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서양사 Western History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이탈리아 침공, 티치노 전투, 트레비아 강 전투, 칸나에 전투, 스키피오, 카르타고 침공, 자마 전투

Jobs9 2021. 5. 13. 18:04
반응형

제2차 포에니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 전 영토

전쟁의 배경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넘기고 막대한 전쟁배상금까지 지불하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쟁에 참여한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급해야 했기 때문에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다. 결국 급료 지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BC 240년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은 용병의 출신국가들과 카르타고 내의 반란 세력과 결합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용병의 반란이 쉽게 진압되지 못하고 거의 3년 4개월이나 끌었지만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활약한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가 이번에도 활약을 보이며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하였다. 다만 그 와중에 로마는 중립화시켰던 사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에 대한 지배권도 얻었다. 또한 북이탈리아로 진출하여 알프스 산맥의 이남 지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제1차 포에니 전쟁과 용병의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운 하밀카르 바르카는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지만 이로 인해 시기하는 무리도 늘어났다. 이에 하밀카르 바르카는 해외로 눈을 돌려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 개척에 나섰다.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외교술을 지닌 하밀카르 바르카는 히스파니아 동쪽에 '신(新) 카르타고'(현재 스페인의 카르타헤나)를 세우고 자신의 바르카 가문의 중심지로 삼고 히스파니아 대부분을 차지하며 카르타고와 별개의 독자 세력을 형성했다. 하지만 BC 228년 하밀카르 바르카가 히스파니아 정복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하밀카르 바스카에게는 세 아들(한니발, 하스두르발, 마고)이 있었지만 아직 모두 어렸기 때문에 하밀카르 바스카의 사위인 하스두르발이 바스카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참고로 하밀카르 바스카의 사위와 아들의 이름이 같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하밀카르 바스카의 사위를 '공정한 하스두르발(Hasdrubal the Fair)'로 구분하여 부른다. 공정한 하스두르발은 하밀카르 바르카와 달리 무력이 아니라 외교술을 이용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는데 결국 로마와 협상을 벌여 로마와의 국경선을 에브로 강으로 설정하는 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하스두르발이 BC 221년 갑자기 암살당하면서 이제는 하밀카르 바스카의 맏아들인 한니발이 바스카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스카가 사망할 당시에 19세 소년에 불과했던 한니발은 바스카 가문의 수장이 된 BC 221년에는 26세의 야심만만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한니발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호전적인 성격과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문을 이어받자마자 히스파니아 중부의 타구스 강에 살던 카르페타니족을 단숨에 제압하였다. 그리고 BC 219년에는 이베리아 반도 동해안에 있던 사군툼을 침공했다. 비록 사군툼은 공정한 하스두르발이 로마와 체결한 조약에 따른 국경선인 에브로 강 이남에 위치했지만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는 한니발에게 사군툼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를 무시했고 8개월 간의 공성전 끝에 사군툼을 점령했다. 이에 로마는 카르타고 본국에 정식으로 항의 사절단을 보냈지만 히스파니아 식민지로 자신감을 얻은 카르타고는 이를 거절했고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

북이탈리아의 티치노 전투와 트레비아 강 전투

 

