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초기역사
고대의 스위스
BC 5세기 경에 갈리아족의 한 갈래인 헬베티족이 현재 스위스의 서부에 정착하고 라에티족이 동부지역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스위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서부의 헬베티족이 AD 58년에 로마제국의 카이사르에게 패배하면서 스위스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AD 4세기 경에는 그리스도교화가 되었다. 현재 스위스의 공식명칭인 헬베티아 연방은 헬베티족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AD 5세기경에 일어난 게르만족 대이동 과정에서 서부지역의 부르군트족과 동부지역의 알라만족, 남부지역의 랑고바르드족이 정착하면서 현재의 민족구성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부르군트족은 라틴화된 반면에 알라만족은 게르만 전통을 유지했기 때문에 스위스의 언어가 현재와 같이 복잡한 구성을 갖게 되었다. AD 8세기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의 서유럽 통일과정에서 프랑크 왕국에 병합된 스위스는 카롤루스 대제 사후 AD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프랑크 왕국이 분열될 때 같이 분할되어 서부는 중프랑크 왕국의 로트링겐에, 동부는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AD 10세기부터 카롤링거 왕조의 힘이 약화됨에 따라 스위스 지역은 이슬람 세력과 마자르족의 침략을 받게 되었으나 오토 1세가 신성로마제국을 세우고 마자르족을 격퇴하면서 신성로마제국으로 병합되었다.
중세의 스위스
스위스 서부지역은 AD 12세기 부르고뉴 공작이 된 체링겐 가문의 지배를 받으며 프리부르와 베른과 같은 도시들이 건설되었으나 AD 1218년 체링겐 가문이 단절되면서 소속 도시들이 모두 황제 직할령이 되었다. 한편 스위스 동부의 우리(Uri)와 슈비츠는 중부유럽과 이탈리아를 잇는 생고타르 고개와 같은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황제 직할령으로 관리되었고, 운터발덴 주는 자치권을 부여받은 수도원의 봉토가 되어 지방영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었다.
AD 10세기 경에 스위스 북부에 합스부르크 성이 세워지고 백작으로 봉해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점차 스위스 동부로 세력을 확대시키기 시작했고 AD 13세기에 체링게 가문이 단절된 이후 권력의 공백이 발생한 스위스 서부까지 진출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AD 1273년에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고 그 다음해에 황제로 즉위하면서 지금까지 황제 직할령으로 관리되던 스위스 도시 전체가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루돌프 1세는 스위스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한 후에 독일의 왕(나아가 신성로마황제) 자리를 두고 경쟁한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를 물리치고 오스트리아를 빼앗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다.
AD 1291년 7월 15일에 루돌프 1세가 죽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로 여긴 슈비츠와 우리가 같은 해 8월 1일 운터발덴의 수장을 설득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는 영구동맹을 체결하였다. 스위스에서는 이 날을 스위스의 독립기념일로 지정하고 있으며 슈비츠, 우리, 운터발덴 세 도시의 동맹을 '원시 3주 동맹'으로 부르고 있다.
