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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Humanities 1004

중국 최고의 황제-청나라 성조 강희제

중국 최고의 황제 당나라 태종 이세민과 청나라 성조 강희제 1. 제왕학 수업이든 어떤 것이든 전혀 읽히지 못한 6살의 나이에 즉위. 당시 모든 정권을 가진것은 오보이라는 막강한 권신이었는데 10년 가까이 조용히 힘을 기르다 단 한번에 정리(16살) 2. 당시 청나라 남쪽에는 우싼구이, 상즈신, 겅징중이라는 세 명의 왕이 번왕이라고 해서 엄청난 군사력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대만과 몽골의 반청 세력일부까지 끌여들어와 초반에는 밀렸음에도 불구, 침착한 대처로 9년간을 버티면서 승리로 이끌어 청나라 내부의 안정을 가져옴. 3. 대만을 비롯한 평후 제도등 36개 섬은 정씨 왕조라는 이들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우선 내부적으로 분열을 유도하고 해군 제독 쉬랑을 파견하여 복속시킴. 항..

산해관(山海關) -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전통시대 한중 외교 사행로에 위치한 중국으로 진입하는 관문.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화이사상(華夷思想)을 갖고 있었다. 즉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화이(華夷)의 기준을 만리장성으로 삼았다. 발해의 노룡두에서 시작되는 만리장성은 산해관 각산장성(角山長城)과 연산산맥을 넘어 서쪽 사막의 감숙성 가욕관(嘉峪關)까지 약 6,400㎞에 걸쳐 이어지는 거대한 인공 건축물이다. 문명(文明)과 비문명(非文明)으로 대체되는 화이를 가르는 기준이 만리장성이었던 만큼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 밖을 관외(關外)라 불렀다. 이 관문을 들어서야 중화(中華)의 세계, 즉 문명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중국을 왕래했던 조선의 외교사절 역시 요동의 사행노정(使行路程)을 경유하여 중국의 수도인 연경(燕京, 지금의 ..

막부(幕府), 다이묘(大名), 쇼군

다이묘(大名) 중세 일본의 각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 다이묘라는 칭호는 본래 '오오나누시'(大おお名な主ぬし)라는 단어가 변화하여 생겼다. '나누시'란 말 그대로 '이름을 가진 자', 즉 봉건사회에서 제대로 된 성씨를 칭할 수 있는 한 마을의 실권자를 뜻하고, 여기에 '크다'는 의미가 붙어 규모가 커지면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는 호족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1] 이것이 막부가 성립하고 무가사회가 되면서 많은 봉토와 부하를 거느리는 무사를 가리키는 의미가 되었다. 일정한 크기의 영토 이상을 소유하지 못한 작은 지역의 영주는 '쇼묘'(小名)라고 불렸다. 다이묘는 다스리는 영지의 쌀 생산량으로 구분되는데 이를 '고쿠다카'(石高, 석고)로 부르고,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고쿠다카 1만 석 이상은 다이묘, 그 미만은 ..

크누트 대왕, 북해제국[영국 역사]

알프레드 대왕의 사후 약 반세기 동안에 그의 아들과 딸, 손자들은 데인인들이 차지한 잉글랜드의 땅을 재정복함으로서 위대한 군주의 과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10세기 초의 한 세대 동안에는 이를 가능케 한 몇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 10세기 초엽에 스칸디나비아로부터의 침입이 잠시 멈추었다는 점이었다. 둘째, 이 무렵에 이르면 잉글랜드에 정착한 데인인들의 모습이 바뀌고 있었다. 즉 그들은 전사에서 농부로, 해적에서 상인으로 바뀌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앵글로 - 색슨인들과 뒤섞여 살면서 서로 결혼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정복은 무엇보다도 알프레드의 군제개혁과 그 후계자들의 유능한 지도력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었다. 알프레드의 아들 에드워드(Edward the Elder)는 아버지 ..

