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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프랑스, 카페왕조, 필리프 2세

Jobs 9 2021. 5. 1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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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페왕조의 성립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경건왕 루크비히 1세 사후인 AD 843년에 베르됭 조약에 의해 3등분되어 중프랑크와 황제 지위는 장남인 로타르가 계승하였고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각각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카를이 차지하였다. 중프랑크 왕국은 로타르 사후에 다시 로트링겐, 부르군트, 이탈리아로 분할되었으며 AD 869년 로트링겐의 국왕 로타르 2세가 죽자 로트링겐을 두고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가 격돌한 끝에 AD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동프랑크와 서프랑크가 각각 동서로 분할하여 차지하였다.

 

AD 879년 서프랑크도 대머리왕 카를의 손자인 루이 3세와 샤를로망 대에 이르러 분할통치되었으나 두 사람이 차례로 죽은 이후에 왕위가 동프랑크와 이탈리아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던 뚱보왕 카를 3세에게 넘어가면서 프랑크 왕국이 일시적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카를 3세가 간질을 자주 앓고 있어 정사를 제대로 돌보기가 힘들었고 결정적으로 침략한 바이킹을 돈으로 매수해서 돌려보낸 사실이 발각되면서 많은 제후와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동프랑크와 이탈리아의 왕위 및 제위는 조카 아르놀프에게 넘어갔고 서프랑크의 왕위는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외손자이자 파리 백작인 외드에게 이어지면서 프랑크 왕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서프랑크의 왕위가 카롤링거 왕가의 직계가 아닌 파리백작 외드에게 이어지자 왕위를 둘러싼 양 가문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대머리왕 카를의 또 다른 손자인 단순왕 샤를 3세가 랭스 대주교 풀크와 몇몇 귀족들의 지원을 받으로 공동왕으로 추대되었고 외드가 죽은 이후에는 단독왕이 되었다. 이에 외드의 형제인 로베르 1세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았고 AD 923년 수아송 전투에서 샤를 3세를 포로로 붙잡았으나 로베르 1세도 전사하였기에 왕위는 로베르 1세의 사위인 루돌프에게 이어졌다. AD 936년 루돌프가 죽자 이번에는 로베르 1세의 아들 공작 위그가 루돌프의 아들의 왕위 계승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던 샤를 3세의 아들 루이 4세를 지지하였다. 결국 귀국한 루이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카롤링거 왕조가 다시 이어질 수 있었지만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는 공작 위그 때문에 루이 4세는 통치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AD 954년 루이 4세의 뒤를 이어 13살의 로테르가 즉위한 뒤에도 여전히 왕국의 실권은 위그가 완전히 장악하였지만 위그가 왕위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영지 확대에만 힘을 썼기 때문에 AD 956년 부르고뉴 공국을 손에 넣는데 성공하고 그 해에 죽었다.

 

위그의 세력은 그 아들인 위그 카페가 계승하였고 AD 987년 로테르의 아들 무위왕 루이 5세가 후사없이 죽자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서프랑크의 왕이 되었다. 위그 카페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들 로베르를 공동왕으로 임명하고 대관식을 거행하였는데 위그 카페 자신은 바르셀로나를 침입한 무어인(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한 북아프리카 이슬람 세력)에 대한 원정을 대비한 것이라고 핑계되었지만 사실은 아직 불안한 자신의 세습기반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이후로 즉위시마다 후계자를 결정하고 대관식을 거행하는 관례가 정착되었고 그 덕분에 위그 카페의 혈통으로 원활하게 왕위가 계승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새로운 왕조를 카페왕조라고 부르며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서프랑크 왕국을 프랑스로 부르기 시작한다.

 

 

프랑스 카페왕조와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의 대립

 

위그 카페가 비록 왕위에 올랐지만 프랑스는 느슨한 귀족연합체 형태였기 때문에 위그 카페의 권한은 사실상 파리와 오를레앙에만 머무르는 형편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가 AD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잉글랜드 왕으로 노르만 왕조를 연 것이었는데 잉글랜드 왕이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게 되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은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왕과 동등한 신분이었지만 프랑스 내부적으로는 프랑스 왕의 봉신이 되는 모순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 귀족 중 하나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프랑스 내부귀족들과 연합하여 끊임없이 카페왕조를 견제하였다. 특히 카페왕조의 5대왕 루이 6세는 잉글랜드와 연합하여 카페왕조의 영향력을 벗어나려는 봉건 귀족들과의 항쟁으로 재위기간 대부분을 소비해야 했다.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 대에 이르러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영토는 더욱 커졌다. 당초 루이 7세는 프랑스 남서부 지방에 위치한 아키텐의 상속녀인 엘레아노르와 결혼하여 아키텐을 병합하였으나 엘레아노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이혼하였다. 엘레아노르는 아키텐을 돌려받은 후에 AD 1152년 프랑스 서부를 지배하던 앙주 백작의 계승자인 앙리 플랜태저넷과 재혼하였고 2년후에 앙리가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가 되어 플랜태저넷 왕조를 창건하면서 아키텐과 앙주는 잉글랜드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하여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프랑스내 영토가 카페왕조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보다 커지게 되었고 이를 둘러싼 양국 사이의 갈등은 더욱 커져만 갔다.

