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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칭기즈칸 정복전쟁

Jobs9 2021. 5. 2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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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과 초원 통일

 

AD 12세기경 중국의 북쪽에 위치한 초원 지대에 살던 몽골족은 서쪽의 나이만 부족, 북쪽의 메르키트 부족, 남쪽의 탕구트족(서하), 동쪽의 타타르족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이들은 서로 침략과 약탈, 이에 대한 복수를 거듭하고 있었고 중국왕조의 계략에 따라 동맹과 분쟁을 반복하였다.

 

몽골족 부족 중 하나였던 보르지긴 씨족의 족장 예수게이가 메르키트 부족의 후엘룬을 납치하여 후처로 삼았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테무진이었다. 테무진은 9살 때 예수게이가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부족민들에게 버림받아 극심한 가난을 경험해야 했다. 테무진은 15살이 되어 아버지 예수게이 살아생전에 정혼을 맺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메르키트 부족이 보르테를 납치하고 말았다. 이는 예수게이가 메르키트 부족으로부터 어머니 후엘룬을 납치하였던 것에 대한 복수의 의미가 강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되찾기 위해 아버지 예수게이의 의형제이자 강력한 부족 중 하나인 케레이트 부족을 이끌고 있던 토그릴 완 칸에게 도움을 청했다. 테무진은 토그릴 완 칸으로부터 2만의 병력을 지원받았고 어릴 적 친구인 쟈다란 부족의 쟈무카의 도움까지 받아 메르키트 부족을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메르키트 부족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테무진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잃어버렸던 아버지의 부족민들을 집결시키며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테무진은 친구 쟈무카와 함께 공동으로 몽골족을 통치하기 시작했으나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맞아 점차 불화가 발생했다. 테무진은 궁핍했던 어린 시절 때문에 능력있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평민과 노예들을 주로 등용한 반면에 쟈다란 부족에서 풍족하게 자란 쟈무카는 능력보다는 서열을 우선시 여겨 귀족들을 중용하였다. 결국 AD 1181년 쟈무칸은 테무진과 결별하고 옛 몽골 귀족들을 이끌고 떠났다. 이후 테무진과 쟈무카는 경쟁적으로 소수 부족들을 포섭하며 세력을 넓혀가지 시작했고 AD 1189년 테무진은 몽골씨족연합의 맹주인 '칸'의 지위에 올라 '칭기즈칸'이란 칭호를 부여받았으며 AD 1201년에는 쟈무카도 테무진 세력에 반감을 가진 몽골족을 규합하여 '구르칸' 지위에 올랐다. 쟈무카는 테무진에게 도전하였으나 케레이트 부족의 토그릴 완 칸과 연합한 칭기즈칸은 이를 토벌하였고 쟈무카는 달아나게 되었다. 이후 쟈무카는 근거지를 잃고 떠돌다가 AD 1206년 수하의 배신으로 테무진에게 붙잡혔는데 다시 형제의 의를 맺자고 제안한 테무진의 제안을 거절하고 처형당했다.

 

쟈무카를 토벌하면서 내부정비를 마무리한 칭기즈칸은 이후 북쪽 초원의 대부족들을 잇달아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AD 1202년에는 타타르 부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수레바퀴 비녀장보다 키가 큰 남자들을 모두 살해하고 나머지를 자신의 부족으로 받아들였다. 이듬해인 AD 1203년에는 오랜 동맹이었던 케레이트 부족과 불화가 발생하였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맏아들 주치와 토그릴 완 칸의 딸의 결혼을 제안하였으나 지나치게 성장한 칭기즈칸을 의식한 토그릴 완 칸 측이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칭기즈칸의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칭기즈칸은 복수를 위해 대대적인 정벌에 나서 토그릴 완 칸을 죽이고 케레이트 부족마저 흡수하였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AD 1204년에 알타이 산맥 방면에 위치한 나이만 부족마저 쓰려뜨렸다.  