영국 UK, Great Britain (England + Wales + Scotland) + Northern Ireland

우리나라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제주도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영국도 England, Scotland, Wales, Northern Ireland 이렇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다만 이들 넷을 각각 nation이라 하는 만큼 우리나라의 도 개념보다 더 독립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유는 Wales와 Scotland와 England는 과거에 각각 서로 다른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England, Scotland, Wales는 하나의 큰 섬(Britain)에 있고, Northern Ireland는 아일랜드라는 나라의 북쪽 지방에 있기 때문에, The United Kingdom(UK)는 공식적으로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big island) and No..

잉글랜드 알프레드 대왕[영국 역사]

『앵글로 - 색슨 연대기』의 789년조에는 한 가지 항목이 들어 있다. 즉 웨식스 가에 대한 모든 경쟁자들을,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그동안 브리튼의 문명이 이루어 놓은 최상급의 업적들을 모조리 일소해 버릴 폭풍의 첫 입김에 관한 항목이 그것이었다. '그 해에 (웨식스 왕) 베어르크트리크(Beorhtric)는 오퍼 왕의 딸 에드부르크(Eadburh)를 아내로 삼았다. 그런데 그의 치세기간 중 회르살란드(Horthaland)의 노르웨이인들을 태운 세 척의 배가 처음으로 왔는데, 지방관리가 그 곳으로 달려가 그들을 왕이 장원으로 끌고가려고 했다. 그것은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그를 죽였다. 이들이 잉글랜드에 온 최초의 데인인(Danes)의 배들이었던 것이다.' 남부해안을 공격하는 '해..

앵글로 - 색슨 잉글랜드, 7왕국[영국 역사]

앵글로 - 색슨 잉글랜드 앵글로 - 색슨 족의 침입과 정착 당대에 쓰여 가장 확실하게 시대상을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는 저술은 오직 켈트계 수도사인 길더스(Gidas)의 기록인 『브리튼의 멸망과 정복』(De excidio et conquestu Britanniae)이 유일한데, 기실 길더스의 기록에서도 직접적인 실제 사건의 묘사는 그리 많지 않다. 길더스는 540년에 이 저작을 작성했는데 이는 당시의 악폐를 가장 맹렬한 폭언으로 고발하기 위함이었다. 이 450년경에서 600년 경 미지의 150년에 대해 활용할 수 있는 주요 문헌 사료는 8세기 노섬브리어의 수도사 비드(Bede)가 쓴 『잉글랜드인들의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 the ecclesiasti..

켈트족, Celts , 할로윈(Halloween)

켈트족(Celts)은 인도유럽어족의 한 일파인 켈트어파를 쓰는 인도유럽인을 가리킨다. 갈리아의 라틴어 켈타이/(Celtae)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또한 켈트 미술과 같은 문화적 특성이 고고학적 증거로서 발견되는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들은 붉거나 금발에 땋은 머리를 하며. 유럽 최초로 바지를 입음으로써 활동하기 좋도록 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으며, 날개달린 투구를 썼다. 또한 로마에서 포도주를 먹을 때 이들은 벌써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이상의 이미지는 켈트족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르네 고시니의 만화 《아스테릭스》는 로마군에 맞서 싸우는 켈트족들의 이야기다. 켈트인은 금세공으로 유명하다. 할로윈(Halloween) 유래 기원전 500년대의 고대 아일랜드 켈트족 풍속으로..

브리튼의 원시 사회, 켈트 사회, 팍스 로마나 [영국 역사]

브리튼의 원시 사회와 켈트 사회 도버 해협의 폭은 30km를 조금 넘는 거리여서 날씨가 좋은 날에는 대륙에서 도버 해협이 보일 정도이다. 빙하시대에는 얼음으로 덮여 대륙과 연결되어 있던 브리튼은 대략 BC 8,000년 경 빙하가 물러나면서 대륙과 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이전 수십만 년 동안 온 나라가 얼음으로 덮여있어 몹시 추웠던 이 섬에서 사람이 살았던 최초의 흔적은 대략 25만 년 전의 것으로, 빙하가 물러나 브리튼이 대륙과 분리되기 훨씬 이전에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와 있었다는것을 보여주고 있다. 브리튼의 신석기 시대는 BC 4,000년 경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의 대륙의 서부 또는 서북부 해안 지방에서 브리튼 서남단의 콘월 지방으로 건너온 최초의 브리튼 주민들, 이 '선주민' 은 ..