루돌프 1세 사후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나사우의 아돌프 차지가 되었으나 그가 제위 6년 만인 AD 1298년에 죽으면서 독일 왕위는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의 차지가 되었다. 알브레히트 1세에 의해 스위스 도시는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알브레히트 1세가 제위 10년만인 AD 1308년에 죽고 독일 왕위가 룩셈부르크 가문의 앙리 7세의 차지가 되면서 스위스 도시들은 예전의 자치권을 되찾았다. AD 1313년에 앙리 7세가 사망하면서 독일왕위를 두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프레데릭과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가 경쟁하게 되었다.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받게 되는 것을 우려한 스위스 원시동맹 3주(우리, 슈비츠, 운터발덴)가 루트비히 4세를 지원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독립전쟁
모르가르텐 전투
AD 1314년 합스부르크 가문을 프레데릭과 공동상속한 동생 레오폴트 1세는 스위스 원시동맹 3주 중 하나인 슈비츠가 토지소유권 분쟁을 벌이던 아인지델른 대수도원을 습격하자 대수도원의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합스부르크 군대는 이제 가문의 근거지가 된 오스트리아에서 소집한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사단 2천명을 포함한 총 9천명의 대군이었다. 이에 반해 슈비츠는 우리(Uri)의 지원병을 포함하여도 불과 1,300명에 불과하였고 모두 보병이었다. 더구나 동맹을 맺었던 운터발덴은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레오폴드 1세의 오스트리아군이 접근해오자 슈비츠군은 토루와 목책을 건설하고 그 뒤로 숨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레오폴드 1세는 방어가 가장 약한 지점으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통로가 바로 모르가르텐 계곡이었다. 비록 모르가르텐 계곡은 한쪽은 절벽, 다른 한쪽은 호수로 이루어진 좁은 길이었으나 슈비츠군이 적은 병력수로 겁을 집어먹고 웅크리고 있다고 자신한 레오폴트 1세는 기사단을 선봉으로 배치한 채 모르가르텐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모르가르텐 계곡의 출구는 이미 슈비츠군에게 막혀있었고 뒤돌아 나가려 했으나 입구 또한 미리 매복한 슈비츠군이 봉새당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좁은 길에서 서로 뒤엉킨 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슈비츠군이 언덕 위에서 돌과 통나무를 굴려 오스트리아군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이어 기사단과 보병을 분리시키기 위해 할버드와 도끼를 맹렬히 휘두르며 돌진하였고 이로인해 전위의 기사단은 보병과 떨어진 채 포위되어 전멸당하고 말았다. 다만 레오폴드 1세와 보병들만이 추크방향의 습지대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모르가르텐 전투에서의 승리로 이끈 슈비츠는 한 달 후에 운터발덴을 방문하여 운터발덴이 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을 문제삼지 않은 채 결속만 재확인 하고 원시 3주 동맹을 새롭게 다짐하였다. 다만 모르가르텐 전투를 통해서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된 슈비츠의 이름에서 스위스 도시동맹을 대표하게 되었고 오늘날 스위스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라우펜 전투
모르가르텐 전투에서 원시 3주 동맹이 승리를 거두자 AD 1332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한 루체른이 동맹에 추가로 가입하였다. 이렇게 하여 스위스 동부의 슈비츠, 우리, 운터발덴, 루체른의 4주 동맹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에서 벗어났을 때 스위스 서부는 베른이 앞서 AD 1323년 원시 3주 동맹과 군사동맹을 체결한 이후에 프리부르와 서로 경쟁하며 영토를 확대하고 있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프리부르는 AD 1339년 부르고뉴 영주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방영주들과 연합하여 베른을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부르고뉴 영주와 프리부르 연합군은 총 17,000명이었고 이 중에는 1천명의 기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베른도 군사동맹을 맺은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도시 연합으로부터 지원군 도움을 받았으나 병력수는 총 6천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일반적인 봉건영주 군대처럼 부르고뉴 연합군도 기사단은 강력하였지만 프리부르 시민병을 제외한 나머지 보병들은 강제로 징집된 농민들로 장비와 사기 면에서 매우 열악하였다. 이에 반해 베른 연합군에게는 모르가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정예 기사단을 물리친 경험이 있는 슈비츠 군이 함께하고 있었다. 베른 연합군은 서로 흰 십자가를 그린 옷을 입고 서로를 구분했다.
