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오니아의 반란
오리엔트를 통일한 페르시아가 그리스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Achaemenid Persia)'가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해안에 위치한 이오니아의 몇몇 그리스계 도시들을 지배한 이후이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일반적으로 그냥 '페르시아 제국(Persian Empire)'으로 불리웠다. BC 544년경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Cyrus II)가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리디아(Lydia)'를 정복하면서 이오니아의 그리스계 도시들도 페르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그러나 BC 525년 키루스 2세의 뒤를 이은 캄비세스 2세(Cambyses II)가 이집트 원정에 성공하자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계 도시들의 페르시아에 대한 불만이 더 커졌는데 이는 이집트와 벌이던 많은 상업과 무역을 일찍부터 페르시아에 편입된 '페니키아인(Phoenicians)'들이 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BC 499년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계 도시인 '밀레투스(Miletus)'의 참주였던 아리스타고라스(Aristagoras)가 주도하여 페르시아가 임명한 '사트라프(Satrap; 총독)'를 축출하고 '이오니아 반란(Ionian Revolt)'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면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Eretria)'가 각각 군선 20척과 5척을 보내왔으나 스파르타는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지원을 거절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아리스타고라스가 BC 498년 이오니아군을 이끌고 리디아의 옛 수도인 '사르디스(Sardis)'를 점령했지만 이오니아로 돌아오는 길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Darius I)가 보낸 군대의 추격을 받아 '에페수스 전투(Battle of Ephesus)'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 이오니아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BC 493년 반란을 주도했던 밀레토스가 함락되면서 사실상 반란이 종식되었다.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마르도니우스의 그리스 침공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의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 밀레토스의 신전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거나 강제로 이주시켰지만 나머지 도시에 대해서는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사후 처리를 이오니아의 신임 사트라프로 임명받은 다리우스 1세의 사위 마르도니우스(Mardonius)도 역시 각 도시에게 공평한 세금을 부여하였고 포로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렇게 이오니아 반란에 대한 처리가 끝났으나 이오니아의 반란을 지원하였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대해서는 응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다리우스 1세가 마르도니우스에게 그리스 침공을 명령하면서 AD 492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이 발발하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군에 대하여 정확한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마르도니우스는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고대 그리스 명칭 헬레스폰토스Hellēspontos 해협)을 건넌 후 육군을 이끌고 발칸 반도 북쪽의 '트라케(Thrake; 트라키아)'를 점령하고 '마케도니아(Macedonia)'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 페르시아 해군이 에게해 연안의 도시와 섬들을 휩쓸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해군이 아토스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하여 철군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보급로가 끊긴 마르도니우스 역시 아나톨리아 반도로 되돌아 가고 말았다. 다만 이번 페르시아의 원정이 과연 그리스 침공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비록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서 침공했다고 기록하였지만 본래부터 페르시아가 노린 것은 트라케였다는 점에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포함시키지 않는 학자도 있다. 어쨌든 트라케를 차지하면서 페르시아의 일차적인 목적은 일단 달성한 셈이 되었다.
다리우스 1세의 그리스 침공 시작
BC 491년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복종에 대한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는 요구를 하였다. 이에 대해 많은 그리스 폴리스들이 굴복하였지만 아테네는 사신을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시켰고 스파르타는 직접 흙과 물을 가져가라며 우물에 빠뜨렸다. 이에 다리우스 1세는 직접 무력으로 응징하기 위하여 BC 490년 다시한번 원정군을 조직하여 그리스 공격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면전인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First Persian invasion of Greece)'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군의 규모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600척의 '갤리선(Galley)'이 동원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200,000명부터 500,000명까지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는 대략 200,000명 정도 동원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리우스 1세는 이번 원정의 지휘를 육군과 해군으로 나누어 자신의 조카인 아르타페네스와 해군 제독인 다티스(Datis)에게 각각 지휘를 맡겼다. 이번에는 폭풍우 없이 무사히 에게해를 건넌 페르시아 해군이 '낙소스섬(Naxos Island)'을 점령한 후 그리스 본토로 직접 상륙하여 별다른 저항없이 에레트리아를 6일만에 함락시켰다. 에레트리아는 폐허가 되었고 신전들은 파괴당했다. 이제 페르시아군이 아테네로 향하면서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반도 동쪽의 마라톤 평야에 상륙하였다. 길잡이로는 일찍이 클레이스테네스에게 추방당했던 아테네의 전(前) 참주인 히피아스가 참여하고 있었다.
