레 전투는 로마 전사에 유래가 없는 대패가 되었고 파르티아 제국은 수레나의 놀라운 활약 덕분에 당대 최강으로 군림하던 로마군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카레 전투 이후

 

로마군이 카레 전투에서 수레나에게 참패를 당하는 사이 오로데스 2세의 보병대는 아르메니아를 정복하고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포로로 잡았다. 결국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로마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파르티아 제국의 속국이 되는 길을 선택하여야만 했다. 한편 카레 전투의 영웅인 수레나는 얼마지나지 않아 요절하고 만다. 일설에 의하면 카레 전투에서의 수레나 전공이 지나치게 큰 나머지 오로데스 2세의 의심과 질투를 사서 죽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수레나 사후 파르티아 제국은 수레나의 파르티안샷 전술을 사용하지 않은 채 전통적인 중기병의 돌격 전술에 다시 의존하게 된다. 

 

 

 

파르티안 샷 전술 

 

파르티아군의 주력은 '카타플락토스(그리스어 κατάφρακτος; 복수형 κατάφρακτοι 카타플락타이)'라고 불리운 중기병으로 파르티아는 말과 기수 모두 갑옷으로 무장한 채 돌격하는 전술을 즐겨 사용하였다. 중기병은 유지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파르티아에서는 귀족들에게 영지를 주는 대신 중앙정부의 요청시에 중기병을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중세 유럽 봉건제도의 원형이 된다.

 

이에 반하여 귀족이 아닌 일반 부족들은 유지비가 적게 드는 경기병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금속판을 밧줄로 엮은 간편한 갑옷을 입고 하의는 바지를 입었으며 주로 활을 들고 전투에 임했다. 다만 당시 궁기병은 이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시절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격파되어 전장의 주역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이는 궁기병의 무장이 빈약하여 화살이 다 떨어질 경우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궁기병의 역할은 개전 초기 원거리 화살공격을 통하여 상대의 진형을 흩트러뜨린 후 보병의 측면을 견제하는 것으로 국한되었고 결전은 언제나 중기병의 돌격으로 이루어졌다. 

 

카레 전투에서도 파르티아 제국의 오로데스 2세가 보병과 대부분의 중기병을 데리고 아르메니아로 침공하고 크라수스의 로마군을 저지하는 역할을 맡은 수레나에게는 대부분이 궁기병으로 편성된 부대를 맡겼다는 사실에서 수레나의 역할은 오로데스 2세가 아르메니아를 점령하는 동안 단지 로마군을 견제하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레나는 오로데스 2세의 예상을 뛰어넘어 오히려 당대 최강이었던 로마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수레나가 전투에 동원한 파르티아 제국의 궁기병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시절 궁기병과 비교할 때 몇가지 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사용하는 활이 기존의 단궁과 합성궁의 장점을 섞은 혼합궁으로 사거리가 훨씬 증가되었다. 여러 층의 나무와 뿔을 혼합하여 화살을 인장력을 강화한 복합궁의 사용으로 무장이 빈약한 궁기병들은 보다 안전하게 원거리에서 공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파르티안의 궁기병들은 달리는 말 위헤서 몸을 180도 뒤로 돌려 화살을 쏘는 것이 가능했다. 이른바 카레 전투 이후에는 '파르티안샷(Parthian Shot)'이라고 불리게 되고 동양에서는 '배사(背射)'라고 불리우는 이 기술은 등자가 없던 시절 달리는 말 위에서 아무런 지지없이 고삐를 손에서 놓은 채 몸을 틀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기술이었으나 파르티아 궁기병들은 기마 민족인 스키타이의 후예답게 이것이 가능하였다. 수레나는 여기에 궁기병의 단점인 화살을 다 소모한 이후의 취약점을 보강하기 위해서 낙타를 이용해 수천 개의 화살을 실어와 계속해서 화살을 보급받을 수 있게 하였다.