로마가 선전포고를 하자 한니발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로마 침공에 나섰다. 한니발은 히스파니아를 동생인 하스두르발에게 맡기고 막내 동생인 마고와 함께 BC 218년 5월 보병 5만 명, 기병 9천기, 전투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에브로 강을 건너 피레네 산맥으로 진격해 갔다. 로마도 2개 군단을 편성하여 집정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각각 1개의 군단씩 이끌고 시칠리아와 마르세유로 향하도록 했다. 로마의 의도는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오는 공격을 시칠리아에서 방어하는 한편 한니발이 해안가를 따라 진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마르세유에서 막아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은 로마의 예상을 깨고 곧바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이르렀다. 다만 험준한 알프스를 넘으면서 그의 병력은 보병 2만명, 기병 6천기로 줄어들었다.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자 마르세유에 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서둘러 북이탈리아로 되돌아 왔고 시칠리아에 대기 중이던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도 카르타고 본국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북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리고 BC 218년 11월 티치노 강 근처에서 양군의 정찰부대들이 우연히 조우하면서 기병대 간의 대결인 티치노 전투가 벌어졌다. 티치노 전투에서 한니발 군이 승리를 거뒀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중상을 입은 채 후퇴하였다. 이에 시칠리아에서 북상한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한니발 군을 상대하면서 BC 218년 12월 18일 트레비아 강 전투가 벌어졌다. 트레비아 강 전투는 보병과 기병이 모두 참여한 최초의 대규모 전투가 되었고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는 한니발이 펼치는 양익 기병을 이용한 포위섬멸전술에 밀려 대패하였다. 로마군은 3만5천명의 병력 중 2만명이 전사하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나 한니발 군의 피해는 경미했다. 이로서 눈치를 살피던 갈리아 부족이 모두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고 로마는 알프스 남쪽의 갈리아 지방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

 

티치노 전투와 트레비아 강 전투에서 2명의 집정관이 모두 패배한 로마는 BC 218년 겨울 집정관 선거에서 새롭게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네포스와 그나에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의 군대를 넘겨받았다. 한니발도 겨울동안 갈리아 부족으로부터 신병을 모집하여 병력을 보강하였다. BC 217년 봄이 되자 전쟁이 재개되어 로마의 두 집정관이 서로 나뉜 채 한니발 군의 이동경로를 차단하고자 나섰지만 한니발은 예상보다 빠르게 남하하여 에트루리아 도시들을 휩쓸어 버렸다. 

 

이에 로마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한니발 군을 공격하기 위해 나섰고 그나에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에게 서둘러 합류하라고 연락을 보냈다. 그러자 한니발은 로마의 양 군단이 합류하기 전에 가까이 있는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로마군단을 먼저 공격하기 위해 이탈리아 중부의 트라시메누스 호수에서 매복하였다. 그리고 BC 217년 4월 24일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로마군단이 나타나자 기습공격하였다. 이 기습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사망하고 로마군단 2만 5천명 중 1만 7천명이 사망하거나 호수에 익사하였으나 나머지 8천명도 포로가 되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제 로마는 토스카나 지방도 한니발에게 내주어야 했다. 

 

 

독재관 파비우스의 지연전술과 로마 시민의 반발

 

이제 로마가 바로 코앞에 있었지만 한니발은 바로 로마로 쳐들어 가지 않고 로마의 주변 도시를 공격햇다. 이는 로마의 연합세력을 차례로 로마로부터 분리시켜 로마를 고립시키고 최종적으로 로마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으려는 전략이었다. 이에 로마는 국가비상사태를 맞이하여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임명하였고 파비우스는 직접 한니발과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다니는 지구전 전술을 구사했다. 이러한 파비우스 전술은 비록 많은 로마인에게 비웃음을 사고 비판을 받았지만 한니발과의 정면대결에서 이길 방법이 없었던 로마로서는 유효한 전략이었다. 또한 한니발의 기대와는 달리 압도적인 카르타고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비록 파비우스의 지연전술은 전략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지만 그 때문에 이탈리아 전역이 한니발에 의해 약탈당하게 되자 로마 시민들은 파비우스를 겁쟁이라고 비난하며 한니발과의 결전을 바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받아들인 로마 원로원은 파비우스의 6개월 임기가 끝나는 동시에 새롭게 집정관으로 임명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타렌티우스 바로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요청했다. 두 집정관은 약 8만의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과 싸우기 위해 나섰다. 파울루스는 한니발과의 정면대결을 피하자고 주장했으나 바로는 결전을 바라고 있었다. 이에 따라 BC 216년 8월 2일 이탈리아 남부의 칸나에 부근에서 전사상 이름 높은 칸나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니발의 빛나는 승리, 칸나에 전투

