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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Humanities/서양사 Western History 251

신성로마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 제2차 십자군 실패

로타르 3세 시대 AD 1125년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5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AD 1024년부터 100여년 동안 독일을 지배하던 잘리어 왕조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에 독일 제후들과 주교들이 모여 다시 왕위계승 선거를 실시해야만 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주플린부르크 가문의 작센 공작 로타르 3세였다. 비록 로타르 3세는 하인리히 5세 생전에 반기를 들어 전투에서 승리하고 사실상 독립상태가 되었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이미 늙고 후계를 이어받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최적의 후보자로서 여겨졌다. 결국 로타르 3세가 잘리어 왕조와 아무런 혈통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왕으로 선출될 수 있었는데 독일 제후와 주교들은 혈통에 의한 세습보다는 선거에 의한 왕위계승원칙을 ..

황제권과 교황권의 대립, 잘리어 왕조 시대, 카노사의 굴욕

콘라트 2세 시대 콘라트 2세는 신성로마황제 오토 1세의 딸인 리우르가르트와 결혼한 로렌 공작 콘라트 적공(Konrad der Rote)의 증손이었지만 아버지인 하인리히가 할아버지 케른텐 공작 오토의 공작 지위를 동생 콘라트에게 빼앗기고 슈파이어 백작에 머물렀고 설상가상으로 콘라트 2세가 2살에 불과한 AD 992년 요절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매우 불우하게 보내야 했다. 콘라트 2세는 아버지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아델하이트도 재혼하였기 때문에 누나 유디트와 함께 삼촌인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5세에게 양육이 맡겨졌고 보름스 주교 부트하르트의 슬하에서 자라야 했다. 이에 따라 비록 콘라트 2세는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신중하고 사려깊은 성품을 지니고 있고 신앙심이 깊으며 상냥..

신성로마제국, 오토 1세, 하인리히 2세

신성로마제국의 탄생 오토 1세 시대 프랑크 왕국이 분열하여 독일 지역에 성립했던 동프랑크 왕국은 AD 911년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인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한 이후 프랑켄 공작, 작센 공작, 슈바벤 공작, 바이에른 공작 등의 유력 제후들이 선거를 통해서 국왕을 선택하였고 이에 따라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와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차례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AD 936년 하인리히 1세가 자신이 죽기 1개월 전인 AD 936년 8월 7일에 자신의 아들인 오토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후 다른 공작들이 선거를 통해 오토 1세를 독일의 왕으로 인정하도록 만들면서 왕위 세습에 성공하고 작센 왕조를 창건하게 되었다. 이제 본격적인 중세 독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귀족 연합체의 명목상 1인자..

비잔티움 제국,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 마케도니아 왕조

비잔티움 제국의 위기와 혼란 이슬람 세력의 아나톨리아 반도 압박 비잔티움 제국은 헤라클리우스 황제 말기에 이슬람 제국에게 야르무크 전투(AD 636년)에서 대패하면서 영토가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시리아와 이집트라는 곡창지대를 빼앗겼으며 AD 674년부터 AD 678년 사이에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공격당하였다. 비록 "그리스의 불" 덕분에 해상의 이슬람 함대를 물리치면서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반도는 계속해서 공격받았다. 계속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가 점점 요새화되면서 주민들이 빠져나가시 시작하자 인구감소 방지와 지역 방위력 증강을 목적으로 테마제도가 실시되었다. 테마제도는 병사들에게 토지를 제공하여 정착시키는 대신에 군역을 담당하도록 만든 것으로 군사령관이 행..

로마 제국의 동서분열,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서로마 제국 멸망, 제노의 유일한 로마 황제 등극

동로마 제국의 등장 로마 제국의 제2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탄생 콘스탄티누스 1세는 AD 324년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이후 이미 유명무실해진 수도 로마를 대신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미 수도 로마는 3세기의 위기를 거치면서 황제가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곳으로 전락하였고 디아클레티니아누스가 로마 원로원의 입법기능마저 박탈하면서 더이상 수도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는 황제가 있는 곳이 바로 수도가 되었고 사두정치를 통해 이탈리아 본토의 통치를 담당하게 된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도 수도 로마가 아닌 밀라노에 주둔했을 정도로 수도 로마의 위상은 바닥에 떨어져 버린 상태였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새로운 수도의 건설을 추진했고 이에 선택된 곳이 발칸 반도와 아..

