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는 힌두교, 이슬람교를 비롯해 기독교,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종교가 있다. 힌두교도가 전체 인구의 78%로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무슬림이 15%, 기독교가 2.5%, 시크교도가 1.9%, 불교도가 0.8%, 자이나교도가 0.4%로 뒤를 잇는다. |
인도는 일조량과 강우량이 풍부해 토지가 비옥한 거대한 대륙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인도 문명의 지리학적 성장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이로 인해 기원전 1500년경부터 아리아인들이 수차례 대규모로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유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인도 문명이 점진적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 기원전 약 500년에 이르면 모든 남아시아 대륙은 이미 공통의 문명으로 응집되기 시작하였다. 혹은 이 시기의 인도는 높은 정도의 문화적 동질성에 근거하는 이미 독자적인 문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인도 아대륙(印度亞大陸)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서북 지역의 산 어귀로는 쉽게 진입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상고시대부터 전 차축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에는 줄곧 인류가 거주하고 있었다.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던 드라비다인은 아리아인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고 있었다. 인도-아리아인의 문화가 비록 점차 드라비다인의 문화를 대체하기는 했지만, 드라비다인의 문화는 여전히 인도 문화의 전체 구조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까지도 각종 드라비다 언어를 구사하는 인구가 여전히 인도 총인구의 약 1/5 정도를 차지한다. 또 인도-아리아인만이 인도 아대륙에 들어와 인도유럽어를 구사하고 윤리 종교를 형성해낸 유일한 민족은 아니었다. 그들 후에 약 천 년쯤 반그리스화된 박트리아인, 이슬람화된 이란인, 이슬람화된 돌궐인, 혹은 돌궐-몽골인이 서북 지역의 산악지대에서 들어왔다. 이러한 민족들은 이 광활한 지역에 그리스와 이슬람 문명 요소들을 가져왔다. 이러한 요소들은 이미 인도 문명에서 분리할 수 없는 일부분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인도아대륙의 정치와 문화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리아족은 민족적 이동을 거듭하면서 BC 1,500년 경에 인도 북부의 펀잡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전차와 철기문화를 가진 아리아족이 인도의 북서부를 차지하면서 베다시대(Vedic Age)가 시작되고 청동기 문화를 가진 선주민들은 지배를 당하거나 인도남부로 밀려났다. BC1,500년에서 BC600년 까지의 베다시대는 인더스와 펀잡지역에서 델리까지 확장해나가는 BC 1,000년까지의 전기베다시대와, 동진을 계속하여 선주민의 문화와 융합이 일어나는 후기베다시대로 구분된다.
카스트제도는 아리안이 원주민을 정복하고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아리안은 원주민을 평정한 다음 지배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바루나'(Varna)나 불리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바루나’ 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색’을 의미한다. 결국 피부색에 의해 신분이 구분된 것이다. 백인인 아리안이 지배계급이다. 그 뒤 아리아인들도 사회적 기능에 따라 계급이 구분되어졌다. 따라서 고대 신분제도인 바루나가 카스트 제도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베다》는 고대 인도의 종교 지식과 제례규정을 담고 있는 문헌으로 브라만교의 성전(聖典)을 총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기원전 수십세기 전부터 구전되어 오던 내용을 기원전 1500~1200년에 산스크리트어로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대인도의 종교, 철학, 우주관, 사회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역사 · 문학적 가치가 높다. 분량은 성경의 6배에 달한다.
브라만교
브라만교는 고대 인도에서 《베다》 경전을 근거로 성립된 종교로 ‘바라문교’라 한역하며 브라만(婆羅門) 계급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기원전 1500년 경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한 이후 신봉되기 시작한 고대 종교로, 힌두교 등 여러 인도 종교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베다》 성전(聖典) 이름을 따서 ‘베다교’, 또는 ‘베다 브라만교’라고도 한다.
