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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공국, 중세 영국,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 노르망디공 윌리엄

Jobs9 2021. 5. 1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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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바이킹이란 본래 대략 AD 800년부터 AD 1050년 사이에 활약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 선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비록 바이킹은 평화적인 정착과 무역활동도 하였지만 당시 유럽인들보다 월등한 항해능력을 바탕으로 유럽 해안 각지에서 약탈활동을 벌인 해적으로 더 유명하였다. 바이킹의 활동으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해안은 사실상 바이킹의 지배에 받기 시작했으며 잉글랜드 본토까지 바이킹 출신인 데인인의 지배를 받았다.

 

유럽 내륙에서도 바이킹의 침입이 이어져 바이킹은 프랑스 지방과 스페인 지방에 침공하였고 지중해와 발트 해 연안, 러시아, 우크라이나까지 진출하였다. 덴마크 출신 바이킹들은 프리슬란트, 프랑스, 잉글랜드 남쪽에 진출했고, 스웨덴 출신 바이킹들은 발트 해 연안,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 진출해 이 지역의 강을 따라 비잔티움 제국에까지 진출하였으며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들은 주로 북서쪽과 서쪽으로 향해 페로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아일랜드, 영국 북부와 아이슬란드에 진출하였다. 특히 아일랜드와 영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인도거나 거주자가 거의 없는 상태였으므로 노르웨이인들은 그곳에 정착하였으며 붉은 에이리크에 의해 그린란드의 발견과 정착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여 바이킹이 건설한 도시로는 잉글랜드의 요크, 우크라이나의 키이우, 아일랜드의 더블린 등이 있다.

 

 

바이킹의 전술

바이킹은 뛰어난 항해능력을 갖췄던 민족으로 유럽을 약탈할 때에도 수로를 이용하였다. 바이킹은 잉글랜드의 템즈 강, 프랑스의 센 강, 독일의 라인 강과 엘베 강을 바이킹선을 타고 내륙 깊숙이 진출하였고 멀리는 다뉴브 강을 타고 흑해로, 드네프르 강을 타고 카스피해까지 진출하였다.

바이킹들이 전투에서 주로 사용한 전술로는 방패벽(쉴드월) 전술이 있었다. 방패벽은 바이킹이 들고다니던 라운드 쉴드를 겹쳐서 거대한 벽을 만드는 것으로 주로 중장기병의 돌격을 저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방패벽이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탁트인 평야가 아니라 언덕위나 습지와 같이 기마의 이동을 방해하는 지형지물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는데 바이킹들은 이러한 것을 이용하는 데 능했다. 이러한 방패벽 전술을 이용하여 소수의 병력으로 적지에 원정하는 경우가 많았던 바이킹이 자기보다 병력숫자가 많은 적을 상대로 우세한 전투를 이끌어낼 수가 있었다.

 

 

노르망디 공국의 탄생

 

바이킹의 약탈은 프랑스 지방이 특히 심하였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가까워 침입이 용이했으나 분열된 프랑스의 귀족들은 서로 단결해서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용맹한 바이킹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이들의 유입을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AD 9세기 초에 바이킹의 약탈이 절정을 이루어 AD 845에는 파리가 점령되고 각지의 주요 도시가 습격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AD 9세기 후반 이후 바이킹 중 일부가 프랑스 왕의 봉토를 받아서 가신이 되는 경향이 강해졌고 AD 900년 경에는 프랑스 북부 센강 유역에 항구적으로 정착지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들은 북쪽에서 왔다는 뜻으로 "노르만족"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노르망디란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AD 911년 프랑스의 샤를 3세가 노르만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카톨릭교 개종과 프랑스어 사용을 조건으로 노르망디 작위를 수여하는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맺으면서 노르만족들이 정식으로 프랑스으로 편입되었다. 이때부터 다수의 노르만족이 이주하여 영지를 확장되었고 노르망디 공국은 실질적인 독립국이 되었다. 이로서 노르만족들은 중세 유럽문화에 편입되었고 기존 스칸디나비아의 전통과 다른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성립

 

노르망디공 윌리엄의 등장

 

