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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니아누스 왕조, 고트족의 침략, 테오도시우스 1세, 로마의 동서 최종 분열, 그리스도교 국교화, 서로마 제국 멸망, 반달리즘(vandalism)

Jobs 9 2021. 5. 16.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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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니아누스 왕조

 

AD 363년 율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도중에 전사하고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요비아누스마저 AD 364년 급사하자 새로운 황제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일개 병사로 시작해 군사령관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요비아누스가 죽자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발렌티누스 1세는 계속된 서쪽의 게르만족 침입과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동생인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제국의 동부를 맡기는 대신에 자신은 서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주로 갈리아의 파리에 머물며 알레마니족을 격파하였고 브리타니아에 침공한 피트족과 스코트족을 상대하기 위해 유능한 장군인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를 파견했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는데 그는 바로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되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가 된다.

 

AD 367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아들 그라티아누스의 왕위계승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9살의 나이에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그리고 AD 375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하자 그라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했으나 판노니아의 로마군단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또 다른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4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황제로 추대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자신의 공동황제로 인정하고 어머니 유스티나의 후견 하에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쿰을 통치하도록 한 후 자신은 라인강을 넘어오는 게르만족을 상대하기 위해 주로 갈리아에 머물며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등 나머지 서방 영토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제국의 동부 지역은 숙부인 발렌스가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다시 3분할 되었다. 하지만 발렌스는 고트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면서 로마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고트족 집단이주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대패

 

고트족의 집단이주 요청

 

고트족은 본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거주하던 게르만족의 일파로 AD 2세기 중엽부터 3세기에 걸쳐 남하하여 다뉴브강 북안과 흑해 북안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서고트족(다뉴브강)과 동고트족(흑해)으로 나뉘어졌다. 동고트족은 통일왕국을 형성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기도 하였으나 서고트족은 몇 개의 부족(키비타스)로 분열하여 통일되진 못하였다. AD 370년 경 훈족의 침입으로 동고트족 왕국은 멸망하였고, 서고트족도 훈족의 공격을 피해 다뉴브 강의 로마국경으로 도망갔다. 서고트족은 로마황제에게 로마 영토안으로의 이주를 요청하였는데 서고트족이 이주를 요청한 다뉴브 강은 발렌스 담당이었다. 발렌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근거지로 하여 주로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서고트족의 이주 요청에 발렌스는 처음에 고민하였으나 황폐화 된 국경지대에 서고트족이 정착하면 세입이 증가하고 국경방어 병력보강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다뉴브강 이남의 트리키아 속주로 이주를 허락하였다. 

 

