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루크 왕조의 탄생
맘루크의 등장
중세시대 이슬람 국가들은 군사력을 주로 맘루크라고 부르는 노예병사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맘루크는 어린 시절에 팔려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남자 노예를 지칭하는 말로 아랍어로는 '소유되었다'는 의미였다. 처음에 투르크족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점차 체르케스, 동로마 제국, 쿠르드, 슬라브 등 출신들도 맘루크로 키워졌다. 맘루크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무타심(재위 833년 ~ AD 842년)에 의해 칼리프의 친위대로 선발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본래 고아로 혈연적, 지연적 연고가 없었던 만큼 오직 자신의 주인에게만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칼리프의 친위대로는 적격이었다. 또한 기본적으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만으로 선발하여 철저하게 훈련되었기 때문에 노예출신이라는 신분의 장벽을 넘어 점차 군부의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장군의 지위까지 차지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슬람 세계에 대한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통제력이 점점 약화하면서 맘루크 제도의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군부를 장악한 맘루크가 힘으로 칼리프를 압박하여 정치를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점차 맘루크의 전횡이 도를 넘기 시작하여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칼리프를 폐위시키거나 살해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독립하여 지방군벌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맘루크의 힘을 누르기 위해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외부세력을 끌어들이면서 부와이 왕조와 셀주크 왕조가 차례로 바그다드를 장악하였고 이후 칼리프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맘루크 왕조의 탄생
맘루크 부대는 비록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전투능력만큼은 뛰어났기에 여전히 중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셀주크 왕조가 분열되고 지방 군벌(아미르 혹은 아타베그)끼리 영토분쟁이 잦아지면서 지방 군벌들은 앞다투어 자신들의 친위대로 맘루크를 선발하고 훈련시켰다. 이러한 경향은 십자군 전쟁 시기가 되면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아이유브 왕조의 창건자이자 이슬람 세계의 영웅인 살라흐 앗 딘도 맘루크를 자신의 군대의 중심으로 삼았다. 살라흐 앗 딘 사후에 왕위쟁탈전이 자주 벌어지면서 아이유브 왕족들은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더욱더 맘루크를 사들였다.
맘루크에 대한 의존도는 아이유브 왕조 말기에 이르면 매우 심각해져서 알 말리크 앗 살리흐(재위 1245년 ~ AD 1249년) 경우에는 기존의 맘루크들은 물론 같은 동족인 쿠르드 병사들도 믿지 못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새롭게 사들인 맘루크로 자신의 친위대를 구성하면서 맘루크의 숫자가 더욱 증가하였다. 이렇게 하여 새롭게 유입된 맘루크들을 기존 맘루크들과 구분하여 '바흐리 부대'라고 불렀다. 바흐리의 유래에 대해서는 '해외'라는 뜻이라는 설과 이들을 훈련시켰던 '나일강의 섬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바흐리 맘루크 부대는 자연스럽게 아이유브 왕조 군대의 중심이 되었고 프랑스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을 격퇴하는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AD 1250년 알 말리크 앗 살리흐의 뒤를 이어 새로운 술탄이 된 그의 아들 알무잠 투란 샤가 즉위후 왕자 시절 시리아를 통치하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시리아 출신 맘루크를 대거 데려오면서 기존의 바흐리 맘루크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흐리 맘루크의 총사령관인 아이바크가 알 말리크 앗 살리흐의 미망인인 사자르 알 두르와 결탁하여 알무잠 투란 샤를 죽이고 사자르 알 두르를 새로운 이집트의 지배자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슬람 역사에서 여성이 최고 지배자가 된 사례가 없었기에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족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바그다드의 칼리프 역시 승인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사자르 알 두르는 어쩔 수 없이 아이바크와 재혼하여 아이바크를 술탄으로 내세워야만 했다. 이렇게 하여 이민족 노예출신 맘루크가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는 맘루크 왕조가 창건되었다.
바이바르스 1세 시대
맘루크 왕조의 초기 권력쟁탈전
아이바크가 아이유브 왕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술탄이 되었지만 지배력은 이집트만으로 한정되었고 기존 아이유브 왕조의 영토였던 시리아에 대해서는 지배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아직은 권력기반이 부족했던 아이바크는 우선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족과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이집트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기 위해 아이유브 왕족인 6살짜리 무사를 상징적인 공동 술탄으로 내세워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기반이 점차 안정되자 AD 1252년에는 무사를 독살하고 단독 술탄이 되었고 자신의 부하인 쿨투즈를 부술탄으로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위협하는 부하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위협으로 생각한 것은 유능한 장군이었던 아크타이였다.