 

이렇게 하여 사상 처음으로 북쪽 초원을 통일하게 된 칭기즈칸은 AD 1206년 오논강변 평원에서 몽고족의 집회인 쿠릴타이를 열고 초원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유지되던 씨족 및 부족제도를 해체하고 군사조직에 바탕을 둔 천호로 재편하였다. 총 95개로 편성된 천호는 그 하부조직인 백호로 다시 나뉘었는데 천호란 약 1,000명, 백호는 약 100명의 병사를 제공하도록 정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천호장과 백호장에는 공신들을 임명하고 이들을 좌익과 중군, 우익의 만호장 지휘하에 두었다. 또한 '케시크티'라고 하는 친위대를 설립하고 천호장 및 백호장의 자제로 편성하여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몽골 유목군단의 최정예 부대를 구성하였다.

 


서하와 금나라 침공

 

서하 침공

 

칭기즈칸은 몽골족의 조직화와 내부정비가 끝난 AD 1206년부터 대외전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칭기즈칸의 최초의 공격목표는 중국의 영하, 감숙, 오르도스, 신강 자치구 일부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탕구트족의 '서하'였다. 서하는 AD 11세기 ~ AD 13세기에 중국 서북부의 오르도스와 감숙 지역에서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이 세운 나라로 본래의 명칭은 '대하'이지만, 중국 송나라에서 ‘서하’라고 불러 이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칭기즈칸이 서하를 공격한 이유는 중국 금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고 군비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칭기즈칸이 대칸의 지위에 오르기 1년 전인 AD 1205년에 이미 야율아해 지휘하의 몽골군이 서하 영토를 처음으로 공격하여 낙타를 비롯한 많은 가축을 빼앗아 돌아온 적이 있었다. 2번째 침공은 AD 1207년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올로하이를 함락하고 많은 말과 낙타,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그 곳에 거주하던 기술자나 농민을 강제로 끌고갔다. 2차례 침공이 모두 성공을 거두자 칭기즈칸은 AD 1209년 대대적으로 서하로 진격하였고 서하의 왕 이안전은 별 수 없이 항복하고 딸 차카란을 칭기즈칸과 바치며 혼인동맹을 맺었다. 이후 서하는 몽골족의 중국 금나라 침공시 병력을 지원해야 했기에 국력이 급격하게 피폐해졌다.

 


금나라 침공

 

서하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칭기즈칸은 금나라를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금나라는 AD 1115년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 AD 1127년 중국의 양자강 이북을 장악하였다. 당시 몽골족은 100년이 넘게 금나라와 주종관계를 맺고 조공을 받치고 있었는데 몽골족이 넘보기에는 아직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칭기즈칸은 케룰렌 강가에서 부족 최고회의인 쿠릴타이를 열고 몽골인의 민족감정을 자극함과 동시에 약탈에 대한 기대감을 불어넣는 데 성공하여 금나라에 대한 전쟁을 결의하게 하였다.

 

AD 1211년 칭기즈칸의 군대가 출병하여 고비남쪽 내몽골 초원에 자리잡고 있는 옹구트 부족을 향해 진격하였다. 옹구트 부족은 금나라와 주종관계를 맺고 만리장성의 북방 산서성의 외곽을 지키고 있었으나 칭기즈칸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기에 순순히 길을 열어주고 오히려 지원군도 파견하였다. 이렇게 하여 손쉽게 만리장성을 통과한 몽골군은 삽시간에 금나라군을 물리치고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현재의 베이징 근처)의 180리 근처까지 육박하였다. 칭기즈칸은 세 아들 주치와 차가타이, 우구데이에게 별동대를 맡겨 산서성 최북단의 서경과 하북성 북부의 선화와 보안 지역 등 변경지역을 파괴하면서 금나라를 압박하였으나 공성전에 서툴렀기에 중도를 함락하지는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이듬해 가을에도 재차 금나라로 침공하였으나 칭기즈칸이 화살에 맞았기 때문에 별다른 소득없이 퇴각해야만 했다.