문제는 발렌스가 생각한 숫자를 훨씬 상회한 사람들이 다뉴브강을 넘어오기 시작하였다는 점이었다. 당초 발렌스는 서고트족만 이주를 허락하였으나 로마군의 다뉴브강 국경선이 개방되자 훈족에게 멸망한 동고트족과 또다른 게르만족인 타이팔레족에 일부 훈족까지 섞여 다뉴브강 도하를 시도한 것이다. 때마침 내린 비로 불어난 다뉴브강을 도하하느라 수많은 사람들이 익사하였지만 그럼에도 발렌스의 예측을 뛰어넘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로마국경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이주한 사람들의 숫자가 예상을 웃돌자 이들을 정착시킬 토지가 부족해졌고 일부 로마관리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트족을 노예로 만들거나 그들의 가축이나 양탄자 같은 재산을 착취하면서 고트족의 로마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갔다. 당초 발렌스는 서고트족의 집단이주의 조건으로 무기반납과 성인남자 및 아이들의 로마 지역내 분산배치를 요구하였으나 무기반납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트족의 아이들은 로마로 인도되어졌으나 성인남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문제였다. 부족한 식량은 매우 비싼 값으로 올랐고 고트족은 노예를 팔면서 식량을 구매하였지만 나중에는 자식까지 팔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고트족은 로마관리에게 해결을 요구하였지만 트리키아 속주관리를 맡았던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이를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무력으로 압박하려고만 하였다. 더구나 루피키누스는 고트족을 통솔하고 있던 프리티게른과 알라비부스를 비롯한 고트족 귀족들을 성으로 초대하여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이 과정에서 알라비부스는 살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프리티게른은 놓치고 말았다. 탈출에 성공한 프리티게른은 당장 자신의 부족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분노한 서고트족과 기타 부족들은 로마 제국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루피키누스도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즉각 트라키아 속주의 전병력을 소집하여 고트족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고트족에게 패배하고 무기를 모두 빼앗기면서 오히려 고트족의 무장을 강화시켜주고 말았다. 이후 서고트족은 식량을 찾아 트리키아 속주일대를 약탈하면서 로마제국 치하에서 불만이 많았던 트라키아 광산의 광부들과 고트족 노예, 추방되었던 소작농에 로마군 소속의 고트족까지 병력으로 흡수하여 세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당시 발렌스는 안티오크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여념이 없었기에 서방의 정제 그라티아누스에게 원군을 청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스의 요청에 응하여 프리게리두스에게 판노니아 발레리아 군대 지휘권을 부여하여 출병시켰고, 리코메레스가 이끄는 갈리아인 부대도 이동시켰다. AD 377년 여름 프리게리투스와 리코메레스의 군대는 살리케스에서 고트족과 전투를 벌였으나 양군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고 승패를 가르지 못한 채 퇴각하고 말았다. 프리게리두스와 리코메레스는 이 전투를 계기로 무질서한 폭도에 불과할 것으로 판단하였던 고트족을 다시보게 되었고 그라티아누스가 갑자기 북방에서 처들어 온 알라마니 족과의 전쟁으로 직접 원군을 이끌고 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전략을 수정하여 정면대결을 피하게 되었다. 또한 고트족의 프리티게른도 로마 서방군의 강력함을 깨닫고 서쪽으로의 진격은 포기하고 로마 동방에 대한 약탈에 집중하게 되었다.

 

발렌스는 그라티아누스에게 원군을 청하는 한편 트라키아 방위를 맡도록 트라야누스와 프로푸투루스를 각각 보병대 사령관과 기병대장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는데 제대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자 트라키아의 제국군을 증강시키기 위해 사투르니누스를 기병대 총사령관에 임명해 파견했다. 이에 프리티게른도 다뉴브강 건너편의 동고트족과 훈족, 사르마티아족, 알라니족, 타이팔레족에게 기병대를 차출해 일제히 다뉴브강을 도하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루피키누스에 의해 다뉴브강 방위병력까지 이미 소집된 상태였기에 이들은 다뉴브강을 아무런 저지없이 도하할 수 있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의 참패

 

AD 378년 동방 정제 발렌스가 드디어 페르시아와의 평화조약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회군하였다. 발렌스가 회군하기 전에 이탈리아의 세바스티아누스가 각 군단으로부터 300명씩 차출하여 조직한 별동대를 이끌고 트라키아 속주 남부의 로도페를 약탈하고 돌아가던 고트족을 괴멸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발렌스는 세바스티아누스의 승전보에 고트족을 과소평가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동방군만으로 고트족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라티아누스가 알라마니 족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시기하여 자신도 단독으로 고트족을 격퇴하고자 하는 공명심에 들뜨게 된다. 발렌스는 그 해 8월 6일 고트족의 군대가 하드리아노폴리스(현재의 에디르네)로부터 20km 서쪽에서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 하드리아노폴리스에 입성하여 세바스티아누스 군대와 합류하였다. 그라티아누스가 보낸 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발렌스는 정찰병으로부터 고트족의 병력이 1만명에 불과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동방 로마군 단독으로 고트족을 상대하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발렌스는 AD 378년 8월 9일 아침 일찍 하드리아노폴리스 외곽에 주둔 중이던 4만여명의 보병대와 2만여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출병하였다. 발렌스도 고트족을 발견하고는 그들이 1만여명이 아님을 깨달았다. 고트족은 둥글게 배치된 짐마차 방벽 뒤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다니는 고트족의 습성상 비전투원들은 짐마차 방벽 뒤에 숨어 있게하고 전투를 담당할 사람들만 짐마차 방벽 밖에 둥글게 포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트족의 가장 큰 문제는 동맹군으로 이루어진 기병대 대부분이 마초와 식량 보급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가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로마군이 중앙에 보병대가 포진하고 양익에 기병을 배치하는 전통적인 진형을 취하는 사이에 프리티게른은 사절을 보내 정착할 토지와 필요한 곡식 및 가축을 공급해준다면 무기를 버리고 로마제국 방위를 위해 돕겠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다른 곳으로 간 동맹군 기병대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고자 한 것이었다. 발렌스는 프리티게른이 보내는 사절들에게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 올 것을 요구하면서 그들의 협상안을 거부했다. 