파르티아 제국, 로마-파르티아 전쟁, 사산왕조 페르시아 등장, 파르티아 제국 멸망

파르티아 제국의 등장 오리엔트의 혼란 '오리엔트(Orient)'의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 '시리아(Syria)', '팔레스타인(Palestine)',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이란고원(Iranian Plateau)', '이집트(Egypt)'와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Bactria)', '소그디아나(Sogdiana)', '아라코시아(Arachosia)', '드란기아나(Drangiana)', '게드로시아(Gedrosia)'를 통일했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Achaemenid Persia)'가 BC 330년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의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재위 BC 336년 ~ B..

게르만족의 대이동, 서로마 제국 위기, 히스파니아 브리타이아 독립, 훈족의 침공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위기 스틸리코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호노리우스는 11살로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으로 반달족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를 임명하였다. 스틸리코는 뒤에 등장하는 아이티우스와 함께 서로마 제국을 지탱한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게 된다. 로마인과 반달족의 혼혈로 태어난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와 결혼하고 호위대장(comes stabuli)에 임명받을 정도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총애를 받았다. 스틸리코는 AD 390년 로마군 최고 지위인 군사령관(magister militum)이 되었고 AD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군대를 총괄하는 총사령관(magister utriusquae militiae)으로 임명받으며 ..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고트족의 침략, 테오도시우스 1세, 로마의 동서 최종 분열, 그리스도교 국교화, 서로마 제국 멸망, 반달리즘(vandalism)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AD 363년 율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도중에 전사하고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요비아누스마저 AD 364년 급사하자 새로운 황제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일개 병사로 시작해 군사령관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요비아누스가 죽자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발렌티누스 1세는 계속된 서쪽의 게르만족 침입과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동생인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제국의 동부를 맡기는 대신에 자신은 서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주로 갈리아의 파리에 머물며 알레마니족을 격파하였고 브리타니아에 침공한 피트족과 스코트족을 상대하기 위해 유능한 장군인 플라비우스 테오..

군인황제시대 도래, 3세기의 위기,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사두정치 체제, 콘스탄티누스 왕조, 그리스도교 공인

군인황제시대 도래와 3세기의 위기 군인황제 시대의 개막 본래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로마 황제는 법적으로 확실한 지위가 아니라 로마 공화정의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 호민관 특권을 교묘히 뒤섞어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차기 황제의 계승 방법이 명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혈통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지만 아우구스투스를 이은 티베리우스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였고 오현제 시대에도 능력이 뛰어난 인물을 양자로 지정하는 방식으로 황제 계승이 이어진 것처럼 반드시 전임 황제의 혈통일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네로와 콤모두스, 카라칼라의 사례에서 보듯이 혈통에만 의존할 경우 폭군이 등장하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네로나 콤모두스가 죽은 이후 혈통이 단절되자 그때마다 로마 원로원이 로마 황제를 지명하였지만 결국은 로마 군단장끼리..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시대, 5현제의 번영, 팍스로마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시대 AD 69년 12월 21일 로마 원로원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하였으나 신중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그대로 알렉산드리아에 머문 채 디라키움의 무키아누스를 로마로 파견하였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대 반란을 빠르게 진압할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티투스에게 예루살렘을 신속히 함락하도록 하였고 티투스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여 5달의 포위전 끝에 AD 70년 9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비록 유대 반란은 최후의 항전을 벌인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는 AD 73년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지만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사실상 끝난 것이었다. 함락된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시대, 티베리우스 시대,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 유대 전쟁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시대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한 아우구스투스는의 기본적으로 포에니 전쟁 이후로 계속된 로마의 급격한 팽창이 이제 한계가 왔음을 인정하고 내실을 기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국경선의 안정을 위해 라인강, 도나우강, 시리아 같은 주요 국경에 요새를 짓고 로마 군단을 주둔시켰다. 다만 내전과정에서 40개까지 늘어난 군단을 예산문제로 28개로 감축하는 대신에 28개 군단을 상비군화하였고 부족한 병력은 로마 속주민으로 구성된 보조병으로 메웠다. 로마 군단은 로마시민권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 20년 동안 복무했고 보조병은 로마시민권이 없는 속주민으로 구성되어 요새수비, 국경 경비, 투사무기 발사병 엄호 등의 임무를 25년 동안 수행하는 대신에 제대 이후 로마 시민권을 얻을 ..

