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주크 투르크
투르크족은 본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으로 하나의 민족을 지칭한다기보다는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로 일반적으로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분열된 여러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AD 6~8세기경 중국 북부의 몽골고원과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강대한 세력을 자랑했던 돌궐도 투르크족의 일종이라고 한다.
셀주크 투르크족은 AD 960년 경 투크르족의 일파인 오구즈 투르크에서 족장 셀주크가 이끄는 한 무리가 독립하면서 생겨났다. 셀주크는 자신의 일족을 이끌고 중앙아시아의 남쪽으로 이동하였으며 주로 이란지역을 장악한 사만왕조의 용병으로서 활약하여 부하라와 사마르칸드 사이의 영토를 얻었다. 이때 셀주크 투르크족이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으로 보인다. 셀주크가 죽은 후에 유목민족의 전통에 따라 부족은 네 아들인 미카엘과 아르슬란, 무샤, 요나흐에 의해 분할되는 데, 장남인 미카일이 일찍 죽으면서 미카일 세력은 다시 그 아들인 토그릴 베그과 차그리 베그 형제가 이끌게 되었다.
초대 술탄 토그릴 베그의 시대
사만왕조가 카라한 왕조와 가즈나 왕조에게 멸망하자 토그릴 베그는 숙부인 아르슬란과 함께 잠시 이란 동부와 중앙 아시아를 장악하고 있던 카라한 왕조 밑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AD 1025년 가즈나 왕조의 마흐무드에게 패배하면서 토그릴과 차그리는 화레즘으로 피신했다. 호라산으로 이동한 숙부 아르슬란이 마흐무드에게 밀려나자 AD 1028년부터 토그릴과 차그리는 호라산으로 이동하여 이듬해 메르브와 니샤푸르를 차지하였다. AD 1040년에 가즈나 왕조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마흐무드의 아들, 마수드의 군대가 호라산을 회복하고자 처들어왔으나 오히려 단단칸 전투에서 토그릴의 셀주크 투르크족이 대승을 거두면서 호라산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로 가즈나 왕조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셀주크 투르크족은 왕조의 기틀이 마련하였다.
토그릴은 형제인 차그리에게 호라산을 맡겨 가즈나 왕조의 재침공을 대비하는 한편 자신은 부와이 왕조가 분열된 틈을 타 이란고원으로 진격하여 AD 1040년~1044년 사이에 호라산, 라이, 하마단 등 카스피해 주변지역을 차지했고 이스파한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AD 1045년에는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진격하여 동로마 제국군을 하산 성채 아래에서 물리치고 만지케르트 요새까지 접근하였지만 겨울이 오자 결국 철수하였다.
AD 1055년 시아파인 부와이 왕조에게 억압받고 있던 아바스 왕조의 수니파 칼리프으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자 토그릴은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부와이 왕조를 물리치고 바그다드로 입성하였다. 토그릴은 칼리프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정식으로 인정받으면서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고 차그리의 딸을 칼리프와 결혼시켜 자신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토그릴은 아바스 왕조의 실권을 장악한 후 칼리프의 종교적인 권위만 인정하여 부와이 왕조에서 칼리프에게 근근히 유지되던 세속적인 권한을 모두 빼앗아 버렸고 칼리프를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시켰다.
한편 셀주크 왕조가 성립되자 투르크족 내부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시아파인 부와이 왕조의 잔존세력 중에서 같은 시아파의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재정지원과 조종을 받는 세력이 발생하였다. 결국 토그릴의 동모제인 이브라힘 이날이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의 지원과 조종을 받은 부와이 왕조 잔존세력이 바그다드의 투르크 용병대장 바사시리의 지휘하에 바그다드에 점령하고 칼리프를 인질로 삼았다. 토그릴은 차그리의 아들인 알프 아르슬란의 활약 덕분에 이브라힘의 반란을 손쉽게 진압하였고 AD 1060년 빼앗긴 바그다드를 탈환하였다. 내부반란을 평정한 토그릴은 칼리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수도를 라이로 옮기면서 셀주크왕조의 기반을 공고히하였지만 AD 1063년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투르크 기병과 궁기병 전술
궁기병 전술은 고대시대부터 유목민족들이 즐겨사용하던 전술로 뛰어난 기동력으로 적의 측후방에 나타나 원거리에서 화살을 퍼붇고 상대방이 접근해오면 퇴각하여 거리를 벌린 후 다시 화살을 쏘아대는 방식이다. 궁기병 전술은 상대보다 월등한 기마술과 궁술 실력이 있어야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으며 특히 달아나는 도중에도 뒤돌아서 화살을 쏘는 배사, 일명 파르티안 샷에도 능해야 돌진해오는 적 기병을 떨쳐내고 거리를 벌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유럽의 기병들이 주로 접근전을 위해 중무장을 하는 쪽으로 발전한 반면에 유목민족들은 빠른 이동속도와 활쏘기에 편한 경무장을 선호하게 되었다. 유목민족의 궁기병 전술은 스키타이족과 훈족, 마자르족 등에 의해서 유럽에도 소개되어 큰 위협으로 작용하였다.