로마군은 7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주력인 중장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그 앞쪽에 경보병을 위치시켰으며 우익에는 로마 기병이, 좌익에는 동맹국 기병이 각각 포진하였다. 로마군의 의도는 자신있는 로마의 중장보병을 이용하여 한니발군을 중앙돌파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총 5만의 병력의 한니발 군도 로마군과 동일하게 중앙에 중장보병, 그 앞쪽에 경보병, 양 날개에 기병을 각각 배치하였으나 중앙의 중장보병을 구부러진 활 모양으로 배치하였다. 튀어나와 있는 중심부에 상대적으로 약한 갈리아 보병과 히스파니아 보병을 집중적으로 포진시켰고 그 양쪽에는 숙련된 카르타고 보병을 배치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병은 로마군이 우세하였고 기병은 한니발 군이 우세한 편이었다. 

  

전투는 한니발의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중앙에서는 로마 중장보병이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보병들을 밀어내기 시작했고 좌익의 한니발 군의 히스파니아-갈리아 기병이 로마군 우익 기병을 압도하였다. 그러나 한니발 군의 우익의 누미디아 기병과 로마군 좌익의 동맹군 기병은 호각을 이루었다. 이때 한니발의 지휘가 빛을 발휘하였다. 한니발은 중심부의 양쪽에 위치시켰던 카르타고 정예보병을 전진시켜 로마 중장보병의 양익을 압박해들어갔고, 로마 기병을 물리친 우익의 히스파니아-갈리아 기병이 좌익의 누미디아 기병에게 가세하면서 동맹군 기병마저 물리쳤다. 그리고 카르타고 기병은 도망가는 로마기병을 쫓지 않고 로마 중장보병의 후방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때 로마의 중장보병은 중앙부에서 한니발 군을 거의 돌파하였으나 좌우의 카르타고 정예보병에게 밀려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르타고 기병이 갑자기 자신의 후방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로마 중장보병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로마 중장보병들은 카르타고 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점점 더 밀집대형을 취하기 시작했으나 오히려 이로 인해 자기들끼리 압박을 못 이기고 압사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로마 중장보병들은 전방은 히스파니아-갈리아 보병에게, 측면은 카르타고 정예보병에게, 후방은 히스파니아-갈리아 기병과 누미디아 기병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채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괴멸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거의 6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잃는 괴멸적인 타격을 받은 반면에 한니발 군의 피해는 불과 6천명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전투초반 열세를 보였던 중앙의 히스파니아-갈리아 보병에게 피해가 집중되었다. 칸나에 전투의 패배로 로마 시민과 로마 원로원은 큰 충격에 빠졌고 한니발에 대한 대응전략을 대폭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니발의 포위섬멸전술

한니발의 포위섬멸전술은 그리스 테베 에파미논다스의 사선진과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대왕 부자의 망치와 모루 전술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었다.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 군의 중장보병은 비록 객관적으로 로마 중장보병보다 전투력은 떨어졌지만 구부러진 활 모양으로 배치하여 중앙부의 두터운 진형이 상대 주력을 붙잡고 있는 동안 양 옆에 위치한 소규모 정예부대가 선회하여 상대의 측면을 공격하는 방법을 통하여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에파미논다스의 사선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한니발은 상대적으로 우수한 기병을 우익을 집중하여 로마 기병을 순식간에 분쇄하였고 이어 좌측으로 이동하여 좌측의 로마 동맹군 기병까지 몰아낸 후에 로마 중장보병의 배후를 포위하는 모습은 망치와 모루 전술과 비슷하였다. 다만 한가지 차이점은 알렉산드로스의 망치와 모루 전술은 우세한 기병의 힘으로 적군을 뚫고 들어가 최후방의 지휘체계를 무너뜨린 후에 부수적인 효과로 포위망이 형성되었다면 한니발의 전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포위공격을 목표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이 선보인 전술은 대규모 보병과 기병 운용의 유기적인 결합을 활용한 포위섬멸전의 교과서적인 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칸나에 전투는 전 세계 모든 육군사관학교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전투가 되었다.  

