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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플라타이아 전투, 미칼레 전투, 칼리아스 화약

Jobs 9 2021. 5. 1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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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테르모필라이 전투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넌 페르시아 군은 트라케와 마케도니아를 지난 후 발칸 반도를 남하했고 해군도 해안선을 따라 육군과 보조를 맞추어 전진했다. 페르시아의 재침공이 점차 현실화 되자 북부의 일부 그리스 폴리스들이 페르시아에게 항복했지만 대부분의 그리스 폴리스들은 서로 간의 반목을 중단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스파르타도 참전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자신의 장점을 살려 각각 해군과 육군을 지휘하기로 합의했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넓은 '테살리아(Thessalía)' 평원에서는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중부 지방의 좁고 험한 산악 지역인 '테르모필라이(Thermopylai)' 협곡에서 싸우는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Leonidas I)가 이끄는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와 그리스 각지에서 모인 4,000명의 병사를 테르모필라이 협곡에 투입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은 페르시아군이 해군을 이용하여 바다를 통해 우회하지 못하도록 '에우보이아(Eúboia)'의 '아르테미시움 곶(Cape Artemisium)'을 지키기로 했다.

 

BC 480년 8월(기록에 따라 9월이라고도 함) 페르시아 육군은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스파르타 300명의 전사를 필두로 한 그리스 군을 만났다. 테르모필라이 협곡은 매우 비좁아 페르시아군이 지닌 대규모 병력이라는 장점을 활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스파르타와 그리스 군은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2일이나 페르시아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3일째 되는 날 그리스의 한 배신자가 협곡을 우회하는 샛길을 페르시아군에게 알려주면서 방어선이 붕괴되고 말았다. 페르시아군이 샛길을 이용하여 테르모필라이 협곡을 우회하자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1세는 스파르타 전사 300명을 제외한 다른 그리스인들을 철수시키고 자신은 300명의 전사들과 함께 남아 퇴로를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결국 레오니다스 1세를 비롯한 스파르타 전사 300명 전원이 사망하면서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라이 협곡을 통과하고 아테네로 향하게 되었다.

 

비록 레오니다스 1세의 스파르타군은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였지만 마지막까지 보여준 불굴의 정신은 훗날 고대 그리스의 서정 시인인 시모니데스(Simonides, 생몰년 BC 556년 ~ BC 468년)에 의해서 테르모필라이 협곡에 세워진 비문 "지나는 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들 조국의 명을 받아 여기 잠들었노라(Ὦ ξεῖν', ἀγγέλλειν Λακεδαιμονίοις ὅτι τῇδε. κείμεθα, τοῖς κείνων ῥήμασι πειθόμενοι.)"를 통하여 기리게 되었다. 그리고 레오니다스 1세는 그리스인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희생을 감수한 그리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테르모필라이 전투(Battle of Thermopylae)'는 패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 마라톤 전투와 함께 가장 유명한 전투로 손꼽히게 되었으며 2007년 영화 《300》으로 영상화되기도 하였다.

 

 

살라미스 해전 

스파르타군이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패배하자 아르테미시움 곶을 지키던 아테네 해군도 철수하였다.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승리한 페르시아군은 곧장 아테네로 향했으나 아테네는 이미 비어 있었다. 이것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작전에 따라 아테네를 직접 방어하기보다는 오히려 비워두고 아테네 시민과 병력을 모두 살라미스섬으로 이주시켰기 때문이었다. 테르모필라이 전투 이전부터 테미스토클레스는 육지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해전을 통해서 승리할 방법을 찾았고 그 결전의 장소로 살라미스섬 근처의 좁은 해협을 선택한 상태였다. 이미 8월 초에 아테네 해군이 아르테미지움 곶으로 출전하기 전에 아테네 시민들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고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모든 함대를 아르테미지움 곶에서 물러나 살라미스섬으로 집결하도록 명령하였다.