정복왕 윌리엄1세 노르만 정복 이후의 잉글랜드

⑴새로운 체제 노르만인의 영국 정복이 일어난 지 10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영국 전역은 윌리엄의 확고한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영국을 지배해 오던 앵글로색슨 귀족들 대부분은 헤이스팅스 전투와 그 후에 일어난 일련의 반란이 실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제거되었다. 그리고 생존한 앵글로색슨 귀족들은 윌리엄에게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양도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런 결과로 윌리엄은 자연스럽게 영국의 왕권을 접수하게 되었다. 앵글로색슨 귀족들이나 영국민들이 침략자이며 정복자인 윌리엄의 지배를 이처럼 손쉽게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하였다. 그것은 수세기 동안 영국이 경험한 어떤 경우보다도 더 단결과 평화와 안정을 영국에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이 영국을 통치하면서 근 수백..

조식의 제자들-곽재우, 정인홍, 김면

칼 찬 선비(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과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들 임진왜란 경상도 3대 의병장 - 의령의 의병장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 합천의 의병장 내암 정인홍 장군, 고령의 의병장 송암 김면 장군 창녕 조씨 남명 조식(南明 曺植, 1501~1572, 연산군 7년~선조 5년) 선생은 조선 중기 대학자다. 조선 성리학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 선생의 이름 앞에는 칼 찬 선비, 대쪽 같은 선비, 실천 지식인, 조선의 참 선비 등 숱한 수식어가 붙는다. 당시 조선 성리학에서 남명 조식 선생은 경상우도의 영수였으며, 퇴계 이황은 경상좌도의 영수로 두 사람은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3대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과 이노, 전치원, 하락, 조종도..

조식의 수제자, 내암 정인홍

문무에 능했던 남명 조식의 수제자, 내암 정인홍 정인홍은 조선중·후기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다. 선조·광해군 대에 북인을 이끌며 정국을 주도한 그는 남명 조식의 수제자이자 남명학파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자는 덕원, 호는 내암, 본관은 서산이다. 1573년(선조 6년) 학문과 덕행을 인정받아 황간현감으로 발탁된 정인홍은 제용감정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합천에서 의병을 모아 합천, 성주, 대구 등지에서 활동하며 왜병을 격퇴, 영남 의병장 호를 받았다. 정인홍은 왜란이 끝나고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북인이 분열한 뒤엔 이산해와 함께 대북 영수가 되었다. 그는 전란이 종결되고 대사헌과 중추부동지사, 공조참판,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고 서령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정인홍은 ..

남명 조식(曺植), 성성자(惺惺子), 조식, 북인, 정인홍, 곽재우

조식이 스스로 항상 깨어 있는 마음을 지니도록 경계하기 위해 옷깃에 달고 다녔다는 방울인 성성자(惺惺子)를 『남명집(南冥集)』 등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조식은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에서 일생을 은거한 학자로, 그의 학문은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데 특징이 있다. 남명 조식(曺植) 조선전기 『신명사도』, 『파한잡기』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 생원 조안습(曺安習)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조언형(曺彦亨)이며, 어머니는 인주(仁州)이씨로 삼가현 지역의 유력한 사족이던 충순위 이국(李菊)의 딸이다. 1501년 경상도 삼가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의 토골(兎洞)에서 태어나 4∼7세 사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으며, 이후 아버지의 벼슬살이를 ..

넛지(Nudge)-리처드 H. 탈러

리처드 H. 탈러 (Richard H. Thaler) 시카고대학 행동과학 및 경제학 석좌교수이자 경영대학원 의사결정 연구센터의 책임자이다. 또한 국가경제연구소의 연구원으로도 재직 중이다. 행동경제학을 경제학계에 알리는 데 기여해 왔으며, 의회에도 적극적으로 출석해서 ‘넛지’를 활용한 자신의 방법론을 제도권으로 들여왔다. 그의 이론에 기반한 저축플랜의 설계로 빚더미에 앉은 미국을 구한 경제학자로 평가받는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은 자신이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공로를 탈러에게 돌리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 ‘행동경제학의 선구자’라는 평가와 함께 현실에 있는 심리적인 가정을 경제학적 의사결정 분석의 대상으로 통합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승자의 ..