아크타이는 아이바크 휘하 장군 중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으로 AD 1251년에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아미르이자 아이유브 왕족이었던 안 나시르 유수프를 물리치고 시리아의 일부를 점령하였고, AD 1253년에는 중부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아크타이의 명성이 지나치게 커지자 이를 우려한 아이바크는 AD 1254년 아크타이를 자신의 성으로 초대하여 살해해버렸다. 이 사실은 많은 맘루크 장군들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하여 이집트에서 도망치도록 만들었다. 도망친 맘루크 속에는 킵차크 투르크 출신인 바이바르스도 있었다.
바이바르스는 본래 킵차크 초원의 작은 마을 출신으로 몽골군의 침략에 의해 노예신세가 되었다가 아이유브 왕조의 알 말리크 앗 살리흐에게 팔려가 맘루크가 되었었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바이바르스는 훈련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아이유브 왕조 군대를 이끌게 되었고 AD 1250년에는 병에 걸린 알 말리크 앗 살리흐를 대신하여 프랑스 루이 9세의 제7차 십자군과 맞서 싸워 루이 9세를 포로로 잡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후 바이바르스는 아이바크 재위 시절에도 여전히 맘루크 군단의 주요한 지휘관이 되었으나 이제는 아이바크의 숙청을 피해 밤중에 다마스쿠스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점차 독재자의 길을 걷는 아이바크 때문에 궁정암투가 발생하였다. 아이바크는 자신을 술탄으로 만들어준 부인 사자르 알 두르를 버리고 다른 장군의 딸과 결혼할 결심을 하였기 때문에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자르 알 두르에 의해 AD 1257년 살해당했다. 이후 사자르 알 두르는 자신의 15살짜리 아들인 알리를 새로운 술탄으로 내세웠지만 사자르 알 두르 역시 얼마되지 않아 아이바크의 여자 노예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틈을 타 부술탄으로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던 쿠투즈가 알리에게서 술탄 자리를 빼앗으면서 최종적으로 맘루크 왕조의 권력은 쿠투즈의 차지가 되었다.
몽골의 침입과 아인잘루트 전투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의 초기 권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졌을 때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의 대군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이란고원으로 처들어왔다. 몽골군은 AD 1258년 바그다드를 철저하게 파괴하였고 AD 1260년에는 시리아 북부까지 침공하여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차지하였다. 훌라구의 침공 이전인 AD 1243년에 몽골장군 바이주에 의해 룸 술탄국이 이미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 이슬람 세계에서 온전한 세력을 보전하고 있는 곳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유일하게 되었다.
AD 1260년 훌라구가 이집트 카이로로 사신을 보내 항복할 것을 요구하자 이집트의 술탄 쿠투즈는 사신의 목에 베어 카이로 성문에 걸어놓음으로서 항전의사를 밝혔다. 몽골군은 역대로 사신을 죽인 적에게 철저한 응징을 가한 것으로 유명하였지만 때마침 몽골 본국의 대칸 몽케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몽골군을 이끌던 훌라구가 차기 대칸 선발을 위한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훌라구는 떠나면서 친우이자 부하인 키부카에게 약 2만의 병력을 남기어 시리아의 남은 지역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키부카는 병력을 이끌고 시리아의 남은 저항군을 격파하였고 계속해서 남진하여 팔레스타인까지 진출하였다. 몽골군은 바그다드 공략 당시부터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안디오키아 공국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기에 이집트 공략에 앞서 다른 십자군 국가와의 연대를 계획하였으나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반대와 시돈의 훌리안이 키부카의 손자를 죽게 한 사건 때문에 무산되었다. 키부카는 손자의 복수를 위해 시돈을 공격하여 철저하게 약탈하였다.
한편 이집트의 쿠투즈는 시돈의 전투소식을 통해 몽골군의 세력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쿠투즈는 우선 시리아로 망명한 바이바르스를 불러들였고, 바이바르스와 함께 몽골군을 공격하기 위해 휘하 5만명의 맘루크와 징병한 병사를 모아 총 12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팔레스타인으로 나갔다. 지나가는 길에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세력이 버티는 아크레를 통과해야 했지만 오랫동안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벌였던 아크레도 몽골군이 훨씬 위협이 된다는 생각에 이집트군이 자신의 영토를 무사히 지나가도록 묵인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이집트군과 몽골군은 팔레스타인의 갈리리, 제즈리엘 계곡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곳은 아인잘루트라고 불리고 있었으며 '골리앗의 눈'이라는 뜻이었다.
