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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Humanities/동양사 Asian History 107

백화(白話), 백화문(白話文), 백화 운동

백화(白話)  당나라 대에 발생하여, 송, 원, 명, 청 시대를 거치면서 확립된 중국어의 구어체를 말하며, 이를 글로 표기한 것을 백화문(白話文)이라고 한다.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고전 등에 나오는 문구를 근거로 쓰인 문언문(文言文, 한문)에 비해, 백화문은 각 시대를 거치며 북경어를 중심으로 민간에서 사용되는 일상 언어가 반영되어,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 형태가 갖추어졌다. 당 시대의 백화로 들 수 있는 것으로 둔황(敦煌)의 변문(變文)이 있다. 이는 민중에게 들려주기 위한 의도로 기록된 것으로, 구어를 문장으로 표현하는 기교가 확립되어 있지 않아, 적지 않게 문언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당에서 송을 거치며 유행을 했던 어록에도 구어를 기록한 내용들을 볼 수 있다. 송 시대에 들어서면 큰 도..

흉노 정벌, 한무제, 곽거병, 흉노족(훈족) 서진, 게르만족 대이동, 로마제국 멸망, 유럽 각국 원형 탄생

로마 멸망을 초래한 흉노 정벌의 영웅, 곽거병 기원전 2세기 한 무제는 흉노와 총력전을 펼친 끝에 흉노를 고비 사막으로 몰아냈다.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사건이었지만, 최초의 세계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서쪽으로 이동해간 흉노족(훈족)으로 인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나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오늘날 유럽 각국의 원형이 탄생했다. 한 무제는 흉노를 협공할 동맹국을 찾기 위해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했는데, 장건의 모험은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됐다. 지구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보다 더 극적인 사건이 있을까?   흉노는 중국 북방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이다. 단일 민족은 아니고 몽골과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까지 포함한 혼성 국가였다. 흉노 정벌은 한나라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식민지 근대화론, 낙성대연구소, 내재적 발전론, 수탈론, 자본주의 맹아론, 식민사관, 실증주의

1926년 조선총독부 조선산림회에서 발행한 에 삽입된 경성시가의 모습. 극도로 낙후하고 정체된 조선 사회가 식민지 지배를 통해 경제적으로 발전되었다는 지배의 정당성을 공간의 변화를 통해 홍보하였다.    식민지 근대화론 현대 한국의 경제적 · 정치적 성장의 원동력을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찾는 역사적 관점. 일제강점기를 해석하는 국내 역사학계의 관점은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크게 갈린다. 내재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조선사회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함으로써 발전을 방해받았다는 것이 종전 역사학계의 ‘내재적 발전론’(수탈론)이라면,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경제가 성장하고 근대화의 토대가 마련된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 안병직, 이영훈 등 낙성대연구소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할..

천안문 사태, 1989년 6월, 천안문 6.4 항쟁

천안문 사태, 天安門事態 천안문 광장 앞에서 있었던 일련의 민주화 운동들을 말한다. 흔히 1차 천안문 사태라 불리는 1976년 천안문 사태와 2차 천안문 사태 혹은 천안문 항쟁으로 불리는 1989년의 천안문 6.4 항쟁이 유명하고 이중에서도 천안문 6.4 항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중국 공산당이 보병은 당연하고 전차, 인민해방군 수송을 위한 트럭을 동원해 무고한 시민들을 깔아죽인 사건이 유명하다.  제1차 천안문 사태마오쩌둥 체제 말기인 1976년 4월 5일에 일어났던 봉기. 온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던 저우언라이 총리의 사망을 계기로 하여 중국인이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에 반발한 봉기이다. 아래의 천안문 사태와는 천안문광장이라는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다는 것 빼고는 관계가 별로 없다. 같은 장소에서 주석과..

