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대 술탄 메메드 1세 시대
AD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에게 패배하고 바예지드 1세 자신은 포로가 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분열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티무르가 오스만 제국을 바예지드 1세의 세 아들이 분할하여 통치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는데, 장남인 슐레이만이 루멜리아(발칸반도 점령지)를, 차남인 메메드는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의 아마시아를, 그리고 삼남인 이사는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부르사를 각각 다스리도록 하였다. AD 1405년 메메드가 이사를 물리치고 부르사를 차지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 영토를 통합하였지만 바예지드 1세와 함께 포로로 붙잡혔다가 풀려난 막내 무사가 AD 1410년 슐레이만을 물리치고 발칸반도 영토를 장악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반도의 두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AD 1413년 메메드가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2세의 도움을 받아 발칸반도를 공격을 개시하여 세르비아의 카무를루 지역에서 무사의 세력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마침내 오스만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반도 영토를 모두 지배하게 된 메메드는 정식으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 즉위하여 메메드 1세가 되었고 수도는 에디르네에 두었다.
이후 메메드 1세는 선대술탄과 마찬가지로 발칸반도에 대한 세력확장에 치중하여 AD 1416년 왈라키아를 공국의 지위로 격하시켜 속국으로 삼았고 AD 1417년에는 알바니아 영토를 획득하였다. 하지만 자신을 도와준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2세와는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제6대 술탄 무라드 2세 시대
권력기반 확립
AD 1421년 메메드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무라드 2세가 오스만 제국의 제6대 술탄으로 즉위했다. 무라드 2세는 즉위 초부터 아버지의 형제라고 주장하는 무스타파의 도전으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비록 오스만 제국 내부에서는 무스타파의 신분을 거짓으로 치부했지만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2세가 무스타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상당한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무라드 2세는 AD 1422년 우선 무스타파의 세력을 격파한 후에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 위기에 몰린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2세는 무라드 2세에게 굴복하여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공물을 받치는 굴욕적인 평화조약에 서명하고 황제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발칸반도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한 무라드 2세는 AD 1425년까지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투르크족 공국들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인하였고 AD 1430년에는 5년간의 전쟁 끝에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던 그리스 북부의 테살로니키를 빼앗았다.
헝가리의 명장, 야노슈 후냐디의 등장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발칸반도를 넘어 헝가리까지 접근해오자 헝가리는 국경지역 수비를 강화하였는데 이때 새롭게 떠오른 사람이 야노슈 후냐디이다. 후냐디는 헝가리의 신흥귀족 집안 출신으로 세베린(지금의 루마니아에 있음) 지역의 '반'(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곳에서 뛰어난 군사적인 재능을 보인 후냐디는 승진을 거듭하여 나중에는 오스만 제국과의 거의 모든 접경지역을 지휘하게 되었고 AD 1442년부터 AD 1443년까지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베오그라드와 트란실바니아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었다.
AD 1443년에 베네치아 공화국과 로마교황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은 후냐디는 헝가리의 내분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 점령지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긴 원정'이라고 불린 이 원정에서 후냐디는 AD 1443년 10월에 도나우강을 건너 세르비아의 니슈와 불가리아의 소피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같은 해 12월에 추위와 보급의 어려움 때문에 퇴각해야 했다. 하지만 퇴각과정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지의 오스만 제국군을 연이어 물리치며 그 이름을 유럽 전체에 알렸다. 비록 후냐디는 발칸반도의 영구적인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유럽진출 이후 이러한 전과를 올린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후냐디의 군사적 명성은 매우 높아졌다.
후냐디의 긴 원정으로 군사적인 압박을 받게된 무라드 2세는 AD 1444년 6월에 에디르네에서 발칸반도의 유럽 국가들과 10년간의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후 전쟁에 염증을 느낀 무라드 2세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투르크족 연합인 카라만 공국과도 같은 해 8월에 평화조약을 맺은 후에 12살 된 어린아들 메메드에게 술탄의 지위를 양위하고 아나톨리아 남부에서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무라드 2세의 복귀와 바르나 전투의 승리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라드 2세가 술탄의 지위에서 물러나자 유럽의 국가들은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의 요청아래 십자군을 결성하고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메메드는 아직 너무 어려 전쟁을 수행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무라드 2세가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였으나 메메드의 "당신이 진정한 술탄이라면 당신의 군대를 지휘하시고, 술탄이 아니라면 술탄인 나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지휘하시오"라는 요청에 의해 군대를 지휘하기 마음을 바꿨다.