 

칭기즈칸은 AD 1213년에 3번째로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대대적인 공세 속에서 금나라 수도 중도까지 손쉽게 진격하였고 AD 1214년에는 중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공성전에 능숙하지 못하였기에 지리한 포위전이 계속되었고 점차 식량이 바닥나고 전염병이 도는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결국 칭기즈칸은 금나라와 협상을 벌여 공물을 약속받고는 철군하였다. 칭기즈칸은 비록 금나라를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매년 공물을 제공받는 경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금나라는 몽골족의 위협을 피하고자 수도를 중도에서 황하 이남의 하남성 개봉으로 옮겼다. 이는 금나라가 사실상 황하 이북을 포기한 것으로 비쳐졌기에 금나라 내부에서 많은 이반이 발생하였고 AD 1214년 가을에 재차 군사행동에 들어간 칭기즈칸에 의해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가 완전히 장악당하고 말았다. 금나라의 영토가 하남과 협서로 축소된 이후에도 전쟁은 AD 1227년 칭기즈칸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결말을 보지 못했고 그가 죽은 이후인 AD 1234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금나라는 완전히 정복당하게 된다.

 

 


서방원정

 

호라즘 샤왕조 정복

 

숙적이었던 금나라를 정벌하여 황하 이남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 칭기즈칸은 이제 눈을 중앙아시아로 돌렸다. 당시 중앙아시아는 호라즘 샤왕조가 이란고원까지 영토를 넓히고 이슬람 세계의 보호자임을 자임하고 있었다. 호라즘 샤왕조는 이슬람 셀주크 왕조의 부장이었던 아누시티긴의 아들 쿠트브 웃딘 무함마드가 수도를 우르겐치로 하여 셀주크 왕조로부터 독립하면서 성립된 왕조로 동쪽의 서요와 연합하여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면서 대국이 되었다. 이후 호라즘 샤왕조는 서요를 물리치고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동서무역을 독점하며 번성하게 되었다.

 

몽골과 호라즘의 1차 충돌은 금나라와 전쟁 중이었던 AD 1218년에 발생하였다. 당시 몽골에 복속되었던 메르키트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몽골군은 이를 진압하고 잔존세력을 쫓아 서요 국경까지 진격하였는데 이때 서요에는 호라즘의 무함마드 샤가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방문한 상태였기에 분쟁이 발생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몽골군은 호라즘군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나 오히려 호라즘군의 절반을 죽이고 샤의 본진을 약탈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몽골군은 여전히 병력에서 열세였기에 밤을 기다려 철수하였다.

  

이후 서요가 칭기즈칸에 쫓긴 나이만 부족의 쿠츨루크에게 점령당하자 칭기즈칸은 유능한 휘하 장수인 제베를 파견하여 쿠츨루크를 죽이고 서요를 점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호라즘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지만 당시까지도 금나라와의 전투 중이었으므로 큰 아들 주치를 보내 화친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칭기즈 칸의 보호를 받고 있던 450명의 이슬람 상단이 오트라르 성의 성주에게 첩자로 몰려 몰살당하였고 화레즘 샤가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하고 오히려 사신을 죽이면서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칭기즈칸은 호라즘을 침공하기에 앞서 호라즘을 분열시키는 계략을 썼다. 당시 호라즘은 단기간에 영토가 확대되었으나 내정을 안정시키지 못한 상태였기에 파벌간 갈등이 매우 심한 상태였다. 칭기즈칸은 호라즘 내의 많은 장수와 귀족들이 자신과 내통하는 것처럼 거짓소문을 내고 몇몇 귀족이나 왕족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호라즘 샤 무함마드 2세가 반란을 우려하여 수도를 사마르칸트로 옮기고 병력을 나라 곳곳에 분산배치하였기 때문에 상황은 몽골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더욱이 호라즘 측에서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에게 칼리프 자리를 넘길 것을 요구했던 일 때문에 아바스 왕조에서 호라즘에 대한 정보를 몽골군에게 제공한 것도 무함마드 2세에게 불리한 일이었다.

