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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가, 카를 5세 시대, 신성로마황제, 종교 개혁, 합스부르크 왕가 분할, 스페인, 오스트리아

Jobs 9 2021. 6. 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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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5세의 상속에 의한 합스부르크 대제국 건설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부르고뉴 공작령 상속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아들 카를 5세

AD 1500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프 1세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의 상속녀 후아나 사이에서 카를로스가 태어났다. 펠리페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 공작령의 상속녀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고 후아나는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가 결혼하여 낳은 딸이었다. 이렇게 복잡한 혈통을 이어받은 카를로스는 오스트리아 기반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고뉴 공작령의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아라곤 왕국 및 카스티야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왕가에 대한 상속권을 모두 보유하게 되었다. 

 

AD 1482년 펠리페 1세는 그의 모후인 마리가 사망하자 부르고뉴 공작령을 물려받았다. 다만 이 당시 정작 영지명의 어원이 되는 부르고뉴 지방은 대부분 프랑스의 왕실에게 몰수당하면서 영지로 남아있는 프랑스 동부 지역은 프랑슈콩테와 샤롤레 뿐이었고 영지의 대부분은 북해 연안 저지대(지금의 베네룩스 3국)의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였다. AD 1496년 펠리페 1세가 아라곤 왕국 및 카스티야 왕국의 상속녀인 후아나와 결혼하였고 AD 1504년 이사벨 1세가 사망한 이후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으로 선포되었나 정신병을 이유로 카를로스의 아버지 펠리페 1세가 섭정이 되었다. 하지만 AD 1506년 펠리페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섭정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고 카를로스는 카스티야 의회에 의해 왕세자에 해당하는 아스투리아스 공(스페인어 Príncipe de Asturias)에 임명되어 장차 후아나를 계승하도록 정해졌다. 

 

대신에 카를로스는 아버지 펠리페 1세의 영지인 부르고뉴 공작령은 곧바로 물려받으면서 공식적으로는 부르고뉴 공작, 로티에르 공작, 샤롤레 백작, 브라반트 공작, 림부르크 공작, 룩셈부르크 공작, 나뮈르 백작, 아르투아 백작, 플랑드르 백작, 에노 백작, 홀란트 백작, 제일란트 백작, 겔데른 공작, 쥐트펀 백작을 모두 겸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테가 섭정이 되어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의 통치와 카를로스의 양육을 맡았다. 또한 신학자인 위트레흐트의 아드리안이 카를로스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그는 훗날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로 선출된다. 

 

 

 

트라스타마라 왕가 상속과 스페인 왕국의 성립

 

AD 1515년 카를로스는 15세가 되자 스스로 통치연령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고는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테로부터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에 대한 통치권을 찾아왔다. 또한 AD 1516년 외조부인 페르난도 2세마저 사망하면서 공식적으로 아라곤 왕국의 여왕이었던 그의 모후인 후아나가 카스티야 왕위까지 물려받게 됐지만 여전히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카를로스가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공동왕으로 즉위하며 카를로스 1세로 선포되었다. 이에 따라 카를로스 1세의 조부모인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한 이후에도 명목상 별개의 나라로 존재하였던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이제 카를로스 1세라는 한 명의 군주가 통치하는 스페인 왕국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다만 공식적으로 카를로스 1세는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마요르카, 발렌시아, 시칠리아, 나폴리의 왕이자 바르셀로나, 루시용, 세르다뉴의 백작이었다. 

 

이렇게 AD 1517년 스페인의 새로운 통치자 자격으로 스페인에 도착한 카를로스 1세였지만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에서 자랐기 때문에 스페인의 관습에 서툴렀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어를 거의 하지도 못했다. 더구나 주요 관직에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 출신의 사람들을 등용하면서 외국인 지배와 다름없는 체제를 만들었기 때문에 카스티야 왕국의 많은 도시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또한 아라곤 왕국의 의회는 후아나의 왕권을 더 우선시하여 AD 1555년 후아나가 사망할 때까지 카를로스 1세가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카를로스 1세는 AD 1519년 할아버지인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스페인 문제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속을 위해 독일로 떠났다. 

 

 

 

합스부르크 왕가 상속 및 신성로마황제 즉위

 

독일에 도착한 카를로스 1세는 오스트리아 대공령, 슈타이어마르크 공작령, 케른텐(카린티아) 공작령, 카르니올라 공작령, 티롤 백작령 등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를 모두 상속받았다. 그러나 조부 막시밀리안 1세가 차지하고 있던 독일 왕위는 혈통에 의한 세습이 아니라 선제후의 선거로 선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후보자로 나서야 했다. 이 때 카를 5세의 왕위 계승을 저지하기 위해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도 후보자로 나섰고 로마교황 레오 10세의 지지도 받아내면서 큰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카를로스 1세는 상속받은 방대한 영지에서 나오는 풍부한 재정 능력을 바탕으로 많은 뇌물을 뿌리며 선거권을 가진 선제후를 매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선거가 실시되자 선제후의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카를로스 1세가 AD 1520년 10월 아헨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독일왕 카를 5세로 즉위했다. 다만 카를 5세가 신성로마황제로 즉위하기 위해서는 로마교황 집전의 대관식이 필요했지만 당시 로마교황 레오 10세가 프랑수아 1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당장은 신성로마황제로서는 대관식을 치를 수 없었다. 결국 AD 1530년이 되어서야 새로운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정식으로 황제의 대관을 받게 되는데 참고로 이것이 역사적으로 로마교황이 집전한 신성로마황제의 마지막 대관식이 된다. 이렇게 하여 카를 5세는 친가와 외가 쪽으로부터 상속받은 영토가 스페인, 오스트리아 및 독일,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 섬, 나폴리 왕국, 밀라노 공국, 프랑슈콩테,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 아메리카 식민지에 이를 정도로 매우 광대해지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the empire on which the sun never sets)'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프랑스와의 대결, 이탈리아 전쟁