행동경제학-경제학, 심리학을 만나다

행동경제학_경제를 움직이는 인간 심리의 모든것도모노 노리오 지음 / 이명희 옮김 경제학, 심리학을 만나다 - 5p - 경제학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계산이 빠른, 그래서 자신의 선택에서 고려하는 모든 대상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계산하여 가장 가치가 큰 대상을 선택하는 인간을 가정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완벽한 선택을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심리학에서는 실제적인 인간을 연구한다. 때로는 무엇이 좋은지도 명확하지 않고, 가끔은 일관되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하는, 계산도 그리 정확하지 않고, 게다가 한번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를... - 기존 경제학은 학문의 특성상 실제 인간의 행동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인간의 선택행동에 대해 몇가지 가정을 하고,..

독립운동가 홍언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일제강점기 미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이끈 홍언(1880.2∼1951.3)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4년 하와이에 이민해 미주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총회 부회장을 지내며 교민사회를 이끌었다. 그는 흥사단 창립에 참여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 선생은 하와이 여러 언론매체의 주필로 활동하는 한편, 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편집과 기고를 맡았다. 또 '동해수부' 등의 필명으로 시와 시조,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하는 등 작가로도 활동했다. 무엇보다 신한민보에 1944년부터 1년간 '국민회약사'를 연재하는 등 국민회 역사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 또 화교들과 교류..

독립운동가 조병준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의병투쟁을 비롯하여 서간도 대한독립단 지도자로, 임시정부 연통제 평북독판부 독판으로, 내몽고 독립운동 개척자로서 폭넓게 독립운동을 이끈 조병준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 선생의 자는 유평(幼平),호는 국동(菊東)이다. 평북 의주군에서 출생하여 3세 때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운암 박문일의 문하생으로 수학했다. ​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의거에 호응하여 평안북도 창성에서 거의했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 광무황제의 특사로 출옥했다. ​ 1910년 경술국치 후 재차 거의하여 평북 창성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하였으나 일제의 병력이 증강되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관전현과 ..

독립운동가 어윤희 선생

국가보훈처는 3ㆍ1운동 당시 개성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어윤희(1881.6~1961.11)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29일 밝혔다. 충북 충주군 소태면에서 태어난 선생은 동학군인 남편이 전사하자 10여 년간 황해도 평산, 해주 등지를 전전했다. 경기도 개성에 정착한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정춘수의 설교에 감명받아 기독교에 입문해 애국계몽운동가로 활동했다. 1919년 3ㆍ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하자 당시 개성의 여자성경학원 기숙사 사감을 지내던 선생은 조선독립선언서 80매를 받아 개성 읍내에서 배포했다. 일본 경찰에 연행돼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으나 유관순 등 옥중의 동지들과 함께 일제에 항거하는 뜻을 굽히지 ..

독립운동가 조완구 선생

조완구(趙琬九) 선생은 상해에서 대한민국 국회인 임시의정원을 만들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선생은 임시정부가 혼란을 맞자 한국독립당을 결성해 임시정부의 조직을 재정비했다.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와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 조완구 선생은 1881년 3월 20일(음력) 서울 계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899년 내부 참봉을 지냈다. 1902년 내부 주사(主事)에 임명됐다. 그러나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요하며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자 25세의 나이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 선생은 일제가 국가 주권을 침탈하자 곧바로 관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대종교를 찾았다. 대종교는 을사5적 암살을 도모하던 나철(羅喆)이 세웠다. 당시 대종교는 단군을 섬기는 민족..