 

 

존엄왕 필리프 2세 시대

 

잉글랜드 리처드 1세와의 협력과 대립

 

루이 7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필리프 2세의 당면한 가장 큰 문제도 역시 잉글랜드 헨리 2세와의 항쟁이었다. 필리프 2세는 루이 7세가 중병이 걸리자 공동왕으로 즉위하여 이미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외숙인 상파뉴 백작이 잉글랜드의 헨리 2세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필리프 2세는 외교적으로 헨리 2세와 협약을 맺어 상파뉴 백작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킨 끝에 반란을 토벌하기는 했지만 필리프 2세가 프랑스에서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잉글랜드 문제를 처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와 아들들 간의 불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잉글랜드를 분열시키기 시작했다.

 

프랑스 최초의 위대한 왕, 필리프 2세

 

당시 헨리 2세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윌리엄이 태어난 지 3년만에 죽어서 살아남은 아들은 4명 뿐이었다. 헨리 2세는 차남 젊은 헨리를 공동왕으로 임명하였으나 실권은 여전히 자신이 장악하였고  3남 리처드에게는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을 부여하였으며 4남 제프리와 막내 존에게는 각각 브르타뉴와 아일랜드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헨리 2세가 막내 존을 편애하였기에 나머지 세 아들들과 불화가 심했는데 이 때문에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는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윌리엄의 지원을 받는 봉건 영주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에 아들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헨리 2세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 아들들을 사면하긴 하였으나 불편한 관계는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AD 1181년에는 헨리 2세의 아들들끼리 분쟁이 발생하였다. 리처드의 영지인 아키텐에서 가혹한 통치에 반발한 가스코뉴 사람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젊은 헨리와 제프리가 이에 가세하여 리처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리처드는 아버지 헨리 2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반란을 막아내던 중 AD 1183년에 젊은 헨리가 급사하는 바람에 반란이 토벌되었다. 제프리 마저 AD 1186년에 사망하자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는 모두 리처드의 차지가 되었고 리처드는 유력한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헨리 2세가 리처드의 왕위계승의 조건으로 리처드의 아키텐 영지를 존에게 넘겨주려는 계획을 세우자 이에 반대하여 프랑스왕 필리프 2세에게 프랑스내 잉글랜드 전 영토의 영주로서 봉신서약을 하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헨리 2세를 압박하였다. 이때 리처드는 막내동생 존마저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는데 사랑하는 막내아들 존 마저 리처드 편에 서자 절망한 헨리 2세는 AD 1189년에 사망하였고 리처드는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2대 왕으로 즉위하여 리처드 1세가 되었다. 그가 바로 제3차 십자군으로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이다.

 

필리프 2세의 도움으로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리처드 1세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기에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대립하기 보다는 협력관계를 유지하기로 한다. 때마침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 살라흐 앗 딘에게 성지 예루살렘이 함락당하자 교황 교황 그레고리오 8세가 성지 재탈환을 목표로 제3차 십자군 결성을 호소하는 것을 기회로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함께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한다. 하지만 현실주의자였던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달리 성지탈환에 대한 열의가 높지 않아 팔레스타인 지방 북부 항구도시인 아크레를 탈환하고 이를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세력에게 돌려준 이후에는 병을 핑계로 귀국하였다.

 

AD 1191년 필리프 2세는 프랑스에 돌아온 후에 리처드 1세가 성지탈환에 매진하고 있는 사이에 계략을 꾸며 리처드 1세의 동생 존을 충동질하여 왕위를 찬탈하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을 탈환을 결국 포기하고 살라흐 앗 딘과 휴전협약을 맺은채 귀국하였으나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 불화가 발생한 신성로마제국에게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기회를 얻은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연금기간을 늘리도록 종용하는 외교적 활동을 통해 존의 찬탈을 지원하면서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AD 1194년 리처드 1세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예상보다 빨리 석방되었고 곧바로 잉글랜드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은 뒤에 프랑스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전투에 능했던 리처드 1세에게 필리프 2세는 AD 1198년까지 숱한 패배를 겪으며 위기에 몰렸으나 AD 1198년 리처드 1세가 아키텐에서 벌어진 브르타뉴 공작 아서와의 전투 도중에 전사하는 행운을 얻었다. 이제 필리프 2세의 상대는 리처드 1세보다 능력이 뒤떨어지는 존이 되었다.