 

밀라노 쟁탈전

 

카를 5세가 독일 왕위를 차지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은 이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이었다. 이미 프랑스는 카를 5세의 영지인 남쪽의 스페인과 북쪽의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에 둘러쌓여 있었는데 이제는 동쪽의 독일까지 카를 5세의 영토가 되면서 바다인 서쪽을 제외하고는 카를 5세의 영지에 의해 프랑스가 포위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 때문에 프랑수아 1세가 이러한 상황을 저지하고자 독일 왕 선거의 후보자로 나선 것이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더욱이 프랑수아 1세를 지지했던 로마교황 레오 10세도 재정마련을 위해 면죄부를 판 것과 관련하여 AD 1517년 종교 개혁 운동이 촉발되면서 위기에 처하자 카를 5세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제 유럽을 대표하는 양대 왕가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발루아 왕가의 대표로서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가 서유럽의 패권을 둘러싸고 필연적으로 맞붙게 되었고 그 장소는 북이탈리아의 밀라노가 선택되었다. 밀라노는 본래 스포르차 가문이 공작 작위를 세습하였으나 프랑스의 샤를 12세가 AD 1499년 장악한 바 있었다. 이후 스포르차 가문의 도움 요청을 받은 스위스,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에게 빼앗겼으나 AD 1515년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를 공격하여 밀라노 공작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 공작에게 연금을 주는 조건으로 물러나게 만들고 밀라노를 재점령하였다. 그러나 스포르차 가문이 카를 5세와 로마교황 레오 10세에게 원군을 요청하면서 AD 1521년 카를 5세와 스포르차 가문 사이에 밀약이 맺어지면서 이탈리아 전쟁이 재개되었다. 

 

 

 

파비아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

 

카를 5세가 파견한 합스부르크-스페인 군은 페스카라 후작 페르난도 데 아바로스 지휘 하에 프랑스 군을 상대로 비코카 전투와 세시아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카를 5세는 프랑스로부터 롬바르디아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고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의 동생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를 새로운 밀라노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프랑수아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롬바르디아를 탈환하기 위해 진격하여 파비아를 포위하였고 카를 5세 측에서도 파비아를 구원하기 위해 샤를 드 란누아를 파견하면서 양 군이 파비아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이 때 프랑스 군은 스위스 용병대를 고용하고 중장기병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총 53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황제군은 독일용병인 란츠크네흐트의 지원을 받았고 아르케부스 소총으로 무장한 보병대가 주력을 이루었으며 스페인-독일 기병이 이를 보조하고 있었다.

 

파비아 전투는 약 1달 간의 소모전을 거듭한 끝에 AD 1525년 2월 23일 스페인 군의 야습으로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었다. 다음날인 AD 1525년 2월 24일 아침 스페인 군의 대포 포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먼저 독일-스페인 기병대와 프랑스 기병대가 격돌했고 이어서 서로 구원을 온 독일용병 란츠크네흐트와 스위스 용병대가 맞부딪치게 되었다. 이때 스페인 군 사령관 샤를 드 란누아가 직접 일단 기병대와 보병대를 이끌고 프랑스 군 야영지를 급습하자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중장기병대를 투입시켜 이들을 막아내게 하면서 프랑스 중장기병대가 독일-스페인 기병을 물리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장창병과 아르케부스병이 혼합된 스페인 보병대에게 포위당해 전멸당하고 말았다. 

 

유럽에서 수위를 다투는 용병단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던 스위스 용병대와 독일 란츠크네흐트의 대결도 독일 란츠크네흐트 측에 스페인 보병대까지 가세하면서 스위스 용병대의 패배로 결착되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프랑스 군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에 호응하여 파비아를 지키고 있던 안토니오 데 레이바도 수비병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파비아를 포위하고 있던 안느 드 몽모랑시의 프랑스 군을 격파하였다. 최종적으로 파비아 전투에서 합스부르크-스페인 군의 사상자는 500명에 불과한 반면에 프랑스 군의 사상자는 12,000명에 달할 정도로 스페인 군의 대승으로 끝났고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도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파비아 전투에서 스페인이 위력을 증명해보인 장창병과 아르케부스 총병을 혼합한 밀집보병진형은 훗날 '테르시오(tercio)'로 불리며 AD 17세기까지 스페인 육군을 최강으로 군림하도록 만들게 된다.

 

 

 

코냐크동맹 전쟁과 샤코 디 로마

 

AD 1526년 카를 5세는 파비아 전투 이후 마드리드 감옥에 수감된 프랑수아 1세와 그를 석방하는 조건에 대한 협상을 벌여 '마드리드 조약(Treaty of Madrid)'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카를 5세는 프랑수아 1세가 점령한 이탈리아 영토를 포기하도록 만든 것은 물론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까지 넘겨받기로 하고 프랑수아 1세의 두 아들인 프랑수아와 앙리까지 볼모로 넘겨받았다. 그러나 정작 풀려난 프랑수아 1세는 국경을 넘자마자 마드리드 조약이 강요로 이루어진 조약이라며 무효를 선언하였고 카를 5세의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화되자 AD 1523년 새롭게 로마교황으로 선출된 클레멘스 7세도 프랑수아 1세의 마드리드 조약 파기를 승인했다. 이에 카를 5세는 프랑수아 1세의 두 아들을 4년 간이나 붙잡아 두게 된다.  