 

카레 전투가 시작되자 로마군이 방패를 앞세운 밀집 대형인 '테스투도(Testudo)'  진형으로 하루종일 견디어 봐도 파르티아 궁기병이 쏘아대는 화살비가 그칠 줄 몰랐고 로마군이 산개하여 궁기병에게 접근하려고 해도 파르티안 궁기병들은 도망가면서 파르티안 샷으로 로마군을 공격하여 다가갈 수가 없었다. 결국 보병 중심의 로마군으로서는 궁기병의 기동성과 원거리 공격 능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막 한가운데서 화살로 인한 크고 작은 부상과 장기간 전투에 따른 열사병으로 패배하게 되었다. 비록 수레나의 이러한 파르티안 샷을 이용한 궁기병 전술은 두터운 갑옷을 입은 중보병과 중기병이 지배하던 당시 전장의 양상을 바꾸는 새로운 전술로서 각광받을 수 있었으나 수레나의 요절과 함께 역사 속에 묻히고 만다. 그리고 수레나의 전술은 천년이나 지나서야 몽골 기마병에 의해 유럽의 악몽으로 되살아나게 된다.

 

  

로마의 내전 및 파르티아 제국과의 국경 분쟁

 

파코루스 1세의 시리아 공격 실패

 

BC 49년부터 로마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 상태에 돌입하자 처음에 오로데스 2세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였다. 이후 폼페이우스가 패배하여 이집트에서 살해되고 카이사르가 카레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대규모 파르티아 원정을 계획하면서 위기에 처했지만 카이사르가 로마의 공화파에게 암살당하면서 무산되었다. 처음에 오로데스 2세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파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약칭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지지했다. 카시우스는 카레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동일 인물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약칭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약칭 '안토니우스')의 동맹군에게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BC 42년에 벌어진 필리피 전투(Battle of Philippi)에서 패배하자 사태를 잠시 관망하게 되었다. 

 

그리던 중 로마에서 다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내전의 조짐이 보이자 BC 40년 폼페이우스의 잔당 중 파르티아 제국으로 망명 온 퀸투스 라비에누스(Quintus Labienus)(약칭 '라비에누스')를 앞세워 로마의 속주인 시리아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오로데스 2세의 장자이자 공동 통치자인 파코루스 1세(Pacorus I)가 파르티아군을 지휘하여 '티레(Tyre)'를 제외한 시리아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로마의 동방 속주 관리를 맡은 안토니우스가 파견한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Publius Ventidius Bassus)의 반격을 받으면서 BC 39년 라비에누스가 사망하고 시리아의 점령지를 다시 내주어야 했다. 이에 BC 38년에 파코루스 1세가 재차 시리아를 공격하였지만 '긴다로스 산 전투(Battle of Mount Gindarus)'에서 패배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헤로데 1세(Herod I)가 '유대인의 왕(King of the Jews)'이 되도록 지원한 뒤 '유대 왕국(Kingdom of Judea)'을 로마의 속국으로 삼으면서 동방 속주를 안정시키게 된다.

 

 

프라테스 4세의 왕위 찬탈과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침공

 

파르코스 1세가 사망하자 오로데스 2세는 다른 아들인 프라테스 4세(Phraates IV, 재위 BC 37년 ~ BC 2년)를 후계자로 임명했다. 그런데 프라테스 4세는 왕위에 빨리 오를 욕심에 아버지와 30여명에 달하는 다른 형제를 모두 살해하고 BC 37년 파르티아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프라테스 4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로마의 공격을 받아야 했는데 로마의 지배권을 두고 옥타비아누스와 경쟁을 벌이던 안토니우스는 시리아와 유대가 모두 안정되자 로마인을 모두 납득시킬만한 전공을 세울 욕심 때문에 BC 36년 10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 원정을 개시한 것이었다.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를 공격하기 위한 경로로 아르메니아를 선택하자 파르티아의 속국이 되었던 아르메니아의 아르타바스데스 2세가 다시 로마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 덕분에 안토니우스는 손쉽게 아르메니아를 통과하여 파르티아 제국의 속국인 '메디아 아트로파테네(Media Atropatene)'로 진격할 수 있었지만 파르티아군의 기습에 의해 공성 병기가 파괴되고 보급 부대가 전멸되는 피해를 입었다. 더욱이 아르메니아의 아르타바스데스 2세가 다시 배반하면서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에서 고립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BC 34년 안토니우스는 3분의 1에 달하는 병력만 상실한 채 아무런 성과없이 철수해야만 했다.

