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르바니팔 시대
이집트 정복 완료
즉위 시에 형제들과 왕위 계승 다툼을 벌여야 했던 에사르하돈은 자신의 후계자를 정하면서 아들인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은 아시리아의 왕으로, 그의 이복 형제인 샤마시-슘-우킨(Shamash-shum-ukin)은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지명하였고 그의 사후 누구도 이에 대하여 반발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도록 했다. BC 669년 에사르하돈이 이집트 원정 중에 사망하자 에사르하돈의 염원대로 아슈르바니팔이 아시리아의 왕위를, 샤마시-슘-우킨이 바빌로니아의 왕위를 각각 계승하였다. 아슈르바니팔의 즉위한 후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이집트 원정의 마무리였다. 에사르하돈이 죽은 것을 알게된 이집트의 파라오(Pharaoh)인 타하르카(Taharqa)가 다시 반격을 개시하여 멤피스를 탈환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아슈르바니팔은 BC 667년 다시 군사를 보내 멤피스를 되찾고 타하르카를 다시 누비아 지역으로 내쫓았다.
아슈르바니팔은 이집트가 너무 멀어 직접 통치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아슈르바니팔은 나일강 델타 지역에 위치한 사이스의 제후인 네카우 1세(Necho I)를 새로운 이집트의 파라오로 내세웠다. 한편 누비아로 도망쳤던 타하르카가 죽고 조카 자격으로 그 뒤를 이은 탄타마니(Tantamani)가 다시 군대를 모아 이집트를 되찾고자 침공하였지만 아시리아군은 이를 물리치고 BC 656년 오히려 '상이집트(Upper Egypt)'의 중심지인 '테베(Thebes)'까지 차지해버렸다. 이렇게 하여 이집트는 누비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대신에 아시리아의 속국 신세가 되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화권이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바빌로니아 전쟁
한편 아슈르바니팔은 부왕이 시킨 맹세 때문에 즉위 후 16년 동안 바빌로니아에 대한 별다른 군사행동을 벌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빌로니아의 샤마시-슘-우킨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명령하였고 샤마시-슘-우킨이 이를 거부한 채 오히려 주변의 세력과 공모하여 반란을 준비하자 마침내 아슈르바니팔이 대대적인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샤마시-슘-우킨 역시 에사르하돈이 지정한 정당한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에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서아시아 전체가 각자의 편으로 양분되면서 전쟁이 무려 3년 간이나 진행되었다. 결국 아시리아군이 바빌론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고 식량이 바닥난 바빌론에서는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참상까지 벌어지자 BC 648년 샤마시-슘-우킨이 자살하면서 겨우 전쟁이 종식될 수 있었다.
오리엔트 대제국 건설
아슈르바니팔은 엘람과도 오랫동안 전쟁을 벌여 10년만인 BC 639년에 마침내 2천년의 역사를 가진 엘람을 정복하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슈르바니팔은 아시리아의 영토를 메소포타미아 전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대부분, 레반트(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레바논), 엘람, 이집트까지 확대시켰고 자신의 칭호에 '왕중왕(아카드어 šar šarrāni)'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만 아슈르바니팔은 파괴된 바빌론을 재건했으나 아시리아에 병합하지는 않고 그의 동생 중 한 명인 칸달라누(Kandalanu)를 별도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또한 아슈르바니팔은 정복활동 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 대한 지원에도 관심을 쏟으면서 그때까지 기록된 모든 언어와 점토판 서적을 수집하여 목록과 사본을 만든 후 오리엔탈 역사상 최초로 거대한 도서관을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에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슈르바니팔의 치세 동안 아시리아는 대외 팽창을 거듭하였지만 바빌로니아와의 오랜 내전으로 인해 오리엔트 전체가 피폐해졌고 엘람과의 전쟁도 오래 지속되면서 아시리아의 국력이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철기와 기병의 등장
아시리아의 강력한 군사력 뒤에는 철기와 기병의 영향이 컸다. 우선 철기의 경우 히타이트 시절부터 일부 사용되었으나 당시 제련 기술이 부족하여 청동기보다 강도가 약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제련기술의 발달과 함께 철기의 위력은 날로 더해갔으며 더욱이 청동기의 원료인 구리와 주석은 귀한 광석인데 반해서 철은 쉽게 발견가능했기 때문에 철기는 급속도록 퍼져나갔다. 아시리아는 이러한 철기의 위력을 일찍 알아차리고 전쟁 무기로 활용하였다.