궁기병 전술은 그 위력에도 불구하고 경무장으로 인해 근접전이 벌어지면 매우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또한 궁기병 전술이 그 효과를 충분하게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병들의 기마술과 궁술에 대한 오랜 훈련이 필요하였고 전투시 적절하게 공격과 퇴각을 반복하여 진형을 유지시키는 조직력이 매우 중요하였다. 하지만 분열하기 쉬운 유목민족의 특성상 위대한 지도자가 출현하지 않는 한 조직적으로 전쟁을 벌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궁기병에게 안정적인 전투력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이 때문에 뛰어난 궁기병을 보유했던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조차도 국가체제를 정비한 이후에는 중기병을 선호하였다. 궁기병 전술은 소규모로 약탈행위를 벌이는 유목민에 의해서만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궁기병 전술이 다시 주목받게 된 계기는 등자의 발명이었다. 등자의 등장으로 마상에서 활을 쏘는 것이 훨씬 간편해지면서 궁기병 전술의 위력이 증가한 것이다. 이에 따라 유목민족의 전투능력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슬람 세계에서 용병으로서의 가치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특히 투르크족은 타던 투르크멘 종의 말은 가볍고 신속하면서도 튼튼하고 다루기 편했기 때문에 많은 전투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유입되기 시작한 투르크 기병은 이슬람 군대의 중추를 담당하기 시작했으며 셀주크 왕조 창건 이후에는 이슬람 세계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제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 시대
술탄 즉위와 동로마 제국 공격
AD 1063년 토그릴이 후사없이 죽자 차그리의 아들 알프 아르슬란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알프 아르슬란은 AD 1061년 아버지인 차그리가 죽자 아버지의 영지인 호라산을 이어받았었다. 토그릴이 죽은 이후에 술탄의 지위를 토그릴의 양자이자 자신의 형제인 슐레이만이 이어받자 삼촌인 쿠탈미쉬와 함께 이에 반발하였다. 알프 아르슬란은 이후 명재상으로 활약하게 되는 니잠 알 물크의 중재로 슐레이만을 설득하여 자신의 신하로 맞이하였고 마침내 AD 1064년 쿠탈미쉬와의 권력쟁탈전에서 최종승리를 거뒀다. 쿠탈미쉬는 일족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로 도망갔는데 이 세력은 훗날 룸 술탄국을 건국하게 된다. 술탄이 된 알프 아르슬란은 내부통치를 니잠 알 물크에게 맡기고 대외적인 팽창정책에 주력했다. 또한 칼리프 자리와 둘러싼 갈등을 피하기 위해 평생 바그다드에 들어가지 않았다.
알프 아르슬란은 동쪽에 대해서는 산악지형으로 공략이 어려운 동부의 가즈나 왕조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트랜스옥사니아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카라한 왕조에 대해서는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알프 아르슬란의 주된 관심사는 제국의 서쪽에 있었다. 알프 아르슬란으로서는 아바스 왕조의 수니파 칼리프의 보호자로서 그리스도교인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공격하는 것이 곧 이슬람교도들의 지지를 받는 길이었다. AD 1064년 쿠르드족과 투르크족 동맹부족들을 아르메니아로 진출시키켰는데 투르크족들은 AD 1064년에 아르메니아의 수도였던 아니를 점령하고 AD 1067년에 투르크족은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까지 진출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0세가 아르메니아 지방의 민병대를 해체하는 무능한 정책을 펼친 덕분이었다.
