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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제1차 삼두정치, 갈리아 전쟁

Jobs 9 2021. 5. 16.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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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제1차 삼두정치

 

동맹시 전쟁에서 활약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불과 18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도와 동맹시 전쟁에서 활약하며 군사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세력에 속했지만 BC 87년 마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와 반대파를 숙청할 때 아버지는 이미 죽고 폼페이우스 자신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화를 피했다. 그러나 BC 83년 술라가 폰투스 원정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하자 폼페이우스는 동맹시 전쟁에서 아버지가 지휘하던 3개의 군단을 이끌고 술라에게 합류하였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내전 동안 뛰어난 군사적 활약을 보여줬고 그 덕분에 술라의 신임을 얻어 독재관이 된 술라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2년동안 마리우스의 잔당토벌을 맡아 잔인하고 철저하게 마리우스파를 숙청하면서 '10대 백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마리우스파 잔당토벌을 마친 폼페이우스가 술라에게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악명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렇지만 폼페이우스는 개선식을 허락해 달라며 로마 성문에서 시위를 벌였고 오랜 내전으로 지친 로마 시민들에게 개선식과 같은 축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술라가 허락하였다. 이때 술라는 어린 폼페이우스에게 장난으로 '마그누스(Magnus; 위대한 자)'라고 불렀는데 오히려 마음에 들어 한 폼페이우스가 이를 자신의 별칭으로 계속 사용하게 된다.

 

술라는 자신의 군단을 로마 가까이에 두기 위해 에트루리아의 땅을 몰수하여 자신의 군단병에게 지급한 적이 있었다. BC 77년 술라가 죽자 에트루리아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나선 집정관인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오히려 에트루리아 반란군과 합세하여 로마로 진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다급해진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군대를 맡겼고 폼페이우스는 레피두스 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레피두스의 반란이 진압되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군단 해산을 요구하였지만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히스파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히스파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세르토리우스는 마리우스파로서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히스파니아의 속주 총독으로 지내던 중 술라의 토벌군을 피해 북아프리카로 달아났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에서 술라의 토벌군을 물리치고 BC 80년 히스파니아를 탈환하였고 이후 반독립상태가 되었다. 레피두스의 반란이 실패로 끝난 이후에는 레피두스의 잔당까지 합세하여 그 세력이 더욱 커졌고 로마에서 여러차례 보낸 토벌군을 물리치며 사실상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비록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능력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지만 당시 폼페이우스의 나이가 아직 29세에 불과하여 군단 지휘권이 있는 법무관은 커녕 최초의 공직인 재무관에 입후보할 연령 제한인 30세에도 못 미치지는 상황이었다. 비록 레피두스 반란토벌은 긴급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여도 멀리 히스파니아 원정을 떠나는 이번 경우에도 폼페이우스에게 총지휘를 맡기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고 폼페이우스 자신도 군단 해산을 거부하며 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결국 원로원도 폼페이우스를 집정관 대리라는 임시직으로 임명하여 히스파니아 토벌군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전에 파견된 퀸투스 카에실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3년째 세르토리우스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메텔루스와 합세하였고 이후에도 세르토리우스가 게릴라전을 펼치며 2년이나 더 버텨냈지만 결국에는 BC 73년 부하에게 암살당하면서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은 5년만에 끝나게 된다. 

 

 

이례적인 집정관 취임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 반란을 토벌한 BC 73년 로마에서는 검투사인 스파르타쿠스가 노예와 검투사를 이끌고 일으킨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에서는 2명의 집정관이 토벌에 나섰으나 실패하였고 이에 폼페이우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까지 자신이 토벌하고자 귀국을 서둘렀다. 하지만 에퀴테스 출신의 부호이자 당시 법무관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자신의 사비까지 보태 무려 8개 군단을 조직했고 이후 잔인한 토벌과정을 벌이면서 BC 71년 폼페이우스가 귀국하기 이전에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폼페이우스도 로마로 귀국하였고 이제 필요없어진 군단을 해산해야 했지만 폼페이우스는 개선식과 다음해 집정관 출마자격을 요구했다. 비록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개선식을 허락했지만 폼페이우스가 여전히 집정관 출마에 필요한 연령제한인 40세가 되지 않았고 집정관 출자자격으로 요구되는 어떠한 공직도 수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난감해했다. 이 때 크라수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군단을 해체하지 않고 집정관직에 출마하겠다고 버텼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비밀협약을 맺고 원로원을 계속 압박한 끝에 결국 원로원으로부터 집정관 출마자격을 인정받았다. 이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한 후 나란히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원로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술라에 의해 사문화되었던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시켰다. 호르텐시우스 법에 의하면 평민의회에서 통과된 법은 원로원의 승인이 없더라고 호민관에 의해 발의할 수 있었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옛 부하이자 로마 시민권자이기도 한 퇴역병사들을 움직여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호민관에 당선시켰고 가비니우스를 앞세워 각종 특혜를 법안으로 통과시켰다. 또한 재판 배심원이 술라에 의해 원로원 의원이 독점하도록 되어 있던 것을 변경하여 원로원, 에퀴테스, 평민이 각각 3분의 1씩 배정받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이렇게 하여 술라가 만들어 놓은 원로원 중심의 지배체제는 술라가 가장 신임하던 폼페이우스에 의해 서서히 무너져 버리게 된다.