문화대혁명, 반달리즘, 홍위병, 마오쩌둥파 덩샤오핑파 권력 투쟁, 덩샤오핑, 류샤오치, 스탈린, 흐루쇼프, 무산계급문화대혁명

무산계급문화대혁명, 无产阶级文化大革命, 無産階級文化大革命,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문혁, 文革, 원거무산계급문화대혁명, 无产阶级文化大革命, 無産階級文化大革命,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문혁, 文革, 원거  1966년 5월 16일의 5·16 공지부터 1976년 10월 6일 문혁사인방의 베이징정변까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파괴운동, 친위 쿠데타, 내란이다. 중국에서는 이 기간을 십년 동란(十年動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국의 문화를 자국민들이 스스로 멸절시키려 한 전례가 드문 대사건으로, 공산주의 체제의 내재적 폭력성과 경직성, 그리고 체제적 한계를 예시할 때 킬링필드, 대숙청, 대약진 운동, 고난의 행군,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과 함께 빠짐없이 언급되는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제사해 운동, 네 가지 해충, 除四害運動, Four Pests campaign, 타마작 운동, 打麻雀運動, smash sparrows campaign, 참새 죽이기 운동, 消滅麻雀運動, eliminate sparrows campaign, 대약진 운동 첫 단계

제사해 운동, 네 가지 해충, 除四害運動, Four Pests campaign, 타마작 운동, 打麻雀運動, smash sparrows campaign, 참새 죽이기 운동, 消滅麻雀運動, eliminate sparrows campaign, 대약진 운동 첫 단계 대약진 운동의 첫 번째 단계로서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장려된 정책이다. ‘제사해’란 “네 가지 해충을 제거한다”라는 뜻으로, 그 네 가지 해충은 들쥐, 파리, 모기, 그리고 참새였다. 이 정책의 결과 중국 참새의 멸종으로 인해 생태학적 균형이 무너졌고, 농업해충이 창궐하였다. 제사해 운동의 네가지 해충 참새들쥐파리모기 이 정책은 애초 마오쩌둥이 1958년에 들고 나온 위생 운동이었는데, 마오는 모기, 파리, 들쥐, 그리고 참새를 멸종시켜야 하..

대약진 운동, 원시 공산주의 실험, 3,000만 명 아사, 토법고로, 大跃进运动, 다웨진 윈둥, Great Leap Forward, Second Five Year Plan

대약진 운동, 大跃进运动, 다웨진 윈둥, Great Leap Forward, Second Five Year Plan 공산 혁명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부강한 사회주의 국가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1958년부터 1961년말-1962년초까지 마오쩌둥(毛澤東)의 주도로 시작된 농공업의 대증산 정책이다. 마오는 《생산성 이론》에 근거해 이 정책을 실시했지만, 농촌의 현실을 무시한 무리한 집단 농장화나 농촌에서의 원시적인 철강 생산 등을 진행시킨 결과 2,500만 명에 이르는 사상 최악의 아사자를 내고 큰 실패로 끝이 난다. 이 때문에 마오의 권위는 추락하고 이 권력 회복을 목적으로 문화 대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반대파 숙청 1957년 11월 6일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는 소련이 공업 생산 및 농업 생산으로 ..

토하라인. Tocharians, 인도유럽인, 아파나시에보 문화

토하라인. Tocharians기원전 2000년경부터 9세기경까지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대에 거주한 코카소이드계 민족으로, 인도유럽어족 계열 언어를 쓰는 민족들 중에서는 가장 동쪽에 거주한 민족이다. 타림 분지 일대의 옛 주민이자 현 위구르인의 조상중 하나로 그 기원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누란의 미녀 미라 등으로 미루어보아 꽤 오랜 옛날부터 중국의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명인 '토하라'는 알란족의 언어로 '무사'를 뜻하는 토하르(tokhar)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 기록에서 고전 그리스어로 '토카로이'라고 하였는데, 로마인들이 라틴어로 '토카리'라고 음역하여 그대로 민족명으로 굳어졌다. 토하라인은 달리, 토하리인, 토카리아인으로 불린다.  기원 토하..