 

또한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베네치아 공화국과 피렌체를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참여하는 '코냐크 동맹(League of Cognac)'을 주도하였고 잉글랜드와 프랑스도 동참시켰다. 그러자 카를 5세는 AD 1527년 군대를 진격시켜 피렌체를 장악했고 그대로 로마로 향하게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오직 밀라노를 되찾을 욕심 뿐이었고 베네치아 공화국 역시 전황이 불리해지자 직접적인 관여를 꺼려했기 때문에 로마는 고립무원이 되었다. 이 당시 로마의 수비병력은 5천명의 민병대와 스위스 근위대 500명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손쉽게 점령됐다. 

 

그렇지만 로마 점령 이후 제때 급료를 지급받지 못한 용병들이 폭도로 돌변하면서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라고 불리는 대약탈이 벌어졌다. 로마에 대한 약탈은 너무나 철저히 진행되어 그동안 르네상스 운동으로 탄생한 수많은 예술품들이 파괴되고 소실되었다. 이 때문에 샤코 디 로마를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 종말의 원인으로 본다. 다만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키다가 전멸하는 길을 선택한 스위스 근위대의 희생 덕분에 무사히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이 때 보여준 스위스 근위대의 충성심과 영웅적인 희생은 오늘날까지도 로마교황청이 근위대를 스위스 용병으로만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산탄젤로 성에 머물던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는 로마가 대약탈을 당하는 참극을 보게 되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AD 1527년 6월 6일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값으로 4십만 두카트를 지불하고 파르마, 피아첸차, 치비타베키아, 모데나 등도 카를 5세에게 넘기는 데도 동의했으나 실제로는 모데나 만이 양도된다. 이후로도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는 6개월 간 산탄젤로 성에서 감금 생활을 하다가 탈출에 성공하였고 AD 1586년 10월이 되어서야 로마로 되돌아 왔지만 이미 로마는 옛 영광을 잃어버리고 만다.

 

한편 밀라노와 나폴리를 침공한 프랑스 군도 제노바 공화국이 카를 5세 측에 가담하면서 제노바 함대에 의해 후방이 차단당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신변 보장의 대가로 막대한 몸값을 치르는 조건으로 AD 1529년 '캉브레 조약(treaty of cambrai)'을 체결해야만 했다. 참고로 캉브레 조약은 협상이 프랑수아 1세의 모후인 사보이아의 루이즈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의 섭정이자 카를 5세의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인들의 평화조약(프랑스어 Paix des Dames)'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캉브레 조약을 통해 카를 5세는 프랑스로부터 밀라노 공국을 비롯한 북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인정받은 것은 물론 프랑스에게 프랑스 북부의 플랑드르, 아르투아, 투르네에 대한 종주권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마드리드 조약 이후 여전히 인질로 억류하고 있던 프랑수아 1세의 두 왕자를 석방하는 대가로 200만 크라운이라는 막대한 보상금도 지불받기로 약속받았다. 이에 반해서 카를 5세가 포기한 것은 프랑스 왕실이 실질적으로 영유하고 있던 옛 부르고뉴 공작령에 대한 유명무실한 상속권 뿐이었다.

 

스페인의 테르시오(Tercio) 보병 방진



근대 초기 스페인은 유럽 최강의 육군을 보유하게 되는데 그 바탕이 된 것이 바로 테르시오(Tercio)라고 불리던 독특한 보병 방진 덕분이었다. 테르시오는 AD 1494년 제1차 이탈리아 전쟁에서 보병과 경기병 중심의 스페인 군이 중기병과 스위스 창병으로 편성된 프랑스 군에게 패배하자 군제개혁의 일환으로 등장하였다. 테르시오의 등장 이전에 보병이 중세식 중장기병을 제압한 경우는 크게 3가지가 있었다. 바로 스위스 장창병과 잉글랜드 장궁병, 그리고 보헤미아 후스파의 수레진 전술이었다. 스위스 장창병은 고대 그리스의 장창보병 밀집대형을 근대 전투에 성공적으로 도입해내었고 잉글랜드 장궁병은 원거리 화력집중의 위력을 증명해 보였으며 보헤미아 후스파의 수레진 전술은 초기 소총과 대포의 전술적 활용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테르시오는 이러한 3가지 장점을 모두 결합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스위스 장창병의 밀집방진을 바탕으로 서서히 그 화력을 인정받고 있던 소총을 잉글랜드식 원거리 화력 집중으로 위력을 극대화시킨 대형이었다. 다만 원거리 공격을 통한 중세식 중장기병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장기병의 돌격을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는데 이를 위해 잉글랜드 장궁병은 사전에 충분한 목책을 세웠고 후스파는 수레를 방호벽으로 삼아서 중장기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했다. 그러나 별다른 방호물 없이도 스위스의 장창보병이 밀집대형을 통해서 중장기병의 돌격을 막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자 스페인에서도 중장기병의 돌격으로부터 소총병을 장창보병이 보호해주는 형태의 새로운 진형을 개발해내었다. 


이를 위해 스페인 보병은 기존의 원형 방패와 검을 버리고 스위스 장창병과 같은 길다란 파이크를 지니게 하였고 창병은 방진을 조직하고 있으면 주위와 양익에 소형의 투사병(석궁병, 소총병)이 배치되도록 했다. 그리고 부대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장교의 숫자도 증가시켜 1명의 장교가 병사 100~600명을 지휘하던 것을 병사 300명 당 약 4~6명의 장교를 배치시키는 것으로 변경했다. 한 부대는 1,000명 전후로 구성되었고 지휘관에는 코로넬(Coronel; 대령)의 계급이 부여되었다. 참고로 테르시오(Tercio)라는 명칭은 AD 1534년 스페인이 이탈리아로 파병한 부대가 3개(스페인어 Tercero)라는 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테르시오의 진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표준형태는 종심 약 40열로 이루어진 장창방진과 그 주변에 배치한 종심 5열의 소총대로 이루어진 3,000명의 밀집대형이었다. 전면에는 무거워서 취급하기 어려웠지만 위력이 컸던 머스킷 총병을 배치하였다. 전투시 소총대가 발포한 다음 후방으로 물러나고 전방의 다수의 창병이 창을 겨누고 돌격해 적을 쓰러뜨리는 방식으로 싸웠다. 전장에서는 3~4개의 테르시오를 일군으로 운용해 역사각형, 역오각형 형태로 전개하고 후방에 예비대로써 1개의 테르시오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화된다.

