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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구데이 칸, 킵차크한국 바투 칸의 유럽원정

Jobs9 2021. 5. 2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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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우구데이 칸의 즉위

칭기즈칸 사후 몽골제국의 제2대 대칸의 자리는 칭기즈칸의 3남인 우구데이(혹은 오고타이)의 차지가 되었다. 본래 칭기즈칸의 장자는 주치였으나 어머니 보르테가 메르키트 부족에게 납치당했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임신했기 때문에 주치는 태어날 때부터 혈통을 의심받았다. 비록 칭기즈칸이 자신의 아들로 선언하였으나 칭기즈칸이 직접 지어준 주치란 이름의 뜻은 '손님'이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이 대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 제국을 여러 아들과 친족들에게 분배하고 후계자를 정했는데, 이때 칭기즈칸이 주치를 장자로서 우대하여 먼저 발언할 기회를 주었으나 차남인 차가타이가 주치의 의심스런 혈통을 거론하면서 주먹다짐까지 벌인 일이 있었다. 자신의 사후 아들끼리 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칭기즈칸은 주치와 차가타이를 모두 꾸짖었고, 이로 인해 후계자의 자리는 3남인 우구데이의 차지가 되었다고 한다.

  

우구데이는 비단 형들의 불화만으로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구데이는 비록 칭기즈칸의 전사로서의 자질을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아들 중 가장 지적이었고 훌륭한 균형감각과 끈기를 지니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자신이 세운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우구데이의 능력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칭기즈칸의 사후 새로운 몽골제국의 지배자가 된 우구데이는 제국의 영토가 확대된 만큼 아버지가 사용한 '칸'이라는 칭호가 아닌 '대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우구데이는 몽골 중부의 오르혼 기슭에 칭기즈칸이 계획하였던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했고 칭기즈칸에 의해 피정복지에서 발탁된 요나라 왕족출신 거란족 야율초재와 위구르족 친카이(진해)를 중용하여 중국식 행정조직을 모방한 통치기구를 정비하였으며 속령에 대해서는 다루가치를 파견하는 지방통치기구를 편성하여 제국의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또한 세제정비를 통해 제국의 경제적 기초확립에도 노력했다.

 

 

유럽대원정

 

총사령관 바투

 

내부체제를 정비한 우구데이는 칭기즈칸의 유지를 이어받아 정복전쟁을 재개하기로 하였고 그 대상은 러시아 방면의 전투 경험이 있던 수부타이의 의견에 따라 러시아 방면으로 결정되었다. 원정군 구성에 제국의 총력을 기울여 몽골의 모든 지파가 합류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주치 가문은 바투, 오르다, 베르케, 샤이반이 참가하였고, 차가타이 가문은 아들 바이다르와 손자 부리가 참여하였으며, 톨루이 가문은 아들 몽케가 합류하였고, 우구데이 자신도 아들 구유크와 카단, 카단의 아들 카이두를 종군시켰다. 원정군 총사령관은 영지가 러시아에 가장 가까웠던 주치의 차남 바투가 맡기로 하였으며 수부타이는 부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바투는 주치의 차남으로 주치가 죽은 이후에 주치의 일족을 이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칭기즈칸의 영지분할 정책과 장자가 가장 먼 영지를 부여받는 몽골족 전통에 따라 주치는 이르티시강 서쪽을 영지로 얻었었다. 주치의 영지는 훗날 금장한국(Golden Horde)으로 불리게 된다. 주치 사후 그의 영지는 둘로 나뉘어 장남 오르다가 다스리는 볼가강 동쪽의 백장한국(White Horde)과 차남 바투가 통치하는 볼가강 서쪽의 청장한국(Blue Horde)으로 분리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바투가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주치에게는 오르다와 바투 이외에도 12명의 아들이 더 있었으나 나머지 아들들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성인이 될 때까지 두 형에게 나뉘어 의탁하게 되었다. 바투는 아버지 주치가 칭기즈칸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생각했지만 주치가 이미 칭기즈칸이 죽기 몇달 전에 먼저 죽었고 바투 자신이 아직은 너무 젊고 세력이 부족하였기에 우구데이가 차기 칸으로 선출되는 것에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다만 우구데이 가문이 칸의 지위를 차지한 것에 대한 바투의 불만은 훗날 우구데이 사후에 벌어지는 몽골족 내부의 권력쟁탈전에서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러시아 정벌