한혈마 전쟁, War of the Heavenly Horses, Han–Dayuan war, 汉攻大宛之战, 천리마 전쟁, 한-대원 전쟁, 토하라인

한혈마 전쟁, War of the Heavenly Horses, Han–Dayuan war, 汉攻大宛之战, 천리마 전쟁, 한-대원 전쟁 기원전 104년~102년 동안 한 왕조가 대원(大宛)의 명마였던, 한혈마(또는 천리마)를 무력으로 찾아오기 위해 벌어졌던 전쟁이었다. 기원전 2세기경의 중국을 다스리고 있었던 제국, 한나라는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제국 중 하나였다. 특히 한나라는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통해 서쪽으로는 인도의 북부에 닿았고, 동쪽으로는 한민족 국가들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베트남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제국이었던 한나라에도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북쪽의 거대한 유목 연합 제국이 끊임없이 한나라의 북부 영토를 침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100년 이상, 끊이지..

전한(前漢: 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 유방(劉邦), 왕망(王莽)

전한(前漢: 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대륙 쟁탈 뒤에 세운 왕조로서 진(秦)에 이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왕조이다. 수도는 장안이었는데 그 위치가 후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 서쪽에 있어서 서한(西漢)이라고도 불린다.  건국고조 유방은 원래 정장(亭長)으로 의병을 일으켜 패공(沛公)의 자리에 올라 초(楚)의 의제(義帝)를 섬기다가 그 세력이 커져 또다른 거대 세력인 항우와 경쟁하였다. 처음에는 거듭 패배하였으나 한신(韓信), 장량(張良), 소하(蕭何)를 위시해 많은 인재를 기용하여 기원전 202년 전세를 역전하기 시작했고 최종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고 한(漢)을 건국했다. 수도를 장안으로 삼았다.  전성기 문경지치(文景之治)로 일컬어지는 문제..

고구려 기원, 고구려 성립과 발전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1. 고구려의 기원  고구려 건국설화인 朱蒙說話는001) 백제나 신라의 건국설화에 비해 내용이 풍부하고 구성이 복잡할 뿐 아니라, 고구려인이 직접 남긴 자료가 전해지고 있어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밝히는 데 중요한 시사를 준다. 현전 주몽설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廣開土王陵碑>의 서두 부분이고,<牟頭婁墓誌>와≪魏書≫고구려전의 주몽설화도 5세기경의 기록이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나≪三國遺事≫·<東明王篇> 등 국내문헌은 5세기경의 기록에 후대적 윤색이 가해진 것을 전하고 있다.002)   주몽설화는 부여의 東明說話에 바탕을 두고,003) 4세기 후반 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와 함께 건국설화로 확립되었다.004) 그리하여 고구려 왕실의 입장을 반영한 주몽설화의 경우, 주몽의 出自를 비롯..

삿초 동맹,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조슈번(야마구치현), 에도 막부 타도, 사카모토 료마

삿초 동맹(일본어: 薩長同盟 삿초도메이) 일본의 에도 시대 후기에 사쓰마번(오늘날 가고시마현)과 조슈번(오늘날 야마구치현)이 맺은 정치적, 군사적인 동맹을 가리킨다. 1866년 3월 7일에 맺었으며, 에도 막부를 타도하는 게 목적이었다. 삿초 맹약, 삿초 연합이라고도 한다. 원래 사쓰마번은 1864년에 금문의 변 사건을 일으켜 교토에서 조슈번을 추방하였고, 몇 차례 조슈번을 공격하여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도사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 중재로 동맹을 맺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교토를 중심으로 에도 시대 막부 말기의 정계에서 웅번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쓰마가 공무합체의 입장에서 막부의 개국 노선을 지지하면서 막부의 정치 개혁을 요구한 반면, 조슈번은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양이..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 천황의 명으로 세상이 새로워졌다는 의미, 근대 국가 체제 확립, 1867년, 왕정복고 쿠데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근대 국가의 체제를 확립, 1867년, 왕정복고 쿠데타 1867년 왕정복고의 쿠데타를 계기로 약 250여 년간 유지된 막부가 무너지고, 일본은 일련의 정치 변혁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당시 천황의 명으로 세상이 새로워졌다는 의미에서 고잇신(御一新)이라고 하였고, 이후 메이지 유신이라 불린다. 대체로 메이지 유신의 시기는 1850~1870년대 미국 함대에 의한 개국,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의 대호령(大號令), 보신 전쟁(戊辰戰爭), 폐번치현(廢藩置縣),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등을 포괄한다. 다만 그 시작과 종결에 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메이지 유신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변혁으로서 메이지..

