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인물, 사람 People

조식의 수제자, 내암 정인홍

Jobs9 2020. 9. 23. 09:29
반응형

문무에 능했던 남명 조식의 수제자, 내암 정인홍

정인홍은 조선중·후기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다. 선조·광해군 대에 북인을 이끌며 정국을 주도한 그는 남명 조식의 수제자이자 남명학파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자는 덕원, 호는 내암, 본관은 서산이다.

1573년(선조 6년) 학문과 덕행을 인정받아 황간현감으로 발탁된 정인홍은 제용감정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합천에서 의병을 모아 합천, 성주, 대구 등지에서 활동하며 왜병을 격퇴, 영남 의병장 호를 받았다.

정인홍은 왜란이 끝나고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북인이 분열한 뒤엔 이산해와 함께 대북 영수가 되었다. 그는 전란이 종결되고 대사헌과 중추부동지사, 공조참판,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고 서령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정인홍은 이언적, 이황 등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다 유생들에게 탄핵받고 <청금록>에서 삭제되는 등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1623년 능양군 등은 80세 이상 재상은 처형하지 않는 관례를 어기고 결국 정인홍을 참형에 처했다. 서인과 노론으로부터 광해군 실정의 책임자 중 한사람으로 비판을 받아온 내암 정인홍은 1908년 순종 때 가서 복권되었다.


 1535 ~ 1623

남명 조식(曺植)의 수제자, 임진왜란의 의병장, 북인 정권의 영수, 광해군 정권 출범 후 왕의 남자. 그러나 그에게 따라 다녔던 모든 영예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한꺼번에 날아갔다. 그리고 그에게는 패륜 정권의 주범, 역적이라는 굴레가 씌워졌다.

선조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시기 북인의 정치적, 학문적 수장으로서 정국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정인홍(鄭仁弘, 1535~1623). 그의 삶과 굴곡 많은 정치 역정 속으로 들어가 본다.

1 스승인 조식과의 만남

정인홍은 조선중기 지성사에서 한 획을 그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수제자라는 학문적 정통성 뿐만 아니라, 1592년 임진왜란 때는 58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의병을 일으킬 만큼 충의(忠義)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선조 후반의 정국에서도 대사헌의 직책을 역임하면서 추상같은 선비의 면모를 잘 보여 주었다.

정인홍은 1608년 광해군 정권 출범 시 이미 70세가 넘은 고령의 정치인이었지만 임진왜란시의 의병 활동, 경상우도(慶尙右道)를 중심으로 한 향촌사회에서의 기반, 조식의 수제자라는 후광, 광해군 즉위의 일등공신이라는 점은 광해군대 정국에서 최대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정인홍의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1535년 합천의 상왕산(象王山) 아래 남사촌에서 태어났다. 정인홍과 훗날 정치적·사상적으로 반대 입장에 있었던 성혼과 심의겸이 1535년생, 이이가 1536년생인 점을 고려하면 조선중기를 이끌어가는 정치·사상계의 지도자가 거의 동시에 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정인홍이 태어날 때 상왕산에서 기이한 징조가 나타났다고 한다. 산의 풀과 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다고 하며, 정인홍의 눈은 별처럼 빛나서 사람을 쏘아보면 압도하는 기세가 있어서 감히 마주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사실 여부를 떠나 정인홍의 강인한 기질을 뒷받침해주는 이야기로, 정인홍은 훗날 정치에 참여하여 죽을 때까지도 이러한 강한 기질을 그대로 나타냈다. 경상우도를 지역적 기반으로 하면서, 경의(敬義) 사상을 핵심으로 한 학자 조식과의 만남은 정인홍의 인생에 중대한 전기가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조식과 정인홍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인홍은 합천 사람이다. 유년 시절에 조식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조식이 지조가 보통 아이와는 다른 것을 기특하게 여겨서 지경(持敬) 공부를 가르치니, 이로부터 굳은 마음으로 어려움을 무릅쓰고 공부하여 밤이나 낮이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식은 항상 방울을 차고 다니며 주의를 환기시키고 칼끝을 턱 밑에 괴고 혼매한 정신을 일깨웠는데, 말년에 이르러 방울은 김우옹에게, 칼은 정인홍에게 넘겨주면서 이것으로 심법(心法)을 전한다고 하였다. 정인홍은 칼을 턱 밑에 괴고 반듯하게 꿇어앉은 자세로 평생을 하루같이 변함없이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6년 5월 1일

조식은 일찍이 ‘덕원이 있으면 내가 죽지 않을 것이다.’라 하면서 분신처럼 정인홍을 아꼈다고 한다. 조식은 죽기 직전 평소 차고 있던 칼인 경의검(敬義劒)을 정인홍에게 전해 줄 정도로 그에 대한 믿음을 두터이 했고, 정인홍은 평생 의리를 지키며 스승에 화답했다.