 

바투의 원정군이 정벌목표로 삼은 러시아는 당시 키예프 루시로 불리고 있었다. 키예프 루시는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는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한 귀족 연합체였다. 키예프 공국은 러시아의 전설적인 건국자인 바이킹 류리크의 후손이었던 올레크가 세운 나라로 동로마 제국과 교역을 하며 동방정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AD 12세기 초에 러시아를 통일하며 번영을 이루기도 하였으나 AD 13세기 중엽부터 세력이 약화되면서 사실상 연합체가 해체되어 북동부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과 북부의 노브고로드 공화국, 남서부의 갈리치-볼리니 공국이 서로 대립과 협력을 반복하고 있던 상태였다. 키예프 루시의 귀족 연합군은 이미 AD 1223년 제베와 수부타이의 몽골군에게 칼가강 전투에서 대패한 바 있었으나, 몽골군이 본대로 귀환 중이었기에 그대로 철수하여 러시아 도시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몽골군이 사라진 후 키예프 루시의 귀족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분열된 채 여전히 서로 분쟁을 벌이며 힘을 소모는 사이에 몽골군은 13년만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바투는 AD 1236년 가을에 원정군을 이끌고 볼가강을 건너 볼가 불가리아로 침입하였고 1년동안 킵차크족와 알란족을 토벌하고 킵차크 대초원을 완전하게 정복하였다. 이어 러시아 쪽으로 눈을 돌린 바투는 AD 1237년 11월에 러시아의 유력제후인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유리 2세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랴잔을 공격하면서 러시아 침공을 시작했다. 6일간의 전투 끝에 랴잔은 함락당했고 철저히 파괴당하고 말았다. 이에 유리 2세가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냈으나 실패하고 말았고 이로인해 콜롬나와 모스코바가 불타게 되었다. AD 1238년 2월 4일에는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수도인 블라디미르에 대한 몽골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수일만에 함락되었고 블라디미르는 불타올랐으며 유리 2세의 가족들은 모두 죽었다. 다만 유리 2세만이 간신히 탈출하여 북쪽으로 도망가 다시 군사를 모았다. 하지만 같은 해 3월에 몽골군과 벌어진 시트강 전투에서 유리 2세의 군대는 다시 괴멸당했고 결국 유리 2세도 살해당하고 말았다.

 

시트강 전투의 패배로 러시아 제후들은 더이상 몽골군에게 저항할 힘을 잃게 되었다. 이후 바투는 군대를 나뉘어 러시아 곳곳의 도시를 공격하여 로스토브와 우글리치를 비롯한 14개의 도시를 약탈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남서부로 이동하여 크림반도를 황폐화시킨 후 AD 1239년 겨울에는 다시 러시아를 공격하였으나 러시아로서는 몽골군을 막아낼 군사력이 없었고 추운 날씨로 강마저 얼었기 때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결국 몽골군에 의해 체르니고프와 페레야슬라프가 약탈당한 후 키예프가 함락당했고 갈리치-볼리니 공국마저 점령당했다. 하지만 노브고로트 공화국만은 몽골군 약탈의 화를 면하였는데 그 이유는 노브고로트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날씨가 너무 추워 몽골군이 탐낼만한 초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날씨가 풀려 얼었던 강이 녹고 습지가 형성되어 기마들의 기동에 제한받았던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이로서 키예프 루시의 거의 대부분의 영지가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를 러시아 역사에서는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며 굴욕의 시기로 취급하고 있다. 본래 타타르는 몽골의 한 부족명인 달단의 음차였으나 그리스어에서 지옥을 뜻하는 '타르타로스'와 연관시켜 몽골인에 대한 비칭으로 사용했으며 나중에는 투르크계 민족까지 아우르는 유목민족 전체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게 된다. 타타르 멍예 기간 동안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유럽의 역사 흐름에서 벗어나 동양적인 색채도 갖게 되었고 특히 몽골의 군국주의 지배방식이 사회 전반에 퍼져 향후 소련시대까지 러시아의 지배방식으로 굳어지게 된다.