독립운동가 백일규 선생

독립기념관(관장 김주현)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백일규(1880년 3월 11일~1962년 5월 31일)선생을 2010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12월 한달 간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에는 선생의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입단증서 등 관련자료 16점이 전시된다. 선생은 1880년 3월 평안남도 증산군 성도면 오화리에서 부친 백린(白麟)과 모친 송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스무 살 때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동학접주로도 활동했다. 평안도와 함경도 등 각지를 여행하던 선생은 미주이민을 결심하고 1905년 6월 진남포를 출발해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에와 사탕수수 농장으로 배치된 선생은 고된 노동 중에서도 한인친목단체인 ‘에와..

독립운동가 심남일 의병장

금정 국사봉 의병본부는 ‘호남의소’ 사령부였다. 그리고 ‘호남의소’의 핵심은 ‘영암 의병’이었다. 이곳을 거점으로 남평·능주·보성·강진·장흥·해남·나주·무안 등 전남 중·남부지역을 호남 의병들이 장악하였다. 사진은 일본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 갇혀 있던 호남 의병장들의 모습이다. 앞줄 왼쪽부터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무경, 이영준, 뒷줄 왼쪽부터 황장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규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심남일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새터(咸平郡 月也面 新基)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학문을 닦아 사서삼경에 능통하였고, 향리에서 면장(面長)·향교장의(鄕校掌議)·도의사(道議事) 등을 역임하고 또 서당의 훈..

독립운동가 동언 이중언 선생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 ㆍ본관이 진성(眞城)이고, 자는 중관(仲寬)이며, 호는 동은(東隱)이다. ㆍ1850년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태어났으며, 1910년 향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ㆍ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나라 위해 목숨 던지니, 동포들이여 꺾이지 말라“ 이중언(1850∼1910) 선생은 1850년 안동 예안의 하계마을에서 퇴계 12대 손으로 태어났다. 1879년 5월 대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정5품)에 제수되었다가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의 이권 침탈을 목도하고 낙향했다. 일제가 1895년 10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공포하가 이에 항거하여 안동 예안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은거 중이던 선생은 선성의진의 이중린 대장 휘하 전방장으로 의병..

독립운동가 김익상 의사

상하이 3대 의거의 독립운동가들육삼정 의거(1933년 3월 17일)를 기획한 백정기 의사, 훙커우 의거(1932년 4월 29일)를 거행한 윤봉길 의사, 황포탄 의거(1922년 3월 28일)의 김익상 의사.​​​상하이의 항구, 황포탄(黃浦灘). 사연이 많은 곳은 으레 향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황포탄은 그런 곳이다.​피천득은 30년대 황포탄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했다. ‘유태인, 백계(白系) 노서아 사람, 서반아 사람, 인도인들’, 그리고 ‘실직자, 망명객 같은 대개가 불우한 사람들’이 고국을 그리면서 ‘기억을 밟고’ 서성이는 곳. 한결같이 ‘영창에 비친 소나무 그림자를 회상’하면서 향수병을 달래고 있는 곳. ‘친구와 작별하던 가을 짙은 카페, 달밤을 달리던 마차, 목숨을 걸고 몰래 넘던 국경’의 모습이 ..

노르웨이 천재 작가 '뭉크'

(1893) ​ 에드바르트 뭉크 (1896) 노르웨이 출신의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는 극심한 우울증 환자였다. 우울증의 근본 원인은 상실감이었는데, 그 상실감은 유년 시절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여러 번 겪은 데서 비롯되었다. 뭉크 나이 5세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했고, 13세에는 두 살 위 누이가 같은 폐병으로 죽었다. 여동생 중 하나는 우울증으로 인한 착란 증세로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그 후 아버지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남동생마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족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뭉크는 생애 내내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의 싸움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질병, 광기, 죽음이 자신을 둘러..

193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지 피란델로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Life is a very sad piece of buffoonery.)" 이 말은 루이지 피란델로의 예술론이지만 그의 인생론이기도 했다. 193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처 안토니에타( Antonietta Portulano)라는 존재가 있었다. 피란델로의 고민의 배후에는 아내가 있었다 피란델로의 작품 가운데에는 인간존재의 이중성, 광기 등 정신의 위기를 주제로 한 것들이 많다. 그는 자기의 이중성에 대해 상당히 고민했던 작가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의 모습과 다른 사람이 자기에 대해 품고 있는 이미지가 분열되어 있다는 점을 평생 동안 고민했다. ​ 이러한 고민은 처 안토니에타(An..