바르나 십자군이라고 불리는 유럽의 연합군은 헝가리와 폴란드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소규모의 교황청 기사단, 튜턴 기사단, 보헤미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왈라키아, 리투아니아, 세르비아 그리고 루테니아(지금의 우크라이나) 군대가 가세하고 있었다. 하지만 총 병력수는 대략 2만명 수준으로 총 6만명으로 추산되는 오스만 제국군보다 열세에 놓여있었다. 다만 바르나 십자군에는 후스전쟁에서 활약한 보헤미아 용병들이 헝가리군과 함께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대포를 실은 약 100여대의 전투마차(Wagenburg)를 보유했다.
양군은 AD 1444년 11월에 현재 불가리아 바르나 근처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바르나 십자군은 헝가리군이 중앙을 지키고 왈라키아 기병대가 후위를 맡았으며 나머지 십자군은 좌우에 나우어 배치시켰다. 이에 대항하여 오스만 제국군은 예니체리 군단과 루멜리아 징집병을 중앙에 배치시키고 우익에는 카피쿨루스와 시파히를, 좌익에는 아나톨리아 출신인 아킨시, 시파히, 아랍 용병들을 위치시켰다. 예니체리 궁수와 아킨시 경기병은 후위에 남았다.
오스만 제국과 아랍출신 경기병대가 바르나 십자군의 우익을 향해 돌격을 감행하며 전투가 개시되었다. 바르나 십자군은 이 공격을 보헤미아 용병들의 대포와 화승총의 포격으로 성공적으로 막아내었고 곧바로 역습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후퇴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너무 무질서하게 추격하였기 때문에 매복해 있던 아나톨리아 낙타기병과 아랍 기병으로부터 측면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자신들의 우익이 무너지는 것을 본 부아디스와프 3세와 후냐디는 왈라키아 기병대가 포함된 기병대를 이끌고 전투에 가세하였고 이 공격이 효과를 거둬 오스만 제국의 아랍 기병과 시파히 기병을 패주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왈라키아 기병들은 추격을 계속하여 오스만 제국 진영의 황금과 전리품을 약탈하였다.
오스만 제국군의 좌익을 물리친 후냐디는 바르나 십자군의 좌익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오스만 제국군의 우익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후냐디의 활약에 전황은 바르나 십자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고 무라드 2세는 후퇴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아디스와프 3세가 500명의 폴란드 기병을 이끌고 무모하게 오스만 제국군의 중앙으로 돌격을 감행하면서 전황은 다시 역전되었다. 부아디스와프 3세의 의도는 술탄 무라드 2세를 포로로 붙잡는 것이었으나 오히려 술탄를 호위하던 예니체리 군단에게 돌격을 저지당한 채 포위되었고 결국 폴란드 기병과 함께 몰살당했다.
부아디스와프 3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바르나 십자군은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후냐디는 왕의 유체를 탈환하기 위해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고 결국 바르나 십자군은 총 11만명의 사상자를 낸 채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오스만 제국군의 피해도 막심하였기에 추격을 당하지는 않았다.
바르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라드 2세였지만 처음부터 술탄의 지위로 복위할 생각이 없었기에 다시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린 술탄을 둘러싸고 신하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예니체리의 반란까지 일어나자 결국 무라드 2세가 술탄의 지위에 복위하게 되었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부아디스와프 3세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왕위를 부아디스와프 3세와 왕위를 다투던 엘리자베트의 어린 유복자 라슬로 5세가 이어받았고 후냐디가 총독이 되어 라슬로 5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헝가리를 대리통치하게 되었다.
제2차 코소보 전투의 승리
AD 1448년 절치부심한 후냐디는 다시한번 군사를 일으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후냐디의 작전은 발칸반도의 주민들을 선동하여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동안 기습공격으로 오스만 제국군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냐디 자신도 단 한번의 전투로 모든 것을 결말짓기 위해서 아무런 예비대를 두지않는 실수를 하였다. 더욱이 후냐디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 세르비아가 자신을 도울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AD 1448년 9월 도나우 강을 건너 세르비아의 수도 스메데레보의 인근까지 진격한 후 진영을 차리고 한달 동안 다른 그리스도교 국가의 지원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 세르비아의 전제공의 지위를 유지하던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AD 1389년 제1차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이 오스만 제국군에게 괴멸당하는 것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강대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합류를 거절하였고 오히려 후냐디를 도와주기로 한 알바니아 군이 합류하는 것도 방해하였다.