 

비록 러시아 정벌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원정군에 참여한 몽골 왕족 사이에서 알력이 발생했다. 우구데이의 아들 구유크와 차가타이의 손자 부리가 바투의 러시아 정벌의 공적 독점을 시기하여 헤묵은 혈통 문제를 거론하면서 바투의 총사령관 지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바투는 즉각 우구데이 칸에게 이를 항의했고 분노한 우구데이 칸은 항명죄를 물어 구유크와 부리를 소환하고 꾸짖었다. 이와는 별도로 툴루이의 아들 몽케도 원정군에서 이탈하기는 했으나 바투와의 우호관계는 유지하였다. 이때 발생한 바투와 우구데이 및 차가타이 가문과의 불화, 바투와 몽케 간의 우정은 훗날 바투가 몽케를 몽골제국의 대칸으로 추대하는 계기가 된다.

 

 

동유럽 정벌

 

러시아 정벌을 마무리한 바투는 자신의 영지의 측면을 보호하고 더 많은 정복을 위해 몽골군이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곳은 바로 유럽이었다. AD 1241년 바투는 유럽 정벌을 위해 부대를 둘로 나누어 형인 오르다와 차가타이의 아들 바이다르, 우구데이의 아들 카단은 함께 폴란드로 보냈고 바투 자신은 수부타이와 함께 헝가리로 향했다.

 

 

레그니차 전투

 

폴란드는 AD 10세기경에 폴라니에족의 피아스트공 미에슈코 1세가 포메라니아, 실롱스크, 말로폴스카의 땅을 합병하고 AD 966년에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여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형성되었다. 이후 폴란드는 볼레스와프 1세(재위 AD 992년 ~ AD 1025년) 대에 폴란드 전체를 통일하고 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를 병합하였으며 독일과의 3차 전쟁에도 독립을 지켜내었다. 그러나 AD 1138년부터 AD 1320년까지 60여년 동안 왕위계승다툼이 벌어지면서 국력이 급격하게 약화되고 말았는데, 바로 이 시기에 몽골군의 침입을 허용하고 말았다.

 

몽골군은 슐레지엔 지방을 침입하였는데 그곳은 폴란드 내부의 왕위다툼으로 상(上) 슐레지엔과 하(下) 슐레지엔으로 나뉘어있었다. 그중에서 몽골군을 상대한 곳은 하 슐레지엔으로 하 슐레지엔 공작 헨리크 2세는 몽골군을 상대하기 위해 5만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레그니차 부근에서 동남쪽으로 10km정도 떨어진 발슈타트로 향했다. 폴란드군은 유럽 각지에서 모인 연합군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당시 명성이 높던 튜튼 기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군이 전멸위기에 처한 것을 본 폴란드 연합군의 본진이 도와주러 진격하였지만 오히려 몽골군의 공격에 밀리기 시작했고 이에 헨리크 2세는 최후의 보루인 튜튼 기사단과 폴란드 기사단까지 투입시켰다. 비록 이들은 유럽의 여러 전장에서 명성이 자자하였지만 거리를 벌리며 화살을 쏘아대는 몽골군에게 제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몽골군의 화살공격에 제일 먼저 석궁병이 쓰러졌고 기사단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결국 헨리크 2세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면서 전투는 몽골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당시 몽골군이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한쪽 귀를 잘라낸 것이 커다란 자루 9개에 가득 찼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대승이었다.