초기 브라만교는 다양한 신을 숭배했고 그들로부터 구복을 바라는 단순한 형태였다. 자연현상의 배후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신들을 상정하고 그것을 인격적 주체로 구체화하고, 더불어 불과 같은 요소를 숭배하여 장수, 다산 등을 바랬다. 곧 태양신 수르야, 어둠과 축복의 신 푸샨, 선의 신 미트라, 공기의 신 인드라 등 삼라만상의 존재를 신격화했다. 아마 수메르 신화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신을 가려서 제를 올렸기에 그 수는 33신 혹은 3,333신이나 되었다.
이후 브라만교는 《우파니샤드》라는 경전이 탄생하면서 우주의 근본원리 브라만(Brahman, 梵)과 개인의 본체인 아트만(atman, 我)이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브라만교의 중심사상이 된다. 우주의 근본원리인 범(梵)과 불변하는 영원한 참 존재인 나(我)는 하나라는 뜻이다. 외부가 아닌 나의 내면에 있는 신을 찾고 의례적인 제식이 아니라 만물에 스며있는 브라만을 찾으라는 가르침이 핵심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요 tad tvam asi, 내가 바로 브라흐만이다 aham brahma asmi)
그리고 기초개념으로 ‘윤회와 달마(達磨), 업(業), 해탈’을 제시했다. 이러한 관념은 뒤에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의 근본개념이 된다. 특히 이는 훗날 불교의 중심사상이 된다.
브라만교는 제사장인 브라만의 역할에 따라 개인과 우주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가르쳤다. 그 무렵 씨족 사회를 벗어나 군데군데 소국을 세운 왕들은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브라만과 손잡았다. 왕들은 대규모 제사의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제왕으로 인정받았다.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신정일치의 사회를 이루어 계급구조를 공고히 하며 기원전 6세기 신흥세력의 도전에 직면할 때까지 계속됐다.
브라만교가 인도아대륙에서 지리학적 확산 혹은 기타 문화에 대한 실체적 동화를 이루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과정에는 강대한 인도-아리아인 집단의 군사적 정복도 포함되고, 또한 약한 비인도-아리아인 집단의 자발적 동일화도 포함된다. 하지만 인도 문화에서 브라만교의 더욱 중요한 지리학적 확장은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이 건립한 아소카 왕조 후에 발생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것은 브라만교가 아니라 그것의 위대한 변종인 불교였다.
불교
브라만 중심의 지배질서에 맞선 신흥세력들이 갠지스 강 유역에서 힘을 키웠다. 그리고는 누구든 전생의 업으로 비롯된 운명에 충실해야 더 나은 생을 얻는다는 브라만식 사상 대신 인간의 운명이란 각자 행하기 나름이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붓다 사상을 받아들였다.
붓다의 일깨움은 마우리아 제국의 3세손 아소카 왕을 크게 고무시켜 하나의 인도 건설을 뒷받침하는 통치이념이 되었다. 그 뒤 서민들이 불교에 마음을 열었다.
이렇게 카스트 제도와 브라만교에 반발해 태어난 종교가 불교다. 불교는 만민평등사상을 그 뿌리로 삼고 있다.
불교가 출현한 기원전 6세기경의 브라만교 실상과 사회 환경을 살펴보자. 다신교인 브라만교는 신과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의례를 중시했다. 그리고 카스트 4계급이 각각 지켜야 할 의무를 강조했다. 브라만교는 기원전 6~7세기에 인도 중부와 동부로 퍼져나갔다.
