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인물, 사람 People

193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지 피란델로

Jobs9 2020. 9. 22. 07:08
반응형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Life is a very sad piece of buffoonery.)" 이 말은 루이지 피란델로의 예술론이지만 그의 인생론이기도 했다. 193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처 안토니에타( Antonietta Portulano)라는 존재가 있었다.

 

피란델로의 고민의 배후에는 아내가 있었다

 

피란델로의 작품 가운데에는 인간존재의 이중성, 광기 등 정신의 위기를 주제로 한 것들이 많다. 그는 자기의 이중성에 대해 상당히 고민했던 작가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의 모습과 다른 사람이 자기에 대해 품고 있는 이미지가 분열되어 있다는 점을 평생 동안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은 처 안토니에타(Antonietta Portulano)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녀의 존재가 없었다면 루이지 피란델로는 이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기억하는 루이지 피란델로라는 존재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피란델로는 1867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유황 광산주로 아내가 죽자 혼자서 피란델로를 키웠다. 아들이 가업을 잇기를 원했으나 피란델로는 사업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 대신 문학에 재능을 보여 문학가의 길을 걷기로 한다.

1885년 로마대학에 입학했지만 교수와의 충돌로 독일의 본 대학으로 옮긴다. 본 대학에서는 언어학을 전공하여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피란델로는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다.

 

1894년 27세의 피란델로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안토니에타와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의 관습에 따라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결혼이었다. 신부를 포함한 모든 것을 부모가 준비하면 신랑은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안토니에타는 피란델로의 아버지의 동업자의 딸로 대대로 내려오는 자산가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녀는 결혼할 때 엄청난 지참금을 갖고와 안그래도 부유한 피란델로는 돈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창작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 안토니에타는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은 조신한 여성으로 한 가지만 빼놓고는 누가 봐도 부러워 할 수밖에 없는 결혼이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안토니에타에게 어머니가 없었다는 점인데 안토니에타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된 사연에는 안토니에타의 훗날을 암시하는 듯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그것을 대단하게 여긴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로 본다면 아기를 낳다가 산모가 사망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토니에타의 경우에는 분명히 불길한 구석이 있었다. 아버지의 광기 어린 질투가 의사가 출산을 지켜보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사망했던 것. 이때 보여준 아버지의 광기어린 질투는 피란델로에게 닥칠 훗날의 불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피란델로의 결혼생활은 무난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젊은 부부는 적어도 세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피란델로는 로마에서 시 창작에 몰두했다.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인지 창작에 대한 치열함은 없었으나 그의 시집은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피란델로도 거기에 만족하면서 여유있는 생활을 즐겼다.

 

홍수로 풍비박산난 피란델로의 인생

 

1903년의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의 파도가 피란델로를 덮쳤다. 피란델로와 가족들의 삶을 근저로부터 뒤흔드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것. 피란델로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유황광산이 홍수 때문에 파산해버렸다.

광산의 파산으로 피란델로의 아버지의 재산 뿐 아니라 자신의 결혼지참금을 대부분 광산에 투자하고 있었던 안토니에타도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안토니에타는 광산의 파산을 알려주는 편지를 읽고 나서 너무나 충격을 받아 긴장증이라는 정신이상 상태가 되었다. 곧 그녀는 심리상태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피해망상증에 걸렸다.

 

집안이 완전히 몰락하는 판에 피란델로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는 자살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 속은 자살하려는 마음 뿐이었으나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집안을 살릴 수 있는 가능한 한 모든 일을 하려고 했다.

지금까지의 여유있는 생활과는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로마대학에서 교편을 잡아 생계를 꾸려가는 한편 창작에도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 가장 곤란했던 이 시기에 “고 마티아 파스칼”과 같은 대표적 작품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역경이 닥쳐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루이지 피란델로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경제적 어려움보다 그를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안토니에타였다. 안토니에타의 광기는 남편에 대한 집요한 질투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녀는 피란델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조롱하고 비난했다.

그의 가정은 지옥 그 자체였다. 그녀는 너무나 폭력적이라 시설에 수용해야 했지만 피란델로는 자신이 직접 돌보기로 작정했다. 사설수용소에 보내는 것은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렵기도 했지만 피란델로는 안토니에타와 헤어지기 싫었기 때문에 스스로 돌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이후 16년간 피란델로의 가정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안토니에타는 피란델로 뿐만 아니라 세 자녀도 괴롭혔다. 딸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다행히 권총이 불량했기 때문에 격발이 되지 않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피란델로의 가족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살았는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6년 동안 정신병 환자인 아내와 살면서 피란델로는 언제나 가면을 뒤집어쓰고 살 수밖에 없었다. 피란델로는 아내가 요구하는 또 하나의 자신을 언제나 준비해두어야만 했다. 현실과 광기의 세계, 현실과 환상의 세계가 그의 일상생활에는 뒤섞여 있었다. 그는 늘 아내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비난과 분노를 가라앉히려 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무위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의 고통은 아내가 요양원에 수용된 뒤에야 끝이 날 수 있었다.

