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문명 1. 기원전 2000년경 크레타 섬, 그리스 본토 미케네 등지에서 발달 2.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으로 에게 해 주변에서 발달한 청동기 문명 3. 의의
크레타 문명 1. 성립 ▶ 에게 해 크레타 섬에서 성립한 청동기 문명 2. 특징 ▶ 크노소스 궁전 건축, 자유롭고 생동감 있는 문명
미케네 문명 1. 성립 ▶ 그리스 본토에서 발생한 청동기 문명 2. 성쇠 ▶ 군사적 성격 강함 → 트로이 정복, 철기를 사용하는 도리아인(도리스인)에 의해 멸망 |
에게 문명
'오리엔트(Orient)' 지방과 별도로 BC 3천년경부터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의 주변인 '에게해(Aegean Sea)'를 중심으로 '발칸(Balkan)' 반도와 그 주변의 섬,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의 서부 연안 지역에는 청동기 문명이 서로 독자적으로 발달하였다. 이를 '에게 문명(Aegean Civilization)'이라고 통칭한다. 에게 문명은 다시 에개해 중앙에 위치한 소군도인 '키클라데스 제도(Cyclades Islands)'에서 발달한 '키클라데스 문명(Cycladic Civilization)', 에게해 남쪽의 '크레타섬(Crete Island)'에서 발달한 '크레타 문명(Crete Civilization)', 그리스 본토에서 발달한 '헬라도스 문명(Helladic Civilization)'으로 나뉘게 된다.
그 중 가장 먼저 발생한 키클라데스 문명은 여러 개의 섬으로 흩어져 있어서 하나의 정치 집단으로 통일되지 못한 채 BC 2천년경 좀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크레타 문명에 밀려 자연스럽게 독자성을 잃게 되었다. 크레타 문명은 에게해 남쪽의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명으로 전설속의 왕인 '미노스(Minos)'의 이름을 따서 '미노스 문명(Minoan Civilization)'이라고도 부른다. 미노스는 동지중해의 중계 무역 덕분에 많은 부를 축적하여 호화로운 '크노소스(Knossos)' 궁전을 짓기도 하였고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 괴물인 '미노타우로스(Minotauros)'의 이야기도 크레타 문명에서 탄생하였을 정도로 후대에까지 많은 전설을 남겼다. 이러한 크레타 문명은 BC 1400년경 멸망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인(Mycenaeans)'의 침략이 그 원인이라는 설과 화산 폭발로 인한 화재, 지진 해일이 그 원인이라는 설이 있다.
키클라데스 문명과 크레타 문명이 발달한 때와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 본토에서도 독자적인 문명이 발달하였는데 이를 '고대 그리스어(Ancient Greek)'로 '그리스(Greece)'를 뜻하는 헬라도스 문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 북부에서 새롭게 유입된 '아카이아인(Achaeans)'들이 그리스 본토의 선주민을 정복하고 '미케네(Μυκήνη)', '아테네(Ἀθῆναι)', '테베(Θῆβαι)', '티린스(Τίρυνς)', '테살리아(Θεσσαλία)', '필로스(Πύλος)' 등과 같은 여러 도시를 건설했고 대표적인 유적지인 미케네의 이름을 따서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이라고도 불린다. 주로 중계 무역을 통해서 성장한 크레타 문명과 달리 미케네 문명은 정복 전쟁을 통해 발전했다. BC 1400년경 크레타 문명이 멸망하면서 미케네 문명이 고대 그리스의 패자가 되었고 이후 호메로스(Hómēros)의 《일리아드(Iliad)》와 《오딧세이(Odyssey)》를 비롯한 다양한 그리스 신화의 배경이 될 정도로 번성하였지만 BC 1100년경에 멸망하고 만다.
미케네 문명이 멸망한 이후 고대 그리스는 이전 문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3백년 동안이나 '그리스 암흑기(Greek Dark Ages, BC 1100년경 ~ BC 750년경)'로 불리는 문명의 퇴보 현상을 보이게 된다. 그리스 암흑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기 때문에 수수께끼로 남았고 다만 '도리아인(Dorians)'이 북방에서 내려와 미케네 문명을 멸망시킨 것으로 추정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미케네 그리스어(Mycenaean Greek)'를 기록하는 데 사용한 '선형문자 B(Linear B)'의 해석이 가능해지면서 미케네 문명이 멸망하기 이전부터 도리아인이 남하하여 공존했다는 반박이 제기되고 있다. 이 밖에 '히타이트(Hittite, BC 1680년경 ~ BC 1178년경)'를 멸망시키고 '고대 이집트(Ancient Egypt)'의 '제20왕조(Dynasty XX, BC 1189년 ~ BC 1077년)'와 '아시리아 중왕조(Middle Assyrian Empire, BC 1392년 ~ BC 934년)'를 쇠퇴시킨 것으로 알려진 '바다의 민족(Sea Peoples)'이 미케네 문명을 멸망시켰다는 설도 있지만 '바다의 민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다.