메이지 유신, 성공 요인, 개방성, 지방의 힘

메이지 유신 성공요인 일본의 개방성, 지방의 힘 270여 개로 나뉘어 진 번은 각각이 국가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막부체제 이후로 각 번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경쟁 시스템이 있었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경쟁은 급격히 치열해집니다. 생존을 위한 부국강병의 경쟁, 개혁의 경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각 번은 군사, 행정조직이 갖춰져 있고 이를 운용할 지식인이 있었습니다. 군사와 상업에 있어서 각 번끼리는 경쟁하는 체제였으므로 이를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 생존경쟁을 하였습니다. 이는 훗날 메이지유신이 가능하게 한 기본 동력이 되었습니다. 다른 번보다 앞선 지식과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열심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네델란드어와 중국어(한문)을 잘하는 인재의 양성은 필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교육과 출판의 양성이 적극 장..

한자, 동이족, 근거 학설

한자, 동이족, 근거 학설 ▷중국 倉힐(吉+頁) 문화연구회 쑨펑(孫鵬) 회장 “(한자를 처음 만든)창일은 동이족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는 한서 예기 오제편에도 논증이 있다. 동이가 문자를 창조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국의 사학자 쩌우쥔멍(鄒君孟), “중국 민족, 곧 화하족(華夏族)은 원시사회 말기 炎帝((염제)와 皇帝(황제) 집단을 기초로 하여 동방일부의 蚩尤(치우)와 少昊(소호)가 지배하던 집단이 융합해 형성됐다.”(華夏族起源考論에서) **동이: 후한시대 동방쪽 사람을 가르키는 말로 쓰였으며 활을 잘 쏘는 우리 민족의 조상을 일컬음. ▷중국의 사학자 왕위저(王玉哲), “한자의 연원은 ‘大汶口文化時代’(대문구문화시대)로 소급된다.”(‘中華遠古史’에서) **대문구문화: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

한(韓) 유래, 한국(韓國)

우리나라를 뜻하는 한(韓)의 유래 지금 우리는 뿌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은 ‘대륙의 중심, 우리가 중심’이라는 의미를, 일본은 “해가 뜨는 나라, 모든 것의 처음이다. 우리가 제일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왜 한국(韓國)인지, 한국문화, 한민족이라 하는데 자기 나라 이름의 연원이나 내력도 모르면서 아무런 문제를 못 느끼며 살죠. 한(韓)이 무슨 의미인지 찾겠다고 오랫동안 고심하다 추적을 했고 그 성과가 만족스럽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성씨가 중국에서 온 것으로 알았는데 한(韓)씨만은 우리나라 사람 때문에 만들어진 한자였습니다. 여기서 출발했죠.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이 읽고 또 읽었던 시경(詩經, 사서오경의 하나)에 한후(韓侯)가 나오는데도 우리나라 사..

한자, 갑골 문자, 상나라, 은나라, 은허

중국의 문자, 한자와 갑골 문자의 발견, 상(은) 전설상의 왕조에 지나지 않았던 상나라, 1899년 갑골 문자가 발견되어 존재를 드러내다. 갑골문은 아주 먼 옛날 중국 은나라 때 쓰던 글자였다. 은나라는 중국 한나라 때의 역사가 사마천이 쓴라는 책에 나온다. 그렇지만 갑골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은나라가 실제 있었던 나라라고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은나라 유물이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골에 은나라 사람들이 농사짓고 자식 낳고 전쟁하며 살았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책에 이름만 나오던 고대 왕국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은허란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였던 은의 유적이다. 1928년부터 행해진 조사에서는 크고 작은 분묘·궁전·종묘지·움집터·청동기·토기·옥석..