 

이에 고트족은 로마측에서도 인질과 같은 높은 자격의 인물이 고트족에게 보낼 것을 요구하였고 로마측에서는 리코메레스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협상이 지루하게 진행되는 동안 로마군 병사들은 기온이 40도나 되는 8월의 더위로 인해 지쳐가기 시작했다. 사실 로마군 병사들은 새벽에 출발한 이후로 물도 식량도 지급받지 못한 상태로 수시간이나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고트족이 주변의 건초와 나무들에 불을 붙여 로마군 병사들은 열은 물론 연기와 사막의 먼지에 의해 고통에 시달렸다. 리코메레스가 로마군을 출발하여 고트족 진영으로 가는 동안 로마군의 우익이 고트족과 사소한 전투를 벌이다가 발렌스의 공격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교전상태에 들어갔다. 이에 놀란 양측 사령부는 협상을 결렬시켰고 리코메레스는 본진으로 귀환하였다.

 

전투는 처음에는 로마군의 공격을 고트족 보병이 방어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로마군은 전투단위와 명령체계가 분명한 반면 고트족은 비록 프리티게른이 총지휘를 맡고는 있었으나 사실상 부족단위별로 나뉘어져 개별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개시되자 로마군은 이미 교전상태에 들어갔던 우익 기병에 이어 좌익 기병도 교전상태에 들어갔고 좌익기병은 고트족을 밀어내고 짐마차 방벽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보병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제때에 지원하지 못해 좌익 기병은 밀려나고 만다. 로마는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전투에 임하면서 서로 동조할 수 없었고 오히려 보병대의 측면을 보호해야할 기병들이 너무 앞서나가 보병의 측면을 노출시켰다. 이때 갑자기 로마군 배후에 5만여 기병이 출현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갑자기 돌변하였다. 고트족 동맹군 기병대가 프리티게른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돌아온 것이었다. 고트족 기병은 중장기병을 중심으로 경장기병과 궁기병이 섞여있는 상태로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도 못하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고트족 기병의 출현 

 

