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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패권, 델로스 동맹, 페리클레스,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Jobs9 2021. 5. 1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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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패권

 

델로스 동맹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그리스 폴리스의 최종 승리로 끝난 직후인 BC 477년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재침공을 예방하고 여전히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계 도시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미칼레 전투를 위해 일시적으로 구성되었던 해군 동맹을 이제는 상설화시켰다. 이 동맹은 본부 및 동맹기금을 수납하는 금고가 델로스섬에 있었기에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이라고 불리게 된다. 델로스 동맹에는 에게해를 중심으로 한 거의 모든 그리스 폴리스가 참여하면서 융성시에는 참가한 숫자가 200개나 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해외에 지나친 힘을 소모하는 것을 꺼려한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과 중립을 유지하던 크레타섬의 폴리스들은 참여를 거부하였다. 

 

델로스 동맹의 전반적인 정책은 델로스섬에서 개최하는 정기 회의에서 결정되었고 모든 동맹 폴리스들이 동등한 투표권을 지니고 있었다. 동맹 폴리스는 원칙적으로 함선 지급 의무가 있었고 여의치 않을 경우 돈으로 대납할 수 있었는데 미칼레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리스티데스가 동맹국의 할당액 결정을 위임받았다. 비록 테미스토클레스의 주도로 크세르크세스 1세의 그리스 침공을 훌륭하게 막아내었지만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이었던 아리스티데스 역시 플라타이아 전투와 미칼레 전투를 통해 큰 명성을 쌓으면서 델로스 동맹을 주도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델로스 동맹 함대의 총사령관은 마라톤 전투의 영웅이었던 밀티아데스의 아들인 키몬(Cimon)이 임명받았는데 키몬 역시 아리스티데스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키몬의 활약

 

키몬이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며 에레트리아의 '에이온(Eion)'과 트라케에서 페르시아의 잔존 병력을 모두 쫓아내면서 아리스티데스의 세력을 점점 커졌다. 이에 반해서 테미스토클레스는 점차 세력을 잃었고 결국에는 BC 473년 도편추방제로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추방 중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사형 선고까지 받으면서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그 후 BC 468년 아리스티데스가 사망하면서 이제 아테네의 국정을 장악하게 된 키몬은 그 사이 델로스 동맹국의 자금을 바탕으로 함대 숫자가 300척으로 늘어난 아테네 해군을 이끌고 BC 467년과 BC 466년 사이에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쪽을 항해했다. 그리고 키몬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팜필리아(Pamphylia)' 지역에서 벌어진 '에우리메돈강 전투(Battle of the Eurymedon)'에서 대승을 거뒀고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쪽 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던 해안 도시들을 잇달아 해방시키고 델로스 동맹으로 끌어들이면서 그 세력을 더욱 키워 나갔다. 

 

키몬이 대외 원정으로 큰 명성을 쌓자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키몬은 트라케를 해방시킬 당시에 마케도니아를 공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비록 마지막에는 그리스 편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의 속국으로써 전쟁 초기에 페르시아를 지원한 바 있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 1세 스스로는 자신이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인 '헤라클레스(Heracles)'의 후손으로 그리스인임을 주장하였지만 대다수 그리스인들에게는 북방의 야만인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키몬이 마케도니아를 공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알렉산드로스 1세로부터 뇌물을 받아 공격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받으며 키몬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비록 키몬이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이로 인하여 권위가 많이 손상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고 대신에 키몬의 재판을 주도한 페리클레스(Pericles)가 새로운 대항마로 떠올랐다.

 

 

페리클레스의 등장

페리클레스는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부유하였고 당시 철학 사상가들인 '소피스트(Sophist)' 성향의 교육을 받아 철학자인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와 예술가인 소포클레스(Sophocles), 페이디아스(Pheidias) 등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는 등 전형적인 귀족이었지만 키몬에게 대항하기 위해 귀족파가 아닌 민중파가 되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문제로 키몬을 재판에 회부시키면서 키몬이 전쟁에는 능하지만 정치적인 모략에는 취약하다는 점이 들어나자 페리클레스는 키몬을 지지하는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아레오스 파고스(Areios Pagos)' 법정의 권한을 먼저 축소시키기 시작했다. 아레오스 파고스는 전임 아르콘으로 구성되어 귀족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파의 중요한 정치 기반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었다. 기회를 엿보던 페리클레스는 BC 462년 키몬이 페르시아 원정에 나가 있는 틈을 타고 같은 민중파인 에피알테스(Ephialtēs)와 함께 아레오스 파고스의 권한을 민회, 평의회, 민중재판소로 분산시키는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켜 버렸다. 