 

이에 분노한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배반한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여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사로잡았고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왕인 아르타바스데스 1세(Artavasdes I)와 강화 조약을 체결한 후 아르메니아의 아르타바스데스 2세와 그의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귀환하였다. 안토니우스가 철군하자 프라테스 4세는 메디아 아트로파테네를 회복하였고 이집트에서 아르메니아의 왕인 아르타바스데스 2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아르타크세스 2세(Artaxes II)가 파르티아 제국으로 탈출해 오자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그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올린 후 아르메니아까지 다시 속국으로 삼았다.

 

BC 31년 파르티아 제국 내에서 티리다테스 2세(Tiridates II)의 반란이 일어나자 프라테스 4세는 동쪽의 유목 민족인 사카족에게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이듬해 사카족의 도움을 받아 티리다테스 2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복위하는 데 성공하면서 티리다테스 2세는 로마 속주인 시리아로 달아났다. BC 26년 티리다테스 2세가 세력을 회복한 후 바빌로니아를 차지하였으나 곧바로 프라테스 4세에게 토벌당하고 말았다.

 

 

로마 제국의 등장과 평화 협정

 

한편 프라테스 4세는 약화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프라테스 4세는 로마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였다. 그 사이 로마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누르면서 내전의 최종 승자가 되자 BC 27년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즉위하면서 공화제 체제의 로마가 '로마 제국(Roman Empire)'으로 재편된 상태였다. 이에 프라테스 4세는 아우구스투스와 평화 협상을 시작하였고 마침내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북서쪽의 오스로에네가 로마의 속국이 되고 카레 전투에서 빼앗은 크라수스의 로마군의 군기와 포로를 되돌려 주는 조건으로 로마와 국경선을 확정하고 오랜 분쟁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파르티아 제국의 내분과 로마 제국과의 아르메니아 쟁탈전

 

프라테스 5세의 찬탈과 아르메니아 공격 실패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는 프라테스 4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한 이후 우호의 상징으로 '무사(Musa)'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여인을 보냈고 프라테스 4세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리고 무사의 충고에 따라 프라테스 4세의 왕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자신의 아들 4명을 로마에 보내 사실상 볼모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무사가 BC 2년 프라테스 4세를 독살하였고 자신의 아들인 프라테스 5세(Phraates V, 재위 BC 2년 ~ AD 4년)를 왕위에 올렸다. 이렇게 하여 프라테스 5세가 즉위하고 이탈리아 출신인 그의 어머니 무사가 파르티아 제국을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지만 프라테스 4세의 다른 아들들은 모두 로마에 볼모로 보내졌기 때문에 그녀를 위협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프라테스 5세는 AD 2년 어머니 무사를 왕비로 선포하였는데 이는 어머니와 결혼하는 패륜이었으므로 파르티아 귀족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내부 분란을 잠재우기 위해 로마의 속국이 된 아르메니아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웠고 마침 AD 4년에 아르메니아의 왕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Ariobarzanes II)가 사망하자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Caesar)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동방 군단을 파견하였기 때문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다시 협상을 벌여 아르메니아가 로마의 속국임을 재확인하여야 했다. 결국 AD 4년 아르메니아 침공마저 아무런 소득없이 물러나자 파르티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프라테스 5세와 무사를 살해하였다.

 

 

아르타바누스 2세의 파르티아 장악

 

비록 프라테스 5세가 살해된 뒤 일단 오로데스 3세(Orodes III, 재위 AD 3년 ~ AD 6년)가 왕위에 올랐으나 잔인한 성격 때문에 AD 6년에 살해되었다. 이에 파르티아 귀족들은 로마에 볼모로 가 있던 프라테스 4세의 아들 중 한 명을 보내달라고 로마에 요청했고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Tiberius)가 AD 7년 프라테스 4세의 장자인 보노네스 1세(Vonones I, 재위 AD 6년 ~ AD 12년)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로마에서 살면서 로마인 교육을 받아 로마 문화에 동화된 보노네스 1세를 파르티아 귀족들은 용납할 수 없었고 이에 파르티아의 속국인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왕이었던 아르타바누스 2세(Artabanus II, 재위 AD 12년 ~ AD 38년)가 AD 9년에 반란을 일으켜 AD 12년 마침내 파르티아 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Ctesiphon)'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보노네스 1세는 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아르메니아로 도망쳤고 티베리우스의 배려로 로마의 속국인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오르며 재기를 노리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타바누스 2세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자 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도 더이상 보노네스 1세를 지원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에 AD 15년 보노네스 1세를 퇴위시킨 후 시리아로 옮기도록 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양자인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를 보내 아르타바누스 2세와 협상을 벌이도록 하였고 아르메니아가 로마의 속국임을 재확인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했다.