비록 고트족 기병은 진형을 정비하지 못했지만 로마군 우익의 기병의 배후를 덮치는 형태로 전투에 임했기에 손쉽게 로마 우익기병을 물리칠 수 있었다. 더구나 로마기병 대부분이 경무장이었기에 중장기병 중심의 고트기병을 감당하지 못하고 로마 좌익기병마저 퇴각하고 만다. 이제 로마군의 중장보병의 가장 취약점인 측면을 노출한 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둥글게 진을 치고 있던 정면의 고트족 경장보병들이 반월형으로 진을 변형해 로마군을 압박하고 있었고 로마군 양익은 적의 중장기병에게 훤하게 노출된 상태였으며 퇴로는 적의 경장보병이 끊겨버렸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로마군은 마지막까지 저항하였지만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로마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황제 발렌스가 전사하였고 대대장 35명과 군단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로마 제국 국경 안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는 점에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일찍이 포에니 전쟁 시절에 겪은 칸나에 전투 이후 최악의 패배로 평가받게 된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의 오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로마 정규군이 난민에 가까웠던 고트족에게 패배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전쟁 사가에게 주목을 받았고 오랫동안 고트족 기병이 로마의 중장보병을 상대로 승리한 것으로 믿어졌다. 이후 중장보병이 전장을 지배하던 시대를 마감하고 중장기병이 새롭게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며 중세유럽을 지배할 '기사'의 등장배경이 되었다고도 하였고 고트족 기병이 이렇게 뛰어난 위력을 보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등자 사용이 있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이 최근에 대대적으로 제기되었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라 유럽의 등자 사용은 6세기 이후에나 이루어졌다는 점이 증명되면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 기병이 등자를 사용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게 되었다. 더욱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보병과 보병이 충돌하고 적 기병을 제압한 기병이 보병의 양익을 포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부터 등장한 아주 오래된 형태의 회전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 기병이 로마군 기병을 압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예는 로마 전사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미 로마군은 3세기의 위기를 거치면서 갈레리우스와 아우렐리아누스를 통해 중장보병 위주의 편성을 포기하고 게르만족이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같은 기병 위주의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한 기병예비대를 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를 중장기병의 중장보병에 대한 우월성을 입증한 전투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에 로마군 최고위로 "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 기병대장)"을 신설했을 정도로 기병 병과를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사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의 패배원인은 바로 로마군 내부에 있었다. 발렌스의 정찰부족에 의한 상대 병력 오판과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성급히 전투를 벌인 공명심, 그리고 로마군의 무너진 군율에 의한 무질서한 공격이 더해지면서 발렌스의 로마군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와 로마의 동서 최종분열

 

테오도시우스 1세의 동방 정제 등극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 동방군은 정예 병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황제 발렌스가 사망하는 비상 사태를 맞이하였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도나우 강 하류의 모이시아 속주의 군사령관 출신인 테오도시우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였다. 히스파니아 출신인 테오도시우스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아버지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의 곁에 종군하며 AD 368년 브리타니아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그 이름을 알렸다. 이후 AD 370년 갈리아에서 알레만니족과의 전투 및 AD 372년 발칸 지방에서 사르마티아족과의 전투에 참가하며 무훈을 쌓았고 AD 374년에는 도나우 강 하류의 모이시아 속주에서 군사령관을 맡아 사르마티아족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궁중 암투에 휩싸여 처형되자 당시에는 고향인 히스파니아로 은퇴한 상태였다. 

 

AD 379년 1월 19일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둘러 이집트와 시리아 등지에서 새롭게 병력을 모았다. 그리고 효과적인 지휘를 위해 군사 제도를 재편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군사령관을 보병(마기스테르 페디튬)과 기병(마기스테르 에퀴툼)을 나누던 것을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새로 모집된 로마군은 훈련이 많이 부족하여 로마 동방의 주요지역 방어에만 치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고트족의 약탈을 막지 못했다. 고트족도 제대로 된 공성무기가 없어서 성으로 둘러싸여진 하드리아노폴리스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같은 주요 도시들은 함락시키지는 못한 채 주변지역을 약탈하고만 다녔다. 고트족의 약탈은 4년이나 계속되었지만 고트족은 어떠한 중요한 마을이나 도시도 점령할 수 없었고 로마군도 고트족을 전투에서 물리칠 수 없었다. 결국 양측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하였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서고트족에게 트라키아 지방을 내어주는 조건으로 로마군에 병력을 제공하는 포이데라티 협정을 맺으면서 고트족의 소요는 겨우 진정되었다. 

 

 

그리스도교 국교화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로마의 동방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통치하던 로마 제국의 동방지역에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는다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설을 추종하는 니케아 신조의 신봉자들과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들이 대립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상태였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 자신이 심한 병을 앓고 AD 380년 세례를 받으면서 니케아 신조를 신봉하게 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설을 신봉하는 사람들만 "보편적(가톨릭) 그리스도교인"으로 간주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AD 381년 주교 150명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인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열려 아리우스파를 비롯하여 니케아 신조를 신봉하지 않는 모든 종파가 이단으로 선포되었다. 