전투는 베른 주의 경계인 라우펜 근처에서 벌어졌다. 베른 연합군은 라우펜 북동쪽의 브람베르크 언덕에서 진형을 짜기 시작했고 부르고뉴 연합군도 전투진형을 편성하였다. 기사단이 우측에 배치되었고 기마병 운용에 적합하지 않은 진형인 좌측에는 보병들을 포진시켰다. 이에 대응하여 베른 연합군은 기사단을 상대하기 위해 경험많은 슈비츠 동맹군에게 우측을 맡겼고 베른 시민군이 좌측에서 부르고뉴-프리부르 보병을 상대로 싸우기로 했다. 베른 연합군의 전략은 슈비츠 동맹군이 부르고뉴 기사들을 상대로 버텨내는 동안에 베른 시민군이 적 보병을 신속하게 제압하고 협공을 가하는 것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부르고뉴 기사단이 먼저 돌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맞서 슈비츠 동맹군은 고슴도치 모양으로 방어진형을 구축했다. 그리고 뒤이어 부르고뉴-프리부르 보병들도 언덕 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양 보병대가 격돌하자 부르고뉴-프리부르 보병이 숫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비와 사기 면에서 모두 앞선 베른 시민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승리를 거둔 베른 시민군은 도망치는 적을 뒤쫓기보다는 부르고뉴 기사단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는 슈비츠 동맹군을 돕기 위해 측면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서로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양 방향에서 공격당하기 시작한 부르고뉴 기사단이 마침내 붕괴되었고 베른 연합군은 최종 승리로 끝났다.
라우펜 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베른은 슈비츠 동맹과의 더욱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고 AD 1353년에는 공식적으로 동맹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 라우펜 전투에서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흰 십자가가 스위스 도시연합을 상징하는 국기에 사용되게 된다.
젬파흐 전투
모르가르텐 전투와 라우펜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스위스 도시연맹도 세력도 점점 증가하여 슈비츠, 우리, 운터발덴, 루체른의 4주동맹에 AD 1351년에는 스위스 북부 최대도시인 취리히까지 동맹에 참여하게 되었다. 취리히는 스위스 도시연맹의 도움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2세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스위스 도시연맹은 AD 1352년에 점령한 추크와 글라루스를 AD 1356년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반환하면서 취리히의 자치권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AD 1339년 라우펜 전투 이후로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스위스 서부지역 최대도시인 베른이 AD 1353년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였다. 비록 추크와 글라루스는 몇년간 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지만 반환이 이루어지기 이전인 AD 1352년에 도시연맹과 영구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 때를 추크와 글라루스가 가입한 해로 본다. 이렇게 하여 스위스 도시연맹의 가입도시는 총 8개(슈비츠, 우리, 운터발덴, 루체른, 취리히, 추크, 글라루스, 베른)로 늘어났고 역사적으로는 '8주 동맹'으로 부르게 된다.
한편 공동상속이라는 특이한 상속문화를 지니고 있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AD 1379년에 영지 분할이 이루어져 오스트리아 공작지위는 알브레히트 3세가 차지했고 그의 동생 레오폴드 3세는 슈타이어마르크와 케른텐, 티롤의 공작이 되었다. 열성적으로 영지확대에 열을 올리던 레오폴드 3세는 스위스 지방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주장하였고 이를 스위스 도시연맹이 거부하면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도시연맹간의 대결이 다시 한번 벌어지게 되었다.
레오폴드 3세는 4천명의 휘하 기사단과 용병들을 모집하였고, 스위스 도시연맹은 총 1,600명의 보병을 소집했다. 양 군은 AD 1386년 7월 9일 루체른 주의 작은 마을인 젬파흐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레이폴드 3세는 젬파흐 부근이 말을 달리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기사들에게 처음부터 말에서 내려 싸우도록 지시했다. 기사들이 말에서 내리자 스위스의 할버드군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으라는 레이폴드 3세의 생각이 적중하여 전초전으로 치뤄진 루체른 시민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에 스위스 도시연맹 지도부는 부대진형을 변형시켜 후위의 좌측에 위치한 쐬기꼴 부대를 좀더 넓은 형태로 변경하여 적군의 측면을 공격하기 쉽도록 만들었고 우리에서 온 지원군을 새롭게 가세시켰다.