 

AD 1219년 칭기즈칸은 10여만의 군대를 이끌고 호라즘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비록 몽골군은 숫적으로 호라즘군보다 적었으나 잘 훈련되어 군율이 엄정하였으며 무엇보다 이들을 지휘관의 능력이 뛰어났다. 칭기즈칸은 원정도중에도 호라즘 지배층을 이간시키고 회유하는 한편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저항의지를 마비시키는 계략을 동원하여 병력손실을 최소화하였다. 칭기즈칸은 4개로 나뉘어 호라즘의 변방도시를 공격하면서 수도인 사마르칸트로 진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몽골군의 우군(右軍)은 장남인 주치가 이끌었고 좌군(左軍)은 차남 차가타이와 3남 우구데이가 맡았으며 칭기즈칸 자신은 막내아들 툴루이와 함께 중군(中軍)이 되었고 칭기즈칸의 4선봉(젤메, 제베, 수부타이, 쿠빌라이) 중 하나로 유명한 제베와 수부타이를 별동대로 삼아 은밀하게 사마르칸트로 진격시켰다.

 

좌군의 차가타이와 우구데이는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오트라르를 함락하고 칭기즈칸의 명령에 따라 성주의 눈과 귀에 은물을 부어 죽인 후 우르겐치로 진군했다. 우군의 주치는 시르다리야강 하류 유역을 공략하여 시그낙, 잔드, 야니칸트 등의 호라즘 주요도시를 점령하고 우르겐치로 향했다. 우르겐치 공략을 앞두고 주치군과 차가타이군이 합류하였지만 두 지휘관의 의견충돌로 인하여 우르겐치 점령이 상당히 지연되었다. 주치가 협상을 통해 항복을 받아내려고 하였던 반면에 차가타이는 파괴와 약탈을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중재하기 위해 칭기즈칸은 우구데이를 파견하여 그에게 지휘권을 부여하였고 우구데이는 우르겐치를 신속하게 점령하고 파괴하였다. 우르겐치 점령시 보여진 주치와 차가타이의 의견충돌과 우구데이의 최종 지휘권 부여는 훗날 칭기즈칸이 우구데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칭기즈칸의 아들들이 대활약을 하는 가운데 칭기즈칸의 본대는 키질쿰 사막을 지나 호라즘의 새로운 수도 사마르칸트의 서쪽도시인 부하라를 점령하였다. 이후 칭기즈칸은 세 아들 부대와 별동대를 모두 불러들여 사마르칸트 공격에 나섰다. 당시 사마르칸트에는 11만의 대병력이 주둔하였기에 쉽게 함락당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칭기즈칸은 수많은 인간방패를 돌진시킨 끝에 단 4일만에 사마르칸트를 함락시켰다. 이때 3만명의 호라즘군이 항복하였으나 칭기즈칸은 이들은 모두 처형하는 무자비함을 보여줬다. 다만 사마르칸트에 있던 이슬람 무슬림들은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무사하였다. 호라즘 샤 무함마드 2세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사마르칸트를 버리고 달아났다. 칭기즈칸은 제베와 수부타이의 별동대에게 무함마드 2세의 추격을 명령했고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의 추격을 피해 발흐로 도망쳤다가 서부 호라산의 니샤푸르로 피신하였고, 이곳까지 추격당하자 카스피 해의 작은 섬 아베스쿤으로 도망쳤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무함마드 2세가 죽은 이후에도 호라즘은 무함마드의 아들 잘랄 웃딘을 중심으로 항전을 계속했다. 잘랄 웃딘은 호라산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산중의 가즈니로 피신하여 새로 군대를 조직하였다. 이에 칭기즈칸은 AD 1221년 봄에 호라산으로 진격하였고 탈리간을 파괴한 뒤 힌두쿠시를 넘어 바미얀을 포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칭기즈칸의 손자인 무투겐이 전사하자 분노한 칭기즈칸은 바미얀의 모든 생명을 죽여버리라고 명령함으로서 호라산 일대의 폐허로 만드는 잔혹함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칭기즈칸은 살아남은 주민 20%를 통치할 총독 다루가치와 서기를 남기고 아프가니스탄 가즈니로 이동하였고 잘랄 웃 딘은 이를 피해 인더스강을 건너 도망쳤으나 잘랄 웃 딘의 가족들은 붙잡혀 남자는 모두 살해되었다. 잘랄 웃 딘은 1231년 쿠르드 산지에서 그곳 주민에게 살해당하면서 한때 중앙아시아와 이란고원을 지배하였던 호라즘 샤왕조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이란과 코카서스 약탈