알프 아르슬란이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철수하여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차지하고 있던 시리아를 공략하기 위해 알레포를 공략하고 있는 사이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로마누스 4세가 새로 즉위하였다. 로마누스 4세는 군대를 빠르게 정비하고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하여 3번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AD 1071년에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셀주크 왕조의 알프 아르슬란에게 점령당한 만지케르트 요새를 수복하기 위해 재차 원정에 나섰다. 알프 아르슬란도 신속하게 군대를 돌리면서 양군은 만지케르트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로마누스 4세는 동로마 제국의 서쪽방면 방위을 담당하던 병력을 대거동원하였기에 약 7만명의 대군을 이끌수 있었다. 다만 동로마 제국군은 테마제도가 붕괴되면서 예전의 막강한 위력의 군대가 아니라 돈만 주면 참전하는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충성도와 훈련도가 낮은 편이었다. 동로마 제국군에 참전한 용병으로는 서쪽의 프랑크족과 노르만족 용병 뿐만 아니라 투르크족과 불가르족도 일부 용병으로 참가하고 있었고 동방에서는 안티오키아 보병대와 아르메니아 부대가 종군하고 있었으며 황제 친위대로 유명한 바랑기안 친위대도 일부 참전하였다.
로마누스 4세는 대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강행군을 감행하여 AD 1071년 7월에 테오도시오폴리스에 도달했다. 동로마 제국군 내부에서 이 곳을 요새화하여 셀주크군을 기다리자라는 주장과 셀주크군이 준비를 마치기 전에 진격하여 알프 아르슬란을 사로잡자던 주장이 대립하였고 고심 끝에 로마누스 4세는 계속 진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로마누스 4세는 아직 알프 아르슬란의 군대가 멀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병력을 나누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였다. 요셉 타카네이오테스 장군에게 보유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3만여명의 병력을 맡겨 클리앗으로 향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셀주크군은 이미 3만의 기병과 함께 아르메니아로 돌아와 있었으며 첩자들을 적극적으로 풀어 동로마 제국군의 움직임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비록 비자니움 제국 측에는 이후 타카네이오테스 장군에 대한 기록이 남겨있지 않지만 이슬람 측 기록에 의하면 타카네이오테스의 군대가 셀주크군의 공격을 받고 도망쳤다고 한다. 실상이 어떠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로마누스 4세의 동로마 제국군은 이제 절반으로 줄어들어 셀주크의 알프 아르슬란의 군대와 병력수에서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로마누스 4세는 나머지 절반의 부대는 이끌고 수비병력이 없던 만지케르트를 손쉽게 점령했다. 뒤늦게 도착한 셀주크군의 궁병대가 기습공격을 하자 아르메니아의 장군 바실라세스는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응전했다. 이는 바실라세스가 셀주크군의 전군이 오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결국 모두 전멸당하고 바실라세스 자신도 포로로 잡혔다. 로마누스 4세는 바실라세스 휘하의 나머지 병력을 출진시켰으나 신속하게 이동해 온 셀주크군의 공격에 퇴각해야만 했다. 알프 아르슬란이 휴전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로마누스 4세는 이곳에서 대승을 거두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동로마 제국의 군사적 위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에 이 제의를 거절하였다. 이제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로마누스 4세는 부대의 진형을 편성하였다. 좌익은 브리에니오스에게 맡겼고 우익은 테오도레 알리아테스에게 맡겼으며 중앙은 황제 본인 직접 지휘하였는데, 다만 자신의 정치적인 라이벌인 안드로니쿠스 두카스에게 잔여병력을 이끌고 배후를 맡도록 하였다는 점이 불안요소였다. 이에 맞선 알프 아르슬란의 셀주크군은 초승달 모양의 진형을 조직하였고 알프 아르슬란 자신은 안전한 거리에서 전황 전체를 살펴보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동로마 제국군은 돌진하기 시작했고 셀주크군은 초승달 진형을 유지한 채 중앙이 뒤로 물러서면서 좌우익의 궁병이 동로마 제국군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했다. 비록 동로마 제국군은 화살비를 뚫고 셀주크 군의 진영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좌익과 우익은 셀주크 궁병에게 큰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여기에 셀주크의 경기병들이 전통적인 치고 빠지기 전술로 동로마 제국군을 괴롭혔다. 