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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시대, 티베리우스 시대,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 유대 전쟁

Jobs 9 2021. 5. 16.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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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시대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한 아우구스투스는의 기본적으로 포에니 전쟁 이후로 계속된 로마의 급격한 팽창이 이제 한계가 왔음을 인정하고 내실을 기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국경선의 안정을 위해 라인강, 도나우강, 시리아 같은 주요 국경에 요새를 짓고 로마 군단을 주둔시켰다. 다만 내전과정에서 40개까지 늘어난 군단을 예산문제로 28개로 감축하는 대신에 28개 군단을 상비군화하였고 부족한 병력은 로마 속주민으로 구성된 보조병으로 메웠다. 로마 군단은 로마시민권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 20년 동안 복무했고 보조병은 로마시민권이 없는 속주민으로 구성되어 요새수비, 국경 경비, 투사무기 발사병 엄호 등의 임무를 25년 동안 수행하는 대신에 제대 이후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수도인 로마 내부에는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대와 경찰 및 소방관 역할을 하는 '비길레스(vigiles)'를 창설하였고 유사시 예비군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아우구스투스는 내실을 다지는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그렇다고 영토 확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히스파니아(이베리바 반도)의 북부지역, 알프스 지역의 라이티아과 노리쿰, 도나우 강 남부의 일리리쿰과 판노니아 등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BC 25년에는 왕이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죽은 갈라티아(아나톨리아 반도 중부)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편입하였고 북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도 병합하여 2개의 속주로 나누었다. 다만 라인 강, 도나우 강 근교의 게르만 족은 AD 9년에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3개 군단이 전멸하는 고전 끝에 결국 굴복시키는 데 실패했다. 또한 동방의 강대한 영토를 보유한 파르티아 제국과는 직접적인 충돌을 자제하고 주로 외교교섭에 나섰다. 그 결과 BC 20년에 협정을 체결하고 양 국의 완충지대로서 아르메니아를 보호령으로 삼게 되었고 또한 일찍이 카르하이 전투에서 빼앗은 크라수스의 군기도 되돌려 받았다.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통치체계는 겉모습은 공화정을 유지한 채 교묘하게 여러가지 권한을 뒤섞은 것이었기 때문에 명확한 법적인 지위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계승시키는 명확한 원칙도 없었고 아우구스투스에게는 후계자로 삼을 아들도 없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지위를 혈족에게 물려주고 싶었기 때문에 누나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마르켈루스를 자신의 딸인 율리아와 결혼시켜 마르켈루스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BC 23년 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고 이에 마르켈루스와 율리아 사이에 태어난 두 외손자인 루키우우스와 가이우스를 양자로 맞이하였지만 이들도 AD 2년과 AD 4년에 차례로 요절하고 말았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후계자로 삼아야 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한 리비아가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두 아들 중 한명이었다. AD 4년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어 카이사르의 성을 물려받았고 또한 5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AD 13년에는 로마군 절대지휘권과 종신 호민관 특권 등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특권을 부여받아 사실상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는 AD 14년 8월 19일 이탈리아 남부의 놀라에서 숨을 거두었고 로마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신격화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티베리우스 시대

 

티베리우스는 동명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티베리우스의 아버지는 로마 공화정 말기에 안토니우스파에 속했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으나 안토니우스가 몰락한 이후 사면령이 내려지면서 겨우 로마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어머니 리비아에게 반하였기 때문에 이혼하라고 압력을 행사했고 결국 리비아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이혼 후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하게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나중에 태어난 동생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같이 아버지에게 남겨졌으나 티베리우스의 나이가 9살일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황궁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오랜 친우이자 충직한 부하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에게도 중요한 지위를 부여했다. 티베리우스는 22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군단 사령관이 되어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에서 상실했던 로마의 기지 일부를 되찾아 오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또한 아드리아 해안의 일리리쿰 속주에서 판노니아 족을 격파하고 판노니아 속주를 점령해내었고 파르티아 제국과 외교교섭도 맡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로마의 보호령으로 삼으며 완충지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AD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로마군이 게르만족 일파인 케루스키 족에게 점령당하는 참패를 당하자 티베리우스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여러 차례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려한 전적과 달리 티베리우스에게 개인적인 불행이 잇달아 찾아왔다. 우선 게르만족 공략을 맡았던 동생 드루수스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낙점하고 그들의 후견인으로 아그리파를 선택하여 자신의 딸인 율리아와 결혼시켰으나 아그리파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티베리우스를 율리아와 결혼시키고자 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아그리파의 딸과 이혼하고 율리아와 재혼하여 그녀의 아들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후견인 노릇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모두가 요절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는 기회를 얻었지만 이번에는 친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이해야 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다음 후계자로 율리우스 가문의 혈통의 게르마니쿠스를 삼도록 한 것이었다. 