철기 시대, 그리스 폴리스의 탄생
약 300년간의 암흑기를 지난 후 BC 8세기경에 그리스에는 이전의 에게 문명과 연관성이 없는 독자적인 문명이 다시 나타났다. 이 문명은 산과 섬이 많은 그리스의 지형 여건상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루지는 못한 채 방위에 편리한 곳에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하여 '폴리스(Polis)'라고 불리는 지역별로 독립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들 폴리스는 에게 문명을 이어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케네 문명의 선형문자 B 대신에 '페네키아 문자(Phoenician Alphabet)'에서 유래한 별도의 문자를 사용하였고 에게 문명와 같은 왕정이 아니라 대토지를 보유한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원로원(Senate)'과 일반 시민들로 이루어진 '민회(Ecclesia)' 중심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고대 그리스 문명은 현대 정치, 예술 사상, 과학 사상, 문학, 철학 등의 오늘날 서구 문명의 상당 부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폴리스는 해안으로부터 멀지 않은 평야에 위치하였고 시내 중심부에는 도시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이 위치한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고 불리는 언덕이 있었는데 이 곳은 외적이 침입할 경우를 대비한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였다. 폴리스 시내에는 주로 귀족과 수공업자, 상인들이 거주하고 그 바깥쪽에는 농민들이 살았다. 외곽에는 성벽을 쌓았지만 이는 외적을 방어할 목적일 뿐 신분을 구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가 아닌 자유민인 폴리스의 시민들은 동등한 시민권을 누리고 정무와 군무에 종사할 수 있었으며 '아고라(Agora)'라고 불리는 시장이 모든 시민들이 참석할 수 있는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폴리스의 숫자는 '그리스 고전기(Classical Greece, BC 510년 ~ BC 323년)'에 그리스 본토에만 2백개가 넘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이오니아(Ionia)'나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이탈리아어 Sicilia)' 등 에게해와 지중해 일대에 건설된 식민시까지 합치면 1천개가 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곳은 '아티카(Attica)' 반도의 '아테네(Athênai)'와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반도의 '스파르타(Sparta)'였다.
그리스 폴리스의 발달
아테네의 탄생과 초기 귀족정
아테네는 미케네 문명 당시부터 존재했던 유서깊은 도시였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도시의 수호신으로 '포세이돈(Poseidon)'과 '아테나(Athena)'가 서로 경합을 벌였고 인간에게 더 유용한 것을 제공하는 쪽을 수호신으로 하자는 제안에 대하여 포세이돈은 호수를 선물하였으나 짠 물이라 마실 수 없었던 반면에 아테나는 '올리브(Olive)'를 선물로 주면서 도시 이름이 아테네로 정해졌다고 한다. 아테네도 다른 초기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시민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진 공동체로서 왕 대신에 '아르콘(Archon)'이라고 불리는 고위 행정관이 종교, 군사, 사법을 총괄하였다. 아르콘의 숫자는 초기에는 3명이었으나 나중에는 9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아르콘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세습 귀족(Eupatridai; 에우파트리다이)'만 부여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친귀족적인 정책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철제 농기구 도입에 따른 농업 생산력의 증대로 인해 대토지를 보유한 귀족층에게 부가 집중되면서 귀족층이 권력을 독점하는 '귀족정(貴族政, Aristocracy)' 형태가 등장하였다.
솔론의 개혁
귀족정 아래에서 빈궁한 농민들이 점차 부채 때문에 토지를 저당으로 상실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노예로 전락하면서 극심한 계급갈등을 낳았다. 이렇게 공동체 양극화 문제가 발생하자 BC 594년 아르콘으로 선정된 솔론(Solon)에 의해 일련의 개혁 작업이 진행된다. 솔론은 우선 토지 재산에 따라 아테네 시민들을 4개의 계급으로 나누고 그에 따른 정치 참여 권리와 군사 의무를 구분하였으며 상위 2개 계급에게 아르콘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세습귀족들이 가졌던 아르콘의 지위 독점권이 깨졌다. 또한 40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Boule)'를 신설하고 민회에 상정할 의제를 검토하도록 하였는데 400인의 평의회에는 3번째 계급까지 참석할 수 있어 중산층까지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회에는 모든 계급이 참여하도록 하여 최하위 계급에게도 정치 참여의 기회를 부여하였다.
