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포스 2세
필리포스 2세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마케도니아는 주변국의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필리포스 2세가 즉위하자 아직 안정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 동쪽의 트라키아와 파이오니아가 처들어왔고 동시에 아테네의 지원을 받는 아르게우스가 왕위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필리포스 2세는 트라키아와 파이오니아와 협정을 맺고 공물을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군사를 물리게 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후 군대를 이끌고 나가 아테네의 중장보병 3천명을 격파하였다. 이렇게 하여 필리포스 2세는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필리포스 2세가 즉위한 시절 그리스는 스파르타가 테베에게 레욱트라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그 영향력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이내로 크게 축소된 상태였고 테베 역시 BC 362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에파미논타스가 전사하면서 예전의 강력함을 잃은 상태였다. 또한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를 딛고 제2차 아테네 해상동맹을 구축하였으나 동맹시(BC 357년 ~ BC 355년) 전쟁이 일어나 로도스, 코스, 키오스 등이 동맹에서 이탈하면서 델로스 동맹만큼의 힘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하여 스파르타와 테베, 아테네 중 어느 누구도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했고 그리스 폴리스들도 분열되어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에 필리포스 2세는 마케도니아를 강국으로 발돋음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군사력을 강화시킬 필요를 느끼고 대대적인 군제개혁에 착수하였다. 이때 필리포스 2세는 볼모시절 만났던 테베의 명장인 에파미논다스로부터 배운 다양한 군사지식을 적극 활용하였다.
우선 마케도니아도 다른 그리스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중장보병이 군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기존의 2~4m 그리스 장창보다 훨씬 큰 7.3m 정도의 사리사를 들게 하여 공격력을 강화시켰고 방패에 줄을 매달아 목에 걸게하여 거대한 사리사를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마케도니아 중장보병은 "페제타로이"라고 불리웠다. 또한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 기병의 활약에 주목하여 기병을 양성하였는데 기병에게도 사리사 창을 들게하여 백병전 능력을 향상시켰다. 이러한 마케도니아 중기병은 귀족자제들로 이루어진 국왕 친위대로 "헤타이로이"라고 불렀는데 "왕의 친구"라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히파스피스타이"라고 불리는 특수보병을 양성하였다. 히파스피스타이의 장비에 대해서는 정해진 학설은 없으나 일반적으로 방패 등의 충분한 방어장비와 창, 검으로 무장한 최정예 보병으로 전투시에 필리포스 2세를 지키는 근위병 역할과 함께 측면공격이 약한 중장보병의 팔랑크스를 측면에서 보호하는 방패병 역할도 수행하였다고 한다.
그리스 북부 영토확장
BC 357년 필리포스 2세는 오랫동안 마케도니아를 괴롭히던 서북쪽의 일리리아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뒤 일리리아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렇게 북방이 안정되자 이번에는 아테네에게 접근하였다. 당시 아테네가 동맹시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아테네가 오랫동안 노리고 있던 암피폴리스를 대신 점령해주는 대신에 BC 363년 빼앗겼던 피드라를 되돌려 줄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필리포프 2세는 암피폴리스를 점령한 후 아테네에게 반환하지 않고 피드라와 함께 그대로 차지하였고 이에 아테네가 전쟁을 선포하였으나 에게해 북서쪽 칼키디키 반도의 올린투스를 중심으로 한 칼키디키 동맹과 연합하여 아테네군을 물리쳤다. 필리포스 2세는 그 대가로 포타다에아를 점령하여 칼키디키 동맹에게 양도하기로 하였는데 아테네와 달리 이번에는 약속을 지켰다.
필피포스 2세가 암피폴리스를 차지하면서 그곳의 팡가이온 금광으로부터 막대한 군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필리포스 2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BC 356년 금광이 발견된 크레니데스를 점령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필리피로 개명시켰다. 이후 필리피 금광은 암피폴리스의 팡가이온 금광과 함께 마케도니아의 귀중한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BC 355년 아테네의 테르마이크 만의 마지막 거점인 메톤을 공격하였고 필리포스 2세는 한쪽 눈을 잃었고 아테네가 함대를 파견하였지만 BC 354년 결국 함락시켰다. 이듬해 필리포스 2세는 트라키아의 해안도시인 아브디라와 마로네아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하여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북부 대부분을 차지하며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못지않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제3차 신성전쟁 개입
BC 356년 그리스 중부의 테베와 포키스의 대립으로 인해 제3차 신성전쟁이 발발하였다. 테베는 포키스를 견제하기 위해 델포이를 설득하여 포키스가 델포이의 신성한 땅을 경작하고 있으므로 무거운 벌금을 물리게 하였다. 만일 포키스가 거절하면 테베가 이를 명분으로 삼아 델포이를 수호하는 인보동맹을 동원하여 포키스와 전쟁을 벌이고자 하였으나 포키스의 대응이 테베의 예상범위를 넘어섰다. 포키스의 장군 오노마르코스가 델포이를 공격하여 신전의 금고를 차지하고 그 자금으로 용병을 대규모로 고용하여 테베의 공격을 격퇴한 것이었다.