 

페르시아군이 손쉽게 아테네를 점령하였고 페르시아 해군도 9월 4일 아테네의 외항에 도착하였으나 페르시아 해군은 '아르테미지움 해전(Battle of Artemisium)'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피해를 복구하느라 약 3주간 전투를 전개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리스 동맹군 내부에서 응전 방법을 두고 논란이 발생하였다. 살라미스섬은 만약 해전에서 패배했을 경우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살라미스섬에서 철수하여 '코린토스(Kórinthos)' 지방으로 후퇴해야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섬에서 철수한다면 적의 진격을 쉽게 내줄 뿐만 아니라 아테네 시민과 영토를 포기하게 되며 열세한 병력으로 좁은 해역에서 우세한 적의 함대에 대응할 수 있는 이점을 포기하는 것"이라면서 다른 그리스인들을 설득하였다.

 

그 사이 페르시아군도 아테네를 점령한 후 크세르크세스 1세가 작전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속주인 '카리아(Caria)'의 여왕인 아르테미시아 1세(Artemisia I)가 아테네에 더이상 전투를 벌일 필요없이 아테네에 그대로 머물며 그리스 폴리스간의 내분이 일어나기를 기다리자는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대로 진격하라고 명령하였다. 때마침 그리스인들을 설득한 테미스토클레스가 첩자를 페르시아 진영으로 보내 그리스 측이 내분 중으로 그리스 해군이 살라미스섬을 빠져나갈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고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 해군이 도망치기 전에 그 퇴로를 봉쇄하기 위한 출정을 서둘러 페르시아 해군에게 명령하게 되었다.

 

BC 480년 9월 28일 페르시아 해군이 야간에 움직이기 시작하여 새벽녘에 살라미스섬의 좁은 수로로 진입하였다. 페르시아 해군은 선두에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섬(Cyprus)' 함대를, 중앙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점령지 함대를, 그리고 왼쪽에는 이오니아와 '킬리키아(Cilicia)'의 함대를 배치하였는데 모두 750척이었다. 이에 대응한 그리스 해군은 380척으로 3열로 배치하되 왼쪽에 아테네와 코린토스 함대를 배치하였다. 페르시아 해군의 전술은 대함대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 해군을 유인하여 넓은 해역에서 싸우는 것이었으나 페르시아 선두 함대가 그리스 함선을 추격하다가 살라미스섬의 좁은 수로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제 북쪽에서는 페니키아의 이오니아 함대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충돌하였다. 이렇게 되자 길이 7km, 너비 2km 밖에 안되는 좁은 '살라미스 해협(Straits of Salamis)'에 양측의 함대 700~800척이 뒤엉키게 되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기동성이 우수한 그리스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일방적으로 몰아 붙이기 시작했다. 결국 혼란에 빠진 채 움직이기 어렵게 된 페르시아 해군이 200척이 침몰되고 40,000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으면서 그리스 함대가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에서 승리하였다. 그리스 함대는 겨우 46척의 함선을 상실하는 피해만 입었을 뿐이었다.

 

살라미스 해전 패배 이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는 페르시아 해군을 사르디스 항구로 물러나게 하였고 이어서 육군도 그리스 북부 점령지로 후퇴시켰다. 그리고 마르도니우스에게 300,000명의 병사를 남기며 그리스 점령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게 한 후 자신은 페르시아로 되돌아갔다. 살라미스 해전 다음날 그리스 군은 페르시아 해군이 다르다넬스 해협 쪽으로 퇴각하고 있으며 페르시아 육군도 역시 후퇴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이를 추격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결국 아직 육군은 수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으므로 무리해서 페르시아군을 추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살라미스 해전의 역사적 의미

 