카이사르 암살, 아우구스투스 내전, 로마 제정,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 아우구스투스 등극,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Avgvstvs), 엠퍼러(emperer), 카이사르(Caesa..

카이사르의 암살 이제 명실상부하게 로마의 1인 지배자가 된 카이사르에게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이 부여되었다. 카이사르는 각종 사회정책(식민·간척·항만·도로건설·구제사업 등)을 추진하고 달력을 율리우스력으로 개정하는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BC 53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인에게 당했던 참패를 당했던 카르하이 전투를 설욕하고자 대규모 원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카이사르 반대파를 자극했다. 카이사르에게 이미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많은 사람들이 왕위를 탐내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또다시 엄청난 군사적 명성을 얻게 된다면 카이사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결국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앞세워 BC 44년 ..

카이사르 내전,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 Alea Jacta Est), 루비콘강, 파르살루스 전투, 폼페이우스의 죽음,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의 내전 제1차 삼두정치의 붕괴 BC 56년 루카 회담에 따라 BC 55년 집정관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나란이 선출되고 이듬해 전직 집정관 신분으로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로, 크라수스는 시리아로 각각 원하는 속주의 총독이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삼두정치 일원 중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진압 이외에는 별다른 군사적 업적이 없던 크라수스가 동방의 파르티아 원정을 야심차게 추진하였으나 BC 53년 카르하이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하여 제1차 삼두정치의 한 축이 무너져버렸고 더욱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연결해주던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이미 전년도에 병사한 상태였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결혼동맹도 깨져 있었다. 비록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제1차 삼두정치, 갈리아 전쟁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제1차 삼두정치 동맹시 전쟁에서 활약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불과 18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도와 동맹시 전쟁에서 활약하며 군사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세력에 속했지만 BC 87년 마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와 반대파를 숙청할 때 아버지는 이미 죽고 폼페이우스 자신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화를 피했다. 그러나 BC 83년 술라가 폰투스 원정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하자 폼페이우스는 동맹시 전쟁에서 아버지가 지휘하던 3개의 군단을 이끌고 술라에게 합류하였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내전 동안 뛰어난 군사적 활약을 보여줬고 그 덕분에 술라의 신임을 얻어 독재관이 된 술라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2년동안 마리우스의 잔당토벌을..

로마의 영토확대, 그라쿠스 형제, 마리우스 집권,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술라의 쿠데타

로마의 급격한 영토 확대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BC 264년부터 BC 146년까지 3차례 포에니 전쟁을 벌였고 동시에 마케도니아와도 BC 215년부터 BC 168년까지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으며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와도 BC 192년부터 BC 188년까지 시리아 전쟁을 벌였다. 이 모든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로마는 이탈리아 서남단의 시칠리아(BC 241년 속주편입), 이탈리아 서쪽의 지중해 섬인 코르시카와 사르데냐(BC 231년 각각 속주편입), 이베리아 반도의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와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BC 197년 각각 속주편입), 발칸반도 서북부의 옛 일리리아 지역인 일리리쿰(BC 167년 속주편입), 그리스에 해당하는 마케도니아-아카이아(BC 146년 속주편입), 북아프리카의 옛 카..