 

 

모히 전투

 

폴란드에서 레그니차 전투가 벌어지던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헝가리에도 바투와 수부데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등장하였다. 헝가리는 AD 9세기말에 아르파드가 마자르족을 이끌고 도나우강 중류지역인 판노니아로 이주하여 그 곳에 있던 대모라비국을 멸망시키고 최초의 마자르 대공이 되면서 형성되었다. 이후 헝가리는 AD 997년 마자르대공이 된 이슈트반 1세가 헝가리에 로마 카톨릭을 전파하고 그 공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AD 1000년에 헝가리왕으로 봉해지면서 중세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지만 바투의 몽골군의 침략을 받기 직전에는 전임왕 엔드레 2세(재위 AD 1205년 ~ AD 1235년)가 방탕한 생활로 왕실 재정을 탕진하고 귀족들에게 굴복하여 왕권을 제한하는 금인칙서를 승인하여 왕권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엔드레 2세의 뒤를 이은 벨로 4세(재위 AD 1235년 ~ AD 1270년)는 귀족들에 대항해 왕권을 재강화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도 전에 몽골군의 침입을 맞이하고 말았다.

 

몽골군의 소규모 정찰대가 AD 1241년 3월 15일 경에 페스트 근처에 도착하자 헝가리군은 이를 손쉽게 격퇴하였다. 그러나 헝가리 측이 이를 몽골군 전체 병력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퇴각하는 몽골군을 쫓아 전군을 이끌고 사조강까지 진출하였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은 대치하였는데 이때 몽골군은 2~3만명으로 추정되었고 이에 맞선 헝가리군은 대략 1.5만명으로 추산되었다. 헝가리군은 헝가리왕 벨로 4세와 그의 동생인 슬라보니아의 칼만 공작, 그리고 성전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우그린 칼로차 대주교가 연합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군이 숲속에 숨어 있었기에 이때까지도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정확한 숫자를 알지 못했다.

 

4월 11일 몽골군이 사조강을 건너려고 시도하면서 전투가 개시되었으나 사조강은 좁은 다리만으로 연결되었기에 좁은 다리를 건너려던 몽골군은 헝가리군의 석궁병에게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몽골군은 작전을 수정하여 바투가 강 건너편의 헝가리군을 공격하는 동안에 수부타이가 일부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부교를 만들고 도하하기로 하였다.

 

계획대로 바투가 헝가리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석궁병에 대한 대책으로 7대의 투석기를 동원하여 공격하였다. 이에 헝가리군이 다리 방어를 포기하고 후퇴하였고 바투군은 도하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강을 등진 상태에서는 몽골군 특유의 기동성있는 원거리 공격을 펼치기가 어려웠고 백병전에 약하다는 약점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바투는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하여 헝가리군의 공격을 버텨내었고 그 사이에 무사히 도하에 성공한 수부타이군이 헝가리군 배후에 나타나 공격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수부타이의 공격에 헝가리군의 진형이 삽시간에 붕괴되었고 결국 견디지 못한 헝가리 연합군이 결국 퇴각하기 시작했다. 바투는 자신의 피해도 커서 추격을 단념하고 군대를 재정비하려고 하였으나 수부타이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헝가리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 판단이 정확하여 이미 붕괴되어버린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대패하고 말았다.

  

몽골군에게 주력군을 잃은 헝가리군은 다뉴브강을 이용하여 몽골군의 진격을 잠시 저지할 수 있었으나 겨울이 되어 강이 얼면서 결국 도하를 허용하였다. 몽골군은 헝가리 평원을 휩쓸기 시작했고 몽골군을 피하고자 헝가리 왕족들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였다. 벨로 4세는 남서쪽으로 도망쳐 아드리아해변에 있는 도로기르 성으로 피신한 후 로마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등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그들은 아직까지 몽골군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거절당하였다. 