 

비록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혈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에 마지막까지도 망설였으나 티베리우스는 유능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통치체제를 유지하며 국경지대를 정비하는 한편 지나친 사치와 향락을 억제하고 긴축재정을 펼쳐 재정을 풍부하게 했다. 하지만 황제가 주최하는 전차 경기대회와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켰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의 인기는 잃었다. 더욱이 AD 26년 티베리우스는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에게 통치를 일임하고 카프리 섬에 은둔하였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비록 세야누스의 전횡이 심해지자 AD 31년 세베루스를 처형하였지만 여전히 카프리 섬에 은둔하면서 통치를 하였고 더욱이 말년엔 의심병 때문에 고발에 의한 고문과 처형이 연이어 벌어지는 공포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폭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

 

AD 37년 티베리우스가 병사하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아그리피나의 아들인 가이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가이우스는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가 지휘하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지어준 '칼리굴라'('꼬마장화'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였는데 70대의 노쇠한 티베리우스 말년의 공포정치에 지친 로마시민들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즉위한 칼리굴라에게 열광하였다. 이에 칼리굴라는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인기에 영합한 정책을 펼쳤으나 변덕과 방종한 생활로 변질되었으며 급기야는 정신병 증세까지 보였다. 결국 칼리굴라는 제위 3년만인 41년 1월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에 의해 살해당했다.

 

칼리굴라가 죽자 원로원은 공화정으로의 회귀를 노렸으나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면서 무산되었다. 클라디우스는 원래부터 병약하고 말을 더듬고 한쪽 발을 질질 끄는 버릇 때문에 동시대인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나 정치적 능력은 뛰어나 속국들이 로마 제국에 흡수되었고 남부 브리타니아가 정복되었으며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벌어지고 로마 제국의 관료조직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AD 54년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어 네로가 즉위하였다. 네로는 즉위 초기 선정을 펼쳤고 속주들이 원만하게 통치되고 있었으며 파르티아 제국과도 50년간의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등 로마 제국 자체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네로가 괴상한 악행과 상상을 넘어선 사치를 벌이기 시작하여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복동생인 브리타니쿠스(AD 55년), 친어머니인 아그리파(AD 56년), 아내인 옥타비아(AD 62년)을 차례로 독살하는가 하면 AD 64년에 일어난 로마 대화재의 원인을 그리스도교인들의 방화로 뒤집어 씌워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기도 하였다. 결국 네로는 AD 68년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히스파니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를 비롯한 각지의 총독들이 들고 일어나 벌어진 내전의 와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으로 이어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단절되고 만다.

 

 

 

네 황제의 해의 혼란과 플라비우스 왕조의 등장

  

네 황제의 해의 혼란

 

네로가 죽은 이후 반란을 일으켰던 갈바가 AD 68년 6월 8일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갈바의 즉위는 많은 반발을 불러왔고 특히 라인강에 주둔 중이던 게르마니아 군단은 AD 69년 1월 2일 자신의 사령관인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여 갈바와 대립하였다. 로마에서도 갈바가 신망을 얻지 못하자 같은 해 1월 15일 쿠데타가 발생하여 오토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렇게 하여 갈바는 네 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AD 69년의 혼란 속에 사망한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이후 오토가 황제가 되었으나 비텔리우스 때문에 그의 지위는 매우 불안하였다. 결국 오토 역시 3개월 뒤 비텔리우스에 의해 축출되어 자살하면서 AD 69년에 죽은 두번째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비텔리우스가 황제가 되었으나 비텔리우스 역시 부하들의 전황을 방치하고 연이은 환락생활로 많은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리하여 AD 68년 한 해 동안 로마 제국에는 황제가 4명이나 등장하는 대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과 유대전쟁

 

베스파시아누스는 세금 징수원이었던 에퀴테스 계급의 아버지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사비니 리에티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가문 출신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트라키아에서 군대생활을 시작하고 AD 39년 30세의 나이에 법무관을 지내며 군단 사령관의 지위까지 올랐다. 그리고 클라우디스 황제 재위시절인 AD 43년 브리타니아에서 20개가 넘는 도시를 점령하는 뛰어난 전공을 세우면서 개선식을 치르고 그 공으로 BC 51년에는 집정관까지 역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스 황제가 죽은 이후 네로가 즉위하자 한동안 아무런 직책을 얻지 못했지만 AD 63년 경 북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임명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AD 66년 유대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토벌해야 하는 시리아의 속주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갑자기 병사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반란의 임무를 맡아 팔레스타인에 파견된 상태였다. 