호라즘을 정벌한 칭기즈칸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주변 지역을 평정하기 시작했다. 잘랄 웃딘을 쫓아 아프가니스탄과 북인도를 평정하기 시작한 칭기즈칸의 본대와 달리 무함마드를 쫓아 카스피해까지 진출한 제베와 수부타이의 별동대는 근처의 초지에서 겨울을 보낸 후에 카스피해 해변을 돌아 칭기즈칸의 본대와 합류하기로 하였다. 몽골군 별동대 2만명은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으로 진출하여 라이, 잔잔, 카즈빈을 약탈했는데 하마단만이 미리 항복하여 약탈을 피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아타베그 오즈벡도 많은 재화와 옷감, 말을 공물로 바치고 몽골군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했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무간 대초원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쿠르드와 투르크멘 용병을 다수 받아들여 군세를 강화했다.

 

이듬해인 AD 1221년이 되자 몽골군은 쿠라강을 건너 그루지아로 이동했다. 그루지아왕은 7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트빌리시 근처에서 몽골군을 격퇴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1만명의 몽골군에게 역습을 받아 대패하였고 같은 해 3월말에 아베르바이잔의 마라게가 함락당해 대학살을 당했다. 몽골군은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이슬람 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하마단으로 다시 이동하였는데 이번에는 하마단이 제때에 항복하지 못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같은해 가을에 북쪽으로 돌아갔고 그루지아군이 다시 트빌리시에서 대기하였으나 거짓퇴각하는 수부데이의 유인에 이끌려 쫓아가다가 제베군의 매복에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몽골군은 그루지아의 남부지방을 약탈하고 코카서스 산맥을 넘었으나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공성병기를 잃고 수백명을 동사로 잃는 손실을 입었다.

 

 

킵차크 대초원 정벌

 

몽골군은 킵차크 대초원으로 들어서면서 그 곳에 살던 쿠만족과 충돌하였다. 쿠만칸 코텐은 주변의 알란족, 레즈기족, 시르카스족들은 물론 인접한 볼가 불가르인과 카자르인까지 끌어들여 약 5만명의 연합군을 구성하였다. 최초 전투에서 승패가 나지 않자 몽골측에서는 먼저 약탈물의 일부를 주어 쿠만족을 회유한 뒤 나머지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쿠만족마저 격퇴시키고 약탈물을 되찾아 갔다. 이어 베네치아인들의 요청에 의해 이동경로에 있던 제네노인들의 수다크와 솔다이아 창고를 약탈하였고, 베네치아인들로부터 유럽 각국 왕실의 계보와 인척관계, 각 나라들의 군사 규모 등의 정보를 얻었다. 이 정보는 향후 칭기즈칸의 사후에 벌어지는 몽골군의 유럽 대원정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흑해변에서 겨울을 지낸 몽골군은 칭기즈칸의 본대에 합류하기로 하고 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몽골군을 피해 도망갔던 쿠만 칸은 사위이자 러시아 지방의 갈리치 공작인 므스티슬라브에게 도움을 청한 상태였다. 므스티슬라브는 수십년동안 쿠만족에게 약탈을 당해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도와주려하지 않았으나 몽골군이 접근해오자 러시아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키예프 루시 제후군 전체를 소집하여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이에 키예프 공국의 므스티슬라브 3세와 체르니코프, 스몰렌스크, 로스토프, 수즈달, 노보고르드, 블라디미르의 총 8명의 러시아 제후연합군이 형성되어 총 8만명의 대병력을 구성하였다. 키예프 루시 제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을 따라 내려와 흑해의 북쪽 연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칼가 강변에서 몽골 본토로 귀환 중이던 몽골군과 마주쳤다. 이때 몽골군은 귀환 중이었기 때문에 전투의사가 없음을 밝혔지만 키예프 루시 제후 연합군이 이를 무시하고 사신을 죽임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몽골군은 불과 2만명의 병력에 불과하여 수적으로 열세이었기 때문에 거짓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인에 걸려든 러시아 연합군은 제대로 진형도 갖추지도 않은 채 무질서하게 몽골군을 쫓기 시작했다. 칼가강에 도달한 몽골군은 비로소 뒤돌아서서 반격에 나섰고 무질서한 추격과 부대 간의 속도차 때문에 분열되어버린 키예프 루시 제후 연합군을 각개격파해버렸다. 칼카강 전투를 통해 키예프 루시 제후군 5만명이 몰살당했으나 몽골군의 피해는 미미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은 러시아 지방에 대한 정벌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칼가강을 건너갔고 이 때문에 러시아 지방에 대한 몽골의 지배는 수십년 후로 연기되었다.