 

키몬이 원정에서 돌아온 뒤에 아레오 파고스의 권한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면서 페리클레스와 충돌하였다. 키몬은 많은 군사적인 업적을 남긴 반면에 페리클레스는 자신을 지원하던 급진적인 에피알테스가 암살되면서 세력이 위축되었지만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협력해야 한다고 믿은 키몬이 친스파르타적인 성향을 보이자 점차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스파르타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을 지원하기 위해서 출병하였으나 오히려 스파르타를 점령하려는 의심만 받고 되돌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 스파르타에 대한 반감이 퍼져나갔고 키몬의 인기는 더욱 떨어졌다. 기회를 얻은 페리클레스가 BC 461년 키몬에게 스파르타와 내통했다는 혐위를 씌우며 도편추방제로 10년 간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테네의 팽창정책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

 

키몬이 추방되면서 페리클레스가 이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페리클레스는 키몬의 세력을 뿌리뽑은 뒤 자신의 권력 기반인 평민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인기에 영합한 정책을 잇달아 펼쳤다. 아르콘의 지원자격이 되는 재산 기준을 더욱 낮춰 제3계급까지 가능하도록 했고 빈민들에게 극장의 무료 관람을 허용해 주었다. 또한 법정의 배심원에게 후한 수당을 지급했고 관리를 희망자 중에서 추첨으로 선출하도록 하여 평민들의 관직 진출이 용이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믿은 키몬과 달리 페리클레스는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누르고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페리클레스는 BC 461년 페르시아 전쟁을 위해 맺어진 스파르타와의 동맹을 파기하였고 BC 460년 스파르타의 동맹인 코린토스와 전쟁을 벌이던 메가라와 동맹을 맺고 군대를 파견하면서 스파르타와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First Peloponnesian War)'을 시작하였다. 

 

일찍부터 페리클레스는 언제가 스파르타와 다시 전쟁을 벌일 수 밖에 없으며 이때 스파르타가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이어주는 '코린토스 지협(Isthmus of Corinth)'만 봉쇄한다면 해군력을 앞세워 스파르타를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페리클레스의 예상대로 전쟁이 벌어진 후 아테네군이 좁은 코린토스 지협을 봉쇄하자 전황은 아테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BC 458년 스파르타군이 '보이오티아(Boeotia)'의 '타나그라(Tanagra)'까지 진출하였지만 여전히 아테네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다. 그 사이 아테네가 그리스의 중부 지역까지 진출하여 페르시아 전쟁 당시에 페르시아를 지원했던 테베와 전쟁을 벌여 BC 457년 '오이노피타 전투(Battle of Oenophyta)'에서 승리를 거두고 보이오이타 지방 대부분을 영향력 아래에 두게 되었다. 

 

 

이집트 원정 실패와 스파르타와의 휴전

 

한편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에서 BC 465년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즉위한 어수선한 틈을 타고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번 기회에 페르시아의 힘을 약화시키고 키프로스 섬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250척의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집트 반란군이 힘없이 페르시아에게 진압당했고 키몬이 지휘하지 않는 아테네 함대도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에 고립된 채 BC 454년 페르시아군의 반격을 받아 사실상 전멸당하고 말았다. 이후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델로스 섬에 보관중이던 동맹 금고를 아테네로 옮겼고 정기 회의도 아테네에서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국력을 집중하기 위해 스파르타와 일시적으로 휴전을 맺었다. 

 

스파르타와의 휴전으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페리클레스는 키몬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아직 추방 기한이 종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로 불러들여 키프로스 공격을 맡겼다. 그러나 키몬이 BC 449년 전투 도중에 전사하면서 키프로스 원정도 실패로 끝나고 만다. 키몬 없이는 더이상의 군사 원정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부자로 유명한 칼리아스(Callias)를 파견하여 페르시아의 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협상을 벌였고 BC 448년 마침내 '칼리아스 화약(Peace of Callias)'을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 아네테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계 도시들의 자치를 보장받는 대신에 이집트에 대한 반란 지원을 중단하고 키프로스섬 일대의 해역도 포기하였다.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재개

 

