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
이집트와 바빌론의 반란 진압
BC 486년 다리우스 대제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즉위하였다. 비록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리우스 대제의 장자는 아니었지만 즉위한 이후에 처음으로 얻은 아들로서 그 어머니가 키루스 대제의 딸인 아토사였기 때문에 다리우스 대제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즉위후 당면한 문제는 다리우스 대제 시절에 일어난 이집트의 반란을 평정하는 일이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속주민에게 관대했던 다리우스 대제와 달리 강압적인 방법으로 통치하기 시작하였는데 2년 동안 진행된 이집트 반란의 진압도 마찬가지여서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을 대대적으로 파괴하여 반란을 응징하였다.
또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자신이 이집트 반란 토벌에 매달려 있는 동안 바빌로니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이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토벌을 지시하였다. 바빌론의 성벽을 허물었고 신전을 약탈하였으며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둑 신상을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자신의 칭호에서 '이집트의 파라오'와 '바빌론의 왕'을 빼버렸는데 이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더 이상 하나의 국가로서 존중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리스 정벌 실패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반란 토벌을 마무리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제 다리우스 대제가 못 이룬 그리스 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 크세르크세스 1세 스스로는 전쟁에 관심이 없었으나 다리우스 대제 시절 그리스 정벌에 실패하였던 마르도니우스가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그리스 정벌을 부추겼다고 한다. 실상이야 어쨌든 꼼꼼한 성격의 크세르크세스 1세는 전쟁을 위해 무려 3년이나 준비를 하여 모든 속주에서 병력과 물자을 징발하고 원할한 물자보급을 위해 해군을 조직하였다.
또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기 위한 이집트와 페니키아에서 징발한 배를 연결한 배다리를 2개 만들었는데 비록 폭풍우에 배다리가 파괴되었지만 다시 만든 후 BC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건너기 시작했다. 이 때 페르시아군의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무려 7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또한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군의 규모를 500만명이라고 기록하였지만 현재는 대략 36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36만명 역시 당시로서는 유래없는 대규모 병력임에는 틀림없었다.
페르시아의 대병력을 방어하기 위해 '스파르타(Sparta)'의 왕인 레오니다스 1세(Leonidas I, 재위 BC 489년 ~ BC 480년)가 이끄는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와 그리스 각지에서 모인 4,000명의 병사가 좁은 '테르모필라이(Thermopylae)' 협곡에서 방어에 나섰다.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군은 3일 동안이나 버텨냈지만 레오니다스 1세와 스파르타 전사 300명 전원이 전사하면서 결국 테르모필라이 협곡을 돌파당하고 말았다. 이 '테르모필라이 전투(Battle of Thermopylae)'가 AD 2007년에 개봉된 영화 《300》의 배경이 된다. 테르모필라이 협곡을 통과한 페르시아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였고 아테네 시민들이 비워둔 아테네에 BC 480년 9월에 입성하여 '아크로폴리스(Acropolis)'를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망친 아테네 시민이 집결해 있는 살라미스 섬을 공격하기 위한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병참선이 막힌 페르시아군이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크세르크세스 1세는 페르시아군 일부를 마르도니우스에게 맡겨 그리스 점령지역을 통치하게 하였지만 페르시아 육군이 BC 479년 8월 테베 근처에서 벌어진 '플라타이아 전투(Battle of Plataea)'에서 패배하고 비슷한 시기에 바다에서도 페르시아 해군이 '미칼레 해전(Battle of Mycale)'에서 패배하면서 그리스 점령지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리고 오히려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그리스군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키프로스섬까지 번져갔다. 이 반란은 크세르크세스 1세의 뒤를 이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es I, 재위 BC 465년 ~ BC 424년)와 BC 448년에 그리스계 도시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칼리아스 화약(Peace of Callias)'이 맺고 나서야 비로소 종식되게 된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향락과 암살
비록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 정벌에는 실패했지만 페르시아 제국이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크세르크세스 1세는 큰 위세를 자랑했고 스스로를 '많은 언어를 가진 속주들의 왕(King of the provinces with many tongues)', '멀고 가까운 위대한 땅의 왕(King of this great earth far and near)'라고 칭했다. 일부에서는 크세르크세스 1세를 '크세르크세스 대제(Xerxes the Great)'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스 정벌에 실패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후로는 더 이상 대외원정을 실시하지 않았다.