마라톤 전투
페르시아군의 침략에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비롯한 주변 폴리스에 전령을 보내어 지원군을 파견해 달라고 했으나 스파르타는 '아폴로 카르네이오스(Apollo Karneios)'를 기념하기 위한 '카르네이아(Karneia)' 제전을 지내야 한다는 종교적인 이유로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스파르타법에서는 카르네이아 제전 동안에는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테네의 요청에 '플라타이아(Plataea)' 만이 1,000명의 지원군을 보냈다. 아테네군은 플라타이아 지원병을 포함하여 총 10,000명이었고 대부분이 '호플리테스(Hoplítes)'라고 불리는 중장보병이었다. 이에 반해 페르시아 군은 총 25,000명으로 대부분이 경보병과 궁병이었고 기병이 대략 5,000기가 포함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마라톤(Marathon)' 평야에서 양군의 대치 상태가 수일간 계속되었다. 당시 아테네군은 10개의 부족에서 병력을 차출하였기 때문에 각 부족별로 '스트라테고스(Strategos; 장군)'가 임명되어 10명의 지휘관이 존재하였고 3명의 아르콘 중 군대 지휘를 담당하고 있던 칼리마코스(Kallímakhos)가 총지휘관이 되었다. 아테네의 스트라테고스들은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먼저 공격하자는 측과 적의 공격을 기다리자는 측으로 나뉘어졌으나 칼리마코스가 공격하기로 결정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아테네군은 10명의 장군이 1일씩 번갈아가며 지휘를 맡고 있었는데 아테네의 스트라테고스 중 하나인 밀티아데스(Miltiades)가 페르시아 군에 잠시 몸을 담은 적이 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4명의 장군이 자신의 지휘권을 밀티아데스에게 위임하였다.
이렇게 하여 밀티아데스는 총 10일 중 5일을 지휘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페르시아군이 전통적으로 중앙은 강하지만 양익은 취약하다는 약점을 노리기 위해 아테네군의 진형을 중앙은 4열 횡대로 얇게 하는 대신에 양익은 평소대로 8열 횡대를 갖추는 대신에 최정예를 배치시켰다. 그리고 밀티아데스가 지휘를 맡던 기간 중에 수적으로 우세하였던 페르시아군은 갑자기 기병 5천기를 포함한 총 10,000명의 병력을 후퇴시켜 군선에 승선시켰다. 페르시아로서는 해상으로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려는 의도였으나 아테네군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여전히 페르시아군은 15,000명의 병력을 보유하여 10,000명의 아테네군보다 수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보병만으로 이루어진 아테네군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페르시아의 기병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공격 기회가 왔음을 깨달은 밀티아데스가 즉각 공격을 명령하였다. 마라톤 전투가 시작되자 밀티아데스의 부대 배치 효과가 곧바로 증명되었다. 아테네군의 중앙은 예상대로 페르시아군에게 밀려나기 시작했으나 양익이 성공적으로 페르시아군을 패퇴시켰고 자연스럽게 중앙의 페르시아군을 아테네군이 반포위하는 형세로 전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포위당할 위험에 처한 페르시아군이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를 아테네군이 뒤쫓았으나 군선을 타고 탈출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 채 군선 7척만 침몰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에서 승리를 거둔 아테네군이 마라톤 평원에서 빠져나간 페르시아군이 아테네를 직접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서둘러 아테네로 되돌아 가면서 해상으로 아테네를 공격하려던 페르시아군의 작전도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이렇게 하여 마라톤 전투가 아테네군의 대승으로 끝이 났다. 