몽골군과 대결하게 된 이집트군은 주로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들인 투르크와 체르케스 출신 맘루크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기마술이 뛰어났고 몽골군과 같은 유목민의 공격전술에 익숙한 편이었다. 쿠투즈는 계곡 안에 대부분의 병력을 숨기고 약 1만의 병력만을 계곡 입구에 포진시켰고 바이바르스가 선봉대를 이끌고 몽골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바이바르스는 얼마 안되어 거짓으로 퇴각하면서 몽골군을 계곡 안으로 유인하기 시작했다. 유인당한 몽골군이 계곡안에 매복해있던 이집트 맘루크군에게 포위당하면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되었지만 무적의 군대로 명성이 자자했던 몽골군이었던 만큼 키부카는 곧바로 병력을 수습하여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돌격하기 시작했다. 키부카의 이러한 전략은 거의 성공할 뻔하였지만 쿠투즈가 부대를 독려하며 병력을 결집시킨 채 결사적으로 방어해내는 데 성공하면서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전투는 난전으로 진행되었고 양측이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근접전에 약한 몽골군의 약점과 맘루크의 중기병의 근접전 위력이 최종적으로 승패를 가르게 되면서 몽골군은 전멸하고 키부카도 전사하였다.
키부카의 몽골군이 붕괴되면서 시리아에 남은 몽골군은 얼마 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이집트군은 계속해서 북상하여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를 함락시켰다. 이로서 몽골군의 서진은 저지되었고 맘루크 왕조가 아이유브 왕조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여 이집트와 시리아를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술탄 즉위와 십자군 국가 공략
아인잘루트 전투에서의 대승과 시리아 평정 이후 쿠투즈와 바이바르스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였다. 당초 바이바르스는 알레포를 자신의 영지로 요구하였으나 바이바르스의 세력이 지나치게 성장하는 것을 우려한 쿠투즈가 이를 거절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바이바르스는 이집트로 돌아오는 도중 벌어진 사냥에서 쿠투즈를 암살하고 스스로 술탄의 지위에 올랐다. 이후 그는 맘루크 왕조의 제4대 술탄 바이바르스 1세로 불리게 된다.
이집트로 돌아온 바이바르스 1세는 몽골군을 물리친 영웅으로 추앙받았기에 빠르게 권력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바이바르스 1세의 야망은 팔레스타인에서 십자군 국가를 몰아내었던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과 같은 영웅이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몽골군에게 파괴된 시리아의 도시와 요새를 재건하였고 여전히 아이유브 왕족이 지배하던 나머지 시리아의 지배권도 넘겨받았다. 역전을 정비하고 역마를 지속적으로 공급하여 제국 내의 정보를 신속하게 모을 수 있게 하였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단일국가로 통합하는 작업도 마무리하였다.
체제를 정비한 바이바르스 1세는 목표로 했던 십자군 국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AD 1265년 바이바르스 1세는 성 요한 기사단으로부터 아르수프를 빼앗았고 아틀리트와 하이파를 점령하였다. 이듬해에는 성전 기사단을 물리치고 사페드마저 함락시켰다. 이슬람 세계의 오랜 적이었던 두 종교 기사단을 물리치면서 바이바르스 1세의 명성은 이슬람 전체에 떨치게 되었다. 바이바르스 1세의 원정은 계속되어 AD 1268년에는 치열한 공성전 끝에 안티오키아를 점령하였는데, 바이바르스 1세는 자신이 존경하던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 함락시 관용정책을 펼친 것과는 달리 안티오키아를 철저하게 파괴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세계에 악명을 남기게 되었다.