테르시오의 장점은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 중장기병의 돌격력을 감소시킬 방안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도 방어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더욱이 창병은 단지 창을 전방으로 향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복잡하고 긴 시간의 훈련도 필요없었다. 다만 방어위주의 진형이기 때문에 이동 및 방향전환에는 막대한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이는 이쪽에서 공격에 나서는 것이 매우 곤란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스페인은 테르시오의 전면에 대포를 배치하게 된다. 이후 테르시오는 여러 나라에 급속하게 퍼져 나가며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AD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완패할 때까지 유럽 전장을 지배하게 된다.

 

 

 

프랑스-오스만 제국 동맹 결성 및 이탈리아 재침공

 

AD 1535년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죽음에 임박했고 그의 지위를 이어받을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카를 5세가 밀라노 공국을 자신의 영지로 병합하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아무런 반발이 일어나지 않았으나 밀라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와 동맹도 체결하고 무력으로 다시 밀라노를 차지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AD 1536년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사망하고 카를 5세가 자신의 아들 펠리페 2세를 새로운 밀라노 공작으로 임명하자 프랑수아 1세가 그 해 3월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지방으로 처들어가 토리노를 점령하였으나 밀라노 함락에는 실패했다. 

 

이에 대응하여 카를 5세는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로 진격하여 AD 1536년 8월 점령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군이 마르세유로 향하는 길을 봉쇄하였기 때문에 카를 5세는 당초 목표인 아비뇽 공격을 포기하고 군대를 스페인으로 퇴각시켰다. 이렇게 카를 5세의 프랑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이탈리아 전황이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피에몬테의 프랑스 군이 계속 증강되자 제노바로 향했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오스만 제국도 해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 사이 제노바도 병력이 증원되었고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에 제노바 함락에는 실패한 채 피에몬테의 다른 지역만 점령하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더욱이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 간의 협력도 원활하지 못해서 AD 1537년 오스만 함대는 코르푸 섬의 공략에만 열중했다. 

 

전쟁이 지지부진해지자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을 동시에 상대하기를 원치 않았던 카를 5세는 프랑수아 1세와 강화 협상을 추진하였고 협상장으로 니스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중재자로 로마교황 바오로 3세가 나섰지만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기 싫어할 정도였기 때문에 협상 기간 내내 다른 방에 머물렀기 때문에 로마교황 바오로 3세가 두 방을 다니면서 중재를 해야 했다. 결국 AD 1538년 6월 '니스 조약(Treaty of Nice)'이 체결되면서 프랑스는 이번에 점령한 토리노의 소유권을 인정받았지만 당초 목표로 했던 밀라노의 탈환에는 실패했다. 

 

이후 AD 1531년부터 카를 5세의 누이동생인 마리아가 섭정이 되어 통치하고 있던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에서 카를 5세가 계속된 전쟁 때문에 부족한 재정을 메우려고 중과세를 부과한 것에 반발하면서 AD 1539년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카를 5세는 진압군을 이끌고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로 향했고 프랑스 영내를 통과하는 것을 프랑수아 1세로부터 허락받았으면서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가 서로 만나 현안에 대하여 논의하는 기회가 생겼으나 아무 것도 해결되지는 못했다. 이듬해인 AD 1540년 카를 5세가 프랑스와의 화해를 위해 자신의 딸인 마리아를 프랑수아 1세의 아들인 오를레앙 공작 샤를 2세의 결혼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지참금으로 장차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와 프랑슈콩테, 샤롤레 지역을 상속시키겠다고 약속하였으나 밀라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프랑수아 1세는 거절하였다. 

 

 

 

오스만 제국과의 대결

 

오스만 제국의 서진과 헝가리 쟁탈전 시작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오스만 제국은 AD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면서 유럽의 그리스도교 문명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동쪽 이란의 사파비 왕조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게 잠시 관심을 돌렸던 오스만 제국은 AD 1520년 쉴레이만 1세가 술탄으로 즉위한 이후 다시 유럽 쪽으로 세력 확장을 시작하였다. 쉴레이만 1세는 AD 1521년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로도스 기사단(옛 성 요한 기사단)의 근거지인 로도스 섬을 장악한데 이어 모하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러요시 2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러요시 2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위를 두고 혼란이 발생했다. 

 

본래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헝가리-보헤미아 왕 블라디슬라프 2세 사이에 맺어진 빈 협정(AD 1515년)에 따라 러요시 2세가 카를 5세의 누이동생인 마리아와 결혼하는 대신에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러요시 2세의 누이동생 안나와 결혼하는 이중 결혼동맹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페르디난트 1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에 대한 계승권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러요시 2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카를 5세는 페르디난트 1세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다만 카를 5세는 AD 1521년 이미 자신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를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임명하였고 AD 1525년에는 독일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을 직접 상대하는 것은 페르디난트 1세의 몫이 되었다. 참고로 미망인이 된 마리아는 카를 5세의 배려로 AD 1531년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의 섭정이 되었다.