 

 

지중해 해적토벌과 동방 원정

 

1년 임기를 마치고 폼페이우스가 집정관 직에서 물러난 뒤 지중해에 해적이 출몰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로마가 그리스와 오리엔트의 국가들의 힘을 약화시켰으면서도 그동안 내전을 벌이며 지중해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폼페이우스가 다시한번 호민관인 가비니우스와 자신의 퇴역병사들을 움직여 BC 67년 해적 소탕의 총사령관으로 자신이 임명받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을 통해서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바다는 물론 해안선 일대를 모두 관할하는 막강한 권한과 임기 3년을 보장받았다. 이러한 전대미문의 특혜에 원로원이 즉각 반발했지만 이미 평민회 의결만 원로원의 동의없이 효력이 발생하는 호르텐시우스 법이 부활하였고 폼페이우스의 인기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원로원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군사적인 재능이 출충했던 폼페이우스는 지중해를 총 13개 구획으로 나누고 각 구획의 항구를 먼저 점령하여 해적의 물과 식량 공급을 차단한 후 한 곳으로 몰아 일거에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이러한 폼페이우스의 전략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불과 3개월 만에 지중해의 모든 해적을 소탕하였다. 이에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에게 군사지휘권을 반환하도록 요구하였으나 때마침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폼페이우스는 다시 로마의 호민관을 움직여 자신을 폰투스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새롭게 임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번에도 원로원은 반대하였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당시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지난 BC 84년 술라와 강화조약을 맺은 이후에도 로마를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고 BC 82년에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벌여 술라가 폰투스를 견제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반도에 남기고 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의 군단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BC 74년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4세가 죽고 비티니아가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자 이에 미트리다테스 6세가 반발하면서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비록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7년간 전쟁을 벌이며 폰투스와 그 동맹인 아르메니아를 착실하게 밀어붙였지만 오랜 원정으로 지친 병사들의 종군거부로 위기에 빠진 상태였다. 

 

이에 폼페이우스가 BC 66년부터 루쿨루스의 지휘권을 인수하였고 불과 2년동안 폰투스에게 2번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란 고원에 신흥강자로 나타난 파르티아 제국과 협정을 맺은 뒤 아르메니아를 압박하여 로마의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결국 고립된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달아났고 아들인 파르나케스 2세에게 배신당하자 자결을 선택하면서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종식되었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폼페이우스는 계속해서 원정을 감행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파르티아 제국과의 국경선으로 확정했다. 또한 파르티아 제국에게 밀려 시리아만 겨우 차지하고 있던 셀레우코스 왕조를 무너뜨렸고 하스모니안 왕조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의 유대 왕국도 점령하였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점령지를 재편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에 새롭게 킬리키아 속주를 편성하였고 시리아도 속주로 재편한 뒤 팔레스타인까지 통치하도록 하였다. 

 

 

폼페이우스의 귀환과 원로원과의 마찰

 