도시국가의 출현, 그리고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공업의 발달, 화폐의 유통, 그리고 종족적 유대관계를 상실한 구속을 싫어하는 도시상공인들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향락주의, 그에 따른 도덕적 해이, 그리고 전통적 바라문교의 약화, 그리고 바라문계급의 절대적 권위의 상대적 하락, 등등의 사회적 · 정치적 혼란과 변혁의 정황들을 그 당시의 시대배경으로 볼 수 있다. 종족사회의 폐허 위에 도시국가들이 건설되었고, 이 도시국가들은 공화제 · 군주제 등 다양한 과도기적 정치체제를 유지하였으나, 점차 강력한 전제군주국가로 통합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이에 따라 브라만들의 종교적 권위와 지도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도시 분위기는 보다 합리적인 새로운 종교를 요구했다. 번잡한 제사의례에 대한 비판과 제사 행위 대가로 사후 천상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는 관념에도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범아일여 사상에도 나타났다. 인간은 ‘유한한 행위'(業 karma)로서는 도저히 영원한 세계를 얻을 수 없고 끊임없이 윤회하며 생과 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더불어 인간의 참 자아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아는 신비적 지식을 통한 해탈이 강조되었다.
카스트의 본질은 인간을 원천적으로 생각하는 자(영혼이 있는 자)와 단순히 일만 하는 자(영혼이 없는 자)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카스트 체제에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존재는 영혼을 가진 브라만 등 상층계급에 국한된다. 하층계급 특히 카스트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은 영혼이 없는 존재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하층민들에게는 브라만교가 아닌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다.
그러자 인도에서는 브라만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제사행위와 내세를 거부하는 새로운 종교운동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을 사문(沙門 , 슈라마나)이라 불렸다. 사문이라 하는 것은 종래의 전통적 브라만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일정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촌락이나 도시를 전전하면서, 걸식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고,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 지도자, 출가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들은 대개 박식한 인물들이었으며 자유로운 사유의 소유자들이었으며, 강력한 시대의식과 비판의식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한결같이 베다의 권위나 제사를 거부했다. 이들은 이단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새롭게 형성된 자유로운 상공계급의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주변에는 자연히 그들의 교설을 따르고 실천하는 승가(僧伽)라는 생활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들 공동체들은 사회적 계급적 신분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개방적 성격을 띤 집단이었다.
그들 가운데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있었다.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이다. 뒤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라 불렸다.
석가족 왕자로 탄생한 석가모니는 안락한 삶을 살았지만 영혼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 그는 29살에 출가해 6년간의 고행 끝에 35세에 크게 깨달아 녹야원이라는 동산에서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최초의 가르침을 주었다. 그 뒤 그는 45년에 걸쳐 인도 각지를 돌며 설법을 전파하며 해탈의 길을 제시했다. 기원전 6세기의 일이었다. 그 뒤 브라만교는 불교에 밀려 쇠퇴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난 후 불교가 발전되어 오다가 기원전 3세기경 대부분의 인도지역을 통일한 아소카 왕에 의해 불교가 세계 여러 곳으로 전파되었다. 아소카 왕은 해외에 전법사를 보내 스리랑카, 미얀마를 비롯해 이집트, 그리스, 북아프리카까지 불교를 전파했다.
쿠샨 왕조는 기원 전후부터 5세기 중엽까지 존재한 북서 인도에서 중앙아시아에 미치는 왕조였는데 각 나라로 연결되는 실크로드를 지배하며 다양한 종교를 허용했다. 불교. 힌두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등 세계 종교의 용광로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대승불교가 나타난다. 대승불교가 중심이된 화려한 불교 문화가 꽃피워지고, 중국 등 동아시아로 전파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간다라 미술’로 유명한 간다라 지역은 오래전부터 동서 문화의 십자로였으며 쿠샨 왕조의 중심지였다.
힌두교
힌두교는 인도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브라만교(婆羅門敎)과 민간신앙과 융합하여 발전한 종교로 ‘인도교(印度敎)’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ū)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 ‘신두(Sindhu:大河)’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 이후 형성된 브라만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브라만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 · 성전(聖典) 전설 · 의례 · 제도 · 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1세기부터 3세기까지가 불교의 전성기였다. 그러다 4세기경 반전이 일어났다. 인도가 불교의 발상지임에도 5세기경부터 불교가 쇠퇴한 이유는 불교가 기본적으로 인도인의 뿌리박힌 사상인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고 남녀평등 사상에 따라 승려계급에 여성 참여를 허용해 기득권층의 격렬한 반발과 저항을 샀기 때문이다. 또한 대외적으로 굽타 왕조는 중앙아시아에서 넘어 온 유목민족들과 싸우면서 세력을 키웠는데 그들에게 대항할 전통 종교가 필요했고, 강력한 왕권에는 불교보다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는 브라만교가 유리했다.