브란코비치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후냐디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후냐디의 헝가리군은 코소보 평원에 도착하였고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2세는 코소보 평원의 언덕을 미리 장악하며 만반의 준비를 마친 채 이를 맞이하였다. 후냐디의 군대는 총 3만명 정도로서 그 중 1만명이 왈라키아군이었다. 후냐디는 본대를 자신이 직접 이끌고 오른쪽 날개는 왈라키아군을 배치하였다. 이에 맞서는 오스만 제국군은 총 6만명으로 술탄인 무라드 2세가 본대를 이끌고 후계자이자 아들인 메메드 2세에게 오른쪽 날개에 위치한 아나톨리아 반도의 징집병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메메드 2세는 이번이 처음으로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었다.
전투가 개시되자 후냐디는 기병을 보내 오스만 제국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경기병 예비대가 곧바로 구원왔기 때문에 후퇴해야 했다. 이에 후냐디는 정예 기사들과 경보병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군의 중앙을 돌파하고자 하였다. 처음에 이 공격에 대하여 오스만 제국군의 예니체리 군단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냐디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군이 진형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술탄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후냐디의 돌격은 저지되었고 빠르게 부대를 재편성한 오스만 제국군의 반격으로 헝가리 기사들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오스만 제국군은 기사들과 분리된 경보병들을 쉽게 격파하고 후퇴하는 헝가리군을 공격하여 수많은 헝가리 귀족들을 살해하였다. 후냐디는 달아났으나 오스만 제국을 지원한 세르비아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그리고 다음날 오스만 제국군이 펼친 최후의 돌격으로 남아있던 헝가리 군은 모두 전멸하였다. 포로로 잡혔던 후냐디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나서야 겨우 석방되어 헝가리로 돌려보내졌다.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총 2만 4천명이 참가하여 5천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오스만 제국군은 총 4만명이 참가하여 1만 5천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오스만 제국의 피해가 더 컸으나 바르나 전투에 이어 이번 전투에서도 승리했기 때문에 이제 발칸반도 주변에서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유럽국가는 이제 남지 않게 되었다.
발칸반도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한 무라드 2세였지만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새롭게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즉위를 승인하고 화평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AD 1451년 초 무라드 2세가 병사하고 그의 아들 메메드가 2번째로 즉위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제7대 술탄 메메드 2세 시대
메메드 2세의 등극과 동로마 제국의 위기
무라드 2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메메드는 AD 1444년 아버지의 갑작스런 양위에 12살의 어린 나이로 술탄이 되었지만 바르나 십자군으로 불리는 대대적인 유럽 연합군의 공격에 아버지의 복위를 간곡하게 요청하였고, 무라드 2세는 아들의 기대대로 바르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AD 1448년 제2차 코소보 전투마저 승리로 이끌었던 무라드 2세가 AD 1451년 병사하면서 메메드는 다시 술탄의 지위에 올라 메메드 2세가 되었다.
메메드 2세는 아버지와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 정세는 메메드 2세에게 유리했다. 동로마 제국은 계속된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발칸반도의 대부분의 영토를 잃어버린채 지형적인 유리함에만 의지하여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미스트라스 요새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나톨리아 반도 북부에 일파인 트라페주스 제국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과는 단절된 상태였다.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벗어나고자 동방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의 대통합을 조건으로 여러 차례 서유럽에 대하여 여러차례 원조를 요청하였고 실제로 통합을 시도한 황제도 있었지만 동방정교회 일반신도들의 대규모 반발에 부딪쳐 무산되곤 하였다. 무엇보다도 서유럽의 각 나라들도 저마다 사정으로 동로마 제국을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오랜기간 지속된 백년전쟁의 여파로 대규모 원군을 파견하기 어려웠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남부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는 레콩키스타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독일)에서는 황제 자리를 두고 제후들끼리 각축을 벌이곤 있었으며 헝가리는 바르나 전투(AD 1444년)와 제2차 코소보 전투(AD 1448년)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하고 대부분의 군사를 잃은 상태였다.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국가들만이 일부 지원군을 보내긴 했지만 오스만 제국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동로마 제국의 처한 상황은 암담하였지만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자체가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에 불과 7천명의 주둔군만으로도 버틸 수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대략 20km의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는데 성벽이 매우 단단하고 육지에 면해 있던 5.5km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해안과 접해있어 육지와 바다의 합동공격 없이는 함락시키기 힘들었다. 이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이전까지 내부동조없이는 단 한번도 함락된 역사가 없었다.