 

몽골군은 지휘부가 붕괴된 헝가리를 상대로 끝까지 저항한 몇 개의 성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약탈하고 집단 처형과 주민학살을 벌이며 헝가리를 거의 완전히 파괴하였다. AD 1242년 여름에 몽골군은 도망친 벨로 4세를 추적하기 위해 보헤미아를 넘어 오스트리아와 달마티아까지 진출하였지만 갑작스럽게 우구데이의 사망소식이 전해졌기에 진군을 멈추고 철수해야 했다. 칭기즈칸이 남긴 율법에 의하면 대칸을 선출하는 쿠릴라이를 열기 위해서는 모든 몽골 왕족이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유럽 정벌을 단념하게 된 바투는 분풀이로 돌아가는 길에 불가리아를 약탈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몽골군 기병전술의 장점과 단점

 
바투의 유럽 원정군은 레그니차 전투와 모히전투에서 각각 폴란드 연합군과 헝가리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비록 모두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두 전투에서 몽골군은 기병전술의 장점과 단점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우선 레그니차 전투에서 몽골군은 전위부대로 적군을 유인하고 이에 이끌려 나온 적군을 미리 매복한 본군이 포위하여 화살을 퍼붇는 전형적인 몽골군 기병전술로 폴란드 기병대와 북유럽의 패자인 튜튼 기사단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것은 몽골의 기마병들이 넓은 평원에서 싸울 경우 유럽의 중장기사단에게도 충분히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모히전투에서는 처음에는 좁은 다리를 두고 싸워야 했고, 나중에는 강을 등지고 싸워야 했기에 몽골 기마병 특유의 원거리에서 포위하여 화살을 퍼붇는 전술을 펼칠 수가 없었고 오히려 빈약한 갑옷 때문에 근접전에서 유럽 기사단에게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다행히도 수부타이의 별동대가 적시에 헝가리 연합군의 배후를 치면서 전투는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몽골군일지라도 지형적으로 기마병이 넓게 포진할 수 없는 경우에는 큰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몽골군의 약점은 훗날 AD 1260년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벌어지는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이 대패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히전투는 패잔병을 추격하는 몽골군의 전술이 얼마나 뛰어난 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헝가리 연합군이 수부타이의 별동대에게 배후를 습격당하고 진형이 붕괴되어 도주하기 시작했을 때 몽골군은 헝가리 연합군보다 빠른 속도로 앞서나가 퇴각로를 차단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거리를 두고 화살로만 공격하는 전술을 택했다. 이는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몽골군의 기마술이 바탕이 되어 궁지에 몰린 적이 결사항전할 경우 발생할 불필요한 아군의 피해를 방지하고 적군으로 하여금 싸우기보다는 열린 퇴각로로 도망치도록 유도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모히전투에서도 이 점이 적중하여 퇴각하던 헝가리 연합군도 역시 뒤돌아서서 싸우기 보다는 계속해서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지만 결국 일정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붙는 몽골군을 떨쳐내지 못하고 차례차례 쓰러지고 말았다. 이것이 몽골군이 한번의 대승만으로 헝가리의 주력군을 모두 격파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몽골제국 내분

 

제3대 구유크 칸과 바투의 대립 

 

우구데이 칸은 AD 1241년 12월에 사망하였으나 유럽까지 거리가 멀어 이듬해 여름이 되어서야 바투 원정군에게 소식이 전달되었다. 몽골족의 율법에 따라 바투와 바이다르, 카단 모두는 차기 대칸이 될 자격이 있었고 또한 차기 대칸에게 충성을 맹세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따라서 차기 대칸을 선출하는 쿠릴타이를 열기 위해서는 이들 모두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바투가 러시아와 동유럽을 정벌한 혁혁한 전과 때문에 유력한 차기 대칸 후보가 되었기에 우구데이 칸 사후 섭정을 맡게 된 우구데이칸의 아내 퇴레게네 황후는 서둘러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차기 대칸을 선출해야 하는 섭정의 책무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쿠릴타이 개최를 지연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구유크가 차기 대칸으로 선출될 수 있도록 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퇴레게네 황후가 섭정의 권력을 이용하여 우구데이 칸 시절의 신하들을 모두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로 대체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몽골족 원로들을 회유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바투가 병을 핑계로 참석을 거절하여 쿠릴타이 개최를 계속 연기시켰다. 바투와 퇴레게네 황후가 서로 견제하는 사이에 쿠릴타이 개최는 계속 연기되어 5년동안 몽골제국의 대칸 자리가 공석이 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나 결국 상황은 몽골제국의 권력을 장악한 퇴레게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퇴레게네는 구유크가 대칸으로 선출될 것이 확실해지자 AD 1246년 바투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쿠릴타이 개최를 강행하여 구유크를 차기 대칸으로 선출시켰다. 이렇게 하여 구유크가 몽골제국의 제3대 대칸으로 선포되었고, 어쩔 수 없이 바투가 이를 묵인하였으나 마음으로 굴복하지 않았기에 양측의 대립은 점점 심화되었다. AD 1248년 구유크 칸이 서쪽정벌을 핑계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바투를 소환하자 저의를 의심한 바투 역시 대군을 이끌고 나와 구유크를 맞이하면서 양측은 전쟁 직전 상황까지 치닫았지만 그 전에 구유크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우려했던 몽골족 내전은 일어나진 않았다.