 

이에따라 AD 385년부터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가 금지되었고 AD 391년에는 일체의 이교도 의식을 금지하였으며 AD 392년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서방 황제 자리를 노리던 이교도 유게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 전체를 통합하여 유일한 황제로 즉위하면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삼위일체설의 로마 카톨릭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언하여 로마 제국을 그리스도교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국교화와 삼위일체설의 정립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이어 로마 제국의 황제로는 2번째로 '대제(The Great)'의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로마의 일시적인 재통합과 최종분열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고트족 소요를 진압하는 데 여념이 없는 사이 로마 제국 서방에서도 이변이 일어나 AD 383년 브리타니아 군단의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켜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하고 제위를 찬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방의 일에 신경쓸 여유가 없어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서방의 황제로 인정했지만 그라티아누스의 동생이자 공동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몸을 위탁해오자 생각이 바뀌었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1세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연합하여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방 황제로 복위시키고 테오도시우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되돌아 갔다.

 

AD 392년에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궁정에서 의문사하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대립하던 갈리아의 아르보가스트가 유게니우스를 새로운 서방 황제로 추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신의 아들인 호노리우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한 후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황제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AD 394년 5월 호노리우스와 또 다른 아들인 아르카디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긴 채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였다. 비록 테오도시우스 1세는 같은해 9월에 벌어진 유게니우스와의 첫번째 대결에서는 피해를 입었지만 다음날 재차 공격을 감행하여 승리하였다. 이렇게 하여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을 다시 통합시켰지만 유게니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병에 걸렸기 때문에 서둘러 후계자 문제를 매듭지어야 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를 동서로 나뉘어 두 아들 중 호노리우스를 서방 황제로, 다른 아들인 아르카디우스를 동방 황제로 각각 임명하기로 마음먹고 호노리우스를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AD 395년 1월 17일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비록 테오도시우스 1세가 후계자를 지명할 때 다시 제국을 동서로 분할하기는 했지만 로마 제국은 이전에도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였고 테오도시우스 1세도 영구적으로 로마 제국을 분할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의 뒤를 이은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모두 어렸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신의 충성스런 장군인 반달족 출신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에게 두 아들의 후견을 부탁했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동방의 훈족에게 밀려난 게르만족이 대규모로 서유럽을 침공하기 시작하면서 스틸리코는 동로마를 신경쓸 여력이 없게 되었다. 더욱이 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가 정무에 관심없어 처음에는 루피누스에게, 나중에 루피누스가 암살된 이후에는 에우트로피우스에게 통치를 맡겨 버렸기 때문에 동로마는 서로마의 위기를 방관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일시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서로마와 동로마의 분리는 점차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결국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AD 500년 서로마 제국 멸망

 

반달족의 로마 약탈

 

막시무스가 황제가 된 뒤 북아프리카의 반달족과 분쟁이 발생했다. 당초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의 왕인 가이세리크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려고 하였으나 막시무스가 그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가이세리크가 반달족을 이끌고 AD 455년 로마를 침공했다. 서로마 제국은 아이티우스가 죽은 이후 아이티우스를 따르던 게르만족 용병들이 떠나가면서 군사력이 더욱 약화되었기 때문에 반달족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했다. 막시무스는 로마를 탈출하려다가 로마 시민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되었고 로마는 반달족에 의해 약탈당했다. 비록 대규모 학살이나 파괴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반달족의 로마 침공은 그 자체로 동시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기 때문에 문화유산이나 예술품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것을 지칭하는 '반달리즘(vandalism)'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리키메르의 전횡

 

반달족이 물러간 뒤 원로원 의원이자 갈리아 군사령관이었던 에파르키우스 아비투스가 서고트족의 후원을 얻어 황제로 즉위하였지만 AD 456년 게르만족 출신의 군사령관이었던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에 의해 폐위되고 리키메르의 친구이자 로마인 출신 군사령관이었던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요리아누스가 리키메르의 추대로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마요리아누스는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노릇을 과감히 거절한 후 나름대로 개혁정치를 펼치고 갈리아의 부르군트족과 그리고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족을 격파하며 서로마 제국의 재건에 나섰다. 그러던 중 AD 460년 반달족을 공격하기 위해 300척의 함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갔다가 오히려 패배하고 불리한 조건의 강화조약을 체결한 채 돌아오자 리키메르가 이를 구실로 마요리아누스를 폐위시키고 살해하였다. 