  

파비우스의 지연전술 재개와 전쟁의 교착화

 

칸나에 전투 이후 전황은 한니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남쪽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동쪽의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왕조에서 잇달아 동맹을 제의해왔던 것이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히에론 왕이 죽자 로마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다.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왕조의 왕 필리포스 5세도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다. 이제 로마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쌓이는 신세가 되어 동쪽에서는 마케도니아, 남쪽에서는 시라쿠사를, 서쪽에서는 한니발의 근거지인 히스파니아를, 북쪽은 한니발을 지원하는 갈리아 부족을 동시에 상대해야만 했다. 그리고 칸나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한니발은 이제 이탈리아 남부지방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로마에게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졌지만 모든 것이 로마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연이은 대패에도 불구하고 로마시민의 항전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도시들도 여전히 로마를 지지하고 있었다. 로마는 원로원 전체가 부동산을 제외한 전 재산을 헌납하였고 전시 국채를 발행하였으며 동맹도시들은 자금을 지원하였다. 이렇게 하여 칸나에 전투에서 괴멸되었던 로마군은 빠르게 재건되었으나 문제는 한니발이었다. 칸나에 전투의 패배로 로마 시민과 로마 원로원 모두 야전에서 한니발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겁쟁이라고 비난하였던 파비우스를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하였다. 파비우스는 이전의 단순한 지구전을 넘어서 한니발과의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한니발의 배후인 히스파니아와 동맹국인 시라쿠사 및 마케도니아를 공략하여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고립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한니발을 상대로 이기지도 않지만 지지도 않는 파비우스의 전술이 상당한 효과를 거둬 이후 4년간 로마군과 한니발 군은 소모전만 계속되는 교착상태에 빠졌고 파비우스는 겁쟁이에서 "이탈리아의 방패"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한편 시칠리아와 마케도니아 공략은 로마에게 우세하게 진행되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로마군과 그리스의 다른 국가들의 방해로 한니발과 호응해서 이탈리아로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는 BC 211년 "이탈리아의 칼"이라고 불리는 클라우디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로마군에게 1년여에 걸친 공성전 끝에 함락당했다. 이때 수학문제를 푸는 데 열중해 있다가 미처 그를 알아보지 못한 로마병사에 의해 아르키메데스가 살해되었다는 일화가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캄파니아 지방의 요지인 카푸아가 로마군에게 포위되었는데 한니발이 구하려 애썼지만 한발 늦어 결국 로마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로써 시칠리아와 캄파니아를 잃은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파비우스의 지연전술

 

한니발이 무서운 기세로 로마군을 유린하자 로마의 독재관으로 군권을 장악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한니발군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추격하는 대신에 한니발의 도발에는 응하지 않고 정면대결을 회피하는 지연전술을 펼쳤다. 처음에 파비우스의 지연전술은 로마의 동맹도시들에 대한 희생이 너무나 크고 비겁하다는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파비우스의 독재관 임기가 만료되자마자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하자 파비우스가 다시 집정관에 뽑히고 그의 지구전술이 로마의 주된 전술로 채택되었고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파비우스의 전술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 지연전술은 후에 역사적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유명한 것은 미국 독립전쟁때 조지 워싱턴이 사용하여 "미국의 파비우스"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것과 나폴레옹의 침공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침공에 맞서싸운 소련의 기본전술이 이 파비우스 전술을 따른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의 반격

 

스키피오의 등장

 

한니발에게 BC 218년 티린토 전투에서 패배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BC 217년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한니발의 근거지인 히스파니아에서 한니발을 지원하지 못하는 임무를 맡고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이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그의 형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와 함께 BC 215년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두루발이 한니발을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고 BC 212년에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원인이 된 사군툼을 함락시켰지만 BC 211년 그의 형과 함께 나란히 전사하고 말았다. 