살라미스 해전은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해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페르시아의 유럽 진출을 저지하고 그리스 특히 아테네가 지중해를 재패하는 초석이 된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또한 전술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살라미스 해전은 충각(나무를 날카롭게 깎아 청동을 입힌 것)을 이용하여 돌격하여 적선을 파괴시키는 전술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대규모 해전이었다. 당시 선박은 노젓기를 중심으로하는 갤리선이었기 때문에 해전에서 사용되는 주요 전술은 우선 충각을 이용하여 적선과 충돌한 이후에 선상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선상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충각을 이용한 적선과의 충돌은 어디까지나 적선을 멈추게 하기위한 방편이었고 주요 전투는 선상전투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육지에서의 전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리스 해군, 특히 아테네 해군의 경우에는 달랐다. 아테네 해군의 향해 기술은 매우 수준이 높았고 전투함으로 사용되던 3단의 노를 이용한 갤리선인 트라이림으로 기동성이 뛰어났다. 아테네 해군은 이미 해전에서 다양한 전술을 사용하며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테네 해군의 전술은 우선 "우회한다"는 뜻의 '페리플로스(Periplous)' 전술로 적 진형의 배후로 우회하여 적 후미를 충각으로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두번째로는 "관통한다"는 뜻의 '디에크플로스(Diekplous)' 전술로 적 진형의 중앙을 돌파한 후에 180도로 회전하여 적 후미를 충각으로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마지막으로는 페리플로스 전술이나 디에크플로스 전술에 대응하기 위하여 '큐클로스(Kuklos)' 전술이 사용되었는데 "원형진"이라는 뜻이었다. 이처럼 그리스 해군은 충각을 이용한 다양한 전술을 활용하였는데 이를 위하여 급가속이나 급선회 능력은 물론 충각으로 부딪친 이후에 재빠르게 후퇴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그리스 해군의 숫자가 페르시아보다 부족했기 때문에 그리스 해군은 좁은 수로에서 싸울 필요가 있었다. 살라미스 해협은 이러한 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지형이었으므로 이곳으로 페르시아 해군을 끌어들이고자 자신들이 내분 중이라는 거짓 정보를 퍼트렸다. 이에 속은 페르시아 해군은 결전을 서두르기 위해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들어오는 실수를 범하였고 결국 전투는 충각을 이용한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그리스 해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스 해군은 빠른 속도로 적선으로 돌진하여 그 옆구리를 파괴한 후 뒤로 빠져서 침몰시켰고 적선이 침몰하지 않는 경우에만 병력을 투입하여 선상 전투를 벌였다. 이처럼 살라미스 해전은 육전에서는 불가능했던 해전 만의 특성을 잘 이해한 그리스 해군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리스 폴리스의 반격

 

플라타이아 전투

 

크세르크세스 1세가 본국으로 되돌아간 뒤 그리스 본토에 남게 된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 북부의 점령지인 테살리아에 머물며 겨울을 보냈고 이듬해인 BC 479년 봄에 속국인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드로스 1세(Aléxandros I)를 보내어 아테네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1세는 오히려 마르도니오스에 대한 정보를 아테네에게 넘기며 싸울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아테네 역시 페르시아 세력을 그리스에서 완전히 몰아내기로 마음먹고 스파르타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한 후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죽은 레오니다스 1세의 조카인 파우사니아스(Pausanias)가 섭정 자격으로 스파르타군을 이끌고 합류하여 동맹군의 총지휘를 맡았다. 또한 한때 도편추방제로 추방당했던 아리스티데스가 마라톤 전투의 경험을 인정받아 아테네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받았다. 그리스 동맹군은 총 80,000명으로 그 중 마라톤 전투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 바 있는 중장보병 35,000명이 참가했다. 

 

BC 479년 8월 '테베(Thêbai)' 근처의 '플라타이아(Plataea)' 평원에서 페르시아와 그리스 동맹군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의 마르도니우스는 마라톤 전투의 패배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20일 가까이 전면전 보다는 소규모 전투만을 벌였다. 그리고 기병대를 이용하여 병참 수송대를 약탈하고 우물에 독을 타며 그리스 동맹군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이를 통해 어느정도 승세를 굳혔다고 생각한 마르도니우스는 결전을 결심했으나 그리스 동맹군의 중장보병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전투는 혼전으로 진행되었으나 페르시아의 수많은 궁병이 발사하는 화살비 속에서도 스파르타 중장보병들은 방패로 몸을 가리고 돌격에 성공하였다. 결국 마르도니우스의 전사가 결정타가 되어 전황이 그리스 동맹군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고 페르시아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마라톤 전투에 이어서 그리스 중장보병이 페르시아 보병을 능가한다는 사실이 다시한번 증명된 것이었다. 아테네 군도 페르시아군을 돕기 위해 동원되었던 그리스 폴리스의 군대를 물리치면서 '플라타이아 전투(Battle of Plataea)'는 그리스 군의 최종 승리로 끝났다. 