노르망디 공국은 프랑스의 카페왕가를 지원하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AD 1035년 노르망디 공작이 된 윌리엄 시대에 노르망디 공국의 세력은 프랑스와 대등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윌리엄은 노르망디의 로베르 1세와 평민출신인 첩 에를르바 사이에서 난 두 아이 중 첫째로 어머니가 정식부인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생아가 되었다. 그러나 윌리엄은 로베르 1세의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후계자가 될 수 있었고 AD 1035년 로베르 1세가 예루살렘 순례 길에서 사망하자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윌리엄은 즉위 당시 8살이라는 어린 아이와 사생아라는 출신이 약점으로 작용하여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5세가 된 AD 1042년부터 윌리엄은 기사작위를 받고 공식적으로 공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AD 1046년에 반란이 일어나서 위기에 처했으나 프랑스왕 앙리 1세의 도움으로 AD 1047년에 반란세력을 격파할 수 있었다. AD 1047년 이후 윌리엄은 대외확장을 꾀하기 시작하여 멘 지역을 두고 앙주 백작 조프루아 마르텔과 몇차례 전쟁을 벌였으나 AD 1052년 프랑스왕 앙리 1세와 조프루아가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위기에 빠져 동부 노르망디의 심각한 반란을 겪기도 하였다. AD 1054년부터 AD 1060년까지 앙리 1세와 조프루아 마르텔 사이의 동맹에 대항해 독자적인 동맹을 유지하였고 AD 1060년 두 사람이 나란히 죽자 마침내 AD 1063년에 멘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 왕위 쟁탈전

 

고대 잉글랜드는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앵글족과 색슨족, 주트족의 지배를 받으며 7왕국의 혼란기를 겪었으나 웨식스의 왕 에그버트에 의해 잉글랜드가 통일되었다. AD 8세기 말부터는 바이킹의 일파인 데인인이 침입하여 AD 9세기 중엽에는 웨식스 지배 하의 여러 왕국 중 동쪽의 몇 나라는 데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 후 데인인과 에그버트의 손자 앨프레드와의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고 앨프레드의 아들 에드워드, 손자 에셀스탠은 각각 데인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전 잉글랜드를 다시 통일하였다. 그러나 AD 10세기 말부터 데인인이 다시 대규모로 조직적인 침입을 하여 AD 1002년에 웨식스왕 에셀레드 2세는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로 망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노르망디 공국으로 망명해온 애설레드 2세는 윌리엄의 조부인 리샤르 2세 백작의 누이인 에마와 결혼을 하면서 잉글랜드 왕가와 노르망디 공국 사이의 동맹이 맺어졌다. 몇년 후 애설레드 2세는 잉글랜드 왕위로 복귀하였지만 애설레드 2세의 뒤를 이은 에드먼드 2세가 얼마 안 되어서 사망하였고 잉글랜드 왕위는 다시 데인인 크누드 1세에게 빼앗겼다. 크누드 1세 사후 하레크누드에게 잉글랜드의 왕위가 이어졌으며 하레크누드가 죽고나서야 비로소 애설레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잉글랜드의 왕이 될 수 있었다.

 

한편 윌리엄은 에드워드가 노르망디 공국에 망명했을 때부터 잉글랜드로 복귀할 때까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 이에 대한 보상으로 윌리엄이 에드워드의 후계자가 되는 모종의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노르만 저술가들에 따르면 AD 1064년에 에드워드는 처남 웨식스 백작 해럴드를 노르망디 공국에 사절로 보냈고 그때 에드워드 사후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는 것과 이에 대한 해럴드의 지지를 포함한 서약을 통해 이를 재확인했다고 한다. 윌리엄의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명분은 에드워드가 노르망디 망명 당시에 자신에게 잉글랜드의 왕 자리를 약속했으며, 해럴드 또한 자신의 가신이 되기를 서약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실과의 혈연관계는 에드워드와 같은 대고모를 두고 있다는 점 뿐이었고 당시 잉글랜드 왕은 세습제가 아니라 선출제였기 때문에 윌리엄의 주장은 당연히 잉글랜드 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AD 1066년 에드워드가 죽자 잉글랜드의 위턴회의(잉글랜드의 수석 고문들과 귀족, 교회인들의 회의)는 윌리엄이 아닌 해럴드를 잉글랜드 왕으로 추대하였고, 윌리엄은 즉각 이 결정에 반대하여 전쟁을 선포하게 되었다.

 

윌리엄은 우선 로마 교황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는 잉글랜드 교회에 대해 고심하던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잉글랜드 왕위계승에 대한 지지를 받아내었고 이를 바탕으로 플랑드르, 브레타뉴, 메인, 앙쥬, 푸아투 등지에 부와 명예를 약속하여 원정군을 모집하여 8천여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에 맞서 잉글랜드의 해럴드는 AD 1066년 여름 동안 윌리엄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나 윌리엄은 때마침 닥친 북풍으로 8주간 항구에 묶여 있었다. 윌리엄의 침공이 지연되자 해럴드는 재정문제로 군대를 해산시켰으나 그해 9월 25일에 해럴드의 형 토스티그가 왕위에 욕심을 내고 노르웨이의 하랄 3세의 지원을 받아 요크셔 지방의 스탬퍼드브리지를 침략하자 급하게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내전에 대해서 알지 못했지만 우연하게도 9월 27일에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였다. 해럴드는 노르웨이군과의 전투로 윌리엄의 상륙을 10월 2일이 되어서야 알아차렸기 때문에 윌리엄군의 상륙은 손쉽게 이루어졌다. 윌리엄은 상륙한 서식스의 퍼벤시를 시작으로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였고 해럴드는 10월 14일이 되어서야 마침내 노르웨이군을 물리치고 회군하였다. 그리고 양군은 헤이스팅스에서 운명을 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헤이스팅스 전투

