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동양사 Asian History

인도 불교 쇠퇴, 이슬람의 침략

Jobs9 2021. 6.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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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력의 성장과 인도 침입

이슬람의 발생과 성장
이슬람의 교주 모하메드(Mohammed, 570∼632)는 AD. 570년 메카(Mecca)에서 쓰러져 가는 명문가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메카는 아라비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였으나 사막 지방의 미신과 우상 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모하메드라는 이름은 ‘높이 존경받다’라는 뜻으로 남자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여졌던 이름이었다. 그의 생의 비극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압둘라(Abdullah)는 그의 탄생 며칠 전에 죽었다. 그가 여섯 살 때 어머니 아미나(Amina)도 잃었다. 그리하여 그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나 아홉 살 때 그 할아버지마저 죽자 삼촌 아부 탈립(Abu Talib) 밑에서 자라며 그가 속한 코레이쉬(Koreish) 부족들과 똑같이 가축을 치고 장사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는 충실하고 진실했으며 열두 살 때 삼촌과 함께 대상 틈에 끼어 시리아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의 일생에 전기가 된 것은 그가 25세 때에 메카의 부유한 과부인 15세 연상 하디자(Khadijah)와 결혼한 것이다. 그녀는 세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려서 죽고 오직 딸 파티마(Fatima)만이 모하메드보다 오래 살았다. 모하메드는 하디자를 만나 경제적 안정을 얻고 명상과 종교적 관심을 더 가질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메카 근교 히라 산에 있는 동굴에서 며칠이고 명상에 잠기곤 했다. 그가 종교적인 각성을 경험한 것은 40세 되던 때였다. 히라 산의 동굴에 있는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알라(Allah)신의 계시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였다. 3년 후 다시 두번째 계시를 받은 후 그는 알라가 유일한 신이며 그의 예언자임을 자처하였다.

모하메드의 후계자인 칼리프(Caliph, 교주)는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이며 군사령관이고 동시에 입법자이기도 하였다. 역대의 칼리프들은 손에 ‘쿠란(Quran)’과 칼을 들고 동서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제5대 칼리프인 우마야(Umaya) 가문의 무아위야(Muawiya) 때는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사라센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들의 지배영역은 사방으로 확대되어 동서로는 대서양에서 인더스 강, 남북으로는 카스피 해에서 나일 강에 이르는 세계 제국이 되었다. 그 뒤 아불 압바스(Abul Abbas)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압바스 왕조를 수립하였다. 또한 우마야 왕조의 일파도 스페인에 세력을 뻗치고 있었으므로 사라센 제국은 동서 칼리프 국가로 분열되었다. 인도에 수립된 무슬림 왕조도 이론상으로는 동 칼리프의 일부였지만 실제로는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였다. 

 

이슬람 제국의 인도 침입
인도는 굽따 제국이 쇠퇴한 뒤 11세기까지 외부로부터 침입이 없었다. 따라서 외세의 위협 아래서 성장하게 되는 애국심이나 민족의식은 점차 상실되어 갔다. 오랫동안 평화롭게 부를 축적하며 여유 있는 경제생활을 하였으나 반면에 정치조직은 미약하였고, 또 지배계층의 반목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렇게 몇 세기가 지나면서 인도는 무력한 상태에서 무슬림의 침입을 맞게 되었다.

무슬림은 인도로 공격해 오기 전에 인도의 서해안 지역과 빈번한 교역을 추진해 왔으며 그들의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인도 안의 영토를 갖겠다는 야망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무슬림의 인도 침입도 이슬람 제국의 강력한 영토확장의 정책의 하나였지만 거기에는 이슬람을 전파하려는 종교적 열정과 함께 오랜 무역을 통해 알게 된 풍요로운 인도의 재화를 약탈하려는 욕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슬람 세력들은 712년에 발루치스탄까지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인더스 강 하류 신드 지방을 병합하였으나 일시적이었다. 그 뒤 아프가니스탄의 터키계 가즈니(Ghaznl? 왕조는 986년부터 인도 정복을 시작하여 먼저 폐샤와르를 점령하고 987년 왕위에 오른 마흐무드(Mahmu?)는 1001∼1027년 사이에 17회에 걸쳐 북인도를 원정하여 물탄, 타네스와르, 마투라 등 북인도 서쪽을 완전히 함락시켰다. 마흐무드가 인도를 원정한 주요 목적은 노예와 물자의 약탈이었지만 불교와 힌두교 사원과 성지를 파괴하고 보물을 약탈하고 스님들을 학살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 원정에 의해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도시는 인도인 노예와 약탈물로 흘러 넘쳤다고 한다. 

마흐무드가 죽은 뒤 가즈니 왕조는 서쪽의 살주크(Salju?) 세력에 밀려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뒤이어 일어난 고르(Ghu?) 왕조의 기야스 우드 딘 무하마드(Ghiyas-ud-dl? Muhammad)에게 멸망당하였다(1173∼1174). 그러나 가즈니 왕조의 마흐무드는 아프가니스탄, 신드 및 펀잡 지방을 그의 영토에 병합시켰지만 마치 폭풍처럼 몰려와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지나가는 데 그쳐 지속적인 영향은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인도의 서북 국경지방을 장악한 일은 다음의 무슬림 침략자들이 인도에 들어오는 길을 쉽게 만들어 놓은 셈이 되었다.1) 1) 曺吉泰, 《인도사》, 민음사, 1995, pp. 180∼182 참조. 

고르 왕조는 가즈니와 헤라트 사이에 있는 고르 지방에 살고 있던 터키계 무슬림으로서 고르 왕인 무하마드는 1173년에 가즈니 왕조를 그 본거지로부터 쫓아내고 동생 무하마드(Shihab-ud-dl? Muhammad)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1175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펀잡과 구자라뜨 지방을 정벌하고, 또 1191∼1192년에 델리 북쪽 따라인에서 두 번에 걸친 전쟁 끝에 인도 연합군을 무찔렀다. 두 차례에 걸친 따라인 전투는 무슬림들이 인도를 지배하게 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2) 이들의 인도 침략 목적은 가즈니 왕조와 달리 약탈보다는 이슬람 왕국을 세우는 데 있었기에 1202년에는 벵갈만까지 그 세력을 확장시켰다. 2) 조길태, 위의 책, pp. 182∼18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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