 

피란델로는 16년간을 지옥 속에서 살았으나 그 기간이 그에게는 깨달음의 기간이기도 했다. 가면을 쓰고 있는 자신은 거짓된 자신이고 가면의 뒤편에는 진정한 자기가 있다는 확신이 얼마나 쓸모없는지를 고민 끝에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문학적 주제로 삼았다. 이러한 처참한 경험이 그의 작품세계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피란델로는 광기와 환상, 고독을 그의 희곡들에 아낌없이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의 연극들이 재정적으로도 성공하면서 1919년 그는 겨우 안토니에타를 사설 요양소에 입원시킬 수 있었다. 안토니에타는 광적인 질투를 드러내며 그를 괴롭혔지만 피란델로는 늘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를 요양소로 보내고나서도 그는 그녀와의 헤어짐으로 괴로워했고 자기가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해 그녀를 집으로 데려오려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너무나 지옥같고 고통스러웠던 17년간이었지만 만약 이 기간이 없었다면 피란델로는 문학가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문학가로서의 피란델로에게 안토니에타는 하늘이 맺어준 연분이었던 셈이다.

결국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일 뿐이다.

책 소개

 

“나 정말 너무 살고 싶었는데, 이게 진짜 살고 있는 것 맞소?”

193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루이지 필란델로의 대표작으로 국내 처음으로 번역된 소설이다. 이탈리아의 어느 작은 마을 미라뇨에서 주인공 마티아 파스칼이 자신의 특이한 경험을 회상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보수적이고 무지한 시골 환경에서 성장한 마티아 파스칼은 아이러니한 상황에 휘말려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다. 장모의 미움을 받으며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활기 없는 생활을 하던 마티아 파스칼에게, 마침내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볼 계기가 마련된다. 이 순간부터 주인공은 자아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고 자신을 덮친 모든 불행과 고통을 웃어넘기는 버릇을 갖게 되는데, 과연 웃음이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는 마티아 파스칼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소설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사사로운 줄거리나 당대의 시공간을 넘어선 인간이라는 본질 자체에 깊숙이 탐구하고자 했다. 실제로 역경이 많은 삶을 살았던 작가는 상실과 소외가 불가피한 현대문명에 참된 자아를 모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독자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 의미가 확립되지 않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그 자체로 소설 그 이상의 의문과 울림을 느끼게 한다. 너무나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었으나 결코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없었던 주인공의 비극적 상황을 희극적으로 풀어냈다.

1904년 문학지『누오바 안톨로지아』지에 연재되었다가 같은 해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고 발표되자마자 이내 큰 성공을 거두며 독자와 비평가들의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받았다. 그 후 여러 차례 수정과 손질을 거쳐 재간행되었다.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라고 자신의 예술론을 설명한 바 있는 피란델로. 그는 틀에 얽매일 수 없는 인간 존재, 역시 틀에 얽매일 수 없는 문학적 형식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했다. 이 소설은 특히나 참된 '자기 자신'과 결코 만나지지 않는 인간의 근본적 모순이 잘 형상화된 작품으로, 웃음과 눈물 사이의 팽창한 긴장과 카타르시스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나는”이라는 실존재에다 자신의 이름에 고(故)를 붙인 부존재를 병치시킨 형용모순적인 문장에 대한 강한 호기심 때문에 책을 펼쳤다. 과연 작가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경의로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고향을 떠나 있던 내가, 저수지에서 투신자살로 추정, 시신의 발견과 아내와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될 사람에 의한 신원 확인으로 나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그것을 계기로 세상의 모든 일들로부터 해방이 된 듯한 자유를 만끽하며 살다가 곧 그 자신은 이 세상에 아무 실체도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되고, 끝내 자신의 실존을 찾아 허위 죽음으로부터 회귀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슬픈 현실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용모와 이름을 바꾸고 세상의 모든 책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생활에서 그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일말의 회귀 가능성도 없이, 삶에서 영원히 쫓겨났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가 그렇게도 원했던 자유를 얻은 것은, 어느 불쌍한 익사자의 주검을 제 남편으로 몰아 자유의 몸이 된 자신의 아내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유를 포기하고 원래의 이름인 마티아 파스칼을 찾기 위해 또 한 번의 죽음을 감행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이미 친구와 재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는 아내까지도 포기한 채 혼자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이 세상에서 내 신분증을 갖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그 하나일 뿐이었으니.