 

후 몽골군은 볼가강을 건너 이동 중에 카마강가의 불가르족과 우랄산맥의 캉그리를 차례로 격파하였으나 도중에 사령관인 제베는 병사하였다. 지휘권을 이어받은 수부타이가 계속해서 부대를 이끌고 회군하여 칭기즈칸 본대와 합류하면서 카스피해 해변을 도는 대장정은 끝이 났다. 이때 제베와 수부타이가 기록한 행군길이는 3년간 총 8천마일로 역사상 유래가 없는 기병의 대원정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칭기즈칸 사후 수부타이는 몽골군의 유럽 대원정의 부사령관으로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몽골군대의 우수성

 

칭기즈칸은 불과 200만명 밖에 안되는 인구를 가진 몽골족을 이끌고 중국 북부초원과 중국 하북지방, 중앙아시아, 남러시아를 정복하였다.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대는 95개의 천호와 1만 명의 친위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칭기즈칸이 사망한 AD 1227년의 총 병력수도 12만 9천명에 불과하였다. 이런 숫자로 칭기즈칸이 거대한 정복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만큼 몽골군대가 우수했기 때문이었다.

 

간결한 조직체계

칭기즈칸은 초원을 통일하고 몽골부족의 편제를 십진법에 따른 효율적인 군사조직으로 개편하였다. 몽골인들은 모두 십, 백, 천호에 속하게 되었고 15세이상 70세 이하의 남자들은 모두 병역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사회편제를 바탕으로 몽골군대 역시 십, 백, 천인대로 구성되었으며 2~3개의 천인대를 집단군으로 편성하여 1명의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몽골은 민족전체가 지휘체계가 분명하고 명령하달이 명확한 군사조직으로 탈바꿈하였다.

 

칭기즈칸은 전투시 하급지휘관에게 상당한 결정권을 부여하여 변화하는 전장에 상황에 맞춰 스스로 전술을 변화시키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몽골군이 다양한 전장에 빠르게 적응하고 뛰어난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몽골기병의 우수성

몽골군은 전체가 활을 사용하는 기병이었고 호라즘 공략 때부터는 역할에 따라서 중기병과 경기병으로 나뉘어졌다. 경기병은 적진을 교란하거나 적군을 유인하고 달아나는 적군을 추격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중기병은 적군의 돌격을 저지하고 진형이 무너진 적진에 최후돌격을 감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몽골의 중기병들도 서양과 달리 활을 지니고 있었고 얇은 철판을 댄 가죽갑옷과 투구를 썼기 때문에 무게가 상당히 가벼워 기동성이 높았다. 특히 몽골군의 기마는 상당히 우수하였기에 몽골군의 위력은 더욱 커졌다. 몽골군의 말은 서양의 말에 비해 크기가 작고 다리가 짧으며 머리가 크고 목이 굵은 모습을 하여 매우 볼품이 없었으나 인내심이 대단하여 추위와 배고픔을 잘 견뎠고 하루에 무려 550km를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몽골군의 강점은 활이었다. 몽골군이 사용한 복합궁은 당시 존재하던 어떤 활보다도 뛰어난 위력과 사정거리를 자랑하였다. 당시 유럽 최고의 활이었던 잉글리쉬 롱보우가 2m에 달하는 큰 크기에도 불구하고 250야드 사정거리와 75파운드의 위력 정도밖에 보유하지 못한 반면에 몽골의 복합궁은 350야드의 사정거리와 100~160파운드의 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뛰어난 말과 활을 지닌 몽골기병을 더 우수하게 만든 것은 몽골족의 뛰어난 시력과 조기교육이었다. 몽골인들의 시력은 5.0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정찰과 원거리 화살사격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면을 보여줬다. 그리고 몽골인들은 유목민족답게 농경민에 비해 어려서부터 말과 활을 다뤄야 했고 사냥을 통해 자연스럽게 군대전술을 익힐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몽골남자들은 별도의 훈련을 거치지 않아도 모두가 훌륭한 전사가 될 수 있었다.