 

 

 

2차례 빈 전투 승리

 

페르디난트 1세는 AD 1526년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자 공식적으로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보헤미아에 대한 점령은 손쉽게 이루어져 페르디난트 1세는 AD 1526년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문제는 헝가리였다. 헝가리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은 트란실바니아의 총독(voivode) 야노시 서포여이가 강력한 경쟁상태로 부상한 상태였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에 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개입이 근본적으로 저지하고자 120,000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AD 1529년 9월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거지인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공격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페르디난트 1세는 보헤미아로 피신했고 빈의 방어는 빌헬름 폰 로겐도르프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빈의 수비병력이 20,000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독일 용병대장 니클라스 그라프 살름이 이끄는 독일 용병 란츠크네히트의 창병과 스페인 출신의 머스킷 총병의 용병단을 고용했다. 오스트리아 군과 독일 용병들은 쉴레이만 1세의 공격을 공성전으로 버텨냈고 결국 오스만 제국도 보급 사정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에 10월 14일 최후의 공세가 무위로 돌아가자 쉴레이만 1세가 후퇴를 결정하였다.

 

쉴레이만 1세는 AD 1532년 다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오스트리아의 빈을 재침공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도 이미 AD 1531년 독일 왕으로 정식 즉위한 상태였고 이번에는 카를 5세가 80,000명의 지원병력을 보냈기 때문에 빈의 방어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결국 이번에도 빈은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버텨내었고 쉴레이만 1세는 후퇴하는 도중에 슈타이어마르크를 약탈하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였다. 이로서 승승장구하며 서진하던 오스만 제국의 공세가 육지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한계에 다다른 것이 명백해졌다. 그렇지만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북서부를 황폐화시켰기 때문에 헝가리에 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도 함께 감소되었다.

 

 

신성 동맹 참여와 프레베자 해전 패배

 

오스만 제국은 2차례 빈 공격이 실패하면서 육로로는 더이상 세력 확장이 어려웠지만 여전히 바다로는 유럽 국가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특히 로도스 섬이라는 훌륭한 해군 기지를 얻고 북아프리카 해적 출신의 명장인 하이르 앗딘 바르바로사가 등장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하이르 앗딘 바르바로사의 오스만 함대가 로도스 섬을 발판으로 에게 해와 이오니아 해의 섬들을 점령하기 시작하자 장차 이탈리아로 향할 것을 우려한 로마교황 바오로 3세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신성 동맹의 결성을 호소하였고 여기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은 물론 오스만 제국에게 로도스 섬을 빼앗긴 후 몰타 섬으로 거점을 옮긴 이제는 몰타 기사단이라고 불리게 된 옛 로도스 기사단이 동참하였다. 

 

스페인 역시 아라곤 왕국 시절부터 남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 섬 등을 차지하고 서(西)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카를 5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지중해 제해권을 지키고자 스페인을 신성 동맹에 동참시켰다. 그렇지만 AD 1538년 9월 28일 이오니아 해에서 벌어진 프레베자 해전에서 신성 동맹이 하이르 앗딘 바르바로사의 오스만 함대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 뿐만 아니라 에게 해와 이오니아 해의 바다까지 모두 장악하는 데 성공하면서 동(東)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헝가리 분할

 

비록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은 막아내었으나 헝가리에서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몰아낼 힘은 없었기 때문에 헝가리 왕위를 야노시 서포여이에게 넘기는 대신에 자신은 헝가리 북서부와 헝가리 왕이 겸하고 있던 크로아티아 왕위는 인정받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다만 크로아티아도 이미 대부분의 지역을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서부 지역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야노시 서포여이가 사망할 경우 헝가리 왕위를 넘겨받기로 하는 비밀협정도 체결하였지만 AD 1540년 막상 야노시 서포여이가 죽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던 헝가리 귀족들은 야노시 서포여이의 아들인 야노시 2세 지그몬드를 새로운 헝가리 왕으로 선출하였다.

 

이에 페르디난트 1세는 무력으로 헝가리를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쉴레이만 1세가 야노시 2세 지그몬드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헝가리를 침입하여 AD 1541년 부다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야노시 2세 지그몬드를 동쪽의 트란실바니아로 이동시킨 후 자신이 직접 헝가리 중남부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헝가리를 두고 벌어진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만 제국의 대결은 페르디난트 1세와 쉴레이만 1세가 모두 죽을 때까지 지속되다가 그들의 후계자들에 의해 AD 1568년이 되어서야 헝가리를 삼분할하는 것으로 합의되면서 겨우 종식된다. 

 

이에 따라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북서부의 '로열 헝가리(Royal Hungary)'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중남부의 '오스만 헝가리(Ottoman Hungary)', 그리고 야노시 2세 지그몬드의 '트란실바니아 공국(Principality of Transylvania)'으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 공작 야노시 2세 지그몬드가 오스만 제국에게 매년 공물을 받치는 대신에 자치권을 유지하는 속국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헝가리의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이 장악한 셈이 된다. 그리고 이후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만 제국의 힘의 균형점이자 끊임없는 분쟁 지역으로 남게 된다. 

 

 

북아프리카 알제 공격 실패

 

AD 1541년 헝가리의 부다를 오스만 제국에게 내어준 이후 카를 5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격을 생각했지만 페르디난트 1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육지가 아닌 바다를 선택하여 북아프리카의 알제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북아프리카의 알제로 본래 해적 시절 하이르 앗딘 바르바로사의 소유였으나 AD 1529년 하이르 앗딘 바르바로사가 귀순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상태였다. 이후 하이르 앗딘 바르바로사는 오스만 제국의 제독이 되어 함대를 총지휘하게 되었고 대신에 알제는 하산 아그하가 통치하게 되엇다. 카를 5세는 AD 1541년 9월에 팔마의 마요르카에서 함선 500척(갤리선은 80척)을 소집하고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의 병사 24,000명을 태웠다. 또한 몰타 기사단과 제노바 공화국도 일부 참가하였고 카를 5세가 이번 원정에 직접 동참하였다. 