때문에 자신의 무덤이기도 한 망자의 무덤에 참배를 하면서 “당신은 누굽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의 호기심에 찬 물음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고 마티아 파스칼이오.”

저자는 소설과는 별도로 ‘상상력의 치밀함에 대한 주의’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소설과 희곡에 대해 비평가와 관객들의 비판에 반박한다. 삶의 부조리들은 있을 법한 일들로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니까요. 반대로 예술의 부조리들은 진실로 보이기 위해 있을 법한 일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 있을 법하다는 것은, 더는 부조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소설은 소설 자체로 받아들이기를 바랄 뿐 휴머니티라는 이름으로 현실과 결부하여 평가하고 재단하는 비평가들을 극도로 경계한다.

저자의 명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내용에 대한 논란과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걸작이었다. 익명성이 주는 자유로움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지만 한 번쯤은 그런 일탈을 꿈꾸어 봄직 하지 않는가?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잊고 있던 또 하나의 진실을 문득 깨우치는 것이 더 슬프다.

희곡작가 가운데 드물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탈리아의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엔리코4세(하인리히4세)의 의상을 입고 사육제 행렬에 참가했다가 말에서 떨어진 한 귀족. 그 후 자신이 진짜 엔리코 4세라는 광기에 사로잡히고 2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서서히 광기에서 깨어 나온다는 내용의 이 연극은 현대 부조리극의 모태가 되었으며, 루이지 피란델로의 말년의 대작이다.

원제는 'Uno, nessuno e centomila'. 오십세를 넘기면서부터 전세계에서 주목받은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의 작품이다. 당시 문단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문제 제기와 나름대로의 해법을 새로운 문학 형식을 통해 드러내었던 피란델로. 그가 15년 동안 구상한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소설에는 내가 했던 모든 것의 완벽한 종합과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의 원천이 들어 있다'고 스스로 고백하였듯이, 이 책은 피란델로 문학 활동을 결산할 수 있는 총체적인 면모를 담고 있다.

현실 세계의 위기를 인식하고 이를 파괴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이를 형상화함에 있어 그 이야기 구조 또한 파괴한 피란델로는 이 책에서 근대 세계에 대한 위기의식, 즉 도시 생활에 대한 염증, 돈과 재산에 기반한 부르주아 사회 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뚜렷이 보여준다.

비탄젤로 모스카르다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코가 휘었음을 알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지금까지 그를 구성하던 모습이 그가 그에게 부여했던 현실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비탄젤로 모스카르다는 자신만을 위한 존재이고, 타인들은 자신의 육체를 통해 오직 그들이 실체를 부여했던 모스카르다만을 본다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지만, 그 누구도 아니면서 동시에 십만 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은행을 청산하여, 지금까지 그를 규정했던 고리대금업자라는 외피를 벗어버린다. 그는 자신의 허구적인 외피를 벗겨내어 마침내 자연과 스스로를 동일시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는 작가가 근대가 이루어놓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소외된 인간의 의식에 대해 집요하게 추적하여 얻은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살아가는 게 버겁다. 소박하고 순수하던 고대의 풍습은 시간의 바람 속에서 먼지가 되고 훗날 그 먼지들을 모아 새로운 성(城)을 쌓지만 그 성은 우리가 지어, 들어가지 못한 채 버림당하는 곳으로 남겨진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선량한 우리, 아벨에게서 왔지만 그가 가졌던 양들은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고 그 몇 천년 동안 푸른 언덕이며 깊은 호수며 그 곳을 가득 메우고 있던 새와 물고기들은 몇 미터의 높이로 쌓인 먼지들의 먹이가 되어버렸다. 아,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모스카르다. 그는 거울을 보면서 그 거울 속에 누군가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아닌, 낯선 이방인. ‘나를 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나를 볼 수 없는’ 어떤 이방인. 그 순간 책을 읽던 나도 책을 덮고 거울 앞으로 간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그런데 과연 거울 속의 나는 나일까. 나란 도대체 무얼까? 나, I, Je, 我……