비록 바이바르스 1세 대에 십자군 국가에 대한 정벌이 마무리 되지는 못했지만 바이바르스 1세 사후에도 십자군 국가에 대한 전쟁이 계속되어 AD 1289년에 트리폴리 공국을 멸망시켰고 AD 1291년에는 마지막 십자군 도시인 아크레마저 점령하였다. 십자군의 잔존 세력은 키프로스 섬으로 도망쳤고 맘루크 군이 해안의 요새를 모조리 파괴하여 십자군의 근거로 삼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200여년에 걸친 유럽의 십자군 원정은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카이로의 번영
바이바르스 1세는 십자군 국가와의 전쟁과 별도로 시리아의 아사신파를 괴멸시켰다. 몽골과 동맹을 맺은 아르메니아 그리스도교도들도 공격해 토지를 황폐화시키고 주요도시를 약탈했으며 AD 1276년에 몽골군이 지배하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룸 셀주크까지 공격하여 몽골군을 물리치고 체자리아를 잠시 점령하기도 하였다. 치세 동안 총 9차례 전투를 치러 몽골군이 티그리스강 서쪽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집트의 남서부를 위협하던 누비아와 리비아도 정벌하기도 하는 등 술탄 재위기간 동안 총 30회 이상의 원정을 감행하여 잠재적인 적을 모두 제거하고 맘루크 왕조를 안정화시켰다.
바이바르스 1세는 AD 1261년에 아바스 왕조 최후의 칼리프 무스타심의 숙부를 카이로로 데려와 이슬람교 칼리프의 명맥을 이어갔는데, 비록 칼리프가 실질적인 힘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이슬람교의 종교적인 구심점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어 민심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허수아비 칼리파조' 또는 '카이로의 아바스 왕조' 시대로 부른다. 그 외에도 바이바르스 1세는 내정을 정비하여 운하를 건설하고 항구를 개축하였으며 다마스쿠스와 카이로 사이에 4일밖에 걸리지 않는 정기적이고 신속한 우편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카이로에 자신의 이름을 딴 거대한 모스크와 학교를 세웠으며 이슬람 법학의 4대 학파를 대표하는 재판장을 임명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이집트의 카이로는 파괴당한 바그다드를 대신하여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며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바이바르스 1세 이후 맘루크 왕조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시대
바이바르스 1세 사후 맘루크 왕조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다시 벌어지면서 국력을 소모하였으나 알 말리크 안 나시르(재위 AD 1293년 ~ AD 1341년)에 의해 이집트의 카이로가 다시 한번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알 말리크 안 나시르는 총 2번의 폐위와 3번의 즉위를 반복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재정수입을 늘리고 이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건축사업을 벌이며 이슬람 문화를 발달시켰다. 특히 AD 1303년에는 다마스쿠스 남부에서 벌어진 샤크하브 전투에서 일한국의 가잔칸 군대를 물리쳐 시리아에 대한 몽골군의 공격을 최종적으로 막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알 말리크 안 나시르가 호화로운 궁정생활을 벌이고 이를 위해 무거운 세금을 메긴 것에 대해서 만큼은 비판받기도 한다.
부르지 계열의 등장과 맘루크 왕조의 쇠락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사후에는 능력있는 술탄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술탄의 권한이 점점 축소되고 실권을 맘루크 장군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맘루크 왕조는 맘루크 장군들 사이의 정쟁으로 계속해서 쇠락해졌고 AD 1382년에는 바흐리 계열의 맘루크가 몰락하고 새롭게 부르지 계열의 맘루크가 권력을 차지하였다. 역사에서는 이 때를 기준으로 앞의 시기를 바흐리 왕조, 이후의 시기를 부르지 왕조로 구분한다. 주로 투르크 계열이 중심이 되었던 바흐리와 달리 부르지 계열은 체르케스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부르지는 그들이 거두하던 탑(혹은 요새)를 뜻하는 말이었다.
부르지 왕조는 바흐리 왕조와 달리 능력보다 출신배경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맘루크 사이의 내부 세력다툼이 더욱 심해졌다. 이 와중에 유럽을 휩쓸고 있던 흑사병이 이집트에서도 대대적으로 유행하면서 농촌인구가 격감해 버렸고 해외무역도 점차 쇠퇴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받고 말았다. 국력이 약화됨에 따라 AD 1400년에는 동쪽에서 융성하기 시작한 티무르에게 시리아를 빼앗기고 티무르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는 굴욕까지 겪어야 했다. 카이트 베이(재위 AD 1468년 ~ AD 1495년) 시절에 키프로스를 정복하는 등 부흥의 징조가 보이기도 하였지만 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군사원정을 위한 과세부담만 증가하고 말았다. 결국 쇠락한 맘루크 왕조는 AD 1517년 아나톨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에게 카이로를 점령당하면서 멸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