 

이제 로마에서는 히스파니아 원정군의 지휘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는 지 논쟁이 일어났고 이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동명의 아들인 24세의 젊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나섰다. 스키피오는 17세의 나이에 티치노 전투에 참전하여 부상당한 아버지를 구출해낸 적이 있었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는 열망에 가득차 있었지만 로마군단의 군사지휘권을 보유한 집정관과 법무관에 취임할 나이에 미달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로마 원로원은 아무런 공직도 없는 스키피오에게 집정관 대행이라는 초법적인 직위를 부여하여 그의 친구인 라일리우스와 함께 히스파니아 원정군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히스파니아 정벌

 

당시 히스파니아에는 하스두르발이 3개 군단을 지휘하고 있었고 칸나에 전투의 대승으로 여유가 생긴 한니발이 하스두르발을 지원하기 위해 마고까지 2개 군단을 이끌고 히스파니아에 합류하도록 조치한 상태였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단순히 한니발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한니발의 근거지를 무너뜨리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 스키피오는 BC 209년 히스파니아의 바스카 가문의 핵심인 신(新) 카르타고를 기습공격하여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듬해인 BC 208년에는 바이쿨라 전투에서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카르타고 군을 패배시켰다. 이때 스키피오는 경보병 부대를 전위에 내세워 적의 시야를 가린 사이에 본대를 둘로 나누어 측면을 공격하는 새로운 전술을 사용하였다. 스키피오에게 패배한 하스드루발은 남은 정예 카르타고 군을 모아 한니발에게 가담하고자 BC 207년 한니발의 알프스 행군 길을 이용해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했으나 로마군 사령관 클라우디우스 네로에 의해 메타우로 전투에서 패배하고 하스드루발도 전사하였다.

 

한편 하스두르발이 이탈리아로 향했을 때 스키피오는 무리해서 이를 뒤쫓지 않고 이탈리아의 다른 로마군단에게 뒷처리를 맡긴 채 자신은 남은 마고의 2개 군단을 상대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BC 206년 일리파 전투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히스파니아 부대를 이용하여 마고의 부대를 견제하는 사이에 로마의 정예 중장보병이 측면으로 돌아가 포위하는 획기적인 전술을 이용하여 대승을 거뒀다. 일리파 전투의 참패로 히스파니아에서의 한니발 세력이 완전히 축출되었고 마고는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달아났다. 그러나 마고는 바다를 통해 제노바에 상륙하였지만 로마군에게 저지당하면서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한니발과 합류하지 못한채 부상을 입고 북이탈리아에 칩거해야만 했다. 

  

  

카르타고 침공

 

히스파니아를 완전히 장악한 스키피오는 로마로 귀환하였고 엄청난 전공으로 인해 30세라는 이례적인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BC 205년 집정관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스키피오는 로마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가 위치한 북아프리카 공격준비에 나섰고 이듬해 속주 총독 부임지로 시칠리아 섬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BC 204년이 되자 먼저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왕국으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본래 누미디아 왕국은 한니발에게 정예기병을 파견할 정도로 친 카르타고 성향이었으나 당시에는 마시니사와 시팍스 사이에 내분이 발생한 상태였다. 스키피오는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던 마시니사를 지원하여 카르타고의 지원을 받은 시팍스 군을 물리치고는 마시니사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누미디아 왕국은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고 한니발 군대의 강력한 힘이었던 누미디아 기병이 이제는 로마의 지원군이 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스키피오의 세력이 강화되자 위기를 느낀 카르타고는 로마에 강화를 요청했고 마침내 이탈리아의 한니발 군과 북아프리카의 스키피오 군이 모두 철수하는 조건으로 강화가 이루어져 BC 203년 한니발과 마고가 카르타고로 송환되었으나 마고는 이동 도중에 죽었다. 그러나 한니발이 귀국하자 갑자기 카르타고에서 강경론이 우세해지면서 강화협상이 결렬되었다. 이제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각자 국가의 운명을 걸고 결전을 벌일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그 대결은 BC 202년 카르타고 남서쪽에 위치한 자마에서 이루어졌다.