 

스페인 함대는 악천후 때문에 AD 1541년 10월이 되어서야 알제 인근에 도착하게 되었다. 10월 23일 상륙한 카를 5세는 알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알제 함락은 시간 문제로 보였지만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서 함선 중 상당수가 파손되었다. 이렇게 카를 5세의 군대에 혼란이 찾아오자 그 틈을 타고 알제의 수비병이 성 밖으로 나와 공격하였다. 카를 5세도 위기에 처했지만 몰타 기사단 덕분에 무사히 도망쳐 알제에서 동쪽으로 5마일 떨어진 케이프 마티푸에서 안드레아 도리아의 제노바 함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폭풍우에 휘말리면서 나머지 스페인 함대는 베자이아에 정박했거나 아에 스페인 항구로 되돌아 가 버린 상태였다. 결국 카를 5세는 알제 공격에서 함선 200척(갤리선 17척 포함)과 1만 7천명의 병력을 잃어버리는 피해만 입고 11월 23일 쓸쓸히 귀국해야만 했다.

 

 

 

프랑스-오스만 동맹과의 전쟁 재개

 

프랑스-오스만 제국 동맹 재결성과 잉글랜드 헨리 8세의 참전

 

카를 5세가 오스만 제국과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자 프랑수아 1세는 AD 1542년 3월 다시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와 동맹을 맺고 그 해 7월 카를 5세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AD 1543년 4월 오스만 제국도 하이르 앗딘 바르바로사의 함대를 출항시켜 프랑스를 지원하도록 하여 그 해 9월 함께 니스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북이탈리아의 피에몬테에 병력을 증강시켜 AD 1544년 4월 체레솔레 전투에서 거뒀지만 AD 1544년 3월 카를 5세가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동맹을 체결하고 함께 프랑스를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피에몬테에 증원되었던 프랑스 군이 귀국하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 군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밀라노 점령에 또다시 실패하게 된다. 

 

프랑스 내 잉글랜드의 마지막 거점인 칼레에 상륙한 잉글랜드 군은 칼레 남쪽의 볼로뉴를 공격했다. 그 사이 카를 5세는 룩셈부르크를 탈환하고 8월 17일 생디지에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헨리 8세에게 파리 진격을 요청했으나 헨리 8세는 볼로뉴의 공격에만 집중하였다. 이에 카를 5세 단독으로 상파뉴 지방으로 진격하여 에페르네, 샤티용-수르-마른, 샤토-티에리, 수아송을 점령했다. 이제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길이 열렀으나 카를 5세도 독일에서 종교 개혁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반란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고 계속된 전쟁으로 재정 부담도 느꼈기 때문에 프랑수아 1세의 강화 협상을 추진했다. 

 

 

크리피 조약의 체결과 전쟁의 종식

 

AD 1544년 9월 18일 크리피 조약(Treaty of Crépy)이 체결되면서 AD 1538년 당시의 국경선으로 되돌리기로 합의했고 오를레앙 공작 샤를 3세를 카를 5세의 딸 마리아 혹은 조카 안나 중 한 명이랑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AD 1545년 오를레앙 공작 샤를 3세가 사망하면서 이 결혼은 무산되었다. 한편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카를 5세가 크리피 조약으로 전쟁을 중단한 이후에도 독자적으로 전쟁을 지속하며 볼로뉴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전쟁도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에 AD 1546년 6월 '아르드르 조약(Treaty of Ardres)'이 체결되었고 이를 통해 헨리 8세는 2백만 크라운이라는 막대한 보상금을 받고 볼로뉴를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가 차례로 사망한다. 

 

 

 

종교 개혁 문제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과 종교 개혁의 시작

 

중세 로마카톨릭에서는 현세의 죄악에 대한 용서를 비는 대사(大赦, Indulgentia)의 방법으로 기도와 성지 순례, 성경 암송 등이 행해졌지만 일부에서는 헌금으로 이루어지는 폐단이 있었다. 그러던 중 AD 1506년 로마교황 레오 10세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한 대사를 허용하면서 많은 종교 개혁가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그러던 중 독일의 로마카톨릭 사제이자 신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는 기존 로마카톨릭의 전횡에 회의를 품고 있던 중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가 재정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자 이를 신학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AD 1517년 10월 21일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의 정문에 이른바 '95개조 반박문(95 Thesen)'를 개재하였다. 

 

 

95개조 반박문은 처음에는 단순히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학자들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것에 불과하였으나 인쇄물로 바뀌어 널리 퍼지면서 독일 전체를 뒤흔드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내세우며 신앙자의 양심을 건 마르틴 루터의 용감한 교황권 비판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힘을 얻은 마르틴 루터는 AD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기존 로마카톨릭 교회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였고 이를 문제삼아 AD 1520년 6월 로마교황 레오 10세는 마르틴 루터에게 60일 안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끝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채 오히려 파문칙령을 불태워버렸다. 

 

마르틴 루터의 사상이 사회적 문제로 확산되자 AD 1521년 제국의회인 보름스 회의에서 마르틴 루터를 소환하여 카를 5세가 직접 신문하였는데 이때 카를 5세는 비록 마르틴 루터의 주장을 물리치기는 하였지만 단순 토론 의제로 취급하였기 때문에 추방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마르틴 루터는 추방자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에 공감하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호의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며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이른바 '루터교(Lutheran Church)'를 성립시켰고 이를 계기로 다른 국가들에서도 로마카톨릭의 권위를 부정하는 교회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는 데 이들을 통칭하여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자>라는 의미)'라고 부르게 된다.

