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대 술탄 바예지드 2세 시대
바예지드 2세는 메메드 2세의 장자로서 말년의 아버지가 사이가 안 좋았으나 AD 1481년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는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궁정관리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오스만 제국의 제8대 술탄이 될 수 있었다. 바예지드 2세 즉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유럽 쪽 영토는 육로로는 헝가리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맞대고 있었고 바다로는 베네치아 공화국 및 로도스 기사단(옛 성 요한 기사단)과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바예지드 2세는 아버지의 팽창정책을 이어받아 AD 1483년 보스니아의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하였고 AD 1484년에는 크림한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나우 강과 드네스트르 강 요새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또한 AD 1499년부터 AD 1503년까지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쟁을 벌여 모레아 지방과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있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새들을 빼앗기도 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유럽 쪽 영토가 점차 안정을 찾는 동안 오히려 동쪽과 남쪽의 이슬람 세력들과 분쟁이 발생했다. 특히 남쪽의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가 수니파 이슬람교의 종주국으로써 오스만 제국과 불분명하게 나뉘어져 있던 국경지역의 소규모 공국들에 대하여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예지드 2세는 맘루크 왕조가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로도스 기사단과 연계할 것을 우려하여 맘루크 왕조의 도발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남쪽의 맘루크 왕조와 함께 오스만 제국을 위협하던 또 하나의 이슬람 세력은 동쪽 이란지방에서 새롭게 발흥한 사파위 왕조였다. 사파위 왕조는 이스마일 1세가 AD 1502년에 아크 코윤루로부터 이란 지방을 빼앗아 건국한 나라였다. 이스마일 1세는 시아파 이슬람교단인 사파위 교단의 수장으로서 수니파 이슬람교를 신봉하던 오스만 제국과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결국에는 사파위 왕조의 지원을 받은 아나톨리아 반도 내부의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곧바로 진압되었으나 문제는 이를 계기로 바예지드 2세는 아들들의 잇달아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첫번째 반란은 바예지드 2세의 장자이자 옛 트라페주스 제국의 영토인 트레비존의 총독이었던 셀림이 일으켰다. 셀림은 아나톨리아 반도가 시아파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고 AD 1511년 크림한국의 타타르족과 함께 발칸반도로 처들어갔다. 셀림의 반란은 곧바로 바예지드 2세에게 진압되고 셀림은 크림한국으로 도망쳐야 했으나 그 사이 아나톨리아 반도의 반란을 진압한 다른 아들인 아메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메드가 아나톨리아 반도 대부분을 장악한 후에 사파위 왕조와 연합하는 것을 우려한 예니체리 군단은 바예지드 2세에게 크림한국의 셀림을 복귀시키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복귀에 성공한 셀림은 기대대로 반란을 진압하고 아메드를 죽였다. 하지만 셀림은 이렇게 얻은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이듬해인 AD 1512년에 다시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바예지드 2세는 유폐되었고 셀림은 술탄의 지위에 올라 셀림 1세가 되었다. 바예지드 2세는 다음달 사망하였는데 공식적인 사인은 실의에 빠진 채 병사했다는 것이었지만 셀림 1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의혹도 있다.
제9대 술탄 셀림 1세 시대
사파위 왕조 공격
아버지 바예지드 2세 및 형제 아메드와 벌인 왕위쟁탈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셀림 1세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반란으로 그 위험성이 증명된 사파위 왕조를 공격하고자 하기 위해 AD 1514년 출병하였다. 오스만 제국 부대에는 바르나 전투와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 자신들을 고전하게 만든 보헤미아 용병들의 화승총과 대포를 실은 전투마차가 새롭게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사파위 왕조는 여전히 기병이 군대의 중심을 이루는 구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파위 왕조의 기병들은 열성적인 시아파 지지자들로 '키질바시'('붉은 머리'라는 의미)라고 불렸다.