 

이제 모든 실권은 서로마 제국의 총사령관인 리키메르가 장악했지만 리키메르는 게르만족 출신이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수는 없었다. 이에 리키메르는 원로원 의원인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후임 황제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로마 제국은 여전히 하나의 국가로서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공동 황제의 개념으로 서로를 승인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단절된 이후 새로운 황제로 추대된 레오 1세는 마요리아누스의 서로마 황제 즉위는 승인했지만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할 뿐이었고 리키메르가 사실상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비우스 세베루스에 대한 승인은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리키메르와 동로마 제국이 서로 마찰을 빚게 되었고 AD 465년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사망하자 서로마 황제의 자리가 2년동안 비워지는 일도 벌어졌다. 

 

AD 467년 동로마 제국의 레오 1세가 서로마 황제로 안테미우스를 지명하여 보냈다. 당시 서로마 제국은 계속된 반달족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고 또한 안테미우스의 딸과 리키메르의 약혼이 성사되자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AD 468년 안테미우스와 레오 1세가 연합하여 추진한 반달족 공격이 최종적으로 실패하자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를 폐위시킬 기회만 엿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AD 472년 4월 동로마 제국의 레오 1세가 안테미우스를 지원하고 리키메르를 견제하기 위해 원로원 의원이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사위이기도 한 올리브리우스를 수도 로마로 보냈으나 오히려 리키메르는 올리브리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옹립하고 안테미우스를 공격하여 AD 472년 7월에 살해해버렸다. 이렇게 4명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옹립하며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던 리키메르였으나 안테미우스를 살해한 다음달인 AD 472년 8월에 병사하였고 리키메르가 올리브리우스 역시 같은 해 11월에 사망하였다. 다만 동로마 제국의 레오 1세는 올리브리우스를 끝까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리키메르와 올리브리우스가 연달아 사망하면서 서로마 제국의 통치에 공백이 발생하자 리키메르의 조카이자 부르군트족인 군도바트가 부르군트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글리케리우스를 새로운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 레오 1세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달마티아의 군사령관인 율리우스 네포스를 서로마 황제로 임명하여 함대를 파견하였다. 그러자 부르군트족이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에 AD 474년 글리케리우스가 폐위되어 달마티아에 보내졌고 군도바트는 부르군트족에게 달아났다. 이제 네포르가 서로마 황제가 되었으나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에 결국 AD 475년 플라비우스 오레스테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네포스는 달마티아로 달아났고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황제로 세웠다.

 

이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서로마 황제가 되고 그의 아버지인 오레스테스가 실권을 장악했지만 AD 474년 새로운 동로마 황제가 된 제노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AD 476년에 게르만족 출신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면서 오레스테스는 오도아케르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으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나이가 어려 이탈리아 남부의 캄파니아에 연금된 채 지내게 되었다. 이후 오도아케르는 이전의 게르만족 출신 실권자들과 달리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지 않은 채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이탈리아에 대한 통치권만 요구하였다. 처음에 동로마의 제노는 오레스테스에게 폐위된 채 달마티아로 달아난 네포스를 서로마 황제로 다시 임명하려고 하였지만 오도아케르가 거절하였다. 

 

이미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를 완전히 장악했고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서고트족이 히스파니아-갈리아-루아르 지역을,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이 각각 나머지 갈리아 지역을, 수에비족이 히스파니아 북서부를 각각 장악하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여 이제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이탈리아 본토와 달마티아 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의 제노도 내부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네포스도 AD 480년 글리케리우스의 지지자들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묵인해야만 했다. 그러나 오도아케르가 사실상 독립적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게 되었기 때문에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킨 AD 476년을 서로마 제국이 최종적으로 멸망한 해로 본다. 