대신하여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리우스 대제 시절부터 건설 중이던 페르세폴리스를 완성하고 그 곳에 아테네 화려한 궁전을 지었고 고고학자들이 '하렘(Harem)'이라고 부르는 작고 똑같은 보물 창고가 여러개 있는 건물도 만든 후에 그곳에서 향락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크세르크세스 1세의 사치스런 생활은 호사가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기게 되지만 크세르크세스 1세가 제국의 통치를 등한시하자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궁중 암투가 시작되고 말았다. 결국 크세르크세스 1세는 BC 465년 경호대장인 아르타바누스(Artabanus) 등의 신하들에 의해 큰 아들 다리우스(Darius)와 함께 살해당하고 만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쇠퇴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
아르타바누스에게 크세르크세스 1세와 그의 장남인 다리우스가 살해당하면서 차남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르타바누스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다. 하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비록 아르타바누스가 자신의 즉위에 큰 공을 세웠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를 살해하고 온전한 통치권을 회복하였다.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동생이 일으킨 박트리아 반란과 아테네의 지원을 받은 이집트의 반란에 시달렸으나 모두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에 대해서는 크세르크세스 1세 시절에 실패한 직접적인 정벌보다는 그리스 내의 중심 세력이 된 아네테를 견제하기 위해 비(非) 아네네의 '폴리스(Polis; 도시 국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교묘한 방식을 사용했다. 결국 BC 448년 아테네와 칼리아스 화약을 체결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 해안의 그리스계 도시들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에 아테네도 '키프로스(Cyprus)' 섬과 이집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로 합의하면서 그리스와의 오랜 분쟁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아르케메스 왕조 페르시아의 혼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케네니스 왕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강력한 전제 군주였다. 이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통치 시기부터 왕족 내부의 파벌로 인한 분열이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BC 424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2세(Xerxes II)가 즉위 45일만에 형제인 소그디아누스(Sogdianus)에게 암살당하자 다른 형제인 다리우스 2세(Darius II)가 반란을 일으켜 소그디아누스를 살해하고 그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이후 다리우스 2세가 20년간 제국을 통치하면서 잠시 안정을 찾았지만 후계자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 II)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에 대한 방비를 위해 그 동생인 키루스(Cyrus)를 아나톨리아 반도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분란의 싹을 남겨놓았다. 한편 그리스에서 그동안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을 주도하던 아테네가 패권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스파르타가 이에 반발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년 ∼BC 404년)이 일어났다. 이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스파르타를 지원하여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그리스에 대해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시대
BC 404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 II, 재위 BC 404년 ~ BC 358년)가 즉위하자 동생인 키루스가 BC 401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그리스군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다. 키루스가 호기롭게 페르시아 제국으로 진군하였으나 바빌로니아에서 벌어진 '쿠낙사 전투(Battle of Cunaxa)'에서 패배하고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그런데 비록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동생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이미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그리스의 지원을 받아 모두 동요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이 당시 그리스는 BC 395년 '코린토스(Corinth)'와 '아르고스(Argos)', 아테네가 동맹을 맺고 스파르타에 대항하는 '코린토스 전쟁(Corinthian War, BC 395년 ~ BC 387년)'을 일으킨 상태였는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스파르타를 견제하기 위해 아테네를 지원하였고 결국 수세에 몰린 스파르타와 '안탈키다스 화약(Peace of Antalcidas)'을 체결하여 아테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대가로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계 도시들에 대한 지배를 인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BC 380년 이집트에서 넥타네보 1세(Nectanebo I)가 일으킨 반란을 막아내지는 못하면서 결국 이집트는 독립했고 '제30왕조(Dynasty XXX)'가 시작되었다. 또한 스파르타가 BC 391년 '레욱트라 전투(Battle of Leuctra)'에서 '테베(Thebes)'에게 패배하면서 그리스 패권을 상실하자 페르시아가 안탈키다스 화약을 통해 보장받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지배력을 다시 위협받게 되었다. 결국 BC 366년경 아나톨리아 반도의 모든 사트라프들이 그리스와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페르시아 제국의 중앙 정부 자체의 힘으로는 사트라프의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지만 사트라프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면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통치 말년에 아나톨리아 반도의 반란을 대부분 진압하게 된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대
BC 358년 즉위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Artaxerxes III, 재위 BC 358년 ~ BC 338년)는 앞선 왕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내분의 원인이 된 많은 인척들을 모두 살해하여 권력을 강화했고 사트라프들이 고용한 모든 용병을 해고하도록 명령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의 통치력도 회복시켰다. 그 사이 그리스에서는 스파르타의 패권이 무너뜨린 테베의 성쇠도 오래가지 못하고 아테네가 잠시 세력을 회복하였지만 아테네의 동맹 도시들이 아테네의 전횡에 반발하여 '동맹시 전쟁(Social War, BC 357년 ~ BC 355년)'을 일으켰기 때문에 아테네의 세력이 다시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 내 어떤 폴리스도 다른 폴리스를 압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렇게 그리스가 내분을 겪고 있는 동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부왕이 상실한 이집트를 다시 점령하기를 원했고 BC 351년의 1차 시도는 실패하였지만 BC 343년 2차 시도가 성공하면서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인 넥타네보 2세(Nectanebo II)의 이집트군을 물리치고 이집트 제30왕조를 무너뜨렸다. 이렇게 하여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페르시아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으나 환관인 바고아스(Bagoas)를 지나치게 총애하였고 결국 BC 338년 바고아스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막내 아들인 아르세스(Arses)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를 모두 죽인 후 아르세스를 왕위에 앉히고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다리우스 3세의 즉위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멸망
아르고스는 바르고스 덕분에 왕이 될 수 있었지만 바르고스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을 허수아비로 만들자 바르고스의 독살을 계획하게 된다. 그러나 아르고스 BC 336년 바르고스가 먼저 아르고스를 살해하였고 대신하여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조카 손자인 다리우스 3세(Darius III, 재위 BC 336년 ~ BC 330년)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다리우스 3세는 바르고스의 뜻과 달리 바르고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에 바르고스가 다리우스 3세를 독살하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다리우스 3세에게 먼저 독살당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다리우스 3세가 군주로서의 통치권을 회복하였지만 그동안 페르시아는 각 지방의 사트라프가 중앙정부의 통제력에서 벗어난 불안정한 상태였다. 더욱이 그동안 서로 분열된 채 내분을 휩싸였던 그리스도 북방의 새로운 강자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프 2세(Phílippos II, 재위 BC 359년 ~ BC 336년)가 그리스 전역을 통일하면서 강력한 국가로 거듭나고 있었다. 결국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으로 더 유명한 필리포프 2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3세(Aléxandros III, 재위 BC 336년 ~ BC 323년)의 정복 전쟁을 상대로 BC 333년 '이수스 전투(Battle of Issus)'와 '가우가멜라 전투(Battle of Gaugamela)'에서 결정적인 대패를 당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오리엔트의 패자로 군림하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사라지고 그리스 문명과 오리엔트 문명을 통합한 새로운 '헬레니즘(Hellenism)' 문명이 탄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