예맥(濊貊), 예맥족, 한반도 북부와 만주, 예(濊)족, 맥(貊)족, 한(韓)족

예맥(濊貊) 예(濊)와 맥(貊)으로 나누어 파악하기도 한다. 예·맥·예맥의 상호관계와 그 종족적 계통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논란이 되풀이되어 왔다. 예맥에 대해서는 예와 맥으로 나누어 보거나, 예맥을 하나의 범칭(汎稱)으로 보는 견해, 예맥은 맥의 일종이며, 예는 예맥의 약칭이라는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예맥(濊貊), 혹은 예맥족이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살던 고대 부족 집단으로,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에 의해 삼한족과 함께 한민족의 조상들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 관해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현대에 우리의 민족인 한민족은 모든 예맥과 삼한이 통합된 단일민족이라고 볼 수 있고,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하는 존재이다. 일찍이 정약용(..

동이(東夷), 동이족, 동쪽 이민족, 설문해자(說文解字), 이(夷), 큰 활(大弓), 은(殷), 갑골문자, 관련 기록

동이(東夷) 중국 동북방에 분포한 민족을 중국인[漢族]이 부르던 종족명칭. ‘동이(東夷)’란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기보다는 중국의 한문화(漢文化)와 상대적인 문화개념으로 호칭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한족과는 종족 · 언어상으로 구분이 된다. 이들은 태호(太皡) · 소호(小皡) · 유제(有濟) · 서방(徐方) · 제부(諸部) · 풍족(風族)이 있었다. 연원 및 변천 동이의 시원과 종족적 성격 · 활동범위 · 문화단계에 대해서 고대부터 깊은 관심이 있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동이라는 기록이 나온 이래 기자(箕子)와 관련지어 관심을 가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동이를 상고사 문제와 관련시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단군조선보다 앞서 동이총..

한자, 동이족, 한자 연원 동이족 문화권

“(중국 고대국가인) 하(夏)·은(殷) 시대를 소급해 볼 때, 중국인과 한국인이 국경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마치 장벽을 쌓아 갈라놓은 것처럼 전혀 다른 문자를 사용했다는 것은 일반상식으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것이다. 한자 창제에는 우리 민족의 뿌리인 동이족(東夷族)이 깊숙이 관여했다.” 한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한자가 중국만의 글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자의 원형이 된 갑골문자를 우리 민족인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고(故) 진태하 전국한자교육총연합회 이사장이 가장 대표적인 학자다. 진 이사장의 ‘동이족 한자 창제설’은 중국에도 소개돼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자의 연원은 동이족 문화권” 한자는 중국의 한족이 만들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대략 서기전 3세기경부터 한자를 차용해..

퉁구스족, 퉁구스족과 예·맥·한족의 관계

시베리아 동부와 연해주, 만주를 중심으로 주로 분포해 있는 퉁구스어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또는 그들의 조상으로, 퉁구스라는 단어는 사하 공화국에 사는 튀르크 퇼레스(Töles)인들의 "아홉 부족"이라는 뜻의 "도쿠즈"에서 유래했다. 뭉뚱그려서 퉁구스계 제민족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튀르크계 제민족과 마찬가지로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유전학적 연관성을 제외하곤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당히 단절되었다. 수많은 퉁구스계 제민족 중 가장 유명한 여진족은 농업과 수렵을 주 생업으로 삼았으며, 다른 퉁구스계 제민족도 유목보단 반농반렵 위주의 생업을 유지해왔다. 이것이 순수 유목인이었던 튀르크 및 몽골계 제민족과의 대표적 차이점이다. 만주족의 경우는 과수 재배를 한 사례도 있어서 영농 기반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물론..

