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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시대, 5현제의 번영, 팍스로마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

Jobs 9 2021. 5. 16.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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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시대

 

AD 69년 12월 21일 로마 원로원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하였으나 신중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그대로 알렉산드리아에 머문 채 디라키움의 무키아누스를 로마로 파견하였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대 반란을 빠르게 진압할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티투스에게 예루살렘을 신속히 함락하도록 하였고 티투스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여 5달의 포위전 끝에 AD 70년 9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비록 유대 반란은 최후의 항전을 벌인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는 AD 73년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지만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사실상 끝난 것이었다. 함락된 예루살렘은 신전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지며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유대 전쟁 동안 사망한 유대인이 무려 11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유대 전쟁이 마무리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비로소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AD 70년 10월 로마에 입성하고 로마 황제로서의 직무를 시작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AD 69년 12월 21일 원로원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황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다만 베스파시아누스는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와 같은 특권을 부여받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권에 관한 법률'을 원로원에게 제정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베스파시아누스는 공식적인 호칭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Vespasianus Augustus)'로 사용하였고 그 아들인 티투스도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아 후계자임을 천명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평민 출신 황제답게 로마 원로원의 의석을 로마의 귀족 뿐만 아니라 갈리아,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 반도 출신에게도 개방하였고 각종 세금을 신설하여 네로가 탕진한 국고를 보충하도록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유명한 콜로세움 경기장을 로마에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티투스의 짧은 치세와 도미티아누스 시대

 

AD 7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사망하자 예정대로 그의 아들인 티투스가 다음 황제가 되었다. 티투스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유대 전쟁을 마무리했을 만큼 군사적인 능력이 출중했고 아버지가 황제가 된 이후에는 근위대의 지휘를 맡아 아버지의 권력강화에 앞장섰다. 그러나 AD 79년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는 여러가지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AD 79년에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폼페이 시가 땅 속으로 매돌되었고 이듬해에는 로마 대화재가 일어났으며 AD 81년에는 로마에 페스트까지 창궐하였다. 더구나 티투스는 AD 81년 불과 재위 2년 만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 뒤를 동생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에게 물려줘야만 했다. 

 

티투스의 뒤를 이어 로마의 제9대 황제로 즉위한 도미티아누스는 허영심이 많아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의 재위시절 형인 티투스와 똑같은 호민관 특권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바 있었다. 이 때문에 형과 적대하게 되었으나 형이 재위 2년만에 사망하는 행운 속에 로마 황제가 되었다. 도미티우스는 통치 면에 있어서 전제군주적인 성격을 보여줬는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대신 로마 원로원을 약화시키기 위해 로마 속주 총독을 원로원 의원이 아닌 에퀴테스에게 맡도록 변경하였다. 또한 군사적인 능력도 뛰어나 브리타니아에 대해서는 칼레도니아(지금의 스코틀랜드)까지 군대를 진군시켰고 AD 85년 도나우강 건너편의 다키아족이 국경을 침입하자 이를 직접 격퇴하였다. 그러나 AD 88년 다키아족이 2번째로 침공해오자 로마 1개군단이 괴멸되고 군단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어려움을 겪은 끝에 AD 89년 막대한 금품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다키아족 왕 데케발루스와 겨우 강화를 맺으면서 그 위상이 많이 실추되고 말았다. 

 

말년에 도미티아누스는 공포정치를 자행하기 시작했는데 그 계기는 AD 89년 상(上)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인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이었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은 하(下)게르마니아 속주의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도미티아누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반란에 연류되었다는 혐의로 처형하였고 원로원 의원들도 종종 반역죄로 고발했다. 또한 도미티아누스는 개인적인 가정사도 복잡하여 이혼과 재혼을 반복했는데 결국 AD 96년 도미티아누스는 황후인 도미티아에게 포섭된 노예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공포정치에 신음하던 로마 원로원은 기뻐하며 도미티우스을 기록말살형에 처했고 또한 군대가 움직이기 전에 서둘러 귀족 출신의 마르쿠스 코세이우스 네르바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렇게 하여 플라비우스 왕조가 3대 만에 단절되었고 대신하여 5현제를 배출하며 로마 제국 최전성기로 일컬어지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시작된다.