철기와 함께 아시리아의 강대한 군사력의 배경에는 기병의 활용에 있었다. 말은 일찍부터 가축으로 길러지면서 전쟁에 활용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으나 기수가 안정적으로 탈 수 있는 안장이 존재하지 않았고 당시의 말이 체구가 작고 체력이 약했기에 중무장한 사람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말은 직접 타기 보다는 전차를 끄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전차는 평지에서만 속력을 낼 수 있고 전복의 위험성이 컸으며 유지비가 많이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러한 전차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말을 직접 타는 방안이 계속해서 강구되었고 마침내 안정적으로 말등위에 고정시킬 수 있는 안장개발과 중무장한 기수를 태울 수 있는 군마의 교배에 성공하였다. 아시리아는 이렇게 탄생된 기병의 전술적 활용도를 높히기 위해서 화살을 쏘는 궁기병과 창을 들고 직접 돌진하는 창기병으로 임무를 세분화하였다. 궁기병은 적 부대 배후 또는 측면을 공격하거나 전차부대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고 창기병은 투창을 던지거나 직접 보병대를 공격하여 공격하도록 하였다. 비록 기병이 등장한 이후에도 한동안 전차가 아시리아군의 주력을 차지하긴 하였으나 전투를 거듭할 수록 기병의 효용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빠르게 전차를 대체하였다.
아시리아의 멸망과 오리엔트의 분열
이집트 제26왕조의 독립
아시리아는 나슈르바니팔에 의해 오리엔트 전역을 모두 지배하는 대제국이 되었으나 영토가 너무 확대됨에 따라 광범위한 지역을 방위하기 위해서 군대가 분산되었고 바빌로니아와 벌인 내전으로 국력을 상당수 소모하고 말았다. 결국 BC 627년 아슈르바니팔이 사망하자 아시리아 속주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성공한 곳은 정복된 지 얼마되지 않은 이집트였다. 이집트는 BC 659년 네카우 1세가 죽은 뒤 새로운 파라오가 된 프삼티크 1세(Psamtik I)는 아시리아가 이집트를 정복하였을 때 충성을 맹세하였으나 나슈르바니팔이 죽자 곧바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나일강 상류에서 재기를 노리던 누비아인을 몰아내고 테베를 포함한 상이집트까지 모두 점령하면서 이집트 전체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왕조를 이집트의 '제26왕조(Dynasty XXVI)'라고 부르게 된다.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성립
이렇게 이집트가 독립하였으나 아시리아 왕궁에서는 매 왕위 계승시마다 벌어지던 권력 다툼이 아슈르바니팔 사후에도 이어지면서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아슈르바니팔이 죽은 이후 그 아들인 아슈르 에틸 이라니(Ashur-etil-ilani, 재위 BC 631년 ~ BC 627년)가 정상적으로 계승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되고 신-슈무-리시르(Sin-shumu-lishir)가 왕위를 계승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아슈르바니팔의 또 다른 아들 신-샤르-이쉬쿤(Sin-shar-ishkun, 재위 BC 627년 ~ BC 612년)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이렇게 왕위계승분쟁이 이어지는 사이에 북방에서는 유목민인 스키타이인이 계속해서 침입하였으나 중앙 정부 차원에서의 대응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아시리아 속주들은 자구책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고 아시리아의 가혹한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었던 피정복인들이 무력을 가지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반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아시리아 전역이 반란에 휩싸이자 BC 626년 남부 바빌로니아의 총독인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가 칼데아인을 규합하여 스스로 바빌론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를 '신(新) 바빌로니아 왕국(Neo-Babylonian Empire)' 또는 칼데아인이 세웠다고 하여 '칼데아 왕국(Chaldean Empire)'으로 부르며 바빌로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조가 된다. 나보폴라사르는 북부 바빌로니아까지 점령하여 영토를 확대하였고 아시리아를 여러차례 침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단독으로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기 어렵다고 생각하고는 그동안 아시리아와 스키타이인의 핍박을 받으며 움추려 지내야 했던 동쪽의 메디아 왕국의 키악사레스(Cyaxares)와 동맹을 맺었다.