 


뛰어난 정찰력

몽골군은 우수한 기동성을 바탕으로 소수의 정찰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였고 이 정찰대는 적군을 미리 탐지하는 기능 이외에 소수의 병력을 얕잡아 보고 덤비는 적군을 아군 본대가 매복한 곳까지 유인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이렇게 우수한 정찰대를 보유하였기에 몽골군은 언제나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여 전투에 임할 수 있었고 설혹 불리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우수한 기동력과 전황정보 수집으로 참패를 모면할 수 있었다.

 

 

간편한 보급체계

몽골군은 별도의 보급부대 없이 전원이 약간의 곡물과 말린 고기, 소금, 냄비, 가죽 주머니, 활시위, 화살촉 연마용 줄칼, 실과 바늘 등을 말 등에 싣고 다녔다. 또한 말위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며 용변도 볼 수 있다고 알려질 정도로 몽골인의 기마술은 뛰어났으며 몽골군대는 1사람이 2마리 이상의 말을 끌고다녀 이동 중에 지친 말을 갈아타기도 했다. 이런 뛰어난 기마술 덕분에 몽골군은 별도의 숙영지도 건설하지 않고 장거리를 이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몽골군의 간편한 보급체계는 가뜩이나 놀라운 속도를 자랑하는 몽골군의 기동력에 엄청한 상승효과를 부여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몽골군을 발견한 정찰병이 돌아오기도 전에 몽골군 군대가 들이닥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파괴와 약탈의 심리전

칭기즈칸은 항복하는 성에 대해서는 파괴와 약탈을 최소화하는 관용정책을 취했으나 저항하는 경우에는 무자비하게 학살과 파괴를 벌이곤 하였다. 이것이 심리전으로 작용하였고 칭기즈칸이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에 몽골군이 예기치 못한 시점에 등장할 경우 공포에 질린 도시들이 제대로 전투를 벌이지도 않고 항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몽골군이 저항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다는 소문은 동유럽까지 알려져 러시아나 동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미리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최강의 궁기병 전술

몽골군은 다른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궁기병을 활용한 전술을 사용하였다. 첫번째 전술은 서양에서는 파르티안 샷, 동양에서는 배사라고 부르는 말에 탄 채 뒤돌아서 활쏘는 능력을 이용한 전술로 유목민들의 가장 기본적인 전투방식이었다. 그 중에서 몽골군은 당대 누구보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해서 그 위력이 극대화되었다. 몽골군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적군과 일정 거리를 두고 진형을 유지한 채 화살공격을 퍼부었고 적군의 진형이 무너지면 창을 든 중기병을 투입하여 전투를 마무리하였다. 만약 적군이 화살비를 뚫고 다가오면 배사를 이용해 달아나면서 계속해서 공격했고, 적군의 돌격이 무뎌지면 다시 진형을 갖추고 화살로 공격하였다. 몽골군을 상대하는 적으로서는 몽골군보다 기동력이 떨어지기에 다가가지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쓰러져야만 했다.