양군은 AD 1514년 8월 23일 이란의 북서부에 위치한 찰디란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비록 사파위 왕조의 키질바시 기병들이 용맹하게 전투에 임했지만 결국 화승총과 포병 화력을 압세운 오스만 제국군에게 참패를 겪고 말았다. 전투에서 승리한 셀림 1세가 같은 해 9월 7일 사파위 왕조의 수도인 타브리즈에 무혈입성하면서 사파위 왕조를 멸망직전까지 몰아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열악한 보급문제와 시아파 교도들의 끊임없는 유격전에 지친 예니체리 군단이 더 이상의 종군을 거부하면서 셀림 1세는 어쩔 수 없이 철군해야만 했다. 결국 셀림 1세는 사파위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쿠르드족과 투르크 공국들을 모두 병합시키는 것에만 만족해야 했고 위기에서 벗어난 이스마일 1세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수도를 이란중부의 카즈빈으로 옮기고 군사를 재정비하였다. 하지만 사파위 왕조가 오스만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후에도 10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맘루크 왕조 정벌
비록 사파위 왕조를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그 세력을 크게 위축시키는 데 성공한 셀림 1세가 이번에는 남쪽의 맘루크 왕조에 대한 정벌을 계획하였다. 당시 맘루크 왕조는 시르케시 출신의 부르지 계열 맘루크들이 술탄 지위를 장악한 채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잇달은 페스트 창궐로 인구수가 격감하고 있었고 포르투갈의 희망봉 신항로 개척으로 지중해와 인도양을 잇는 중계무역의 이익을 상실하여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렇게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맘루크 왕조였지만 수니파 칼리프가 카이로에 있었던 덕분에 수니파 이슬람교의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은 유지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맘루크 왕조는 오스만 제국의 국경에 위치한 소규모 공국에 대한 이슬람 종주국으로서의 영향력을 계속해서 행사하며 오스만 제국과 마찰을 빚었다.
맘루크 왕조의 군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맘루크 출신 중무장 기병은 한때 몽골군을 물리친 적도 있을 정도로 용맹함을 자랑하였지만 이제는 수십년간 대규모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는 구식 군대에 불과하였다. 이에 반해 셀림 1세의 오스만 제국군은 화승총과 대포를 활용하여 사파위 왕조와의 전투에서 기병을 격파한 경험이 있었다. 결국 오스만 제국군과 맘루크 왕조의 대결은 오스만 제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오스만 제국은 AD 1516년 8월 시리아 알레포 북쪽에서 벌어진 마르즈다비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였고, 이듬해 1월에 이집트로 진격하여 라이다니야 전투에서 다시한번 승리를 거두고 카이로에 입성하였다. 이로서 약 250년간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루크 왕조는 결국 멸망하였다.
맘루크 왕조의 정벌에 성공한 셀림 1세는 형식적이긴 하였지만 칼리프로 맘루크 왕조의 보호를 받던 알 무타와킬을 이스탄불로 데려왔다. 이후 셀림 1세는 칼리프의 상징인 무하마드의 성의와 칼리프 오마르의 검 등을 건네받으면서 칼리프 칭호를 양위받았고 또한 이슬람 세계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종교지도자인 샤리프(무하마드의 외손자 핫산의 후손에게 주는 칭호)로부터 성도를 여는 열쇠를 받아내면서 이슬람 세계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파위 왕조의 이스마일 1세는 여전히 시아파 이슬람교의 지도자로서 셀림 1세의 이슬람교 칼리프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셀림 1세가 칼리프 지위에 오르면서 이후 모든 오스만 제국의 군주들은 술탄이자 칼리프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를 역사적으로는 술탄-칼리프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스스로를 칼리프로 칭하는 것은 오스만 제국이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AD 18세기 이후부터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셀림 1세가 칼리프 칭호를 양위받았다는 주장을 조작된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오스만 제국 내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던 칼리프 제도도 AD 1922년 터키 혁명으로 터키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최후의 원정준비와 죽음
이집트에서 돌아온 셀림 1세는 이제 유럽으로 관심을 옮겨 로도스 기사단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였기 때문에 이 원정은 아들인 쉴레이만에게 맡겨진다. 셀림 1세는 불과 8년 밖에 통치하지 않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거의 3배 가까이 확대하는 업적을 남겼고 오스만 제국은 그 아들인 쉴레이만 시대에 이르러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제10대 술탄 쉴레이만 대제 시대
베오그라드 함락과 로도스섬 점령
AD 1520년 셀림 1세가 급사하자 그의 외아들인 쉴레이만이 새로운 술탄이 되어 쉴레이만 1세가 되었다. 쉴레이만 1세는 이미 아버지인 셀림 1세가 대대적인 숙청을 통해서 친족들을 모두 죽인 상태였기 때문에 술탄의 지위에 대해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았다. 이에 쉴레이만 1세는 메메드 2세가 이룩하지 못한 헝가리 베오그라드 함락과 셀림 1세가 말년에 계획하였던 로도스 섬 점령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쉴레이만 1세는 즉위한지 10달도 안된 AD 1521년에 베오그라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베오그라드는 지난 AD 1456년에 메메드 2세를 상대로 헝가리 민족영웅 야노슈 후냐디의 지휘아래 오스만 제국에게 승리를 거둔 적이 있는 도시였지만 야노슈 후냐디가 없는 상태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3주에 걸친 맹공을 받게 되자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쉴레이만 1세의 다음 목표는 아버지 셀림 1세가 최후의 원정계획을 세웠던 로도스 섬이 되었다. 로도스 섬은 십자군 전쟁시절 예루살렘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성 요한 기사단(혹은 구호 기사단)이 예루살렘을 잃어버린 후 AD 1309년부터 새로운 거점으로 삼고 있는 곳이었다. 로도스를 점령한 이후부터는 로도스 기사단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는 해군력을 강화하여 이슬람 무슬림의 상선을 습격하는 해적행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로도스섬을 점령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었다.