 

병력숫자는 양측 모두 7천여명으로 비슷했지만 노르망디군은 용맹한 노르만 기사단을 중심으로한 정예병이었던 반면에 잉글랜드군은 노르웨이군과의 전투에서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징집한 농민으로 이루어져 무장과 훈련 모두에서 열악한 상태였다. 잉글랜드의 운명을 건 헤이스팅스 전투는 10월 14일 새벽 노르만족 기사단의 잉글랜드군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해럴드 군은 대부분 보병으로 이루어져 궁병과 기병이 부족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엄폐물이 많은 언덕 위에서 방어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윌리엄은 궁병을 맨앞에 배치하였고 접근전을 위해 보병을 그 뒤에 두었으며 노르만 기사들을 맨 마지막에 위치시켰다. 윌리엄의 기본전략은 궁병의 화살공격으로 먼저 큰 피해를 입히고 보병으로 승세를 굳히며 정예 기사단의 돌격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다. 그러나 윌리엄의 전략은 처음부터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노르망디군 궁병의 화살공격은 잉글랜드군의 방패벽에 막혀 큰 피해를 주지 못했고, 이어진 보병의 진격도 언덕 위에서 돌과 투창, 바위 등을 던지는 잉글랜드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을뿐 잉글랜드군의 굳건한 방패벽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윌리엄은 예정보다 빠르게 노르만 기사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렸으나 노르만의 정예기사들을 상대로도 잉글랜드군이 도끼와 창, 칼을 들고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오히려 노르만의 많은 기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개시된 지 1시간 정도 지나자 좌익의 브리타니인들의 진형이 붕괴되어 도망갔고 노르만족들과 플랑드르인들도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혼전이 계속되던 와중에 윌리엄의 말이 공격을 받으면서 윌리엄이 땅위로 떨어졌는데, 윌리엄이 갑자기 사라지자 노르만족들이 잠시 패닉에 빠졌으나 윌리엄이 헬멧을 벗고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면서 부대를 수습할 수 있었다. 윌리엄은 기사들을 이끌고 돌격을 재개했고 방패벽을 무너뜨리고 많은 농민군을 살해하였다. 잉글랜드군은 윌리엄군의 반격을 뒤늦게 알아차렸기에 많은 피해를 입고 나서야 진형을 물렸다.

 

비록 노르망디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굳건했던 잉글랜드군의 방패벽도 많이 무너진 상태였다. 윌리엄은 잉글랜드군이 전술적 경험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이용하여 유인책으로 2차례나 군대를 일부러 후퇴시켰다. 일설에는 전투중에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난 것에 불과하다고도 하였지만 노르망디군이 후퇴하자 잉글랜드군이 쫓아나오기 시작했다. 잉글랜드군의 진형이 무너진 것을 확인한 윌리엄은 군대를 되돌려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잉글랜드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자 윌리엄은 최후의 돌격을 위해 궁수들에게 잉글랜드군 방패벽 뒤를 노리기 위해서 높은 각도로 활을 쏴서 잉글랜드 군의 후열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이 공격이 적중하여 해럴드는 눈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고 윌리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예 기사단을 돌격시켜 일거에 잉글랜드군을 섬멸하였다. 결국 해럴드는 전사하였고 윌리엄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기병전술의 발달과 노르만 중기병

 