이렇게 폼페이우스는 불과 4년동안 폰투스를 제압하고 아르메니아를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정복하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BC 62년 12월 비로소 이탈리아의 브린디시움 항구를 통해 귀국하였다. 지나치게 많은 병력과 엄청난 전공을 가진 폼페이우스의 귀국에 로마 원로원은 바짝 긴장했으나 다행히 폼페이우스는 즉각 자신의 군단을 해산하였다. 그리고 BC 61년 9월 29일 자신의 생일날에 통산 3번째 개선식을 거행하는 영광을 거뒀다. 하지만 그동안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의 요구를 여러번 묵살하였기 때문에 이에 앙심을 품은 원로원에서는 폼페이우스가 동방원정에서 처리한 정책에 대한 승인과 해산된 퇴역병사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일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미 군대를 해산한 폼페이우스가 더이상 두렵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에 폼페이우스의 체면이 깎이면서 곤란을 겪게 되었고 이 틈을 타고 BC 59년 집정관직을 노리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하여 크라수스와 함께 비밀협정을 맺고 제1차 삼두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활약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집안은 로마 왕정의 씨족인 율리우스 가문이었기 때문에 유서 깊은 귀족 집안이었으나 그 조상에는 유명한 정치가는 없었고 그동안 배출한 집정관도 3명에 불과했다. 카이사르 자신도 31세가 된 BC 69년에 재무관을 시작으로 BC 65년 안찰관과 BC 62년 법무관을 차례로 역임하였는데 이미 20세에 두각을 나타낸 폼페이우스에 비하면 당시 귀족출신으로서 지극히 평범한 길을 걸은 것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관직을 수행하면서 민심 파악의 수완을 보여주었고 민중과 친근한 입장에 서서 로마와 기타 속주에서 군무와 실제의 정책 운영 면에서 착실하게 성과를 거두어 명성을 획득하였고 점차 대정치가로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특히 카이사르의 고모부가 바로 평민들에게 인기가 높던 마리우스였기에 카이사르는 자연스럽게 평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법무관직을 마친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지금의 포르투갈의 대부분, 안달루시아, 에스트레마두라, 남부 레온)의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그동안 선거운동으로 막대한 빚을 졌기 때문에 로마를 떠나기 전에 채무자에게 시달려야 했다. 이때 로마 최고의 갑부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의 빚 일부를 대신 갚아주고 나머지는 보증을 서주면서 해결되었다. 겨우 부임지로 떠난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속주에서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는 업적을 남기며 무사히 속주 총독직을 마쳤고 로마 시민의 최고 명예로 여겨지는 개선식을 거행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거행하려면 군사령관 신분으로 로마 바깥에 대기해야 했고 공직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로마 안으로 입성해야 했다. 결국 개선식과 공직 출마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집정관직에 더 관심이 많았던 카이사르는 부득이 개선식을 포기해야만 했다. 

 

 

 

제1차 삼두정치의 성립

 

카이사르가 출마한 BC 59년 집정관직은 카이사르를 비롯한 세명의 후보가 나섰고 가장 불리한 처지였던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과 마찰을 빚고 있던 폼페에우스에게 접근하였다.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옛 병사들을 움직여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당선되도록 하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에 대한 토지분배 법안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고 서로 간의 신뢰를 위해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가 폼페이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여기에 카이사르는 로마 최고의 갑부이자 자신의 재정적인 후원자인 크라수스도 끌어들였다. 크라수스는 술라의 대숙청 시절 국가에 몰수된 재산을 값싸게 사들이는 방법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고 이후 경제계를 좌우하는 에퀴테스의 대표로서 빚이 있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돈을 대여해주는 방식으로 우호세력을 만들었지만 로마 정계 자체가 명망 귀족과 전쟁영웅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는 BC 70년 집정관직을 공동으로 수행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카이사르의 요청에 따라 크라수스와도 비밀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역사상 제1차 삼두정치라고 불리우는 비밀 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대중적인 인기와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을 이용한 조직력, 그리고 크라수스의 막대한 자금력이 합쳐진 제1차 삼두정치는 이후 술라가 이룩한 로마 원로원 체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게 된다. 제1차 삼두정치의 힘으로 카이사르는 열세라는 예상을 뒤엎고 BC 59년 집정관에 손쉽게 선출되었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원 속에서 원로원의 반발을 무시하고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농지법 개혁안을 민회에서 강행 처리하였다. 원로원은 반발하였으나 퇴역병과 민중을 선동하여 압력을 가한 삼두정치의 힘 앞에는 무기력할 뿐이었다. 카이사르와 공동 집정관으로 선출된 원로원파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카이사르는 사실상 남은 임기 동안 혼자서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BC 59년말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종료 후 자신의 속주 총독 부임지로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산맥 너머의 갈리아라는 의미)와 일리리쿰(발칸 반도 서부지역)으로 선택하고 제1차 삼두정치의 힘을 이용하여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기에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남프랑스 지방)의 속주 총독인 퀸투스 카에실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가 갑자기 죽자 그곳까지 카이사르에게 넘겨졌다. 카이사르의 속주 중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일리리쿰은 일찍부터 속주화가 진행되어 비교적 안정적이었지만 갈리아 키살피나는 분쟁이 잦았다. 갈리아는 현재의 프랑스 지방으로 당시에는 켈트족의 일파인 갈리아인이 여러 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살고 있었고 당시 로마는 갈리아인 몇몇 부족들과 교역 및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카이사르로서는 잠재적인 라이벌인 폼페이우스에 비해 부족한 군사적 명성을 보충하기 위해 아직 분쟁 중인 갈리아를 자신의 부임지로 선택한 것이었다.