쉴레이만 1세는 AD 1521년 9월 로도스 기사단장 필리프 드 릴라당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이듬해 6월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로도스 기사단은 약 500명의 기사와 1,500명의 용병들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엄청난 병력 손실과 탄약 소모를 불사하며 공격했음에도 결코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쉴레이만 1세는 AD 1522년 12월 기사와 주민들의 안전한 이주와 남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파격적인 항복조건을 내걸은 후에야 전쟁에 지친 로도스 기사단으로부터 로도스섬을 넘겨받을 수가 있었다.
모하치 전투 승리와 헝가리 점령
로도스섬을 점령한 쉴레이만 1세의 세번째 목표는 헝가리였다. AD 1521년 베오그라드를 상실한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라요슈 2세가 앞으로 이어질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AD 1522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리아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었고 쉴레이만 1세도 로도스섬 점령 과정에서 많은 손실을 입은 터라 처음에는 헝가리에게 외교적으로 접근하였다. 하지만 쉴레이만 1세가 제안한 공물을 요구하는 평화협정을 라요슈 2세가 거절하면서 전쟁이 불가피해졌다.
AD 1526년 4월 쉴레이만 1세는 친히 1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이에 반해 헝가리는 쉴레이만 1세의 공물요구 제안을 거절하면서 전쟁이 임박해졌음에도 라요슈 2세의 무능한 통치로 인해 제대로 군사를 모으지도 못했다. 같은 해 7월 페테르바로드를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후에야 비로소 헝가리 군대를 움직였지만 총 2만명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불리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라요슈 2세는 트란실바니아와 크로아티아로부터 오고 있는 증원군도 기다리지 않은 채 헝가리 부다페스트 남쪽의 모하치에서 오스만 제국과 싸울 결심을 하였다.
모하치 전투 초기에는 헝가리 군의 총사령관인 팔 토모리의 활약으로 헝가리 군이 오스만 제국의 루멜리아(발칸반도의 오스만 제국령) 징집병 부대를 격파하고 쉴레이만 1세를 위협할 수 있는 거리까지 육박하였지만 곧바로 오스만 제국의 대대적인 반격을 허용하면서 전황이 역전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 군단의 돌격에 헝가리 군은 압도당했고 셀림 1세 시절부터 그 위력을 자랑하던 포병대의 후방공격에 헝가리 군의 진형이 급격하게 붕괴되었다. 전투가 종료되자 헝가리군은 총 1만 4천명이 죽는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받았고 라요슈 2세는 도망치다가 크셀레 강에서 익사하였다.