마케도니아 전쟁과 그리스 재패, 로마-시리아 전쟁과 아나톨리아 반도 진출, 제3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의 멸망

마케도니아 전쟁과 그리스 재패 제1,2차 마케도니아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카르타고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이제 서지중해에서 로마를 상대할 만한 세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제 로마의 관심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로마를 위협하던 마케도니아에 대한 응징이 되었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후예인 안티고노스 왕조가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BC 229년 마케도니아 왕으로 즉위한 필리포스 5세는 BC 216년 로마가 한니발에게 칸나에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자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BC 214년 일리리아의 로마 동맹도시들을 공격하여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10여 년 동안 지리하게 이어졌고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BC 206년..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이탈리아 침공, 티치노 전투, 트레비아 강 전투, 칸나에 전투, 스키피오, 카르타고 침공, 자마 전투

제2차 포에니 전쟁 전쟁의 배경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넘기고 막대한 전쟁배상금까지 지불하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쟁에 참여한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급해야 했기 때문에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다. 결국 급료 지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BC 240년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은 용병의 출신국가들과 카르타고 내의 반란 세력과 결합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용병의 반란이 쉽게 진압되지 못하고 거의 3년 4개월이나 끌었지만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활약한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가 이번에도 활약을 보이며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하였다. 다만 그 와중에 로마는 중립화시켰던 사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에 대한 지배권도 얻었다. 또한 북이탈리아로 ..

로마, 공화정, 이탈리아 반도 정복, 제1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

초기 왕정 로마는 전설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 전쟁에서 패배한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한 뒤 그의 손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 BC 753년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7세기경 팔라티누스 언덕에서서 조그마한 도시국가로 출발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초기 로마는 로물루스, 누마 폼필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앙쿠스 마르키우스의 4명의 왕이 차례로 통치한 후 BC 550년 경부터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에트루리아인에게 직접 통치를 받았다. 에트루리아 왕조는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세 명의 왕으로 이어지며 로마의 초기문화의 근간을 제공하였으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폭정을 못이긴 로마 시민의 ..

알렉산더, 박트리아 원정, 북인도 원정, 헬레니즘 제국 탄생

박트리아 원정 다리우스 대왕이 죽자 이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이 페르시아 왕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 원정이 마무리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헬라스 동맹의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테살리아와 그리스 동맹군을 모두 본국으로 되돌려 보냈지만 마케도니아군은 그대로 페르시아에 남긴 채 페르시아의 잔당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동방의 박트리아에 대한 원정을 계속했다. BC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엘부르즈 산맥을 넘어 카스피해 근처의 히르카니아로 진출하자 그 곳의 페르시아 태수와 귀족들이 항복하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들 중 일부에게 그대로 통치를 맡겼다. 그리고 엘부르즈 산맥에 거주하던 산악부족인 마르디족을 격파하였고 페르시아군에 종사하던 그리스 용병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또한 지금의..

알렉산더 대왕, 페르시아 원정, 아나톨리아 반도 점령, 이수스 전투,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더 대왕은 바로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서 태어났으며 공식적인 호칭은 알렉산드로스 3세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3년 동안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배우면서 학문적인 소양을 닦았고 전술 및 행정에 관해서는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에게 배웠다. 필리포스 2세의 맏아들로서 BC 340년 필리포스 2세가 비잔티움을 공격할 때 마케도니아의 대리통치를 맡았고 BC 338년의 카이로네이아 전투에 직접 좌익을 지휘하며 승리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필리포스 2세의 후계자 교육을 착실하게 받았지만 필리포스 2세와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사이가 좋지 않아 실제로는 아버지와는 소원한 사이였다. 결정적으로 어머니가 에페..