메메드 2세는 이렇게 견고한 성벽을 지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기 위해 초대형 대포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대포는 백년전쟁과 후스전쟁에서 일부 사용된 적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일반화되지 않는 신무기였다. 메메드 2세는 헝가리 출신 기술자인 우르반을 고용하여 포길이가 8m가 넘고 직경은 75cm 가량이며 544kg의 포탄을 거의 1.6km까지 날려보낼 수 있는 대형 대포를 제작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대포는 제작자의 이름을 따서 우르반 대포라고 불리게 되는데 너무 무거워 90마리의 소와 400명의 병사가 끌어야 했다고 한다.
AD 1453년 4월 3일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야심차게 준비한 우르반 대포를 이용하여 포격을 시작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는 우르반 대포가 조준이 부정확하고 한 번 발사한 후에 재장전까지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어 동로마 제국에게 피해를 복구할 시간을 벌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메메드 2세는 바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들어가는 금각만으로 선박을 진입시키고자 하였다. 동로마 제국에서 쇠사슬로 금각만 입구를 봉쇄하였기 때문에 메메드 2세는 기름칠한 통나무를 늘어놓고 그 위에 선박을 굴려서 지상으로 선박을 이동시켰다. 이제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공격을 받게 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계속해서 분전하였지만 결국 5월 29일 오스만 제국군의 총공세에 무너지고 말았고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도 전사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기 전에 메메드 2세는 병사들에게 3일 간의 약탈을 허락했었지만 점령 첫날 저녁에 명령을 철회하였고 군대의 선두에 서서 입성하였다.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창시자와 같은 이름의 황제 대에 멸망한다는 예언이 떠돌았는데, 서로마 제국은 이미 AD 476년에 로마를 최초로 건국한 로물루스와 같은 이름의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대에 멸망하였고, 동로마(비잔티움) 제국도 거짓말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제국의 제2의 수도로 정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와 이름이 같은 콘스탄티누스 11세 치세에 멸망하였다. 비록 동로마 제국의 일파인 트라페주스 제국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건재하였고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모레아(옛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지칭)가 남아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한 AD 1453년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해로 본다.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 이름을 이스탄불로 개칭하였다. 메메드 2세는 도망쳤던 그리스도교도인들에게 돌아올 것을 권유하고 그들의 신변을 보장해주었으며 동방정교회 총대주교좌를 복원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문화를 보전해주었다. 하지만 소피아 대성당을 이슬람 모스크로 바꾸고 동방정교회의 위치를 이슬람교 다음의 제2종교로 격하시켰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지니고 있던 동방정교회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동로마 제국이 보유했던 그리스 문화는 서유럽으로 이전하여 르네상스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메메드 2세는 스스로를 카이세리 룸(로마의 카이사르)으로 부르며 오스만 제국이야말로 로마 제국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념은 훗날 러시아 제국의 모태가 되는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가 모스크바를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잇는 제3의 로마로 선언하면서 충돌하게 된다.
헝가리 후냐디의 재등장과 베오그라드 전투의 패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메메드 2세는 스스로를 이슬람 세계의 패자이자 로마제국을 잇는 대제국의 주인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메메드 2세는 스스로를 '두 대륙(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과 두 대양(에게해와 흑해)의 군주'라고 불렀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정복전쟁을 재개하여 AD 1455년에는 속국이었던 세르비아를 전격적으로 침공, 세르비아 중남부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메메드 2세의 다음 목표인 헝가리에서 아버지 무라드 2세가 힘겹게 물리쳤던 헝가리 총독 야노슈 후냐디의 저항을 만나게 된다.
후냐디는 AD 1448년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권위가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헝가리 총독으로서 왕의 수입을 관리할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AD 1456년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가 베오그라드로 진격해 오자 후냐디는 베오그라드를 구원하기 위해 식량과 무기를 보내고 용병들을 모집했다. 후냐디가 동원한 병력은 모두 5만명이었으나 그 중 4만명은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장비도 형편없던 농민들이었다. 메메드 2세는 총 10만의 군대로 베오그라드를 포위하였고 이번에도 대포를 동원하여 베오그라드 성벽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후냐디는 도나우 강에 있던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면서 무사히 베오그라드로 들어갈 수 있었고 강을 통한 보급로도 확보할 수가 있었다.
