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
ㆍ본관이 진성(眞城)이고, 자는 중관(仲寬)이며, 호는 동은(東隱)이다.
ㆍ1850년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태어났으며, 1910년 향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ㆍ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나라 위해 목숨 던지니, 동포들이여 꺾이지 말라“
이중언(1850∼1910) 선생은 1850년 안동 예안의 하계마을에서 퇴계 12대 손으로 태어났다. 1879년 5월 대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정5품)에 제수되었다가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의 이권 침탈을 목도하고 낙향했다.
일제가 1895년 10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공포하가 이에 항거하여 안동 예안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은거 중이던 선생은 선성의진의 이중린 대장 휘하 전방장으로 의병의 선봉에 섰다. 선성의진은 영주, 순흥의진과 연합하여 7천명 규모로 상주 태봉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였다. 선생은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으나 일본군에게 밀려 끝내 해산되었다.
의진 해산 후 신암폭포 아래 은거하던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 -’ 라는 상소문을 올려 이완용 등 을사늑약 체결에 가담한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이때 만60세를 맞은 선생은
“을사년 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오로지 한 올의 명주실과 다를 바가 없이 목숨을 영위해 온 사람이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살아 있는 인간으로 자처하겠는가.”
고 말하고 자정(自靖)으로 일제에 항거할 것을 결심하고 조상의 사당과 부모의 묘소를 두루 찾아 그 뜻을 고하고 단식을 시작하였다.
단식 12일 째 族孫이자 예안의 선성의진에서 활약했던 이선구에게
“옻을 칠한 좋은 관을 쓰지 말라.”고 당부하고 술회사(述懷詞)를 읊었다.
가슴에 품은 칼날 같은 마음 그 누가 이를 풀어 줄 수 있으랴.
하늘마저 이미 끝나고 말았으니 죽지 않고서 또 무엇을 할까.
내가 죽지 않고 있으니 향산옹이 빨리 오라 재촉하네.
며칠 뒤 상복차림으로 대기하던 친족들에게 일일이 뒷일을
당부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염습도 얇게 하고, 장례도 간단히 치르라는 당부였다. 선생은 단식한 지 27일 만에 순절하였는데 숨을 거두기에 앞서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펼쳐보라고 가족들에게 봉서를 남겼다. 거기에 담긴 글이 바로 경고문 「警告文」이다.
‘규범이 무너진 세상이라면 삶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성현의 가르침’ 이라고 밝히면서 우리 겨레가 힘써 매진할 때임을 일렀다. 죽음을 통해 국권 피탈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 선생의 절의는 민족적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중언 선생을 2010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