 

 

제4대 대칸 몽케 칸 옹립

 

구유크가 후사를 남기 않고 죽었기에 차기 대칸을 둘러싼 암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우구데이 가문에서는 구유크 사망 이후에 섭정이 된 구유크의 미망인 오굴 카이미시를 앞세워 우구데이의 손자인 시레문을 대칸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에 맞선 툴루이 가문에서는 툴루이의 아들 몽케를 대칸 후보로 내세웠다. 상황은 점점 몽케에게 유리한 편이었다. 본래 몽골족은 유목민족의 전통에 따라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이어받는 풍습이 있었기에 우구데이 칸 시절부터 진정한 대칸은 툴루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비록 툴루이가 아버지 칭기즈칸의 의견을 존중하여 우구데이를 대칸으로 내세웠기에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몽고족 내부에서는 여전히 툴루이 가문에서 대칸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다. 또한 칭기즈칸 손자 세대의 최고 연장자로서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된 바투도 유럽 원정시절부터 몽케에게 호의적이었다. 결국 바투가 툴루이의 미망인인 소르카크타니와 연합하여 AD 1250년에 쿠릴타이를 몽골초원에서 여는 전통을 무시하고 시베리아에서 소집하면서 몽케는 대칸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절차상의 문제가 불러지자 이듬해에 아우 베르케로 하여금 몽케를 호위하게 하여 칭기즈칸의 고향이자 툴루이 가문의 영지인 몽골 초원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몽케의 차기 대칸 지위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이에 반발한 우구데이 가문에서 몽케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미리 발각당해 숙청당했고 몽케의 대칸 지위는 공고히 되었다. 

 

 

 

킵차크 한국

 

킵차크 한국의 건설

 

유럽 대원정을 통해 바투의 영토는 크게 확대되었다. 본래 바투의 아버지인 주치의 영지는 금장한국(Glden Horde)으로 불렸고, 주치 사후 금장한국은 볼가강을 중심으로 바투가 다스리는 볼가강 서쪽의 청장한국(Blue Horde)과 볼가강 동쪽의 백장한국(White Horde)으로 분리되었었다. 이렇게 주치와 그 아들들의 세력이 색깔로 구분된 것은 동양의 오행설(좌-청색, 우-백색, 남-적색, 북-흑색, 중앙-황금색)에 따른 것으로 몽골초원에서 볼때 좌측인 바투 세력이 청색, 우측인 오르다 세력이 백색으로 분류되었던 것이었고 중심이 되는 주치 세력은 황금색이 된 것이었다. 또한 황금색은 칭기즈칸의 친족을 가리키는 황금씨족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러시아 정벌 당시 바투의 천막이 황금색이었던 것 때문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유럽 정벌에서 돌아온 바투는 볼가 강 하류에 새로운 도시, 사라이를 건설하여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오르다의 백장한국은 발하슈 호수를 근거지로 삼다가 시르다리야 강의 시그나크로 옮겨갔다. 또한 성장한 바투의 동생 샤이반은 우랄산맥 동쪽이자 오르다 영지의 북쪽에 새로운 영지를 부여받았다. 이렇게 하여 명목상 금장한국은 주치 아들들이 분할받은 여러 영지의 연합체가 되었지만 바투의 청장한국 세력이 훨씬 거대하였기에 바투 가문에서 금장한국의 칸의 지위도 겸하며 주치 가문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금장한국은 정복한 지역의 이름을 따 '킵차크 한국'으로 불리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었다