 

 

프랑스내 잉글랜드 영토 정복

 

필리프 2세는 아직 존이 왕으로서 지위가 탄탄하지 못한 점을 이용하여 협상을 시작했다. 리처드 1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차기 왕위의 유력한 후보는 동생인 존이 되었지만 브르타뉴의 아서 또한 리처드 1세의 동생이자 존의 형인 제프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AD 1200년에 존은 필리프 2세와 협약을 맺어 자신을 지지해주는 조건으로 에브뢰와 노르망디를 할양했다. 또한 그의 조카를 필리프 2세의 아들(훗날 루이 8세)와 결혼시키며 지참금으로 이수됭과 그라세를 주기로 동의했으며 베리와 오베르뉴에 대한 종주권도 완전히 포기했다. 

 

새로운 잉글랜드 왕으로 존을 지원하면서 상당한 이익을 얻었지만 필리프 2세의 야심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존이 아키텐의 한 지방인 푸아투의 뤼지냥 가문과 분쟁을 일으키자 필리프 2세는 프랑스의 군주로서 존에게 출두를 명령하였고 당연히 존이 이에 응하지 않자 존이 프랑스 내에서 소유하고 있던 봉토를 몰수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 지방을 침략하여 아르케를 포위하였지만 자신을 지원하던 브르타뉴의 아서가 존에게 생포당하자 별다른 성과없이 파리로 귀환해야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필리프 2세는 포기하지 않고 AD 1203년에 노르망디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여 AD 1204년 3월에 샤토가야르를 함락하고 같은 해 6월에는 노르망디의 수도인 루앙을 점령하였으며 투렌 지방의 멘까지 차지하여 잉글랜드의 앙주지방 지배를 종식시켰다. AD 1206년에 2년간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AD 1208년 필리프 2세는 휴전협정이 종료되자마자 전쟁을 재개하였고 프랑스내 잉글랜드 영토를 대부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 잉글랜드는 생통주와 기옌 및 가스코뉴와 함께 푸아투 지방의 남서부 일부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필리프 2세는 AD 121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가 켄터베리 대주교 선임문제로 존과 대립한 끝에 파문하자 이 틈을 타 잉글랜드로 진격하여 자신의 아들 루이를 잉글랜드 왕으로 만들려는 계획마저 세웠으나 존이 교황에게 굴복하자 계획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존이 복수를 위해 신성로마제국, 플랑드르 백작, 불로뉴 백작과 동맹을 맺고 AD 1214년에 프랑스로 침공하였으나 그 해 7월 라로슈오무안 전투에서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가 대승을 거둔 데에 이어 부빈전투마저 프랑스의 대승으로 끝나면서 잉글랜드군은 별다른 성과없이 퇴각하고 말았다. 결국 프랑스 내 대부분의 영토를 잃은 존은 실지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얻었으며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지나친 과세를 부여하다 귀족들의 반란을 겪고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대헌장(마그나카르타)'을 승인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잉글랜드를 물리치고 프랑스 내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하게 된 필리프 2세는 알비 십자군을 기회로 프랑스 남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국왕대관 제도를 확립하였으며 파리에 새로운 성벽을 축조하여 프랑스 수도로서의 권위를 세우는 등 카페왕조의 왕권을 신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필리프 2세는 존엄왕으로 불리며 프랑스 최초의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게 된다.

 

 

성왕 루이 9세 시대

 

AD 1226년 재위에 오른 루이 9세 대에 이르러 프랑스가 서유럽의 중심이 되었다. 루이 9세는 카페왕조의 역대 왕령을 계승하고 봉건영주 봉토에 국왕직속의 관료를 두어 국가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중세 프랑스의 중앙집권 왕정을 완성하였다. 대외적으로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와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어 지리한 싸움을 종식시켰고 여러 국왕과 제후 사이의 평화수립에 노력하였다. 비록 참여한 제7차 십자군 원정(AD 1248년 ~ AD 1250년)에는 실패하고 AD 1270년 제8차 십자군 도중에 사망하였지만 덕과 정치의 일치를 추구한 왕으로 성인으로 추증되어 성왕으로 불리게 된다.