결국 동로마 제국군은 거리를 벌리는 셀주크군을 따라잡지 못했고 밤이 되자 로마누스 4세는 작전상 후퇴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때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혼란이 발생하였다. 동로마 제국군의 우익이 명령을 잘못 이해하여 도주하기 시작했고 퇴각하는 로마누스 4세를 보호해야 할 동로마 제국군의 배후병력을 이끄는 두카스마저 고의로 명령을 무시하고 만지케르트 캠프로 퇴각해 버린 것이다. 잠시 버티던 동로마 제국군의 좌익마저 퇴각해버리면서 로마누스 4세의 중앙군은 바랑기안 친위대와 함께 셀주크군에게 포위당하게 됐다. 결국 로마누스 4세의 부대는 궤멸당했으며 로마누스 4세는 사로잡혔다. 알프 아르슬란은 비록 대승을 거두고 로마누스 4세를 포로로 잡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몸값을 받고 로마누스 4세를 곧 풀어줬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으로 돌아간 로마누스 4세는 권력을 장악한 두카스 가문에게 패배하여 두 눈이 먼 채로 유배되었다가 죽고만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알프 아르슬란은 동로마 제국군을 격파하고 황제를 사로잡는 대승을 거뒀으나 실제로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이 당한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로마누스 4세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휘관이 살아남았고 병력 대부분도 도주하는 데 성공했으며 아나톨리아 반도의 핵심부인 안티오키아, 에데사, 히에라폴리스, 만지케르트가 모두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에 대한 방어체계가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이후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 내전이 벌어지면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방어체계는 재편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말았다. 결국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10년동안 투르크족 일파의 침입이 계속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 반도를 상실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으로서는 풍족한 곡창지대이자 군대의 군마 보급지였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평야를 잃게 되었기 때문에 국력이 크게 쇄락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때문에 많은 역사가들이 만지케르트 전투를 동로마 제국의 멸망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시작되는 십자군 원정의 간접적인 원인으로도 작용하게 된다.
죽음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알프 아르슬란은 동쪽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셀주크 투르크족의 선조들의 발상지인 투르케스탄으로 진군하여 옥수스강에 다다랐다. 그러나 AD 1072년에 알프 아르슬란은 카라한 왕조의 국경 요새를 공격하던 중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 국경요새를 수비하던 유수프를 포로로 잡았는데 유수프는 숨겨둔 단검으로 알프 아르슬란을 공격하였다. 궁술에 자신이 있던 알프 아르슬란은 호위병을 물리치고 친히 활을 쏘았으나 발이 미끄러지면서 화살을 빗나가 결국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말았다. 부상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알프 아르슬란은 당시 13세였던 어린 아들 말리크 샤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재상인 니잠 알 물크에게 후견인으로서 자신의 제국을 부탁하였다.
제3대 술탄 말리크 샤 1세 시대
AD 1072년 알프 아르슬란이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아들인 말리크 샤 1세가 셀주크 왕조의 새로운 술탄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술탄이 된 말리크 샤 1세는 아버지 시절부터 명재상으로 유명하였던 니잠 알 물크의 후견하에 제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술탄이 즉위하자 셀주크 왕조의 고질적인 왕위쟁탈전이 일어났다. 숙부인 카부르트 베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카부르트 베이와의 내전으로 정신없는 사이에 서쪽의 서 카라한 왕조와 북인도의 가즈나 왕조도 국경을 넘어오면서 말리크 샤 1세의 치세 초기는 극히 불안해졌다. 그러나 말리크 샤 1세는 니잠 알 물크의 도움을 받아 신속하게 카부르트 베이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이어서 가즈나 왕조에 압력을 가하여 조공을 받아내면서 종주권을 재차 확인받았으며 서 카라한 왕조로 처들어가 수도인 사마르칸드까지 진격하여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등 제국을 빠르게 안정시켰다.