헝가리의 방어선을 무너뜨린 쉴레이만 1세는 같은 해 9월 헝가리의 부다로 진군하였지만 점령하지는 못한 채 퇴각하였다. 이후 공석이 된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에 대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훗날 신성로마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오스만 제국과 분쟁을 벌였다. 페르디난트 1세는 자신의 왕위계승권에 대한 근거로 AD 1491년 막시밀리안 1세(페르디난트 1세의 할아버지)와 블라디슬라프 2세(라요슈 2세의 아버지) 간에 체결된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내세웠다.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의하면 블라디슬라프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경우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계승권이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오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라요슈 2세가 태어나면서 이 약속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라요슈 2세가 후사없이 죽었기 때문에 조약을 넓게 해석하여 다시 합스부르크 왕가가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계승권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이 보헤미아에서는 받아들여져서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쉴레이만 1세는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왕으로마저 선출되는 것을 우려하여 헝가리 왕위계승 후보자로 트란실바니아의 총독(voivode)이었던 야노슈 자폴리아를 내세웠다. 야노슈 자폴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AD 1526년 11월 헝가리 왕으로 선출되었고 페르디난트 1세도 역시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아서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쉴레이만 1세는 페르디난트 1세를 헝가리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AD 1529년 근거지인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처들어갔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1세는 지원군이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결국 겨울이 되자 쉴레이만 1세는 악천후와 보급상의 어려움 때문에 철군해야만 했다. 쉴레이만 1세는 AD 1532년에 다시 한번 대규모의 원정군을 동원하여 빈을 공격하였으나 이번에도 실패하였다. 이것으로 오스트리아 빈은 오스만 제국의 유럽진출의 한계점에 해당하는 것이 명백해졌다.
AD 1538년 헝가리 왕위를 두고 서로 다투던 페르디난트 1세와 야노슈 자폴리아 사이에 헝가리 분할에 대한 노지바로드 비밀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 서부와 크로아티아 지방을 얻었고 야노슈 자폴리아는 나머지 헝가리 영토(전체의 3분의 2 정도)를 통치하게 되었다. 다만 야노슈 자폴리아가 죽은 이후에는 페르디난트 1세가 나머지 헝가리 영토도 통치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약속은 AD 1540년 야노슈 자폴리아가 사망하였을 때 오스만 제국의 개입으로 야노슈 자폴리아의 아들인 야노슈 2세 지그몬드 자폴리아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지켜지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1세가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며 부다까지 진격했지만 오히려 오스만 제국이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면서 오스만 제국에게 헝가리 중부와 남부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AD 1541년에는 부다까지 점령당했다. 결국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한 헝가리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야 했고 그 자신은 헝가리 북서부 지방을 차지하는 것에만 만족해야만 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만 제국의 대결은 쉴레이만 대제와 페르디난트 1세가 각각 AD 1562년와 AD 1564년에 차례로 사망하면서 그 아들인 오스만 제국의 셀림 2세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2세의 대결로 넘어간 후 AD 1568년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겨우 종식되었다. 이렇게 하여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는 북서부의 로열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중남부의 오스만 헝가리, 그리고 야노슈 2세 지그몬드 자폴리아가 다스리는 동부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동헝가리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명목상 헝가리 왕위를 차지하고 있던 야노슈 2세 지그몬드 자폴리아가 AD 1570년 공식적으로 헝가리 왕위를 막시밀리안 2세에게 넘기고 트란실바니아 공작(prince)으로 강등되면서 트란실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기 때문에 헝가리의 대부분 지방을 사실상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게 된다.
프레베자 해전의 승리와 동지중해 제해권 장악
쉴레이만 1세의 또다른 업적은 해군력 신장이었다. 본래 투르크 기마족 출신이 군사력의 주축이었던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해군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그리스인들을 선발하여 해군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쉴레이만 1세가 로도스섬을 장악하면서 지리적인 이점이 뛰어난 해군기지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급성장하게 되는 데 그 배경에는 붉은 수염 때문에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이라는 뜻)라고 불린 하이르 앗 딘이 있었다.
하이르 앗 딘은 본래 해적이었으나 AD 1516년 동맹을 맺었던 북아프리카 알제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스스로 술탄이 되었다. 그러나 알제에 대하여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가 스페인 해군을 동원하여 압박해오자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에게 귀순했으며 쉴레이만 1세가 즉위한 이후에는 해군제독으로 임명받아 북아프리카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그 때부터 하이르 앗 딘은 알제로 돌아가지 않고 오스만 제국의 해군을 개혁하여 지중해 제해권 재패를 노리게 되었다.