이와 별도로 솔론은 BC 624년 드라코(Draco)가 제정한 법률이 사소한 일도 사형을 가하는 일이 많아 너무 가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살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형을 금지시켰다. 또한 아테네는 해안가에 위치하여 평지가 적은 탓에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족한 식량은 수입하고 비교적 풍부한 올리브를 제외한 나머지 농산물의 수출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솔론의 개혁은 비록 당대에는 토지 재분배를 기대한 빈민층의 반발을 불러왔지만 정치 권력을 출생이 아닌 재산을 기준으로 부여하여 세습 귀족의 힘을 약화시켰고 아테네의 경제 구조를 농업이 아닌 상공업 중심으로 변경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아테네가 해상 무역으로 번영하는 기틀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
비록 솔론의 개혁 덕분에 아테네의 계급 갈등이 많이 완화시키기는 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솔론이 10년간 휴가를 떠난 사이 아테네에서는 지주 계급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리쿠르고스(Lycurgus)의 '평원당(Pedieis)'과 부유한 상인과 무역상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메가클레스(Megacles)의 '해안당(Paralioi)'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원당과 해안당이 서로 다투는 틈을 이용하여 농민과 빈민들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의 '산악당(Hyperakrioi)'이 제3의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의 통치 시절 '살라미스섬(Salamis Island)'을 둘러싸고 '메가라인(Megareans)'들과 벌인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만큼 각종 계략에 능했다. 특히 그는 겉으로는 민주정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숫자가 가장 많은 농민과 빈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스스로 왕처럼 군림하는 '참주(僭主, Tyrannos)'가 되어 독재 정치를 펼치는 '참주정(僭主政, Tyranny)'을 추구하였다. 참주정은 오리엔트의 전제군주정의 영향을 받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폴리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였고 점차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BC 561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우선 스스로 자신의 몸과 노새에게 상처를 입힌 뒤 대중 앞에 나타나 반대파로부터 공격받았음을 주장하여 무장 호위 병력을 둘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이 무장 호위대를 동원하여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함으로써 참주가 되었다. 이후 반대파인 리쿠르고스와 메가클레스가 연합한 반격에 국외로 망명을 떠나야 했지만 10년간의 망명생활에서 오히려 금은광 채굴을 통해 부를 축적한 후 용병을 이끌고 귀국하면서 BC 546년 다시 참주가 될 수 있었다. 다만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죽을 때까지 독재자로 군림하였지만 솔론의 법률을 준수하고 농민층을 보호하는 한편 대외 무역도 장려하여 '황금 시대(Golden Age)'라는 아테네의 번영을 이끌어내었고 이때부터 아테네가 그리스의 폴리스를 주도하는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과 직접 민주정 체제 구축
비록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로서 아테네를 번영시켰지만 기본적으로 참주는 오늘날 '폭군(Tyrant)'으로 번역되는 것처럼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 폭력 등의 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하였고 자신의 권력을 자식에게 세습시키는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BC 527년(혹은 BC 528년) 그가 죽자 그의 아들인 히피아스(Hippias)가 참주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이에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추방당했던 메가클레스의 아들인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가 세력을 규합하고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히피아스를 추방한 후 다시는 참주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개혁 작업에 착수하였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씨족 중심의 전통적인 4부족 체제를 10부족 체제로 재편하여 세습 귀족의 권력기반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데모스(demos)'라 불리는 촌락 공동체를 기본 정치 단위로 하여 그 속에서 공직자를 선출하도록 했고 18세 이상의 남자라면 누구나 데모스에 등록하도록 하여 아테네의 모든 시민에 공직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또한 참주의 출현을 막기위해 1년에 한 번씩 위험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적어넣어 6천표 이상이 되는 최고득표자를 10년 동안 추방하는 '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 Ostrakismos)'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덕분에 아테네는 귀족정이나 참주정에서 벗어나 데모스를 기반으로 한 '직접민주정(直接民主政, Direct Democracy)'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의 발달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부에 위치한 스파르타의 공식적인 국가명은 '라케다이몬(Lacedaemon)'이었나 일반적으로 중심 도시의 이름인 스파르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라케다이몬은 그리스 신화의 주신인 '제우스(Zeus)'와 '님프(Nymph; 요정)'인 '타이게테(Taygete)'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이었고 스파르타는 라케다이몬의 아내 이름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라케다이몬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서부에 자리를 잡고 왕이 되면서 나라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땄으나 수도는 아내의 이름인 스파르타로 지었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아네테와 여러모로 대비가 되는데 달리 토지가 비옥하고 넓어 식량의 자급 자족이 가능하였고 주로 무력에 의한 정복 전쟁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특히 스파르타는 BC 7세기경 2차례에 걸쳐 '메세니아 전쟁(Messenian Wars)'을 통해 비옥한 지역인 '메세니아(Messenia)' 지역을 병합하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스파르타는 피정복민인 '메세니아인(Messenians)'을 '헬로트(Helot)'라고 불리는 국유 노예로 삼아 자유민 신분인 순수한 '스파르타인(Spartans)'과 구분했다.