 

 

독일 농민전쟁

 

AD 1521년 마르틴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게 되자 그의 사상을 추종하는 안드레아스 칼슈타트가 비텐베르크에서 미사 폐지, 성상 파괴 등을 내세우는 과격한 개혁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원래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과격한 개혁을 원하지 않아 과격파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그러나 이미 마르틴 루터의 사상은 오직 성경만을 내세우며 진행된 로마교황청이라는 절대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개혁이었기 때문에 상급 귀족과 영주들에게 핍박받던 하급 귀족과 농민들의 개혁 사상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던 중 AD 1522년에는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추종하는 인문주의자 울리히 폰 후텐과 제국 기사인 프란츠 폰 지킹겐이 AD 1522년 9월 트리어 대주교 리하르트 그라이펜클라우를 공격하는 '기사 전쟁(Knights' Revolt)'을 시작하였으나 토벌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비록 기사 전쟁은 실패했지만 하층 계급의 불만은 계속해서 누적되어 갔고 마침내 AD 1524년 슈바벤 지방의 수도원 농민들이 교회에 대한 십일조 폐지, 부역 감소, 농노제 폐지 등의 12개조 요구사항을 내걸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슈바벤 동맹(독일어 Schwäbischer Bund)의 제후들이 토벌군을 조직하였는데 슈바벤 동맹은 AD 1488년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주창으로 결성된 슈바벤 지역의 주교령과 제후령, 기사령, 자유도시들의 상호방위동맹이었다. 슈바벤 동맹은 AD 1524년 4월 라이파임에서 농민군을 공격하여 1천명을 학살하고 그 시체를 도나우 강에 던졌으며 이후에도 농민군을 각개격파해 나갔다. 

 

독일 농민 반란은 슈바벤을 넘어서 인근의 티롤, 튀링겐, 작센 등으로 퍼져나갔는데 특히 튀링겐의 신학자 토머스 뮌처의 세력이 가장 컸다. 토머스 뮌처는 부도덕하고 부조리한 현재의 세상을 타도하고 진정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면서 농민 뿐만 아니라 광부들까지 반란군에 끌어들여 제후의 요새와 교회, 수도원을 습격했다. 그러나 토머스 뮌처의 반란군도 AD 1525년 5월에 벌어진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와 작센 공작 게오르크에게 패배하면서 토벌당했고 토머스 뮌처는 사로잡혀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슈말칼덴 전쟁

 

비록 마르틴 루터의 사상이 농민 반란군의 정신적인 기반으로 작용하였고 마르틴 루터 본인도 처음에는 농민 반란에 호의적이었지만 점점 반란의 규모가 커지자 작센 선제후의 비호를 받던 입장에서 독일 제후들의 무력진압을 지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루터교는 기본적으로 제후의 힘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이는 많은 제후들이 제국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자신들을 최고 수장으로 하는 영방 교회를 성립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신성로마제국 전체가 로마카톨릭 지지파와 루터교 지지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자 루터교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로마카톨릭을 지지하던 카를 5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 중에 가장 세력이 컸던 것은 작센 선제후와 헤센 방백이었다. 작센은 프리드리히 3세 시절부터 마르틴 루터를 비호했는데 그가 AD 1525년 사망하자 동생 요한이 작센 선제후령을 상속받았다.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는 AD 1524년부터 루터교로 개종을 하였으나 농민 반란의 진압에는 주도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AD 1526년부터 작센 선제후 요한과 손을 잡았고 AD 1531년 마침내 루터교를 지지하는 독일 북부와 중부의 6명의 제후와 10개의 도시들을 결속시켜 '슈말칼덴 동맹(독일어 Schmalkaldischer Bund)'을 결성하였다. 슈말칼덴 동맹의 명칭은 본부를 둔 도시인 슈말칼덴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작센 선제후 요한이 AD 1532년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아버지의 영지와 이념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렇게 슈말칼덴 동맹이 조직되었으나 카를 5세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전쟁을 거듭했기 때문에 슈말칼덴 동맹이 프랑수아 1세와 연합할 것을 우려하여 일단 슈말칼덴 동맹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AD 1544년 프랑수아 1세와 강화조약에 합의하면서 이제 카를 5세도 슈말칼덴 동맹에 대한 토벌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AD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열리면서 로마카톨릭의 교리와 체계를 재정비하였지만 여전히 루터교를 배격하였다. 그리고 카를 5세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명분을 삼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 대한 토벌을 선언하면서 AD 1546년 슈말칼덴 전쟁이 시작되었다. 

 

카를 5세는 슈발칼덴 동맹 중 가장 큰 세력인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그 전에 내분을 유도했다. 당시 작센은 배틴 가문이 지배하였으나 AD 1464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이후 두 아들에 의해 영지가 분할된 상태였다. 장남인 에른스트는 작센 선제후가 되어 작센과 튀링겐을 상속받았고 차남인 알브레히트는 작센 공작이 되어 마이센을 물려받으면서 예른스트계 분가와 알브레히트계 분가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AD 1542년 에른스트계 분가인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공동 영지인 부르첸를 점령하면서 알브레히트계 분가인 작센 공작 모리츠와 불화를 겪었다. 이에 카를 5세는 작센 공작 모리츠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반해서 슈말칼덴 동맹은 겉으로는 세력이 강대했지만 지도자가 무능하여 세밀한 작전을 세우지 못했다. 이 때문에 로마교황 바오로 3세가 AD 1547년 4월 병력을 철수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뮐베르크 전투에서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즈의 활약 속에 카를 5세가 승리를 거뒀다.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비롯한 많은 슈말칼덴 동맹 지도자들이 포로로 붙잡혔고 헤센 방백 필리프 1세가 협상을 시도했으나 카를 5세에게 거절당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이렇게 하여 슈말칼덴 동맹이 붕괴되었고 카를 5세는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선제후 지위를 모리츠에게 넘겼다.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반란과 파사우 조약

 

슈말칼덴 전쟁이 카를 5세의 승리로 끝나고 카를 5세는 AD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열고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게 로마카톨릭을 강요하면서 독일의 종교 분쟁이 종식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제 작센 선제후가 된 모리츠는 비록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의 분쟁 때문에 카를 5세의 편에 섰지만 여전히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에 카를 5세의 로마카톨릭 정책에 동조하기 힘들었다. 또한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아내인 아그네스가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의 딸이었는데 당초 카를 5세는 필리프 1세가 항복한다면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감옥에 수감시켰다. 이에 분노한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조용히 기회를 엿보았고 AD 1552년 1월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비밀리에 샹보르 조약을 체결하였다.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프랑스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는 대신에 앙리 2세가 메츠, 툴, 베르됭, 캉브레를 점령하기로 합의했다.