 

이후 아르타바누스 2세는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면서 파르티아 귀족들과 마찰을 빚었고 AD 35년에는 재차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로마를 자극하였다. 이에 파르티아 귀족들이 반발하여 티베리우스에게 프라테스 4세의 다른 후손을 왕으로 보내달라고 하였고 티베리우스는 프라테스 4세의 손자인 티리다테스 3세(Tiridates III, 재위 AD 35년 ~ AD 36년)를 보내줬다. 티리다테스 3세가 시리아에 도착하자 시리아 속주 총독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Lucius Vitellius)가 셀레키우스를 점령하고 티리다테스 3세를 파르티아 왕위에 앉혔다. 이에 아르타바누스 2세는 카스피해 남쪽의 '히르카니아(Hyrcania)'로 도망쳤으나 로마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티리다테스 3세가 파르티아인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을 보자 재차 군사를 일으켜 왕으로 복위했고 티리다테스 3세는 시리아로 달아나야 했다.

 

 

아르타바누스 2세 폐위 이후의 혼란

 

아르타바누스 2세는 우여곡절 끝에 왕위를 되찾았지만 그도 오래 가지 못하고 AD 38년에 일어난 반란을 피해 파르티아 제국의 속국인 '아디아베네(Adiabene)'의 이자테스 2세(Izates II)에게 도망쳐야 했다. 그곳에서 다시 한번 복위를 노렸으나 최종적으로 이루지는 못하고 사망하였다. 아르타바누스 2세가 도망친 후 킨나무스(Cinnamus)가 잠시 파르티아의 왕이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AD 40년 아르타바누스 2세의 아들인 바르다네스 1세(Vardanes I, 재위 AD 40년 ~ BC 46년)가 파르티아 왕위를 되찾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형제인 고타르제스 2세(Gotarzes II, 재위 AD 40년 ~ AD 51년)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고 AD 46년 바르다네스 1세가 사망하면서 고타르제스 2세가 정식으로 파르티아의 왕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후로도 파르티아 제국의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고타르제스 2세 역시 얼마지나지 않은 AD 51년 사망하였고 그의 형제로 추정되는 보노네스 2세(Vonones II, 재위 BC 51년)가 잠시 왕위에 올랐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볼로가세스 1세(Vologases I, 재위 AD 51년 ~ AD 78년)가 파르티아의 왕이 되었다. AD 54년 볼로가세스 1세가 아르메니아를 공격하면서 다시한번 로마와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AD 63년 볼로가세스 1세의 동생인 티리다테스 1세(Tiridates I)가 아르메니아의 왕이 되는 대신에 아르메니아가 여전히 로마의 속국임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다시 평화 조약이 타결되었다. 

 

 

파르티아 제국의 분열과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공격

트라야누스가 점령한 파르티아 제국의 영토 현황(빗금친 지역)

 