전투가 재개되자 스위스 시민군이 오스트리아 전위부대의 측면을 공격하여 진형을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일설에 의하면 스위스의 전설적인 영웅인 아놀드 폰 빙켈리드가 스위스 장창병을 이끌고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적의 공격이 집중되도록 유도하면서 적진을 돌파하였기 때문에 그 틈을 노린 스위스 본군의 공격으로 오스트리아 밀집대형이 무너졌다고 한다. 자신의 전위부대가 무너지는 것을 본 레이폴드 3세가 두 번째 부대에게 반격을 명령했으나 이미 진형이 무너진 오스트리아군은 반격의 실마리를 잡지 못했고 결국 2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대패하고 말았다. 전투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병력의 절반인 2천명이 전사하였고 레이폴드 3세 자신도 사망하였다. 젬파흐 전투로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스위스의 슈비츠, 우리, 운터발덴, 루체른 등 4개주의 독립이 완전하게 보장되었기 때문에 스위스 독립의 전환점이 되었다.
네펠스 전투
젬파흐 전투 승리 이후 스위스 도시연맹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가 된 글라루스로 진격하여 발렌호 주변의 베젠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무된 글라루스는 다음해에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글라루스을 스위스 도시연맹으로부터 탈퇴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베젠에 대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총 6,500명으로 약 1,500명의 기사단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에 맞서는 글라루스 수비대는 슈비츠와 우리에서 지원병을 합치더라도 4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글라루스 수비대는 후퇴하여 네펠스 마을의 고지를 점령하였다.
승세를 탄 오스트리아 군이 산개하여 진격하였으나 때마침 내린 눈과 안개로 서로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 기회를 틈 탄 글라루스 군이 공격을 개시했고 서로 흩어진 오스트리아군은 각개격파되었다. 진형을 재정비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군은 퇴각하기 시작했으나 다리가 무너지면서 익사자가 속출하였다. 전투가 끝났을 때 글라루스 수비대의 사망자는 총 54명인데 반해 오스트리아 군의 사망자는 약 1,700명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글라루스 수비대의 대승이었다.
스위스 시민군이 연달아 승리를 거두면서 스위스 도시연맹의 독립성은 공고해졌다. AD 1389년 4월 알브레히트 3세와 7년간의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스위스는 여전히 명목상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에 속했지만 자치권을 보유하면서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다.
스위스 장창병
로마제국 시절 전장의 주역은 중장보병이었으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프랑크 왕국이 세워진 이후에는 중세 전장을 중기병이 지배하였으며 보병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성격에 머물렀다. 프랑크 왕국은 강력한 중기병을 보유하기 위해 기사단을 구성하였고 이들에게 무장을 하고 장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영지를 부여하면서 봉건귀족계급이 성립하였다. 중세의 보병은 단지 중기병을 보조하기 위해 영지에서 강제로 징집한 농민들로 장비가 열악하고 사기가 낮았지만 어디까지나 전장의 주력은 중기병이었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따라서 중세 전쟁의 승패는 서로가 보유한 중기병 기사단 중 어느 한쪽이 더 강한 가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스위스 장창병이 중기병 기사단이 중심이 된 오스트리아 군을 연달아 물리치면서 이러한 중세전투의 통념이 깨졌다. 모르가르텐 전투의 경우에는 무능한 지휘와 불리한 지형 탓을 할 수도 있었지만 라우펜 전투에서는 개활지에서 벌어졌기에 더 이상 핑계대기 어려웠다. 더욱이 기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하여 순수한 기사들의 무력으로만 상대한 젬파흐 전투도 스위스 장창병의 승리로 끝나면서 스위스 장창병이 중기병 기사단보다 우수하다는 것은 이제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스위스 장창병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핼버드(혹은 미늘창이라고도 함)을 사용한 새로운 전술 덕분이었다. 핼버드는 도끼 같은 날과 그 반대편에 갈고리를 지녔으면서 찌르기 위한 예리한 날도 갖추고 있는 독특한 모양의 창으로 그 복잡한 모양 때문에 베기, 찌르기, 걸기, 찍기라는 네 가지 기능으로 매우 다양한 공격이 가능했다. 스위스 장창병의 전술은 밀집대형으로 중기병의 돌격을 견디고 멈춘 기사들을 상대로 핼버드에 달린 갈고리를 이용하여 말위에서 끌어내리는 방법으로 싸웠다. 이러한 스위스 장창병의 핼버드 전술은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는 아주 효과적인 전술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이후 스위스 장창병은 핼버드가 말에서 내린 기사와 파이크 보병을 상대로는 큰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주력무기를 파이크로 변경하게 된다. 그리고 핼버드는 배후를 공격하는 부대에서만 사용하는 보조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핼버드는 유럽으로 전파되어 AD 16세기말 화승총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무기가 된다.