메디아 왕국의 성립
메디아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 생몰년 BC 484년 ~ BC 425년)에 따르면 BC 709년 전설상의 군주인 데이오케스(Deioces)에 의해 지금의 이란 북부와 아제르바이잔에서 성립된 나라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데이오케스의 아들로서 메디아의 2대 왕이 된 프라오르테스(Phraortes)를 실제 메디아의 창건자로 보고 있다. 프라오르테스는 작은 마을의 족장이었으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확장하였고 마침내 메디아인(Medians)과 킴메르인을 규합하여 아시리아와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BC 653년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에게 패배하면서 피살당하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그 틈을 노린 스키타이인에게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그 후 BC 625년 프라오르테스의 아들인 키악사레스가 연회 도중에 스키타이인 족장을 살해하며 왕위를 되찾았다. 그리고 군대를 개편하여 창군, 궁수, 기병으로 나누는 군사 개혁을 단행하였고 아버지의 원수인 아시리아와의 전쟁을 재개하였다. 신바빌로니아의 나보폴라사르가 반(反) 아시리아 동맹을 제의한 것이 바로 이즈음이었다.
아시리아의 멸망
이렇게 세력을 되찾은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가 연합하여 아시리아를 침공하자 아시리아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고 BC 614년 아시리아의 발상지인 아슈르가 함락된 데 이어 BC 612년 마침내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가 점령당하며 철저히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샤르-이쉬쿤을 살해당했으나 아시리아의 왕족이었던 아슈르-우발리트 2세(Ashur-uballit II)가 니네베를 탈출하여 '하란(Harran)'에서 왕위에 오른 뒤 이집트의 네카우 2세(Necho II)와 동맹을 체결하며 아시리아의 명맥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네카우 2세가 보낸 이집트군이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군대를 상대로 처음에는 레반트 지방에서 승리를 거듭하였으나 '카르케미시 전투(Battle of Carchemish)'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아슈르-우발리트 2세는 고립무원이 되었고 BC 609년 하란마저 신바빌로니아에게 점령당하면서 오리엔트의 대제국이었던 아시리아가 최종적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이후 아시리아의 아시아 영토는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가 분할하여 지배하게 된다.
리디아 왕국의 성립
한편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 지역에는 '리디아 왕국(Kingdom of Lydia)'이 자리잡고 있었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BC 1300년경 전설상의 군주인 마네스(Manes)에 의해 '마에오니 왕조(Maeoniae dynasty)'가 창건되었고 마에오니 왕조의 마지막 왕인 리두스(Lydus)의 이름을 따서 나라 이름이 '리디아(Lydia)'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BC 13세기 초 헤라클레스의 현손으로 알려진 전설 상의 군주 아르곤(Agron)이 왕위를 찬탈하면서 리디아의 두번째 왕조인 '헤라클레스 왕조(Heraclid dynasty)'가 시작되었으나 BC 716년 헤라클레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칸다울레스(Candaules)가 친구인 기게스(Gyges)에게 암살당하면서 헤라클레스 왕조도 단절되고 대신하여 기게스가 리디아의 세번째 왕조인 '메름나드 왕조(Mermnad dynasty)'가 등장하였다. 이후 리디아는 사르디스를 수도로 삼았고 킴메르인과 몰아내면서 이오니아와 프리기아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아시리아가 멸망할 당시에는 기기세의 증손자인 알리아테스(Alyattes)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알리아테스는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메디아의 키악사레스가 BC 590년 리디아까지 욕심을 내면서 처들어오자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전쟁은 5년 동안이나 이어졌지만 BC 585년 일어난 개기일식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 키악사레스가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쟁이 끝났고 리디아와 메디아의 국경선이 '할리스 강(Halys River)'으로 정해졌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소수민족
우라르투
인도-유럽어족인 현재의 '아르메니아인(Armenians)'이 정착하기 이전의 '아르메니아(Armenia)' 지역에는 이들과 별개의 민족인 '나이리(Nairi)' 부족이 살고 있었다. BC 858년 경 아라무(Aramu)가 나이리 부족을 통합하면서 '우라르투(Urartu)'를 건국하였고 이후 아시리아(Assyria)의 북방을 끊임없이 위협하게 되었다. 우라르투는 BC 834년 왕위에 오른 사르두리 1세(Sarduri I)가 수도를 '투쉬파(Tushpa; 현재 터키의 반)'로 옮긴 후 주변 민족을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시키기 시작하면서 BC 764년에 즉위한 사르두리 2세(Sarduri II) 시절에 최대 영토를 보유하게 된다.