AD 78년 볼로가세스 1세가 사망한 이후 파르티아 제국은 또다시 왕위 다툼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볼로가세스 1세의 아들인 볼로가세스 2세(Vologases II, 재위 78년 ~ AD 80년)가 즉위하였으나 2년 만인 AD 80년 삼촌인 파코루스 2세(Pacorus II, 재위 AD 78년 ~ AD 110년)에게 폐위되었다. 그리고 파코루스 2세도 AD 110년에 사망하면서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비록 파코루스 2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동생인 오스로에스 1세(Osroes I, 재위 AD 109년 ~ AD 129년)를 지명했지만 볼로가세스 2세의 아들인 볼로가세스 3세(Vologases III, 재위 AD 110년 ~ AD 147년)가 왕위를 요구하며 파르티아 제국의 동방 영토를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미트리다테스 5세(Mithridates V, 재위 AD 129년 ~ AD 140년)도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을 차지하고 왕위를 요구하고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로에스 1세는 AD 114년부터 로마 제국의 가장 뛰어난 5명의 황제인 '5현제(五賢帝; Five Good Emperors)' 중 하나로 추앙받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Traianus)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내전을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없었다. 트라야누스는 로마 제국에 오랜만에 등장한 활발한 정복 군주로서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파르티아 제국과의 오랜 분쟁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아르메니아를 점령하며 직접 로마의 속주에 편입시켰고 이듬해에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점령한 후 로마 속주로 삼았다. 이어서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파르티아 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트라야누스도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반란에 더 이상은 진격하지 못했다. 결국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제국의 영토 전역을 점령하는 것을 포기한 채 메소포타미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오스로에스 1세의 동생인 파르타마스파테스(Parthamaspates)를 파르티아 왕으로 임명한 뒤 시리아로 철군하여야 했다. 그리고 AD 116년 갑자기 트리야누스가 병을 얻어 사망하였고 그의 후계자가 된 하드리아누스(Hadrianus)는 파르티아 제국과 강화 조약을 맺고 철군하기로 결정하였다.

 

 

 

파르티아 제국의 멸망

 

볼로가세스 4세의 제국 통합과 로마군의 거듭된 크테시폰 약탈

 

로마군이 물러가자 오스로에스 1세는 즉각 로마가 세운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축출하고 왕위를 되찾았으나 AD 129년 사망하면서 오스로에스 1세가 통치하는 지역이 모두 동방의 볼로가세스 3세에게 흡수되었다. 그러나 볼로가세스 3세가 파르티아 제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미트리다테스 5세의 메소포타미아는 회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AD 147년 볼로가세스 3세가 사망하자 미트리다테스 5세의 아들인 볼로가세스 4세(Vologases IV, 재위 AD 147년 ~ AD 191년)가 크테시폰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고 파르티아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파르티아 제국을 재통합한 볼로가세스 4세는 파르티아 제국의 오랜 숙원인 아르메니아를 되찾기 위해서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재개했지만 오히려 로마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의 반격을 받아 셀레우키아가 파괴되고 수도인 크테시폰의 왕궁이 불타는 피해만 입어야 했다. 결국 볼로가세스 4세는 로마와 평화 협약을 맺고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넘겨야 했다. AD 191년 볼로가세스 4세의 아들인 볼로가세스 5세(Vologases V, 재위 AD 191년 ~ AD 208년)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하고 로마군이 떠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회복하였지만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되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에게 패배하여 크테시폰을 약탈당하고 말았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등장과 파르티아 제국의 멸망

 

AD 208년 볼로가세스 5세의 아들인 볼로가세스 6세(Vologases VI, 재위 AD 208년 ~ AD 228년)가 즉위하였으나 AD 213년 그의 동생인 아르타바누스 4세(Artabanus IV, 재위 AD 213년 ~ AD 224년)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크세티폰을 차지했기 때문에 볼로가세스 6세는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를 겨우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아르타바누스 4세의 치세도 안정되지 못했다. 먼저 AD 215년 로마 황제 카라칼라(Caracalla)의 공격을 받았으나 AD 217년 카라칼라가 암살되면서 겨우 로마의 공격에서 겨우 벗어났다. 하지만 그 사이 옛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발상지인 파르스에서 봉기한 아르다시르(Ardashir)의 세력이 크게 확대되면서 더 큰 위기를 맞이하였고 결국 아르다시르는 AD 224년 아르타바누스 4세를 살해하고 파르티아 제국의 크세티폰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아르다시르가 크테시폰에서 스스로 즉위하면서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I)가 되었고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적통을 계승하였음을 천명하면서 그가 건국한 나라는 그의 선조 이름을 따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Sassanid Persia)'로 명명되었다. 이렇게 하여 파르티아 제국은 멸망하였고 비록 바빌로니아의 볼로가세스 6세가 AD 228년까지 명목상 왕위를 유지했지만 일반적으로 이 때를 파르티아 제국이 멸망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하여 500년 가까이 동방의 제국으로 군림하며 로마와 오랫동안 다투던 파르티아 제국이 사라지게 되었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동방의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여 로마 제국과 끝없는 대결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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