스위스 장창병이 불패의 신화를 쌓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 스위스 장창병이 자유시민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세시대의 보병은 강제로 징집된 농민군이었기 때문에 결속력이 매우 약했지만 스위스 장창병은 스스로의 자유와 독립을 싸웠기 때문에 단결력과 전투의지가 매우 높았다. 이 때문에 정면에서의 기사단의 돌격에서 진형을 유지할 수 있었고, 취약점인 측후방 공격을 허용하더라도 쉽게 도망치지 않았다.
스위스 장창병의 세번째 특징은 소규모 전술조직을 활용한 유연함과 민첩함이었다. 스위스 장창병은 여러 도시 시민의 연합군이었기 때문에 지휘체계가 통일되지 않는 단점을 지닐 수도 있었으나 오히려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소규모 전술조직으로 매우 유연한 운용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스위스 장창병은 산개와 밀집대형 편성을 매우 신속하게 할 수 있었고 이것은 스위스 장창병에게 유래가 없는 민첩함을 부여하였다. 또한 스위스 장창병은 최초로 군악대를 활용하여 보조를 맞춰 행군한 최초의 군대이기도 했다.
스위스 장창병은 부르고뉴 전쟁에서 프랑스왕 루이 11세를 도와준 이후 용병으로서 최고의 명성을 쌓았다. 이후 스위스 장창병은 화승총의 등장으로 성립한 스페인의 테르시오 진형에게 패배할 때까지 거의 2세기 동안 불패의 용병으로서 전장을 누볐다. 그리고 AD 16세기에 독일용병 란츠크네히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독점적으로 용병을 공급하기도 했다. 스위스 용병은 높은 충성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교황청의 근위대는 스위스 용병만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완전한 독립
스위스 도시연맹은 AD 1474년에 프랑스에서 귀족연합체를 조직하여 프랑스왕 루이 11세에게 대항하던 프랑스 부르고뉴 공작 샤를 르 테메레르(일명 호담공)와 대결을 벌여 그랑송 전투(AD 1476년)와 낭시전투(AD 1477년)에서 잇달아 승리하고 최종적으로 샤를 르 테메레르를 전사시키면서 독립을 지켜냈다. 그리고 이때부터 스위스 보병은 용병으로서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부르고뉴 전쟁 승리 이후에 스위스 도시연맹의 독립성은 공고해졌지만 본래 스위스의 도시들은 국가를 형성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각 도시별로 서로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였고 이로인한 분쟁이 자주 일어나면서 연맹체의 결속력을 점점 상실해갔다. 그러나 AD 1493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가 스위스에 대한 압박을 재개하면서 스위스의 각 주는 다시 한번 단결하여 신성로마제국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AD 1499년 막시밀리안 1세의 공격에 대해 스위스 연맹군이 오히려 대대적인 반격을 벌였고 결국 바젤 화약을 통해서 스위스는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그 사이 스위스는 8주 동맹에서 졸로투른과 프리부르(AD 1481년), 바젤과 샤프하우젠(AD 1501년), 아펜첼(AD 1513년)이 추가로 참가하여 13주 동맹으로 확대되었고 AD 1648년 30년전쟁 종료 후 체결된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 스위스 연맹은 자신들의 독립을 국제사회로부터 공인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