그렇지만 BC 735년 루사 1세(Rusa I)가 즉위한 이후부터 남쪽의 아시리아의 경우에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Tiglath-Pileser III)가 BC 745년 즉위하면서 다시 강성해지기 시작했고 흑해 연안에서도 새로운 유목 민족인 '킴메르인(Cimmerians)'이 나타나면서 우라르투가 위기를 맞이했다. 결국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아시리아와 킴메르인의 공격에 우라르투의 영토가 계속 축소되었고 BC 722년 사르곤 2세(Sargon II)가 아시리아의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거의 멸망 직전까지 내몰리게 되었다.
BC 706년 사르곤 2세가 죽자 루사 1세의 아들인 아르기슈티 2세(Argishti II)가 킴메르인과 아시리아 세력을 몰아내고 실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에도 아시리아의 공격을 계속 받아야 했다. 북방에서는 새롭게 '스키타이인(Scythians)'까지 등장하면서 국력이 다시 쇠퇴하던 중 아시리아를 무너뜨린 메디아의 공격을 받게 되자 우라르투는 BC 585년 경 멸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아르메니아 역사에서 우라르투는 사라졌고 그로부터 20년 후 전설상의 군주인 오론테스 1세(Orontes I)가 새롭게 즉위하면서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
킴메르
BC 8세기경부터 카프카스 지방에 살던 유목 민족인 '킴메르인(Cimmerians)'들이 흑해 연안을 따라 아나톨리아 반도 북동쪽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우라르투가 있었기 때문에 충돌이 불가피했고 우라르투는 남쪽의 아시리아를 방어하는 데도 벅찬 상태였기 때문에 킴메르인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또한 킴메르인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서부 지역을 공격하여 '프리기아(Phrygia)'를 정복하고 리디아(Lydia)를 약탈하면서 에게해 연안의 '이오니아(Ionia)'까지 진출하여 그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그런데 그동안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우라르투가 쇠퇴한 이후 직접 아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이번에는 아시리아와 전쟁을 벌여야 했고 아시리아의 에사르하돈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비록 아시리아가 메디아와 신 바빌로니아의 연합공격에 무너지면서 재기할 기회를 얻었지만 서쪽에서는 리디아의 왕 알리아테스 2세에게 밀려나고 북쪽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스키타이인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급격히 세력이 쇠퇴하였고 BC 512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의 베히스툰 비석에서 언급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프리기아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서부에 BC 15세기경에 인도-유럽어족인 '프리기아인(Phrygians)'이 정주하면서 '프리기아 왕국(Kingdom of Phrygia)'이 성립되었다. 헤로도토스는 프리기아의 창건자를 고르디아스(Gordias)로 기록하였고 그의 아들이 바로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황금으로 변한다는 전설로 유명한 미다스(Midas)이다. 당시는 히타이트가 아나톨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시절이므로 아마도 히타이트의 속국으로 지냈고 히타이트가 멸망한 이후 비로소 독립국가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프리기아는 한때 동쪽으로 진출하여 우라르투와 충돌하기도 했지만 BC 7세기경 아나톨리아 반도로 유입된 킴메르인에게 점령당했고 이후 BC 546년에는 킴메르인을 몰아낸 리디아의 영토가 되었다.
스키타이
BC 11세기 경 흑해 북쪽의 돈강으로부터 프루트강으로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초원 지대에 살던 이란계 유목 민족인 '스키타이인(Scythians)'들은 BC 7세기 경부터 아나톨리아 반도의 북부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스키타이인은 부족 연맹적인 성격으로 단일 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기마술과 궁술을 보유하여 큰 위협이 되었다. 스키타이인은 BC 6세기경 아조프해 북부로 근거지를 형성했고 서쪽으로 동유럽의 도나우강 중류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킴메르인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나타난 것도 스키타이인에게 밀려났기 때문이었고 최종적으로 킴메르인을 멸망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스키타이인들은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오리엔트를 끊임없이 위협하며 BC 2세기까지 이어진다. 특히 스키타이인의 기마술은 훗날까지도 주변국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