고대 기병의 경우 경무장으로 창을 머리위로 들어서 내려찍는 방식을 사용했다. 오버헤드 랜스 방식으로 불리는 이 방식은 말위에서 보병의 머리를 노린다는 점에서 위력이 있었지만 실제 전투에서 고대 기병들은 경무장을 하였기 때문에 중장보병의 방패벽과 방진을 돌파할 위력이 없었다. 따라서 고대 기병의 역할은 취약한 중장보병 측면 공격이나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는 보다 중무장한 기병인 헤타이로이가 등장했고 이들은 양손으로 창을 잡고 돌격하는 투핸드 랜스 전술을 사용하였다. 뒤에 등장하는 파르티아의 중장기병 카타플락타이는 마갑과 기수 모두를 중무장시켜 두핸드 랜스의 공격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비록 투핸드 랜스방식이 오버헤드 랜스 방식보다 위력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 돌파력이 보병 앞부분 정도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어서 전세를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적 보병대 중간에 갇힐 경우 포위공격으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 시절 중장기병이 충분히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보병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AD 9세기 이후 중세시대가 도래하면서 중장기병이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이 부대를 중장기병 중심으로 편성하였고, 동방의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중장기병이 핵심병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투핸드 랜스 방식으로 돌격할 경우 충돌시 충격력으로 기수가 말에서 떨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오버헤드 랜스 방식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이유로 중세 초기의 기병은 여전히 제한적으로 활용될 수 밖에 없었다.

 

중세 기병전술의 획기적인 발전은 창을 팔과 겨드랑이에 고정시킨 채 돌격하는 카우치드 랜스의 등장이후부터이다. 카우치드 랜스는 다른 한손으로 말 고삐를 잡아 오버헤드 랜스 방식과 마찬가지로 자세가 안정되면서도 투핸드 랜스 못지 않은 돌격력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카우치드 랜스는 투핸드 랜스와 달리 창의 중간부분이 아니라 끝부분을 쥐기 때문에 공격시 사용할 수 있는 창의 길이도 늘어났다. 또한 말의 안장이 앞뒤로 높아진 것과 다리를 길게 뻗고 말을 타는 자세가 도입된 것 등이 기수로 하여금 충돌시 말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중장기병의 돌격력은 더욱 상승하였다. 카우치드 랜스를 사용하는 중세기사들은 이제 무기 길이의 차이 때문에 먼저 공격을 가하면서도 말의 돌진력과 장갑의 무게를 이용한 충격력으로 적 보병전열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다.

 

카우치드 랜스 방식은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제국의 일부 기병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이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전술적으로 활용한 것은 노르만족들이었다. 바이킹으로 해적출신이었던 노르만족들은 처음에는 기마를 타고 싸우는 것이 미숙했지만 곧바로 뛰어난 기병이 되었다. 특히 노르만족들은 바이킹으로 해적활동을 하던 당시부터 매우 충동적이고 무모할 정도로 용맹하며 교활하고 잔인무도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배를 버리고 말을 타게 되면서도 이러한 성향은 변하질 않았다. 여기에 카우치드 랜스 방식을 도입하면서 노르만 중기병의 위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하였다.

 

노르만 기사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원뿔형 투구와 연 모양의 방패, 날이 넓적한 긴 칼과 가느다란 창으로 무장을 한 채 때로는 적은 수의 인원으로 몇 배나 되는 적을 쳐부수곤 하는 놀라운 무공을 세우며 중세 전장을 활약하였다. 특히 잉글랜드와의 헤이스팅스 전투와 비잔티움 제국과의 두라초 전투, 기타 잉글랜드와 시칠리아, 십자군 원정 등에서 두터운 보병대열도 무너뜨리는 위력을 자주 보여줬다. 노르만족들과 대결을 벌였던 비잔티움 제국의 기록을 보면 노르만 기사의 돌격력은 "바빌론의 성벽마저 뚫어버릴 정도"라고 표현되었을 정도였다. 노르만 기사들의 활약과 함께 카우치드 랜스를 이용한 돌격전술은 AD 15세기 스위스 장창병의 파이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중세 전장을 지배하였고 화약무기가 등장한 이후에야 역사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노르만 왕조의 성립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잉글랜드에는 더이상 윌리엄을 막을 정규병력이 없었다. 윌리엄은 무리해서 런던으로 진격하기 보다는 주변 지역을 초토화시키면서 잉글랜드 귀족들을 압박하였다. 결국 해럴드의 죽음으로 구심점을 잃은 잉글랜드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가 위험에 처하자 할 수 없이 윌리엄에게 항복하였다. 윌리엄은 AD 106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대관식을 열어 잉글랜드왕 윌리엄 1세가 되었다. 이로서 잉글랜드 왕국을 지배하던 앵글로 색슨 왕조가 무너지고 새롭게 영국을 지배하게 되는 노르만 왕조가 성립되었으며, 윌리엄에게는 '정복왕'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음에도 잉글랜드 각 지역에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기에 윌리엄는 잉글랜드 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5년여의 시간을 더 소모해야 했다. AD 1067년부터 시작된 반란은 AD 1069년에 절정에 달했고 가장 극심했던 노섬브리아 반란을 윌리엄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나선 뒤에야 진압에 성공했다. 여세를 몰아 윌리엄은 북부지역을 완전히 제압하였고 AD 1071년에는 잉글랜드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윌리엄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잉글랜드의 변경지역의 안정을 위해 스코틀랜드(AD 1072년)와 웨일스(AD 1081년)를 침공하여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경계를 따라 방어적인 역할을 하는 특별한 '변경주'들을 창설하고 자신에게 충실했던 가신들에게 봉토로 하사했다.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영토