하이르 앗 딘은 강화된 해군력을 바탕으로 AD 1537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차지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에게해와 이오니아해의 여러 섬들을 차례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시로시, 아이기나, 로스, 파로스, 티노스, 카르파토스, 카소스와 같은 많은 섬들이 오스만 제국의 차지가 되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던 낙소스 공국도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확대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방어거점인 코르푸 섬(케르키라 섬)과 스페인이 차지한 이탈리아 남부의 칼라브리아까지 미치게 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교황 바오로 3세가 그리스도교 국가의 소집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AD 1538년 2월에 스페인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중심으로 한 '신성동맹'이 결성되었다. 신성동맹에는 로마 교황령과 제노바 공화국도 참여하였으며 오스만 제국에게 로도스 섬을 빼앗기고 이제 몰타섬으로 이동한 몰타 기사단(옛 로도스 기사단)도 함께 하였다.
신성동맹군은 카를 5세의 명령을 받은 안드레아 도리아 제독의 지휘하에 302척의 함대(162척의 갤리선과 갤리온선, 140척의 바르퀘스선)를 동원하여 총 6만명의 병력으로 코르푸 근처에 집결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오스만 제국군은 하이르 앗 딘이 122척의 함대에 총 2만명의 병사를 실고 발칸반도 서부에 있는 프레베자 항구에 도착하였다. 양 함대는 AD 1538년 9월 28일 프레베자 근해에서 격돌하였다. 숫적으로 오스만 제국 함대가 열세였으나 하이르 앗 딘은 신성동맹 함대가 무풍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여 겔리선과 겔리온선의 기동성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이 전략이 적중하여 오스만 제국 함대는 신성동맹 함대를 유린한 반면에 신성동맹 함대로서는 오스만 제국 함대가 아군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제대로 포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결국 오스만 제국 함대는 단 1대의 배도 잃지 않고 신성동맹함대의 총 10척을 침몰시키고 3척을 불태웠으며 36척을 나포하여 3천명의 포로를 붙잡는 대승을 거뒀다.
프레베자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하이르 앗 딘은 AD 1539년까지 에게해와 이오니아해에 남아있던 그리스도교 세력의 요새들을 대부분 점거하였다. AD 1540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막대한 배상금과 오스만 제국이 차지한 베네치아 공화국령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내용의 강화협정을 맺으면서 오스만 제국은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라크 점령과 제국 체제의 정비
쉴레이만 1세는 서쪽에 대한 정벌이 일단락되는 동안 동쪽으로도 진군하여 AD 1535년부터 AD 1555년까지 이란지방의 사파위 왕조를 3번에 걸쳐 정벌하였다. 이 과정에서 쉴레이만 1세는 아덴, 예맨, 바그다드와 이라크의 대부분, 아르메니아 서부 등을 점령했다. 하지만 사파위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AD 1555년 사파위 왕조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확장시킨 것만큼이나 내치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행정관리제도를 정비하고 교육제도를 완비하였으며 문예보호와 중요 건축물 건설에도 앞장섰다. 특히 "군하총회", "이집트 법전", "쉴레이만 법전"을 제정하여 터키인들에게는 '법을 만든 술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쉴레이만 1세 치세에 오스만 제국은 외형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아시아,유럽,북아프리카에 걸치는 대제국이 되었고 내부적으로도 제국에 걸맞게 체제가 정비되었다. 이러한 업적을 기려 쉴레이만 1세에게는 '대제'의 칭호가 붙게 된다.
쉴레이만 대제 이후 오스만 제국
쉴레이만 대제의 말년은 어수선했다. AD 1565년 몰타섬을 차지한 성 요한 기사단에 대한 공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아들들의 다툼으로 인해 무스타파와 바예지드를 처형해야만 했다. AD 1566년 헝가리에 대한 원정군을 이끌고 떠났으나 같은 해 9월 시게르바트 전투 도중에 사망하였다.
술레아만 대제 사후에도 오스만 제국는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내부적으로는 무능하거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술탄이 계속해서 즉위하면서 통치권을 대(大)와지르(총리대신)에게 위임해버리는 일이 많아졌고, 점차 정치세력화한 예니체리 군단이 술탄을 폐위시키는 일도 일어났다. 그 사이 유럽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 베네치아 공화국 등의 세력이 커지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남쪽에서는 여전히 이란지방에서 사파위 왕조가 적대적이었다.
그러면서 오스만 제국의 유럽쪽 패권이 흔들리게 되었다. 먼저 지중해에서는 AD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스페인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연합함대에게 패배하면서 사실상 서(西) 지중해로의 진출이 좌절되었고, 내륙에서도 AD 1683년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얀 3세 소비에스키 중심의 그리스도교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헝가리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