 

 

 

5현제의 번영, 팍스로마나

 

네르바 시대

 

네르바는 유명한 원로원 집안 출신으로 황제로 추대받았으나 즉위 당시 66세의 고령으로 병중이었기 때문에 통치기간이 2년에 불과하여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원로원과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도미티아누스의 공포정치의 잔재를 일소하면서 로마 제국을 쇄신하였다.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투옥되었던 무고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국외로 추방된 사람들은 사면하여 귀국을 요청하였으며 몰수된 재산도 반환하였다. 그러나 네르바는 군부의 지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군부의 지지를 받을 만한 인물을 물색하여 게르만 속주의 한 지방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네르바의 통치기간이 2년으로 매우 짧았기 때문에 네르바의 가장 큰 업적을 자신의 후계자로 트라야누스를 지명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트라야누스 시대

 

트라야누스는 히스파니아의 로마 속주 바이티카에서 태어났다.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 전쟁을 벌이던 시절 그의 군단 사령관으로 복무했던 인연으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 집정관 자리에까지 올랐고 이후 시리아와 아시아 속주의 총독까지 지냈다. 트라야누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되던 당시에 상(上)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을 맡고 있었고 군부 내에서 명망이 높았다. 이 덕분에 트라야누스는 AD 96년 네르바의 양자가 되어 차기 황제로 지명받았고 AD 98년 1월 1일부터는 네르바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AD 98년 1월 27일 네르바가 사망하면서 로마 속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후 트라야누스는 전임 네르바와 마찬가지로 원로원과의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빈민 자녀의 부양정책, 이탈리아의 도시 및 농촌 회복정책을 추진하면서 내정을 정비하였다. 

 

 

트라야누스의 제일 가는 업적은 로마 제정 성립 이후 한동안 중단되었던 팽창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로마제국의 영토를 최대한으로 넓혔다는 것이었다. 트라야누스의 첫번째 정복사업은 다키아 전쟁이었다. 다키아는 현재의 루마니아 영토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티소 강과 헝가리, 도나우 강,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다키아는 일찍부터 다키아 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도미티아누스 시절에는 다키아 군에게 패배하여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평화조약을 맺는 굴욕을 겪기도 하였다. 트라야누스는 AD 101년 3월에 로마 군단을 이끌고 제1차 다키아 원정을 감행하여 이듬해까지 전투를 벌여 다키아 군을 격파하고 다키아의 왕인 데케바루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AD 105년 데케바루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AD 106년 제2차 다키아 원정을 떠나 다키아 왕국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데케바루스는 도망쳤으나 결국 자살하고 말았고 다키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점령하던 AD 107년 나바타이 왕국(지금이 요르단 서부)의 국왕이 죽자 로마 제국으로 병합하여 속주 아라비아로 삼았다. 그리고 AD 114년에는 오랫동안 동방에서 로마 제국에 맞서고 있던 파르티아 제국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여 17개 군단, 약 8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 사이를 오가며 양국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던 아르메니아 왕국을 침공하였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가 세운 아르메니아 왕을 내쫓고 AD 114년 말까지 아르메니아 전역을 장악하여 아르메니아 속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파르티아 제국의 북부로 진입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들을 함락하였고 AD 116년에는 세 방면으로 부대를 나눠 진군하여 파르티아 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일시적으로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이은 파르티아의 반격과 이집트 및 유대인의 반란 때문에 퇴각해야만 했고 로마 귀환 도중에 트라야누스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결국 트라야누스는 진중에서 병사하였고 자신의 후계자로 시리아 속주 총독인 플라비우스 아에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를 지명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

 

하드리아누스는 비록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가문은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유래하였다. 트라야누스의 먼 친척이기도 했던 하드리아누스는 공직에 진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경험하였고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시절에는 시리아 속주의 총독으로서 후방 병참을 담당하고 있었다. AD 117년 8월 9일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하였고 이틀 뒤 트라야누스는 사망했고 하드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우선 트라야누스에 의해 정복된 2개의 지역에 대한 정비에 나서 여전히 파르티아 제국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과감하게 포기하면서 파르티아 제국과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로마로 귀국하는 길에 다키아 속주에 들러 통치체제를 재편성한 후 이듬해 7월에야 로마로 돌아왔다. 

 

 

하드리아누스는 재임시절 속주인 유대교 반란, 브리타니아 반란, 북아프리카 반란 등을 겪었지만 이를 모두 진압하고 속주 통치를 안정화시켰다. 또한 더이상의 팽창정책을 포기하고 대신에 국경선 안정화에 매진하여 로마 제국의 속주들을 순행하며 정비에 나섰다. 브리타니아에는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구축하여 지금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선을 만들었고 게르마니아의 방벽도 강화하여 라인강과 도나우강 국경을 정비했다. 파르티아 제국과는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아르마니아를 보호국으로 만들어 완충지대로 삼았다. 말년까지 두번에 걸쳐 속주 순행에 나서며 속주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속주 통치제도 정비에도 힘썼다. 이렇게 제국의 통치기반을 정비한 하드리아누스는 AD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양자로 삼아 뒤를 맡기고 사망하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

 

안토니누스의 가문은 본래 갈리아에서 유래하였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모두 집정관을 지낸 명문가였다. 안토니누스는 관대하고 온건하며 인자한 성품으로 하드리아누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아시아 속주 총독, 집정관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뒤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로서 후계자가 되었다. AD 138년 7월 하드리아누스가 사망하고 안토니누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원로원은 경건한 자라는 뜻의 '피우스(Pius)'라는 존칭을 부여하였다. 