 

 

유대 전쟁의 발발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유대인의 나라인 유다 왕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 도중에 정복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처음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이집트의 프롤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으나 BC 168년부터 BC 164년까지 이어진 마카베오 가문의 저항운동이 성공하면서 독립에 성공했다. 마카베오 가문은 마타티아스와 그의 셋째 아들인 유다가 차례로 죽자 마타티아스의 막내 아들인 시몬이 유대인 저항운동을 이어받았고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내부 권력다툼의 혼란을 이용하여 유대 왕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대제사장이자 왕이 되어 하스모니안 왕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하스모니안 왕조의 성쇠는 얼마가지 못했고 BC 63년 경 동방원정 중인 로마의 그라니우스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이후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내전이 시작되자 카이사르를 지원한 요한 히르카누스 2세가 왕위에 복권되어 비록 로마의 속국 지위로 유다 왕국을 재건하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이후 로마의 유력가가 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BC 42년 이두매 출신의 헤로데 1세를 유다 왕국의 속왕으로 임명하면서 헤로데 왕조가 시작되게 되었다. 다시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내전이 벌어졌으나 헤로데 1세는 안토니우스가 몰락한 이후에도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그 지위를 그대로 인정받았다. 다만 헤로데 1세가 죽고 나자 유다 왕국을 삼분하여 차지한 세 아들인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빌립보 1세는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AD 6년 가장 많은 영토를 물려받은 헤로데 아르켈라오스가 폐위되자 유다 왕국이 로마 속주로 잠시 편입되었고 AD 41년 헤로데 1세의 손자인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로마의 3대 황제인 칼리굴라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유다의 왕위에 오른 뒤 나머지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데 빌립보 1세의 영토를 모두 넘겨받으며 유다 왕국을 잠시 재건하였지만 AD 44년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사망하자 왕위가 그 아들에게 이어지지 못하고 유다 왕국은 로마의 시리아 속주의 지배를 직접 받게 되었다. 하지만 유다 왕국이 로마 속주로 편입된 뒤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로마 속주 총독에 의해 많은 부정이 저질러졌고 이교도인 로마인이 유다 왕국의 대제사장을 지명하는 것에 많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네로 황제 시절인 AD 66년 카이사레아 지역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분쟁이 발생하였으나 로마 주둔군이 제대로 중재해내지 못했고 오히려 유대의 로마 속주 행정관인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유대 신전의 금고를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결국 분노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의 로마 주둔군과 플로루스가 임명한 대제사장까지 모두 학살당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시리아의 속주 총독인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안티오키아에 주둔 중이던 로마 제12군단과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아들로 작은 지역의 분봉왕이 되었던 아그리파 2세의 군대를 이끌고 갔으나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하였다. 더욱이 갈루스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되돌아 온 후 갑자기 병사하면서 예루살렘 반란의 진압이 어려워지자 네로 황제는 경험이 많고 노련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3개 군단을 이끌고 유대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거병

 

베스파시아누스는 동명의 아들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유대반란 진압에 나섰다. 아들인 티투스 역시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복무하면서 많은 군무 경험을 쌓은 상태였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AD 67년 봄에 불과 몇 주 만에 갈릴리를 장악하고 AD 68년이 되자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 왕국의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AD 68년 6월 네로가 죽자 전투를 중단하고 로마의 정황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새로운 황제 갈바를 인정하고 티투스를 축하사절로 보냈지만 티투스는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인 AD 69년 1월 갈바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아버지에게 되돌아왔다. 그리고 로마에서 오토와 비텔리우스 사이의 내전이 벌어지자 베스타시아누스 자신도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조용히 지지세력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AD 69년 4월 오토가 패배하여 죽고 비텔리우스가 즉위하였으나 거듭된 실정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AD 69년 7월 베스타시아누스가 마침내 거병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거병에 대해 함께 유대 전쟁을 치르던 베스타시아누스 휘하의 로마 군단은 물론 시리아와 이집트에 주둔 중이던 로마 군단도 지지를 선언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군사적 전공을 위해 유대 전쟁을 재개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이후 아들인 티투스에게 유대 전쟁의 지휘권을 일임하고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은 로마의 주요 곡물 수입지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향하여 로마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자신을 따르기로 한 시리아의 속주 총독인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를 발칸반도의 디라키움(지금의 알바니아 두러스)에 파견하여 그곳의 함대를 손에 넣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AD 69년 8월에 도나우 강에 주둔 중인 5개 군단까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지지를 선언하고 도나우 강 군단장 중 하나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비텔리우스의 라인강 군단을 물리치고 12월 20일 로마에 입성했다. 비텔리우스는 퇴위를 간청했으나 결국 살해당하며 AD 69년에 죽은 마지막 황제가 되었고 최종적으로 베스파시아스가 황제가 되면서 로마는 AD 69년 한 해동안 황제가 4명이나 교체되는 진통 끝에 겨우 혼란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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