 

윌리엄 1세는 노르만족이었지만 선왕인 에드워드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었기에 잉글랜드의 옛 관습과 법을 존중하겠다고 발표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귀족계급만은 앵글로 색슨 계통에서 노르만족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철저하게 진행되어 잉글랜드 정복 후 20년이 지났을 때에는 앵글로 색슨 계통의 대귀족은 단 2명에 불과했고, 윌리엄 1세로부터 봉토를 부여받은 제후 200여명이 잉글랜드 대부분을 차지한 상태가 되었다. 귀족들을 정비한 윌리엄 1세는 성직자들도 노르만족으로 교체하기 시작해 일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교회와 수도원마저 장악하였다. 그리고 왕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왕국의 경제와 토지소유 현황을 자세하게 조사하여 기록한 2권짜리 토지대장 '둠즈데이 북'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지만 자신의 근거지인 노르망디를 오랫동안 비울 수 없었기에 말년의 15년을 잉글랜드보다 노르망디에서 더 많이 보냈다. 그러나 윌리엄 1세에 의해 잉글랜드는 유럽의 봉건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게 되었으며, 윌리엄 1세가 제후들로부터 분봉받은 봉신들을 소집하여 직속영주보다 왕인 자신에 대한 충성이 우선하는 충성서약을 받아냄으로써 봉건영주의 분열로 혼란이 극심했던 유럽대륙과는 달리 왕권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노르만 왕조의 단절

 

윌리엄 1세는 세 아들인 로베르와 윌리엄 루퍼스, 헨리에게 자신의 왕국을 분할하여 남겼다. 장자인 로베르가 노르망디 공작 지위를 이어받고, 잉글랜드의 왕은 차남 윌리엄 루퍼스에게 돌아갔으며, 헨리에게는 영지를 사들일 수 있는 막대한 보물을 물려줬다. AD 1087년 잉글랜드를 이어받은 윌리엄 루퍼스는 윌리엄 2세로 불리며 카톨릭교회와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는 왕권을 더욱 공고히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윌리엄 2세가 AD 1100년 사냥터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자 그 뒤를 동생인 헨리가 이어 헨리 1세가 되었다. 헨리 1세는 교회와 타협하면서 왕권을 안정시킨 한편 재정 수입의 기초를 다지고 순회재판제도를 확립하는 등 왕권 강화에 더욱 노력하였고 AD 1106년 노르망디 남서부에 있는 탱슈브레에서 첫째형인 로버트의 군대를 무찌르고 로버트를 사로잡으면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모두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AD 1135년 헨리 1세가 죽으면서 노르만 왕조는 대가 끊겼다. 헨리 1세는 유일한 왕자였던 윌리엄이 불의의 사고로 죽자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5세와 결혼하였다가 미망인이 된 딸 마틸다를 불러들여 후계자로 지명하였는데 잉글랜드에서는 아직 여자가 왕이 된 선례가 없었기에 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더욱이 마틸다가 잉글랜드 귀족들의 동의없이 프랑스의 앙주백작 계승자인 제프리 플랜태저넷과 결혼했기에 귀족들의 반발은 더욱 심해졌다. AD 1135년 헨리 1세가 죽자 윌리엄 1세의 외손자이자 마틸다의 고종사촌인 스티븐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교회와 대부분의 귀족들은 스티븐을 지지했으나 마틸다는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1세와 그녀의 이복 오빠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기에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2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결국 스티븐이 죽으면서 최종적으로 화해가 성립되었고 왕위는 마틸다와 제프리 플랜태저넷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헨리 플랜태저넷이 계승하여 헨리 2세가 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성립되었다.

 

한편 헨리 2세는 잉글랜드 왕위와 함께 노르만 왕조가 보유하던 프랑스 노르망디 공작 지위도 얻었기 때문에 본래 소유하던 프랑스 앙주 백작 지위에 의한 앙주지방에 이어 노르망디 지방도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헨리 2세는 아키텐의 상속녀인 엘레아노르와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키텐 지방도 잉글랜드 왕가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는 프랑스 내에서 프랑스 카페 왕조가 지배하던 영토보다 더 거대한 크기의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때문에 이후 양국은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영지를 두고 오랫동안 분쟁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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