 

 

갈리아 전쟁

 

아직 로마에 정벌되지 않은 갈리아를 두고 카이사르는 크게 갈리아, 아퀴타니아, 벨가이로 구분하여 기록했다. BC 58년 카이사르가 속주에 도착한 첫 해에 로마 영토에 인접하여 로마와 동맹을 맺은 하이두이족이 세콰니족, 헬베티족, 게르만족의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다. 또한 현재의 스위스와 남부 독일에 살던 헬베티족도 독일의 게르만족에 밀려 대서양에 면한 산토니족의 영토로 이주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카이사르에게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갈리아 부족은 그 자체가 거대한 전투집단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헬베티족은 로마 속주를 피해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이 살던 지역을 지나가려고 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하이두이족이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결국 카이사르는 하이두이족의 요청에 응해 갈리아 부족 사이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갈리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손 강 연안에서 헬베티족을 기습공격하였고 달아나는 헬베티족을 뒤쫓아 비브락테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둔 뒤 강화를 맺었다. 카이사르가 헬베티족을 손쉽게 격파하자 하이두이족은 분쟁 중인 세콰니족이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끌어들인 게르만족의 일파인 수에비족을 상대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카이사르는 수에베족의 족장인 아리오비스투스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하며 로마의 동맹인 하이두이족을 공격하는 것은 로마를 공격하는 것과 같으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전달하였으나 아리오비스투스는 갈리아와 자신의 일에 로마가 개입하지 말라고 답변하였다. 결국 카이사르와 수에비족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고 베손티오(오늘날의 프랑스 브장송)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승리를 거두면서 아리오비스투스는 라인강을 건너 도망쳐야 했다.

 

 

벨가이족 격파 

 

아리오비스투스를 격파한 카이사르는 베손티오에서 겨울 숙영지를 짓고 머물며 라인강을 로마 방어선으로 구축했다. BC 57년이 되자 카이사르는 멀리 갈리아 북쪽의 벨가이(현재의 벨기에)에 살던 호전적인 벨가이족을 공격했다. 먼저 벨가이족 중 레미족과 동맹을 맺었고 이후 수에시오네스족을 물리치고 벨로바키족, 암비아니족과 차례로 강화를 맺으면서 벨가이 지방을 모두 정복했다. 또한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크라수스의 아들로서 카이사르와 함께 종군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일명 '젊은 크라수스')에게 대서양 연안으로 진출하게 하여 오늘날의 노르망디 지방과 브르타뉴 지방을 정복하도록 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BC 57년 겨울 숙영지로 갈리아 중서부의 현재의 오를레앙에 해당하는 지역에 다리를 잡았다.

 

갈리아 전쟁 3년차인 BC 56년에 카이사르는 먼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루카에서 만나 제1차 삼두정치의 방향을 정했다. 루카회담에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도록 하고 집정관 임기 종료 후 폼페이우스는 이베리아 반도의 두 속주(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에, 크라수스는 시리아에 각각 속주 총독으로 부임할 수 만들기로 합의했다. 또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속주 총독 임기를 5년으로 하고 형평성을 위해 카이사르의 속주 총독 임기도 더 연장하기로 했다. 

 

루카 회담을 마치고 카이사르가 돌아오자 오늘날의 브르타뉴 남부에 살던 베네티족이 갈리아 서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때까지 정복당하지 않은 대서양 해안의 모리니족과 라인 강 하류의 남쪽 연안에 사는 메나피족이 베네티족의 반란을 지원했다. 베네티족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해군이 필요했으므로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 함대 지휘를 맡겼고 또한 다른 부장인 티투스 라비에누스, 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 젊은 크라수스에게 각각 육지 전투를 맡겼다. 카이사르의 부장들은 모두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브루투스가 베네티족의 함대 220척을 격파하였고 라인강에서는 라비에누스가, 지금의 노르망디에서는 사비누스가, 지금의 아키텐에서는 젊은 크라수스가 각각 승리하였다. BC 56년 베네티족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카이사르는 노르망디에서 겨울 숙영지를 편성했다. 