  

바투는 유목민으로서의 몽골족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킵차크 대초원을 직접 지배하는 대신에 러시아 공국들에 대해서는 간접지배방식을 취했다. 이리하여 러시아 공국들은 킵차크 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매년 일정하게 공물을 받치는 대신에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바투 이후 킵차크 한국의 칸들은 러시아 제후에게 세금징수권을 부여하면서 이들을 통제했고 만일 킵차크 한국에 대한 공물납부를 거절하거나 명령을 어길 경우에는 이전과 같은 무자비한 학살과 파괴를 가해 공포감을 심어 주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킵차크 한국은 불과 4만명의 몽골군만으로도 킵차크 대초원과 러시아 제후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다. 이후 러시아는 몽골군에게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키예프나 블라디미르와 같은 기존의 대도시가 몰락하고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모스크바와 트베르와 같은 신흥도시가 발달하게 되는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특히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고 세금 감면 혜택을 받으면서 러시아 정교회도 부흥할 수 있게 되었다.

 

 

바투 이후 킵차크 한국

 

킵차크 한국은 바투 사후 아들 사르다크(재위 AD 1255년 ~ AD 1256년)와 울라크치(재위 AD 1256년)로 이어지는 짧은 치세 이후에 바투의 동생인 베르케(재위 AD 1257년 ~ AD 1266년)가 킵차크 한국의 제4대 칸으로 즉위하여 볼가 강 상류에 새로운 사라이를 건설하고 수도를 옮겨 국가 체제를 새로이 정비시켰다. 이후 구 사라이는 사라이-바투, 신 사라이는 사라이-베르케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베르케가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캅차크 한국은 급격하게 이슬람화되어 갔고, 특히 이슬람교도로서 일한국 훌라구 칸의 이슬람 정벌을 방해하며 전쟁까지 벌였기 때문에 몽골제국은 급격하게 분열되고 말았다.

 

베르케가 AD 1266년 훌라구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캅차크 칸의 지위가 사르타크의 동생의 아들, 즉 바투의 손자인 몽케 테무르에게 이어져 바투 가계가 다시 칸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몽케 티무르 사후에 바투의 조카인 노가이 칸이 실권을 장악하고 3명의 칸을 바꿔치우면서 킵차크 한국을 사실상 노가이 칸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제8대 칸인 토크흐타가 노가이 칸를 제거하고 통치권을 되찾았으면서 킵차크 한국은 토크흐타와 그의 아들 우즈베크 칸으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우즈베크 칸 사후 그 아들들이 계속해서 암살당하면서 AD 1357년부터 AD 1379년까지 무려 16명의 칸이 난립하는 극심한 혼란을 겪고 말았다. 더욱이 AD 1346년 ~ AD 1347년에 전국을 휩쓴 흑사병은 킵차크 한국의 국토를 황폐시키고 인구를 격감시켰다. 

 

청장한국이 점차 무너지고 있는 사이에 AD 1376년 백장한국의 우루스 칸이 청장한국에 대하여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손자 토크타미시에 의해 결실을 이루어 킵차크 한국이 재통일되었지만 AD 1391년부터 시작된 티무르군의 공격에 토크타미시가 결국 폐위되고 속국으로 전락한 끝에 카잔한국과 크림한국, 아스트라한 한국이 분리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명목상 킵차크 한국 칸의 지위는 유지되었지만 실권을 티무르 제국에게 모두 빼앗겼기에 사실상 멸망한 것으로 취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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