진지한 학문과 예술은 참된 어떤 것을 찾아가면서 거짓되고 허상인 것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러다가, 아뿔싸! 거짓과 허상의 중심에 '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현대인에게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제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없다. 나란 없는 자(nobody).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은 아주 사소한 계기.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 서서 나는 누구이고 내 인생은 무엇이고…… 이런 자질구레하고 매우 일상적이지만, 때때로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에게 있어 극히 치명적인 질문으로 인해 고통받는 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주제인 ‘주체의 분열’이란 실제로는 모더니즘의 것이다. 그건 현대(Modern)의 학문과 예술이 19세기말부터 의문시해온 어떤 근본적인 반성과 관련되어 있다. 모스카르다의 정신 나간 듯한 말투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치명적인 자화상과 마주한다. 나를 찾기 위해서 방황하고 노력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고립당하는 우리 자신들과.

‘주체의 분열’이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모더니즘적 방식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분열 이후’다. 우리는 진정한 나를 찾아가기 위해서 무수한 위험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만 과연 우리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할까?

“그것은 묘비명, 즉 이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죽은 자들에게 편리한 것이다.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인생은 이름을 모른다. 이 나무는 새로 난 나뭇잎이 흔들릴 때 호흡한다. 나는 나무다. 나무이자 구름이다. 내일은 책이나 바람이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읽는 책. 내가 마시는 바람이 된다. 그 모든 것이 외부에서 방랑한다.”(240쪽)

덧붙임 : 자신의 삶을 후기 구조주의자들에게 의지하기 말기를 바란다. 그들의 뛰어난 재능은 우리에게 어떤 실마리를 가르쳐주기는 하지만, 그들은 실패한 자들임을.

우리는 모두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의 어떤 사람’이다.

루이지 피란델로의『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을 읽다.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그러나 한 번은 읽고 넘어가야 할 책이다. 물질문명에 집착하고 치부(致富)에 부심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은 책이다. 더구나 경제가 인간을 지배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자기 해체의 시도로 어느 날 주인공 모스카르다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기의 코가 오른쪽으로 약간 비뚤어 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기의 코가 비뚤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코를 흉보며 살아온 자기를 뒤돌아보며, 내가 생각해온 나는 진정 나인가, 그리고 아내가 본 내가 진정 나인가, 아니 여러 사람들이 본 나들 중에 진정 나는 있는가.

모든 사람들이 나를 각자의 눈으로 본다. 따라서 나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여러 명의 나일 수도 있다. 진정 나를 볼 수 있을까. 나를 찾는 모험은 시작된다. 남들이 보는 나를 하나하나 파괴하기 시작한다(진정한 내가 아니므로). 남들에게 보이는 고리대금업자(나의 직업)를 파괴하기 위하여 은행 예금을 모두 인출하고 아내의 나 - 젠제(아내가 나를 부르는 애칭)를 파괴하기 위하여 아내를 구타한다.

그리고 아내는 떠났고, 아내의 친구 안나 로사를 만난다. 안나 로사의 권총 오발로 다친 안나를 보살피면서 가까워지며 유혹 받는다. 그러나 모스카르다는 안나가 보는 안나의 모습들을 부정한다. 안나의 사진들을 보면서 살아 있는 안나는 이미 사진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안나가 생각하는 안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이 안나를 보는 각도에 따라 수많은 안나가 있을 뿐이며, 진짜 안나는 찾을 길이 없다. 안나 자신도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다라고 설명하는 순간, 그녀도 똑같이 자기 분열증세를 보인다. 그리고 그녀는 권총으로 모스카르다를 쏜다.

법정에서는 사면을 받는다. 어쩌면 주인공은 미치광이로 처분되거나 고의적으로 안나를 살해하거나 치근덕거리는 치한으로 구속되거나, 안나는 살인 행위로 인하여 구속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정직한 방법 - 자기 의도대로 부르주아를 파괴하는데 성공한다. 모스카르다는 은행의 모든 돈을 인출해 구민원(救民院)에 희사한다. 소유물 모두 헌납한 것이다. 나의 본질을 찾기 위하여. 인간들은 모두 각자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 각각의 안경 수만큼 사물은 다양하다. 따라서 나는 있으면서 없으며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고 또 죽는 것이다. 자연처럼 사는 것. 오늘은 나무가 되고, 내일은 책이 되고…. 인간 존재는 유일하지 않으므로 소유에 집착하지 말라. 읽기를 끝내면 숙고(熟考)하게 하는 책이다. 소설 속에 철학이 녹아 있다. 미흡하다면 해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철학적 사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