아테네군의 전사자는 200명 남짓에 불과한 반면에 페르시아군의 전사자는 6,400명에 달할 정도로 아테네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비록 아테네군이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자발적으로 스스로 무장하고 나선 시민병이었기 때문에 강제로 동원된 페르시아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의 중장보병이 페르시아의 경보병보다 더 우수하다는 점도 증명되었다. 마라톤 전투의 승리로 그리스 폴리스들은 페르시아 군이 더이상 무적이 아니고 그리스 국가들도 연합하여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에 반해서 키루스 2세 이래로 전면전에서 한번도 패한적 없는 페르시아 육군이 마라톤 전투에서 유일하게 패배함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페르시아군이 물러나자 페르시아에 굴복했던 많은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들이 다시 아테네 편으로 돌아서게 되었고 이오니아의 그리스계 도시에 대한 페르시아의 영향력도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한편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가지고 아테네로 달려온 한 병사가 소식을 전하고 사망했다는 전설에서 현대 올림픽의 마라톤 경주가 유래가 된다.
팔랑크스 대형
BC 3000년의 수메르 시대부터 전투에서 병사들이 전쟁의 공포를 이겨내고 효과적인 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밀집대형을 이루어 싸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보병의 밀집대형은 발전을 거듭하여 BC 7세기 초에 고대 그리스에서 '팔랑크스(Phalanx)'라는 대형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그리스는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차나 기병의 운용이 어려웠기 때문에 자연스렵게 보병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군대에 자원한 시민군으로 이루어져 자신의 무장을 스스로 구입하는 전통 덕분에 모든 병사의 중무장이 가능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군은 경무장 궁병과 궁기병 중심의 페르시아 군과 달리 중장보병이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그리스 중장보병들은 '호플론(hoplon)'이라고 불리는 둥근 방패를 들었기 때문에 '호플리테스(Hoplítes)'라고 불렸다. 그리스 호플리테스들은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만 전쟁에 동원되었으므로 복잡한 전술을 택하기 보다는 단순히 밀집대형을 짜고 상대진영으로 돌진하는 전술이 주로 사용되었다. 호플리테스의 팔랑크스 진형은 왼손에 든 방패로 자신의 상반신 왼쪽과 왼편에 위치한 아군의 상반신 오른쪽을 같이 방어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밀집도는 더욱 커졌고 혼자 도주할 경우 왼편의 아군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주기 때문에 최고의 불명예로 여겨졌다. 그리고 방패로 가려줄 수 없는 부분은 청동 헬멧, 청동 흉갑, 정강이받이 등을 착용하여 방어하였다. 다만 진열의 가장 우측에 위치한 병사는 자신의 오른쪽 부분을 가려줄 수 있는 동료가 없기 때문에 최고의 전사만 차지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로 취급되었다.