필리포스 2세, 그리스 패권, 제3차 신성전쟁, 카이로네이아 전투, 헬라스 동맹, 필리포스 2세, 망치와 모루 전술

필리포스 2세 필리포스 2세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마케도니아는 주변국의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필리포스 2세가 즉위하자 아직 안정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 동쪽의 트라키아와 파이오니아가 처들어왔고 동시에 아테네의 지원을 받는 아르게우스가 왕위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필리포스 2세는 트라키아와 파이오니아와 협정을 맺고 공물을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군사를 물리게 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후 군대를 이끌고 나가 아테네의 중장보병 3천명을 격파하였다. 이렇게 하여 필리포스 2세는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필리포스 2세가 즉위한 시절 그리스는 스파르타가 테베에게 레욱트라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그 영향력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이내로 크게 축소된 상태였고 테베 역시 BC 362년 만티네이아 ..

마케도니아 등장, 알렉산드로스 1세, 페르디카스 2세

마케도니아 등장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의 증손인 아리스토마쿠스의 세 아들 테메누스, 크레스폰테스, 아리스토데무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점령한 후 크레스폰테스가 메세니아와 스파르타를, 아리스토데무스가 라코니아를, 테메누스가 아르고스를 각각 차지하였다고 한다. 이 중에서 테메누스의 사후 그의 아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발생하였고 여기에서 밀려난 카라노스가 델파이의 현자인 피티아스의 조언에 따라 북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녹지로 우거진 골짜기를 찾아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아이가에'라고 명명하였는데 이것이 마케도니아 아르고스 왕조의 시작이다. 마케도니아의 시작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남겼다. 헤로도토스 역시 마케도니아의 기원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와 연관을 지었는..

스파르타 패권,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르키다모스 전쟁, 데켈레아 전쟁, 코린토스 전쟁, 안탈키다스 화약

스파르타 패권 펠로폰네소스 전쟁 스파르타는 모든 농업 활동을 노예인 헬로트에게 맡기고 스파르타인들은 모두 군사훈련에만 매진하는 독특한 제도 덕분에 그리스 폴리스 중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군사강국이 되었고 이러한 점은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여실히 들어났다. 그러던 중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의 힘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면서 융성하여 그리스 중부의 보이오티아까지 진출하면서 스파르타가 위협을 느끼게 되자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왕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스파르타군을 이끌고 엘레우시스 평원까지 진출했지만 왕의 자문을 맡은 클레안드리다스가 아테네의 페리클레스에게 매수당하면서 플레이스토아낙스는 BC 445년 아테네와 30년 화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물리고 말았다. 뇌물을 수수..

아테네 패권, 델로스 동맹, 페리클레스,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 패권 델로스 동맹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그리스 폴리스의 최종 승리로 끝난 직후인 BC 477년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재침공을 예방하고 여전히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계 도시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미칼레 전투를 위해 일시적으로 구성되었던 해군 동맹을 이제는 상설화시켰다. 이 동맹은 본부 및 동맹기금을 수납하는 금고가 델로스섬에 있었기에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이라고 불리게 된다. 델로스 동맹에는 에게해를 중심으로 한 거의 모든 그리스 폴리스가 참여하면서 융성시에는 참가한 숫자가 200개나 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해외에 지나친 힘을 소모하는 것을 꺼려한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과 중립을 유지하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오니아 반란, 다리우스 1세, 마라톤 전투, 팔랑크스 대형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오니아의 반란 오리엔트를 통일한 페르시아가 그리스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Achaemenid Persia)'가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해안에 위치한 이오니아의 몇몇 그리스계 도시들을 지배한 이후이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일반적으로 그냥 '페르시아 제국(Persian Empire)'으로 불리웠다. BC 544년경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Cyrus II)가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리디아(Lydia)'를 정복하면서 이오니아의 그리스계 도시들도 페르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그러나 BC 525년 키루스 2세의 뒤를 이은 캄비세스 2세(Cambyses II)가 이집트 원정에 성공하자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계 도시들의 페르시아에 대한 불만이 더 커졌는데 이..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플라타이아 전투, 미칼레 전투, 칼리아스 화약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테르모필라이 전투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넌 페르시아 군은 트라케와 마케도니아를 지난 후 발칸 반도를 남하했고 해군도 해안선을 따라 육군과 보조를 맞추어 전진했다. 페르시아의 재침공이 점차 현실화 되자 북부의 일부 그리스 폴리스들이 페르시아에게 항복했지만 대부분의 그리스 폴리스들은 서로 간의 반목을 중단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스파르타도 참전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자신의 장점을 살려 각각 해군과 육군을 지휘하기로 합의했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넓은 '테살리아(Thessalía)' 평원에서는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중부 지방의 좁고 험한 산악 지역인 '테르모필라이(Thermopylai)..