 

안토니누스는 평생 속주 순행으로 보낸 전임 하드리아누스와 달리 거의 대부분 로마를 떠나지 않고 통치하였다. 그의 재위기간은 대부분 동안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번영을 이어갔다. 안토니누스는 속주의 부담을 줄이며 재정을 건전하게 하였고 사회정책도 추진하여 그리스도교 박해를 금지시켰으며 대지진으로 파괴된 그리스와 소아시아, 로도스의 도시들을 재건시켰다. 또한 브리타니아에 안토니누스 방벽을 구축하여 국경을 정비하기도 하였다. 안토니누스는 본래 하드리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명하고자 했으나 그전에 사망한 콤모두스의 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양자로 맞아 후계자로 삼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염두에 두었던 또다른 후계자 후보였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의 아들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안토니누스의 양자로 들어갔고, AD 161년 3월 안토니누스가 죽자 베루스와 함께 공동황제가 되었다. 아우렐리우스 통치 시절에는 평화로웠던 이전 황제들의 시대와 달리 변방에 외적 침입이 잦아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된다. AD 161년 파르티아 제국이 침공하여 로마의 1개 군단을 궤멸시키고 아르메니아 왕국까지 점령하였다. AD 163년 베루스가 동방의 남은 군단을 이끌고 출정하여 파르티아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르메니아 왕국을 탈환하였고 AD 165년에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파르티아 국경선 안쪽까지 진격하여 파르티아 제국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베루스는 AD 169년 아우렐리우스와 국경을 순행하고 오던 중 급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단독황제가 된 아우렐리우스는 AD 170년 다키아 속주로부터 대규모 군단을 북상시켜 게르만족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게 하였으나 총사령관이 전사하고 로마군 2만명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게르만족에 의해 국경 방어선이 위협받자 4개 군단을 더 창설시켰고 AD 172년부터 제1차 게르마니아 전쟁을 벌였으나 도나우강 건너에서 근위대가 대패하고 근위대장이 전사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AD 173년부터는 각개격파로 작전을 바꿨고 결국 AD 174년 강화를 맺었다. AD 178년부터 다시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을 시작하여 게르만의 여러 부족을 몰아붙이기도 하였으나 도나우 강 진중에서 병을 얻어 AD 180년 사망하였다.

 

  

콤모두스 암살과 팍스 로마나의 종식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콤모두스가 황제가 되었으나 AD 182년 그의 누이인 루킬라가 원로원 의원들과 공모하여 벌인 암살미수사건이 발각되자 상당수 원로원 의원을 처형했고 AD 190년 로마의 반을 태워버린 대화재가 일어나자 재건된 로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콜로니아 콤모디아나'(콤모두스의 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자신이 헤라클레스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직접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처럼 싸우기도 하였다. 콤모두스의 기행은 급기야 AD 193년 1월 1일 검투사 복장으로 집정관직에 취임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극에 달했고 결국 집정관에 취임하기 직전인 AD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되었고 로마 원로원은 즉각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세베루스 왕조의 짧은 치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

 

콤모두스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공석이 된 황제 자리를 두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당시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를 새로운 로마의 황제로 선포하였지만 페르티낙스는 재위 3개월만에 근위대장 퀸투스 아에밀리우스 라에투스에게 암살당했고 원로원 의원이었던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라에투스에 의해 새로운 황제로 옹립되었다. 이에 판노니아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리아 총독 페르켄니우스 니게르,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반발하여 각자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면서 로마 제국은 내란에 휩싸였다. 그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판노니아의 세베루스로서 그는 먼저 공동 황제 즉위를 조건으로 브리타니아의 알비누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로 향하여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살해하고 근위대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AD 194년 이수스 전투에서 시리아의 니게르를 대파한 후 마지막으로 AD 197년 2월 리옹 전투에서 알비누스마저 격파하고 단독황제가 되어 세베루스 왕조를 창건하였다. 