칼리아스 화약을 통해서 장기간에 걸친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비로소 종식되자 페리클레스는 다시 휴전을 맺었던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전쟁의 계기는 BC 448년 코린토스 만 북부에 위치한 '포키스(Phocis)'가 그리스의 종교적인 성지인 델포이를 점령하자 스파르타가 출병하여 포키스를 쫓아낸 '제2차 신성 전쟁(Second Sacred War)'으로부터 유발되었다. 제2차 신성 전쟁이라는 이름은 BC 590년 '로크리스(Locris)'의 델포이 점령에 대항하여 테살리아, 시키온, 아테네가 델포이의 독립을 지켜낸 '제1차 신성 전쟁(First Sacred War)'과 구별하여 지어졌다. 제2차 신성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군이 델포이를 떠난 뒤 아테네가 개입하여 포키스가 델포이를 재차 점령하도록 지원하면서 스파르타와의 휴전을 깨고 전쟁에 돌입하였다. 

 

처음에 전쟁은 아테네에게 유리한 듯이 보였지만 BC 447년 테베가 다시 개입하면서 전황이 뒤바뀌었다. BC 457년의 오이노피타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세력 회복에 치중했던 테베가 이번에는 BC 447년 '코로네아 전투(Battle of Coronea)'에서 아테네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보이오티아를 되찾았기 때문에 아테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더욱이 메가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스파르타 편으로 돌아서면서 그동안 스타르타군의 육상 이동을 막아주던 코린토스 지협이 열리고 말았다. 스파르타군이 코린토스 지협을 지나 아테네 북서쪽의 '엘레우시스(Eleusis)' 평원까지 진출하자 다급해진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 왕 플레이스토아낙스(Pleistoanax)의 조언자인 클레안드리다스(Cleandridas)를 매수하여 휴전을 다시 추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BC 445년 스파르타와의 '30년 화약(Thirty Years' Peace)'을 체결하는 데 극적으로 성공하면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의 동맹국 간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고 분쟁이 발생하면 서로 협의하여 해결할 것을 약속하게 되었다.

 

 

아테네 제국주의 성립

 

한편 아테네는 겉으로는 민주정이었으나 사실상 페리클레스가 1인자로서 모든 권력을 장악한 '페리클레스 시대(Age of Pericles)'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아스 화약을 통해 페르시아와의 오랜 분쟁을 종식시키고 30년 화약을 통해 스파르타와도 휴전을 맺으면서 아테네는 오랜 전쟁을 끝내고 마침내 평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페리클레스는 칼리아스 화약을 통해서 델로스 동맹의 최초의 결성 목적이 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델로스 동맹을 유지시키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동맹의 힘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동맹 폴리스들의 안이한 대처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는데 당초 델로스 동맹 결성 당시에 동맹 폴리스들은 함선 지급 의무를 돈으로 대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동맹 폴리스들의 자금으로 구축된 동맹 함대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테네만을 위한 함대로 변질되어 버렸다.

 

이제 동맹 폴리스들은 아테네에게 세금을 바치는 처지로 전락하였고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힘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며 동맹 폴리스 위에 군림하는 제국주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러한 아테네의 제국주의 경향은 이미 이전부터 드러나고 있었는데 BC 472년 에우보이아 지방의 '카리스토스(Karystos)'를 강제로 동맹에 가입시켰고 동맹 탈퇴를 원하는 낙소스를 무력으로 굴복시켜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BC 463년 '타소스(Thasos)'에서 일어난 반란을 강력하게 진압했다. 또한 BC 460년부터 스파르타와 벌인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도 델로스 동맹의 힘을 이용하면서 페르시아를 상대하기 위해 결성되었다는 당초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아테네의 횡포에 '밀레토스(Miletus)', '에리트라이(Erythrae)', '콜로폰(Colophon)' 등에서 아테네에 대한 반대 운동이 벌어졌으나 오히려 아테네는 이를 빌미로 동맹 폴리스들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성벽을 허물게 하였으며 자신의 민주정을 강요하는 내정 간섭을 시작하였다. 이제는 형식적으로 열리던 동맹 회의조차 없어졌고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힘을 이용하여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테네는 동맹 금고의 돈을 이용하여 페르시아에게 파괴되었던 아테네 신전들을 다시 짓기 시작하는 등 전횡이 도를 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동맹 폴리스들의 반감이 점점 더 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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