이후 말리크 샤 1세는 아버지 알프 아르슬란으로부터 이어받은 셀주크 왕조의 영토를 더욱 확장시키고자 하였는데, 메소포타미아의 위쪽부분과 아제르바이잔의 옛 예속국을 제압하였고 파티마 왕조로부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빼앗았으며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와 메디나, 예멘 등에 대해서도 지배력을 하였다. 말리크 샤 1세에 의해 셀주크 제국은 아바스 왕조 초기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게 되었다.
영토가 확대됨과 함께 말리크 샤 1세는 계속된 반란에 시달렸다. AD 1084년에는 모술의 영주 무슬림이 파티마 왕조의 원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켜 알레포를 점령하자 말리크 샤 1세는 직접 토벌군을 이끌고 가 반란을 집압하였고, 이어 AD 1086년에도 호라산의 영주이자 말리크 샤 1세의 동생인 테키쉬가 반란을 일으켜 마르브를 공격하자 이번에도 직접 토벌하였다. 같은 해에 아나톨리아 반도로 도망간 쿠탈미쉬 세력을 이끌던 슐레이만이 에데사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룸 술탄이라 칭하고 안티오키아와 알레포를 공격하자 이를 토벌하여 안티오키아와 알레포를 수복하고 에데사까지 점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셀주크 왕조의 영토를 안정시킨 말리크 샤 1세는 AD 1087년에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왕관을 수여받아 이슬람 세계의 "동방과 서방의 술탄"의 칭호를 얻었고 명실상부한 이슬람 세계의 최고 지배자가 되었다.
니잠 알 물크와의 불화와 죽음
셀주크 왕조의 알프 아르슬란과 말리크 샤 1세의 대외팽창정책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재상인 니잠 알 물크의 안정적인 내정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니잠 알 물크는 처음에 가즈나 왕조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나 AD 1059년 호라산 지방의 최고 행정관으로 등용되었고 AD 1063년부터 셀주크 가문을 받들기 시작하였는데 알프 아르슬란이 술탄이 되자 셀주크 왕조의 재상(와지르)이 되었다. 니잠 알 물크는 알프 아르슬란과 그 뒤를 이은 말리크 샤 1세의 2대를 섬기면서 이들이 대외팽창에 힘쓸 수 있도록 재상으로서 내정에 힘써 셀주크 제국의 행정체계 구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공으로 "국가의 질서"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바그다드에 일종의 이슬람 신학대학인 마드라사 조직을 형성하여 행정관료와 신학자에게 통일된 교육을 시켰으며 말리크 샤 1세를 위해 "정치의 서"라는 명저를 남겼다.
이렇게 셀주크 왕조의 지배에 지대한 공헌을 한 니잠 알 물크였지만 말년의 말리크 샤 1세와 불화가 발생하면서 셀주크 왕조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말리크 샤 1세가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두번째 왕비의 어린 아들인 마흐무드를 후계자로 내세울 마음을 먹자 니잠 알 물크가 여기에 강력하게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술탄과 재상의 불편한 관계가 지속된 끝에 니잠 알 물크는 아사신이라는 암살교단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아사신은 자신들의 적을 살해하는 것을 종교적인 의무로 여기고 있는 광신도 집단으로 셀주크 왕조에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니잠 알 물크가 죽은 지 얼마안되어서 말리크 샤 1세 또한 의문에 죽음을 당했다. 결국 셀주크 왕조는 마흐무드가 잇게 되었지만 말리크 샤 1세의 다른 아들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셀주크 제국은 극심한 분열에 시달리게 된다.
셀주크 왕조의 군사제도
셀주크 왕조는 바그다드를 점령한 이후 주요 방어거점에는 유능한 장군을 파견하였지만 그 외에는 셀주크 왕조 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한 지방정권들의 군사편제는 바꾸지 않은 채 이크타 제도로 바꿔 순수하게 군사적인 임무만 수행하도록 하였다. 지방 총독들은 중앙정부에 일정하게 공물을 바치고 전쟁시 병력을 지원하는 대가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셀주크 왕조의 군대는 바그다드의 술탄 근위대와 고용된 용병을 중심으로 한 중앙군과 지방 총독들이 지원한 지방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술탄의 근위대는 주로 투르크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투르드, 비잔틴, 아나톨리아, 슬라브, 그루지야 노예 등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기병이었으며 '아스카르(Askar)'라고 불렸다. 지방 총독들도 독자적인 아스카르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충분한 아스카르를 보유하지 못한 총독들은 주로 북아프리카와 쿠르디스탄의 이주자로 이루어진 민병으로 군대를 구성하였다. 이외에도 야전군에는 참여하지 않고 부여받은 토지만을 방어하는 영역 예비군이 있었다.