메메드 2세는 대포를 이용하여 성벽을 무너뜨리고 병력 일부를 성벽 안으로 진입시켰다. 이에 후냐디는 무너진 성벽에 불을 질러 오스만 제국군의 진입을 막고 성안으로 들어온 오스만 제국군을 오히려 역포위하여 섬멸하였다. 이때 후냐디의 부대 일부가 제멋대로 이탈하여 오스만 제국군의 본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기습으로 작용하여 큰 효과를 보았고 기회를 얻은 후냐디가 총공격을 감행하여 대승을 거뒀다. 오스만 제국군은 총 7만 5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가지고 온 모든 대포를 잃었지만 메메드 2세는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베오그라드 전투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유럽 국가가 거둔 최대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후냐디의 명성은 다시 드높아졌다. 하지만 며칠 뒤 성 안에 퍼진 전염병에 걸려 후냐디가 사망하고 말았기 때문에 이 승리가 전략적으로 활용되지는 못하고 만다. 그러나 베오그라드 전투에서의 승리로 후냐디는 헝가리의 민족영웅으로 추방받게 되었고 헝가리는 이후 약 7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점령을 피하게 된다. 그리고 후냐디의 둘째 아들 마티아슈는 훗날 헝가리의 왕이 되어 혼란에 빠진 헝가리를 재건하게 된다.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반도의 지배권 재확립과 죽음
베오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로 실의에 빠진 메메드 2세는 한때 음독자살까지 생각하였지만 곧바로 안정을 찾고 정복전쟁을 재개하였다. AD 1460년과 AD 1461년에 각각 모레아 전제군주국과 트라페주스 제국을 멸망시키고 동로마 제국의 잔존세력을 일소하였다. 그리고 발칸반도 북쪽의 왈라키아로 침공하여 처음에는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의 모티브가 되는 블라드 체페슈의 저항에 고전하기도 하였지만 AD 1462년 블라드 체페슈의 남동생인 라두를 앞세워 블라드 체페슈를 추방하고 왈라키아를 속국으로 삼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블라드 체페슈는 AD 1476년에 왈라키아로 돌아와 다시 오스만 제국과 다시 싸우지만 결국 전사하고 만다.
메메드 2세가 발칸반도에 대한 정벌에 집중하는 사이에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부지역에서는 새롭게 아크 코윤루가 발흥하였다. 아크 코윤루는 AD 1402년 티무르로부터 북부 이라크의 디야르바크르 전지역을 양도받은 카라 오스만에 의해 성립한 투르크족 연맹으로 아크 코윤루가 터키어로 백양이란 뜻이기 때문에 '백양조'라고도 불린다. 아크 코윤루는 카라 오스만 사후 벌어진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우준 하산에 의해 영토를 바그다드 및 호라산을 비롯한 이란 지방까지 확대하였다. 그리고 우준 하산이 배후의 안전을 위해 오스만 제국과 적대하던 트라페주스 제국과 카라만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과 차례로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과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양 군은 AD 1473년 테르칸 전투에서 격돌하였고 결국 오스만 제국 메메드 2세의 승리로 끝났다. 이 승리로 아나톨리아 반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이 공고해졌고 아크 코윤루의 세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아크 코윤루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게 반기를 들었던 카라만 공국은 AD 1487년에 최종적으로 오스만 제국으로 병합된다.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를 모두 장악한 메메드 2세는 이제 흑해연안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미 흑해연안에 위치한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지를 공격하여 AD 1463년까지 모두 점령하였던 메메드 2세는 AD 1475년 몽골제국의 후예에 해당하는 크림한국을 속국으로 삼으면서 타타르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AD 1480년부터 이탈리아 남부를 침공하여 오트란토 지역을 공격했지만 이듬해인 AD 1481년에 메메드 2세가 사망하면서 원정이 중단되었다.
이렇게 평생동안 정복전쟁을 벌이며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확대한 메메드 2세였지만 정복지에 대한 관용으로 이질문명을 이해할 줄 알았다.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후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와 그리스 학자들을 불러모았고 궁전 안에 그리스어와 라틴어 서적 도서관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가끔씩 울라마로 불리는 원로 이슬람 학자들을 초빙하여 신학논쟁을 벌이기도 하면서 치세 동안 오스만 제국의 수학, 천문학, 이슬람 신학이 높은 수준으로 발달시켰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메메드 2세는 탁월한 술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