2 의병장에서 왕의 남자로

1575년의 동인과 서인의 분당에서는 동인, 1589년의 남인과 북인의 분당에서는 북인의 중심인물로 성장한 정인홍은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았다. 5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인홍은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 초반 의병 활동을 한 정인홍의 행적은 실록을 비롯하여 각종 문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은 임시벼슬) 김성일(金誠一)은, ‘근일에는 고령에 사는 전 좌랑 김면(金沔), 합천에 사는 전 장령 정인홍이 그의 동지인 현풍에 사는 전 군수 곽율(郭慄), 전 좌랑 박성(朴惺), 유학 권양(權瀁) 등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집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홍은 정예병이 거의 수백 명이며 창군(槍軍)은 수천 명이나 됩니다.’라고 하여 정인홍의 휘하에 정예병 수백 명과 창군 수천 여명이나 되는 병력이 포진하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만큼 정인홍이 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에서 막강한 모습을 보이던 1602년, 정인홍은 마침내 임진왜란의 공훈과 지방에서의 기반을 바탕으로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오늘날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대사헌이라는 직책은 정인홍에게는 ‘체질’이었고, 실세 정인홍은 상대 당파인 서인에 대해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선조 후반 북인 주도의 정국은 1606년 영창대군이 출생하면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선조의 환심을 사고자 영창대군의 세자 책봉을 은근히 청하는 세력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결국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으로 분립되었다.

대북의 중심에는 정인홍이, 소북의 중심에는 유영경(柳永慶)이 자리를 잡았다. 조선시대의 당쟁을 정리한 [당의통략]에는 ‘유영경이 정승이 되어 정치를 전임하게 되었는데 정인홍의 무리를 많이 파면하고 교체했으며 오로지 소북만을 등용하였다.’고 하여 북인의 권력 투쟁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정인홍은 고향인 합천에서 상소문을 올려 유영경을 강력히 탄핵하다가 결국에는 유배를 당하는 어려움에 처하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면서 정인홍의 유배는 ‘훈장’이 되었고, 정인홍은 광해군의 ‘왕의 남자’로 돌아왔다.

 

내암정인홍선생선대배위및후손증직교지류(內庵鄭仁弘先生先代配位및後孫贈職敎旨類)는 선조 35년(1602)에서 광해군 7년(1615) 사이에 조정에서 내암 정인홍의 조상들과 그의 부인 및 후손에게 내린 증직교서들로, 총 17점이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 소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31호.

 

정인홍이 광해군대 정국의 핵심인물로 등장한 것은 무엇보다 임진왜란에서의 공훈, 그리고 선조후반 안개정국에서 광해군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면서 끝까지 세자인 광해군에 대한 의리를 지켜나갔기 때문이었다.

정인홍의 재등장은 반대세력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스승 조식을 꼭 닮은 엄격하고 직선적인 기질, 원칙에 어긋나면 절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추진력 등은 정국의 태풍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정인홍은 광해군 즉위 후 중앙정계에는 거의 참여하지는 않았다. 광해군은 정인홍이 곁에서 자신을 보좌해 줄 것을 청했지만, 그는 고령과 신병을 이유로 거듭 사직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산림에서 왕을 도울 것을 다짐하였다.

정인홍과 광해군 사이에 오고간 상소문과 비답은 [광해군일기]와 [내암집]에 여러 차례 실려 있다. 자신에게 필요한 인물을 발탁하여 그 의견을 수용하고자 하는 국왕의 뜻은 시대를 초월하려 여러 차례 나타나지만 광해군과 정인홍의 관계는 형식적인 것에 그치지 않았다.

광해군은 실제 정인홍에게 국정 현안을 자문하였고, 대부분은 정인홍의 의사가 국정에 반영되었다.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정인홍을 산림(山林)의 원형으로 파악한 것도 그가 국정에 미친 광범한 영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3 비타협, 강성의 정치가

정인홍의 정치관의 핵심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보민(保民) 정치에 있었다. 특히 광해군 즉위 후에는 국왕이 군자당(君子黨)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해 나가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요소는 철저히 척결하여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정인홍이 정국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 조선사회는 붕당의 형성과 함께 붕당정치가 전개되는 시점이었다.

동인과 서인의 분당, 남인과 북인, 소북과 대북의 분당을 거치며 정인홍은 반대 당파와의 대립에서 강경노선을 견지하였으며, 광해군 즉위 후 대북이 집권하면서 반대당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비타협적인 입장을 보였다. 정인홍은 구양수의 [붕당론(朋黨論)]을 인용하여 군자, 소인의 구별을 엄격히 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이 속한 대북이 군자당이라는 자신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광해군 즉위 후 정인홍은 누차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사직을 청하고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중앙정계에는 그의 정치적 대리인 이이첨이 핵심으로 성장하였고, 정국에 주요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반대파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였다.

즉위 초 임해군의 역모 혐의가 드러났을 때 이원익, 이항복 등 원로 대신들이 형제의 의를 따지는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한 데 비하여 정인홍은 반역이 명백한 이상 주살(誅殺)할 것을 청했고 결국 임해군은 귀양지에서 피살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정국을 뜨겁게 달군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에서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출향(黜享)을 요구하면서 스승인 조식의 문묘종사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문묘종사는 성균관의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되는 것으로 학자에게는 최대의 영예였다.