 

AD 1552년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반란을 일으켜 오스트리아에 머물던 카를 5세를 기습공격했고 거의 포로로 붙잡을 뻔했지만 카를 5세가 간신히 도망쳤다. 그리고 카를 5세가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반란을 단호하게 대처하려고 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감옥에 수감되었던 헤센 방백 필리프 1세가 석방되었고 프랑스의 앙리 2세는 예정대로 라인 강으로 진출하여 도시들을 점령했다. 그러자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앙리 2세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카를 5세와 협상에 나섰다. 카를 5세도 심신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는 로마카톨릭만을 고집하던 카를 5세와 달리 독일 내의 안정을 위해서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AD 1552년 8월 독일 내 프로트세탄트의 지위를 인정하는 '파사우 조약(Treaty of Passau)'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파사우 조약으로 인해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양 측 모두를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와 로마카톨릭 모두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테스탄트로서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반란에 가담했던 브란덴부르크-콜룸바흐 변경백인 알브레히트 2세가 파사우 조약 이후 프랑켄 지역을 공격하며 뷔르츠부르크 주교구와 밤베르크 주교구, 뉘른베르크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프랑스가 점령한 메츠를 되찾기를 원하는 카를 5세의 편으로 돌아섰는데 카를 5세는 그 대가로 알브레히트 2세의 점령지에 대한 병합을 승인해 주었다. 그렇지만 페르디난트 1세는 알브레히트 2세에게 반대하고 작센 선제후 모리츠와 함께 반(反) 알브레히트 동맹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알브레히트 2세를 공격하여 AD 1553년 7월 지버스하우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불행히도 작센 선제후 모리츠 자신은 전사하고 만다. 하지만 작센 선제후 모리츠가 죽은 이후에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하인리히 5세가 계속해서 알브리히트 2세를 공격했고 결국 알브레히트 2세는 모든 지위를 박탈당한 채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AD 1555년 이제 페르디난트 1세는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의 화해를 위해서 루터교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The Peace of Augsburg)'를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루터교가 공인되면서 로마카톨릭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되었지만 '영주의 종교선택권(라틴어 Cuius regio, eius religio; 그의 영지에, 그의 종교)'의 관련 조항을 통해서 루터교를 선택할 권리는 영주에게만 있을 뿐 영지에 소속된 사람들은 종교 선택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아 영주가 선택한 종교를 그대로 따라야 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중에서도 루터교 이외에 프랑스의 신학자 칼뱅에 의해서 발단된 칼뱅파는 제외되었다는 문제도 있었다. 칼뱅파가 공인받는 것은 1세기 이후에 벌어지는 30년 전쟁으로 인해 베스트팔렌조약(AD 1648년)이 체결된 이후가 된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1세는 루터교와 로마카톨릭 간의 세력 균형을 위해서 로마카톨릭의 세력 유지를 위해서 '교회령 유보(라틴어 Reservatum ecclesiasticum)' 조항을 삽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서 교회령의 로마카톨릭 성직자 영주가 루터교로 개종하는 경우 공직과 영지를 모두 박탈되도록 하면서 교회령이 계속해서 로마카톨릭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대신에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이 교회령 내 제국자유도시와 귀족, 기사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자 이를 수용하면서 '페르디난트의 선언(라틴어 Declaratio Ferdinandei)' 조항이 추가되었다. 이렇게 하여 불완전하지만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부터 촉발된 독일 종교 개혁의 오랜 혼란이 겨우 종식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분할과 카를 5세의 죽음

 

AD 1700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분할된 영토 현황 (적색: 스페인 계열 / 황색: 오스트리아 계열 / 빗금 지역: 종주권 주장 지역)

 

카를 5세는 당초 오스트리아 공작과 독일 왕위를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겼지만 AD 1527년 아들인 펠리페 2세가 태어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AD 1550년 펠리페 2세에게 신성로마황제 자리를 넘기려고 했으나 독일 선제후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리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약을 성사시키면서 독일 지역에서 페르디난트 1세의 권위가 확고해졌기 때문에 미련을 버리게 된다. 대신에 카를 5세는 펠리페 2세를 잉글랜드 여왕 메리 1세와 결혼시켜 잉글랜드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로 만들려는 욕심을 가졌지만 잉글랜드 의회는 펠리페 2세의 잉글랜드 직접 지배를 거부했고 메리 1세도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카를 5세의 의도는 무산되었다.

 

다만 카를 5세는 펠리페 2세에게 AD 1554년 나폴리 왕위를 넘긴 데 이어 AD 1556년에는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와 스페인을 비롯한 나머지 영지를 상속하였다. 그리고 AD 1556년 신성로마황제 지위까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양위한 뒤 은퇴를 선언했다. 이리하여 합스부르크 왕가는 페르디난트 1세의 오스트리아 계열과 펠리페 2세의 스페인 계열로 분리되었다. 이후 카를 5세는 AD 1557년 2월부터 스페인의 유스테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지만 은둔생활 중에도 포르투갈 왕위를 아들인 펠리페 2세가 물려받을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네덜란드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기도 하는 등 완전히 정치에서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렇게 평생을 로마카톨릭의 수호자이자 중세 황제 이념의 마지막 대표자로 보냈던 카를 5세는 AD 1558년에 58살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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