 

몽골군의 두번째 전술은 툴루그마라고 불리는 우회기동 전술로 몽골군의 가장 대표적인 전술이었다. 툴루그마는 '깃발청소'라는 뜻으로 부대의 일부를 은밀하게 이동시켜 적의 배후에 깃발을 꼽고 이를 기준으로 포위공격을 벌인데서 유래하였다. 툴루그마 전술이 충분히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회기동하는 부대가 제때에 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적군의 배후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회기동부대를 지휘하는 장수의 역량이 중요했다. 칭기즈칸의 몽골군에게 많은 명장들이 있었고 이들이 상당한 수준의 재량권을 부여받았기에 툴루그마 전술은 언제나 최고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몽골군의 마지막 전술을 거짓퇴각을 이용한 유인전술로 '망구다이'라고 불린 몽골군의 선봉대가 주로 유인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하여 망구다이 전술로도 불렸다. 망구다이 전술은 적 병력이 몽골군보다 많거나 방어진형이 매우 단단하여 화살공격으로 쉽게 진형이 무너지지 않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망구다이 선봉대만 먼저 적군과 전투를 벌인 뒤 거짓으로 퇴각하여 적군을 유인하면 미리 매복한 본대가 포위공격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몽골군은 당대 비교할 바가 없는 기동력을 지니고 있어 매복할만한 지형이 없더라도 적군의 정찰거리 밖에 있다가 삽시간에 접근하여 포위공격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몽골군을 상대하는 적들은 상대하는 몽골군의 전체규모를 제대로 가늠하지도 못한 채 패배하기도 했다.

 

 

부족한 공성기술의 개발

몽골군은 뛰어난 기병을 보유하여 야전에서는 무적의 위력을 자랑하였지만 공성전에는 큰 힘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실제로 칭기즈칸은 금나라 수도 중도를 포위하고 주변을 약탈하면서도 중도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화친을 맺고 물러나기도 하였다. 칭기즈칸은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과 이슬람 지역을 정복한 이후에는 민간인 중에 기술자들을 우대하여 부족한 공성기술을 개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기술개발은 칭기즈칸 사후에 큰 힘을 발휘하여 몽골군이 공성전을 벌이는 금나라와 남송을 점령하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최후의 원정과 죽음

 

AD 1225년 몽골 초원으로 돌아온 칭기즈칸은 확대된 자신의 제국을 여러 아들과 동생들에게 분배해주었다. 큰 아들인 주치는 장자가 가장 먼 영지를 이어받는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이르티쉬강 서쪽의 카스피해와 아랄해 북방의 영토를 얻었고, 둘째 아들인 차가타이는 서요가 지배하던 중앙아시아를 분할받았다. 또한 셋째아들 우구데이는 일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외몽골 서부에서 천산산맥에 걸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동부 몽골고원과 만주지방은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칭기즈칸 자신은 몽골 본토를 다스리며 훗날 막내아들인 툴루이가 이어받도록 하였고 남방의 농경지대는 자신의 친족인 황금씨족의 공유재산으로 하고 다루가치와 주둔군을 배치하였다.

 

내정을 정비한 칭기즈칸은 서하를 응징하기로 하였다. AD 1211년 서하에서 일어난 궁정반란으로 새로 왕위에 오른 신종이 칭기즈칸의 호라즘 원정에 대한 지원요청을 거부한 채 오히려 AD 1225년 금나라와 형제지국의 동맹관계를 회복하고 몽골에 대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AD 1225년 가을 대장 아타치가 이끌고 출정한 서로군이 하란산맥 서쪽지역을 공략해 갔고, 칭기스칸 자신은 이듬해 2월 동로군을 이끌고 남하해 직접 하란산맥 동쪽으로 나와 서하로 진격하였다. AD 1226년 11월에 서로군과 합세한 칭기즈칸은 서하의 영주를 포위하였고 구원을 온 노장 명외영공의 10만 병력을 맞이하여 승리를 거뒀다. 포위전이 장기화되자 칭기즈칸은 황하를 건너 금나라의 서경을 선제공격하여 금나라의 원군파견을 미리 저지하였고 이듬해 봄에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이 때 병을 얻었고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깨닫고는 같은 해 여름에 용덕 청수하 지역 육반산의 남록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3남 우구데이와 막내 툴루이를 불러들여 우구데이를 후계자로 지명하고는 같은해 8월 18일에 숨을 거뒀다. 칭기즈칸의 죽음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채 서하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어 3일 후에는 서하왕이 항복하였으나 처형당했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유언에 따라 전 주민이 살해당했는데 매우 철저하게 이루어져 서하인이 거의 멸족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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