서민종교인 불교가 쇠퇴하면서 인도인에게는 그들의 성향에 맞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다. 이때 브라만교가 변신을 시도하고, 소나 말 같은 동물을 잡아서 드리던 제사 대신 이를 꽃과 과일로 간소화했다. 그리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만나는 삶의 고비마다 의미를 부여해서 작명식, 돌잔치, 결혼식, 장례의식을 철저히 챙겼다. 낮은 곳으로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이렇게 브라만교가 인도의 여러 토착종교와 결합하고 기존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비슈누와 시바’를 최고신으로 하는 힌두교로 발전했다.
반면 불교는 참선, 고행을 강조하며 민초들의 삶에는 세심한 눈길을 주지 못했다. 현실 초월 경향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본질적 가치관으로 형성되지 못했다. 그 뒤 불교는 신도와 승려의 거리가 멀어지고,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토속신앙과 결합한 힌두교를 당해내지 못했다.
인도 종교와 철학은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가의 여부에 따라 두 파로 나뉜다. 곧 정통파를 뜻하는 아스티카와 비정통파를 뜻하는 나스티카로 구별된다. 아스티카 그룹은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 동안 분화되어 여섯 힌두철학 학파 곧 삼키아 · 요가 · 니야야 · 바이셰시카 · 미맘사 · 베단타 학파로 나뉘었다. 반면 불교 · 자이나교 · 차르바카파와 기타 다른 종교나 학파들은 나스티카로 분류되었다.
이 시기에 이들 학파들은 지지자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힌두교는 베다 전통이 민속 신앙들과 융합하면서 고대의 베다 종교가 새로운 모습으로 부흥한 형태로 시기적으로는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였던 8세기경에 출현했다. 이렇듯 인도인의 사상 속에는 베다를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래야 정통으로 인정되고 불교와 같은 나스티카 종교나 사상들은 비정통으로 인식되는 뿌리 깊은 베다 사상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힌두교와 고대 브라만교와 차이점이 있다면, 브라만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나 신상(神像) 없이 자연신을 숭배한 데 비해, 힌두교는 신전과 신상이 있으며 인격신이 신앙의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또한 신불(神佛)에 산 제물을 바치는 공희(供犧)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었다.
힌두교의 경전은 브라만교에서 유래된 《베다》와 《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흐마나》, 《수트라》 등의 문헌이 있다. 힌두교는 브라만교에서 많은 신관(神觀)과 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이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신을 설정하고 힌두교의 여러 신들을 최고신의 다양한 현현(顯現)으로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불교는 결코 기독교처럼 적극적 포교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초기 역사를 보면 불교는 분명 포교형 종교였다. 이는 아소카 왕조 시기의 인도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확인할 수 있다. 아소카왕은 평생 동안 전쟁을 했지만 마지막에는 불교에 귀의했다. 그가 통치하는 기간에 인도 불교도는 왕의 장려 속에서 기원전 250년 파탈리푸트라성에서 유명한 제3차 결집을 거행했다. 불교 교의의 결정과 통일 및 교구조직 형식의 확립 방면에서, 이 결집은 기타 문명 역사에서 초기 종교 회의, 예를 들면 기독교 역사에서 두 차례의 니케아공의회와 몇 차례 중요한 회의, 유가 역사에서 동한의 백호관 회의와 유사한 결과를 낳았다. 이 결집이 낳은 다른 한 가지 결과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그것은 포교승을 선발해 인도아대륙 각지와 중앙아시아로 보내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불교는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귀의를 설파하는 종교가 될 수 있었고, 나아가 불교가 빠른 속도로 중앙아시아 · 동아시아 · 동남아시아로 전파될 수 있었으며, 이 지역의 문명 진행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슬람교(인도-무슬림만)