아스카르는 연대단위로 편성되었으나 그 정확한 편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제1차 십자군 전쟁 때 시리아의 대표적인 도시였던 알레포와 다마스쿠스가 각각 2천명의 아스카르를 보유했다는 사실에서 간접적으로 그 규모를 유추할 수가 있다. 또한 알레포의 강력한 적이었던 모술에서는 안티오키아 점령시 1만5천명의 야전군을 동원했다는 사실에서 지방정권 간에 필요시 아스카르를 서로 지원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전투에서 아스카르가 주력으로 사용되었지만 모집병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영역 예비군의 경우에서 시리아에서 초기 십자군 시대까지 남아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민병과 영역예비군들은 주로 창과 검으로 무장한 채 말을 탔고, 원거리 공격을 위해 투르크인 이주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민병과 영역예비군 모두 무기와 말은 본인부담이었지만 병기공장에 집단으로 주문하기도 했다.
이렇게 셀주크 왕조 시대의 군대는 정예 아스카르는 물론 민병과 영역예비군까지 모두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전쟁에서 보병도 빠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보병 대부분은 시골에서 징집되어 왔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열정은 가득찼지만 훈련과 무장은 형편없어 군사적인 가치가 적은 편이었다. 다만 알레포와 같은 대도시의 시민들의 경우 공병과 지뢰공병으로 크게 활약하였는데 요새와 진지 수비와 공성전에 큰 활약을 보여줬다.
셀주크 제국의 분열
지방의 아미르 정권과 아타베그 정권
아바스 왕조에서는 왕족이나 귀족이 지방을 다스렸으며 이들은 '아미르(Emir)'라고 불렸다. 본래 아미르는 무슬림 집단 수장의 칭호였으나 점차 원정군의 사령관과 점령지의 총독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AD 10세기에 이르러 부와이 왕조가 아바스 왕조로부터 실권을 빼앗았을 때 칼리프로부터 받은 칭호가 바로 '대(大) 아미르'였다. 셀주크 왕조가 부와이 왕조를 대신하여 아바스 왕조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아미르란 칭호 대신에 '술탄' 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술탄의 원래의 뜻은 '도덕적 또는 정신적 권위'이었으나 나중에는 '칼리프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특정한 지역을 지배하는 무슬림 통치자'를 뜻하게 되었다. 셀주크 왕조 이후로는 이슬람 세계에서 세습 군주제로 통치하는 지역의 군주를 부르는 말로 사용되었고 아미르는 지방총독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게 되었다.
부와이 왕조 시절부터 지방 세금제도의 일환으로 '이크타(Iqta)'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크타 제도는 왕족이나 고위관료에게 급료 대신 봉토를 할당하는 방식이었는데, 봉토를 지급받은 사람들은 중앙정부에 일정부분의 세금을 내고 남은 재원을 이용하여 봉토를 통치할 수 있었다. 셀주크 왕조에서는 이크타 제도와 아미르 제도를 결합시키면서 지방분권화가 시작되었다. 아미르는 1년에 1번 중앙정부에 공물을 바치는 의무와 중앙정부 요청시 자비로 병력을 지원해야하는 의무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통치지방의 재원을 이용하여 자체적으로 군사양성하고 행정조직을 유지할 수 있어 사실상 반독립적으로 영지를 통치할 수 있었다. 아미르의 지위는 세습되었기 때문에 서유럽의 봉건제와 유사한 형태가 되었으며 아미르가 통치하는 영토는 '에미레이트(emirate)'라고 불렸다.