 

성왕 루이 9세

 


미남왕 필리프 4세 시대

 

카페왕조는 제11대 왕인 필리프 4세(AD 1285년 ~ AD 1314년) 대에 이르러 프랑스 왕권신장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키가 크고 금발의 미남이었기 때문에 미남왕(le Bel)이라는 별칭을 얻은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의 외교적인 독립성을 확립하고 아들들의 정략결혼과 영토전쟁으로 영지를 확장하여 프랑스를 왕권 중심의 통일체제로 만들어냈다.

 

특히 필리프 4세는 부족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성직자에게 부과한 세금문제가 발단이 되어 발생한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의 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교황권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지켜냈다. 당시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는 필리프 4세가 교황의 동의없이 프랑스 내부의 교회가 보유한 토지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자 이를 비난하고 교황이 왕권에 대해 우위를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였는데, 이에 필리프 4세는 AD 1303년 삼부회(귀족, 중산층, 성직자 회의)를 최초로 소집하여 얻어낸 프랑스내 추기경단의 지지를 바탕으로 아나니에서 교황을 급습하는 강경수단을 취했다.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교황 보니파티우스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베네딕토 11세마저 재위 1년만에 급사하자 필리프 4세는 교황 선출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시키고 마침내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는 아비뇽 유수시대(AD 1309년 ∼ AD 1377년)를 열었다. 또한 AD 1307년에는 성전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아 해산시켜 전재산을 몰수하였고 유대인과 롬바르디아인과 같은 외국인 고리대금업자에 대해 박해정책을 취해 부족한 재정을 확충하였다.

 

필리프 4세는 재위기간 동안 로마법을 공부한 측근 법률가들의 정책과 조언을 과감히 추진하였고 교황권을 누르고 국왕이 신의 대리자로서 국가를 통치한다는 왕권신수설을 발전시키면서 훗날 등장하는 절대왕권의 시대의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직계 카페왕조 단절

 

카페왕조는 AD 1328년 샤를 4세가 딸들만 남기고 사망하면서 직계혈통이 단절되었다. 이후 왕통은 방계혈통으로 이어져 샤를 4세의 사촌인 필리프 6세(AD 1328 ~ AD 1350년 재위)가 왕위에 올랐고 필리프 6세가 왕이 되기 전 발루아 백작 작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그와 그의 후계자들의 가문을 발루아 왕조로 부르게 된다. 한편 샤를 4세의 여동생 이사벨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도 프랑스 왕위계승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훗날 양국간에 벌어지는 백년전쟁의 원인이 된다. 

 

 

봉건제의 성립배경

 

AD 8세기 분열되었던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은 이전의 로마시대처럼 체계적인 지방통치체계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은대지제도(베네피키움)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 은대지제도란 왕국의 토지가 모두 왕의 소유란 생각을 바탕으로 충성과 봉사를 조건으로 토지를 대여해주는 제도였다. 프랑크 왕국의 왕들은 신하들에게 은대지제도를 통해 토지를 불하하였고 교회소유 토지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을 적용하면서 통치권을 위임하였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토지를 할당받은 영주들이 토지 임대권을 세습할 수 없었고 종사제도를 통해 왕과의 장기적인 주종관계를 명확히 하였기 때문에 지방영주들의 이탈을 방지할 수가 있었다. 토지를 불하받은 지방영주들은 중앙정부에 대해 일정한 세금납부와 유사시 군사지원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제한적인 통치권을 위임받았고 왕은 봉건제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통치권을 간접적으로 보장받았다.

 

이러한 봉건제는 처음에 프랑크 왕국이 탄생한 프랑스 지방에서 실시되었다.. 특히 프랑스 지방은 로마시대의 지방통치체계가 남아있어 행정구역 정리와 통제가 용이하였기 때문에 토지분할 및 위임에 의한 봉건제가 빠르게 정착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봉건제 또한 이와함게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스페인 북부 지방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지여건에 따라 프랑스 지방과는 다른 방식으로 봉건제가 실시되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경우에는 라인강 동부지방 대부분이 로마 시대 영토 밖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지방과 달리 지방 행정구역 분할과 관리임명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결국 독일 지방에서는 점령군 사령관이 총독이 되어 통치권을 행사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귀순한 대부족장이 그대로 통치권을 위임받았다.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행정구역 단위가 아닌 부족단위로 통치가 이루어졌고 이들의 통치권이 세습되면서 독일 지방의 봉건제가 시작되었다. 또한 프랑스에 노르망디 공국을 건설한 노르만인들이 자신이 정복한 영토에 유럽의 봉건제를 추가로 전파시켰는데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남부지방, 시칠리아 섬이 이에 해당하며 십자군 전쟁으로 건설한 십자군 국가도 봉건제가 통치체제로 정착한다.