 

마르도니우스가 죽은 뒤 패잔병이 된 페르시아군이 그리스 점령지를 포기하고 아나톨리아 반도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비밀리에 그리스 편에 섰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가 이번 기회에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페르시아군을 공격하면서 다시한번 큰 위기에 처했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스트루마(Struma)' 강에 매복하였고 이를 모르고 지나가던 페르시아군을 공격하여 45,000명을 전사시켰다. 이렇게 하여 페르시아군이 그리스 북부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마케도니아가 점차 그리스 북부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미칼레 전투

 

마르도니우스의 페르시아군과 플라타이아 전투를 벌이기 이전에 에게해의 '사모스섬(Samos Island)'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소식을 그리스 폴리스들에게 전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사모스섬의 지원 요청에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 함대를 중심으로 동맹군이 결성되었고 아리스티데스가 총지휘를 맡았다. 그리스 동맹함대가 나타나자 페르시아 해군은 사모스 섬을 포기하고 이오니아의 미칼레로 후퇴하였고 해전을 포기한 채 모든 군선을 육지로 끌어올리고 육군과 합류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스 동맹함대 역시 이번 기회에 페르시아 해군을 완전히 격멸하기로 마음먹고 미칼레에 상륙하였다. 

 

그 후 플라타이아 전투가 일어나던 날과 동일한 날에 '미칼레 전투(Battle of Mycale)'가 시작되었다. 그리스 군은 아테네, 코린토스, '시키온(Sicyon)', '트로이젠(Troizḗn)'의 병사들과 사모스섬의 동맹군이 페르시아군과 정면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스파르타군이 구릉을 우회하여 페르시아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플라타이아 전투와 마찬가지로 미칼레 전투에서도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중장보병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받던 스파르타군이 측면을 강타하자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전투에서 승리한 그리스 동맹군이 미칼레에 남아있던 페르시아의 모든 군선을 불태웠기 때문에 페르시아 해군이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그리스의 반격과 칼리아스 화약

 

플라타이아 전투를 통해 페르시아 육군이 그리스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미칼레 전투에서 페르시아 해군이 괴멸되었다. 비록 페르시아가 광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던 까닭에 다시 그리스 원정군을 재건할 여력은 충분했지만 크세르크세스 1세가 더 이상의 전쟁에 흥미를 보이지 않은 채 새로운 수도인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 틀어 박혀 향락에만 몰두하면서 더이상의 그리스 원정이 추진되지 않았다. 오히려 살라미스 해전과 미칼레 전투에서 페르시아 해군에게 승리를 거둔 그리스 해군이 아나톨리아 반도와 키프로스섬 등에 위치한 그리스계 도시를 독립시키고자 일시적으로 구성한 해군동맹을 상설 동맹으로 변경하고 지속적으로 페르시아의 해안을 공격하게 된다. 이 동맹은 폐쇄적인 스파르타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그리스 폴리스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동맹으로 발전하게 되고 '델로스섬(Delos Island)'에 근거지를 두었다고 하여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으로 불리게 된다. 

 

델로스 동맹은 이후 30년간 에게해와 동지중해 연안의 페르시아 영토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였고 그 공격이 이오니아와 키프로스섬을 델로스 동맹으로 끌어들여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후방을 어지럽히기 위해 실시된 이집트의 반란 지원이 BC 454년 나일강 입구에서 아테네 함대가 전멸당하면서 그 세력이 위축되었다. 결국 아테네가 더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BC 448년 크세르크세스 1세의 뒤를 이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es I)와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계 도시들은 자치권을 획득하는 내용의 '칼리아스 화약(Peace of Callias)'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서 BC 499년의 이오니아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그리스-페르시아 사이의 오랜 전쟁이 50여년만에 마침내 종식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델로스 동맹을 주도하던 아테네의 위상이 매우 올라갔고 어느덧 그리스 폴리스들의 위에서 군림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면서 이제부터는 그리스 폴리스 간의 내분이 격화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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