조선 망한 이유

조선 망한 이유 근대에 조선과 일본은 둘 다 외압에 의해 개국을 강요당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일본만 식민지화되지 않고 자주적 근대화를 성취하였다. 그 이유는 외압의 차이를 기준으로 비교사적 관점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보는 관점은 일본이 조선과 중국에 비해 개국 이전의 생산력 발전 조건이 앞서 있었거나, 지도층이 뛰어났다고 보는 일본 학계의 통설(通說)보다 설득력이 크다. 일본이 식민지화를 면한 이유를 양심적인 일본인 학자 도야마 시게키(遠山茂樹)와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는 동아시아 여러 민족 가운데 일본의 사회 발전 단계가 앞서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의 외압이 조선이나 중국보다 느슨하였다는 점, 개국 시기가 중국보다 늦었지만 조선보다 앞섰던 점 등에 있다고 보았다.347) 특히 강..

이슬람교 성립, 성립 배경,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다툼, 동서 교역로 단절, 메카·메디나, 이슬람 제국 발전

이슬람 문화의 발달 ▶ 종교적 색채가 강하고 국제적 성격을 띰 1. 학문 ▶ 수학, 천문학, 화학(알코올·알칼리 등, 연금술), 의학 발달, 지리학(성지 순례 의무에 따라) 발달, 문학("아라비안나이트"), 법학, 신학(쿠란의 해석) 발달 2. 건축 ▶ 모스크(둥근 지붕, 뾰족한 탑), 아라베스크 무늬 발달 ▶ 모스크 이슬람교도들의 예배 장소, 둥근 지붕(돔), 뾰족한 탑(첨탑), 아치 모양의 천장이 특징 → 이슬람 사회의 중심지 ▶ 아라베스크 무늬 기하학적인 직선 무늬와 넝쿨무늬가 특징 → 우상 숭배 금지 교리로 그림이나 조각을 만들지 못함 이슬람 문화의 확산 ▶ 중국의 제지법·나침반·화약 등을 유럽에 전파, 이슬람 학문을 중국에 전파 이슬람교의 성립 1. 이슬람교 성립 배경 ▶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 ..

한사군, 낙랑군, 대방군, 고구려, 광개토대왕, 새로운 무역로 개설

중요한 것은 한나라가 망하면서 낙랑과 백제 중심의 무역로가 깨지고 고구려와 신라가 득세했다는 사실이다. 한나라 멸망의 혜택을 가장 크게 본 나라는 고구려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오랑캐가 중국으로 들어가자 빈집털이를 한 것이다. 새로운 무역로 개설이다. 낙랑군(樂浪郡, 기원전 108년~기원후 313년)은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점령하고 세운 한사군 중 하나로, 현도군과 함께 최후까지 남은 변군(邊郡)이다. 대략 한반도 북부를 관할하였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중국의 변군으로 존속하였으며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약 420년에 걸쳐 한반도 및 만주 일대의 민족들과 대립하고 교류하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낙랑·대방의 요서이동과≪송서≫·≪남제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미천왕 1..

일본 근대화, 네덜란드 난학, 메이지 유신, 조선과 일본의 차이점

일본 근대화, 네덜란드 난학 일본 에도시대에 서양의 의학과 과학지식이 보급되었고, 이것은 하나의 학문영역으로정립되었다. 주로 네덜란드를 통해 전래되었다는 의미에서 난학(蘭學)이라 한다. 당시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쇄국정책을 취한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네덜란드에게는 제한적인 교역이 허용되었고, 이를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이 유입되었다. 일본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상인층을 중심으로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보급된 서양의 기술서적을 연구하는 학문활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이들을 난학자라고 하였다.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각성은 이들 난학자들에 의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앞서서 먼저 적극적으로 서양의 앞선 문물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선비(鮮卑), 북위, 탁발선비족, 수나라, 당나라, 동호, 튀르크계 민족, 돌궐, 탁발부(拓跋氏),

선비(鮮卑)는 남만주와 내몽골, 다싱안링 산맥 지역에 분포했던 동호 또는 튀르크계 민족이었으며, 유목·수렵·목축·농업 등을 영위하였다. 이후 일부는 한족에 동화되었다. 선비족의 언어가 어떤 계통에 속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되고 있으나 남아있는 언어로는 튀르크계 언어가 많다. 한자 기록에 의하면 동호의 일종으로 처음에는 흉노의 동쪽에 있어 그들에게 복속되어 있다가 흉노가 멸망한 후 자립하여 각지로 진출했다. 하지만 튀르크계 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할 때, 10만 명의 흉노 지배층을 선비족에 남겨 통솔하다 국가를 성립했다고 하여 지배층 일부를 튀르크계로 보기도 한다. 일단 선비족 자체가 혈연을 기반으로 한 하나의 부족이 아니라, 내몽골~서만주의 여러 부족이 선비 라는 이름 안에 느슨하게 연결된 초대형..