  

자마 전투 

  

자마 전투에서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은 통상적인 포에니 전쟁 전투와 정반대의 상황에 있었다. 항상 로마군은 보병이 많았고 기병이 부족했으나 이번에는 누미디아 기병이 로마군으로 넘어간 탓으로 카르타고군이 기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를 보완하고자 한니발은 8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선두에 배치하고 두번째 열에 비교적 전력이 약한 용병 혼성군을 배치하였으며 세번째 열에 카르타고 시민병을 배치했다. 후방으로 200보 떨어진 곳에 한니발 자신과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최정예 부대를 배치했다. 이에 맞서는 스키피오 군은 보통의 진영의 간격보다 더 넓게 진영을 짜고 경보병으로 그 틈을 메웠다. 보병은 스키피오 자신이 지휘하고 양쪽 날개에는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과 로마 기병을 각각 배치하였다.

 

한니발은 부족한 기병을 전투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양익의 기병에게 위장 후퇴를 지시했고 전투 초기 누미디아 기병대가 카르타고 기병대를 쫓아 전장을 이탈하면서 한니발의 의도대로 되는 듯 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2번째 수로 돌진시킨 8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상대로 로마 경보병들은 직접 상대하지 않고 신속히 양 옆으로 비켜났고 이로 인해 생겨난 간격 사이를 전투 코끼리들이 그대로 통과하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스키피오는 전투 코끼리를 상대하기 위해 사전에 로마군 간격을 충분히 넓혀놓았고 그자리에 경보병을 배치하여 위장했었던 것이었다. 전투 코끼리는 로마군 후위에 위치한 경보병들이 투창으로 공격을 받자 상처를 입고 아무런 역할을 못한 채 전장을 이탈하고 말았다.

 

이제 대결은 카르타고와 로마의 중장보병 대결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한니발의 3만 1천명의 병력이 2만 8천명의 로마군을 상대로 우세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직접 지휘하는 제3열의 예비대를 좌우로 배치시켜 정면과 앙옆의 3방향에서 공격을 시작했고 이에 맞서 한니발도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자신의 정예군을 좌우로 넓게 포진시키면서 양군은 일직선으로 백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호각지세를 이루었던 중장보병과의 대결은 카르타고의 기병을 물리치고 돌아온 누미디아 기병이 카르타고의 배후를 공격하면서 로마군으로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모든 예비대까지 전선에 투입하였던 한니발로서는 이 공격을 버텨낼 여력이 없었다.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누미디어 기병이 돌아올 때까지 한니발 군을 상대로 버텨내는 데 성공한 스키피오는 이제 한니발의 장기인 포위섬멸전으로 오히려 한니발 군을 공격할 수 있었다. 한니발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카르타고 군은 전멸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종결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은 전사자, 포로 모두 합해 4만 명을 잃었고 로마군의 피해는 겨우 1,500명이었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상대로 14년전 칸나에 전투의 패배를 완벽하게 설욕한 것이었다. 자마 전투로 16년을 끌어온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종결을 맞는다. 카르타고 의회는 로마가 제시한 강화조건을 승인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이후로 로마의 징벌적 휴전조항에 의해 카르타고는 다시는 지중해에서 군사강국이 되지 못했고 자신의 영토를 간신히 지킬만한 군사력만 가질 뿐이었다. 한편 스키피오는 개선장군으로 로마로 귀환하였고 아프리카를 제압했다는 의미에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한니발은 동방 시리아로 도망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BC 190년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마저 로마군에 패배하자 아나톨리아 반도의 비티니아로 피신하였다가 나중에 자살하고 만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