BC 353년에 제3차 신성전쟁은 테살리아로 확대되었다. 테살리아의 페라리와 라리사가 전쟁을 벌였는데 라리사가 마케도니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페라리 역시 포키스에게 지원을 요청하면서 마케도니아와 포키스가 대결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즉위 이후 연전연승하던 필리포스 2세였지만 이번만은 달라서 포키스의 오노마르코스에게 2번이나 패배하고 겨울이 되자 마케도니아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필리포스 2세는 이듬해인 BC 352년 재차 군대를 몰고 내려왔고 이번에는 크로코스 평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오노마르코스를 전사시켰다. 이제 필리포스 2세는 테살리아 동맹의 맹주가 되어 테살리아까지 마케도니아의 세력 범위에 편입시켰고 테살리아의 여러 항구와 강력한 기병을 손에 놓을 수 있었다.
포키스는 마케도니아의 남진을 막기위해 페르시아 전쟁 시절 유명한 격전지인 테르모필라이의 좁은 협곡을 지키며 아테네와 스파르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필리포스 2세는 테르모필라이 협곡을 무리해서 돌파하기 보다는 그 북쪽에서의 마케도니아 세력을 강화시키는 데에만 집중하여 BC 348년에 올린토스를 공격하여 칼키디키 동맹을 해체시키고 마케도니아의 영토로 합병하는 한편 아테네와는 외교적인 협상을 계속 벌였다. 아테네는 여전히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내륙에서의 마케도니아 확장을 막기 어려웠고 결정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던 포키스가 갑자기 아테네군과 스파르타군이 테르모필라이 협곡에 주둔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마케도니아와 협상을 벌여 BC 346년 필로크라테스 화약을 맺었다.
카이로네이아 전투
마케도니아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아테네에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항전을 부르짖는 데모스테네스 파와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페르시아를 토벌해야 한다는 이소크라테스 파로 나뉘었다. 데모스테네스는 그 유명한 "필리포스 탄핵" 연설 3편을 연이어 선보이며 마케도니아의 제국주의에 맞설 반(反)마케도니아 동맹을 추진하였다. 이에 반해 이소크라테스는 그리스 폴리스끼리의 항쟁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페르시아에 맞서는 범(汎)그리스주의를 주창하였고 그 중심인물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를 꼽고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필로크라테스 화약이 암피폴리스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마케도니아와의 동맹을 강요하는 등 아테네에게 불리한 조항이 많아 아테네 시민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케도니아가 계속해서 팽창을 거듭하자 데모스테네스 주장에 동조하여 테베와 반(反) 마케도니아 동맹이 결성하도록 하였다. 이에 아테네 및 테베 동맹군과 마케도니아 군은 BC 338년에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아테네와 테베 동맹군은 보병만 3만 5천명이었고 마케도니아 군은 3만명의 보병과 2천의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테베는 레욱트라 전투 이후로 용맹을 떨치던 300명의 신성부대로 구성되었다. 아테네의 시민 중장보병대가 좌익을 맡고 테베의 신성부대가 우익을 맡았으며 그 밖의 동맹군이 중앙에 위치하기로 하였다. 이에 맞선 마케도니아 군은 중앙에 중장보병을 위치시키고 우익에 필리포스 2세가 직접 지휘하는 친위보병 히파스피스타이를 배치하였으며 좌익은 당시 18살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지휘하는 기병좌익에게 맡겼다.
먼저 공격한 것은 필로포스 2세가 지휘하는 히파스피타이였다. 그러나 필로포스 2세는 곧바로 군대를 뒤로 물렸고 이에 유인된 아테네군이 전진하면서 동맹군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이틈을 놓지지 않고 알렉산드로스 3세의 기병대가 돌진한 다음 왼쪽으로 선회하여 테베군을 좌측에서 포위하였고 후방에 배치시킨 경장기병이 테베군의 우측을 공격하였다. 동맹군은 둘로 나뉘어졌고 중앙의 마케도니아의 중장보병이 아테네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후퇴하던 필리포스 2세의 히파스피스타이도 공격으로 돌아서서 아테네 군의 진형을 흐트러뜨렸다. 결국 아테네 군이 패주하면서 동맹군의 좌익과 중앙이 무너졌고 홀로 남겨진 우익의 테베 신성부대는 분전하였으나 300명 중 254명이 전사하고 남은 46명이 포로로 잡히면서 사실상 전멸하였다.