셀주크 왕조에서 아미르는 대부분 왕족으로 임명되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아미르의 지위를 미성년의 왕족이 계승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들 왕족이 무사히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성년이 될 때까지 유능한 무장을 후견인으로 지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타베그(atabeg)'라고 불렸으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알프 아르슬란 사후 말리크 샤 1세를 도운 니잠 알 물크이었다. 그러나 성실하게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던 니잠 알 물크와 달리 많은 아타베그들은 미성년 왕족이 성장할 때까지 섭정을 맡아 대리통치하는 것을 기회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타베그의 권력이 대대로 세습되기에 이르렀는데, 이 때문에 많은 왕족 아미르들이 명목상 군주로 전락되었다. 이렇게 하여 생긴 지방의 세습정권을 아타베그 정권이라고 부른다.
중앙정부의 왕위쟁탈전과 셀주크 왕조의 분열
셀주크 제국은 기본적으로 부족 연맹체로 출발하였기에 분열의 가능성이 상존하였다. 이는 아버지의 재산을 자식들이 나누어 이어받는 유목민의 전통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셀주크 왕조의 위대한 술탄으로 불리는 알프 아르슬란과 말리크 샤 1세 역시 모두 재위 초기에 친족의 반란을 경험해야만 했다. 비록 알프 아르슬란과 말리크 샤 1세 모두 중앙의 강력한 군사력과 재상 니잠 알 물크의 효율적인 통치력에 힘입어 반란을 물리치고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지만 말리크 샤 1세 사후 벌어진 술탄의 자리 쟁탈전은 조기에 종식되지 않은채 장기화되었다. 말리크 샤 1세 사후 마흐무드가 새로운 술탄으로 선포된 것에 대하여 나머지 세 아들인 바르키야루크, 메흐메드(혹은 무하마드), 아흐메드 산자르가 모두 이에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흐무드의 통치력은 수도 이스파한에 한정되었고 바르키야루크는 바그다드를, 메흐메드는 아제르바이잔을, 아흐메드 산자르는 호라산을 통치하였다.
중앙정부가 왕자들간의 권력다툼으로 혼란이 거듭되자 지방정권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하기 시작했다. 많은 지방의 아타베그들이 중앙정부에 대한 공물납부를 거부하였고 급기야는 명목상 군주로 내세우던 셀주크 왕족마저 폐위시키고 스스로 자립하면서 셀주크 제국은 극심하게 분열되고 만다.
셀주크 왕조의 지방정권들은 중앙정부의 명목상 종주권만은 인정하였기에 역사적으로는 이란과 이라크 지방의 술탄왕조를 대(大) 셀주크(Great Seljuk) 왕조라고 부르고 나머지 지방정권을 소(小) 셀주크 왕조로 구분하여 부른다. 소 셀주크 왕조의 대표적인 예가 아나톨리아 반도의 룸 술탄국와 시리아 셀주크이며 그 밖에 케르만 셀주크, 이라크 셀주크 등이 있다.
룸 술탄국은 예전에 알프 아르슬란과의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하여 도망쳤던 쿠탈미쉬의 후손인 킬리지 아르슬란 1세에 의해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세워진 지방정권으로 룸 술탄국("룸"은 아랍어로 로마를 가리키는 말로 바로 동로마 제국을 말한다) 혹은 아나톨 셀주크라고 불린다. 시리아 셀주크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영주로 한 때 말리크 샤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했던 투투쉬 1세가 세력을 회복하고 시리아에 세운 지방정권으로 투투쉬 1세 사후에 다시 분열되어 그 아들인 라드완과 두카크 각각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지배하게 된다. 그 밖에 모술, 에데사, 안티오키아를 지배하던 장군들이 중앙정부로부터 이탈하였고 많은 투르크족에 의해 아나톨리아 반도가 나뉘어졌다.
여러 소 셀주크 왕조들은 서로 영토분쟁을 벌이며 끊임없이 반목하였기에 셀주크 왕조의 힘은 크게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셀주크 왕조의 분열은 훗날 이어지는 서유럽의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예상밖의 큰 성과를 거두는 큰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대 셀주크 왕조는 말리크 샤 1세의 네 아들들이 왕위쟁탈전을 계속 벌어진 끝에 AD 1157년 제8대 술탄 산자르를 마지막으로 멸망하고 말았고 시리아의 셀주크 왕조도 이집트에서 아야유브 왕조를 세우게 되는 살라흐 앗 딘에게 무너지고 만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룸 술탄국만이 유럽의 십자군에 맞서며 존속되었지만 룸 술탄국도 결국 13세기의 몽골의 침입에는 무너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