우다가와 요안(宇田川榕菴), 에도 말기의 양학자, 난학, 조어(造語) 사례, 산소(酸素), 수소(水素), 세포(細胞), coffee 일본어 珈琲(가배)

우다가와 요안(宇田川榕菴) 에도 말기의 양학자 이름은 榕. 종종 緑舫라고도 불렸다. 일본에 없던 식물학, 화학 등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 중 하나이다. 14세에 大垣藩医가의 양자가 되어 번의(藩医)가 되었다. 우다가와 집안은 난학의 명문가로 양아버지 宇田川玄真, 양할아버지 宇田川玄随도 난학자이며 요안의 양자인 宇田川興斎 역시도 난학자, 양학자로 이름을 알렸다. 이름은 요(榕) 또는 료쿠호(緑舫)라고도 일컬어졌다. 宇田川榕庵(우다가와 요안)이라고도 표기된다. 당시까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던 식물학(植物学), 화학(化学) 등을 처음으로 서적을 통하여 소개한 인물이다. 겐푸쿠(元服) (나라시대 이후 일본에서 성인[成人]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루어졌던 의식이다. 통과의례의 하나이다. 元[겐]은 '머리', 服[후쿠]..

임나일본부설, 가야

임나일본부설과 가야 가야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주장(남조선경영론)의 핵심이 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광복 이전에는 임나일본부의 입증을 위해서만 연구되었고 광복 이후 1980년대까지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는 안습의 시기를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학계를 지배했던 것은 초기의 김해의 금관국 중심의 연맹체가 금관국 멸망 이후 후기의 대가야 중심으로 이동하였다는 학설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자신감을 다소 회복한 학계에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결과, 이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발굴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굵직굵직한 발굴 몇 개가 마감될 때마다 학설이 생겼다가 뒤집어지는 양상이 있다. 대표적으로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일본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발굴되는 일본계 유물인 파형동기[205]가 ..

임나일본부설, 任那日本府説, みまなにほんふせつ, 임나(가야) 일본부 존재설, 일본 서기, 임나=가라국(금관가야)

임나일본부설, 任那日本府説, みまなにほんふせつ, 임나(가야) 일본부 존재설 임나=가라국(금관가야) 일본 서기 일본서기의 문제가 되는 기록들에 대해서는, 비록 이 책에서 과장이 되긴 했지만 '일본부' 기록의 원형이 된 어떤 왜인 위주의 기관이 6세기 전반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데는 현대 한일 학계에서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 기관의 성격은 '통치기구'가 아니라 ‘백제-가야의 여러 나라-신라-왜국’이란 고대의 국제 다자구도에서 일종의 교섭 용도, 그것도 왜왕과 왜국 정부의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일본의 고훈 시대에서 아스카 시대에 해당하는 서기 4세기-6세기 중엽 사이에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일본부(日本府)라는 통치기구를 세웠으며 이 지역을 속국, 제후국(..

후지무라 신이치, 일본 구석기 사기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고고학 유물을 조작한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자신이 미리 만든 유물을 발굴 예정 장소에 몰래 묻고 나중에 공식 발굴 작업을 통해서 찾아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후지무라의 유물 조작 사건은 일본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었으며 교과서에 실린 그의 업적을 변경하는 등 큰 홍역을 치러야 했다. 1972년에 후지무라는 고교 졸업 후 고고학을 독학하고 유물을 찾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화학회사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981년 미야기(宮城) 현 사사라기(座散亂木) 유적지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굴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3만 년 전의 유물이 없던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그의 발견에 크게 고무되었고 결국 그는 일본에 최초 인류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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