헬라스 동맹 체결과 필리포스 2세의 암살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의 승리로 마케도니아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그리스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테베는 핵심전력인 신성부대가 전멸하면서 군사력이 붕괴되었고 마케도니아군의 주둔을 허용하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아테네는 필리포스 2세가 장차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서는 아테네 해군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페르시아 원정의 병사와 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관용을 베풀었다. 그밖에 암브라키아와 코린토스에도 마케도니아 군대를 주둔시키고 친(親)마케도니아 정권이 들어서도록 압력을 가했다.
BC 337년 필리포스 2세는 코린토스에 그리스 폴리스의 각 대표들을 소집하여 아테네 중심의 델포이 동맹이나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뛰어넘는 규모의 군사동맹인 헬라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은 총회장소의 이름을 따서 코린토스 동맹이라고도 부르며, 예전 페르시아 전쟁 당시에 코린토스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심의 코린토스 동맹이 결성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여 신(新)코린토스 동맹이라고도 부른다. 필리포스 2세는 각 폴리스의 자유와 자치권을 보장하였지만 마케도니아의 무력에 맞설 세력이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마케도니아가 마음대로 주도하는 동맹이 되었다. 하지만 헬라스 동맹에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그리스 폴리스가 참석하였기 때문에 그리스 폴리스는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 동맹체를 구성하게 된 것으로 인정받는다.
필리포스 2세는 헬라스 동맹의 의장(헤게몬)으로 선출되었고 페르시아 원정을 공식화하였고 각 폴리스들은 의장의 요구에 따라 병력이나 선박을 제공할 의무가 부여되었고 이 동맹군의 총사령관으로 당연히 필리포스 2세가 취임하였다. 그러나 필리포스 2세의 페르시아 원정 꿈은 BC 336년 마케도니아 왕가의 내분에 얽힌 암살로 좌절되었다. 필리포스 2세는 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 자리에서 젊은 귀족 파우사니아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은 파우사니아스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인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이후 필리포스 2세와 그의 네번째 부인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난 20살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즉위하였기 때문에 올림피아스가 그 배후라고 의심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 3세가 부왕을 뛰어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며 부왕이 못다 이룬 페르시아 원정의 꿈을 완벽하게 이루게 된다.
에파미논타스의 사선진형과 필리포스 2세의 "망치와 모루" 전술
레욱트라 전투는 여러 면에서 후대의 전술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우선 균일한 두께로 진형으로 배치하던 기존관념에서 벗어나 사선형으로 배치하면서 강력한 좌익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뒤쪽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약한 우익이 상대를 붙잡아두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주공과 조공의 개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이었다. 여기에 보조병력으로 취급받던 기병을 본대의 작전에 직접 연결시켜 적진을 돌파시키며 큰 성과를 거뒀는데 이 역시 역사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보병과 기병의 협동작전이었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등장한 새로운 전술개념은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망치와 모루 전술(Hammer and Anvil Tactic)'로 발전한다.
필리포스 2세는 테베에 볼모로 잡혀있던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테베의 명장 에파미논타스가 레욱트라 전투에서 보여준 사선진 전술에 깊이 심취했다. 필리포스 2세는 테베의 사선진 대형의 진정한 위력은 병력을 균일하게 배치하지 않고 주력군(주공)과 보조군(조공)으로 나뉘어 조공이 교착과 견제 역할을 수행하고 주공이 상대를 타격하는 역할을 맡은 것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에 필리포스 2세는 기병의 가능성에 눈을 뜨고 기병을 적극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필리포스 2세는 기병에게 주공을 맡기고 중장보병에게 조공의 역할을 부여하는 전술을 개발하였는데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고 불리웠다. 망치와 모루 전술은 마치 대장간에서 모루 위에 쇠를 두고 망치로 치는 것처럼 조공(모루)이 고착과 견제를, 주공(망치)이 우회기동에 의한 타격를 맡는 개념이었다. 망치와 모루 전술은 현대까지도 전쟁의 주요전술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전술이다.
망치와 모루 전술은 전투시 중장보병이 적 주력을 상대로 버티어내는 동안 기병이 적진의 배후로 우회 돌격하여 후방에서 몰아세우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적군은 마케도니아의 기병에게 몰아세워져 어쩔 수 없이 앞으로 전진해야 했고 그 앞에는 비록 기동력은 느리지만 공격력 만큼은 매우 강력한 마케도니아 중장보병이 기다렸다가 적군을 격파하였다. 이러한 전투 방식으로 필리포스 2세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페르시아를 정벌하게 된다. 그리고 망치와 모루 전술은 훗날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에 의해 더욱 발전하여 포위섬멸전술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