힌두교의 나라 인도의 제 2 종교는 이슬람교다. 인도의 소수 종교 중 가장 큰 집단을 이루고 있는데 인도의 이슬람교도는 인도에서 정착한 무슬림이라기 보다는 인도 본토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인도-무슬림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에서 이슬람의 역사는 12세기 꾸뚜브딘 아이바크(노예 왕조)가 델리를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수피즘을 중심으로 이슬람교가 인도에 전파되었는데 인도-무슬림은 외부로부터 무슬림 유입, 인도 원주민들의 개종, 자연스런 증가의 세 단계에 걸쳐 증가했다. 12세기 30~40만 명에 불과했던 신도수는 17세기 1500만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고, 1941년에는 전 인구의 23%인 900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으로 무슬림 인구가 많았던 곳이 파키스탄으로 분리되고 인도 내 800만 명의 무슬림이 이주한 것을 기점으로 인도의 무슬림들은 사회의 소수로 밀려나게 되었다. 인도-무슬림들은 힌두교 극우 세력의 압박 속에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하며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후진적이고 열악한 환경에 있다. 근본적인 종교적 차이가 있지만, 이들도 외견상 힌두교와 유사한 풍습(카스트, 내혼제 등)에 따르고 있다. 인도-무슬림 인구는 카슈미르, 우타르프라데시, 아삼, 깨랄라 등 11개 주에 걸쳐 집중되어 있는데, 이들의 커뮤니티는 잦은 충돌로 힌두교와 분리되어 게토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시크교
시크교는 15세기 펀잡 지방에서 구루 나낙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구루 나낙은 하층 계급 출신으로 브라만 중심의 카스트 제도와 기존 질서에 반하여 생겼고, 우상 숭배를 거부했으며 유일신을 믿으며 10대 구루들에게 집중된 신앙을 특징으로 한다. 힌두교와 불교처럼 업과 환생을 믿지만, 윤회의 고리를 끊는 금욕과 수행의 전통은 없고, 술과 담배 그리고 약물의 복용을 멀리하는 신조를 지녔다. 대대로 기골이 장대하여 군인으로 활약해왔다. 시크교에 헌신한다는 의미에서 이들의 공동체는 다섯 가지 상징물을 가지는데, 손대지 않은 머리와 깎지 않는 수염(케쉬), 이를 관리하는 빗(캉가), 단정함을 상징하는 속옷(카차), 힘과 위엄을 상징하는 칼(키르판), 용감함을 상징하는 쇠팔찌(카라)가 그것이다. 터번을 쓰는 것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들은 사자(獅子)를 의미하는 ‘싱(Singh)’이라는 이름을 많이 쓴다.
자이나교
기원전 6세기 마하비라에 의해 창시된 자이나교는 불교, 시크교 등과 마찬가지로 기존 힌두교의 질서에 반발하여 생겨난 종교다. 자이나교는 카스트의 신분과 계층을 초월하여 업을 소멸시키고 영혼의 정화를 이룬다면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도덕적 생활과 단식, 명상 등 엄격하고 금욕적인 수행 및 비폭력 등이 강조된다.
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에 의해 창시된 이 종교(마즈다교, 배화교라고도 함)는 기원전 1800년 또는 640년 등 그 형성 시기가 분명하지 않다. 중동에서 창시되어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전파되었는데 선과 악이 끊임없이 대립한다는 이원론적인 개념을 가졌다. 7세기경 이슬람교가 등장하면서 쇠퇴하였고, 인도에는 그들의 후손으로 이슬람의 박해를 받은 파시교도에 의해 10세기에 전파된 것으로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