호플리테스의 무기는 2m 정도 길이의 장창인 '사리사(Sarissa)'였는데 커다란 길이 때문에 주로 어깨 위로 들어서 사용했다. 전투시 길다란 장창을 부채살 모양처럼 앞으로 겨눈 상태에서 앞쪽 5, 6열이 창을 내리고 나머지 열은 조금씩 각도를 올려서 창을 올린뒤 전진해 나갔기 때문에 전체적인 모습은 고슴도치 모양이 되었다. 밀집대형의 최소단위 가로 4명과 세로 8명인 32명으로 계속 모여서 거대한 대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팔랑크스라고 불린 이 대형은 비록 측면이나 후면에서의 공격에는 약했으나 정면에 대해서만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그리스의 중장보병은 페르시아의 궁기병과 궁병의 원거리 공격을 방패와 방어구로 막아내고 전진하여 근접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의 경보병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그리스의 중장보병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그 우수성을 입증하였고 이후 팔랑크스는 고대 그리스군의 대표 전술이 되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프 2세(Phílippos II, 재위 BC 359년 ~ BC 336년)에 의해 더욱 개량되어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Aléxandros III, 재위 BC 336년 ~ BC 323년)의 대제국 형성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10년의 휴전
아테네의 전쟁 준비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가 대승을 거둔 이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3번재 원정을 계획하였고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바빌로니아(Babylonia)'와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다리우스 1세가 BC 486년 사망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아테네는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가 내부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그리스를 또 다시 침공하는 BC 480년까지 10년 간의 평화를 얻었다. 그러나 페르시아가 재차 침공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군사력 증강에 힘을 쏟게 되었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을 두고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밀티아데스의 육군 증강론과 BC 493년 아르콘에 선출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ẽs)의 해군 증강론이 대립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단순히 국방의 우선 순위를 넘어선 정치 쟁점으로 발전하였다. 육군 증강의 경우에는 시민병들이 자신의 무장비용을 스스로 부담하는 아테네의 전통 때문에 시민병으로 복무하는 중산계급의 정치적 지위의 상승으로 이어지는 반면에 해군 증강은 군선 건조를 위해 부자들이 비용을 부담해야 하므로 더 많은 세금을 내야하는 부자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록 육군 증강론과 해군 증강론이 처음에는 첨예하게 대립하였지만 밀티아데스가 마라톤 전투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이 승리한 이유가 페르시아군이 기병을 철수시켰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페르시아 기병이 그대로 있었다면 제 아무리 아테네의 중장보병이라도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페르시아군을 평원에서 상대하기보다는 해상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이 좀더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아테네에서 8㎞ 정도 떨어진 '피레에프스(Pireefs)' 만을 항구로 만드는 공공 사업을 추진하였고 당시 70척 정도였던 아테네가 보유한 갤리선을 2~3배로 늘리고자 하였지만 예산 문제로 한계에 봉착하였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는 BC 483년 발견된 '수니움(Sunium)' 근처의 은광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입을 시민들에게 배당하는 대신에 군선 건조에 투입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라톤 전투에 참전했던 장군이자 또다른 아르콘인 아리스티데스(Aristeides)가 반대하고 나섰으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도편추방제를 이용하여 아리스티데스를 추방하며 반대 의견을 묵살하였다. 그 후 BC 480년까지 무려 200척의 3단 갤리선인 '트라이림(Trireme)'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가 본격적인 해양강국으로 나가는 기반을 다지게 된다.
페르시아의 전쟁 준비
한편 페르시아에서는 BC 485년 다리우스 1세가 죽자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가 즉위하였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리우스 1세의 말년부터 이어진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느라 그리스 침공을 곧바로 추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 1세는 무자비한 토벌로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반란을 곧바로 진압하게 되었고 특히 관용을 내세운 다리우스 1세와 달리 반란 토벌 과정에서 바빌론의 신전과 신상을 파괴해 버릴 정도로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여유가 생긴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이 이루지 못한 그리스 원정을 준비를 명령하게 되고 페르시아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병력을 징발하는 동시에 갤리선을 이용한 대규모 수송선단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치는 데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BC 480년 마침내 제2차 그리스 침공을 단행하게 된다.
이번에도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군 규모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는데 헤로도투스의 기록은 보병만 1,700,000명, 기병 80,000기, 그리스의 페르시아 동맹군 320,000명 등을 합하여 총 2,600,000명 이상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라고 적고 있으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대략 800,000명 정도로 추정하였고 현대의 연구자들은 약 90,000명에서 300,0000명 사이로 보고있다. 실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든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의 대병력이 동원된 것만은 분명하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 사이에 놓인 좁은 바다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배를 이용하여 건너지 않고 육상으로 건너기 위해 이집트와 페니키아의 함선을 연결한 2개의 배다리를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비록 배다리가 폭풍에 유실되었으나 다시 지어졌고 페르시아의 대군이 7일에 걸쳐 모두 건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