 

비록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지만 여전히 원로원을 유지하는 등 로마 제국의 통치 체계를 바꾸지는 않았기 때문에 로마인의 반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오도아케르는 달마티아를 공격하여 2년만에 정복하였고 서고트족에게는 이탈리아 북서부 일부를 빼앗겼지만 반달족으로부터 시칠리아를 되찾아왔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에서 제노를 폐위시키기 위해 일어난 일루스의 반란을 지원하였다가 실패하였고 도리어 제노의 요청에 따라 판노미아에 거주하던 테오도리크의 동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오도아케르는 AD 493년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이탈리아에는 동고트 왕국이 건설되었고 이후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에게 멸망하는 AD 552년까지 동고트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포이데라티(foederati)와 서로마 제국의 멸망

 

로마는 초기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도시와 동맹을 체결하였는데 이들 동맹도시를 '포이데라티(foederati)'라고 불렀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영토가 지중해로 급격히 확대되고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 도시들의 많은 지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로마의 우월적 지위가 유지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탈리아 동맹 도시들이 동맹시 전쟁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동맹 도시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포이데라티는 이탈리아 밖에 있는 로마의 동맹국으로 의미가 변경되었다. 또한 로마 군단은 로마시민들이 중장보병을 이루고 기병대는 동맹국으로부터 제공받은 보조군으로 구성하는 형태로 변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포이데라티는 자연스럽게 용병을 제공하는 동맹국을 지칭하는 의미가 되었다. 

 

로마는 처음에는 동맹국에게 용병을 제공하는 대가로 금전이나 식량을 제공하였지만 3세기의 위기 이후 로마 제국의 재정이 궁핍해지면서 정착할 토지를 제공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갈리에누스는 라인강을 넘어 온 알라마니족에게 국경 안의 정책지를 내주고 대신에 국경방어를 맡도록 하였다. 이제 로마 제국은 포이데라티가 된 게르만족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대신에 국경수비의 재정 부담을 덜게 되었지만 게르만족의 방어를 게르만족에게 맡겨버리면서 국방의 자주성을 일부 포기하고 말았다. AD 358년 프랑크족이 갈리아 북부에 정착하였고 AD 376년에는 서고트족이 도나우강 남쪽에 정착하여 포이데라티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서고트족이 AD 378년 반란을 일으키고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단을 괴멸시키고 로마 황제 중 한 명인 발렌스까지 전사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뒷 수습을 맡게 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고트족을 무력으로 제압하지 못하자 다시 포이데라티 협정을 맺고 트라키아 지방을 내어주면서 겨우 사태를 진정시키게 되었다. 

 

비록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로마 제국의 동방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최종적으로 서방까지 통합하게 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되면서 두 아들인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에게 각각 제국의 로마 서쪽과 동쪽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 모두 어리고 통치능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훈족의 등장으로 촉발된 게르만족 대이동이라는 대위기 앞에 로마 제국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만 비교적 풍족하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방 정제 시절 구축한 안정적인 기반을 가진 동로마 제국은 위기를 극복해내었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가 제대로 통치기반을 마련하지도 못한 채 무능한 호노리우스에게 맡겨져 버린 서로마 제국은 궁핍한 재정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에 따라 서로마 제국은 국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게르만 부족과 연이어 포이데라티 협정을 맺는 방식으로 사태 수습에 나섰다. 비록 AD 451년 아이티우스가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훈족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포이데라티 협정를 맺은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동고트족의 도움 덕분이었으나 로마 시민을 징병하여 훈련시키는 것보다는 포이데라티에게 군사력을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더욱 쇠락해졌다. 결국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같은 게르만족 출신의 군사령관에 의해 로마 황제가 마음대로 교체되는 혼란을 겪은 끝에 게르만족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가 최후의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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