 

 

게르마니아와 브리타니아 정벌

 

BC 55년 갈리아 전쟁 4년차가 되자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평정되었다고 생각하고는 갈리아 부족을 위협하던 라인강 건너의 게르만족의 영토인 게르마니아 공격에 나섰다. 카이사르는 오늘날의 독일 본과 쾰른사이에 해당하는 코블렌츠 바로 밑에서 라인 강을 건너 수감부리족을 공격하고 우비족과 강화를 맺었다. 다음으로 도버 해협 건너편의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영국) 섬을 급습했는데 당시 로마군단으로서는 처음으로 브리타니아에 상륙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해안가에서 교두보를 마련하고 브리타니아인과 격전을 치렀지만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채 되돌아와 아미앵에서 겨울 숙영지를 마련했다. 

 

이때 집정관 임기를 마친 크라수스가 시리아 속주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아들인 젊은 크라수스가 카이사르를 떠나 기병 1천기를 이끌고 크라수스에게 갔다. BC 54년이 되자 카이사르는 재차 브리타리아 공략에 나서 템즈강을 건너 브리타니아의 카시벨라우누스와 강화를 맺었다. 카이사르는 가을에 갈리아로 되돌아왔고 밀의 수확량이 예년에 훨씬 못 미쳤기 때문에 군대를 8개로 분산하여 겨울 숙영지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최후의 갈리아 반란과 토벌

 

카이사르의 군대가 분산되자 그 틈을 타고 벨가이 부족 중 하나인 에부로네스족의 암비오릭스가 카이사르의 로마 군단 중 한 부대를 포위하여 몰살시켜버렸다. 이에 고무된 네르비족과 아투아투키족도 로마에 반기를 들었으나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6만명의 벨가이족 군대에 굴복하지 않고 농성을 벌였고 카이사르는 트레베리족의 위협을 받는 라비에누스의 군단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모두 이끌고 키케로를 구원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미앵에서 겨울 숙영지를 편성하고 이듬해 전쟁을 대비했다.

 

BC 53년 봄이 되자 카이사르는 다시 군대를 움직여 반란을 일으킨 네르비족을 직접 격파하였고 그 사이 라비에누스도 자력으로 트레베리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카이사르는 파리에서 갈리아 부족장 회의를 소집하였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로마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통보하자 세노네스족과 카르누테스족이 굴복하였다. 이후 카이사르는 도망친 암비오릭스를 뒤쫓아 다시한번 라인강을 넘어 게르마니아를 침공하였으나 암비오릭스를 붙잡지는 못했다. 카이사르는 다시 라인강을 건너 되돌아 온 후 랭스에서 갈리아 부족장 회의를 다시 개최하고 반란 주동자를 처형시켰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은 7년차인 BC 52년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갈리아족의 일파인 아르베르니족의 새로운 족장이 된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 중부지방에서 갈리아인을 규합하고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든 것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알프스 산맥 건너편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던 카이사르 군대를 로마군으로부터 차단할 계획을 세웠고 기병작전과 초토화작전으로 로마군에 대한 군수품 보급을 차단함으로써 승리를 거두고자 했다. 그러나 다른 부족은 베르킨게토릭스의 이러한 고통스러운 작전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투리게스족은 베르킨게토릭스의 전략을 무시하고 아바리쿰(지금의 부르주)에서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견디고자 하였으나 1개월도 지나지 않아 카이사르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어서 카이사르는 오늘날의 클레르몽페랑 근처에 있는 게르고비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포위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반격을 개시하여 게르고비아를 단숨에 점령하려는 로마군을 물리치고 카이사르에게 갈리아 최초의 참패를 안겨줬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곧바로 부대를 정비하여 행군하는 도중에 받았던 공격을 물리쳤으며 디종 북서쪽에 있는 알레시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다시 포위하였다. 알레시아는 게르고비아와 마찬가지로 천연의 요충지였고 이 도시를 구하기 위해 갈리아의 대군이 몰려오면서 카이사르가 다시한번 위기에 빠지는 듯 했으나 결국 뛰어난 지휘력으로 갈리아 군을 격퇴시키고 베르킨게토릭스를 사로잡았다. 이로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하여 7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로마의 속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전쟁 자체는 8년째, BC 5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베르킨게토릭스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전쟁은 실질적으로 끝났으며 BC 51년은 전후처리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갈리아 전쟁에 대한 1차 사료로는 카이사르의 저작 《갈리아 전쟁기》가 남아 있다. 카이사르는 BC 50년에는 새로 정복한 영토를 조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갈리아에서의 전쟁은 끝났으나 이제 카이사르는 더 큰 적을 상대해야만 했다. 바로 국내의 적인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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