사이키델릭,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

사이키델릭 록(영어: psychedelic rock) 애시드 록, 드러그 록 또는 사이키델릭 현란한 조명효과에 마약을 한 상태에서 연주하는 것 같은 환각적인 분위기 특징 ​ 미국의 1960년대를 사이키델릭의 시대라고 한다. 사이키델릭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LSD, 메스칼린, 실로시빈이라는 환각을 가져오는 약물과 그 약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약물이라 하면 질겁을 할 사람도 많겠지만, 사실 60년대 중반까지 이러한 약물들은 합법적이었다. ​ 약국에서 누구나가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러한 약물을 경험할 수 있었다. 대학 주변에는 연구자들이 주최하는 연구용 LSD 체험 모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디즈니랜드를 보러 가는 것보다는 LSD ..

닥터 지바고-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혁명 시대에 대한 가장 인간적이고 진실한 예술적 증언. ​ 혁명과 내전의 폭풍이 휩쓸었던 20세기 초 러시아 민중의 삶을 생의 존엄함에 대한 찬미의 시로 그려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장편소설. 1945년에 집필하기 시작해 십 년 만에 완성한 이 작품은 자국 내 출간 불허로 1957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소개되며 세상에 알려졌고, 파스테르나크는 이듬해인 1958년 "동시대 서정시와 러시아 서사문학의 위대한 전통의 계승에 기여한" 업적으로 이반 부닌에 이어 러시아에서 두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혁명을 부정적으로 그렸다는 거센 비판과 추방 압력에 "모국을 떠난다는 것은 나에게 죽음과도 같다"고 밝히며 결국 수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 년..

역사란 무엇인가-E.H. 카

E.H. 카 (Edward Hallett Carr) 1892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런던의 머천트 테일러즈 스쿨(Merchant Taylor's School)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를 졸업했다. 1916년에 외무부에 들어가 수많은 업무에 종사하다가 1936년에 사임하고, 웨일스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국제정치학 교수가 되었다. 1941년부터 1946년까지「더 타임스(The Times)」의 부(副)편집인을 역임했으며, 1948년 국제연합의 세계인권선언 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의 정치학 튜터(Tutor)를 맡았으며, 1955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 1966년에는 옥스퍼..

불량국가-노암 촘스키, 미국의 세계 지배와 힘의 논리

1928년생 유대계 미국 언어학자이자 철학자, 인지과학자. 사회비평가이자 정치운동가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변형생성문법 이론의 창시자로서 20세기 언어학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학자로 꼽힌다. 1955년부터 MIT에서 강의를 시작해 현재는 MIT 언어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언어학뿐 아니라 철학, 사상사, 당대의 이슈, 국제문제와 미국의 외교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해 글을 쓰고 강의해왔다. 국내 번역된 저서로 『촘스키의 통사구조』『촘스키, 사상의 향연』『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불평등의 이유』『파멸 전야』등 다수가 있다. ​ ​ 세계 언론에서 '불량국가(rogue states)'라는 지목은 종종 'North Korea'라는 표제와 함께 발견되곤 했다. 국제 사회의 공동의 이익과 인류의 평화 혹은..

자유론 - 존 스튜어트 밀

하버드대, 옥스포드대, 서울대 선정 필독 고전 『자유론』은 오늘의 시대정신에 꼭 맞는 책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대표작인 『자유론』은 출간 된 지 15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큰 사랑을 받는 책이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더욱 큰 사랑을 받고, 이 책의 가치는 점점 더 빛을 발한다. 이 책은 시민과 국가의 관계, 즉 시민의 자유가 어디까지 보장되고, 국가의 간섭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저자인 밀은 말한다. “개인의 자유는 자신의 사고와 말, 행위가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 모든 범위에서 절대적이다. 국가의 법률이나 일반적인 도덕적 판단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 밀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시민으로서 개인은 무한한 자유를 갖는다. 단,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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