리쿠르고스의 개혁과 스파르타의 군국주의, 과두정 체제
스파르타가 정복 전쟁을 통해 성장하면서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문제가 발생하자 리쿠르고스(Lycurgus)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Oracle of Apollo at Delphi)'을 받고 일련의 개혁작업을 추진하였다. 리쿠르고스가 실존한 인물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Hēródotos, 생몰년 BC 484년 경 ~ BC 425년 경), 크세노폰(Xenophōn, 생몰년 BC 430년 경 ~ BC 354년 경), 플라톤(Plátōn, 생몰년 BC 428년 경 ~ BC 348년 경), 플루타르코스(Ploútarchos, 생몰년 AD 46년 ~ AD 119년)가 모두 스파르타의 독특한 제도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 의하면 리쿠르고스는 먼저 토지 개혁을 통해 소수에게 집중된 토지를 스파르타인 전체에게 재분배하였으나 실제 농업 활동은 메세니아인을 노예로 삼은 헬로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스파르타인은 오로지 군사 훈련과 육체 단련에만 매진하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15명 이상의 공동 식사 제도를 정하여 스파르타인 사이의 완전한 평등을 이루어냈고 경제적으로는 쇄국 정책을 펼치며 상업 활동을 제한하여 금화 및 은화의 유통을 금지시키고 스파르타 안에서만 가치가 있는 철제 화폐만 오로지 사용하도록 하였다. 다만 필수적인 제조업과 상업을 제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페리오이코이(Perioikoi)'라는 반(半)자유민 계급이 별도로 만들어졌다.
스파르타는 공식적으로는 '에우리폰 가문(Eurypontids)'과 '아기스 가문(Agiads)'에서 1명씩 뽑힌 2명의 왕이 통치하는 군주제 국가였지만 리쿠르고스가 정치 개혁을 실시하면서 민회에서 선출된 28명의 원로회 의원과 두 명의 왕을 포함한 총 3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에서 민회에 상정할 안건을 논의하도록 변경되었다. 다만 겉으로는 민회가 스파르타인 전원으로 구성된 최종 의결 기구로서 스파르타인 전체가 국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안건에 대한 발의권을 원로원에게만 부여했기 때문에 민회는 단순히 국가 정책을 설명듣고 동의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민회에서 선출된 5명의 감독관(éphoros; 에포로스)'이 행정권을 위임받았는데 종신직인 원로회 의원과 달리 감독관은 임기가 존재하고 재선이 허락되지 않는 대신에 왕이 법을 어길 경우 이를 처벌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지녔다. 이렇게 하여 스파르타의 왕은 그 권한을 대폭 제한을 당한 채 최고 군사령관과 최고 사제의 지위에 머무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고 실제 통치권은 원로원과 감독관이 행사하게 되었다.
리쿠르고스 개혁을 통해 스파르타는 소수의 자유민인 스파르타인이 다수의 헬로트와 페리오이코이를 지배하고 민회에서 선출된 소수의 원로원과 감독관이 스파르타인 전체를 지배하는 '과두정(寡頭政, Oligarchy)' 형태가 되었다. 또한 스파르타인들은 분배받은 토지를 헬로트가 경작하게 하고 그 생산량의 절반을 받게 되면서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갖게 된 대신에 스스로의 비용으로 무장하고 공동 식사 비용을 분담하며 육체 단련과 군사 훈련에만 매진하는 직업 군인으로만 살아가도록 강요받았다. 대신에 금욕적인 생활과 엄격한 교육, 훈련 덕분에 그리스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게 되면서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더불어 그리스의 가장 유력한 폴리스로 자리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