 

비록 봉건제 자체가 중앙권력을 약화시키는 제도는 아니었지만 당시 프랑크 왕국의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봉건제가 지방분권화로 이어졌다. 가장 큰 원인은 프랑크 왕국의 내부분열때문이었는데 카롤루스 대제가 이룩한 프랑크 왕국은 그의 아들 경건왕 루트비히 1세 대까지만 통합왕국이 유지되었고 루트비히 1세 사후에는 그의 세 아들에 의해 각각 중프랑크와 동프랑크, 서프랑크로 분할되었다. 이후에도 상속에 대한 분규와 형제간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왕국끼리의 분열과 반목이 반복해서 일어났고 이로인해 중앙권력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은 점점 느슨해져만 갔다.

 

봉건제가 지방분권화로 변화된 두번째 이유는 외적의 침입이었다.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내려온 바이킹은 유럽 곳곳을 침략하고 약탈하였는데 특히 서프랑크 왕국의 피해가 심하여 한때 파리까지 함락당할 정도였다. 나중에 바이킹이 프랑스 북부지방에 정착하여 정식으로 영지를 인정받으면서 성립한 것이 노르망디 공국이며 이후 이곳 출신 바이킹을 노르만인으로 부르게 된다. 동쪽에서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인 마자르족이 헝가리 초원지대까지 진출하여 인접한 독일의 여러 지방을 약탈했다. 마자르족에 의해 독일은 바이에른, 북부의 작센, 중부의 튀링엔이 모두 약탈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어야만 했다. 마지막 외적은 남쪽의 이슬람 세력이었다. 이미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했던 이슬람 세력은 AD 9세기경에는 지중해를 통하여 남부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연안을 약탈하고 일부 점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유럽 곳곳이 외적의 침입과 약탈에 노출되었으나 분열된 프랑크 왕국의 중앙정부에서는 이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방어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지방영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체적인 방어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또한 자영농이나 자유시민들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유력한 지방영주에게 스스로 몸을 위탁하려 했기 때문에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지방영주일수록 점점 더 세력이 거대해져만 갔고 장원제가 정착되면서 경제력 또한 높아졌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지방영주들은 중앙정부조차 간섭할 수 없는 독립권력을 창출할 수 있었고 결국 원칙적으로 세습이 불가능하던 은대지제도 또한 그 후계자가 다시 충성서약을 하면 아버지의 영지를 그대로 상속받는 관례가 정착되어 나중에는 왕 조차도 영지 상속에 대해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에 대한 광범위한 개발권과 이용권을 보유하고 세습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중앙정부가 보유하던  영지 주민에 대한 재판권까지 장악하면서 사실상 독립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중앙의 왕권이 미치는 지역은 직할영지에만 한정되어졌다.

 

다만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지방영주들의 지나친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교회의 조직망을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주종관계를 맺는 대가로 주교와 대수도원장에게 토지를 불하하고 이에대한 통치권을 위임하였다. 이는 성직자 지위가 세습되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한 것으로 신성로마황제(혹은 독일왕)는 성직자 임명권(서임권)을 통하여 교회가 보유한 토지에 대한 지배권의 이탈을 방지하였고 나아가 교회영지를 확대시켜 지방영주들의 영지확대를 견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세속정권인 황제가 교회에 대한 서임권을 보유했다는 점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고 훗날 서임권을 둘러싼 황제권과 교황권의 충돌을 야기시키게 된다.

 

봉건제가 중세 사회를 기본적인 통치제도로 정착되었으나 지나친 지방권력의 독립성으로 인해 지방영주 사이의 잦은 분쟁이 발생하면 무정부 상태의 혼란이 발생할 우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중앙정부의 권력을 다시 강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퍼져나가게 되었는데 AD 12세기경부터 자유도시들이 성장하면서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자유도시들은 교환경제의 발달로 생겨난 상업도시들로 주변 영주들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앙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중앙정부로서도 자유도시들 덕분에 재정을 지방영주의 세금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고 자금만 충분하다면 지방영주의 군사지원이 없더라도 용병제를 통하여 얼마든지 부족한 군사력을 충당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프랑스에서는 AD 12세기부터 지방영주의 권력이 크게 위축되기 시작했고 AD 13세기에는 본격적인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독일에서는 통합된 중앙권력이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영방단위의 권력집중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소규모 지방영주가 난립하던 봉건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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