그리스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폴리스, 아테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과 직접 민주정, 스파르타의 군국주의, 과두정

에게 문명 1. 기원전 2000년경 크레타 섬, 그리스 본토 미케네 등지에서 발달 2.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으로 에게 해 주변에서 발달한 청동기 문명 3. 의의 서아시아와 이집트의 발달된 문물(오리엔트 문명)을 그리스와 유럽에 전달 크레타 문명 1. 성립 ▶ 에게 해 크레타 섬에서 성립한 청동기 문명 2. 특징 ▶ 크노소스 궁전 건축, 자유롭고 생동감 있는 문명 미케네 문명 1. 성립 ▶ 그리스 본토에서 발생한 청동기 문명 2. 성쇠 ▶ 군사적 성격 강함 → 트로이 정복, 철기를 사용하는 도리아인(도리스인)에 의해 멸망 에게 문명 '오리엔트(Orient)' 지방과 별도로 BC 3천년경부터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의 주변인 '에게해(Aegean Sea)'를 중심으로 '발칸(Balkan)..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1세, 테르모필라이 전투(Battle of Thermopylae), 스파르타 전사 300,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헬레니즘(Hellenism) 문명

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 이집트와 바빌론의 반란 진압 BC 486년 다리우스 대제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즉위하였다. 비록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리우스 대제의 장자는 아니었지만 즉위한 이후에 처음으로 얻은 아들로서 그 어머니가 키루스 대제의 딸인 아토사였기 때문에 다리우스 대제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즉위후 당면한 문제는 다리우스 대제 시절에 일어난 이집트의 반란을 평정하는 일이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속주민에게 관대했던 다리우스 대제와 달리 강압적인 방법으로 통치하기 시작하였는데 2년 동안 진행된 이집트 반란의 진압도 마찬가지여서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을 대대적으로 파괴하여 반란을 응징하였다. 또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자신이 이집트 반란 토벌에 매달려 있는 ..

지중해 패권 순서, 그리스와 페니키아, 카르타고와 로마, 로마제국, 동서로마의 분열, 게마르만족 왕국과 비잔틴제국, 이슬람, 르네상스의 도시국가, 오스만제국과 스페인제국

그페 카로로 동서 비게이스 르오스 근 "급해 가로로 동서 비게있스 누워서 근데" ● 지중해 패권 순서 그리스와 페니키아 카르타고와 로마 로마제국 동서로마의 분열 게마르만족 왕국과 비잔틴제국 이슬람 르네상스의 도시국가 오스만제국과 스페인제국 지중해 근현대사 그리스와 페니키아 식민지 카르타고와 로마

페르시아 제국, 캄비세스 2세, 이집트 정복, 다리우스 1세

캄비세스 2세 시대 즉위와 이집트 원정 준비 키루스 대제의 남은 목표는 옛 아시리아의 영토 중 정복하지 못한 이집트의 정벌 뿐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이집트 정벌을 나서기 전인 BC 530년 키루스 대제는 북방을 침입한 '스키타이인(Scythians)'의 일파인 '마사게타이족(Massagetae)'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이집트 정벌 숙원은 아들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II)에게 이어졌다. 캄비세스 2세는 태자로서 바빌론을 포함한 '바빌로니아(Babylonia)' 북부의 통치자로 임명받아 제국 통치를 배웠고 키루스 대제가 사망하자 곧바로 왕위를 계승한 후 제국을 안정화시켰다. 그리고 이미 키루스 대제 시절부터 이집트 원정의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캄비세스 2세는 즉위한 지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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