정인홍은 스승을 위해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였고 이것은 대부분의 사류(士類)들이 정인홍에게 등을 돌리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성균관 유생들 마저도 [청금록(靑衿錄- 유생들의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인홍은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여전히 정국의 실세로 활약하였다. 1613년의 계축옥사로 영창대군에 대한 처벌이 정치의 쟁점으로 떠올랐을 때 정인홍은 영창대군을 구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인홍의 구원 상소는 영창대군의 처단으로 광해군이 져야 할 부담을 먼저 고려한 것이었다.

즉 영창대군을 무고하게 죽이는 것은 반대하면서도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에 대한 척결을 모색한 것이다. 정인홍은 이후에 정국을 달군 인목대비의 유폐, 즉 폐모론(廢母論)에도 소극적이었다. 폐모론의 과정에서 조응인, 문홍도 등 문인들의 이탈도 이루어졌다. 정인홍이 폐모론 정국을 주도하던 이이첨의 전횡을 조금이라도 견제했다면 문인의 이탈은 없었을 것이다.

정인홍은 광해군의 왕권안정이라는 최상의 목표만을 위해 강경하고 비타협적으로 정국에 임했기에 여론의 불만을 초래했고, 심지어는 자파 문인들이 이탈하는 상황까지 맞이하였던 것이다.

4 산림(山林)으로서의 역할과 한계

근대의 학자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정인홍을 산림의 면모를 보인 최초의 인물로 꼽고 있다.

‘광해조 때 이이첨이 일을 꾸며 정인홍을 삼공의 서열에 두고 큰 일마다 서로 화합하여 유현(儒賢)의 논의임을 빙자하여 그들의 속마음을 실천하였다. 이로부터 당국자들이 추종하여 조정의 정국이 일변하였다. 문득 임하(林下)의 한 사람을 추대하여 영수로 삼고 비록 어짐과 간사함이 다르지만 산림에 갖다 붙이지 않음이 없었다.’

황현, [매천야록]

그런데 정인홍이 산림학자의 면모를 보인 연원에는 스승인 조식의 출처관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세기 훈구파의 전횡이 계속될 때 사림파라는 비판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고, 사림세력 중에서도 현실비판의 입장이 강했던 처사들의 학풍과 사상을 체제 내에 흡수하려고 노력한 점은 조선사회가 가진 가능성의 측면이다.

정인홍은 선조대에 산림으로 발탁되어 사헌부에 재직할 때 ‘산림장령(山林掌令)’이라 불리면서 강직한 면모를 보여준 바 있었으며, 특히 광해군대에 대북과 연결되어 정계를 뒷받침하는 거물이 되었다. 그는 강력한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중앙정계에 큰 문제가 있을 때마다 경상우도 사림을 동원하여 북인정권을 지원하였다.

그는 시종일관 과격하고 강경한 주장을 폈고 상대당에 대한 독설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철과 성혼의 기축옥사 때의 행적을 비판하면서, ‘간악한 정철을 부추겨 고명한 선비를 죽이게 한 성혼은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清正)을 부추겨 조선을 침략한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유할 만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정인홍의 과격한 모습은 광해군대의 정국에서도 그대로 지속되었으나, 왕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었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광해군대에 이미 80세가 넘은 고령이라는 점 또한 정인홍이 쉽게 정치노선을 바꾸지 못한 요인이었고, 이이첨이 정인홍의 위세와 명성을 십분 활용한 점 또한 정인홍의 강성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광해군대 정국에서 정인홍은 주로 합천에 은거한 산림의 입지를 지켰으나. 그의 정치적 명성과 영향력은 그를 산림 그 자체의 존재만으로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이다. 정인홍은 비록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당시에는 이례적으로 장수한 인물로, 국가에 대한 의리(의병), 왕에 대한 의리(광해군), 스승에 대한 의리(조식)를 일관되게 지켜나갔다.

특히 그의 삶에 있어서 스승 남명과 국왕 광해군은 그가 존재하는 목표이자 이유였다. 정인홍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언적과 이황에 대한 문묘 출향을 주장하고, 토역(討逆- 역적을 토벌함)의 논리를 전개하면서 궁중에 피를 부른 것은,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왕에 대한 의리와 충성에서 발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급진성과 과격성, 반대세력을 조금도 용인하지 않는 비타협성은 반대세력을 결집시켜주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그의 나이 88세가 되던 1623년 정인홍은 인조반정직후 참형되고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처형 이후 서인과 노론 주도의 정국이 전개되면서 정인홍은 조선후기 내내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삶의 궤적에서는 원칙과 신념을 위해 조금도 굽힘없이 살아간 조선조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으며 산림이 조선후기의 정치사·사상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단서도 제공했다. 정인홍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은 인조반정 이후 역사의 수면에서 사라진 북인의 정치적, 사상적 위상을 제대로 세우는데도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신병주, [정인홍평전], 경인문화사, 2008;조여항, [정인홍과 광해군], 동녘, 2001

반응형