 

이후 세베루스는 로마 원로원을 억압하고 자신의 세력기반인 군대를 우대하였다. 이에 따라 군단의 숫자를 30개로 늘리고 이들에 대한 봉급을 인상하면서 재정이 부족해지자 그동안 면세 특권을 누리던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걷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인 카라칼라를 공동 황제 겸 후계자로 삼아 자신의 황제권을 공고히 하였다. 세베루스는 AD 197년 동방 속주를 침공한 파르티아 제국을 공격하여 AD 199년 티그리스 강 근처에서 파르티아군을 물리치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화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AD 210년 칼레도니아(지금의 스코틀랜드) 전역을 재패하고자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하였다가 AD 211년 2월 에보라쿰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카라칼라 시대

 

카라칼라의 본명은 아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레루스 안토니우스였지만 켈트족의 전통적인 모자를 뜻하는 '카라칼라'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였다. 세베루스가 임종시 자신의 후계자로 두 아들인 카라칼라와 게타를 지명하였기 때문에 카라칼라와 게타의 대립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카라칼라가 AD 212년 2월에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동생 게타를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카라칼라는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대목욕장을 건설하고 병사들의 급료를 인상하였으나 이로 인한 재정부족이 발생하자 세금을 올리고 화폐의 질을 낮추어 주조하기도 하였다. 카라칼라가 한 정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AD 212년 로마 제국의 모든 속주민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안토니우스 칙령'이었다. 이제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 로마의 모든 속주에게 개방된 것이었다.

 

카라칼라는 그 성격이 잔인하고 허영심이 많아 AD 212년 게르만족에 대한 원정 당시 무분별하게 동맹부족까지 학살하였고 AD 215년 파르티아 원정을 무리하게 추진하였으나 곧 중단되자 오히려 알렉산드리아의 소요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AD 216년 재차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지만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하는 등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고 결국 황제의 자리를 노리던 근위대장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백인대장에 의해 AD 217년 암살되었다. 

 

마크리누스는 소원대로 황제가 되었지만 카라칼라가 벌인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채 강화를 맺는 과정에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포기하고 볼모로 잡고 있던 파르티아 왕의 어머니와 그 때까지 손에 넣은 모든 전리품을 반환하는 불리한 조건을 모두 수용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결국 카라칼라의 이모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가 음모를 꾸며 자신의 아들인 14세의 엘레가발루스를 카라칼라의 서자로 둔갑시켜 근위대의 지지를 얻어내었다. 결국 시리아의 군단까지 엘라가발루스의 편에 서자 마크리누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향해 도망쳤으나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붙잡혀 처형당했다.

 

 

엘라가발루스 및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혼란

 

엘라가발루스의 본명은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였지만 어머니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의 가문이 대대로 태양신 바알을 섬기던 엘라 가발이라는 제사장 가문이었기 때문에 엘라가발루스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해졌다. 엘라가발루스는 어머니의 음모 덕분에 카라칼라의 서자로 꾸며져 마크리누스를 죽이고 동방 출신으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인에게 바알 신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기면서 로마인들의 공분을 샀다. 또한 경박하고 장난이 지나쳐 거미집을 수집하고 각종 동물들로 마차를 끌게 하는 가 하면 손님들에게 유리로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음식에 거미를 넣거나 말똥을 섞기도 하였다. 엘라가발루스의 기행이 계속되자 그의 어머니인 율리아가 엘라가발루스를 설득하여 사촌 동생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후계자로 삼게 만들었지만 곧 변심하여 알렉산데르를 죽이려 하였다. 이에 반발한 근위대가 AD 222년 폭동을 일으켜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를 살해하게 된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새롭게 즉위했지만 그의 나이도 14세에 불과했지만 유명한 법학자인 울피아누스를 등용하고 로마 원로원과의 관계도 개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인 율리아 마마이아가 울피아누스를 실각시키면서 내정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고 파르티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부상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AD 226년에 처들어오면서 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병사들을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지만 군사적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패배하였다. 하지만 AD 234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알레만니족이 라인강을 건너 처들어 오자 개선식을 거행할 욕심에 알레만니족을 돈으로 매수하려고 하였고 그 사실이 발각되면서 어머니와 함께 근위대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과 3세기 위기의 시작

 

이렇게 하여 5대에 걸친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졌고 이후 로마 제국은 AD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 위에 오를 때까지 내부적으로 로마 군단이 황제를 마음대로 폐립하며 약 50년간 무려 18명의 황제(공동통치자까지 포함하면 26명)가 교체되는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특히 군인황제 시대로 불리는 이때 로마황제 중에 천수를 누린 사람이 2명 뿐일 정도로 혼란이 극심하였다. 이 시기는 대외적으로도 동방에 새롭게 등장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압박과 북방에서 날로 증가하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그동안 왕위다툼의 혼란을 겪던 파르티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동방의 강국으로 등장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로마의 동방 속주를 끊임없이 위협하였고 북방의 게르만족은 비록 통일된 정치체계는 없었지만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부족해진 식량을 찾아 로마 제국이 라인강 중류에서 도나우강 상류까지 연결하여 만든 방벽인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를 쉴새없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3세기의 위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 로마는 계속된 어려움 속에서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많은 면이 이전과 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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